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헌신하면 헌신짝이 됩니다: Bab 1 - Bab 10

14 Bab

제1화

7년을 연애하는 동안 기성훈은 단 한 번도 제 노트북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그런데 이번 출장길에는 어쩐 일인지 노트북을 끄는 것을 깜빡했고 서재를 정리하던 나는 우연히 켜져 있는 화면을 보게 되었다.[성훈아, 너 진짜 오늘 스위스에서 장미랑 결혼식 올린 거야?][혼인신고는 안 했다지만 서윤이가 알면 난리 날 텐데 괜찮겠어?][당장 사흘 뒤가 국내 결혼식이잖아.][이 자식아, 정신 좀 차려!]기성훈의 제일 가까운 절친이 보내온 카톡 메시지였다.나는 책상 모서리를 붙잡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이장미는 기성훈의 열여덟 살 적 첫사랑이자, 장거리 문제로 헤어진 지 8년이나 된 여자였다.그런데 우리 결혼식을 고작 사흘 앞두고 그 여자랑 몰래 식을 올렸다니.솔직히 7년의 연애 끝에 올리는 결혼이라 나는 세심하게 공을 들이고 있었다. 더욱 특별하고 뜻깊은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호텔 예식에 앞서 신혼집에서 신부 맞이를 치르고 신랑집에 들러 가문 어른들께 먼저 인사를 드리는 자리까지 마련한 참이었다.책상 모서리를 움켜쥔 손등 위로 푸른 힘줄이 툭 불거졌다. 나는 기성훈이 뭐라고 답할지 확인하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화면을 노려보았다.이내 기성훈의 답장이 올라왔다.[진짜야. 나 제정신이고.][이건 장미와 열여덟 살 때 했던 약속이야. 나한테 청한 유일한 부탁인데, 이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줘야지.][서윤이는...]채팅창은 한동안 침묵에 휩싸였다. [어차피 서윤이는 모를 테니까. 돌아가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면 돼.]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문장을 노려보았고 한참 뒤에야 씁쓸하게 웃음을 터뜨렸다.‘그렇게는 안 될 것이다. 기성훈, 나는 이미 알아버렸으니까.’나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은 뒤,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를 잡고 기성훈과 이장미의 대화창을 열었다.우리가 함께한 7년 동안 나는 두 사람이 매일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이장미가 귀여운 고양이 사진을 공유하면 기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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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행간마다 묻어나는 ‘정성'이라는 두 글자를 마주한 순간, 나는 마침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기성훈과 함께한 나의 7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서재에 홀로 앉아 하룻밤을 바짝 지새운 뒤, 나는 다음 날 휴가를 내고 절친 정하린과 함께 결혼식을 취소하러 갔다.“서윤아, 너 정말 잘 생각한 거지?”나를 보자마자 정하린이 대뜸 물었다.“어. 잘 생각했어.”“너 기성훈이랑 7년을 만났고 당장 모레가 결혼식이야. 걔 돌아오는 것도 안 기다리고 너 혼자 다 취소하겠다는 거야?”“응.”“기성훈은 알고 있고?”“바빠.”“뭐 하느라 바쁜데?”나는 대답하지 않았다.정하린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을 이었다.“네가 직접 말하기 껄끄러우면 내가 전화할게. 너희 둘 7년이나 만났잖아. 결혼같이 이렇게 큰일을 어떻게 너 혼자...”“그 사람 결혼하느라 바빠.”내가 나직하게 말했다.정하린은 멈칫하더니, 못마땅해하던 표정 그대로 굳어버렸다.“뭐라고?”나는 옅게 웃어 보이며 어젯밤 기성훈의 노트북에서 저장해 둔 대화 내용을 꺼내 보여주었다.“기성훈이 결혼했어. 바로 어제, 스위스에서 그의 첫사랑인 이장미랑.”정하린은 긴 침묵에 잠겼다. 이내 붉어진 그녀의 눈가에 차오르는 분노가 일렁였다.“너 어제 새벽까지 호텔에서 조명 감독이랑 식장 연출 리허설 하느라 정신없었잖아. 도중에 나한테 위장약 좀 사다 달라고 메시지까지 보냈었고. 그런데... 그 시간에 기성훈은 스위스에서 딴 여자랑 결혼식을 올리고 있었다고?”나는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어.”정하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곧바로 차를 몰아 나를 웨딩 컨설팅 업체로 데려갔다.가는 길 내내 그녀는 내 손을 아프도록 꼭 잡고 있었다.결혼을 취소하고 돌아온 나는 기성훈과의 신혼집에서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이 집을 떠나기 위해 묵묵히 캐리어를 싸고 있던 그때, 기성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공항 대기실에서 찍은 사진 한 장과 함께 짤막한 글이 적혀 있었다.[출장 끝, 피곤하다.]나는 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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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통화 너머에서 한 여자의 맑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성훈아, 이것 좀 봐봐. 내 다이아몬드 반지 좀 헐거워진 것 같지 않아?”그러자 기성훈이 고개를 돌려 다정하게 대꾸했다.“잠깐만 기다려봐.”그러고는 이내 다시 화면을 보며 내게 말했다.“서윤아, 더 할 말 있어? 없으면 나 먼저 끊을게.”나는 화면 속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결국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질문을 던지고야 말았다. “기성훈, 너 진짜 나랑 결혼하고 싶긴 한 거야?”그는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실소를 터뜨렸다. “당연한 소릴 왜 해? 우리 사귄 지 7년이야. 인생에 7년이라는 시간이 몇 번이나 있겠어? 당연히 너랑 결혼하고 싶지.”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손가락은 이미 기성훈의 가족 단톡방 대화창에 머물러 있었다.불과 3분 전만 해도 나는 그곳에 정중하게 글을 적어 내려가는 중이었다.[양측의 합의하에 모레 예정되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기로 했습니다.]그때까지만 해도 마지막으로 그의 체면을 세워주려 했던 것이다.하지만 이제 나는 그 글자들을 미련 없이 한 자씩 지워버렸다. 그러고는 건조하게 대답했다.“알았어.”다음 날, 나는 대부분의 짐을 고향 집으로 부쳤다.그때 기성훈의 어머니 최선영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서윤아, 오늘 점심 먹으러 집으로 오렴. 성훈이도 마침 도착했단다.”수화기 너머의 그녀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이내 생글거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아, 성훈이가 친구도 한 명 데려왔어. 이장미라고 하는데, 이번 기회에 서로 인사나 나누면 딱 좋겠구나.”최선영은 겉보기에 참 ‘인자한' 사람이었다.기성훈이 나를 처음 집으로 데려갔던 날, 그녀는 첫 만남부터 내게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다정하게 차를 권했었다.예쁘게 생겼다며 연신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내 학력과 집안 배경, 그리고 집안일은 얼마나 야무지게 하는지 꼬치꼬치 캐묻던 사람이었다.나는 대학 졸업 논문 발표 때보다 더 긴장한 채,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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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기성훈이 나를 배웅하겠다며 쫓아 나왔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불쑥 입을 열었다.“엄마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뭐가?”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을 이었다.“장미한테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한 거, 우리 엄마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어.”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내 양손을 뒤집어 가며 빤히 바라보았다. “너희 엄마는 나를 처음 본 날부터 예쁘다고 칭찬했지. 손이 곱다면서 고생 한 번 안 해본 손 같다고 했고. 그러고 나서 너희 집에 갈 때마다 내가 자리에 앉기만 하면 주방으로 불러내 설거지를 시키셨어. 7년 동안, 내가 너희 집에서 밥그릇 닦은 횟수만 78번이야. 그런데 이장미는 방금 밥 먹을 때 보니까 너희 엄마가 물 한 잔도 직접 못 뜨게 하더라.”기성훈의 얼굴빛이 미세하게 굳어졌다.“서윤아, 장미는 손님이잖아.”“손님한테 어머니라 부르라고 시켰다고?”기성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내가 다시 물었다.“나한테 가져온 그 결혼 답례품, 누구 아이디어였어?”기성훈은 멍하니 굳어버렸다.“장미가 그러자고 한 거야. 그냥 좋은 기운 좀 받으라고.”“넌 그걸 말리지도 않았고?”“난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 안 했지...”나는 또다시 실소를 터뜨렸다.함께한 7년 동안, 이 핑계를 기성훈의 입에서 들은 게 대체 몇 번이었던가.내 생일을 까먹었을 때도 그랬다.“일이 너무 바빠서, 그렇게 깊게 생각 못 했어.”기념일에 나와 이장미에게 똑같은 브랜드의 팔찌를 선물해 놓고도 둘러댔었다.“어차피 같은 브랜드잖아, 난 그냥 별생각 없었어.”심지어 나한테 청혼했을 때도 반지 치수가 한 사이즈나 컸었다.그때 그의 변명 역시 똑같았다.“내가 이런 사소한 걸 잘 기억 못 해, 깊게 생각 안 했지.”정말로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그랬던 건지는 이제 와서 따지고 싶지도 않다.지금은 그런 것조차 귀찮고 지긋지긋할 뿐이니까.나는 그에게 단 한마디를 건넸다.“기성훈, 만약 지금이라도 나와의 결혼을 무르고 싶다면, 아직 늦지 않았어.”그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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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그렇게 화사해야 할 신혼집이 소름 끼칠 정도로 조용해 마치 적막한 폐허를 연상케 했던 것이다.신혼방을 장식했어야 할 화려한 풍선도, 내가 밤을 새워가며 정성껏 골랐던 생화와 디퓨저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고 심지어 안방의 옷장마저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오직 거실 한가운데 외롭게 놓인 탁자 위에 약혼반지가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신부를 데려가기 위해 고운 꽃다발을 가슴에 품고 있던 기성훈은 문 앞에 멈춰 선 채 입가에 머물던 미소를 서서히 잃어갔다.곧 그의 뒤에 빽빽하게 서 있던 친척들이 가장 먼저 사태를 파악하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이게 대체 무슨 난리라냐?”“새신부는 어디 갔대?”“분명히 이 시간에 신부를 데리러 오기로 약속하지 않았어? 왜 사람 그림자도 안 보이지?”“집 꼴이 왜 이래? 이사라도 간 것처럼 살림살이가 죄다 빠져나갔잖아!”당황하기는 신랑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누군가 기성훈의 어깨를 툭 치며 다급하게 속삭였다.“성훈아, 너 서윤이랑 크게 싸우기라도 한 거야?”“설마 급하게 대기 장소가 변경된 건 아니겠지?”“성훈아, 말 좀 해봐.”하지만 기성훈에게는 그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그는 멍한 눈으로 사람들을 밀치며 오직 거실 중앙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바닥을 밟는 구두 굽 소리가 유난히 고요하게 울렸다.그러나 그 가벼운 발소리는 그의 가슴을 한 번씩 짓누르는 거대한 추와 같았다.사람들 맨 뒤에 서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기성훈의 절친 박지호는 마침내 상황을 깨달은 듯 안색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그는 빠른 걸음으로 기성훈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성훈아, 서윤이가 혹시 눈치챈 거 아니야?”기성훈이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뭘 눈치채?”그의 목소리가 꽉 막힌 것처럼 억눌려 나왔다.박지호는 그런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뭘 눈치챘을 것 같아? 당연히 너랑 이장미가 스위스에서 치른 그 결혼식 말이지.”그 마디가 떨어지자마자 넓은 거실에 서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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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성훈이가 위장병으로 앓아누울 때면 서윤이는 한밤중에 동네를 뛰어다니며 약을 구해왔고 성훈이가 사업 초기 자금난에 허덕일 때는 3년 동안 악착같이 모은 적금을 통째로 털어주었어. 성훈이 엄마가 입원했을 때는 자기 몸이 열이 펄펄 끓는 와중에도 병상을 지키며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다고. 그런데 너는?”박지호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넌 돌아오자마자 성훈이를 데리고 스위스에 가서 결혼식을 올렸잖아. 그런데 오늘은 또 뻔뻔하게 내연녀의 탈을 쓰고 신부 자리에까지 기어오르려고? 꿈도 꾸지 마.”거실 안은 순식간에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술렁이기 시작했다.“스위스 결혼식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누가 누구랑 결혼을 해?”“성훈이는 오늘 결혼하는 거 아니었어?”“이장미랑은 그냥 동창이라며?”기성훈의 사촌 동생 강은비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이장미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똑바로 응시했다.“저 언니 손에 있는 저 반지... 결혼반지 아니야?”이장미가 황급히 손을 뒤로 숨겼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모든 이의 시선이 그녀의 손가락에 꽂혔다.그 다이아몬드 반지는 너무나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이 결혼식에 모인 모든 이들의 뺨을 후려치는 따귀처럼.하지만 기성훈은 끝까지 이장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그의 시선은 오직 탁자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찻잔 옆에 고정되어 있었다.그곳에는 약혼반지가 쓸쓸히 놓여있었다. 안쪽에는 이니셜 두 글자가 촘촘히 새겨져 있었다.H&Y성훈과 서윤.내가 몇 번이고 간곡하게 부탁한 끝에 기성훈이 마지못해 새겨주었던 이니셜이었다.당시 그는 귀찮다는 듯 이렇게 말했었다.“반지는 그냥 반지일 뿐이야, 이런 거 새겨봤자 아무 의미 없어.”하지만 나는 아주 진지하게 대답했었다.“의미 있어. 난 이 반지로 우리가 진짜 평생 함께할 거라는 걸 증명할 테니까.”그런데 지금, 그 반지는 내게 버려진 채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마치 아무 말 없는 사형선고서처럼.기성훈은 천천히 걸어가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집어 들었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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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아름다운 만년설을 배경으로 흐드러지게 핀 생화들 사이에서, 두 사람은 그 누구보다 행복한 진짜 신혼부부의 모습이었다.왜 하필 스위스를 골랐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기성훈은 다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제 아내가 이곳을 아주 좋아하니까요.”거실 안은 순식간에 죽은 듯한 정적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 침묵도 잠시, 이내 폭탄이라도 터진 듯 사방에서 비난 섞인 웅성거림이 쏟아져 나왔다.“완전 미친놈이네!”“이거 사실상 중혼이잖아!”“아무리 혼인신고를 안 했다지만 진짜 소름 끼치고 구역질 난다.”“내일 국내에서 결혼식을 올리면서 며칠 전에 첫사랑이랑 미리 식을 올려?”“임서윤이 이걸 알고도 안 떠나면 그게 이상한 거지!”기성훈의 큰아버지는 흙빛이 된 얼굴로 삿대질을 하며 불같이 호통을 쳤다.“이 망할 놈,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구나! 네놈이 우리 집안 얼굴에 아주 제대로 먹칠을 했어! 서윤이랑 결혼하기 싫었으면 진작 말을 할 것이지. 그 착한 아이가 너 하나만 믿고 무려 7년을 헌신했는데 사람을 어떻게 이토록 처참하게 짓밟아!”기성훈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만 달싹일 뿐, 단 한마디 변명조차 꺼내지 못했다.이미 하얗게 질려버린 이장미는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하려 다급하게 애걸했다.“정말 그런 게 아니에요. 저희는 그저 어릴 적에 했던 가벼운 약속을 지키려 했을 뿐이에요. 두 사람의 결혼을 방해하려던 의도는 결코 없었어요. 저는 정말이지 그저...”바로 그때, 옆에 있던 강은비가 차가운 실소를 터뜨리며 그녀의 말을 가차 없이 잘라냈다.“그저 웨딩드레스를 입었을 뿐.” “그저 결혼반지를 나눠 꼈을 뿐.” “그저 남의 약혼자한테 남편이라고 불렀을 뿐.” “그저 그 집 어머니한테 며느리 소리를 들었을 뿐.” “그리고 또 오늘은 그저 진짜 신부 대신 식장에 들어가려 했을 뿐이다?” “이장미 씨는 그놈의 ‘그저’가 참 많기도 하네요.”이장미는 눈시울을 붉힌 채 애처롭게 기성훈을 돌아보았다.“성훈아, 제발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하지만 기성훈은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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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시집오는 처녀가 조금 비싸게 구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눈꼴시어서 더는 못 봐주겠네. 우리 기씨 집안이 지 아니면 아쉬울 줄 아나.”최선영의 오만한 목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지기가 무섭게, 기성훈의 차가 대문 앞에 급히 멈춰 섰다.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허겁지겁 마중을 나갔다.“성훈아! 서윤이는 어쩌고 왜 너 혼자 오는 거야?”하지만 기성훈은 못 들은 척 그녀를 밀치고 이층 계단으로 성큼성큼 걸어 올라갔다.최선영이 황급히 그의 뒤를 쫓았다.“엄마가 묻잖니! 대체 신부는 어딨어?”마침내 기성훈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엉망이었다.“서윤이 떠났어요.”최선영은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떠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임서윤이 다 알아버렸다고요.”그 순간 거실에 모여 있던 친척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로 쏠렸고 최선영의 안색은 차갑게 굳어버렸다.“대체 뭘 알아버렸다는 게냐?”기성훈은 절망스러운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저랑 장미가 스위스에서 결혼식 올린 거요.”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씨 본가 안은 마치 폭탄이라도 터진 듯 발칵 뒤집혔다.“뭐라고!”“성훈이가 이장미랑 먼저 식을 올렸다고?”“그럼 오늘 결혼하려던 임서윤은 대체 뭐가 되는 건데?”“이건 대놓고 남의 귀한 딸 모욕 준 거잖아!”최선영은 덜컥 겁이 나 비굴하게 손사래를 쳤다.“아니에요, 다들 오해하시는 거예요! 장미랑 성훈이는 그냥 어릴 때 장난으로 했던 약속을 지킨 것뿐이라고요! 혼인신고도 안 했으니 식이고 뭐고 다 무효예요, 무효!”“무효라고?!”기성훈의 큰아버지가 격노하며 테이블이 부서져라 내리쳤다. “결혼식이 무효면 대체 뭐가 유효하다는 거야! 이장미가 제수씨한테 어머니, 어머니 하며 살살 녹일 땐 왜 무효 소리를 안 했어? 오늘 신부 데리러 가는 차에 이장미를 기어이 태우고 가려고 설쳐댔을 땐 왜 무효 소릴 안 했냐고!”최선영은 매서운 질타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평소 잘난 체하며 체면을 그 무엇보다 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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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서윤이가 내게 반지를 돌려줬어요. 나를 버렸다고요.”영상은 거기서 뚝 끊겼다.그때 정하린에게서 메시지가 날아왔다.[진짜 속 시원하다. 그런데 서윤아, 너 진짜 그 자식한테 끝까지 아무 말도 안 해줄 거야?]나는 한참 동안 휴대폰 화면을 응시하다가 답장을 보냈다.[그럴 필요 없어.]7년이라는 세월 동안 쏟아부은 감정이 얼만데, 왜 할 말이 없었겠는가.다만 뱉어야 할 말들은 이미 수많은 배신과 실망 속에서 닳고 닳도록 쏟아낸 뒤였다.그 남자가 내 목소리에 귀를 닫았으니 나도 더 이상 얹을 말 따위 없었다.결혼식이 취소된 첫날, 나는 무려 열 시간이나 푹 잤다.눈을 떠보니 따스한 햇살이 침대 끝자락에 내리쬐고 있었고 엄마가 침대 곁에 앉아 말없이 사과를 깎고 있었다.엄마는 내가 갑자기 왜 친정에 돌아왔는지 묻지 않았고 결혼식이 왜 무산되었는지도 캐묻지 않았다.엄마는 그저 사과를 먹기 좋게 조각내어 내게 건네주었다.“달달한 거 좀 먹어.”그 다정한 한마디에 왈칵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그동안 나는 기성훈이라는 우주를 내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았다.명절이나 기념일이 다가오면 그의 스케줄부터 확인했고 월급이 들어오면 그에게 뭘 선물할지 먼저 고민했으며 그의 어머니가 조금만 불평을 늘어놓아도 며칠 밤낮을 자책하며 나를 탓했다.나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나를 한없이 깎아내리는 과정인 줄 알았다.그래서 몸을 바짝 낮추면 그 먼지 날리는 바닥에서도 기적처럼 꽃이 피어날 거라고 착각했다.하지만 먼지투성이 바닥에서 피어나는 건 없었다.숨이 막혀 콧속으로 시커먼 재만 들어찰 뿐.결혼식이 취소된 둘째 날부터, 나는 증거를 수집하기 시작했다.대화 내용과 펜테라 결혼식 기사 스크린샷, 기성훈이 이장미에게 사준 웨딩드레스와 결혼반지, 호텔 결제 내역, 그리고 이장미가 그에게 보낸 낯뜨거운 음성 메시지와 영상통화에서 ‘친구 결혼식'이라며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던 화면 녹화까지...나는 그것들을 항목별로 차곡차곡 분류했다.시간, 금액, 사건 발생일,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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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우리 예정대로 혼인신고하고 평소처럼 살자. 내가 다 보상해 줄게.”나는 그를 멍하게 쳐다보다가 쓴웃음을 터뜨렸다.“기성훈, 너 아직도 내가 신경 쓰는 게 고작 혼인신고를 했느냐 안 했느냐 뿐이라고 생각해?”그는 멍한 얼굴로 굳어버렸다.“아니야?”나는 픽 웃었다.“당연히 아니지.”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아까 그 리스트를 띄웠다.“질문 몇 개만 할게.”기성훈은 화면을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안색이 점점 사색이 되어갔다.내가 입을 열었다.“내가 스물다섯 살 생일날, 널 밤새도록 기다렸어. 임시 야근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그날 실제로는 어디 있었어?”기성훈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난...”“솔직히 말해.”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장미랑 영화 보러 갔어.”“왜?”“그날 장미가 기분이 안 좋아서.”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표에서 그 칸에 줄을 그었다.“7주년 기념일 때 나한테 팔찌 선물해 줬지. 그런데 알고 보니까 이장미도 똑같은 게 있더라고. 너 그때 무슨 생각이었어?”기성훈이 눈을 피하며 횡설수설했다.“난 별생각 없었어.”“그래?”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그럼 왜 이장미 건 한정판 기프트 박스고, 내 건 점원이 대충 담아준 흔해 빠진 일반용이었는데?”기성훈의 낯빛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한참 동안 침묵하던 그가 쉰 목소리로 쥐어짜듯 뱉었다.“장미가 그 포장이 마음에 든다고 해서... 그래서...”“더 좋은 걸 걔한테 준 거겠지.”내가 그의 말을 마저 끝맺어 주었다.그는 마치 뺨을 호되게 맞기라도 한 사람처럼 낯빛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나는 질문을 이어갔다.“내가 생리통으로 앓아눕던 그날 밤, 회사에 급한 일이 있다고 했지. 너 그날 이장미한테 간 거 맞지?”기성훈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그래. 장미가 사는 아파트에 단전이 됐는데, 어둠을 무서워하는 애라...”내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나도 아픈 거 엄청 싫어하거든. 하지만 너는 내 아픔 따위 관심조차 없었잖아.”기성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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