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는 두 장, 집은 하나

계약서는 두 장, 집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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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6jay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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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간 모은 돈과 전세대출로 겨우 마련한 첫 집. 이삿날 윤서아는 자신의 집에 먼저 살고 있던 강도현과 마주친다. 같은 주소, 같은 집주인, 두 장의 계약서. 집주인은 잠적하고 보증금은 묶였다. 갈 곳 없는 두 사람은 피해가 해결될 때까지 한집살이를 시작한다. 냉장고 칸부터 생활비까지 사사건건 부딪히던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의 상처를 가장 먼저 알아보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경매 소식과 함께 동거의 끝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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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01화. 이삿날, 모르는 남자가 있었다

목요일 오후 1시 7분, 현관문은 열려 있었다.

서아는 오전 11시 10분에 보증금의 남은 1억 1천7백만 원을 보냈다.

계약할 때 이미 넣은 1천3백만 원, 이날 은행 창구에서 보낸 자기 돈 4천5백만 원과 전세대출 7천2백만 원을 합치면 보증금 1억 3천이었다. 송금 한도 때문에 은행 창구에서 한 차례 막혔고, 은행원이 임대인과 통화한 후에야 돈이 나갔다.

김상식은 `입금 확인했습니다`라는 문자와 현관 비밀번호를 보냈다. 서아는 택시를 타고 오며 문자 속 비밀번호를 두 번이나 확인했다. 이제 남의 원룸을 전전하며 이사 날짜를 맞출 필요가 없었다.

윤서아는 손에 든 휴대폰과 도어록을 번갈아 봤다. 그럴 리 없지만 주소도 다시 봤다.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해솔빌라 302호. 방금 지나온 층 안내판에도 302호가 적혀 있었다.

문 안에서 종이 박스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사다리차 아저씨들이 먼저 올라왔나?”

서아가 현관에 발을 들여놓았다. 회색 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거실 한복판에 서 있었다. 발치에는 `서재`, `주방`, `도면`이라고 쓴 박스가 쌓여 있었다.

남자가 먼저 물었다.

“누구세요?”

“그쪽이야말로 누구세요?”

거실 벽에는 서아가 집을 보러 왔을 때는 없던 큰 시계가 기대어 있었다. 남자가 가져온 것이었다. 싱크대 위에는 종이컵과 공구함까지 나와 있었다. 비어 있어야 할 자리를 남의 물건이 이미 차지하고 있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하필 이럴 때 이사 기사의 전화가 왔다.

“고객님, 장롱부터 올릴게요. 문 비밀번호 풀어 놓으셨죠?”

서아는 남자를 봤다. 남자도 전화기 밖으로 새어 나온 목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잠시만요. 아저씨, 아직 올리지 마세요.”

전화를 끊고 서아가 신발을 벗었다.

“여기 오늘부터 제가 살 집인데요.”

“저도 그런데요.”

남자가 식탁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들어 보였다. 김상식에게서 받은 문자에는 서아가 받은 것과 똑같은 현관 비밀번호가 적혀 있었다.

“강도현입니다. 오늘 입주로 계약했습니다.”

“윤서아예요. 저도 오늘 입주고요.”

“저는 9시 반에 잔금을 보내고 현관 비밀번호를 받았습니다. 아침부터 이사 중이었고요.”

“저는 11시 10분에 보냈어요. 그렇다고 이 집이 시간 단위로 세를 주는 건 아니잖아요.”

“어디서 계약했습니까?”

“새길부동산이요.”

도현이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서아는 이사용 가방에서 파란 파일을 꺼냈다. 전세계약서, 등기사항증명서, 중개대상물 확인설명서, 임대인에게 잔금을 보낸 이체 확인증까지. 어제만 해도 노트북에 스캔본을 따로 저장해 둔 자신이 대견했다.

도현도 배낭에서 투명 파일을 꺼냈다. 두 사람은 식탁 양쪽에 서서 각자의 서류를 내밀었다.

주소는 같았다.

임대인도 김상식으로 같았다. 도장의 모양과 임대인 계좌까지 일치했다.

다른 건 계약일이었다. 도현은 입주 6주 전에, 서아는 3주 전에 계약했다. 둘 다 계약 당일 주민센터에서 확정일자도 받아 두었다.

“제가 먼저 계약했다는 말로 끝날 문제는 아닌 것 같군요.”

“당연하죠. 오늘 같은 날 들어오라고 한 건 집주인이고요.”

“이거 원본 맞습니까?”

도현이 물었다.

“지금 저보고 위조했다는 거예요?”

“확인하는 겁니다.”

“저도 확인 좀 할게요. 강도현 씨 보증금은 얼마인데요?”

“1억 4천만 원이요.”

서아는 자기 계약서의 보증금 칸을 엄지로 눌렀다. 1억 3천만 원. 거기에 남의 돈 1억 4천만 원이 더 얹혔다.

아래에서 경적이 연거푸 울렸다. 전화기 너머로 사다리차 기사가 주차 단속 차량이 돌고 있다고 재촉했다.

“고객님, 이십 분 넘었어요. 대기료 붙습니다. 여기 길도 막아서 빨리 정해 주셔야 해요.”

서아는 자신의 짐을 다시 싣고 갈 곳을 떠올려 보다가 포기했다. 남은 잔액으로 이사비를 두 번 낼 수는 없었다. 보관창고를 당일에 구할 수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작은방으로 제 짐 넣을게요.”

도현이 큰방과 거실에 놓인 자신의 짐을 봤다.

“일단 어느 쪽도 짐을 빼지 맙시다. 대신 서로의 물건은 손대지 않는 걸로 하죠.”

“그건 당연하죠.”

서아는 이사 기사에게 작은방과 현관 안쪽으로 짐을 올려 달라고 했다. 새 주소로 인수했다는 이사 확인서도 받았다. 기사가 식탁 위의 계약서 두 장을 힐끗거렸지만 묻지는 않았다.

“일단 집주인한테 전화하죠.”

서아는 계약서에 적혀 있는 김상식의 번호를 눌렀다. 연결음이 한 번, 두 번 갔다.

이어서 기계음이 나왔다.

전원이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된다는 말이었다.

식탁 위에는 302호의 주소가 적힌 계약서가 두 장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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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오후 1시 7분, 현관문은 열려 있었다.서아는 오전 11시 10분에 보증금의 남은 1억 1천7백만 원을 보냈다.계약할 때 이미 넣은 1천3백만 원, 이날 은행 창구에서 보낸 자기 돈 4천5백만 원과 전세대출 7천2백만 원을 합치면 보증금 1억 3천이었다. 송금 한도 때문에 은행 창구에서 한 차례 막혔고, 은행원이 임대인과 통화한 후에야 돈이 나갔다.김상식은 `입금 확인했습니다`라는 문자와 현관 비밀번호를 보냈다. 서아는 택시를 타고 오며 문자 속 비밀번호를 두 번이나 확인했다. 이제 남의 원룸을 전전하며 이사 날짜를 맞출 필요가 없었다.윤서아는 손에 든 휴대폰과 도어록을 번갈아 봤다. 그럴 리 없지만 주소도 다시 봤다.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해솔빌라 302호. 방금 지나온 층 안내판에도 302호가 적혀 있었다.문 안에서 종이 박스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사다리차 아저씨들이 먼저 올라왔나?”서아가 현관에 발을 들여놓았다. 회색 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거실 한복판에 서 있었다. 발치에는 `서재`, `주방`, `도면`이라고 쓴 박스가 쌓여 있었다.남자가 먼저 물었다.“누구세요?”“그쪽이야말로 누구세요?”거실 벽에는 서아가 집을 보러 왔을 때는 없던 큰 시계가 기대어 있었다. 남자가 가져온 것이었다. 싱크대 위에는 종이컵과 공구함까지 나와 있었다. 비어 있어야 할 자리를 남의 물건이 이미 차지하고 있었다. 속이 울렁거렸다.하필 이럴 때 이사 기사의 전화가 왔다.“고객님, 장롱부터 올릴게요. 문 비밀번호 풀어 놓으셨죠?”서아는 남자를 봤다. 남자도 전화기 밖으로 새어 나온 목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잠시만요. 아저씨, 아직 올리지 마세요.”전화를 끊고 서아가 신발을 벗었다.“여기 오늘부터 제가 살 집인데요.”“저도 그런데요.”남자가 식탁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들어 보였다. 김상식에게서 받은 문자에는 서아가 받은 것과 똑같은 현관 비밀번호가 적혀 있었다.“강도현입니다. 오늘 입주로 계약했습니다.”“윤서아예요. 저도 오늘 입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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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2화. 둘 중 하나는 가짜
작은방으로 장롱이 올라오는 동안 도현은 자기 박스를 한쪽으로 밀어 길을 내고 휴대폰을 들었다.“저는 중개사한테 연락할게요.”새길공인중개사의 대표 번호는 두 사람의 계약서에 똑같이 적혀 있었다. 통화 연결음이 여덟 번 갔다. 눌렀던 번호를 다시 눌러도 답은 같았다.“안 받습니다.”“저도요.”서아는 임대인과 나눈 문자 대화를 처음부터 캡처했다. 프로필 사진, 계좌번호, 비밀번호를 보낸 시간이 화면에 남았다. 손가락이 자꾸 다른 곳을 눌러 세 번을 다시 했다.현관은 바로 복잡해졌다. 서아의 짐이 신발장 앞과 작은방으로 밀려들어왔다. 이사 기사들은 이상한 기류를 느낀 듯 필요한 말만 했다.“침대는 어느 방으로 넣을까요?”서아가 작은방을 가리켰다. 큰방에는 도현의 침대 프레임과 박스가 이미 들어가 있었다. 서아의 슈퍼싱글 매트리스는 작은방 문틀에 빡빡했다.“세워놓아 주세요. 오늘은 정리 못 할 것 같아서요.”도현이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이사비를 결제하는 데도 십 분이 걸렸다. 결제 금액을 두 번이나 다시 확인한 뒤에야 서명했다. 기사가 영수증을 내밀고 나서도 서아는 자신이 지금 얼마를 결제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저는 주민센터부터 갈 겁니다.”도현이 말했다.“저도 가요. 전입신고하려고 월차까지 낸 사람한테 지금 나가라고 할 거예요?”“그런 뜻이 아닙니다.”“아까부터 뜻은 좋으시네요.”둘은 원본 서류와 신분증, 각자의 이삿짐이 들어온 현관과 방 사진을 챙겨 주민센터로 갔다. 대기표는 27번과 28번이었다. 서아가 먼저 소리 나게 웃었다.“이런 건 줄을 세워 주네.”창구 직원은 같은 호실의 계약서가 두 장인 걸 보고 옆자리 직원을 불렀다. 두 사람이 따로 전입신고서를 작성했고, 직원은 주소와 실제 거주 사실을 확인하는 절차가 더 필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서아는 접수증부터 사진으로 남겼다.“어느 분이 임차인인지 여기서 판단해 주시는 건 아니죠?”서아의 질문에 직원이 고개를 저었다.“주민센터에서는 계약 유효나 우선순위를 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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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길공인중개사 출입문에는 `임대` 스티커만 남아 있었다.유리문 안쪽은 비어 있었다. 상담용 책상과 의자, 벽에 붙어 있던 매물표까지 사라졌다. 블라인드가 반쯤 내려와 있어 천장에 달린 형광등만 거리에서 반사됐다.서아가 손잡이를 당겨 봤다. 잠긴 문이 덜컥거렸다.“이사를 갔으면 종이라도 붙여 놓던가.”“임대 스티커는 오래된 겁니다.”도현이 스티커 모서리에 쌓인 먼지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서아는 저 사람이 이런 상황에서도 그걸 확인하는 게 신기했다. 좋은 뜻은 아니었다.통화하며 오가던 중개사 조희철의 목소리가 아직 생생했다. `대리님처럼 꼼꼼한 분은 처음 봅니다.` 그 말을 듣고 웃었던 자신이 짜증났다.서아는 유리문과 비어 있는 실내를 찍었다. 간판과 건물 번호가 같이 나오도록 반대편에서도 사진을 남겼다.옆 세탁소 주인이 문을 반쯤 열고 내다봤다.“부동산 사람 찾아요?”서아가 조희철의 사진을 보여 주자 주인은 바로 알아봤다. 그는 어제 저녁에 탑차 한 대가 왔고, 남자 두 명이 사무실 짐을 실어 갔다고 했다.“폐업한다는 얘기는 못 들으셨어요?”“없었어요. 이사냐고 물으니까 사무실 가구 바꾸는 거라고만 하던데.”세탁소 외부 카메라는 부동산 출입구 일부가 보이는 각도였다. 주인은 수사기관에서 요청하면 보존해 둔 영상을 제출하겠다고 했다. 도현이 업체 이름과 연락처를 메모했다. 서아는 세탁소 간판과 카메라 위치가 한 화면에 들어오도록 찍었다.“등기 다시 보시죠.”두 사람은 가까운 무인민원발급기가 있는 구청으로 갔다. 도현이 당일 등기사항증명서를 다시 발급받았다. 소유자 이름은 여전히 김상식이었다.그러나 계약 당시 서류에는 없던 근저당권이 추가돼 있었다. 등기 접수 시각은 이날 오전 8시 50분, 채권최고액은 9천5백만 원이었다.서아가 해당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이거 언제 들어온 거예요?”“접수는 우리가 잔금 보내기 전이네요.”서아가 자기 말을 정정했다.“아니, 그래도 이게 어떤 영향인지는 우리가 판단하면 안 되겠죠.”“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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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4화. 오늘 밤만
오민지의 원룸은 여섯 평이었다.요 하나를 펴면 현관문이 반만 열렸고, 요를 접으면 세 사람이 앉을 자리가 나왔다. 민지는 남자친구 재현의 이불을 개며 당분간 자기가 바닥에서 자겠다고 했다.“안 돼. 내가 며칠씩 여기 깔고 앉아 있으면 우리 세 명 다 미쳐.”“그럼 어떡해. 그 남자랑 같이 자게?”“방 두 개야. 문 잠그고 자면 돼.”서아는 아까 작은방에 세워 놓은 매트리스를 떠올렸다. 전자레인지는 싱크대에, 사무실로 배송하지 못한 신제품 샘플은 냉장고에 들어 있었다. 속옷과 출근복도 모두 거기 있었다.“짐만 좀 가지고 올게. 내일 회사는 가야 하니까.”서아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민지의 화장실에 들어가 숙박 앱부터 열어 봤다. 주변 비즈니스호텔은 1박에 9만 8천 원이었고, 한 달 살기로 검색하자 백만 원이 넘었다. 고시원은 예약 후 방문 상담이 필요했고, 자리가 있는 지점은 회사까지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중고 거래 앱에서 보관이사 업체도 찾아봤다. 물량을 확인하고 견적을 내겠다는 답만 왔다. 지금 짐을 모두 빼면 권리에 어떤 영향이 있는지도 확인하지 못했다.서아는 예약 화면을 모두 닫고 택시 호출지에 해솔빌라 302호를 찍었다.“나도 가자.”“됐어. 재현이 들어올 시간이잖아.”민지는 도어록을 누르려는 서아의 손을 잡았다.“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 그 사람 신분증은 봤어?”“경찰이 봤어. 중개사보다는 확실해.”불안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한 말이었는데 민지는 웃지 않았다. 자기 집 비밀번호와 재현의 전화번호를 문자로 보낸 뒤에야 서아를 보냈다.밤 10시가 넘어 서아는 302호로 돌아왔다.신발장 아래에는 처음 보는 남자 구두 두 켤레가 나란히 들어가 있었다. 그 위에 자신의 흰 운동화를 놓으려니 자리가 적었다. 서아는 구두 한 켤레를 안쪽으로 밀었다.도현은 식탁에서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 아침의 티셔츠 대신 남색 셔츠를 입었는데 소매는 대충 접혀 있었다. 한쪽에 놓인 종이컵 세 개가 모두 비어 있었다.“오실 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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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5화. 동거 계약서
아침 일찍 서아가 전세피해 상담창구에 다시 전화했다.상담원은 두 계약의 권리관계를 즉석에서 정해 줄 수는 없다고 했다. 전입신고 접수 결과, 확정일자, 인도 시각, 등기 접수 내용을 보고 개별 법률상담을 받아야 했다.“지금 다른 곳으로 나가면요?”서아가 물었다.“점유를 유지하는 방법과 전입 상태는 전문가가 서류를 보고 안내할 때까지 임의로 바꾸지 마세요. 짐을 모두 빼거나 주소를 옮기기 전에 반드시 상담받으셔야 합니다.”“다른 임차인과 한집에 있는 건요?”“서로 안전에 문제가 없고, 실제 거주 사실을 명확히 남기면서 합의하신다면 가능할 수는 있어요. 다만 이 전화로 권리가 확정되는 건 아닙니다.”서아는 `짐 임의로 빼지 말 것`을 통화 내내 세 번 적었다.거실에서는 도현이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현진 형, 아는 변호사 중에 임대차 전문으로 하는 분 없어요? 네. 지금 같은 호실에 두 명이 있습니다.”그는 오늘 퇴근 후 장현진이 알아본 변호사와 전화 상담을 하기로 했다. 서아도 자신이 신청한 상담 예약 시간을 알려 줬다.“당분간은 나갈 수도 없겠네요.”서아가 말했다.“저도 같습니다.”“그럼 일단 정해요. 이대로는 살 수 없어요.”도현은 식탁 위의 종이컵과 자기 양말 한 짝을 보았다. 양말은 뒤집힌 채였다. 그가 아무 말 없이 양말부터 집어 들었다.서아는 출근했다. 그날 입을 옷과 회사용 화장품은 박스에서 꺼냈다. 한미경 차장은 서아의 주름진 블라우스를 히끗 보더니 물었다.“이사하다가 싸웠냐?”“매트리스랑요.”“졌어?”“제가 졌어요.”한 차장은 더 묻지 않고 신제품 품평표를 내밀었다.“점심 전에 먹고 써. 어제 한숨도 못 잤나 보네. 얼굴이 그 모양이지?”“네 시간 잤어요.”“이사가 아니라 살인을 했나.”서아는 웃으며 품평표를 받았다. 한 차장이 등을 돌린 후 은행 앱을 열었다. 잔액은 전날보다 달라지지 않았다. 서아는 무릎 위에 손을 숨긴 채 앱을 닫았다.저녁 8시, 둘은 서로 다른 상담원에게 들은 내용을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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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6화. 욕실은 하나뿐이라서
월요일 아침 7시 8분, 욕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윤서아 씨, 2분 뒤 제 시간입니다.”서아는 머리에서 샴푸 거품을 씻어 내며 벽시계를 봤다. 2분 남았다.“아직 제 시간이에요.”“드라이기까지 하시면 넘깁니다.”“드라이기는 방에서 해요.”“어제는 안 그러셨습니다.”“어제는 일요일이잖아요.”문 밖에서 도현이 뭐라고 중얼거렸다. 서아는 샤워기를 끄고 수건으로 머리를 어설프게 감았다.한쪽 머리가 눌린 도현이 양치컵을 든 채 문 앞에 서 있었다.“2분밖에 안 넘겼어요.”“이 시간에는 토론할 생각이 없습니다.”도현이 욕실로 들어가자마자 서아는 헤어드라이기를 켰다. 작은방 한쪽에는 아직 풀지 못한 박스가 남아 있었다. 전기 코드가 짧어 서아는 반쯤 열린 방문 앞에 서서 머리를 말렸다.욕실 문이 열렸다. 도현이 헤어드라이기 소리를 뚫고 뭐라고 했다.“뭐라고요?”서아가 드라이기를 끄었다.“아닙니다.”“다 들리거든요.”“다음 합의서에 소음 조항도 넣죠.”“좋아요. 양치는 제 시간 전에 해놓으시고요.”서아는 머리카락이 덜 마른 채 옷을 입었다. 한 손으로 아이라인을 그리며 다른 손으로는 회사에 가져갈 보냉가방을 열었다. 편의점용 차돌된장찌개 샘플 세 개가 투명한 지퍼백 안에 들어 있었다. 제조일자와 배합 코드가 적힌 스티커까지 확인하고 문을 닫았다.도현은 식탁 전체에 A3 도면을 펼쳐 놓고 있었다. 빨간 펜으로 표시한 벽체와 숫자가 도면 위에 가득했다.“공용 식탁에 이걸 다 펼쳐 놓으면 저는 어디서 밥 먹어요?”“아침은 안 드시잖습니까.”“제가 안 먹는지 어떻게 알아요?”“주말 내내 안 드셨으니까요.”서아는 반박하려다가 자신이 먹은 것을 생각해 봤다. 친구와 먹은 떡볶이, 어제 밤 방에서 더운물만 부어 먹은 컵누들이 전부였다.“오늘부터 먹을 거예요. 일단 저 가방 좀 놓을게요.”서아가 식탁 빈틈에 보냉가방을 밀어 넣었다. 가방이 도면 모서리에 걸려 기울었다. 지퍼백 아랫부분이 벌어지며 밀봉이 터진 샘플의 갈색 국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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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7화. 당한 사람끼리
장현진이 보낸 단체대화방 링크는 접속 전에 확인할 것이 많았다.계약서의 임대인 성명과 주소, 중개사무소 상호가 나오는 부분을 찍어 운영자에게 보내야 했다. 주민등록번호와 서명, 계좌번호는 가린 뒤에야 접속 승인이 됐다.단체방 이름은 `김상식·새길 피해확인방`이었다. 인원은 서아와 도현이 들어가자 열한 명이 됐다.채팅방은 조용했다. 피해자 대표를 맡은 최은정이 고정해 놓은 공지에는 경찰 접수 번호, 법률상담 예약 방법, 등기 발급 순서가 적혀 있었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 금지`, `집주인을 찾아가 직접 충돌하지 말 것`도 눈에 띄었다.최은정은 온라인에 올린 자료가 수사 증거를 대신하지 않으니 각자 원본과 전자파일을 따로 보존하라고 거듭 알렸다. 서아는 개인 클라우드와 외장메모리에 같은 폴더를 복사했다. 종이 원본은 방수 파일에 넣었다.서아는 채팅방을 맨 위까지 올려 처음부터 읽었다.응암동 원룸 보증금 8천만 원. 역촌동 빌라 1억 1천만 원. 녹번동 201호 9천5백만 원. 건물과 호실은 달랐지만 예금주와 중개사 이름은 같았다.“여기 201호도 있어요.”서아가 휴대폰을 도현에게 내밀었다. 도현은 자신의 폰으로 이미 같은 내용을 읽고 있었다.“201호는 중복 계약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근저당 접수 시점이 비슷합니다.”“그럼 우리만 한 집에 두 명이네요.”“자랑거리는 아닙니다.”“알아요.”서아는 단체방에 302호 계약이 두 건이라고 적었다가 지웠다. 도현을 봤다.“어디까지 써도 돼요?”“우리가 함께 확인한 사실만 쓰죠. 보증금은 서로 동의하면 공개하고요.”서아는 도현의 동의를 받아 두 계약의 계약일과 잔금 시간, 입주 시간을 올렸다. 개인정보를 가린 계약서 사진도 함께였다.대화방은 오 분 만에 울리기 시작했다.`302호도 저 건물주에게 돈 보낸 게 맞네요.``중개사도 같습니다.``당한 사람끼리는 자료 숨기지 말고 맞춰 봅시다. 단, 수사기관에 제출할 건 따로 보관하세요.`서아는 인용 표시가 붙은 자기 글을 한참 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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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8화. 선을 긋는 남자
토요일 오전, 도현이 거실 바닥에 파란 테이프를 붙였다.서아는 택배 박스를 접다 말고 그를 보았다. 도현은 식탁 다리 아래부터 싱크대 앞까지 테이프를 길게 일직선으로 붙였다. 손바닥으로 눌러 주름까지 폈다.“지금 뭐 하세요?”“공용공간에서도 수납구역은 나누는 게 낫겠습니다.”“그래서 남북한 만들어요?”“얼마나 사는지 모르니 제거하기 쉬운 양생 테이프를 쓴 겁니다.”“말하는 본새가 더 짜증 나는 거 아세요?”도현은 테이프를 손으로 끊었다. 선은 식탁의 정확한 중앙을 지나갔다.“식탁에도 붙일 거예요?”“매번 쓰기 전에 사용 시간을 공유하는 것보다 편할 겁니다.”“집에서 편하자고 식탁을 절반으로 자르지는 않아요.”서아는 현관에 쌓인 신발부터 가리켰다. 자신의 신발은 운동화, 구두, 샌들, 슬리퍼까지 여섯 켤레였다. 도현의 것은 구두 두 켤레와 슬리퍼가 다였다.“신발장은 그쪽이 더 써도 됩니다.”“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절반으로 해요.”“제 자리를 비워 놓는 건 제 선택입니다.”“그럼 나중에 안 비워도 군말 없는 거예요.”도현은 신발장 중앙에도 테이프를 붙였다.서아는 빈 박스를 납작하게 접어 현관 옆에 놓았다. 당일에 버리는 게 원칙이었는데, 아파트와 달리 빌라는 폐지 배출일을 따로 알아봐야 했다. 시간을 확인하러 휴대폰을 들었다가 은행 앱부터 열었다.잔액은 어제와 같았다. 서아는 앱을 닫고 사진 앨범에서 분리배출 안내문을 찾았다.도현은 냉장고도 비워 냈다. 서아의 반찬통을 왼쪽으로 옮기고, 자신의 생수와 캔커피를 오른쪽에 넣었다.“제 반찬통 순서 바꾸셨어요?”“왼쪽은 윤서아 씨 자리라서 옮긴 겁니다.”“날짜순으로 놓은 거예요. 이게 26일, 이게 24일. 새로 놓은 걸 뒤에 놓으면 안 돼요.”도현이 반찬통을 다시 꺼냈다.“이런 건 합의서에 없었습니다.”“이런 걸 왜 합의서에 써요. 상식이지.”서아는 자기 순서대로 반찬통을 정리했다. 도현은 그걸 끝까지 지켜보더니 냉장고 안 선반 가운데에 테이프를 세로로 붙였다.저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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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9화. 엄마한테는 비밀
일요일 오전 11시 42분, 엄마에게 문자가 왔다.`녹번역 내렸다. 반찬 가져감.`서아는 침대에서 튀어내렸다. 전화를 걸자 엄마는 이미 마을버스를 탔다고 했다.“엄마, 왜 미리 말도 안 하고 와?”“나 버스 탔다고 미리 말했잖아.”“녹번역에서 말하면 그게 뭐가 미리야.”“반찬 받기 싫으면 역으로 나와. 주고 갈게.”엄마는 전화를 끊었다.서아가 방문을 열고 나가자 도현은 주방 바닥에 앉아 냉장고 받침통을 교체하고 있었다. 아침 일찍 근처 가전부품점에서 규격이 맞는 물건을 사 온 참이었다. 검은 티셔츠의 등판이 먼지로 회색이 돼 있었다.“엄마가 와요.”도현이 드라이버를 멈췄다.“언제요?”“지금이요. 아마 오 분 뒤.”“제가 나가죠.”“지금 나가면 계단에서 마주쳐요.”서아는 거실을 둘러봤다. 식탁 아래의 남자 양말, 싱크대의 커피 두 잔, 소파 위의 남자 셔츠가 한 번에 눈에 들어왔다.“서아 씨가 이거 숨길 동안 저는 작업자로 있을게요.”“작업자요?”도현이 손에 든 받침통을 들어 보였다.“냉장고 수리하고 있으니까요.”서아는 도현의 셔츠와 양말, 치약과 면도기를 큰방에 밀어 넣었다. 큰방 문을 닫고 방문 앞에 자신의 스티로폼 박스를 쌓았다. 엄마가 방문을 열어 볼 사람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신발은요?”도현이 자신의 구두를 보았다.“현관에 기사 신발이 하나도 없으면 더 이상하겠죠.”그는 현장에서 쓴다는 일회용 신발 커버를 공구함에서 꺼냈다. 서아는 자신이 왜 이 거짓말을 이렇게 성실히 준비하는지 따져 볼 새도 없었다.벌써 인터폰이 울렸다.엄마는 반찬 가방 두 개와 휴지 열두 롤을 들고 들어왔다.“세상에. 집을 왜 이 꼴로 해 놨어?”“아직 정리 중이야.”“이사한 지가 며칠인데. 그리고 저분은 누구야?”엄마의 눈이 냉장고 앞에 앉아 있는 도현에게 갔다.“어제 냉장고에서 물이 새서. 수리하러 오셨어.”도현이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안녕하십니까. 배수받이 교체 중입니다.”“독립하자마자 냉장고부터 물이 새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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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비가 새는 집
오후부터 빗방울이 거세졌다.베란다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방 안까지 들렸다. 재난문자에는 서울 서북권에 호우가 예상된다며 지하공간 접근을 피하라고 적혀 있었다.서아는 작은방에서 엄마와 통화하고 있었다.“버스 잘 내렸어?”“응. 여기는 비 안 와. 너네 동네는 어때?”“좀 오네. 문 잠그고 안 나가면 돼.”엄마는 아까 그 냉장고 기사가 내일 다시 오냐고 물었다. 서아는 부품을 교체해서 다 끝났다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거실로 나가자 도현은 소파에 양반다리를 하고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 엄마가 주고 간 삼계탕은 반만 먹고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냉장고는 안 새요?”“아직은요.”“다행이네요. 냉장고까지 속이면 사람을 못 믿을 것 같아서.”“냉장고는 사람을 속이지 않습니다. 고장 날 뿐입니다.”서아가 소파 등받이 너머로 도현을 봤다.“무슨 뜻인지 알아요. 농담이에요.”창틀에서 톡, 하는 소리가 났다.서아는 창문 앞으로 가서 바닥을 봤다. 작은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는 사이 다음 물방울이 정확히 같은 자리에 떨어졌다.“여기 물 새요.”도현이 노트북을 접고 왔다. 그는 창틀의 실리콘을 손톱으로 누르고, 벽지 위로 젖은 부분을 확인했다.“창틀 뒤쪽으로 들어옵니다. 수건부터 대놓죠.”서아가 수건을 가져오는 동안 물방울은 줄이 됐다. 바닥에 깐 수건이 빨리 어두워졌다.“이건 집주인이 고쳐야 하는 거죠?”“원인을 확인해야겠지만, 임차인이 바로 처리할 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서아는 김상식에게 전화했다. 아직도 폰은 꺼져 있었다. 창틀과 물이 새는 영상을 찍어 문자와 이메일로 보냈다. 전송 시간과 발송 화면도 따로 캡처했다.도현이 원래 냉장고 물을 받던 낮은 통을 창틀 아래에 대었다. 수건을 들어 짜자 물이 흘렀다.“대야 없어요?”“이사 박스 어디엔가 있어요.”서아는 작은방을 뒤졌다. 파란 플라스틱 대야를 찾아 나왔을 때는 베란다 천장 쪽에서도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이쪽도요.”베란다 외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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