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민아는 항상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이다. 식사시간, 그녀는 쉬지 않고 계속 다른 화제를 던졌다. 신이랑이 귀찮아할 거라 여겼지만, 예상과 다르게 그는 조금의 불편한 기색도 없이 차근차근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세 마디만 초과하면 입을 다물라고 다그치는 기성은과는 완전히 달랐다.“이랑 씨, 저 이제 배불러요. 다 드셨어요?”“네. 저도 배불러요.”“아직 이른 시간인데 나가서 영화라도 볼까요? 요즘 재밌는 공포 영화 나왔다던데, 어때요?”“좋아요.”신이랑이 카운터로 걸어가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돈을 지불했다.소민아는 두 손을 뒤로 가져간 채 말했다.“이랑 씨, 다음엔 애플 페이 한 번 써봐요. 그럼 현금 가지고 다닐 필요 없어요.”“전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요.”“괜찮아요. 오늘은 이랑 씨가 샀으니까 다음엔 제가 대접할게요.”소민아는 코를 긁적이며 말했다.“제가 데이트 신청했을 때 거절만 하지 않으면 돼요.”“언제 부르든 나올게요.”소민아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어젯밤 쌓였던 눈이 녹아 바닥은 약간 젖어있었다.“지금 영화 보러 가면 소설 쓸 시간 없지 않아요? 오늘 올린다고 하셨잖아요.”“이미 다 얘기해뒀어요.”그가 그녀를 살짝 쳐다보고는 물었다.“안 추워요?”참으로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괜찮아요.”“이거 해요.”신이랑이 호주머니에서 검은색 실장갑을 꺼내주었다.소민아가 바로 고개를 들고 말했다.“저한테 주면 이랑 씨는요?”“난 안 추워요.”“그럴 리가요.”그녀는 어디에서 용기가 솟아올랐는지 바로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따뜻했다.“정말 안 춥나 보네요. 그럼 제가 할게요.”신이랑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그는 당황스러움에 다급히 시선을 돌렸다.소민아는 추위를 잘 타는 체질이라 이미 발까지 꽁꽁 얼어있었다. 손은 더 말할 것도 없다.“됐어요. 이제 가요. 마침 이 부근에 영화관이 있어요.”그는 키가 꽤나 컸다. 그녀가 고개를 들고 쳐다봤을 때 발갛게 달아오른 그의 귀가 눈에 들어
두 시간 반의 영화가 끝난 뒤, 그들은 사람들로 붐비는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갔다. 구석까지 밀린 그녀는 누군가에게 발을 밟혔다.“아아, 내 발.”신이랑이 그녀를 비좁은 공간 속에서 끌어냈다.“괜찮아요?”“네. 괜찮아요.”“조금만 참아요.”“네.”소민아는 그의 등 뒤 안전한 공간에 자리 잡았다. 꼭 맞잡은 창백하게 하얀 그의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그의 건장한 몸집을 눈앞에 두고 숨을 죽였다. 심장이 당장 튀어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쿵쾅거리며 요동쳤다.1층에 도착하자 소민아는 그의 손에 이끌려 엘리베이터에서 나갔다.나간 뒤에도 신이랑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소민아는 그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지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아까 영화를 볼 때 자주 눈을 감고 있기도 했었다.그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왜 그래요? 어디 불편하세요?”신이랑이 부드럽고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데려다줄게요.”소민아는 조금 전 영화를 볼 때 엄마로부터 받았던 문자가 떠올랐다.“이랑 씨, 또 머리가 아픈 거예요?”머리 아파하는 그의 모습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더없이 온순하고 귀여웠다.신이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걱정할 필요 없어요. 집에 가서 약 먹으면 돼요.”그의 말투는 늘 이런 식인가보다. 느리고 부드러우며 친절하다.소민아가 말했다.“그럼 안 되죠! 저랑 같이 약 사러 가요. 머리 아픈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저도 잘 알아요. 매번 늦게까지 야근할 때면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 벽에라도 부딪히고 싶더라니까요.”“가요. 제가 약 사줄게요.”“난...”소민아는 신이랑에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그렇게 급히 앞으로 걸어가는 소민아는 온통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신이랑의 눈빛을 느끼지 못했다.머지않은 곳 검은색 승용차 안, 기성은과 소피아가 앉아있었다. 차가 신호등 앞에서 멈춰 섰을 때, 소피아는 건물에서 나오는 소민아를 발견했다.“기
“저기요.”신이랑이 호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한곳을 가리켰다.“와. 진짜 부자시네요. 가요... 여기 한 달 월세 엄청 비싸지 않아요?”소민아는 그에게 끊임없이 말을 붙였다. 영화 한 편을 봤을 뿐인데 두 사람은 오래된 친구처럼 친해져 있었다. 소민아는 그가 말하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다.“별로 안 비싸요.”“피곤하면 매일 집에서 소설만 써요. 힘들게 인간관계를 신경 쓰지 말고요. 이랑 씨는 모를 거예요. 제 예전 회사 상사들이 얼마나 괴물 같았는지.”그의 시선이 지긋이 소민아에게로 향했다.“출근하는 게 행복하지 않으면 하지 말아요.”소민아는 피식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난 한 달에 몇억씩 손쉽게 버는 이랑 씨와 달라요. 출근 안 하면 누가 절 먹여 살리겠어요? 이제 더는 삼촌한테 신세 지고 싶지 않아요.”신이랑이 말했다.“나 돈 많아요. 내가 먹여 살려 줄게요.”그 말에 소민아는 하마터면 사레에 들릴 뻔했다. 돌연 불어온 바람이 그녀의 앞머리를 흐트러뜨렸다. 그녀는 희미한 조명 아래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그런 농담 안 웃기거든요.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절 먹여 살리겠대요!”“천천히 가까워져야죠. 처음부터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신이랑은 잘못된 말을 내뱉은 아이처럼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한 고급 주택가에 들어서자 신이랑이 발걸음을 멈추었다.“도착했어요.”소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이 약 가지고 가요. 전 더는 안 따라갈게요.”“돈 줄게요.”신이랑이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려 하자 소민아는 그의 팔목을 잡았다.“됐어요. 얼마 안 돼요.”“곧 열 시네요. 저도 이만 집에 갈게요. 어서 들어가요.”신이랑은 뒤돌아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며 말했다.“잘 자요.”“이랑 씨도 잘 자요!”소민아는 그를 등진 채 팔을 흔들었다.소민아는 주택가를 떠나 택시를 잡으려 거리에 나왔다. 차가운 바람이 팔을 스치고 지나서야 아직 그의 장갑을 끼고 있다는 것을
차가 움직이자 소민아의 얼굴에 초조함이 깃들었다. 몸을 짓누르는 무형의 압력이 그녀로 하여금 숨이 막혀 말도 한마디 꺼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직하기 전이니 그녀는 아직 성세 그룹의 직원이다.소민아의 머릿속에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그를 흘겨보았던 오늘 낮 자신이 떠올랐다. 그는 정말 밴댕이 소갈딱지다. 누군가 듣기 싫은 말 한마디만 하면 줄곧 마음에 두고 괴롭힌다.설마... 복수하러 온 건 아니겠지.소민아는 이런 경직된 분위기 속의 고요함이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돌연 흘러나오는 박하 향기에 그녀는 잠시 긴장을 풀었다.창문 유리에 달린 디퓨저를 본 소민아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기 비서님도 이거 사셨네요! 저번에 제가 추천해준 건데 써보니까 어때요?”빨간색 신호등 앞에 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기성은은 손을 핸들에 올리고 전방을 주시하며 차갑게 말했다.“소피아 씨가 준비한 거예요. 요즘 함께 출장 가는 일이 많이 차에 토할까 봐 걱정된다면서.”“아, 네.”소민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약간의 씁쓸함이 느껴졌다... 아무튼 뭔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이상한 감정이었다.차 안이 조용해지던 그때, 마침 그녀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익숙한 번호로부터 보내온 문자였다.[차 탔어요?]소민아가 살짝 도발했다.[밖에 나갈 때 핸드폰도 갖고 다니지 않는 사람이 문자도 다 보내네요!]신이랑은 그 말에 반응하지 않고 문자를 보냈다.[집에 도착하면 문자 보내요. 난 소설 올려야겠어요.][그래요. 최대한 많이 써서 저희 독자들의 기대감을 만족시켜주세요.]부드러운 조명 아래, 신이랑은 물컵을 들고 책상에 앉아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알겠어요.]그때 신이랑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의 엄마인 남지선이었다.“우리 아들! 선본 거 어떻게 됐어?”“좋았어요.”엄마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이놈 마음에 들었나 보네. 그럼 한번 잘 만나봐. 매일 집에 틀어박혀 소설에만 매달려있지 말고 같이 산책도 좀 하고. 민아 엄마랑 난 오랜
“디자인팀 팀장 연봉이 그 사람 한 달 수입에도 미치지 못한다니까요.”“그만!”기성은이 돌연 소리쳤다.소민아는 깜짝 놀라 입을 닫았다. 하지만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역시 그와는 세 마디 이상 주고받지 못한다.소민아는 어깨를 올렸다 내리고는 조용히 핸드폰을 만졌다.아파트 단지 입구에 도착하자 소민아는 갓 올라온 따끈따끈한 소설을 읽으며 만 원짜리 세 장을 꺼내 자리에 올려놓았다.“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어요. 택시비만큼 돈 드릴게요.”소민아는 핸드폰에 정신을 집중한 채 차에서 내렸다.“소민아 씨!”기성은이 핸들을 꽉 잡고서 소리쳤다.소민아가 몸을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네?”기성은이 창문을 내렸다.“내 여자친구 해요.”“?”소민아는 온몸이 경직되고 동공이 확장되었다. 그 한마디 말에 그녀는 호흡하는 방법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다. 밤하늘에서 빗방울 하나가 그녀의 콧등에 떨어져서야 천천히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었다.기성은이 시선을 거두고 차갑게 말했다.“나 도착하려면 35분 정도 걸려요. 내가 목적지에 이르기 전에 민아 씨 대답을 들었으면 좋겠네요.”소민아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눈만 끔뻑거렸다. 빗줄기가 거세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복도에 뛰어 들어가 비를 피했다. 그녀는 힘껏 자신의 뺨을 두드렸다.“나 꿈꾸는 거 아니지?”소민아는 집에 돌아간 뒤 한동안 소파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에서 흘러나오는 딸깍거리는 시곗바늘 소리에 최면이라도 걸릴 것 같아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얼마가 지났을까, 그녀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기성은의 문자였다.[생각해 봤어요?]소민아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심장이 너무 쿵쾅거려 가슴을 부여잡았다.“왜 이러지?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손이 부들부들 떨려. 죽을 것 같아.”“기성은이 나더러 여자친구가 되어달래. 이게 진짜라고?”“진짜라고?”소민아는 예전 그녀의 잘못으로 몇억이나 손해 볼 뻔했을 때도 이렇게까지 긴장되지는 않았다.
전송 버튼을 눌러 보내버린 문자는 망망대해에 뿌린 모래알과도 같이 조금의 파란도 일으키지 못하고 조용히 밑으로 가라앉았다.소민아는 넋이라도 빠진 듯 핸드폰을 안고 있었다. 2분이 지나도록 그는 답장을 보내오지 않았다.그녀는 소파에 기대어 앉아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았다. 실은 아직도 기성은이 왜 여자친구가 되어달라고 했는지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녀는 기성은과 같은 사람에게 조금의 저항력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서팀을 포함한 회사 모든 직원들은 그와 한 마디만 섞으면 그거로 하루종일 행복해한다.기성은은 대표님을 제외하고 회사 여직원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남자였다. 그는 회사 일을 제외한 사생활을 내비친 적이 없다. 그는 출중한 외모뿐만 아니라 회사 임원들 세 배나 되는 연봉까지 갖추고 있다.유일한 결점이라면 성격이 너무 차갑다는 것이다!너무 냉정해 모든 사람들이 거리감을 느끼게 만든다. 예전 회사에 대학교 퀸카가 인턴으로 온 적이 있었다. 회사 전체를 통틀어 그녀보다 예쁜 여자는 없을 정도로 빼어난 미모였다.하지만 어느 날 기성은의 발을 밟은 일이 고의로 그의 주의력을 끌기 위함이었다는 게 들통나자 3일도 안 되어 회사에서 쫓겨났다.퀸카는 그렇게 울며불며 회사를 떠났다.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 퀸카는 한 도시 시장의 딸인데 그를 유혹하는 걸 목적으로 들어왔다고 했다.소민아는 그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하고 나서야... 기성은이 자신에겐 그리 독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그녀가 잘못한 일이 어찌 그의 발을 밟은 것뿐이겠는가.기성은은 그녀가 시끄럽다고 나무란 것 외에 다른 건... 정말 불평한 적이 없다.비서팀 사람들 모두가 기성은의 옆에서 일하는 그녀를 부러워했었다.또한... 그녀는 그와 함께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일한 사람이다.이용당했다는 걸 알고 이직을 결심했을 때, 그의 맞은편 자리에서 일하고 있으면 늘 등 뒤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었다.소민아는 배시시 웃는 얼굴로 자신에게 흠뻑 도취되어 있었다. 설
이번에 보낸 문자도 결국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아버렸다.소민아는 욕실에서 씻고 나온 뒤 핸드폰을 안고 방에 들어가 열어보았다. 여전히 감감무소식인 답장에 그녀는 이성을 잃고 욕설을 퍼부었다.“진짜 짜증 나. 좀 적극적이면 어디가 덧나나!”“됐어. 잠이나 자자.”그날 밤 소민아는 밤새 침대에서 뒤척이며 좀처럼 잠이 들지 못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가도 다시 눈을 뜨고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새벽 3시, 그녀는 더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정말 미치겠어요. 내가 왜 비서님과 사귀겠다고 했을까요!][스스로를 괴롭히는 거나 다름없는데!]소민아는 분노에 차올라 미친 듯이 문자를 보냈다.[안 사귈 거예요. 다른 사람 찾아봐요!]그때 답장 하나가 도착했다.[일이 이제 끝났어요. 자요.]헤어지겠다는 소민아의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그래요. 잘 자요.]그리고... 다음은 없었다...그날 밤 소민아는 완전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하여 이튿날 걸어 다니는 시체처럼 피곤한 상태로 회사에 출근했다.그녀는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온 얼굴로 마지막 1분에 사무실에 발을 들이고는 책상에 축 늘어졌다.옆에서 누군가의 친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민아 씨, 어젯밤 늦게까지 데이트한 거예요? 다크서클 심각한 거 좀 봐요!”“그러니까요! 남자친구 어떤 사람이에요? 듣기론 엄청 잘 생겼다던데 진짜예요?”소민아는 앞머리를 이마에 늘어뜨린 채 희미한 정신으로 말했다.“네? 제가 남자친구 생겼다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누가 말한 거예요?”뒤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전부 다가왔다.“몰랐어요? 어젯밤 소피아 씨가 소민아 씨와 남자 한 명이 건물에서 걸어 나오는 사진을 단톡방에 보냈잖아요. 사진이 희미하긴 했지만 뒷모습만 봐도 잘생겼던데요!”“맞아요! 민아 씨, 남자친구랑 기 비서님 중에서 누가 더 잘생겼어요?”소민아는 그녀에게 건네주는 핸드폰 속 사진을 보고는 말했다.“아니에요! 이 사람은 엄마가 소개해준 맞선남이에요. 남자친구 아니니까
시계를 보니 정각 아홉 시였다. 소민아는 눈을 감고 책상에 엎드렸다.“저 30분만 잘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깨워주세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검은색 정장을 입은 기성은이 한 손에 서류를 들고 다른 한 손은 호주머니에 넣은 채 바깥에서 걸어들어왔다. 소민아는 눈을 감자마자 잠이 들어 미세한 발걸음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비서팀에서 소민아를 제외하고는 기성은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감히 근무 시간에 잠을 자다니.기 비서님이 왔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이해가 전혀 안 되는 건 아니다. 소민아는 지금 송 부대표의 사람이기 때문에 기성은과 비슷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송 부대표는 일을 할 때 전연우에 버금갈 정도로 공포스럽다.그들 역시 늘 괴롭힘을 당하는 소민아를 동정하고 있었다.소민아가 지금 이렇게 마음 놓고 잘 수 있는 건 송시아는 오전엔 거의 사무실에 나오지 않아 그녀를 찾지 않기 때문이었다.소피아는 기성은의 사무실에 들어가다가 엎드려 자고 있는 소민아를 보고는 이마를 찌푸렸다. 하지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소피아는 업무 보고를 마치고 다른 일을 처리하러 나갔다. 11시 30분쯤, 다시 돌아왔을 때에도 소민아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성세 그룹에 어떻게 이런 날로 먹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녀의 얼굴에 또다시 불만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그녀는 조심스레 기성은에게 말했다.“기 비서님, 소민아 씨 아직도...”한 번 든 잠이 점심시간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다.백혜진이 소민아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민아 씨... 이제 일어나요. 사무실 사람들 다 나갔어요.”소민아는 깜짝 놀라 부르르 떨며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들었다. 몽롱한 정신으로 주위를 둘러보고는 말했다.“지금 몇 시예요?”“벌써 점심시간이에요!”백혜진의 시선이 안쪽 사무실에 있는 사람에게로 향했다. 순간 정면으로 마주친 차가운 눈동자에 백혜진은 화들짝 놀랐다.“민아 씨, 저 먼저 식당에 갈게요.”소민아는 얼굴을 톡톡 두드리고는 커피를 한 잔 받았다.
배가 고픈 데다 아기들이 발길질까지 하니 더욱 아팠다. “아가들아, 제발 차지 마. 규영 언니랑 미진 언니가 곧 맛있는 거 가져다줄 거야.” 그녀가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들을 달랬다. 규영과 미진은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뱃속 두 녀석들이 워낙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으니 더는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알았어요, 아가씨. 간단히 드실 걸 가져다드릴게요. 여기 앉아서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그들은 걱정되는 마음에 거듭 당부했다. 소현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여기 이렇게 많은 언니들이 지켜보고 있잖아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절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게요.” 규영과 미진은 사람들에게 다시 신신당부한 뒤에야 먹을 것을 가지러 자리를 떴다. 지난번 일 이후로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게 되어 소현아의 음식은 반드시 그들이 직접 준비해야 했다.소현아는 혼자 소파에 앉아서 작게 아기들과 이야기했다. “아가들아, 소월 이모가 전연우 그 나쁜 놈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전화를 왜 안 받은 거지?” “나 소월이가 너무 걱정돼. 근데 너희가 너무 무거워서 몰래 도망갈 수도 없어.” 그녀에게 돌아오는 답은 점점 잦아드는 태동뿐이었다. 소현아는 아기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 누군가 문을 열었는지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얇은 연노랑 잠옷만 입고 있던 소현아는 추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곧이어 도우미들의 공손한 인사 소리가 들렸다. “효연 아가씨.” 천효연은 거만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 보고는 곧장 위층으로 향했다. “여기 뒀던 내 꽃병은 어디 갔어?” 계단 모퉁이에 있던 꽃병이 사라진 걸 발견한 천효연이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현아 아가씨가 다치실까 봐 잠시 장식품들을 다 치웠습니다.” 소현아?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천효연의 눈동자에 냉기가 스쳤다. “그 바보는 지훈 씨가 방에 가둬놨잖아?” 도우미
엄마와 통화를 마친 뒤, 소현아는 장소월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전연우 그 나쁜 놈이 소월이를 괴롭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혹시 소월이는 강용 소식을 알지 않을까... 소현아는 강지훈이 강용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장소월의 당부를 기억하며 감히 묻지 못했다. 통화음이 두 번 울린 뒤 전화가 연결되었다. 상대가 말하기도 전에 소현아는 흥분해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소월아! 드디어 전화 받았네! 있잖아, 강지훈 그 나쁜 놈이 나 계속 방에 가둬놓고 문밖으로 못 나오게 했어. 나 진짜 답답해 미치겠어!” “널 여기 데려와 같이 놀려고 했는데, 강지훈의 말이 전연우 그 나쁜 놈이 너 안 보낸다고 하더라고. 둘 다 진짜 짜증 나! 내가 간신히 휴대폰 구해서 전화한 거야. 소월아, 그 나쁜 놈한테 말하고 이쪽으로 놀러 와줄 수 있어?” 한참을 떠들었을 때, 저쪽에서 낮고 위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지훈이 내가 소월이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고? 언제 나한테 물어봤는데?” 소현아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몇 초 뒤에야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꺼냈다. “전... 전연우 씨? 왜 당신이 전화를 받아요?” 전연우가 차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쁜 놈이 전화를 받아서 많이 실망했나?” 소현아는 겁을 먹고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저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잘못 들었어요! 소월이는요? 이거 소월이 폰이잖아요. 빨리 소월이한테 돌려줘요!” 전연우가 말했다. “소월이는 전화 안 받아. 다시 전화하지 마.” “소월이한테 나라고 말해줘요. 소월이가 제 전화 안 받을 리 없어요.”소현아는 다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 다시는 소월이 찾지 마. 바빠서 너랑 소꿉놀이할 시간 없으니까.” “그리고 강지훈한테 전해. 내게 터무니없는 누명 씌우지 말라고.” 전연우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소현아가 다시 걸어봤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현아 아가씨, 이제 일어나서 운동할 시간이에요.” 규영과 미
소현아는 얼굴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빨 자국을 달고서 원망 어린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았다. 강지훈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내가 소월이한테 전화해도 돼요?” “그쪽에서 받기만 한다면야.” 소현아는 이제 아침에 있었던 불쾌한 일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저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 강지훈은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신이 나 붕방거리던 소현아는 김빠진 공처럼 순식간에 축 처져버렸다. “하지만 방에만 계속 있는 건 너무 따분하단 말이에요.” “절대 도망 안 갈게요. 여기 아기들도 있잖아요. 그냥 아래층에서 좀 돌아다니게만 해줘요, 네?” 그녀가 지금 머무는 방은 집에 있던 침실을 완벽하게 똑같이 복원한 곳이었다. 소현아는 이곳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며칠 동안 줄곧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녀는 방안을 끝없이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방은 갑자기 창고로 변해버렸고, 아무리 깨려고 해도 도저히 깨어날 수가 없었다. 강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밥을 한입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연우 그 나쁜 놈도 소월이가 마당에서 그림 그리는 건 허락하던데... 강지훈 씨는 날 침실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네. 전연우보다도 더 나빠.” “...” “아래층에서만 놀아. 방을 나서면 규영과 미진이 따라갈 거야.”결국 강지훈이 한발 물러섰다. 소현아의 눈에 다시 별빛이 들어왔다. “음, 당신은 전연우 그 나쁜 놈보다 조금 나아요. 정말 아주 조금.” 아침을 먹고 난 뒤 소현아는 바로 휴대폰을 요구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거의 즉시 연결되었다. “현아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명세진의 목소리는 흥분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 조심스러웠다.오랜만에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소현아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엄마,
강지훈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돌아왔다.옆방에서 샤워를 마친 강지훈은 잠옷을 입고 소현아의 방으로 들어갔다.소현아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2.2미터나 되는 퀸사이즈 침대에서 편안하게 팔다리를 쭉 뻗은 채 말이다. 무슨 꿈을 꾸는지 웅얼거리며 입가에 흘린 침을 닦고 있었다.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강지훈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침대 곁으로 다가간 그는 이불을 끌어다 그녀의 배를 덮어주고는 코를 꼬집었다.“윽...”잠시 후 소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듯 눈을 떴다.“강지훈 씨 너무 싫어요. 숨을 쉴 수가 없잖아요. 빨리 놔줘요.”침대 곁에 있는 사람을 본 소현아는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강지훈이 말했다. “말해 봐.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제대로 말하면 놔줄게.”소현아는 씩씩거리며 눈을 감고 어쩔 수 없이 입으로 숨을 쉬었다. 가슴이 뻐끔뻐끔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마치 복어 같았다.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까지 막아버렸다.몇 초 지나지 않아 소현아는 다시 웅얼거리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강지훈은 그저 잠시 그녀에게 장난을 치고 싶었을 뿐이지만, 한번 맛을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그는 손을 떼어 그녀의 허리에 얹고 반바지를 벗기려 했다.소현아는 필사적으로 바지를 붙잡고 엉덩이를 비틀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강지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손 놔. 살살할게.”“저 졸려요. 자고 싶으니까 강지훈 씨도 빨리 자요.”그녀는 강지훈이 또 키스하려 할까 봐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낑낑거리며 그를 밀치고는 죽은 척 눈을 감았다.강지훈이 어떻게 하든 소현아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정말로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곤히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다음 날 아침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 꼭 안겨있었다. 그녀의 코끝에 그의 단단한 가슴이 닿아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어젯밤 일이 떠오른 소현아는 그의 가슴을 힘껏 깨물었다.곧이어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