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연애 연습 상대: Chapter 11 - Chapter 20

22 Chapters

제11화

성혁의 표정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술잔을 쥔 그의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홱 고개를 돌려 서슬 퍼런 눈으로 그 친구를 노려봤다. 목소리가 얼음장 같았다. “네가 감히?”그 눈빛에 움찔하던 친구도 이내 성질이 올라, 목을 뻣뻣이 세우고 맞받아쳤다.“내가 뭘 못 하는데? 넌 태라 누나를 연습용 도구로 쓴 거잖아. 고작 연습용 도구인데, 넌 초아 얻고 나면 어차피 버릴 거 아니야. 설마 태라 누나는 평생 다른 남자 근처에도 가지 말라는 거냐?”“한 번만 더 지껄여 봐!”성혁이 벌떡 일어섰다. 손에 든 술잔을 바닥에 내동댕이치자 깨진 유리잔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그 눈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가장 예민한 부분을 건드린 것처럼.상대도 발끈해서 곧장 달려들어 성혁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내 말이 틀렸어? 갖고 논 건 너잖아. 이제 와서 무슨 순정파 코스프레야?”두 사람은 삽시간에 뒤엉켰다. 주먹이 살에 박히는 둔탁한 소리와 유리 깨지는 소리가 뒤섞여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다른 친구들이 허둥지둥 뜯어말리며 소리쳤다. “그만해! 20년 지기끼리 여자 하나 때문에 주먹질이 뭐냐!”“게다가 그 여자가 태라 누나잖아! 이미 떠났어. 다신 운천시에 안 돌아온다고. 여기서 치고받아 봤자 무슨 소용이야?”성혁은 몇몇 친구에게 붙들린 채 가슴을 거세게 들썩였다. 눈은 여전히 그 친구를 산 채로 씹어 삼킬 듯 노려보고 있었다.나이가 좀 있는 친구 하나가 한숨을 쉬며 성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간곡한 말투였다. “성혁아. 내일 초아 생일 파티, 우리가 고백 파티로 꾸며 놨어. 잘 생각해. 네가 진짜 좋아하는 게 누군지. 안 그러면, 돌이킬 수 없어.”성혁의 숨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눈을 감자, 태라와 함께한 하루하루가 밀려들었다.웃으며 넥타이를 매주던 모습, 품에 웅크려 잠들던 모습, 주방에서 분주하던 모습, 침대 위에서 눈가가 붉게 물들던 모습...그 장면들이 영화처럼 머릿속에서 끝없이 되감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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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성혁은 밤새도록 꿈꿨다. 꿈속은 온통 태라로 가득했다.그 웃음, 그 눈물, 그 낭창한 허리, 그 나직한 숨소리.성혁의 꿈속에서 태라는 여전히 품 안에 있었다. 예전처럼 성혁이 파고드는 대로 받아 주고, 빠져드는 대로 안아 줬다. 그 숨결이 온몸을 휘감아... 마치 여전히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사람 같았다.하지만 눈을 떴을 때, 곁엔 아무도 없었다.그는 습관처럼 손을 뻗어 끌어안으려 했지만, 닿는 건 차가운 침대 시트뿐이었다. 그 텅 빈 감각에 가슴이 옥죄었다. 아주 소중한 무언가가 생살을 찢고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핸드폰 벨 소리가 불쑥 울리며 생각을 끊었다.전화받자, 친구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성혁아, 생일 파티 준비 다 끝났어. 초아 쪽에도 알렸고. 너 언제 올 거야?]성혁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 “금방 갈게.”전화를 끊고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갔다.찬물이 정수리부터 쏟아져 내렸다.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그 장면들을 씻어 내려는 듯이. 하지만 아무리 씻어도 태라의 그림자는 여전히 눈앞에 어른거렸다.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고 나가려는데, 아파트 주인이 돌아왔다.성혁이 돈 걱정 따위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아는지, 그는 얼굴 가득 비위를 맞추려는 웃음을 띠고 있었다.“어젯밤 편히 주무셨죠? 계속 머무르실 거면 가격은 다시 상의해 드릴게요. 돈을 좀 더 얹으셔도 되고요...”성혁이 차갑게 말을 끊었다. “됐습니다.”집주인은 멍해졌다. 이렇게 단칼에 거절할 줄은 몰랐던지, 서둘러 덧붙였다. “이 집 위치도 좋고 인테리어도 괜찮은데, 마음에 드시면 더 깎아 드릴 수도...”“이 집은 전 여자친구랑 살던 집입니다.” 성혁의 목소리가 얼음장 같았다. “앞으론... 다시 올 일 없어요.”말을 마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파트를 떠났다....생일 파티장은 더없이 성대하게 꾸며져 있었다. 생화, 풍선, 조명. 모든 것이 로맨틱하고 호화로웠다.친구들이 성혁을 보고 곧장 다가와 정교한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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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성혁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홱 고개를 돌렸다.잠시, 성혁은 그게 태라인 줄 알았다.하지만 온 사람을 알아본 그때, 성연이라는 걸 깨달았다.“누나?” 성혁이 굳었다. “해외여행 중이라며. 왜 갑자기 돌아왔어?”성연은 반듯한 정장 차림에 하이힐을 신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그 눈빛은 얼음장 같았고, 초아를 훑는 시선엔 숨기지 않은 혐오가 담겨 있었다.“내가 서둘러 안 왔으면, 네가 어떤 여자를 데려올 뻔했는지 알기나 해?” 성연이 차갑게 웃으며, 초아에게 시선을 꽂았다. “임초아, 맞지?”초아는 그 눈빛에 겁을 먹고 한 걸음 물러섰다. 눈시울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언니, 제가... 제가 언니한테 뭘 잘못했나요? 왜 절 이렇게 싫어하세요?”성연은 그 억울한 표정을 상대도 하지 않고, 가방에서 사진 한 뭉치를 꺼내 초아의 몸에 사납게 내던졌다. “네가 나한테 직접 잘못한 건 없지. 근데 이번에 해외 나가 있는 동안, 네 ‘화려한 이력'을 아주 많이 들었거든.”여러 장의 사진이 바닥에 흩어졌다. 고개를 숙여 사진을 확인한 초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사진 속에는 클럽에서 밤새 흥청망청 놀아대는 모습부터, 여러 남자들과 몸을 밀착한 채 뒤엉켜 있는 장면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성연이 싸늘하게 초아를 내려다봤다. 말투에 조롱이 뚝뚝 흘렀다. “임초아. 네 그 구린 짓들, 누구한테까지 숨길 수 있을 것 같았어? 내 동생이 널 좋아한다길래 원래는 끼어들 생각 없었는데, 네가 굳이 내 총구 앞으로 기어들어 왔네.”“이번에 네가 다녔다는 학교에 가서 좀 알아봤거든. 안 물어봤으면 몰랐지, 물어보니 기절하겠더라. 해외에서의 네 생활, 아주 찬란하던데?”초아의 얼굴이 점점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변명하는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그건 전부 오해예요! 누가 일부러 절 모함한 거라고요!”“오해?” 성연이 코웃음을 쳤다. “그럼 설명해 봐. 이 사진들은 다 뭐야? 네 유학 시절 ‘친구'라는 애들도 다 입을 모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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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초아의 눈물이 멎었다. 얼굴에는 기쁨이 번졌다.하지만 성연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말투에 조롱이 그대로 묻어났다. “권성혁, 너 미쳤어? 사진이 이렇게 뻔히 눈앞에 있는데, 그래도 쟬 믿는다고?”성혁은 몸을 돌려 초아를 등 뒤로 감쌌다. 단호한 말투였다. “누나, 난 초아를 믿어. 이런 짓 할 애가 아니야. 해외에서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잖아. 이 사진들은 분명 누가 일부러 모함한 거야.”성연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동생을 바라봤다. 화가 나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너... 넌 그 잘생긴 얼굴이 아깝다, 아까워. 머리는 텅텅 비었어! 이걸 못 믿겠다 이거지?”“좋아. 지금 당장 해외로 데려가서, 쟤가 어떤 앤지 네 눈으로 직접 보게 해 줄게!”말하며 성혁을 잡아끌려 손을 뻗었다.성혁은 그 손을 확 뿌리쳤다. 말투가 싸늘해졌다. “그만해, 누나. 축하해 주러 온 거면 환영이야. 근데 판을 엎으러 온 거면, 나가 줘. 나 어린애 아니야. 내 연애는 내가 결정해.”성연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손가락질을 하며 성혁에게 쏘아붙였다.“그래, 네가 결정해! 나중에 잡아먹히든 말든 알아서 해!”말을 마치고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파티장을 나갔다. 하이힐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쨍쨍하게 울렸다.성연이 떠나자, 초아는 곧바로 성혁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선배, 절 믿어 줘서 고마워요... 정말 무서웠어요. 선배마저 다른 사람들처럼 절 오해할까 봐...”성혁이 가만히 등을 토닥였다. 다정한 말투였다. “무서워하지 마. 내가 있잖아.”주변의 하객들이 그 모습을 보고 너도나도 부추겼다. “아직도 선배래? 이제 호칭 바꿔야지!”초아의 얼굴에 발그레한 홍조가 번졌다.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나직이 불렀다. “오빠...”파티가 끝나고, 성혁의 친구 몇이 걱정 어린 얼굴로 다가왔다. “성혁아, 초아 그 사진들... 합성 같지가 않던데.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성혁이 미간을 좁혔다. 언짢은 말투였다. “너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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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밤이 깊었다. 집 안은 고요했다.성혁은 방 문을 열고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쉬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이불을 걷은 그때, 온몸이 그대로 굳었다.초아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뽀얀 살결이 은은한 조명 아래 윤기를 머금고 있었다. 유혹이 어린 눈으로 나긋한 목소리를 냈다. “이제 왔네...”성혁은 목이 뻣뻣해져,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초아야, 지금 뭐 하는 거야?”초아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손목을 붙잡았다. 어리광 섞인 말투였다. “우리 이미 사귀는 사이잖아. 왜 자꾸 날 피해? 내가 싫은 거야?”성혁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인데, 몸은 이끌리듯 침대 가로 끌려갔다. 초아가 그대로 품에 기대며 고개를 들어, 가만히 입술을 포갰다.부드럽고 끈질긴 입맞춤이었다. 떠보는 듯, 도발하는 듯.성혁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 입맞춤에 응했다.“누나...” 자기도 모르게 낮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초아의 몸이 우뚝 굳었다. 성혁을 확 밀어내며 눈물을 삽시간에 쏟아 냈다. “방금... 누굴 부른 거야?”성혁은 꿈에서 깬 사람처럼 눈물범벅이 된 초아를 바라보며 가슴이 철렁했다.그제야 소스라치게 깨달았다. 방금 초아와 입을 맞추는 내내 머릿속엔 온통 강태라와 입 맞추던 장면뿐이었다는 걸. 그 시절의 달콤함과 애틋함이 밀물처럼 밀려와서 성혁을 통째로 삼켜 버렸다는 걸.성혁은 허둥댔다.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일찍 자.”초아는 물러서지 않고 팔을 움켜쥐었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혹시... 혹시 내가 더럽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 사진들 믿어서 내가 불결하다고 느끼는 거야?”성혁은 잠깐 침묵하다가,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줬다. 담담한 말투였다. “아니야. 그냥, 아직 준비가 안 됐어.”“준비가 안 됐다고?” 초아의 목소리에 억울함과 의아함이 섞였다. “사람을 좋아하면, 갖고 싶은 게 당연한 거잖아. 오빠는 대체 내 어디가 좋은 건데?”성혁은 초아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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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초아는 그 눈빛에 겁을 먹고 한 걸음 물러섰다. 눈물이 삽시간에 쏟아졌다. “내 말 좀 들어 봐... 그 일들은... 그 일들은 전부 부모님이 시킨 거야! 그 남자들 비위 맞추라고 억지로 떠민 거라고.”“나도 어쩔 수 없었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오빠뿐이야!”성혁이 초아를 바라봤다. 눈에 실망과 혐오가 가득했다. “임초아. 너 정말 역겹다.”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나가려는데, 초아가 별안간 달려들어 팔을 죽어라 움켜쥐었다. “권성혁! 날 좋아한다면 내 전부를 좋아해야지! 못 받아 주겠으면 화라도 내야 하는 거 아니야?”“근데 넌 왜 급하게 나가려고 해? 뭘 하러 가는데? 강태라 찾으러 가는 거지? 걜 좋아하게 된 거 맞지?”성혁의 발이 멎었다. 머릿속은 뒤죽박죽인데, 마음속엔 영문 모를 해방감이 차올랐다.‘그래. 난 왜 이렇게 급하게 나가려는 거지?'‘왜 진실을 듣고 나서 충격보다 후련함이 더 큰 거지?’‘왜 머릿속이 온통 태라 누나뿐인 거지?'성혁은 마침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자신이 태라를 좋아하게 됐다는 걸.곧이어 몸을 돌려 초아를 바라봤다. 목소리가 얼음장 같았다. “그래서 뭐? 이 모든 거짓말의 대가를 너도 반드시 치르게 해 줄게.”말을 마치고 곧장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초아가 해외에서 벌인 문란한 행적들, 싹 다 캐서 도시 전체에 뿌려. 다신 얼굴 못 들고 다니게 만들어.”말을 마치자마자 초아의 손을 뿌리치고, 성큼성큼 집을 떠났다.초아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끝났다. 다 끝났어...’목이 터져라 울부짖었다. 목소리에 절망이 묻어 있었다. “권성혁, 늦었어! 날 망가뜨려 봤자 소용없어! 넌 날 위해서 그 여자를 그렇게 짓밟았잖아. 영원히 그 여자는 너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야!”...성혁이 성연의 집에 들이닥쳤을 때, 성연은 한창 짐을 싸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흘끗 보고는,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왜 왔어?”성혁은 방으로 들어가, 펼쳐진 캐리어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누나,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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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한편, 호랑시.태라는 일찌감치 일어나 단장을 시작했다. 맞춤 제작한 웨딩드레스는 눈처럼 새하얗게, 가느다란 허리와 우아한 어깨선을 살려 냈다.드레스를 입은 태라를 보며 방 안의 모두가 감탄 어린 눈빛을 보냈다.“세상에, 태라야, 너무 예쁘잖아!” 친구들이 곁을 둘러싸고 연신 감탄했다.태라는 옅게 웃으며 거울로 시선을 옮겼다.거울 속 태라는 그림 같은 눈매에, 입가엔 은은한 행복이 어려 있었다.“신랑 왔다!” 누군가 외쳤다.태라가 몸을 돌리자, 구준범이 걸어 들어왔다.몸에 꼭 맞게 재단된 검은 예복, 훤칠한 몸, 기품 있는 분위기.그 시선이 태라에게 닿자, 눈에 숨김없는 감탄이 어렸다.“우리 태라 예쁘죠?” 방 안 사람들이 웃으며 물었다.준범은 대답 대신 곧장 태라 앞으로 걸어와, 몸을 숙여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낮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내 예쁜이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태라는 볼을 발그레 붉히며 나직이 타박했다.“나도 곧 서른인데, 무슨 예쁜이 취급이야.”준범이 웃었다. 눈에는 태라를 향한 애정이 가득했다. “내 눈엔, 넌 영원히 예쁜이야.”태라는 마음이 따뜻해져, 눈시울이 살짝 젖어 들었다.이 정략결혼이 준범과 다시 만나게 해 줄 줄은... 정말 몰랐다.정략결혼을 승낙한 건 그저 성혁에게서, 그 고통스러운 관계에서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상대를 만나 보니, 뜻밖에도 학창 시절 남몰래 좋아했던 그 남자였다.구준범, 태라의 고등학교 선배. 그 시절, 수많은 여학생의 마음속 아이돌 같은 존재였다. 태라는 그저 조용히 좋아하기만 했을 뿐, 그 마음을 입 밖에 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훗날 준범이 유학을 떠나며 두 사람의 연은 끊겼다.이번 정략결혼이 성사되고서야 알았다. 준범도 줄곧 태라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이 혼담은, 준범이 먼저 청해 왔다는 걸.이 며칠 동안 두 사람의 사이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준범의 다정함과 자상함은 태라를 성혁의 트라우마에서 조금씩 걸어 나오게 해 줬다.기억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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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메시지가 올라가자마자, 단톡방이 삽시간에 폭발했다.[헐, 성혁아, 드디어 정신 차렸냐? 이제 임초아는 진짜 아니야?][진작 그랬어야지! 임초아 같은 여자한테 시간 낭비할 가치도 없다고!][근데 태라 누나 쪽은... 네가 그렇게 깊게 상처 줬는데, 용서해 줄까?]성혁은 메시지들을 내려다보며, 손가락으로 빠르게 입력했다. [임초아는 진작에 안 좋아했어. 그냥 집착 같은 거였나 봐. 걔랑 같이 있던 며칠 내내, 머릿속에 태라 누나뿐이더라고. 예전엔 몰랐는데, 이젠 알았어.]단톡방이 몇 초 조용해졌다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친구야, 깨달았으면 됐어! 임초아 같은 여자, 진짜 네가 마음 쓸 가치 없어. 너 모르지? 걔 그 사진들 터지고 나서 임씨 집안 주가 폭락해서 이미 파산했어. 임초아는 맨날 부모한테 두들겨 맞는다더라. 온 가족이 운천시에서 조용히 도망칠 준비 중이래.]성혁은 미간을 좁혔지만, 마음엔 잔물결 하나 일지 않았다. 임초아의 일 따위 이제 조금도 관심 없었다. 오직 태라를 빨리 찾아 그 마음을 되돌리고 싶을 뿐이었다.[걔 얘긴 그만해. 난 지금 태라 누나 되찾을 방법만 알고 싶어. 빨리 머리 좀 굴려 봐.]친구들이 곧장 왁자하게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일단 진심으로 사과해! 사과는 무엇보다 태도가 제일 중요해. 그 명문가 도련님 유세 좀 부리지 말고!][맞아. 아예 태라 누나 앞에서 무릎을 꿇어. 쪽팔리긴 해도, 네가 그만큼 깊게 상처 줬잖아.][그거랑, 네가 변했다는 걸 보여줘야 해. 말로만 하는 건 다 가짜야. 행동으로 진심으로 뉘우쳤다는 걸 증명하라고!][...]성혁은 하나하나 새겨들으며 속으로 가만히 계산을 굴렸다.이런 방법들이 체면 깎이는 짓이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태라를 위해서라면 자존심 따위는 내려놓을 수 있었다.어느새 한 시간이 흘렀다.결혼식이 곧 시작되는데, 태라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점점 커지는 불안에 성혁은 참지 못하고 옆자리 하객을 붙들고 나직이 물었다. “저기, 혹시 강태라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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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성혁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 못 박혀 버렸다.정수리부터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온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려 왔다.시선은 무대 위의 태라에게 못 박혀 있었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눈웃음을 머금은 채 다른 남자 곁에 선 태라에게.그 옆에 선 성연은 들러리 드레스 차림으로, 얼굴 가득 행복하게 태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식을 지켜보는 사람처럼.눈앞의 모든 것이 잔인할 만큼 또렷하게 말해 주고 있었다.이 결혼식의 주인공은... 강태라였다.성혁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귓가가 웅웅 울렸다.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사회자의 목소리가 다시 울리고서야 성혁은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신부 강태라 양은 신랑 구준범 군을 남편으로 맞이하여,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 때나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평생을 함께할 것을 서약합니까?”태라가 살며시 눈을 들어 다정한 시선으로 준범을 바라봤다.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막 입을 열려는 그때, 성혁이 미친 사람처럼 무대로 뛰어올라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안 돼! 이 결혼은 안 돼!”장내가 발칵 뒤집혔다. 모두의 시선이 성혁에게 쏠렸다. 성연은 눈을 부릅뜨고 허둥지둥 그 팔을 붙들며 목소리를 낮춰 노성을 질렀다. “권성혁! 너 미쳤어?! 오늘이 태라 결혼식인 거 알면서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얌전히 앉아서 조용히 기다리라고 했잖아. 그런데 단상까지 올라와서 식을 망치겠다고? 제정신이야?”성혁은 들리지도 않는 듯 성연의 손을 뿌리치고, 태라 앞으로 달려들어 그 손을 덥석 붙잡았다.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누나, 내가 잘못했어! 나 이제 임초아 안 좋아해. 아니, 사실은 훨씬 전부터 누나를 좋아하고 있었어! 다른 남자랑 결혼하지 마. 절대 못 하게 할 거야!”“누나는 내 거라고 했잖아. 누나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여기서 성혁과 마주칠 줄은 몰랐던 태라의 표정은 순시간에 차갑게 식었다.힘껏 그 손을 뿌리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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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성혁은 보안팀 직원들에게 식장 대문 밖까지 끌려 나왔다. 쾅!육중한 문이 등 뒤에서 닫히며, 안의 떠들썩한 소리를 끊어 냈다. 밖에 선 성혁의 귀엔, 그래도 안의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사회자가 반지 교환을 선언하는 소리. 하객들이 환호하며 부추기는 웃음소리. 그 뒤에 이어진... 가볍지만 심장을 부수기엔 충분한, 입맞춤 소리.심장이 보이지 않는 손에 사납게 움켜쥐어져 숨이 막힐 만큼 아팠다. 성혁은 문에 와락 달려들어 세차게 두드리며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문 열어! 제발 문 좀 열어 줘! 누나! 그 사람한테 시집가지 마! 제발... 시집가지 마!”하지만 안의 사람들에겐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아니, 애초에 누구도 상대해 주지 않았다. 예식은 그대로 이어졌다. 웃음소리, 박수 소리, 축복의 말들이 날 선 칼이 되어 하나하나 성혁의 가슴에 박혔다.성혁은 이마를 차가운 문짝에 짓누른 채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을 쏟았다. 언젠가 자신이 이렇게 비굴하게 한 사람의 용서를 구걸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었다.오기 전엔 수많은 방법을 떠올렸다. 무릎 꿇을 생각도 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되찾을 생각도 했다.하지만 지금 태라가 다른 사람과 부부가 되는 걸 제 귀로 들은 뒤에야 깨달았다. 자신에겐 태라를 되찾을 자격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걸.“누나... 이러지 마... 내가 정말 잘못했어... 다른 사람한테 시집가지 마... 제발...”목소리가 점점 낮아지다가 끝내 흐느낌이 됐다. 하지만 안의 사람은 끝내 답하지 않았다. 성혁이 그저 아무 상관 없는 낯선 사람인 것처럼.그는 정말 후회스러웠다.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왜 진작 제 마음을 알아보지 못했는지가...왜 태라를 아껴 주지 못했는지가...하지만 이 모든 건... 이미 늦어 버렸다.한참이 지나서야 문이 마침내 열렸다. 성연이 얼음장 같은 얼굴로 걸어 나왔다.성혁 앞으로 걸어와 세차게 따귀를 올려붙였다. 목소리에 끝없는 분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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