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hat ng Kabanata ng 계약서는 두 장, 집은 하나: Kabanata 11 - Kabanata 20

30 Kabanata

제11화. 육개장 두 그릇

젖은 수건들이 욕실 문 앞부터 베란다까지 줄지어 널려 있었다.두 시간 동안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아낸 결과였다. 비는 그쳤지만 집 안에서는 젖은 벽지 냄새가 났다. 도현은 창틀에 임시로 붙인 방수 테이프를 한 번 더 눌렀고, 서아는 물먹은 종이 상자를 현관 쪽으로 밀었다.폭우 때 도현 방으로 옮겨 둔 스투키가 방문 옆에 보였다. 서아가 입주 첫날 사 온 화분이었다. 잎 끝이 젖어 있었지만 누가 물을 줬는지는 묻지 않았다.임대인에게 보낸 누수 사진은 읽음 표시조차 뜨지 않았다. 서아는 노트북에 날짜와 시간을 띄워 놓고, 그 화면부터 천장과 창틀까지 끊지 않고 동영상으로 찍었다. 도현은 아래층에 내려가 피해 범위를 확인하고 돌아왔다.“안방 벽지는 괜찮대요. 거실 모서리만 젖었답니다.”“수리비 달라고 하면요?”“우리가 임의로 인정하지 말고 관리인하고 보험부터 확인해야죠.”“이 와중에도 할 일이 계속 생기네.”서아는 피해 자료 폴더 안에 `누수`라는 새 폴더를 만들었다. 계약서, 신고 접수증, 등기부 다음이었다. 늦여름에 이사 온 뒤 한 달도 안 돼 집 하나 때문에 휴대전화 안에 서류철이 생겼다.“이건 버려야겠네요.”상자 안에는 회사에서 가져온 육개장 샘플이 들어 있었다. 포장지는 멀쩡했지만 종이 슬리브가 눅눅하게 젖었다. 다음 주 관능평가에 쓸 물건이라 여분까지 넉넉히 받아온 것이었다.“안에 든 것도 상했습니까?”“파우치는 괜찮아요. 포장이 이 모양이면 제출을 못 해서 그렇지.”도현이 시계를 봤다. 밤 열한 시 사십 분이었다.“그럼 먹죠.”“지금요?”“저녁 안 먹었잖아요.”서아는 네 시간 전 편의점 삼각김밥을 먹으려다 천장에서 떨어진 물을 받느라 내려놓았던 일을 떠올렸다. 도현도 커피만 두 잔 마셨다고 했다.냄비 하나에 육개장 두 봉지를 부었다. 물을 조금 더 넣고 대파를 잘라 넣자 비에 젖은 냄새가 매운 국물 냄새에 밀려났다. 햇반을 두 개 돌려 식탁에 마주 앉았다.도현이 한 숟갈 먹고 말했다.“지난번 것보다 덜 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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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피해자라는 이름

상담실에는 의자가 열여섯 개였고 사람은 스물두 명이었다.앉지 못한 사람들은 벽에 기대거나 창가에 서 있었다. 누군가는 계약서가 든 비닐 파일을 안고 있었고, 누군가는 대출 잔액이 찍힌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서아와 도현은 맨 뒤에 나란히 섰다.“해솔빌라 302호 두 분 맞죠?”피해자 대표가 물었다.“네.”“같은 집에 계약이 두 개라 변호사님이 따로 보신대요.”앞줄에서 몇 사람이 돌아봤다. 서아는 고개를 숙이고 파일 모서리를 눌렀다.한 여자는 임대인이 해외에 나갔다는 문자를 보여줬고, 노부부는 통장에 남은 돈이 팔십만 원뿐이라고 했다. 같은 건물에 살면서도 처음 보는 얼굴이 많았다. 계단에서 몇 번 마주친 사람들은 서로 인사할 여유가 없었고, 이제야 각자 잃은 금액부터 알게 됐다.“302호는 두 분이 싸우면 안 돼요.”피해자 대표가 목소리를 낮췄다.“집주인이 노리는 게 그거예요. 피해자끼리 네 계약이 가짜네, 내 돈이 먼저네 하다가 시간 다 가는 거.”서아는 도현을 봤다. 그는 대꾸하지 않고 상담 순서표만 확인했다.한지수 변호사는 계약서를 한 장씩 펼쳐 놓고 잔금 시간과 전입 접수 시간을 확인했다. 확정일자를 받은 날도 다시 적었다.“계약을 먼저 썼다고 자동으로 우선하는 건 아닙니다. 인도, 전입, 확정일자를 함께 보고 실제 점유도 따져야 해요. 두 분 사이 순위는 제가 지금 단정할 수 없습니다.”도현이 물었다.“오전 여덟 시 오십 분에 들어온 근저당은요?”“두 분이 잔금을 지급하고 들어가기 전 접수된 권리라 상당히 불리합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짐을 빼거나 전출하시면 안 되고요. 개별 권리를 보전할 절차부터 확인해야 합니다.”변호사는 종이에 세로줄을 그었다. 왼쪽에는 선순위 채권, 오른쪽에는 주택의 예상 매각가를 적었다. 예상 매각가에서 근저당 채권최고액 구천오백만 원과 경매비용을 차례로 빼자 두 사람 몫으로 돌아올 수 있는 숫자가 더 작아졌다.“낙찰가가 얼마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비용도 빠지고요. 전액 회수는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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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남의 칫솔

도현이 이틀 연속 자정을 넘겨 들어왔다.첫날에는 야근이라고 연락했다. 둘째 날에는 메시지도 없었다. 서아는 열한 시에 욕실에 들어가 이를 닦다가 파란 칫솔이 그대로 마른 것을 봤다.남의 칫솔이 젖었는지 마른지까지 아는 건 좀 심했다.입주 두 달째가 되자 집은 처음보다 조용해졌다. 욕실을 오래 써도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없었고, 냉장고 문을 열면 가운데 붙인 테이프도 그대로였다. 편해야 맞는데 서아는 현관 쪽에서 소리만 나면 노트북에서 고개를 들었다.밤 열한 시 반에는 피해자 단체방에 새 공지가 올라왔다. 서아는 도현도 확인했는지 물으려고 개인 대화창까지 열었다가 스스로 질려 창을 닫았다.서아는 컵을 세면대 구석으로 밀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노트북을 켰지만 같은 기획서 첫 줄만 네 번 읽었다. 열두 시 십칠 분,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문을 열고 나갈 이유가 없어 그대로 앉아 있었다.잠시 뒤 도현이 작은방 문을 두드렸다.“안 자요?”“자려고요.”“거실 불 켜져 있던데.”“내가 켠 거 아니에요.”“그럼 귀신인가.”“그쪽이 켜놓고 갔겠죠.”도현은 문밖에 몇 초 더 서 있다가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식탁에는 편의점 샌드위치가 두 개 놓여 있었다. 하나에는 검은 펜으로 `어제 연락 못 함`이라고 적혀 있었다.서아는 사진을 찍었다가 바로 지웠다.샌드위치를 들고 회사에 갔지만 오전 내내 먹지 못했다. 점심 직전 포장 비닐을 뜯자 빵 가장자리가 조금 말라 있었다. 서아는 그것까지 다 먹고 포장지의 유통기한을 확인했다. 포장지에 찍힌 날짜는 그날까지였다.그날은 서아도 야근이었다. 영업팀 최 대리가 편의점 본사에 보낼 샘플 상자를 함께 차에 실어 주고 집 앞까지 데려다줬다. 차에서 내릴 때까지 둘은 나트륨 수치를 두고 말싸움을 했다.“대리님, 짜야 팔려요.”“짠맛으로 한 번 팔고 재구매 안 나오면 네가 책임질래?”“그건 기획팀에서 책임져야죠.”“꺼져. 상자나 내려.”최 대리가 웃으며 트렁크를 열었다. 샘플 상자가 다섯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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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불쌍해서 잘해주는 거면

“윤 대리, 아까부터 전화 계속 오던데?”회식 자리에서 누군가 물었다.서아는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맞은편에 앉은 사원이 별 뜻 없이 휴대전화만 보고 있었다.“왜요?”“모르는 번호가 계속 뜨길래. 스팸인가 해서.”“은행이에요. 대출 갈아타라고.”“집 샀어?”“전세.”“요즘 전세 무섭다던데.”한미경 차장이 집게로 삼겹살을 뒤집으며 끼어들었다.“남의 대출 얘기를 안주 삼지 말고 고기나 먹어. 탄다.”화제는 금세 신입사원의 연애로 넘어갔다. 서아는 웃는 시늉을 하며 휴대전화를 뒤집었다. 화면에는 피해자 모임에서 온 부재중 전화가 세 통 찍혀 있었다.평소보다 두 잔 더 마셨다. 취하려고 마신 건 아니었는데, 일어나자 바닥이 조금 밀렸다.한미경이 택시를 부르려 하자 서아는 버스가 끊기지 않았다며 손을 저었다. 택시비 삼만 원이 아까웠다. 한미경은 그런 서아를 한참 보더니 식당 현관에서 팔을 잡았다.“윤 대리.”“네.”“집 문제 있으면 회사에 말해. 네 연차 써 가며 관공서 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어.”“문제 없어요.”“없는 얼굴은 아닌데.”서아는 웃고 팔을 뺐다. 거짓말은 어느새 입에 붙었다.버스에서 내린 뒤 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걸었는지는 연결음이 간 뒤에 생각났다.― 어디예요?“집 앞.”― 몇 번 출구.“집 앞이라니까.”― 지하철 소리 들리는데.서아는 역 이름이 적힌 기둥을 올려다봤다. 한 정거장 일찍 내렸다.“잘못 내렸네.”― 거기 있어요.“나 혼자 갈 수 있어요.”― 움직이지 말고.십오 분 뒤 도현이 운동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한 손에는 생수, 다른 손에는 서아가 아침에 두고 간 얇은 재킷이 들려 있었다.“이걸 왜 들고 왔어요?”“밤에 춥습니다.”“나 안 불쌍해요.”도현이 재킷을 내밀다 멈췄다.“갑자기 무슨 소리예요.”“사기당한 불쌍한 여자 챙기는 거면 안 해도 된다고.”“술 얼마나 마셨어요?”“두 병.”“그건 거짓말이고.”“한 병 조금 넘게.”도현은 재킷을 서아 어깨에 걸쳤다.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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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경매개시결정

법원 우편은 두 통이었다.봉투 앞면에 윤서아와 강도현의 이름이 각각 적혀 있었다. 집배원은 본인 확인을 한 뒤 하나씩 건넸다.“같은 주소에 같은 법원에서 왔네요.”서아는 웃지 못했다.도현과는 전날 밤 이후 필요한 말만 했다. 욕실 쓰세요. 문 잠글게요. 우편 왔어요. 존댓말이 처음 만난 날보다 더 각이 서 있었다.식탁 양끝에서 봉투를 뜯었다. 첫 장 위쪽에 굵은 글자가 박혀 있었다.`부동산임의경매 개시결정`서아는 두 번째 줄부터 읽지 못했다.입주한 지 석 달째, 창밖 은행잎이 거의 다 떨어진 늦가을이었다. 사건번호 아래에는 채권자와 채무자 이름이 나왔고, 별지에는 302호 주소가 적혀 있었다. 현관문에 붙은 302라는 숫자와 같은 호수인데 법원 서류 안에서는 사람이 살지 않는 물건처럼 보였다.도현은 휴대전화로 모든 장을 찍었다. 서아도 따라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이제 나가라는 거예요?”“아닙니다. 개시결정이면 절차 시작됐다는 뜻일 겁니다.”“그걸 어떻게 알아요.”“전에 상담 때 들었잖아요.”“나는 기억 안 나요.”도현이 한지수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피커폰 너머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변호사는 지금 바로 퇴거하라는 문서가 아니며, 별도로 배당요구 종기와 필요한 절차를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황조사나 감정평가 연락이 올 수 있으니 문서를 보관하라는 설명도 덧붙였다.“그럼 저희는 계속 살아도 되는 거죠?”“점유와 전입을 유지 중이라면 임의로 움직이지 마시고, 다음 상담 때 서류를 전부 가져오세요. 두 분 권리관계는 각각 검토해야 합니다.”통화가 끝났다. 도현은 봉투와 결정문을 날짜순으로 파일에 넣었다.서아는 첫 장만 들고 있었다.“서아 씨 것도 넣을까요?”“내가 할게요.”“손이 떨립니다.”“안 떨어요.”종이 모서리가 파르르 움직였다. 서아는 파일을 빼앗듯 받아 작은방으로 갔다. 문을 닫으려다 방향을 바꿔 욕실로 들어갔다.찬물을 틀었다. 세면대에 물이 부딪치는 소리가 커지면 머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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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실수하기 좋은 밤

도현의 팔에 안긴 시간은 십 분이 채 안 됐다.그 뒤 사흘 동안 서아는 그 십 분을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올렸다. 욕실에 들어갈 때, 도현의 셔츠가 빨래건조대에 걸려 있을 때, 냉장고에서 같은 생수를 꺼내다 손이 겹칠 때마다 그랬다.도현도 평소와 달랐다. 아침마다 정확히 일곱 시 십 분에 욕실 앞에 나타나던 사람이 서아와 마주치면 수건을 두고 왔다며 방으로 돌아가거나 면도기를 다시 가지러 갔다.그 사흘 사이 둘은 법원도 다녀왔다. 배당요구 종기까지 미루지 말라는 한지수의 말을 듣고 각자의 계약서와 송금 내역, 주민등록 자료를 따로 제출했다. 접수 도장은 같은 날짜였지만 서류는 두 묶음이었다.법원 직원은 접수 여부만 확인해 줄 뿐 누가 앞서는지 말하지 않았다. 서아는 이번에는 묻지 않았다. 경찰도 주민센터도 법원 창구도 그걸 정하는 곳이 아니라는 말을 이제 외울 정도로 들었다.건물을 나와 도현이 접수증 사본을 한 장 더 만들자고 했다.“사진 찍었는데요.”“종이도 둬.”“도현 씨 파일 터지겠어요.”“돈보다 먼저 터지면 안 되지.”둘은 웃지 못하고 근처 문구점에 들어갔다. 복사비 이백 원은 서아가 냈다.목요일 밤에는 둘 다 늦었다.서아가 집에 도착했을 때 도현은 싱크대 앞에서 컵라면 용기에 뜨거운 물을 붓고 있었다. 식탁에는 법원에 제출하고 남은 서류 사본이 날짜별로 정리돼 있었다.“또 라면이에요?”“밥 없잖아요.”“냉동실에 있어요.”“서아 씨 칸인데.”“하나 먹는다고 신고 안 해요.”도현이 냉동실 문을 열었다. 가운데 붙인 테이프가 물기에 들떠 끝부분이 말려 있었다.“김치볶음밥 먹을래요?”“컵라면 물 부었는데.”“그럼 둘 다 먹어.”말이 먼저 나갔다. 서아는 정정하지 않았다. 도현도 아무 말 없이 볶음밥 두 봉지를 꺼냈다.도현은 볶음밥 두 봉지를 차례로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둘 다 가운데가 덜 데워져 차가웠다. 도현이 서아 몫부터 다시 돌리려 하자 서아는 그대로 떠먹었다.“그러다 배탈 납니다.”“기다리기 싫어요.”“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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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없던 일로 하죠

아침 일곱 시, 도현은 식탁에 커피 두 잔을 놓았다.서아는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그걸 봤다. 평소라면 제 컵부터 가져갔을 텐데 가방을 먼저 챙겼다.“커피 안 마셔요?”“회사 가서 마시려고요.”“어제 잠 못 잤잖아.”반말이 귀에 걸렸다. 서아는 현관 앞에 서서 운동화 끈을 괜히 다시 묶었다.“도현 씨.”“왜.”“어제 일은 없던 일로 하죠.”뒤에서 컵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싫었어?”“그건 아니고.”“그럼.”서아는 몸을 일으켰다. 도현은 식탁에 한 손을 짚은 채 서 있었다.“우리 둘 다 지금 정상적인 상황 아니잖아요. 집 때문에 매일 붙어 있고, 나갈 수도 없고. 이런 때 하는 건 실수일 수 있으니까.”“맨정신이라고 네가 먼저 말했잖아.”“맨정신에도 실수는 해요.”“알겠습니다.”도현의 말끝이 반듯해졌다.“그렇게 하죠.”서아는 문을 연 채 몇 초 서 있었다. 뒤에서는 컵을 드는 소리만 났다. 서아는 문을 닫고 나갔다.그날부터 집 안의 시간이 정확해졌다.도현은 오전 여섯 시 십 분에 욕실에 들어가 여섯 시 사십 분 전에 나왔다. 서아가 쓰는 시간과 한 번도 겹치지 않았다. 냉장고에는 자기 칸에만 음식을 넣었다. 늦는 날에도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식탁 위 공동 정산표에는 다시 숫자만 적혔다. `세제 4,900원`, `휴지 8,700원`. 도현은 영수증까지 집게로 물려 놨고 서아는 확인 표시를 한 뒤 정확히 절반을 보냈다.수요일에는 서아가 찌개 2인분을 끓였다가 절반을 냉장고에 넣었다. 다음 날에도 그대로였다. 금요일 아침 표면에 기름이 굳은 것을 보고 결국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렸다.도현은 그날부터 커피도 한 잔만 내렸다.서아도 묻지 않았다. 피해자 단체방 공지는 따로 확인했고, 법원 서류 사본도 각자 출력했다. 같은 집에서 같은 사건을 처리하면서 대화할 일이 없었다.회사에서는 오민지가 점심시간에 전화를 걸었다.“너 요즘 목소리 왜 그래. 그 남자랑 싸웠어?”“안 싸웠어.”“그럼 잤어?”“야.”“목소리 보니까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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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계약에 없던 일

“두 바늘 꿰맨 손으로 뭘 고쳐요.”서아가 공구함을 빼앗았다.“왼손으로 하면 됩니다.”“왼손으로 나사를 제대로 돌릴 수는 있고요?”“드라이버 주세요.”“싫어요.”도현은 깨진 유리부터 빗자루로 모았다. 서아는 그의 붕대 끝에 붉은 점이 번진 것을 보고 드라이버를 등 뒤로 숨겼다.“앉아요.”“선반 떨어집니다.”“떨어지라고 해요. 이 집도 넘어가는데 선반 하나가 뭐라고.”도현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서아는 구급함에서 의료용 테이프를 꺼내 들뜬 붕대 끝을 덧붙였다. 손을 잡자 그가 손가락을 조금 폈다.“회사에서는 조심하라면서 본인은 맨손으로 유리 줍고.”“봤어요?”“피 묻었잖아.”다시 반말이었다. 서아는 붕대를 고정한 테이프를 손톱으로 눌렀다.“없던 일로 하는 거, 취소하면 안 돼요?”도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뭘 취소해.”“없던 일로 하자는 말.”“왜.”“집에 갇혀서 그랬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건 맞아요. 그런데 확인도 하기 전에 없애는 건 아닌 것 같아서.”도현이 다친 손을 빼지 않았다.“나는 없던 일로 못 해.”“그럼 왜 알겠다고 했어요?”“싫다는데 뭘 해.”“한 번은 더 물어보지.”“물으면 대답 바꿨을 거야?”서아는 의료용 테이프 포장지를 반으로 접었다. 도현이 낮게 웃었다.“거봐.”“지금은 바꿨어요.”도현의 웃음이 멎었다.“미안해요.”“뭐가.”“나 혼자 없던 일로 정한 거. 도현 씨가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무서워서 그랬어요.”“뭐가 무서운데.”“집 나가면 끝날까 봐. 여기서만 통하는 마음일까 봐.”도현은 붕대 감은 손을 내려다봤다.“끝나는지 아닌지는 그때 물어보면 되잖아.”“도현 씨는 그게 쉬워요?”“아니. 그래서 지금도 다친 손으로 선반이나 고치려고 들지.”서아가 웃자 도현이 테이프가 다시 들뜬 곳을 턱으로 가리켰다.“여기도.”서아는 테이프를 한 조각 더 잘라 붙였다.“계약서에 없는 일은 하나씩 물어보면 되잖아요. 나도 물어볼게요.”“지금 물어봐.”“손부터 낫고.”서아는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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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집 밖에서 만난 사람

“토요일에 밖에서 만날래요?”서아가 먼저 물었다.도현은 커피를 마시다 컵을 내려놨다.“우리 지금도 만나고 있는데.”“이건 거주 중이고.”“그럼 밖에서는 뭘 합니까.”“데이트.”도현이 대답하기까지 삼 초쯤 걸렸다.“어디서 몇 시.”“왜 회의 잡듯이 물어요.”“늦으면 또 화낼 거잖아.”토요일 오후 두 시, 두 사람은 집에서 따로 나와 불광역 개찰구 앞에서 만났다. 같이 출발하면 데이트인지 장 보러 가는 길인지 애매하다는 서아의 주장이었다.초겨울 바람이 불기 시작한 날이었다. 서아는 먼저 나와 역 화장실에서 립스틱을 한 번 더 발랐다. 도현은 약속 시간보다 십 분 일찍 와 있었다.도현은 평소 출근할 때 입던 셔츠 대신 검은 티셔츠를 입었다. 머리에도 뭔가 바른 흔적이 있었다.“꾸몄네요.”“이게?”“머리 딱딱한데.”서아가 앞머리를 눌러보려 하자 도현이 고개를 피했다.“본인은 입술 색도 다르면서.”“그걸 알아요?”“매일 보는데 모르나.”둘은 망원시장까지 지하철을 탔다. 도현은 사람이 몰릴 때 서아의 팔꿈치를 잡았다가 자리가 나자 바로 놓았다. 집에서는 어깨와 무릎이 부딪쳐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밖에서 닿으니 둘 다 손 둘 곳을 찾지 못했다.시장에서 고로케 하나와 닭강정 작은 컵을 샀다. 도현이 계산하려 하자 서아가 휴대전화를 먼저 내밀었다.“이번 건 내가.”“다음 건 내가.”“정산 안 해요?”“데이트비도 십 원 단위로 보내게?”“빚지는 건 싫어서.”“그럼 번갈아 내.”서아는 삼천 원짜리 고로케까지 공동 정산표에 올리는 짓은 안 하기로 했다.시장 끝 중고서점에도 들어갔다. 서아가 추리소설을 고르는 동안 도현은 건축 잡지 코너에 쪼그려 앉아 절판된 책을 찾았다.“집에서도 도면 보고 여기서도 건물 봐요?”“서아는 회사에서 음식 보고 시장에서도 먹잖아.”“그건 살아야 하니까.”“나도 이거 봐야 살아.”서아는 그가 든 낡은 책의 가격표를 봤다. 만 팔천 원이었다. 도현은 두 번 펼쳐보고 제자리에 꽂았다.“안 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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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회사에 소문이 났다

소문은 총무팀 복사기 앞에서 시작됐다.서아는 전세피해 관련 대출 상담에 필요한 재직증명서와 급여명세서를 받으러 갔다. 담당자는 서류 봉투를 건네며 평소 목소리로 물었다.“전세사기 피해 관련 대출 상담용 맞으시죠? 용도 문구 이렇게 넣으면 되나요?”복사기 앞에는 영업팀 직원 둘이 서 있었다.서아는 봉투를 받아 들었다.“네. 그리고 이건 개인정보니까 다른 데 말씀하지 마세요.”“그럼요.”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두 사람이 괜찮냐고 물었다. 한 명은 아는 법무사를 소개해주겠다고 했고, 한 명은 자기 사촌도 당했다며 한숨을 쉬었다.입주한 지 넉 달 가까이 숨긴 일이 네 시간 만에 같은 층을 돌았다. 메신저로 `힘내세요`라고 보낸 사람은 복도에서 마주치자 보증금이 얼마였는지 물었다. 서아는 답하지 않고 화장실로 들어가 은행 앱을 열었다. 잔액은 아침과 같았지만 세 번 새로고침했다.점심에는 한 직원이 서아 맞은편에 앉자마자 말했다.“요즘 계약 전에 유튜브만 봐도 다 나오잖아요. 근저당 같은 거.”서아는 식판을 내려놓았다.“봤어요.”“그런데도 당해요?”“네. 그러더라고요.”한미경 차장이 맞은편 의자를 발로 밀어 앉았다.“밥 먹을 때 남의 보증금 씹지 말고 제육이나 씹어.”직원이 민망하게 웃으며 자리를 옮겼다. 서아는 숟가락을 들었지만 국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렸다.오후에는 업무에서도 실수가 났다.다음 달 출시할 육개장 라벨 최종본에서 알레르기 유발 원재료 하나가 빠졌다. 서아가 지난밤 수정한 파일이었다. 인쇄 직전 품질팀이 발견해 생산 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협력사 일정이 하루 밀렸다.회의실에서 한미경이 교정지를 책상에 내려놨다.“이거 윤 대리가 마지막 확인했지.”“네.”“왜 놓쳤어.”“죄송합니다.”“사과 말고 원인.”서아는 밤마다 은행 앱을 열었다는 말도, 경찰서 추가 진술 때문에 새벽까지 자료를 정리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제 검수가 부족했습니다. 오늘 안에 수정본 보내고 협력사 일정 다시 잡겠습니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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