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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오늘 대표님이 저를 안고 여보라고 불렀어요. 이러다 얼마 안 가 사모님 자리도 저한테 내주셔야겠네요.][어젯밤에도 대표님이 저를 울렸어요. 그래도 아침에는 조만간 목걸이 하나 사 줘서 기분 풀어주겠다고 약속했고요. 히히.][사모님 아들이 오늘 직접 꽃 한 송이를 잘라서 저한테 선물해 줬어요. 처음으로 여자한테 꽃을 선물하는 거래요. 사모님도 못 받아 봤다면서요.]...종이마다 하연서가 자랑하듯 늘어놓은 말들이 가득했다. 심지어 류시진과 하연서가 함께 찍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사진들까지 있었다.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공포가 류시진의 온몸을 휩쓸면서 온몸의 피가 그대로 굳는 것만 같았다.‘초연이 나와 하 비서의 일을 이미 알고 있었어.’그런데도 류시진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하지만 지금 류시진에게는 그런 걸 따져 볼 여유조차 없었다. 그저 지금 당장 현초연을 찾고 싶었다.때려도 좋고 욕해도 좋았다.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라고 해도 기꺼이 그럴 수 있었다.현초연을 찾아 다시 자신과 함께 집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류시진은 거의 미친 사람처럼 종이를 한 장 한 장 꼼꼼하게 뒤지면서, 자신이 바람을 피운 증거들 사이에서 어떤 정보든지 조금이라도 찾아내려 했다.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현초연은 단 한 글자조차 남기지 않았고, 류시진에게 남긴 것은 반지 하나뿐이었다.그 반지는 결혼할 당시 두 사람이 직접 디자인하고 사람을 찾아 제작한 반지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이 반지를 빼지 않겠다고 서로 약속했었다.그런데 지금 그 반지가 서류봉투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은...류시진은 더 이상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가장 원하지 않는 답을 확인하게 될까 두려웠다.류모현은 이런 것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엄마가 어디로 갔는지 곧 알게 될 거라며 기뻐하던 아빠가 지금은 온몸에서 절망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얼굴에 가득했던 기쁨은 이미 흔적조차 없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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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이 류시진이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 하연서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번졌다. 하지만 곧 엉망진창인 거실을 떠올리자,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묻어났다. 머릿속으로는 빠르게 변명거리를 찾기 시작했다.“대표님, 어떻게 다시 오셨어요? 오늘 제가...”하연서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류시진의 큰 손이 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얼굴에는 잔뜩 핏줄이 불거져서, 그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기어 나온 악귀와도 같았다.“하연서, 죽고 싶어?”류시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자신의 앞에서는 한없이 연약하고 순진한 척하면서, 현초연과 조금도 다툴 생각이 없는 것처럼 굴었던 하연서였다.근데 이토록 혐오스러운 본색을 숨기고 있을 줄은 몰랐다.죽음의 문턱에 몰린 하연서는 살고자 하는 본능에 두 손으로 필사적으로 류시진의 손을 내리쳤다.하지만 류시진은 조금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손에 들어간 힘은 계속 강해졌고,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는 뼛속까지 스며드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처음부터 경고했잖아. 우리 사이의 일을 초연이한테 절대 들키게 하지 말라고. 그런데 감히 내 뒤에서 초연이한테 다 까발렸어?”“넌 내가 밖에서 데리고 놀던 여자에 불과해. 네 주제도 몰랐다면, 내가 잔인하게 굴어도 원망하지 마.”말을 마친 류시진은 얼음장 같은 얼굴로 하연서를 바닥에 내던졌다. 남자의 온몸에서 싸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하연서는 목을 감싸 쥔 채 격렬하게 기침하며 연신 숨을 들이마셨다.이토록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는 류시진의 모습은 처음 봤다.분명 어젯밤까지만 해도 같은 침대에서 가장 친밀한 스킨쉽을 나눴는데, 지금 류시진은 철천지원수라도 보는 것처럼 하연서를 바라보고 있었다.하지만 하연서는 류시진의 금기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현초연에게 도발적인 메시지를 보냈다는 사실만큼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다.하연서는 절망 어린 눈으로 류시진을 바라봤고,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대표님 눈에는 제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요?”“저는 늘 마음속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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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류시진의 움직임이 멈추더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하연서를 뚫어지게 바라봤다.“정말 내 아이를 가진 게 확실해?”처음 류시진이 이토록 격노한 모습을 보게 되자 하연서는 두려웠다.이대로 류시진에게 버림받을까 두려웠고, 류시진이 자신에게 보복할까 두려웠다.하지만 현초연이 떠났다는 말을 듣는 순간, 하연서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 떠올랐다.‘나한테도 기회가 왔어.’하연서는 어려서부터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폭력을 휘둘렀고 그걸 견디지 못한 어머니는 다른 사람과 도망쳤다.하연서는 홀로 아버지의 폭력과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며 자랐다.대학에 들어가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본 뒤, 하연서는 맹세했다.자신도 반드시 남들 위에 서는 사람이 되어 다시는 무시당하지 않겠다고.석 달 전, 하연서는 L그룹 대표 비서직에 성공적으로 입사했다. 그리고 류시진을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속으로 그를 자신의 목표로 삼았다.세상 사람들이 류시진이 아내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아무리 떠들어도, 하연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바람피우지 않는 남자는 없으니까.밖에서 아내를 사랑하고 아끼는 모습을 보이는 남자일수록 다른 여자의 맛을 보고 나면 헤어 나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그리고 실제로 하연서는 해냈다.평범한 비서에서 류시진의 곁을 차지하는 여자가 되는 데 성공했다.류시진이 얼마나 통 크게 돈을 쓰는지 직접 경험한 뒤, 하연서의 야망은 점점 커졌다.그래서 더는 빛을 볼 수 없는 곳에 숨어 있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류시진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고작 어린아이였기에, 오히려 마음을 사기는 더 쉬웠다.류모현이 회사에 올 때 함께 애니메이션을 봐 주고, 정말 관심이 있는 척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에 맞춰서,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는 간식 몇 가지를 사 주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의지와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이제 남은 사람은 L그룹 사모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현초연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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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하연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류시진이 정관 수술을 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류시진은 하연서와 잠자리를 가질 때 단 한 번도 피임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연서는 그것이 자신이 아이를 갖는 걸 류시진이 허락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했다.한 달이 지나도록 임신 소식은 없었지만, 재벌가에서는 자신의 핏줄이 밖에서 떠도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우선 류시진을 붙잡아 두고 성공적으로 류씨 집안에 들어간 뒤 매일 함께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아이를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하연서는 한 번 도박을 해 보기로 했다.하지만 류시진이 현초연을 위해 이미 정관 수술까지 받았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하연서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내려다보는 류시진의 눈빛에는 조금의 온기도 없었다.“하 비서 뱃속에 있는 아이가 누구 아이든 나랑은 상관없어. 오늘부로 해고야. 알아서 눈치껏 이 도시를 떠나는 게 좋을 거야.”류시진은 그렇게 두 사람의 관계가 끝났음을 선언했다.절망이 서서히 하연서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여전히 류시진이라는 든든한 뒷배경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하연서는 황급히 사실을 털어놓았다.“저 임신 안 했어요! 그냥 대표님 곁에 있고 싶어서 핑계를 댄 것뿐이에요!”“대표님, 제가 잘못했어요. 저를 내쫓지 마세요. 네?”이제 류시진은 하연서를 보기만 해도 현초연이 자신을 떠난 일이 떠올랐다.하연서가 이렇게 분수도 모르고 현초연에게 두 사람의 일을 알리지 않았다면, 현초연도 자신과 아들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본인 발로 떠나지 않으면 내가 사람을 보내서 내쫓겠어. 하 비서만 아니었으면 아내도 집을 나가지 않았어.”“다시는 초연이 앞에 나타날 기회조차 주지 않겠어!”류시진의 목소리에는 매서운 독기가 서려 있었다.이토록 단호한 태도를 보자, 하연서는 무슨 짓을 해도 류시진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러자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비틀거리며 일어나 류시진을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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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류시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자신이 한순간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현초연은 떠나지 않았을 것이고, 아들도 지금처럼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아들을 꼭 끌어안은 류시진의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있었다.“아니야. 엄마가 그렇게 모질게 우리를 버릴 리 없어.”“우리가 잘못한 건 맞아. 하지만 엄마를 찾아서 사과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빌면, 엄마도 우리한테 다시 돌아올 거야.”하지만 수없이 전화를 돌렸음에도 일주일이 지나도록 현초연의 흔적은 여전히 찾을 수 없었다.누군가 전화 너머로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대표님, 이렇게 오랫동안 사모님을 찾지 못했는데, 혹시 사모님이 이미...]그러자 류시진은 휴대폰을 벽에 세게 내던졌다. 두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럴 리 없어! 초연이에게 어떻게 무슨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이야!’류시진은 인력을 더 늘려서 현초연의 행방을 찾았다.류모현은 현초연과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었기에, 온종일 엄마를 찾아 달라며 울고 보챘다.류시진은 그런 류모현을 데리고 비밀방으로 향했다.이곳에는 현초연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두 사람 사이의 모든 추억이 담겨 있었다.현초연이 떠난 뒤 류시진은 몇 번이고 비밀방을 열어 보고 싶었다.하지만 그 사진들을 떠올리고, 이제 안주인이 사라진 집을 바라볼 때마다 심장이 칼로 베이는 듯 아팠다.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무너질까 두려웠다.하지만 일주일이 지나자 끝없는 그리움이 류시진의 머릿속을 잠식했다. 결국 과거의 행복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비밀방 안에 걸린 사진들에서 하나같이 현초연의 모습이 잘려 나간 걸 확인한 순간, 류시진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류시진은 미친 사람처럼 사진을 전부 꺼내 한 장 한 장 확인하면서, 입으로는 끊임없이 중얼거렸다.“말도 안 돼. 왜 없는 거지?”“그럴 리 없어!”“초연이는?”류모현이 사진 한 장을 주워들었다. 그건 지난해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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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현초연이 떠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하지만 류시진은 여전히 현초연에 관한 어떤 소식도 듣지 못했다.류시진은 사람을 시켜서 비밀방에 있던 사진의 전자 파일을 모두 복원한 뒤, 다시 출력해서 비밀방 벽에 붙였다.류모현은 이제 학교에도 가지 않았다. 온종일 비밀방에서 지냈고, 밤에 잠을 잘 때조차 현초연의 얼굴이 들어간 사진 한 장을 반드시 손에 꼭 쥐고 있어야 했다.류시진은 수색 범위를 넓혔다. 심지어 현초연을 찾는다는 글까지 인터넷에 올려서, 누군가 현초연을 발견한다면 가장 먼저 자신에게 알려 주기를 바랐다.하지만 누리꾼들은 현초연이 떠난 이유가 류시진의 외도 때문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그저 현초연에게 무슨 사고라도 생긴 줄로만 알았다.[세상에, 사모님한테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야? 설마 납치라도 당한 건가?][요즘 대표님이 거의 미칠 지경이라고 하던데?][휴, 재벌가에서 보기 드문 잉꼬부부였는데. 대표님이 하루빨리 사모님을 찾았으면 좋겠어. 두 사람 다시 알콩달콩한 모습 보고 싶다.][류시진은 정말 변함없이 아내를 사랑하네.][애도 요즘 매일 엄마를 찾으며 운다던데? 애가 엄마와 떨어져 있다니 너무 불쌍해.]...류시진은 유용한 정보를 하나라도 놓칠까 봐 시시각각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을 확인했다.하지만 현초연을 봤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댓글에는 하루빨리 현초연을 찾기를 바란다는 말과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한다는 내용만 가득했다.예전이었다면 류시진은 이런 글을 보며 자부심을 느꼈을 테지만, 지금 남자의 마음에는 끝없는 죄책감과 두려움만 남아 있었다.자신이 하연서와 바람을 피우지만 않았더라면, 자신의 초연은 절대로 떠나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사모님을 찾자는 여론이 갈수록 뜨거워지던 그때, SNS에 올라온 글 하나가 인터넷을 발칵 뒤집었다.류시진에게 해고된 뒤, 하연서는 정말 남자의 말대로 이 도시에서 더 이상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그 어느 회사도 하연서를 채용하려고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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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하지만 정작 L그룹으로 돌아가서 사태를 수습해야 할 류시진은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류시진은 바에 앉아서 독한 술을 한 잔씩 연거푸 들이켰다.그래야만 술에 취한 꿈속에서 한때 자신과 더없이 사랑했던 현초연을 다시 만날 수 있었으니까.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여자가 구석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류시진을 발견하고는 눈을 반짝였다.예전에 류시진은 바에 올 때면 절대로 여자를 부르지 못하게 했다. 아내가 알면 화를 낸다는 이유였다.한때, 류시진이 정말 다른 여자에게 손도 대지 않는다는 말을 믿지 못한 사람이 일부러 여자들을 한 줄로 불러 세워서 마음대로 고르라고 한 적도 있었다.그러자 류시진은 그 자리에서 격분해서 그 사람의 머리가 터지도록 때렸고, 거의 성사될 뻔했던 협력도 무산됐던 일도 있었다.그 뒤로 업계에서는 감히 류시진에게 여자를 붙여 주려는 사람이 없었다.바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류시진의 금기를 알고 있었기에 감히 접근하는 여자도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류시진이 여비서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었다.아내밖에 모르는 줄 알았던 류시진에게 이미 오래전부터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든든한 배경을 가진 눈앞의 남자를 보자 여자의 마음이 동했다.류시진이 자신의 비서와도 그런 사이가 됐다면, 어쩌면 자신에게도 관심을 보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곧 여자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요염한 자태로 류시진 곁에 다가가 앉았다. 그러고는 가느다란 손을 류시진의 어깨 위에 올리고 유혹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대표님, 왜 혼자 이렇게 술을 드세요? 오늘 밤 제가 같이 있어 드릴까요?”말속에 담긴 암시는 충분히 노골적이었다.여자에게는 늘 끊임없이 구애하는 남자들이 있었다. 오늘 밤 원하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최소한 류시진과 연락처 정도는 주고받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하지만 여자의 손이 류시진에게 닿는 순간, 남자는 혐오스럽다는 듯 몸을 피했다.“꺼져!”여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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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원래 세계로 돌아온 현초연은 침대에서 눈을 떴다.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확인해 보니 시간은 이미 6년 전으로 돌아가 있었다.현초연은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 속에는 눈에 띄게 젊어진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그제야 깨달았다.현초연은 임무 세계에서 10년이라는 시간을 보냈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고작 4년밖에 흐르지 않았다는 사실을.그러니까 지금의 현초연은 29살이 아니라 23살의 현초연이었다.낯설면서도 익숙한 방을 천천히 둘러보자, 마치 아주 오랜 세월을 건너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현초연은 자신만의 세상에서 빠져나왔다.침실 문을 열자 10년 동안 보지 못했던 어머니 심형단과 마주쳤다.장을 보고 돌아온 심형단은 주방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곁눈질로 딸의 침실 문 앞에 누군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집에 도둑이 든 줄 알고 사람을 부르려던 순간, 그 얼굴이 너무나도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손에서 힘이 순식간에 빠졌는지 장바구니가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안에 들어 있던 채소들이 바닥에 와르르 쏟아졌다.하지만 지금 심형단에게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두 다리에 납덩이라도 매단 듯 어머니는 힘겹게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디뎠다.마침내 현초연 앞에 도착한 어머니는 떨리는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눈에는 이미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초연아, 정말 초연이니?”어머니는 현초연의 뺨을 만지고 싶었지만, 혹시 자신의 환상일까 두려웠다.손을 대는 순간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딸이 실종된 뒤로 어머니는 매일 사진을 바라보며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매일 밤 꿈에서라도 딸을 만나기를 바랐다.하지만 지난 4년 동안 단 한 번도 딸의 꿈을 꾸지 못했고, 딸의 모습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얼굴이 조금 달라져 있었지만 어머니는 한눈에 알아봤다.자신의 소중한 딸, 현초연이 틀림없었다.심형단의 희끗희끗해진 머리카락을 보는 순간, 현초연은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조심스럽게 묻는 심형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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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현초연은 결국 임무 세계에서 보낸 10년의 시간을 부모님에게 모두 털어놓기로 했다.부모님은 이 세상에서 현초연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두 사람이었다.현초연은 불과 세 시간 만에 지난 10년 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설명했다.마지막 말까지 끝낸 뒤, 현초연은 탁자 위에 놓인 물컵을 들어 목을 축였다. 부모님에게도 이 모든 일을 받아들일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하지만 부모님은 처음의 놀라움도 잠시, 이제는 딸을 향한 안타까움만 남아 있었다.두 사람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기억 속 딸은 여전히 밝고 걱정 없이 살아가던 대학생이었는데, 지금은 다른 세계에서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았다고 했다.심지어 남편과 아이에게 동시에 배신당하는 일까지 겪었다고 했다.심형단은 성격이 눈에 띄게 차분해진 딸을 바라보다 다시 눈물을 흘렸다.애지중지 키운 딸이 정말 많은 고생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현초연은 부모님의 얼굴에 똑같이 떠오른 안타까움을 바라보며, 끝없는 죄책감과 후회에 휩싸였다.모두 자신이 그때 소위 ‘사랑’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이 4년 동안 슬픔 속에서 살아야 했다.어머니는 손을 들어 눈물을 닦으면서 현초연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고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지 물었다.이 세계에서 사라지기 전 현초연은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현초연이 사라지고 한 달 뒤, 부모님은 대신 휴학 절차를 밟아 두었다.하지만 현초연은 이미 임무 세계에서 대학 4년 과정을 모두 마쳤기에, 다시 학교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게다가 지금 겉모습은 23살이지만, 실제로 10년이라는 시간을 더 살아온 만큼 정신적인 나이는 이미 29살이었다.다시 대학생들 사이에서 지내는 건 어색하게만 느껴질 것 같았다.현초연은 잠시 생각한 끝에 조용한 작은 마을을 찾아 한동안 쉬기로 했다.류시진과의 실패한 결혼 생활이 결국 현초연의 마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남겼기에, 혼자서 천천히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부모님은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며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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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현초연은 그 말을 듣고 조금 당황했다.“나를 뭐라고 불렀어?”여자아이는 여전히 현초연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엄마라고 불렀다.현초연은 자신이 낳은 아이가 류모현 하나뿐이라는 걸 확실히 알고 있었다.그러니 자신에게 세 살짜리 딸이 있을 리 없었다.아무래도 아이가 사람을 잘못 알아본 것 같았다. 현초연이 아이를 안아 경찰서에 데려가 부모를 찾아 주려던 순간, 뒤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린아!”곧바로 고개를 번쩍 든 아이는 남자가 오는 방향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아빠, 엄마가 돌아왔어요!”남자는 현초연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순간 멈칫했다.“현초연?”현초연은 낯선 얼굴을 바라보며 머릿속 기억을 열심히 더듬어 보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이 세계에 대한 현초연의 기억은 10년 전에 멈춰 있었다. 설령 두 사람이 정말 아는 사이였다고 해도, 10년이나 만나지 않아서 과거의 기억은 이미 흐릿해질 대로 흐릿해져 있었다.현초연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자 남자의 눈빛에 잠시 쓸쓸함이 스치더니, 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나 고진혁이야. 너보다 두 학번 위 선배. 우리 예전에 같은 동아리였는데 기억나?”봉인되어 있던 현초연의 기억이 서서히 되살아났다.눈앞의 남자 얼굴이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기억 속 얼굴과 겹쳐졌다.“선배? 정말 오랜만이네! 아이가 벌써 이렇게 컸어?”현초연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토론 동아리에 가입했고, 고진혁은 동아리 회장이었다.그 시절의 기억은 이미 다소 희미해졌지만, 고진혁이 누구에게나 온화했고 자신을 도와준 적도 있다는 건 기억하고 있었다.고진혁은 현초연의 품에서 고아린을 받아 안으며 설명했다.“아린이는 내 누나 딸이야. 아린이 아주 어렸을 때 누나와 매형이 세상을 떠났어. 그래서 내가 아린이를 입양했고, 나를 아빠라고 부르게 했어.”“네가 입은 옷이 누나가 세상을 떠난 날 입었던 옷과 비슷해서, 아린이 널 엄마로 착각한 거야. 정말 미안해.”그제야 현초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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