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은퇴한 궁녀의 완벽한 홀로서기: Chapter 1 - Chapter 10

10 Chapters

제1장

마지막 금화를 보따리 깊숙이 쑤셔 넣었다.손바닥으로 보따리를 툭툭 두드리자 묵직한 감촉이 전해졌다.내일 아침이면 내 나이도 스물다섯.드디어 궁을 나가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바깥방에서는 동궁의 탕약 화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씁쓸한 약 냄새가 희뿌연 연기와 함께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나는 청자 약사발을 들고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태자 배서진이 평상에 기대어 있었다.가슴이 찢어질 듯 기침을 해대는 얼굴에는 병색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창백한 뺨 위로 홍조가 얇게 번져 있었다.나는 다가가 약사발을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전하, 약 드실 시간입니다."그러나 배서진은 약사발을 받아 들지 않았다.대신 손을 뻗어 내 손목을 거칠게 낚아챘다. 뼈가 으스러질 듯한 힘이었다.하지만...그의 눈길은 나를 향해 있지 않았다.어깨 너머 허공을 직시하는 멍한 눈빛.갈라진 입술 사이로 이름 하나가 아득하게 새어 나왔다."설희야...""설희야. 그곳은 춥지 않느냐..."윤설희.먼 곳으로 화친을 떠난 공주이자, 배서진이 마음 깊이 품은 첫사랑.나는 아무 말 없이 손목을 비틀어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그리고 약사발을 옆의 자단목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전하, 약이 식습니다."그제야 배서진의 시선이 돌아왔다.그는 나를 한 번 흘겨보더니, 곧 익숙한 냉정함과 오만함을 얼굴에 걸쳤다.이윽고 약사발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태의가 그러더구나. 내 몸에 남은 고독(蠱毒)의 독기는 거의 다 빠졌다고."손수건으로 입가를 단정히 닦아내며 계속 말을 이었다."네 임무를 아주 훌륭히 해냈다."나는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대답했다."전하, 과찬이시옵니다."당연히 훌륭하게 해냈겠지.지난 오 년 동안 윤설희에게 줄 해독제를 찾기 위해 세상의 독이란 독은 모조리 삼켰으니까.그렇다고 난 대의를 품은 성녀 따위는 아니다.그저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속물일 뿐.내 이름은 심은숙.촌스럽지만 내가 직접 지어 붙인 이름이다.나는 본래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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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반년이 지난 뒤였다.변방에서 윤설희가 지독한 고독에 걸려 목숨이 위태롭다는 소식이 전해졌다.배서진은 미쳐 날뛰었다.그는 전국의 명의들을 모조리 불러 모아 해독제를 만들게 했다.문제는 그 약의 약성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것이었다.조금만 잘못되어도 약을 먹은 사람이 목숨을 잃을 수 있었으니까.때문에 독성을 시험할 사람이 필요했다.그리고 배서진이 고른 사람은... 바로 나였다.태감 두 명이 내 몸을 바닥에 짓눌렀다.배서진은 직접 내 턱을 움켜쥐고, 새까만 독물을 입안에 들이부었다.목구멍을 타고 내려간 순간, 오장육부가 불길에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나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을 뒹굴었다.푸른 청석 바닥 위로 손톱이 긁히고, 손끝이 짓물러 피가 배어 나왔다."제발 살려 주세요!"목이 찢어지도록 울부짖었다.그러나 배서진은 그저 옆에 서서 지켜볼 뿐이었다.눈처럼 하얀 수건으로 손을 닦아내며, 그가 차갑게 읊조렸다."설희를 대신해 해독제를 시험할 수 있으니, 네게는 복인 줄 알거라."개소리하고 있네.그놈의 복, 너나 실컷 처먹으시든가.그날 이후 나는 보름 동안이나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그리고 그날, 배서진에게 품었던 마지막 미련까지 모조리 끊어냈다.더 이상 그의 보호 따위 바라지 않았다.내게 필요한 건 오직 돈뿐이었다.나는 배서진과 조건을 걸고 거래를 시작했다.해독제를 한 번 시험할 때마다 월봉의 세 배를 주기로.맹독이라면 열 배였다.지난 오 년 동안 내가 토해낸 검은 피는 동궁의 연못을 물들이고도 남았을 것이다.대신 소매 속 금화도 날이 갈수록 두툼해졌다.이제 배서진의 몸에 남은 독기도 모두 빠졌다.나 역시 떠날 만큼의 돈을 모았다.이것으로 우리는 깔끔하게 끝이다."내일 출궁하여 제천 의식을 올릴 것이다."배서진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나를 끄집어냈다."너는 동궁에 남아 약사발과 탕약 화로를 깨끗이 정돈해 두어라."나는 고개를 숙인 채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예, 명 받들겠습니다."탕약 화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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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나도 가끔은 마음이 약해지곤 했다.차가운 피만 흐르고 눈물이라고는 말라버린 궁에서, 나와 배태영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가엾은 처지라고 여겼다.적어도 삼 년 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배태영은 어둠 속에서 힘을 숨긴 채 눈을 고치고 옛 수하들을 불러 모았다.그리고 마침내 시력을 되찾고 권력까지 손에 넣은 날.냉궁의 육중한 문이 거세게 열렸다.눈부신 햇살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그는 빛을 등진 채, 새까맣고 화려한 황자의 망포를 입고 서 있었다.나는 진심으로 기뻤다.드디어 장기적인 밥줄이 제대로 터졌다고 생각했다.축하 인사도 건네고 하사품이나 좀 얻어볼까 싶어 그에게 다가갔다.그러나 내가 채 입을 열기도 전이었다.배태영이 불쑥 손을 뻗었다.그리고 내 목덜미를 사정없이 움켜쥐었다.손아귀에 힘이 들어간 순간,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그는 나를 통째로 들어 올려 냉궁의 얼룩진 벽에 그대로 내던졌다.쿵!등 뒤로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숨이 턱 막혀와 두 손으로 그의 손가락을 필사적으로 떼어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배태영은 나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한때 두려움과 의존으로 가득했던 눈동자였다.그러나 지금은 감정이라고는 온데간데없이 지독할 정도로 맑고 음산하기만 했다.질식감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나를 바라보며, 그가 입꼬리를 비뚤게 말아 올렸다."한낱 장기말 주제에 감히 주인의 진심을 바란 거냐?""네가 냉궁에서 내게 한 짓거리 따위로 내가 감복이라도 할 줄 알았더냐?""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천것 주제에, 네가 정말 뭐라도 된 줄 착각했나 보구나."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그럴수록 목을 죄어오는 손아귀의 힘만 더욱 거세질 뿐이었다."꺼져라.""다시는 내 눈앞에 그 비천한 얼굴을 들이밀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네 눈알을 뽑아버리겠다."그제야 배태영은 거칠게 손을 놓았다.순간, 나는 쓸모없는 누더기처럼 바닥에 내팽개쳐졌다.콜록! 콜록!목구멍이 찢어질 듯 아팠다.나는 미친 듯이 기침하며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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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얼마 지나지 않아 관성루에 새로 배치된 여종 몇 명이 들어왔다.그중 한 명은 자존심이 어찌나 하늘을 찌르는지, 안도윤의 곁에서 수발드는 내게 시종일관 질투 어린 시선을 보내오기 일쑤였다.그날도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안도윤에게 차를 올리고 있었다.그때였다.뒤에 서 있던 여종이 일부러 나를 툭 치고 지나갔다.손목에 들어간 힘이 풀리며 찻잔이 파르르 흔들렸다.거친 옷소매가 안도윤의 눈처럼 새하얀 옷자락을 살짝 스쳤다. 그 바람에 하얀 비단 위에 옅은 잿빛 얼룩이 내려앉고 말았다.쨍그랑!안도윤은 망설임 없이 찻잔을 내던졌다.팔팔 끓는 찻물이 내 손등 위로 튀어 올랐다. 순간, 피부가 순식간에 붉게 부풀어 오르며 타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그 여종은 기다렸다는 듯 털썩 꿇어앉으며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해댔다."국사 나리, 노여움을 거두시옵소서! 이 천것이 일부러 수작을 부린 것입니다. 평소에도 온갖 요망한 짓으로 사내들을 홀리던 계집이옵니다!"나는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나리, 소인은 결코..."변명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안도윤의 시선은 옷자락에 남은 얼룩에 박혀 있었다. 눈동자에는 노골적인 혐오감이 넘실거렸다."벗어서 태워라."곁에 서 있던 도동(道童)에게 차갑게 명령을 내린 그가 소매를 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머리 위로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비수처럼 내리꽂혔다."너는 그저 비천한 궁녀일 뿐이다. 다시는 내 눈을 더럽히지 마라.""밖에 나가 꿇어앉아 있거라. 내 명 없이 감히 일어날 생각은 마라."나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은 채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그리고 이내 바닥에 이마를 짓찧었다."소인,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그렇게 내리쬐는 땡볕 아래에서 꼬박 여섯 시간을 꿇어앉아 있었다.무릎이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하지만 물론 속으로는 그의 조상 18대를 모조리 욕하고 있었다.'산신령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내가 다시는 네 수발을 드나 봐라!'다행히도...드디어 끝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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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안도윤이 갑자기 이성을 잃었다.늘 고고하고 맑던 그 눈동자에,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당혹감이 거세게 일렁였다.그의 손가락이 쇠집게처럼 내 어깨를 틀어쥐었다.뼈가 으스러질 듯한 힘이었다.나는 미친 사람을 보듯 안도윤을 바라보았다.남이 옷자락 하나 건드리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던 자가 정말 맞단 말인가?힘껏 몸을 비틀어 뿌리쳐 보았지만 소용없었다."국사 나리. 소인, 아픕니다."안도윤은 그제야 번뜩 정신이 든 듯 억세게 쥐었던 손을 놓았다.하지만 시선만큼은 여전히 내 얼굴을 집요하게 꿰뚫고 있었다.그의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렸다.서리처럼 차갑던 얼굴에는 지우지 못한 혼란과 당혹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그 호위무사와 혼인할 수 없다."그가 이를 악물고 한마디씩 내뱉었다.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혼기가 차면 혼인하는 것이 세상 이치입니다. 소인도 출궁할 나이가 되었으니 고향 사람과 혼인하는 것이 당연하거늘, 어찌 안 된다는 말씀이십니까?""그따위 놈은 너에게 어울리지 않아!"안도윤이 순간 목소리를 바짝 높였다.차갑게 가라앉아 있던 눈동자 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들끓었다.이윽고 그가 다시 내 손목을 낚아챘다.이번에는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가지 마라..."안도윤이 고개를 떨구었다.갈라진 목소리에는 남아 있던 자존심마저 내던진 듯한 비굴함이 배어 있었다."내가 너와 혼인하겠다.""내 정실이 되어다오. 응?"나는 순간 멍해졌다.'정실?'조정의 국사이자 사대부의 수장이 한낱 허드렛일이나 하는 궁녀를 정실로 삼겠다고?오 년 전, 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높은 분들에게 헛된 기대를 품고 있던 나였다면 눈물겹게 감격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그저 황당하기 그지없는 소리일 뿐이다.나는 서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잡힌 손을 세차게 털어냈다."국사 나리, 어디 약이라도 잘못 드셨습니까?"안도윤의 몸이 굳어졌다.얼굴 역시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게 질렸다.나는 한 걸음 물러나 그와 거리를 벌린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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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내 일은 한낱 점쟁이 따위가 참견할 바 아니다!"배태영은 안도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그는 문턱을 성큼 넘어, 곧장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너무 빨랐다.내가 반응할 겨를도 없이, 그가 옷덜미를 낚아채 나를 벽으로 세게 밀쳐붙였다.차가운 검날이 목덜미에 바짝 와닿았다.검날에 채 마르지 않은 핏방울이 쇄골을 타고 옷깃 안으로 흘러들었다. 끈적이고 불쾌했다.배태영이 나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눈시울은 찢어질 듯 붉었고,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누가 너더러 혼인하라고 했느냐?"나는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댄 채 목에 검을 받치고 있었다.그런데도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배서진이 억지로 맹독을 삼키게 했을 때마저 죽음이 두렵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이까짓 낡은 칼 따위가 무섭겠는가?나는 무덤덤한 얼굴로 그의 분노를 받아냈다."전하, 소인은 출궁할 나이가 되어 은전을 받고 혼인하려는 것뿐입니다. 모두 궁의 법도에 맞는 일입니다.""그딴 법도 따위, 개나 주라 해!"배태영이 내 귓가의 벽을 주먹으로 세게 내리쳤다.쿵!손가락 뼈마디가 금세 피로 물들었다.그는 붉어진 눈시울을 한껏 치켜뜨고 이를 악물었다. 마치 어떤 커다란 고통을 극도로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심은숙, 네가 아주 배짱이 두둑해졌구나. 냉궁에 있을 때, 내 곁에 계속 남아 있겠다고 한 건 너였다!""내 잠자리를 데워주고, 남은 숯불을 내게 나눠주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자고 한 것도 너였어!""한낱 장기말 주제에, 내가 가라고 하기 전에는 한 발짝도 못 간다!""너는 살아서도 내 사람이고, 죽어서도 내 귀신이다!"나는 검날이 목을 누르는 압박을 피해 고개를 살짝 돌렸다.그리고 차갑게 입을 열었다."전하, 기억력이 참으로 나쁘십니다.""당시 냉궁에서 소인에게 직접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잠시 말을 멈춘 뒤, 나는 그때 배태영이 지었던 고고하고 비웃음 섞인 말투를 그대로 흉내 냈다."한낱 장기말 주제에 감히 주인의 진심을 바라느냐?""꺼져라. 이 비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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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엉켜 싸우던 배태영과 안도윤이 동시에 손을 멈췄다.우리 셋의 시선이 일제히 문밖으로 향했다.태자 배서진이 태감들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비틀 마당으로 들어오고 있었다.두루마기조차 걸치지 못한 채, 얇은 황색 침의만 걸친 모습이었다.원래도 창백하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그는 부축하던 태감들을 거칠게 밀쳐내고 내 방 앞까지 비틀거리며 걸어왔다.게다가 손에는 황색 비단 두루마리 하나가 꽉 쥐여 있었는데, 그건 내가 출궁하여 면천받을 수 있도록 내려진 성지였다.쩌어억!배서진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성지를 힘껏 찢어버렸다.이윽고 황색 비단이 두 갈래로 갈라져 바닥에 떨어졌다.지나치게 힘을 준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리다 못해 푸르스름해졌다.그는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눈동자 깊은 곳에는 절박한 애원이 고여 있었다."너는 떠나지 못한다."나는 바닥에 내팽개쳐진 두 동강 난 성지를 바라보며, 마침내 미간을 찌푸렸다.그건 내가 거금을 들여 간신히 손에 넣은 출궁 통행증이었다!"태자 전하, 지금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내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았다.배서진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대신 몸을 발작하듯 심하게 떨며 거칠게 콜록이기 시작했다."콜록! 콜록!"입에서 붉은 피가 쿨럭 터져 나와 순식간에 가슴께의 침의를 붉게 물들였다. 보기만 해도 등줄기가 서늘해질 만큼 흉측한 광경이었다."태자 전하!"태감들이 깜짝 놀라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하지만 배서진은 그들을 내치며, 끈질기게 나만을 노려볼 따름이었다."설희가 죽었다."그가 비참하게 웃었다."변방에서 급보가 왔다. 몸속의 고독이 발작하여... 끝내 살리지 못하고 죽었다더구나."순간 머리가 멍해졌다.배서진은 피를 토하면서도 내게 한 걸음씩 다가왔다."나는... 심장이 찢어질 듯 아플 줄 알았다."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변방의 추위가 워낙 지독하여, 그 아이는 보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더구나. 소식이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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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배태영을 내려다보았다."구황자 전하, 소인이 냉궁에서 전하의 체온을 녹여 드린 게 전하가 불쌍해서였다고 생각하셨습니까?"비웃음이 새어 나왔다."귀비 마마 곁의 태감이 제 손에 은전을 쥐여 주며, 전하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감시하라고 시켰기 때문입니다! 숯불을 나눠 드린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하께서 돌아가시면 제 쏠쏠한 밥줄이 끊기니까요!"배태영의 몸이 거칠게 떨렸다.핏발 선 눈동자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절망이 가득 차올랐다.나는 마지막으로 안도윤을 바라보았다."그리고 국사 나리."나는 비아냥거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소인이 매일 모아 둔 이슬로 바닥을 닦고, 나리의 그 유난스러운 결벽증을 맞춰 드린 게 나리를 신선처럼 우러러봐서였다고 생각하셨습니까?""그저 관성루의 월봉이 다른 궁의 두 배나 되었고, 명절 하사품도 가장 두둑했기 때문입니다!"나는 침상 곁으로 걸어가 묵직한 보따리를 단숨에 낚아채 들었다.스르륵.일부러 보따리 틈새를 살짝 벌렸다.촛불 아래에서 노랗게 빛나는 금화와 하얗게 반짝이는 은전이 모습을 드러냈다."똑똑히 보셨습니까?"나는 보따리를 툭툭 치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저는 당신들 중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습니다.""제가 사랑하는 건 오직 돈뿐입니다.""이제 돈도 충분히 모았으니, 저는 제 인생을 살러 떠나겠습니다.""궁의 법도에 따르면 스물다섯이 된 궁녀는 내무부의 호패만 있으면 성지가 있든 없든 출궁할 수 있습니다.""내일 아침 진시에 신무문이 열립니다."나는 세 사람을 차례로 바라보았다."한때 주인과 하인으로 맺어진 인연도 여기까지니, 부디 좋게 헤어지시지요. 혹여라도 내일 제 길을 막고 재물길을 끊으려 드는 분이 계시다면..."서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그분 눈앞에서 피를 토하고 죽어 드리겠습니다. 평생 목숨값의 굴레를 짊어진 채,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게 만들어 드릴 테니까요."말을 끝낸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문턱을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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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신무문 앞에 쥐 죽은 듯한 정적이 내려앉았다.문지기들은 진작에 겁에 질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배서진, 배태영, 안도윤.세 사람이 반원 모양으로 나를 둘러싼 채 궁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서로를 노려보는 눈빛에는 상대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도 남을 살기가 서려 있었다.그러나 그 시선이 나를 향하는 순간.넘쳐흐르던 살기는 거짓말처럼 비굴한 애원으로 바뀌었다.배서진은 허리조차 제대로 펴지 못할 만큼 심하게 기침을 해댔다.이윽고 입가에 채 가시지 않은 핏자국을 한 손으로 문질러 닦으며, 떨리는 손을 내게 뻗었다."가지 마라... 내가 이렇게 빌 테니, 제발 남아 다오..."부서져 흘러내리는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왔다.배태영은 자신이 흘린 붉은 핏자국을 짓밟은 채 서 있었다.붉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죽일 듯 노려보더니, 이내 짓씹듯 한마디 내뱉었다."내 곁에만 있겠다고 했잖아. 날 속인 거냐..."안도윤은 턱끝까지 차오른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차갑던 눈동자에는 어느새 물기가 가득 고여 있었다.하얗게 질린 주먹을 불끈 쥔 채,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내가 너와 혼인하겠다. 국사부의 전 재산을 네게 줄 테니, 제발 내 곁을 떠나지 마라..."나는 그 자리에 서서 세 남자를 바라보았다.한때 나를 짚신짝이나 도구처럼 여기던 사람들이었다.고고한 고개를 조금 숙이고, 뒤늦게 진심을 조금 내보이면 이 비천한 궁녀가 감격해 눈물을 흘리며 계속 그들의 손발이 되어 줄 줄 아는 모양이었다.'권력에 취하면 오만한 사람도 이렇게 바보가 되는구나.'나는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태자 전하, 구황자 전하, 그리고 국사 나리."넓고 휑한 궁문 앞에 내 목소리가 유달리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무언가 단단히 착각하신 것 아닙니까?"나는 등 뒤에 멘 보따리를 살짝 털었다.그러자 안에서 금화가 부딪히며 청아하고 경쾌한 소리를 냈다."저는 여러분을 속인 적도, 저버린 적도 없습니다.""목숨을 걸고 태자 전하를 위해 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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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처음에는 그저 팔자가 너무 늘어졌기 때문이었다.저택은 지나치게 넓었고, 나 혼자 관리하기에는 손이 턱없이 모자랐다.그래서 집사에게 저잣거리에 나가 일할 하인 몇을 구해 오라고 시켰다.장부 선생 하나.저택을 지킬 호위무사 하나.그리고 서당 선생 하나.장원 급제를 노리는 건 아니었지만, 누군가 곁에서 이야기책을 읽어 주는 건 좋아했으니까.조건은 딱 하나였다.값싸고, 말 잘 들을 것.며칠 지나지 않아 집사가 세 사람을 데리고 왔다.나는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앉아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며 대충 그들을 훑어보았다.딱 한 번.그 순간, 하마터면 씨앗 껍질이 목구멍에 걸려 헛구역질을 할 뻔했다.세상 참 좁다.아니.이 세 남자의 낯짝이 미치도록 두꺼운 거겠지.맨 왼쪽에 서 있는 자는 새로 뽑은 장부 선생이었다.하얗게 바랜 푸른 베 두루마기를 걸친 그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했고, 손에는 핏자국이 묻은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주인 어른."그가 고개를 숙인 채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소인은 셈이 빠르고 정확합니다. 그저 밥 한 술만 주신다면 월봉은 한 푼도 받지 않겠습니다."목소리는 허약하기 짝이 없었지만, 축축하게 젖은 눈빛만큼은 오롯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이 자는 구름 위에 앉아 있던 병약한 태자, 배서진이 아닌가?동궁에서 차기 황제 노릇이나 할 것이지, 강남까지 기어 내려와 내 장부를 적겠다고?가운데 서 있는 자는 새로 들인 장님 호위무사였다.거친 무명옷을 걸치고 눈에는 검은 천을 둘렀으며, 손에는 낡은 목검 한 자루를 쥐고 있었다."주인 어른."낮고 거친 목소리에는 살벌한 가시가 돋쳐 있었다."소인이 비록 앞은 보지 못하지만 귀는 밝습니다. 감히 주인 어른의 세 걸음 안으로 다가오는 자가 있다면, 그 다리를 사정없이 부러뜨려 놓겠습니다. 소인 역시 월봉은 필요 없습니다. 그저 문이나 지키게 해 주십시오."나는 어이가 없어 속으로 눈알을 굴렸다.'구황자 배태영. 너는 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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