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녀가 가져간 나의 계절 / 챕터 11 - 챕터 20

그녀가 가져간 나의 계절의 모든 챕터: 챕터 11 - 챕터 20

24 챕터

제11화

괴로워하는 박경언을 보며 심혜민은 속으로 번지는 기쁨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흥분으로 손끝까지 떨릴 정도였다.‘심가영이 드디어 갔어!’‘언니라는 이름만 앞세워 늘 내 위에 있던 눈에 거슬리던 여자가...’‘이제 나와 경언 오빠의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어.’‘이제 경언 오빠 눈에는 나만 남을 거야.’‘정식으로 연인이 되고, 언젠가는 아내가 되는 사람도 나야.’하지만 심혜민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예상했던 대로 심가영의 부재는 박경언에게서 생기까지 모조리 빼앗아 갔다.문제는 박경언이 심혜민이 바란 것처럼 마음을 심혜민에게 돌리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오히려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박경언은 술에 의지하기 시작했다.회사에도 제시간에 나가지 않았고, 출근하는 날조차 술 냄새를 풍길 때가 잦았다.퇴근 뒤에는 술집을 전전하거나, 술을 한가득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와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마셨다.자신감 넘치고 침착하던 박 대표는 온데간데없었다. 수염도 제대로 깎지 않은 채 텅 빈 눈으로 하루를 버티는 초라한 남자만 남았다.심혜민은 ‘곁에서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이미 박경언의 집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매일 공들여 꾸미고 음식을 차렸다. 다정함과 살뜰함으로 박경언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했다.박경언은 그런 심혜민을 쳐다보지도 않았다.집에 돌아오면 신발조차 제대로 벗지 않은 채, 심혜민이 준비한 음식도, 달콤한 미소도 그대로 지나쳐서 곧장 침실로 들어가 몸을 침대에 내던졌다.술기운에 반쯤 잠들고 반쯤 깨어 있는 상태가 되면, 입술 사이로 반복해서 흘러나오는 이름은 늘 하나였다. “가영아... 가영아... 미안해...”“돌아와... 제발 돌아와 줘...”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심혜민의 미소는 차갑게 굳어졌고, 가슴속의 증오심은 그만큼 더 자랐다.심혜민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별짓을 다 했다. 우울 증상이 심해진 척까지 하며 동정을 끌어냈다. 그런데 돌아온 건 이런 결과였다.심가영은 이미 떠났는데도 유령처럼 박경언의 마음을 꽉 붙들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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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심혜민의 손끝이 박경언의 피부에 닿자 박경언이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처음에는 술과 약물 탓에 초점이 흐릿했지만, 이내 눈앞에 누가 있는지 알아봤다.그토록 그리워하던 얼굴이 아니었다.속에서 강한 거부감과 혐오가 치밀어 올랐다.“꺼져!” 박경언은 남은 힘을 모아 심혜민을 거칠게 밀어냈다.예상하지 못한 힘에 밀린 심혜민은 비틀거리다가 카펫 위에 주저앉았다.심혜민은 놀란 채 박경언을 올려다봤다. 박경언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탁하게 흐려진 눈빛 속에서도 심혜민을 향한 거부와 냉기는 선명했다.“오빠, 나는...” 심혜민이 다시 다가가려고 했다.“손대지 마!” 박경언이 갈라진 목소리로 낮게 으르렁거렸다. 말에는 일말의 여지도 없었다.“넌 가영이 아니야... 영원히 가영이 될 수도 없어.”더는 심혜민을 보지 않고 비틀거리며 침실 안 욕실로 들어간 박경언은 문을 세게 닫고 잠갔다. 곧 안쪽에서 거센 구토 소리가 들려왔다.심혜민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닫힌 욕실 문만 바라봤다. 차가운 바닥의 냉기가 몸속으로 스며들었다.심혜민의 안색이 피가 빠져나가듯 창백해졌다.완벽한 실패였다.약까지 썼는데도 박경언은 무의식 깊은 곳에서 심혜민을 거부했다.참을 수 없는 모욕감과 완벽한 실패감이 심혜민을 덮쳤고, 뒤이어 걷잡을 수 없는 증오심이 솟구쳤다.심혜민은 박경언의 냉정함도 미웠지만 심가영은 더 미웠다. ‘전부 심가영 때문이야. 떠나 놓고도 날 끝까지 방해해!’‘절대 포기 안 해.’ 심혜민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깊숙이 파고들 정도로.‘경언 오빠는 내 거야. 내 사람이어야 해.’‘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반드시 차지할 거야.’‘심가영이 가졌던 건 전부 내가 빼앗을 거야!’닫힌 욕실 문을 바라보던 심혜민은 처음으로 분명히 깨달았다. 박경언의 마음속에 들어가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울지도 몰랐다.‘심가영’이라는 오래된 그림자는 이미 박경언의 마음 깊숙이 뿌리내렸다. 어쩌면 영영 뽑히지 않을 만큼.욕실 안에서는 한참 동안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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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언니가 남긴... 유품이래...”심혜민은 흐느낌에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척했다.박경언의 몸이 크게 굳어지면서 동공이 확 좁아졌다.박경언은 봉투를 거칠게 낚아챘다. 너무 세게 움직인 탓에 손등의 수액 바늘이 빠질 듯 흔들렸고 피가 배어 나왔지만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자 얇은 종이 두 장이 들어 있었다.첫 장은 의료기관에서 발급하는 형식의 ‘사망진단서’였다.[성명: 심가영.사망 원인: 추락으로 인한 중증 두부 손상 및 다발성 장기 파열.사망일: 박경언이 위출혈로 입원하기 며칠 전.장소: 설요시 하진면 월담리 망월절벽.]박경언의 호흡이 끊어지듯 멎었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종이에 적힌 글자를 미친 듯이 쫓았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달궈진 쇳조각처럼 남자의 눈과 가슴을 지졌다.‘아니야... 말도 안 돼. 심가영이 어떻게...’박경언은 떨리는 손으로 두 번째 종이를 집어 들었다.편지였다. 심가영의 필체였다. 박경언은 심가영의 글씨를 너무나 잘 알았다. 분명 심가영이 쓴 것처럼 보였지만, 획마다 기운이 빠진 듯 흐려져 있었다.[경언아, 네가 이 편지를 읽을 때쯤이면 나는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거야.나 때문에 슬퍼하지 마. 어쩌면 이게 나한테는 해방일지도 몰라.20년이 넘도록 살아오면서 너무 지쳤어.사랑도, 미움도 이제 다 내려놨어.그래도 끝까지 마음에 걸리는 건 너와 혜민이.그리고 미안해. 내 성격에 문제가 있었어. 너무 강한 척했고, 말도 하지 않아서 너한테 많은 부담을 줬어.너와... 혜민 사이의 일도 이제는 원망하지 않아.혜민은 젊고 밝고 생기가 넘치잖아. 나보다 너한테 더 잘 맞는 사람일지도 몰라.내가 떠난 뒤 바라는 건 하나뿐이야. 혜민을 잘 돌봐 줘.혜민은 이 세상에 남은 내 유일한 동생이고, 하나뿐인 가족이야.아버지와 어머니도 혜민에게 빚이 있고, 나도... 좋은 언니가 되지 못했어.혜민은 어릴 때부터 불안이 많은 아이였고 지금은 아프기까지 하잖아. 마음이 놓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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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박경언은 치료를 성실히 받고 끼니도 제때 챙기면서, 억지로라도 ‘괜찮은 사람’이 되려고 했다.하지만 예전의 박경언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말수는 더 줄었고 눈에서는 빛이 사라졌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정해진 의무만 수행하는 빈 껍데기처럼 보였다.박경언은 심혜민을 ‘돌보기’ 시작했다. 물질적으로 원하는 건 대부분 들어줬고 곁에 머무는 것도 허락했다.그렇다고 심혜민을 바라보는 눈에 온기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무거운 짐을 등에 진 사람처럼 무감각한 시선뿐이었다.박경언이 살아가는 이유는 심가영의 ‘마지막 부탁’을 지키는 일 하나만 남은 듯했다.심혜민은 마침내 ‘떠난 언니가 맡긴 동생’,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명분으로 박경언 곁에 단단히 자리 잡을 수 있었다.박경언이 제공하는 넉넉한 생활을 누리며, 바깥에서는 차츰 자신을 박경언의 ‘약혼녀’라고 소개하기 시작했다.다만 깊은 밤, 옆에서 잠든 박경언이 꿈속에서도 미간을 구기면서 심가영의 이름을 무의식적으로 부를 때면 심혜민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얻은 건 박경언의 몸뿐이었다.박경언의 사랑도, 고통도, 마음도 모두 위조된 유서와 함께 죽었다고 믿는 심가영에게 묻혀 있었다.심혜민은 가장 악독한 거짓말로 차가운 감옥을 만들었다. 박경언을 감옥에 가뒀고, 동시에 자기 자신도 그 안에 가뒀다.그토록 애써 빼앗아 낸 ‘승리’에는 허무와 절망만 가득했다.문제의 ‘사고’는 한 기업 행사 뒤에 벌어졌다.박경언은 사업 관계자들과의 자리에서 어쩔 수 없이 술을 여러 잔 마셨다. 예전보다 술도 약해진 데다가 마음까지 짓눌린 상태라 금세 취기가 올랐다.마침 심혜민이 ‘우연히’ 박경언을 데리러 왔다....다음 날 아침, 박경언은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 속에서 눈을 떴다.창으로 들어오는 빛에 눈이 부셔서 손을 들어 가리려다가, 따뜻하고 매끈한 피부에 손끝이 닿았다.박경언은 눈을 번쩍 떴다. 얼음물 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었다.곁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심혜민이 박경언의 품 안에 웅크린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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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심혜민은 마침내 바라던 것을 얻었다.심혜민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크고 화려한 결혼식을 열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자신이야말로 박경언의 정식 아내라는 사실을 모두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박경언은 반대하지 않았다. 해야 할 업무 하나를 처리하듯 심혜민의 요구를 전부 받아들였다. 웨딩홀은 최고급으로 꾸며졌고 드레스는 값비싼 맞춤 제작품이었다. 수많은 하객이 몰렸고, 연예·경제 매체까지 취재를 나왔다....결혼식 날, 웨딩홀 안에는 잔잔한 연주가 울려 퍼졌다.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심혜민은 환하게 웃으면서, 박경언의 팔에 손을 얹고 꽃잎이 깔린 버진로드를 걸었다.객석에서는 주유림과 친구들이 힘껏 박수를 치며 두 사람을 축하했다.“혜민이 정말 오래 기다렸는데, 드디어 이런 날이 왔네.”“경언이도 이제는 과거에서 나와야지. 언니도 어디에선가 마음을 놓을 거야.”“둘이 잘 어울려. 혜민처럼 밝은 사람이 옆에 있어야 경언이도 좀 웃겠지.”박경언은 주례 앞에 서서 익숙한 결혼 서약을 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 한곳에 머물러 있었다.생각은 아주 먼 곳으로 흘러갔다.언젠가 박경언 역시 심가영과의 결혼식을 셀 수 없이 상상한 적이 있었다.심가영이 웨딩드레스를 입으면 차분하면서도 눈부실 거라고 생각했다. 달빛 아래 핀 하얀 꽃처럼.조금 수줍어하며 자기 손 위에 손을 올려놓을 때의 온기도 상상했다.서로 반지를 끼워 주고 평생을 약속하는 장면도 그렸다.하지만 지금 박경언 옆에서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사람은 심혜민이었다.객석에서 박수치는 사람들은 한때 박경언과 심가영의 앞날도 축복했던 친구들이었다.참 잔인한 운명이었다.이보다 더한 조롱도 없을 것 같았다.“박경언 신랑은 심혜민 신부를 평생의 배우자로 맞아 기쁠 때나 힘들 때나, 넉넉할 때나 어려울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사랑하고 아끼며 함께하겠습니까?”주례의 목소리에 박경언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박경언은 몇 초간 말없이 서 있었다. 곁에서 초조하게 바라보는 심혜민과 하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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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심혜민의 우울증도 거짓이었다.사망진단서도 가짜였다.유서까지 위조였다.그날 밤의 ‘사고’도 심혜민이 파 놓은 함정이었을 가능성이 컸다.박경언은 철저하게 바보가 된 채 심혜민의 손안에서 놀아났다.거짓 유언 하나 때문에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또다시 배신했고, 끝없는 죄책감과 고통 속에서 살았다. 심지어... 이런 여자와 결혼까지 했다.심가영이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에서 혼자 고통을 견디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자신은 심가영을 망가뜨린 장본인과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욱...!”비릿한 느낌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더니 박경언은 피를 토했다. 몸이 크게 흔들리면서 가까스로 벽을 짚었다.증오가 들끓었다. 지옥불 같은 분노가 남아 있던 이성까지 태워 버릴 듯했다.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든 박경언은 거실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환하게 웃는 심혜민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는 싸늘한 잔혹함만 남아 있었다.결혼식의 들뜬 분위기가 아직 집 안에 남아 있었지만, 화려한 신혼집 계단 모퉁이에서는 다른 폭풍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결혼 뒤 떠난 신혼여행은 박경언이 빈틈없이 준비했다.두 사람은 라비엘 제도의 고급 수상 빌라에 머물며 푸른 바다와 맑은 하늘을 즐겼다.박경언은 심혜민이 원하는 건 거의 전부 들어줬고, 겉으로 보기에는 다정하고 세심했다.심혜민의 등에 선크림을 발라 주고, 촛불이 켜진 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스테이크를 잘라 줬다. 심혜민이 피곤하다고 투정하면 해변 길에서 업어 주기도 했다.그리고 그 ‘행복’에 완전히 취해 있었다.박경언의 반듯한 옆모습과 자신에게 보이는 ‘다정함’을 바라볼수록, 심혜민은 승리감이 가슴이 터질 듯했다.‘봐. 10년 사랑이니 평생 못 잊는다느니 해도 결국 남자는 현실을 보게 돼.’‘심가영은 이제 과거야. 지금 경언 오빠 옆에 있는 건 나, 심혜민이라고.’‘나는 젊고 예쁘고, 필요한 말도 잘해.’‘경언 오빠 마음도 조금씩 내가 채우고 있어. 언젠가는 전부 내 것이 될 거야.’“엄마,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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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봉투가 벌어지면서, 안에 든 사진과 서류가 쏟아져 유리 테이블을 가득 덮었다.“설명해.”나지막하고 잔뜩 갈라진 박경언의 목소리는 억누르고 있던 분노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했다. 겨우 한마디였지만 무게는 무거웠다.심혜민은 불안한 눈으로 고개를 숙여 흩어진 서류와 사진을 바라봤다.한 장만 확인했는데도 안색이 백지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입술까지 통제할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사진에는 심혜민이 사망진단서를 위조해 준 브로커와 외진 곳에서 만나서 거래하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다른 장소에서 주유림과 은밀히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있었다.심지어 심혜민이 박경언의 물컵에 흰 가루를 몰래 넣는 모습이 담긴 보안카메라 캡처까지 있었다.서류 내용은 더 치명적이었다.위조를 맡긴 사람에게 돈을 보낸 계좌 이체 내역이 있었다.온라인에서 익명의 계정을 이용해 여론 조작 업체와 접촉하고, ‘심가영이 심혜민을 우울증으로 몰아넣었다’, ‘성격이 폐쇄적이라 동생을 학대했다’는 식의 글을 퍼뜨린 대화 기록과 IP 접속 추적 자료도 있었다.주유림의 계좌로 심혜민이 여러 차례 보낸 ‘사례비’ 내역도 정리돼 있었다.마지막에는 설요시의 작은 마을 도서관에서 심가영이 발급받은 회원증 사본까지 있었다. 발급일은 ‘사망진단서’에 적힌 날짜보다 뒤였다.심가영은 죽지 않았다.부정할 수 없는 증거였다. 심혜민이 치밀하게 꾸민 계략도, 완벽하다고 믿었던 거짓말도 모두 드러났다.심혜민은 눈앞이 핑 도는 듯했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서 비틀거리며 쓰러질 뻔했다.고개를 들자 박경언의 차갑고 잔인한 시선과 마주쳤다. 살갗을 벗겨 내듯 매서운 눈이었다.“아니야... 오빠... 내 말 좀 들어 봐...”“이건... 다 가짜야... 누가 나를 모함하는 거야...”심혜민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한 채 마지막 변명을 쏟아냈다. 이번에 흘리는 눈물은 연기가 아니라 진짜 공포에서 나온 것이었다.“가짜?”박경언이 비웃듯 짧게 웃었다. 그 소리에는 끝없는 조롱과 비애가 섞여 있었다.박경언이 한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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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그렇다... 모두 맞는 말이었다.박경언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심혜민이 경계를 넘어왔을 때 모른 척했던 것도 자신이었다. 잠깐의 편안함과 따뜻함을 탐냈고, 심가영과 심혜민 사이에서 매번 더 약해 보이고 보호가 필요해 보이는 쪽을 골랐다.‘마지막 부탁’이라는 명분으로 스스로를 묶었다고 생각했지만, 마음 한편에는 심가영이 지닌 무거운 과거에서 벗어났다는 아주 작은 안도감이 있었던 건 아닐까?그 사실을 인정하는 일은 어떤 비난보다 더 절망적이고 비참했다.가장 큰 공범은 결국 자기 자신이었다.“닥쳐!” 박경언이 울부짖듯 소리치면서 더는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끊으려고 했다.하지만 심혜민은 아픈 곳을 제대로 찔렀다는 걸 알아차리자 더 심하게 몰아붙였다. 뒤틀린 쾌감이 얼굴에 떠올랐다.“가영 언니가 제일 불쌍한 이유가 뭔지 알아?”“죽는 날까지... 아니, 지금까지도 아마 오빠가 나를 선택했다고, 나를 사랑하게 됐다고 믿고 있을 거야!”“가영 언니는 그 무능한 엄마랑 똑같아. 맨날 참기만 하고 자기 걸 지킬 줄도 모르지! 버림받아도 싸. 아무것도 못 가져도 싸!” “언니는 불쌍한 인간일 뿐이야. 경언 오빠도 똑같고! 둘 다...”“그만해!!”박경언이 참지 못하고 고함을 터뜨렸다. 목소리에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사나운 분노가 뒤엉켜 있었다.더는 한 마디도 듣고 싶지 않았다. 심혜민이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살을 베어 내는 것 같았다.박경언은 바닥에 앉아 일그러진 표정을 짓는 심혜민을 노려봤다. 저 여자가 자신과 심가영의 모든 것을 망가뜨렸고, 이제는 가장 독한 말로 심가영과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까지 짓밟고 있었다.분노와 모든 것을 부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박경언을 덮쳤다.‘입을 다물게 해야 해!’‘대가를 치르게 해야 해!’‘가영이 겪었던 고통을... 심혜민도 겪게 해야 해!’차갑고 잔인한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박경언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자신을 찢어 놓을 듯한 감정을 억눌렀다. 눈빛은 이상하리만큼 차분해졌지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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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설요시의 하늘은 심가영이 지금껏 본 적이 없을 만큼 맑고 높았다.공기에는 소나무 잎의 서늘한 향과 흙냄새가 섞여 있었다. 매연과 콘크리트 냄새가 가득한 대도시와는 전혀 달랐다.심가영은 작은 마을 끝자락에 있는 오래된 단독주택을 빌렸다. 조그만 마당에는 수령이 수십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자작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아침마다 새소리에 눈을 떴고, 창을 열면 짙푸른 산 능선이 멀리 펼쳐졌다.마을 사람들처럼 장에 가서 싱싱한 채소를 사고 직접 밥을 해 먹었다. 가끔은 이웃 아주머니에게 김치 담그는 법을 배우거나, 겨울에 쓸 두툼한 이불을 손질하기도 했다.수첩은 가끔 꺼내 봤지만 ‘박경언’과 ‘심혜민’에 관한 지난 이야기는 남의 인생을 읽는 것처럼 낯설었다. 마음속에도 큰 파문이 일지 않았다.마취하 전기경련치료는 부드러운 지우개처럼 날카롭던 기억의 모서리를 흐리게 만들고 옅은 자국만 남겨 놓았다.심가영은 지금의 고요한 생활이 마음에 들었다.누군가를 위해 계속 희생할 필요도, 버림받을까 불안해할 이유도, 비교와 원망 속에서 살아갈 필요도 없었다.설요시의 맑은 산과 물에 씻긴 것처럼 마음이 한결 넓고 편안해졌다.가슴속에서는 자주 또렷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심가영, 지금이 네 인생에서 가장 좋은 날들이야.’...마을은 크지 않았고 생활의 속도도 느렸다. 심가영이 가지고 온 돈은 적지 않았지만 평생 저축만 쓰면서 살 수는 없었다. 이곳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수입도 얻을 수 있는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돌이 깔린 골목길을 천천히 걷다가 ‘별빛고원’이라는 이름의 펜션을 발견했다.위치는 훌륭했다. 넓은 초원이 바로 앞에 펼쳐져 있었고 멀리 눈 덮인 설산도 보였다. 하지만 손님은 거의 없었고 간판도 낡아 있었다.심가영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프런트 뒤에서는 굵은 니트 스웨터를 입은 남자가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손가락은 생각에 잠긴 듯 책상을 일정하게 두드렸다.27, 8살쯤으로 보였다. 짙은 눈매와 단단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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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전환점은 늦가을에 찾아왔다.그해 설요시 일대에는 수십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대규모 유성우가 예보됐다.맑은 밤하늘을 수많은 별똥별이 길게 가르며 쏟아졌고, 어두운 산자락 위 풍경은 꿈처럼 아름다웠다.심가영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곧 ‘별빛고원에서 만나는 유성우’를 주제로 홍보 문구와 영상을 만들었고, 예전에 함께 일했던 여행 크리에이터들에게 연락했다. ‘별빛고원’ 펜션을 유성우와 별을 보기 좋은 숙소로 알리기 시작했다.‘별빛고원에서 침대에 누워 별똥별을 만나 보세요!’라는 문구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단번에 끌었다.원래 한산했던 마을로 유성우를 보려는 여행객이 몰려들었다.미리 준비를 끝낸 ‘별빛고원’은 매일 만실이었고, 예약은 두 달 뒤까지 꽉 찼다.진우성은 하루 종일 발이 보이지 않을 만큼 바빴고, 심가영도 프런트 응대부터 행사 기획까지 안팎을 뛰어다녔다. 사람이 모자라는 날에는 주방에 들어가서 간단한 음식까지 직접 만들었다.몸은 바빴지만 심가영의 볼에는 건강한 혈색이 돌았고 눈빛은 밝게 빛났다. 자신의 능력이 필요한 곳을 찾았다는 충만함이 표정에 드러났다.성수기가 지나고 정산해 보니, 그 분기 이익은 펜션을 연 뒤 지금까지 벌었던 금액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더 컸다.어느 저녁, 진우성은 심가영을 마당으로 불렀다. 자작나무는 잎을 모두 떨군 뒤였고 굵은 가지가 달빛 아래 힘차게 뻗어 있었다.진우성은 두툼한 봉투 하나를 심가영에게 건넸다.“가영 씨, 이번 분기 성과급이에요.”진우성의 목소리에는 시원한 웃음이 묻어 있었다.“진짜로 가영 씨가 아니었으면 이 펜션, 올겨울도 못 넘겼을 겁니다. 고마워요.”심가영은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었다.고개를 들어 드문드문 밝게 빛나는 별을 바라봤다. 자신의 능력으로 얻어 낸 보상이 손바닥에 실린 무게로 전해지자, 입가에 편안하고 진짜 같은 미소가 번졌다.“저도 고마워요, 저한테 이 일을 맡겨 줬잖아요.”이곳에서 심가영은 누군가의 약혼녀도, 누군가의 언니도 아니었다. 그저 심가영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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