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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or: 생생이
정시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마부를 향해 말했다.

"경조부(京兆府)로 가거라."

"경조부?"

서정호가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그곳에는 어찌 가려는 것이냐?"

정시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런 빛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서정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곁에 있던 박해주가 때맞춰 앞으로 나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왕야, 시월 언니께서 이제 막 옥에서 나오셨으니,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는 듯합니다. 그러니... 언니 뜻대로 두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정호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채 서 있는 정시월을 바라보았다.

마음속 의문과 불편한 감정을 애써 누른 서정호는 낮게 말했다.

"좋다. 나도 함께 가겠다."

가는 내내 마차 안은 숨이 막힐 만큼 고요했다.

서정호는 무슨 말이라도 꺼내려 했지만,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쉬고 있는 정시월을 바라보자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사람을 시켜 담요를 가져와 정시월에게 덮어주게 하고, 따뜻한 물을 따라 그녀의 입가에 내밀었다.

하지만 정시월은 눈도 뜨지 않고 고개를 살짝 돌려 피했다.

예전의 정시월은 이렇지 않았다.

예전에는 조금이라도 다치기만 하면, 설령 살갗이 조금 벗겨져도 곧장 서정호의 앞으로 달려와 손을 내밀고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곤 했다.

"왕야, 너무 아픕니다. 어서 ‘호-’하고 불어주십시오."

그때의 서정호는 정시월이 지나치게 어리광을 부린다고 생각해 귀찮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발바닥이 타들어 갈 만큼 끔찍한 일을 겪고도, 정시월은 끝내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다.

서정호의 마음속 불편함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마치 무언가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듯 숨이 막혀왔다.

경조부에 도착하자 서정호가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서정호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부축하려 했지만, 정시월은 스스로 마차 벽을 짚고 내려섰다.

"내가 함께 들어가겠다."

서정호가 말했다.

정시월이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바로 그때, 뒤따라오던 박해주에게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해주야!"

서정호의 안색이 순간 변했다.

그는 곧장 몸을 돌려 박해주를 부축했다.

"어찌 된 것이냐? 심장이 또 아픈 것이냐?"

"왕야, 저는 괜찮습니다. 그저 고질병이 다시 도진 것뿐입니다."

박해주는 서정호의 품에 기대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왕야께서는 어서 시월 언니와 함께 들어가 보십시오. 저는... 잠시 쉬면 괜찮아질 것입니다..."

서정호는 품 안에서 괴로워하는 박해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미 몸을 돌려 관아 안으로 향하는 정시월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를 악물었다.

"시월아, 해주의 지병이 도진 모양이다. 아무래도 먼저 왕부로 데려가 어의를 불러야겠다. 너는 이곳에서 볼일을 마치거라. 일이 끝나는 대로 관아 사람을 보내 왕부까지 데려다주게 하겠다. 괜찮겠느냐?"

서정호는 예전의 정시월이라면 결코 이렇게 물러서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분명 그 자리에서 자신을 붙잡고 따져 물었을 것이다.

예전의 정시월은 자신과 박해주가 함께 있는 것을 가장 못마땅해했다.

서정호가 박해주와 말을 섞기라도 하면, 금세 얼굴을 붉히며 달려와 허리에 손을 짚고 박해주에게 눈길도 주지 말라고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정시월은 그저 뒤돌아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서정호는 정시월의 뒷모습이 문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순간 마음 한구석에 알 수 없는 감정이 피어올랐다.

마치 무언가가 서서히 손에서 빠져나가고 있는데, 서정호는 그것을 붙잡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왕야..."

박해주가 다시 서정호를 불렀다. 목소리는 한층 더 힘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서정호는 시선을 거두고 박해주를 부축해 마차에 올렸다.

"가자. 어의를 보러 가자."

경조부 관아 안.

주부(主簿)는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옷은 남루했고 두 발은 피와 살이 뒤엉켜 처참한 모습이었지만, 정시월의 얼굴에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부인은 어쩐 일로 찾아오셨소?"

정시월은 고개를 들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리(和離)를 청하러 왔습니다."

"화리라?"

주부는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부군께서 직접 화리서(和離書)를 작성하셨소?"

"화리서는 없습니다."

"그게... 조정의 법도에 따르면, 여인이 먼저 화리를 청할 경우 반드시 부군의 동의를 얻고 화리서를 받아야 하오. 만약 부군이 이를 거부하는데도 여인이 끝까지 화리를 원한다면... 몸에 일흔두 개의 못을 박는 형벌을 받아야 할 것이오. 이는 결코 가벼운 형벌이 아니니 부인,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소?"

'일흔두 개의 못?'

'분명 끔찍하게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 고통이 옥에서 날마다 이어졌던 형벌보다 더할까?'

'방금 전 지나온 그 십 리 숯불길보다 더할까?'

지난 오 년 동안 그녀가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이유.

바로 서정호를 완전히, 영원히 떠나는 것뿐이었다.

"이미 마음을 정했으니 등록해 주십시오. 이달 말, 형벌을 받으러 오겠습니다."

주부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결국 책자에 그녀의 이름과 날짜를 적어 넣었다.

관아를 나온 정시월은 홀로 번잡한 거리 위를 걸었다.

오 년이었다.

경성은 많은 것이 달라진 듯하면서도, 또 놀라울 만큼 그대로였다.

어느 골목을 지나던 순간, 그녀는 연노란 치마를 입은 화사한 소녀가 차가운 얼굴의 푸른 옷 소년의 뒤를 쫓으며 쉴 새 없이 말을 거는 모습을 보았다.

“거기 서십시오! 어찌 그리 빨리 가시는 것입니까! 지금은 저를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허나 괜찮습니다! 제게는 평생 그 마음을 돌릴 시간이 있으니까요!"

소녀의 뺨은 달리느라, 또 설렘 때문인지 붉게 물들어 있었고, 반짝이는 눈동자에는 활력이 넘쳐났다.

마치... 예전의 자신처럼.

정시월은 걸음을 멈추고 한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묻어두었던 지난 기억들이 마치 밀물처럼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왔다.

그녀는 정택 대장군의 하나뿐인 여식이었다.

어려서부터 금지옥엽으로 귀하게 자란 그녀는 누구보다 밝고 호방했으며,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성정을 타고났다. 말타기와 활쏘기, 도검과 창봉에 이르기까지 능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경성에서 가장 빛나는 장군가의 명주였다.

열다섯 살 봄 사냥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서정호를 만났다.

검은 옷을 입은 그는 말 위에 올라 사람들 사이에서도 홀로 차갑고 고고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속세를 떠난 선인과도 같았다.

그 순간, 그녀는 그의 매력에 사로잡혔다.

그날 이후 정시월의 삶은 온전히 서정호를 중심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가 진귀한 고서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면 경성 곳곳을 뒤져 찾아냈다. 그가 바둑을 즐긴다는 것을 알고는 밤낮으로 기예를 갈고닦았다.

그가 무심코 서쪽 거리의 과자를 칭찬하기라도 하면, 성의 절반을 돌아 그것을 사서 그의 저택으로 가져갔다.

차츰 경성 사람들은 하나같이 대장군 정택의 금지옥엽 같은 딸이 진북왕을 마음에 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거침없었고, 세상의 시선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서정호는 언제나 그녀에게 차갑고 멀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정호가 먼저 그녀를 찾아와 혼인을 청했다.

그녀는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몰랐다.

오랜 세월 품어온 마음이 마침내 그를 움직였다고 믿었다.

십 리에 걸친 붉은 혼례 행렬과 화려한 혼례복. 그렇게 그녀는 진북왕부의 안주인이 되었다.

하지만 첫날 밤, 그는 그녀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그의 성정이 원래 차가울 뿐이라고 생각했다.

괜찮았다.

평생의 시간이 있다면 언젠가는 그의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훗날 그녀는 우연히 진실을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은 박해주 때문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 벗이자, 오랫동안 왕부에 머물던 외사촌 동생인 그녀가 뜻밖의 낙마 사고로 다리를 다쳤고, 어의는 치료를 위해 희귀한 약재인 설골삼(雪骨參)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설골삼은 정씨 가문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가보였다.

다만 적통에게만 이어지는 보물로, 결코 밖으로 내어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를 끔찍이 아끼던 정택은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서정호가 반드시 정식 혼례를 올려 그녀를 왕비로 맞아들여야만 약재를 내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서정호는 박해주의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서 그녀와 혼인한 것이고, 그녀는 그저 약재를 얻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진실을 알게 된 그날 밤, 그녀는 두 사람의 혼방에서 밤새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결국 눈물을 닦아내고, 웃는 얼굴로 그를 찾아갔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계속 그에게 잘해준다면, 언젠가는 자신의 진심을 알아줄 거라고 믿었다.

혼인 후에도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 차갑고 무심했다.

그녀는 왕비로서 본분을 지키려고 애썼다.

설령 그가 몰라주어도 왕부를 돌보고, 그의 어머니를 공경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오래된 부상이 다시 도져 병세가 위태로워졌다.

그녀는 서정호에게 사람을 보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라도 찾아와 주기를 바란다고 청했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훗날 그녀는 그날 그가 오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날 박해주가 거리에서 마차 사고를 내는 바람에, 몰래 궁을 빠져나와 거리를 나섰던 6황자가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박해주를 지키기 위해, 서정호는 권세를 이용해 마침 그 부근에 있던 그녀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

"정시월은 투기에 사로잡혀 진북왕께서 외사촌 동생을 총애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이에 고의로 왕야와 가까운 6황자를 해쳤다."

단 한 장의 죄명서 앞에서 그녀는 아무리 억울함을 외쳐도 벗어날 길이 없었다.

병상에 누워 있던 아버지는 그 소식을 듣고 분노와 충격을 이기지 못해 피를 토하며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녀는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옥에 갇혔다. 그렇게 오 년이었다.

5년 동안 이어진 형벌은 그녀에게서 모든 날카로움과 생기, 그리고 서정호를 향했던 마지막 애정마저 모두 앗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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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햇빛 속의 칼날   제21화

    서정호는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하지만 부러진 뼈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극심한 통증이 밀려와 결국 낮게 신음을 흘리며 다시 침상 위로 쓰러졌다.서정호의 이마에는 순식간에 식은땀이 맺혔다.“왕야! 상처가 너무 심합니다.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암위가 다급히 다가와 서정호를 붙잡으려 했다.“비켜라!”서정호는 핏발 선 눈으로 소리쳤다.어디서 그런 힘이 나온 것인지, 서정호는 암위를 단숨에 밀쳐냈다.그리고 부러진 다리를 끌며 침상에서 추하게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상처가 다시 터져 피가 빠르게 붕대를 적셨다.하지만 서정호는 통증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며, 힘겹게 한 걸음씩, 조금씩 문을 향해 기어갔다.정시월을 찾아야 했다.반드시 찾아야 했다.정시월이 떠날 리 없었다.정시월이 이렇게 자신을 버리고 떠날 수는 없었다.암위는 더 이상 차마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품 안에서 곱게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떨리는 손으로 그에게 내밀었다.“왕야... 시월 아씨께서 떠나시기 전, 이것을 남기셨습니다.”서정호의 움직임이 멈췄다.서정호는 피와 흙으로 얼룩진 손을 떨며 종이를 받아 들었다.그리고 천천히 펼쳤다.그 안에는 뼛속 깊이 익숙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한때는 소녀의 마음과 애정으로 가득했던 글씨.하지만 지금은 차갑고 단호한 한 줄의 말만 남아 있었다.“왕야, 저를 놓아주고 왕야 자신도 놓아주십시오. 이제부터는 산과 물이 서로 만나지 않듯 다시 마주칠 일 없을 것입니다. 지난 인연의 길고 짧음을 더는 논하지 마십시오.”'다시는 만나지 않으리라.''지난 인연의 길고 짧음을 논하지 말라.''하...''하하하...'서정호는 가벼운 종이를 움켜쥔 채, 그 위에 적힌 단정하면서도 힘이 배어 있는 글씨를 바라보았다.그러다 갑자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갈라진 웃음소리가 텅 빈 방 안에 울려 퍼졌다.웃고 또 웃던 서정호의 충혈된 눈가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그 눈물은 얼굴에 묻은 피와

  • 햇빛 속의 칼날   제20화

    “왕야—!!”정시월은 그가 온 힘을 다해 밀친 탓에 비틀거리며 안전한 바위 위로 넘어졌다.무릎과 팔꿈치가 바닥에 쓸려 살갗이 벗겨졌고, 화끈거리는 통증이 밀려왔다.절벽 아래는 구름과 안개에 휩싸여 끝이 보이지 않았다.정시월은 서정호가 이미 산산이 부서져 계곡 아래로 떨어졌다고 생각했다.그 순간, 아래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날카로운 소리와 억눌린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정시월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서정호는 그대로 계곡 아래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다행히 절벽 벽면 밖으로 비스듬히 뻗어 있던 고목 하나에 걸려 있었다.하지만 그 고목은 그의 추락 충격과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듯, 위태로운 소리를 내며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그의 몸은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등과 팔에는 날카로운 바위에 긁힌 상처가 수없이 생겼고, 온몸은 피투성이였다.서정호는 아직 살아 있지만 상황은 매우 위태로워 언제라도 아래로 떨어질 수 있었다.구진웅 역시 절벽 끝까지 달려왔다.상황을 확인한 구진웅은 표정이 무거워졌다.“시월아,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거라. 바줄을 찾고 사람을 불러야겠다.”구진웅은 곧바로 결정을 내리고 마을 쪽으로 달려가려 했다.구조 과정은 손에 땀을 쥐게 했다.마을의 사냥꾼들과 장정들이 밧줄을 들고 달려와 온 힘을 다한 끝에, 중상을 입은 서정호를 절벽 아래에서 끌어올릴 수 있었다.절벽 위로 끌어올려졌을 때, 서정호는 온몸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왼쪽 다리는 골절되어 하얀 뼈가 드러났고, 갈비뼈 두 대도 부러져 있었다.몸에는 성한 곳이 거의 없었다.서정호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하지만 정신을 잃은 순간에도 그의 입술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미간은 굳게 찌푸려져 있었고, 마치 끝없는 악몽 속에 빠진 듯했다.“시월아... 가지 마라... 미안하다... 미안하다...”끊어질 듯한 중얼거림이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이어졌다.구진웅은 그 자리에서 응급 처치를 했다.부러진

  • 햇빛 속의 칼날   제19화

    구진웅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여전히 겸손하면서도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다.“구진웅이라고 하오. 이리저리 떠돌며 의술을 펼치는 의원일 뿐이오. 내가 아는 것은 이곳에서 몸을 추스르고 있는 정시월은 이제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는 몸이라는 것이오. 만약 계속 억지를 부리며 환자의 안정을 해친다면 나도 좌시하지 않겠소.”구진웅의 손끝에 든 은침이 차갑게 빛났다.“오라버니.”정시월이 갑자기 손을 뻗어 구진웅의 소매를 살며시 붙잡았다.그 모습은 완전한 신뢰와 의지가 담긴 행동이었다.정시월은 서정호를 향해 다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마치 그는 정시월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스쳐 지나가는 존재일 뿐인 것처럼.“들어갑시다.”정시월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서정호의 귀에는 또렷하게 들렸다.“상관없는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상관없는 사람.짧은 한마디였다.하지만 가볍게 흩어진 그 말은 독을 바른 비수처럼 서정호의 심장에 깊숙이 박혔다.그리고 그 안을 휘저으며 피투성이 상처를 남겼다.그는 눈앞에서 정시월이 구진웅의 소매를 잡고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구진웅이 조심스럽게 정시월을 부축하는 모습도 보았다.문턱을 조심하라고 낮게 일러주는 모습도 보았다.그리고 정시월이 소박한 집의 문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끼익.”얇은 나무문이 서정호의 눈앞에서 조용히 닫혔다.그 문은 서정호와 그의 모든 후회, 애원, 고통을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갈라놓았다.햇살은 여전히 따뜻했고, 작은 뜰은 여전히 고요했다.하지만 서정호는 자신이 마치 얼어붙은 설원 한가운데 서 있는 듯했다.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서정호는 낙운진의 한 허름한 객잔에 머물렀다.그리고 매일 날이 밝기도 전에 그 작은 뜰 앞을 찾아가 영혼을 잃은 석상처럼 말없이 그곳을 지켰다.해가 떠오를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그리고 별이 가득한 밤하늘 아래까지.서정호는 보았다.정시월이 잠에서 깨어나 구진웅의 부축받으며 천천히 뜰 안을 걸으며 재활하는 모습을.아직 걸

  • 햇빛 속의 칼날   제18화

    “아니다!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건 성립되지 않는단 말이다!”서정호는 다급히 정시월의 말을 끊었다. 격한 감정에 목소리가 높아졌고, 그 안에는 감출 수 없는 두려움이 묻어났다.“시월아, 내가 잘못했다! 이제 모든 걸 알았다! 박해주가 저지른 일들, 옥에서 있었던 일, 절벽에서 벌어진 일까지... 모두 내가 어리석었던 탓이다! 내가 눈이 멀었던 탓이다! 내가 너에게 죄를 지었다!”“나를 용서해 주면 안 되겠느냐? 우리 다시 시작하자. 앞으로는 너에게만 잘하겠다. 오직 너만 믿고, 너만 아껴주겠다...”서정호는 앞뒤도 맞지 않는 말을 쏟아냈다.며칠 동안 쌓여온 후회와 고통, 그리움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모두 토해내며, 마지막 남은 한 줄기의 희망이라도 붙잡으려 했다.하지만 정시월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을 뿐이었다.감동해서가 아니었다.그저 평온한 일상을 누군가 헤집어 놓았다는 불쾌함에 가까운 반응이었다.정시월은 자신에게 다가와 팔을 붙잡으려는 서정호의 손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몸을 뒤로 물렸다.마치 불쾌하고 더러운 것을 피하듯.“왕야의 마음은...”정시월은 고개를 들어 서정호의 고통과 애원으로 일렁이는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그리고 한마디 한마디 또렷하고 차갑게 말했다.“제가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왕야의 사촌 여동생을 잘 돌보십시오. 두 분이야말로 천생연분입니다.”“나는 해주에게 마음이 없다!”서정호가 낮게 울부짖었다.그 말은 마치 칼날처럼 서정호의 심장을 깊이 찌른 듯 고통이 밀려왔다.“내 마음속의 여인은... 너다! 내가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시월아, 나를 봐라... 제발 나를 봐라... 지금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느냐? 나는 이 시간 동안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살았다. 밤낮으로 너만 생각했고, 후회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았다! 한 번만 기회를 다오. 단 한 번만이라도... 내가 너에게 보상할 기회를 줘. 내가...”“보상이요?”정시월이 갑자기 서정호의 말을 끊었다.입꼬리

  • 햇빛 속의 칼날   제17화

    그는 스물다섯, 여섯쯤 되어 보였다.곧게 뻗은 체격에 온화한 기품이 흐르고, 훤하고 깨끗한 이목구비는 마치 산속의 맑은 샘물과 숲 사이를 스치는 바람 같았다.그의 손에는 거친 도자기 그릇 하나가 들려 있었는데 그 안에서는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구진웅이었다.구진웅은 등나무 의자 곁으로 다가가 자연스럽게 몸을 낮추었다. 그리고 약그릇을 옆 작은 탁자 위에 내려놓은 뒤, 매우 조심스러운 손길로 정시월의 다친 발을 받쳐 들었다.이어 감겨 있던 깨끗한 천을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서정호의 심장이 세차게 움찔했다.숨이 가빠졌다.그 발바닥에는 여전히 끔찍한 분홍빛 새살과 짙은 흉터가 남아 있었다.하지만 분명 극진한 보살핌을 받은 흔적이 있었다.찻집에서 길손들이 말했던 “성한 살이 하나도 없다”는 모습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나아져 있었다.구진웅은 약물에 적신 부드러운 천으로 상처 주변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닦아냈는데, 그 손길은 마치 세상에 하나뿐인 귀한 보물을 다루는 듯했다.정시월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찌푸려졌다.“조금만 참거라. 곧 끝난다.”구진웅은 곧바로 정시월의 불편함을 알아차리고 손길을 더욱 부드럽게 했다.목소리는 온화했고,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힘이 있었다.“이번에 구한 설련연고가 전보다 효과가 좋구나. 조금만 더 바르면 흉터도 많이 옅어지고, 걸을 때 통증도 훨씬 줄어들 것이다.”정시월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정시월의 미간이 풀렸다.그리고 눈을 떠 자신의 발을 바라보다가, 다시 구진웅을 올려다보았다.그 눈빛에는 온전한 신뢰와 평온함이 담겨 있었다.“감사합니다, 오라버니.”정시월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바람을 타고 서정호의 귀에 또렷하게 들어왔다.오라버니라는 호칭은 차가운 바늘처럼 예고 없이 서정호의 심장을 찔렀다.순간 날카롭고 끊임없는 통증이 밀려왔다.정시월은 한 번도 그런 목소리로 자신을 ‘오라버니’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정시월은 항상 서정호를 ‘왕야’라고 칭했다.그 안에는 소

  • 햇빛 속의 칼날   제16화

    “짝——!”뺨 때리는 소리가 돌연 찻집 안에 울려 퍼지자,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던 몇몇 길손들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그곳에는 줄곧 말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내가 있었는대, 초췌한 얼굴 속에서도 감출 수 없는 귀한 기품이 흐르는 사내였다.그런데 서정호가 방금 자신의 뺨을 세게 내리친 것이었다.얼마나 힘껏 때렸는지 입가에는 순식간에 피가 흘러내렸다.하지만 서정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 그저 타오르는 불꽃만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서정호의 눈에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후회가 가득했다.그날 밤.황량한 들판과 산길 사이, 살을 에는 듯한 찬 바람이 몰아쳤다.서정호는 홀로 모닥불 곁에 앉아 있었다.불빛은 핏발 선 서정호의 눈과 턱에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을 비추고 있었다.서정호는 품 안쪽에 숨겨두었던 작은 보자기를 꺼냈다.그 안에는 철제 상자에 남아 있던 재와, 타다 남은 향낭 조각이 들어 있었다.거칠어진 손끝이 조심스럽게 새까맣게 그을린 천 조각을 어루만졌다.차갑다.마치 마지막 순간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처럼.“시월아...”서정호는 텅 빈 허공을 향해 중얼거렸다.갈라지고 부서진 목소리는 차가운 바람이 스치자 금세 흩어졌다.“그때 나는... 정말 네가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네 무공이... 네 무공이...”서정호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몰랐다.서정호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몰랐다.그저 정시월이 장군 가문의 딸이고, 무예가 뛰어난 사람이라고만 알았다.하지만 정시월의 비파골은 이미 꿰뚫렸고 무공은 모두 폐해져, 평범한 사람보다도 약한 몸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몰랐다.“그 생선도... 잊고 있었다... 네가 먹지 못한다는 걸... 정말 잊고 있었다...”서정호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뜨거운 눈물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와 얼굴에 묻은 먼지와 뒤섞였다.“일부러 그런 게 아니다... 나는 그저...”그저 무엇이었을까?정시월을 외면하는 것이 익숙했다.언제나 정시월이 자신의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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