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남편은 성욕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고 잠자리를 가질 때도 늘 시간을 철저히 정해 두었다. 그런데 오늘 한창 관계를 맺고 있던 도중 남편의 휴대폰이 울렸다. 특정인의 연락에만 울리도록 설정해 둔 벨 소리였다. 수화기 너머로 정이준의 비서 최다윤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대표님, 저희 집 수도관이 터졌어요. 저 너무 무서워요...” 정이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난처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 정이준을 붙잡았다. “오늘은 너무 늦었어. 그리고 우리 아직...” “다윤이는 기댈 곳 하나 없는 애야. 그리고 나는 다윤이 상사야. 모르는 척할 수 없어.” 정이준은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덤덤히 손을 빼낸 뒤 셔츠 깃을 정리하며 덧붙였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다 끝났어. 남은 시간은 다음에 채워 줄게.”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정이준에게 있어 나와 잠자리를 가지는 건 의무에 불과했던 것이다. 정이준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최다윤에게서 문자가 왔다. 최다윤은 내 남편의 어깨에 기대있었다. [언니, 정말 죄송해요. 너무 무서워서 그랬어요. 대표님한테 다음에는 꼭 언니한테 잘해주라고 말씀드릴게요.] [오늘은 일단 장난감으로라도 해결하세요.] 문자를 읽은 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평온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를 하고, 침대 시트를 갈고, 새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정이준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View More나는 정이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떴다.그리고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레스토랑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휴대폰을 꺼내 집 안 CCTV를 켜보니 정이준이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들이 놓인 식탁 앞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그 광경에 잠시 코끝이 시큰해졌다.예전의 내 모습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입장이 완전히 뒤바뀐 지금은 그저 과거의 내가 안쓰럽게 느껴질 뿐이었다.식사를 끝낸 뒤에는 백화점을 둘러보며 쇼핑을 했다.어느새 날이 어두워졌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나는 집에 도착했다.정이준은 집에 없었지만 식탁 위 음식들은 그대로였다.정이준은 음식을 한가득 만들어 놓았다. 제법 정성을 쏟은 듯했다.나는 음식을 맛보지 않았고 청소 도우미를 불러 음식들을 전부 처리했다.그 이후로 정이준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덕분에 내 일상도 한결 자유로워지고 편안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저녁때쯤 최다윤이 나를 찾아왔다.몸은 눈에 띄게 야위었고 얼굴도 많이 수척해진 모습이었다.최다윤은 비틀거리며 나를 향해 걸어오더니 다짜고짜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꺼져. 멀리 꺼져버리라고! 다시는 정이준을 유혹하지 마! 정이준이 그랬어. 자기는 내 거라고. 그런데 왜 정이준을 내게서 빼앗으려는 거야?”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최다윤을 상대해 줄 생각은 없었기에 문밖으로 밀어내며 말했다.“나가.”그러나 최다윤은 그 말에 자극을 받은 건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더니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정이준을 돌려줘. 정이준은 내 거야! 정이준은 나를 사랑한다고, 오직 나만 사랑한다고 그랬어. 심지어 나한테 모든 걸 다 얘기해줬어. 그런데 어떻게 아직도 당신을 좋아할 수 있겠어?”고개를 번쩍 든 최다윤의 눈빛은 섬뜩할 정도로 공허했다.최다윤은 씩 웃으며 말했다.“정이준은 당신보다 나랑 더 많이 잤어. 그러니까 당연히 나랑 함께 있어야지...”나는 최다윤을 밀어낸 뒤 안타까운 눈빛으로 최다윤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진짜 미친 거야?”그러나 최다윤은
정이준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차 안에는 긴 침묵만이 흘렀다.이런 상황이 계속 이어질 거라고 생각될 때쯤 정이준이 갑자기 문을 열었다.나는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오늘 고마워. 시간 되면 나중에 밥 한 번 살게.”나는 캐리어를 들고 침착하게 위층으로 올라갔다.집에 도착한 뒤에는 빠르게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렸다.그러고 나서 베란다로 걸어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이준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창문은 내려져 있었고 한 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었다.정이준은 아주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나는 몸을 돌린 뒤 커튼을 닫았다.다음 날, 나는 점심이 되어서야 깨어났다.오후가 되어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니 정이준이 밖에 서 있는 게 보였다.정이준은 조금 초췌한 모습으로 식재료가 든 봉투를 들고 있었다.아침 일찍부터 와 있었던 모양이었다.나의 의아한 눈빛을 본 정이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장을 좀 봐 왔어. 내가 밥해 줄게... 그리고 네가 예전에 같이 하고 싶다고 했던 것도 다 같이 해 줄게.”나는 움직이지 않았다.“이제는 안 바쁜 거야?”정이준은 찔리는 게 있는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회사 일은... 급하지 않아. 그리고 요즘은 별로 안 바빠.”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예전에는 제발 시간 좀 내달라고, 나랑 같이 있어 주면 안 되냐고 울면서 정이준에게 애원했었다.그럴 때마다 정이준은 철이 없다며 나를 나무랐다.그런데 내가 떠나고 나서야 정이준은 일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은 모양이다.그러나 이제는 필요 없었다.나는 고개를 들어 차분하게 정이준을 바라봤다.“괜찮아. 회사 일이 중요하지. 빨리 돌아가.”정이준은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아니야... 나는 그냥 너랑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어 주고 싶어.”내가 정이준을 사랑했을 때는 세상 모든 일이 나보다 먼저였다.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더 씁쓸하게 느껴졌다.나는 더 이상 정이준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정
정이준을 떠난 뒤 나는 남쪽의 한 도시로 향했고, 그곳의 병원에서 한동안 입원 치료를 받았다.퇴원한 뒤에는 근처 도시들을 여행하며 지냈다.그러던 어느 날 기차역에서 나오는데 캐리어가 고장 나버렸다. 몸이 다 나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무거운 짐을 들고 다니기는 어려웠다.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갑자기 짐을 들고 있던 손이 가벼워졌다.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감사합니다.”그러나 짐을 들어준 사람이 몇 달 만에 다시 마주한 정이준임을 확인한 순간 나는 완전히 넋이 나가버렸다.정이준은 한 손으로 내 캐리어를 들고서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천만에.”그러나 나는 이내 감정을 추스르고 평정심을 되찾았다.나는 택시를 타고 곧장 떠날 생각이었다.그런데 정이준이 갑자기 나를 붙잡더니 망설임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나를 봤는데... 하고 싶은 말은 없어?”나는 고개를 저은 뒤 시선을 내리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정이준은 다급히 내게 다가오더니 손을 뻗어 내 휴대폰 화면을 가렸다.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내 캐리어를 번쩍 들었다.“어디로 가? 내 차가 바로 근처에 있어. 데려다줄게.”정이준의 넓은 등판과 조금 다급해 보이는 뒷모습을 바라본 나는 시선을 내리깔고 조용히 정이준을 따라나섰다.차 앞에 선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뻗어 뒷좌석의 문을 잡아당겼다.그러나 문이 열리지 않았다.고개를 들자 차창 너머의 정이준과 시선이 마주쳤다.나는 문을 가리켰다.“문이 안 열리는데.”정이준의 검은 눈동자에서 수많은 감정들이 일렁이고 있었다.한참 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정이준은 마침내 딸깍 소리와 함께 문을 열어 주었다.차 안에서 정이준은 나를 바라보지 않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서빈아, 조수석에는 아직 네 이름이 붙어 있어.”나는 잠시 당황했다. 정이준의 말대로 조금 색이 바랜 내 이름이 적힌 스티커가 눈에 들어왔다.그건 정이준이 몇 안 되게 내게 허락해 준 특별한 일이었다.
정이준은 온몸이 굳은 사람처럼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듣고 귀를 기울였다.정이준은 마음이 조금 놓여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대로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곧이어 정이준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돌아왔어?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그러나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미처 내뱉지 못한 말들이 목구멍에 턱 걸렸다.정이준의 눈동자에는 깊은 절망이 어려 있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 여기에는 왜 온 거야?”최다윤은 미소 띤 얼굴로 빠르게 정이준에게 다가가더니 손을 뻗어 정이준의 팔을 끌어안았다.“대표님 보고 싶어서 왔죠. 저한테 언제든 이곳에 와도 된다고 하셨잖아요.”정이준은 최다윤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간 채 슬며시 자신의 팔을 빼냈다.“너는 지금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어야지.”최다윤은 입을 비죽거리면서 계속해 정이준과 가까이 붙어 있으려고 했다.최다윤은 불만스러운 듯 투덜거렸다.“대표님께서 그러셨잖아요. 저는 쉬고 싶으면 언제든 쉬어도 된다고 말이에요. 저는 낮에도 밤에도 일만 하고 싶지는 않다고요.”최다윤은 그렇게 말하면서 정이준을 힐끗 보더니 일부러 치맛자락으로 정이준의 바짓단을 건드렸다.“대표님, 이 옷 어때요? 예뻐요? 저한테도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요?”고개를 든 정이준은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팔을 뻗어 최다윤의 손목을 잡았다.“네가 왜 이걸 입고 있어? 이건 내가 서빈이를 위해 산 옷이잖아. 다 알면서 왜 하필 이걸 입은 거야?”최다윤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저 아파요... 저는 그냥 언니 대신 입어 본 것뿐이에요...”최다윤은 정이준의 손을 힘껏 뿌리친 뒤 자신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정이준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최다윤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났다.그러나 최다윤은 그런 기색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굴었다. 고개를 든 최다윤은 한쪽에 놓여 있는 결혼사진을 보더니 잔뜩 들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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