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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봄날에, 우리는 헤어졌다: Chapter 1 - Chapter 9

9 Chapters

제1화

시곗바늘이 몇 바퀴나 돌아간 끝에 마침내 문손잡이에서 작게 딸깍 소리가 들렸다.정이준이 돌아왔다.늘 그랬듯이 내게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팔을 뻗어 외투를 걸어 둔 뒤 정이준은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져 잠들었다.정이준의 몸에서 낯선 향수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몸을 뒤집자 정이준의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울리기 시작했다.휴대폰을 집어 들어 확인해 보니 최다윤이 보낸 문자가 보였다.[대표님, 오늘 와줘서 너무 감사드려요.][혹시 언니 화난 건 아니겠죠? 그렇다면 다음에 꼭 제가 직접 찾아가서 사과드릴게요.]나는 고개를 숙여 문자를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손가락을 움직여 예전에 두 사람이 주고받은 문자를 확인했다.두 사람은 마치 연인처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눴고 정이준이 답장을 보내는 횟수가 굉장히 많았다.나를 대할 때의 차갑고 무심한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나는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문자를 입력했다.[우리 남편 잠들었어. 그리고 나 화 안 났어.][내일 다시 연락해.]화면을 끈 뒤에는 휴대폰을 침대맡에 내려놓았다.베개를 챙겨 객실로 가서 자려는데 갑자기 정이준이 내 손목을 잡았다. 그 순간 따뜻한 온기가 피부에 전해졌다.나는 멈칫했다.정이준은 눈을 감은 상태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댔다.“다윤아.”정이준의 잘생긴 이목구비를 바라보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그리고 곧 방을 나섰다.다음 날 아침, 정이준이 갑자기 방문을 박차고 들어오더니 소매를 정리하며 낮은 목소리로 내게 따져 물었다.“왜 다윤이한테 그런 말을 한 거야? 다윤이는 아직 어려서 예민한데 그걸 몰라서 그래? 그리고 다윤이는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비서일 뿐이야. 그런데 왜 자꾸 애를 괴롭혀?”나는 시선을 들어 분노에 찬 정이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비서일 뿐이라고? 잠결에 자기 비서 이름을 부르는 대표가 세상에 어디 있어?”정이준은 눈에 띄게 당황하더니 이내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나랑 다윤이는 직장 상사와 부하직원 관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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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나와 정이준의 사이는 점점 틀어졌다.정이준은 한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더 이상 언제 돌아오냐고 묻지 않았다.셋째 날 아침, 정이준의 수행비서 강지원이 나에게 정이준의 스케줄을 알렸다.[사모님, 대표님께서는 며칠 동안 매우 바쁘셨습니다. 오늘 막 S국에서 돌아오셨어요.]나는 답장을 보냈다.[앞으로는 저한테 알려주지 않아도 돼요.]스크롤을 올려 보니 온통 내가 정이준의 소식을 묻던 기록뿐이었다.심지어 정이준보다 강지원에게 연락한 횟수가 훨씬 더 많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강지원에게서 또 문자가 도착했다.[사모님, 혹시 두 분 싸우신 겁니까?]답장을 보내지 않았지만 강지원은 계속해 문자를 보냈다.[대표님은 사모님을 많이 사랑하세요. 그렇지 않았다면 대표님 성격에 먼저 사모님에게 구애하지 않으셨을 거예요.]나는 눈을 깜빡였다.강지원의 말처럼 먼저 애정 공세를 퍼부은 건 정이준이었다.정이준은 냉담한 성격이었지만 예전에는 틈만 나면 나와 같이 있으려고 했고,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면서 예쁘다고 칭찬해 주곤 했다.그러나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강지원의 문자는 계속 이어졌다.[대표님께서는 오늘 사모님 생일인 걸 기억하시고 특별히 선물도 준비하셨어요. 사모님께서 오래전부터 갖고 싶어 하시던 그 팔찌예요.]곧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강지원의 말대로 한때 갖고 싶다고 정이준에게 여러 번 얘기했던 그 팔찌였다.그걸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 순간 나는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나는 한숨을 내쉰 뒤 주방으로 가서 정이준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준비했다.늦은 밤이 되어서야 돌아온 정이준은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곧장 서재 쪽으로 걸어갔다.나는 정이준을 불러세웠고, 정이준은 얼굴을 찡그리며 나를 돌아봤다.“왜?”차가운 어조였다.숨이 조금 가빠진 나는 식탁을 꽉 움켜쥐며 물었다.“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정이준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날인데?”그 말에 마음이 갈기갈기 찢겼다.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내 생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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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정이준은 아침 일찍 외출해서 저녁 늦게 돌아오기 시작했다.나는 낮 동안 가져갈 짐을 하나씩 정리했고, 그렇게 우리는 한동안 서로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정리가 끝나갈 무렵 갑자기 정이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휴대폰 화면에 뜬 이름을 바라본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정이준은 늘 그렇듯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옷이 젖었어. 옷장 맨 오른쪽에 검은 정장 하나 있으니까 그거 좀 가져다줘.”나는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손을 뻗어 그 정장을 만져보는데 딱딱한 무언가가 만져졌다.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그때 수화기 너머에서 정이준이 낮게 웃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봤어?”나는 멍한 표정으로 그것을 꺼냈다.그건 반지였다.그것을 힘주어 꽉 움켜쥐자 반지에 박힌 다이아몬드가 손바닥을 파고들어 통증이 느껴졌다.나는 목이 메어 말했다.“이건...”한결같이 무심한 말투였지만 평소보다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정이준이 말했다.“마음에 들어?”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나는 입술만 달싹일 뿐 바로 대답하지는 않았다.마음속에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치솟아 오른 탓이었다.“왜 갑자기 이런 걸...”그 순간 정이준이 입을 열었다.“다윤이한테 고마워하도록 해. 사실 그거 다윤이 아이디어거든. 다윤이는 마음씨가 착해서 나한테 네게 사과하고 용서를 빌라고 했어. 다윤이 부탁인데 거절하기도 그래서 받아들인 거야.”나는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넋이 나간 채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마음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갔다.손안에 든 반지를 바라보고 있자니 목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만 같아 옷자락을 꽉 움켜쥔 채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정이준, 이렇게까지 나를 모욕해야겠어?”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잠시 후 정이준이 중얼대는 소리와 최다윤이 작게 신음을 내뱉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정이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파? 날 상대로 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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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정이준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듯한 모양이었다.“왜 그래?”나는 사진을 찍어 정이준에게 보냈다.“잘 봐.”정이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잘못 배송됐네.”“뭐? 지금 잘못 배송된 게 문제야? 네가 그 여자랑 결혼사진을 찍은 건 아무 문제 없어?”정이준은 난처한 듯 말했다.“회사로 와. 내가 다 설명할게.”전화를 끊은 뒤 나는 가방을 들고 곧장 집을 나섰다.심장이 욱신거리며 아팠다.정이준은 단 한 번도 내가 회사에 가는 걸 허락한 적이 없었다. 내가 회사에 가면 보기 좋지 않다는 게 그 이유였다.그런데 처음 회사로 가도 된다고 허락받은 것이 이런 일 때문일 줄은 몰랐다.회사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타자 한 직원이 나를 가로막았다.“외부인은 사무실에 들어가실 수 없어요. 응접실에서 기다려주세요.”내가 설명하려는 순간 최다윤이 갑자기 나타나서 나를 데리고 사무실로 들어갔다.“괜찮아요. 제가 아는 분이에요.”최다윤은 물 만난 물고기 같았다. 마치 이곳의 안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나를 이끌고 사무실로 들어간 최다윤은 내게 물 한 잔을 따라주며 말했다.“대표님은 지금 회의 중이에요. 잠깐만 기다려주세요.”나는 물을 건네받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소파에는 정이준과 최다윤의 커플 잠옷이 있었고, 정이준이 쓰는 컵도 어느새 커플 컵이 되어 있었다.그리고 책상 위에는 두 사람이 함께 만든 수공예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나는 참지 못하고 냉소를 흘렸다.결혼 후 나는 여러 차례 정이준에게 함께 공방에 가서 직접 수공예품을 만들어 보자고 했는데 정이준은 매번 내켜 하지 않았다.그러면서 시간이 없다고 하거나, 다음에 가자는 핑계만 반복했고 결국에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나는 그제야 깨달았다.정이준은 단지 나와 함께 가는 것이 싫었을 뿐이었다.최다윤은 신경 쓰지 않고 웃는 얼굴로 물건을 정리했다.“언니, 오해하지 마세요. 저랑 대표님은 아무 사이 아니에요.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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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성큼성큼 걸어가 주위를 둘러본 정이준은 그 순간 불안감에 휩싸였다.정이준은 황급히 몸을 돌려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달려가 간호사 한 명을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이 병실에 있던 환자는 어디로 갔죠?”간호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선생님, 진정하세요.”간호사는 병실을 힐끗 바라본 뒤 말을 이어갔다.“환자분은 퇴원 절차를 밟으시고 오늘 아침 일찍 떠나셨어요.”정이준은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간호사를 붙잡고 있던 손에 천천히 힘이 풀렸고,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떠났다고요? 다친 몸으로 어떻게 떠난다는 거죠? 그리고 어디로 간 거예요?”간호사는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저희가 설득해 봤는데 소용없었어요. 끝까지 퇴원하겠다고 고집을 부리셔서 의사 선생님도 결국 막지 못하셨어요.”정이준은 침을 꿀꺽 삼킨 뒤 심호흡을 했다.무거운 발걸음으로 다시 병실로 돌아간 정이준은 떨리는 손으로 침대 위에 놓여 있던 이혼합의서를 집어 들었다.그리고 곧 눈빛이 어두워졌다.임서빈이 떠날 리가 없었다. 어떻게 자신을 버리고 떠날 수 있다는 말인가?정이준은 감정이 격해진 탓에 팔뚝의 핏줄까지 불거졌다.얼굴을 일그러뜨린 정이준은 애써 불안함을 억누르며 빠르게 병원을 나섰고, 비틀대며 집에 도착한 뒤에는 힘주어 문을 열었다.그러나 집 안은 텅 비어 있었고 임서빈의 물건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마치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반대로 거실 벽에 걸린 정이준과 최다윤의 결혼사진은 매우 눈에 띄었다.정이준은 흠칫하더니 이내 그곳으로 달려가 결혼사진을 벽에서 거칠게 떼어내 바닥에 내팽개쳤다.휑한 벽을 바라보던 정이준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여기에는 원래 서빈이랑 같이 찍었던 사진이 있었는데...”특별한 의미가 있는 사진도 아닌데 임서빈은 그것을 무척 소중히 여겼고, 며칠에 한 번씩 먼지를 닦아주면서 사진을 가리키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곤 했었다.정이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집 안을 샅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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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정이준은 온몸이 굳은 사람처럼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듣고 귀를 기울였다.정이준은 마음이 조금 놓여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대로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곧이어 정이준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돌아왔어?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그러나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미처 내뱉지 못한 말들이 목구멍에 턱 걸렸다.정이준의 눈동자에는 깊은 절망이 어려 있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 여기에는 왜 온 거야?”최다윤은 미소 띤 얼굴로 빠르게 정이준에게 다가가더니 손을 뻗어 정이준의 팔을 끌어안았다.“대표님 보고 싶어서 왔죠. 저한테 언제든 이곳에 와도 된다고 하셨잖아요.”정이준은 최다윤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간 채 슬며시 자신의 팔을 빼냈다.“너는 지금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어야지.”최다윤은 입을 비죽거리면서 계속해 정이준과 가까이 붙어 있으려고 했다.최다윤은 불만스러운 듯 투덜거렸다.“대표님께서 그러셨잖아요. 저는 쉬고 싶으면 언제든 쉬어도 된다고 말이에요. 저는 낮에도 밤에도 일만 하고 싶지는 않다고요.”최다윤은 그렇게 말하면서 정이준을 힐끗 보더니 일부러 치맛자락으로 정이준의 바짓단을 건드렸다.“대표님, 이 옷 어때요? 예뻐요? 저한테도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요?”고개를 든 정이준은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팔을 뻗어 최다윤의 손목을 잡았다.“네가 왜 이걸 입고 있어? 이건 내가 서빈이를 위해 산 옷이잖아. 다 알면서 왜 하필 이걸 입은 거야?”최다윤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저 아파요... 저는 그냥 언니 대신 입어 본 것뿐이에요...”최다윤은 정이준의 손을 힘껏 뿌리친 뒤 자신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정이준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최다윤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났다.그러나 최다윤은 그런 기색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굴었다. 고개를 든 최다윤은 한쪽에 놓여 있는 결혼사진을 보더니 잔뜩 들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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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정이준을 떠난 뒤 나는 남쪽의 한 도시로 향했고, 그곳의 병원에서 한동안 입원 치료를 받았다.퇴원한 뒤에는 근처 도시들을 여행하며 지냈다.그러던 어느 날 기차역에서 나오는데 캐리어가 고장 나버렸다. 몸이 다 나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무거운 짐을 들고 다니기는 어려웠다.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갑자기 짐을 들고 있던 손이 가벼워졌다.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감사합니다.”그러나 짐을 들어준 사람이 몇 달 만에 다시 마주한 정이준임을 확인한 순간 나는 완전히 넋이 나가버렸다.정이준은 한 손으로 내 캐리어를 들고서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천만에.”그러나 나는 이내 감정을 추스르고 평정심을 되찾았다.나는 택시를 타고 곧장 떠날 생각이었다.그런데 정이준이 갑자기 나를 붙잡더니 망설임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나를 봤는데... 하고 싶은 말은 없어?”나는 고개를 저은 뒤 시선을 내리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정이준은 다급히 내게 다가오더니 손을 뻗어 내 휴대폰 화면을 가렸다.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내 캐리어를 번쩍 들었다.“어디로 가? 내 차가 바로 근처에 있어. 데려다줄게.”정이준의 넓은 등판과 조금 다급해 보이는 뒷모습을 바라본 나는 시선을 내리깔고 조용히 정이준을 따라나섰다.차 앞에 선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뻗어 뒷좌석의 문을 잡아당겼다.그러나 문이 열리지 않았다.고개를 들자 차창 너머의 정이준과 시선이 마주쳤다.나는 문을 가리켰다.“문이 안 열리는데.”정이준의 검은 눈동자에서 수많은 감정들이 일렁이고 있었다.한참 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정이준은 마침내 딸깍 소리와 함께 문을 열어 주었다.차 안에서 정이준은 나를 바라보지 않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서빈아, 조수석에는 아직 네 이름이 붙어 있어.”나는 잠시 당황했다. 정이준의 말대로 조금 색이 바랜 내 이름이 적힌 스티커가 눈에 들어왔다.그건 정이준이 몇 안 되게 내게 허락해 준 특별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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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정이준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차 안에는 긴 침묵만이 흘렀다.이런 상황이 계속 이어질 거라고 생각될 때쯤 정이준이 갑자기 문을 열었다.나는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오늘 고마워. 시간 되면 나중에 밥 한 번 살게.”나는 캐리어를 들고 침착하게 위층으로 올라갔다.집에 도착한 뒤에는 빠르게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렸다.그러고 나서 베란다로 걸어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이준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창문은 내려져 있었고 한 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었다.정이준은 아주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나는 몸을 돌린 뒤 커튼을 닫았다.다음 날, 나는 점심이 되어서야 깨어났다.오후가 되어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니 정이준이 밖에 서 있는 게 보였다.정이준은 조금 초췌한 모습으로 식재료가 든 봉투를 들고 있었다.아침 일찍부터 와 있었던 모양이었다.나의 의아한 눈빛을 본 정이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장을 좀 봐 왔어. 내가 밥해 줄게... 그리고 네가 예전에 같이 하고 싶다고 했던 것도 다 같이 해 줄게.”나는 움직이지 않았다.“이제는 안 바쁜 거야?”정이준은 찔리는 게 있는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회사 일은... 급하지 않아. 그리고 요즘은 별로 안 바빠.”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예전에는 제발 시간 좀 내달라고, 나랑 같이 있어 주면 안 되냐고 울면서 정이준에게 애원했었다.그럴 때마다 정이준은 철이 없다며 나를 나무랐다.그런데 내가 떠나고 나서야 정이준은 일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은 모양이다.그러나 이제는 필요 없었다.나는 고개를 들어 차분하게 정이준을 바라봤다.“괜찮아. 회사 일이 중요하지. 빨리 돌아가.”정이준은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아니야... 나는 그냥 너랑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어 주고 싶어.”내가 정이준을 사랑했을 때는 세상 모든 일이 나보다 먼저였다.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더 씁쓸하게 느껴졌다.나는 더 이상 정이준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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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나는 정이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떴다.그리고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레스토랑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휴대폰을 꺼내 집 안 CCTV를 켜보니 정이준이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들이 놓인 식탁 앞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그 광경에 잠시 코끝이 시큰해졌다.예전의 내 모습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입장이 완전히 뒤바뀐 지금은 그저 과거의 내가 안쓰럽게 느껴질 뿐이었다.식사를 끝낸 뒤에는 백화점을 둘러보며 쇼핑을 했다.어느새 날이 어두워졌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나는 집에 도착했다.정이준은 집에 없었지만 식탁 위 음식들은 그대로였다.정이준은 음식을 한가득 만들어 놓았다. 제법 정성을 쏟은 듯했다.나는 음식을 맛보지 않았고 청소 도우미를 불러 음식들을 전부 처리했다.그 이후로 정이준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덕분에 내 일상도 한결 자유로워지고 편안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저녁때쯤 최다윤이 나를 찾아왔다.몸은 눈에 띄게 야위었고 얼굴도 많이 수척해진 모습이었다.최다윤은 비틀거리며 나를 향해 걸어오더니 다짜고짜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꺼져. 멀리 꺼져버리라고! 다시는 정이준을 유혹하지 마! 정이준이 그랬어. 자기는 내 거라고. 그런데 왜 정이준을 내게서 빼앗으려는 거야?”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최다윤을 상대해 줄 생각은 없었기에 문밖으로 밀어내며 말했다.“나가.”그러나 최다윤은 그 말에 자극을 받은 건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더니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정이준을 돌려줘. 정이준은 내 거야! 정이준은 나를 사랑한다고, 오직 나만 사랑한다고 그랬어. 심지어 나한테 모든 걸 다 얘기해줬어. 그런데 어떻게 아직도 당신을 좋아할 수 있겠어?”고개를 번쩍 든 최다윤의 눈빛은 섬뜩할 정도로 공허했다.최다윤은 씩 웃으며 말했다.“정이준은 당신보다 나랑 더 많이 잤어. 그러니까 당연히 나랑 함께 있어야지...”나는 최다윤을 밀어낸 뒤 안타까운 눈빛으로 최다윤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진짜 미친 거야?”그러나 최다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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