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이 조명을 껐다. 그가 돌아갔는지 가지 않았는지는 모른 채 말이다.혹시라도 그가 정말 들어올까 봐 그녀는 잠옷 바지를 입고 강영수의 방으로 갔다.그녀가 침대에 눕자 남자가 다가와 등 뒤에서 꼭 끌어안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어디 갔었어?”장소월이 정신은 딴 데 팔린 채 말했다.“네가 깰까 봐 내 방에 가서 씻었어. 자.”“응.”강영수는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향기로운 냄새를 맡으며 다시 꿈나라에 빠져들어 갔다.장소월이 침대 옆 무드등 스위치를 누르자 침실 전체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자꾸만 머릿속에 피어오르는 생각을 떨쳐냈다.지금 그의 능력으론 강씨 집안과 맞서지 못한다. 앞으로 그녀가 강씨 집안의 사모님이 된다면 더이상 그에게 얽매이지 않아도 될 것이다. 비록 그녀는 여전히 전연우를 무서워하고 그의 협박과 잔인한 수단을 두려워하지만 말이다.예전의 일은 절대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절대 시도 때도 없이 해오는 그의 협박에 사로잡혀 꼼짝달싹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불현듯 저도 모르게 피곤함이 몰려와 이내 잠이 들었다.다음 날 아침, 뜨거운 햇볕이 침실을 비추었다.장소월이 허리를 펴며 이불 사이로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입가에 미소를 띠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좋은 아침.”“좋은 아침.”“시간이 늦었어. 이제 일어나.”“몇 시야?”“12시.”장소월은 자신이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잤을 줄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넌 몇 시에 깼어? 왜 날 깨우지 않은 거야?”“넌 우리 강씨 집안 미래 사모님이니 더 자도 돼. 내가 가서 치약을 짜놓을게. 옷 갈아입고 와.”“알았어.”강영수가 옷을 갈아입은 뒤 그녀의 칫솔에 치약을 짜주었다. 그가 칫솔을 건네주며 거울 속 창백한 모습의 그녀를 보며 말했다.“심리 치료사한테 가 보는 거 어때? 어젯밤 너 밤새 잠꼬대했어.”이를 닦던 장소월의 손이 멈췄다.“내가... 뭐라고 말했어?”강영수가 등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고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
장소월이 말했다.“사실이에요? 그럼 전연우는 왜 그 사람을 잡으려고 한 거죠? 경찰을 도왔을 리는 없고. 분명 죽이려고 하는 것 같던데.”그 사람에게 무슨 원한이 있기에 강지훈까지 보내 직접 쫓은 걸까?장소월은 해바라기 하나를 가져왔다. 자주 가던 꽃집에서 마지막 남은 한 송이를 사 온 것이었다.병실엔 소현아의 가족들이 와있었고 허이준과 단모연도 아직 자리하고 있었다.소현아는 사과와 복숭아를 번갈아 가며 베어 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장소월은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많이 회복된 것 같은 그녀를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기도 했다. 장소월은 소현아에게 고마움과 죄책감 모두를 갖고 있었다.문 앞에 서 있는 장소월을 보자 소현아가 아이처럼 붕방거리며 소리쳤다.“소월아!”강영수는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아 진봉과 함께 병실 밖에서 기다렸다.장소월이 안으로 들어가자 건장한 몸집의 중년 남자와 여린 몸집의 중년 여자가 보였다. 그녀는 소현아가 누구를 닮았는지 한눈에 보아낼 수 없었다.소현아의 아버지가 말했다.“우리 현아를 보러 온 거지?”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네.”소현아의 어머니가 말했다.“너희끼리 얘기해. 난 현아 아버지와 같이 아래로 내려가 간식거리를 사 오마.”“네.”장소월은 소현아의 부모님이 병실을 나서며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다.“저 아이는 뭘 먹고 자랐길래 저렇게 예쁜 걸까요? 한 끼에 만두 다섯 접시를 먹는 탓에 얼굴도 만두랑 점점 닮아가는 우리 현아와는 완전히 딴판이네요.”“그러니까 말이야. 다행히 우리 집이 가난하지 않아서 망정이지 웬만한 집안에선 키우지도 못할 거야.”소현아가 이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아빠, 엄마, 다 들려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친구들이 제가 만두 다섯 접시를 먹는다는 거 알게 되잖아요.”단모연이 옆쪽으로 물러서며 고개를 숙이고 쿡쿡대며 웃었다.부부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곧바로 자리를 떴다.장소월이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소월아... 쟤들 아직도 웃어.”
백윤서가 자살 시도를 한 건가?인사를 하기도 전에 전연우와 백윤서는 병원으로 들어가 버렸다.장소월은 종래로 이렇듯 만신창이가 된 백윤서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직접 보지 못했다면 절대 믿지 못했을 것이다.백윤서는 전연우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저 지경이 되도록 놔뒀단 말인가?강영수의 목소리가 들려와서야 그녀가 정신을 차렸다.“가서 볼래?”장소월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잘 해결하겠지.”이건 그들 두 사람 사이의 일이다. 장소월은 조금도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이번 백윤서의 상처는 저번보다 훨씬 더 깊었다.그녀의 상처 소독을 맡은 간호사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얇은 팔목에 나 있는 원래 상처 위에 또 날카로운 칼을 그었으니 살에 파묻혀있던 봉합선이 끊기고 허연 뼈가 드러났다.간호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생명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귀중한 거예요. 이렇게 자해하면 남자친구가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어요!”요즘 세상엔 자살 시도를 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잔혹하게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간호사가 남자친구를 언급하자 백윤서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가 옆에 서 있는 남자의 손을 잡으며 그를 바라보았다.“맞아요. 제 남자친구는 저밖에 몰라요. 이번엔 제가 너무 충동적이었어요.”지금의 백윤서와 오늘 아침 전연우 앞에서 울며불며 소리를 지르던 백윤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간호사가 전연우를 나무랐다.“앞으론 여자친구한테 더 신경 쓰세요. 만에 하나 살리지 못한다면 평생 후회할 거예요.”전연우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백윤서는 전연우를 두둔하고 나섰다.“오빠 탓이 아니라 다 제 잘못이에요. 오빠, 저 목말라요. 물을 한 컵 가져다줄래요?”전연우는 복도에 놓여있는 정수기에서 물을 받으러 병실을 나섰다.백윤서와 간호사가 그 뒤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모른다. 전연우가 돌아왔을 때 간호사는 이미 자리를 뜬 뒤였다.전연우는 컵에 빨대를 꽂은 뒤 백윤서에게 건
“손 함부로 움직이지 마.”전연우가 백윤서의 손을 멈춰 세우고 그녀의 앞에서 전화를 받았다.“의부님.”전연우는 이어 그녀를 살짝 밀어내고 자신의 손목을 꽉 움켜쥔 손을 뿌리치고는 창문옆 발코니로 걸어갔다.그들의 통화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희미하게나마 들을 수 있었다. 문이 닫히는 찰나, 인시윤이라는 세 글자가 백윤서의 귀에 들어왔다.장해진이 말했다.“미국 연수는 너한테 인맥을 넓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직위는 걱정하지 마. 내가 이미 잘 안배해 두었으니까.”“의부님의 결정이신가요, 아니면 인씨 가문의 결정인가요?”“인시윤은 인씨 가문의 후계자이고 넌 내 아들이야. 난 소월이보다 널 더 심혈을 기울여 키웠어. 그러니 내 고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번 일은 그렇게 결정하는 거로 해. 소월이와 영수의 약혼식이 끝나면 너도 시윤이와 같이 미국으로 떠나. 회사 일은 잠시 내가 진봉에게 맡기마. 진봉은 몇 년 동안 함께 일한 네 심복이니 너도 안심할 수 있겠지.”“알겠습니다. 생각해보겠습니다.”“처신을 잘하는 게 좋을 거야. 인시윤과 더 많이 접촉하도록 해. 강씨 집안과 인씨 집안 모두와 손을 잡는 건 우리한테 분명 도움이 될 테니까. 업계에서 견고하게 자리 잡으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해. 쓸데없는 사람한테 네 시간을 낭비하지 마. 끊기 힘들다면 내가 대신 네 주변을 깔끔하게 처리해주마.”“네.”전연우의 눈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늘이 드리웠다. 그는 장해진이 전화를 끊은 뒤에야 핸드폰 화면을 껐다.전연우가 병실로 들어가자 백윤서는 상처받은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오빠도 떠나려고요? 소월이를 가질 수 없게 됐으니 이제 인시윤한테 가려는 거예요? 오빠,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전연우는 그녀가 얼마나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초지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다음에 얘기해.”“인시윤과 결혼하려는 거죠? 권력과 부를 위해!”백윤서가 흥분하며 소리 지르자 피가 링거 관을 타고 역류했다.
그때, 서철용의 핸드폰으로 재미있는 문자가 도착했다.감옥에 들어갔던 김남주가 출소했다는 내용이었다.참으로 흥미롭다.하필 약혼식이 한 달 남은 지금 모습을 드러내다니.이렇게 빨리 움직이려는 건가?“서 선생님, 황유나라는 아가씨가 선생님을 찾아왔습니다.”서철용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조교에게 물었다.“어디에 있어?”“선생님의 사무실에 모셔다드렸습니다.”“그래.”서철용이 사무실에 들어가니 누군가와 똑 닮은 여자의 뒷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여자는 옅은 색 원피스에 금색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등 뒤에서 들려온 발걸음 소리에 황유나가 몸을 돌렸다.“오랜만이에요. 서 선생님.”흥분감이 가득 섞여 있는 목소리였다.서철용이 손을 저어 자신을 따라온 조교를 돌려보내고는 사무실 문을 닫았다.“황유나 씨, 3년 만에 뵙는군요. 보아하니 회복이 잘 된 것 같네요.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황유나가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그때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 이 얼굴의 주인과 아는 사이라고 말이에요! 귀국한 뒤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따가운 눈총을 받았는지 알아요?”서철용이 덤덤한 웃음을 지으며 손에 쥐고 있던 검사 차트를 책상에 내려놓았다.“우리 성형외과는 고객님의 생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당시 표본은 고객님께서 직접 선택하셨고 전 그 선택을 존중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제 와 저에게 책임을 묻는단 말입니까?”그 말에 황유나는 더더욱 분노가 치밀었다.“네. 맞아요! 하지만 난 AI가 임의로 합성한 사진인 줄로 알았다고요! 그때 아는 사람의 얼굴이라고 말해줬다면 난 결코 그 얼굴을 선택하지 않았을 거예요. 이건 분명 병원 책임이에요!”서철용이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실실 웃으며 한 손으로 그녀를 확 끌어당기고는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섰다.황유나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그를 경계하며 뒤로 물러섰다.“당신... 뭐 하려는 거예요!”허리가 책상에 부딪혀 더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그녀가 다른
이후 회복기 3개월을 보내고 살펴보니 확실히 그는 실망시키지 않았다.황유나는 서철용의 그 말을 3년 내내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그녀가 부자연스러운 얼굴로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왜 피해요?”매혹적인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남자가 황유나의 턱을 들어 올리자 그녀의 얼굴에 발그레 홍조가 일었다. 입술에 부드러운 감촉이 전해진 순간,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그가...황유나가 채 반응을 하기 전에 남자가 현란한 스킬로 여자의 입술을 열고 거칠게 몰아붙였다.황유나는 저도 모르게 끓어오르는 욕망에 남자의 키스를 받아주었다.그녀가 순순히 응하자 키스가 더더욱 깊어졌다. 다가오는 여자는 종래로 거절하는 법이 없는 서철용이다.남자의 손이 돌연 황유나의 치마 밑을 휘젓고 들어가 여자의 탐스러운 엉덩이를 어루만졌다.황유나가 거친 숨을 내쉬며 잠시 입을 뗐다.서철용이 눈을 맞추며 말했다.“침대로 올라갈까요?”황유나가 쑥스러운 듯 발그레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서철용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린 뒤 사무실에 숨겨진 은밀한 방으로 들어갔다.여자의 몸이 거칠게 침대에 던져졌다. 침대가 움푹 파여 내려갔다가 다시 위로 튕겨 올라왔다. 남자가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여자의 몸을 돌린 뒤 마지막 남은 얇은 속옷을 벗겼다.아랫배에서 무언가를 느낀 황유나가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 오랫동안 하지 못한 탓에 찢어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한 번 또 한 번, 점점 더 거세지는 강도와 함께 쾌감 또한 점점 더 극에 달하고 있었다. 마치 하늘 위 구름 사이를 거닐다가 단번에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반복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얼마가 지났을까, 그녀가 화끈 달아오른 몸을 가누지 못해 힘들어하고 있을 때, 남자가 돌연 움직임을 멈추었다.“계속해요. 나 괴롭단 말이에요.”문 앞에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는 사람을 본 순간, 몸 아래에서 애원하고 있는 여자에게 흥미가 떨어져 버렸다.서철용은 단정히 옷을 입고는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배은란은 의자에 앉아
“이거 놔!”그의 것이 아닌 향수 냄새가 배은란의 코를 찔렀다. 목과 셔츠엔 여자의 립스틱 자국까지 남아있었다. 두 사람이 그 방에서 얼마나 격렬히 엉켜있었는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배은란은 그의 품에서 도망치려 몸부림치며 역겨움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질투하는 거야?’배은란의 손톱이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요망스러운 얼굴에 생채기가 나자 서철용은 따끔함에 얼굴을 움켜쥐었다. 그 사이에 배은란은 곧바로 몸을 일으켜 셔츠를 정리하고는 분노에 찬 얼굴로 힘껏 그의 따귀를 내리쳤다.“그 더러운 손으로 나 만지지 마!”서철용의 얼굴이 충격에 한쪽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분노하기는커녕 허허 웃으며 말했다.“너무 살살 때렸어. 난 형수님이 날 거칠게 굴렸으면 좋겠는데?”그 허기짐과 욕망이 가득 담긴 눈빛엔 흥분감까지 일렁이고 있었다.배은란이 이마를 찌푸리고 미치광이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저번 두 번은 내 뜻이 아니었어. 당시 우리 사이의 일은 없었던 걸로 생각할 거야. 그 사진들로 날 협박한다고 해도 난 너와 타협하지 않아.”그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난 지금 너와 민용 씨가 형제라는 것 때문에 애써 부드럽게 말하고 있는 거야. 성욕을 채우기 위해 여자와 침대에서 뒹군다고 해도 널 말릴 사람은 없어.”“난 지금도 앞으로도 네 형수야.”무슨 일이 생기든 그녀는 절대 민용과 이혼하지 않을 것이다.서철용은 떠나는 사람을 쳐다보며 엄지손가락으로 얼굴 상처를 쓸어내렸다. 손가락에 묻은 피를 보며 그가 미치광이처럼 웃어댔다.등 뒤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배은란은 역겨움이 극에 달해 걸음을 재촉해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하강 버튼을 눌렀다.문 앞 휠체어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남자를 본 그녀는 곧바로 마음을 다잡고 그에게로 걸어갔다.배은란이 마스크를 하고 있는 서민용의 수건을 정리해주며 말했다.“아버님의 일은 도련님에게 얘기했어. 책임지고 보살필 거야.”서민용이 말했다.“떠나기 싫으면 억지로 떠나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을 초대해야 해? 약혼식일 뿐이잖아.”아직 물이 마르지 않아 장소월은 한 번 본 뒤 제자리에 내려놓았다.“당연하지. 넌 강씨 가문 사모님이 될 사람이야. 언젠가는 이 사람들과 접촉하게 될 거야. 리스트를 봐. 혹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내가 바로 지울게.”A4 용지 위에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장소월이 고개를 저었다.“약혼식이 이렇게 복잡할 줄은 정말 몰랐어. 내가 맡아 했다면 머리가 터져버렸을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희미해졌던 옛 기억이 떠올랐다.당시 그녀는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녀는 대학 졸업식에 가지도 못한 채 전연우의 집에서 결혼식 준비 때문에 바삐 돌아치고 있었다.그녀는 인터넷에서 결혼식에 필요한 물품을 조사했다.그녀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전연우에게 다가가 애교스러우면서도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오빠, 결혼식을 하는데 이렇게나 많은 물건이 필요하다고 하네요.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아요. 이건 청첩장을 보낼 사람 명단이에요. 한 번 봐줘요.”“오빠, 이 답례품 괜찮을까요?”“오빠, 혼인 신고하러 갈 때 이 옷 입고 갈까요?’“오빠, 빨리 카메라를 봐요. 난 우리가 혼인신고를 하는 아름다운 날을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할 거예요. 그리고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오빠와 함께 꺼내 볼 거예요.”장소월은 온몸이 찢기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왜 갑자기 그런 기억이 떠오른 걸까.장소월은 왠지 전생에 있었던 그 일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강영수가 고개를 들었다.“왜 그래? 어디 불편한 거야?”장소월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괜찮은 척 미소를 지었다.“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도울 거 있어?”“심심해?”“그냥 돕고 싶어서.”“강씨 가문 예비 사모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심심하면 내려가서 TV 봐. 나도 곧 내려갈게.”그가 자신에게 잘해줄수록 장소월은 그에게 빚진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배가 고픈 데다 아기들이 발길질까지 하니 더욱 아팠다. “아가들아, 제발 차지 마. 규영 언니랑 미진 언니가 곧 맛있는 거 가져다줄 거야.” 그녀가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들을 달랬다. 규영과 미진은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뱃속 두 녀석들이 워낙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으니 더는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알았어요, 아가씨. 간단히 드실 걸 가져다드릴게요. 여기 앉아서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그들은 걱정되는 마음에 거듭 당부했다. 소현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여기 이렇게 많은 언니들이 지켜보고 있잖아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절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게요.” 규영과 미진은 사람들에게 다시 신신당부한 뒤에야 먹을 것을 가지러 자리를 떴다. 지난번 일 이후로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게 되어 소현아의 음식은 반드시 그들이 직접 준비해야 했다.소현아는 혼자 소파에 앉아서 작게 아기들과 이야기했다. “아가들아, 소월 이모가 전연우 그 나쁜 놈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전화를 왜 안 받은 거지?” “나 소월이가 너무 걱정돼. 근데 너희가 너무 무거워서 몰래 도망갈 수도 없어.” 그녀에게 돌아오는 답은 점점 잦아드는 태동뿐이었다. 소현아는 아기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 누군가 문을 열었는지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얇은 연노랑 잠옷만 입고 있던 소현아는 추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곧이어 도우미들의 공손한 인사 소리가 들렸다. “효연 아가씨.” 천효연은 거만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 보고는 곧장 위층으로 향했다. “여기 뒀던 내 꽃병은 어디 갔어?” 계단 모퉁이에 있던 꽃병이 사라진 걸 발견한 천효연이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현아 아가씨가 다치실까 봐 잠시 장식품들을 다 치웠습니다.” 소현아?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천효연의 눈동자에 냉기가 스쳤다. “그 바보는 지훈 씨가 방에 가둬놨잖아?” 도우미
엄마와 통화를 마친 뒤, 소현아는 장소월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전연우 그 나쁜 놈이 소월이를 괴롭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혹시 소월이는 강용 소식을 알지 않을까... 소현아는 강지훈이 강용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장소월의 당부를 기억하며 감히 묻지 못했다. 통화음이 두 번 울린 뒤 전화가 연결되었다. 상대가 말하기도 전에 소현아는 흥분해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소월아! 드디어 전화 받았네! 있잖아, 강지훈 그 나쁜 놈이 나 계속 방에 가둬놓고 문밖으로 못 나오게 했어. 나 진짜 답답해 미치겠어!” “널 여기 데려와 같이 놀려고 했는데, 강지훈의 말이 전연우 그 나쁜 놈이 너 안 보낸다고 하더라고. 둘 다 진짜 짜증 나! 내가 간신히 휴대폰 구해서 전화한 거야. 소월아, 그 나쁜 놈한테 말하고 이쪽으로 놀러 와줄 수 있어?” 한참을 떠들었을 때, 저쪽에서 낮고 위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지훈이 내가 소월이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고? 언제 나한테 물어봤는데?” 소현아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몇 초 뒤에야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꺼냈다. “전... 전연우 씨? 왜 당신이 전화를 받아요?” 전연우가 차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쁜 놈이 전화를 받아서 많이 실망했나?” 소현아는 겁을 먹고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저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잘못 들었어요! 소월이는요? 이거 소월이 폰이잖아요. 빨리 소월이한테 돌려줘요!” 전연우가 말했다. “소월이는 전화 안 받아. 다시 전화하지 마.” “소월이한테 나라고 말해줘요. 소월이가 제 전화 안 받을 리 없어요.”소현아는 다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 다시는 소월이 찾지 마. 바빠서 너랑 소꿉놀이할 시간 없으니까.” “그리고 강지훈한테 전해. 내게 터무니없는 누명 씌우지 말라고.” 전연우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소현아가 다시 걸어봤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현아 아가씨, 이제 일어나서 운동할 시간이에요.” 규영과 미
소현아는 얼굴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빨 자국을 달고서 원망 어린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았다. 강지훈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내가 소월이한테 전화해도 돼요?” “그쪽에서 받기만 한다면야.” 소현아는 이제 아침에 있었던 불쾌한 일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저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 강지훈은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신이 나 붕방거리던 소현아는 김빠진 공처럼 순식간에 축 처져버렸다. “하지만 방에만 계속 있는 건 너무 따분하단 말이에요.” “절대 도망 안 갈게요. 여기 아기들도 있잖아요. 그냥 아래층에서 좀 돌아다니게만 해줘요, 네?” 그녀가 지금 머무는 방은 집에 있던 침실을 완벽하게 똑같이 복원한 곳이었다. 소현아는 이곳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며칠 동안 줄곧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녀는 방안을 끝없이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방은 갑자기 창고로 변해버렸고, 아무리 깨려고 해도 도저히 깨어날 수가 없었다. 강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밥을 한입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연우 그 나쁜 놈도 소월이가 마당에서 그림 그리는 건 허락하던데... 강지훈 씨는 날 침실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네. 전연우보다도 더 나빠.” “...” “아래층에서만 놀아. 방을 나서면 규영과 미진이 따라갈 거야.”결국 강지훈이 한발 물러섰다. 소현아의 눈에 다시 별빛이 들어왔다. “음, 당신은 전연우 그 나쁜 놈보다 조금 나아요. 정말 아주 조금.” 아침을 먹고 난 뒤 소현아는 바로 휴대폰을 요구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거의 즉시 연결되었다. “현아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명세진의 목소리는 흥분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 조심스러웠다.오랜만에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소현아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엄마,
강지훈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돌아왔다.옆방에서 샤워를 마친 강지훈은 잠옷을 입고 소현아의 방으로 들어갔다.소현아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2.2미터나 되는 퀸사이즈 침대에서 편안하게 팔다리를 쭉 뻗은 채 말이다. 무슨 꿈을 꾸는지 웅얼거리며 입가에 흘린 침을 닦고 있었다.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강지훈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침대 곁으로 다가간 그는 이불을 끌어다 그녀의 배를 덮어주고는 코를 꼬집었다.“윽...”잠시 후 소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듯 눈을 떴다.“강지훈 씨 너무 싫어요. 숨을 쉴 수가 없잖아요. 빨리 놔줘요.”침대 곁에 있는 사람을 본 소현아는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강지훈이 말했다. “말해 봐.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제대로 말하면 놔줄게.”소현아는 씩씩거리며 눈을 감고 어쩔 수 없이 입으로 숨을 쉬었다. 가슴이 뻐끔뻐끔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마치 복어 같았다.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까지 막아버렸다.몇 초 지나지 않아 소현아는 다시 웅얼거리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강지훈은 그저 잠시 그녀에게 장난을 치고 싶었을 뿐이지만, 한번 맛을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그는 손을 떼어 그녀의 허리에 얹고 반바지를 벗기려 했다.소현아는 필사적으로 바지를 붙잡고 엉덩이를 비틀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강지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손 놔. 살살할게.”“저 졸려요. 자고 싶으니까 강지훈 씨도 빨리 자요.”그녀는 강지훈이 또 키스하려 할까 봐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낑낑거리며 그를 밀치고는 죽은 척 눈을 감았다.강지훈이 어떻게 하든 소현아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정말로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곤히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다음 날 아침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 꼭 안겨있었다. 그녀의 코끝에 그의 단단한 가슴이 닿아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어젯밤 일이 떠오른 소현아는 그의 가슴을 힘껏 깨물었다.곧이어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