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8년간 모은 돈과 전세대출로 겨우 마련한 첫 집. 이삿날 윤서아는 자신의 집에 먼저 살고 있던 강도현과 마주친다. 같은 주소, 같은 집주인, 두 장의 계약서. 집주인은 잠적하고 보증금은 묶였다. 갈 곳 없는 두 사람은 피해가 해결될 때까지 한집살이를 시작한다. 냉장고 칸부터 생활비까지 사사건건 부딪히던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의 상처를 가장 먼저 알아보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경매 소식과 함께 동거의 끝이 다가온다.
View More목요일 오후 1시 7분, 현관문은 열려 있었다.
서아는 오전 11시 10분에 보증금의 남은 1억 1천7백만 원을 보냈다.
계약할 때 이미 넣은 1천3백만 원, 이날 은행 창구에서 보낸 자기 돈 4천5백만 원과 전세대출 7천2백만 원을 합치면 보증금 1억 3천이었다. 송금 한도 때문에 은행 창구에서 한 차례 막혔고, 은행원이 임대인과 통화한 후에야 돈이 나갔다.
김상식은 `입금 확인했습니다`라는 문자와 현관 비밀번호를 보냈다. 서아는 택시를 타고 오며 문자 속 비밀번호를 두 번이나 확인했다. 이제 남의 원룸을 전전하며 이사 날짜를 맞출 필요가 없었다.
윤서아는 손에 든 휴대폰과 도어록을 번갈아 봤다. 그럴 리 없지만 주소도 다시 봤다.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해솔빌라 302호. 방금 지나온 층 안내판에도 302호가 적혀 있었다.
문 안에서 종이 박스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사다리차 아저씨들이 먼저 올라왔나?”
서아가 현관에 발을 들여놓았다. 회색 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거실 한복판에 서 있었다. 발치에는 `서재`, `주방`, `도면`이라고 쓴 박스가 쌓여 있었다.
남자가 먼저 물었다.
“누구세요?”
“그쪽이야말로 누구세요?”
거실 벽에는 서아가 집을 보러 왔을 때는 없던 큰 시계가 기대어 있었다. 남자가 가져온 것이었다. 싱크대 위에는 종이컵과 공구함까지 나와 있었다. 비어 있어야 할 자리를 남의 물건이 이미 차지하고 있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하필 이럴 때 이사 기사의 전화가 왔다.
“고객님, 장롱부터 올릴게요. 문 비밀번호 풀어 놓으셨죠?”
서아는 남자를 봤다. 남자도 전화기 밖으로 새어 나온 목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잠시만요. 아저씨, 아직 올리지 마세요.”
전화를 끊고 서아가 신발을 벗었다.
“여기 오늘부터 제가 살 집인데요.”
“저도 그런데요.”
남자가 식탁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들어 보였다. 김상식에게서 받은 문자에는 서아가 받은 것과 똑같은 현관 비밀번호가 적혀 있었다.
“강도현입니다. 오늘 입주로 계약했습니다.”
“윤서아예요. 저도 오늘 입주고요.”
“저는 9시 반에 잔금을 보내고 현관 비밀번호를 받았습니다. 아침부터 이사 중이었고요.”
“저는 11시 10분에 보냈어요. 그렇다고 이 집이 시간 단위로 세를 주는 건 아니잖아요.”
“어디서 계약했습니까?”
“새길부동산이요.”
도현이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서아는 이사용 가방에서 파란 파일을 꺼냈다. 전세계약서, 등기사항증명서, 중개대상물 확인설명서, 임대인에게 잔금을 보낸 이체 확인증까지. 어제만 해도 노트북에 스캔본을 따로 저장해 둔 자신이 대견했다.
도현도 배낭에서 투명 파일을 꺼냈다. 두 사람은 식탁 양쪽에 서서 각자의 서류를 내밀었다.
주소는 같았다.
임대인도 김상식으로 같았다. 도장의 모양과 임대인 계좌까지 일치했다.
다른 건 계약일이었다. 도현은 입주 6주 전에, 서아는 3주 전에 계약했다. 둘 다 계약 당일 주민센터에서 확정일자도 받아 두었다.
“제가 먼저 계약했다는 말로 끝날 문제는 아닌 것 같군요.”
“당연하죠. 오늘 같은 날 들어오라고 한 건 집주인이고요.”
“이거 원본 맞습니까?”
도현이 물었다.
“지금 저보고 위조했다는 거예요?”
“확인하는 겁니다.”
“저도 확인 좀 할게요. 강도현 씨 보증금은 얼마인데요?”
“1억 4천만 원이요.”
서아는 자기 계약서의 보증금 칸을 엄지로 눌렀다. 1억 3천만 원. 거기에 남의 돈 1억 4천만 원이 더 얹혔다.
아래에서 경적이 연거푸 울렸다. 전화기 너머로 사다리차 기사가 주차 단속 차량이 돌고 있다고 재촉했다.
“고객님, 이십 분 넘었어요. 대기료 붙습니다. 여기 길도 막아서 빨리 정해 주셔야 해요.”
서아는 자신의 짐을 다시 싣고 갈 곳을 떠올려 보다가 포기했다. 남은 잔액으로 이사비를 두 번 낼 수는 없었다. 보관창고를 당일에 구할 수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작은방으로 제 짐 넣을게요.”
도현이 큰방과 거실에 놓인 자신의 짐을 봤다.
“일단 어느 쪽도 짐을 빼지 맙시다. 대신 서로의 물건은 손대지 않는 걸로 하죠.”
“그건 당연하죠.”
서아는 이사 기사에게 작은방과 현관 안쪽으로 짐을 올려 달라고 했다. 새 주소로 인수했다는 이사 확인서도 받았다. 기사가 식탁 위의 계약서 두 장을 힐끗거렸지만 묻지는 않았다.
“일단 집주인한테 전화하죠.”
서아는 계약서에 적혀 있는 김상식의 번호를 눌렀다. 연결음이 한 번, 두 번 갔다.
이어서 기계음이 나왔다.
전원이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된다는 말이었다.
식탁 위에는 302호의 주소가 적힌 계약서가 두 장 놓여 있었다.
“등기부 다시 확인하셨죠?”서아가 묻자 중개사가 웃었다.“오늘 아침에 떼서 보여드렸잖아요.”“계약 직전에 한 번 더 볼게요.”“그러세요. 당연히 확인하셔야죠.”도현은 말없이 휴대전화로 등기사항을 다시 열었다. 소유자 이름, 근저당 설정 여부, 주소와 동·호수. 서아는 임대인의 신분증과 계좌 예금주를 한 번 더 맞췄다.긴장한 사람은 오히려 임대인이었다.“제가 뭐, 문제 있는 집을 내놓은 건 아닙니다.”“문제 있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건 아니고요.”서아가 말했다.“저희가 전에 크게 당해서요.”예전에는 전세 사기라는 말을 입 밖에 내면 얼굴부터 뜨거워졌다. 이번에는 먼저 말하고 중개사와 임대인의 반응을 기다렸다.지난 집 배당금은 예상보다 조금 많았지만 보증금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입금액은 각자 대출 원금에 넣었고, 임대인과 중개사를 상대로 한 절차는 아직 진행 중이었다.도현이 특약을 읽었다.“잔금과 전입신고를 마친 다음 날까지 현재 권리관계를 유지하고, 소유권 이전이나 새 담보권 설정을 하지 않는 조건 맞죠?”“예, 적어놨습니다.”“보증 가입이 거절되면 계약을 해제하고 이미 지급한 돈을 전액 반환하는 조건도요.”“여기 있습니다.”서아는 마지막 장을 넘겼다.임차인 칸에는 이름이 두 개 들어가 있었다.특약에는 두 사람이 부담한 보증금 액수와 반환계좌, 한 사람이 먼저 나갈 때의 정산 방식도 적혀 있었다.윤서아. 강도현.계약서는 한 장이었다.두 사람은 각자 도장을 찍었다. 도현이 도장에 묻은 인주를 닦는 사이 서아는 제 이름 옆을 손가락으로 눌렀다.손은 떨리지 않았다.계약서를 첨부해 주택 임대차 신고를 마쳤고 확정일자 번호도 확인했다.일주일 뒤 잔금을 보내기 직전, 둘은 새 등기부와 진행 중인 등기신청 유무를 다시 확인했다. 서아는 임대인의 납세증명서와 전입세대확인서, 건축물대장을 차례로 확인했다.이삿짐차 두 대가 다시 한 골목에 섰다.이번 기사들도 주소를 확인했다.“두 분 짐이 같은 집으로 가는 거 맞죠?”서아
다시 연애를 시작한 뒤에도 두 사람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금요일 밤은 주로 서아의 집에서 보냈다. 도현의 원룸은 회사와 가까웠지만 창문을 열면 옆 건물 벽만 보였다. 서아의 집은 꼭대기라 계단을 다섯 층이나 올라야 했지만, 창문 한쪽으로 북한산 자락이 조금 보였다.“칫솔 놓고 가도 돼?”도현이 물었다.“한 개만.”“면도기는?”“안 돼.”“왜.”“세면대 좁아.”“네 화장품 반만 치우면 되잖아.”“그럼 오지 마.”“칫솔만 둘게.”일요일 저녁이면 도현은 제 칫솔을 남겨 두고 돌아갔다. 서아는 문이 닫히고 나서도 굳이 컵에서 빼지 않았다.여섯 달 동안 둘은 세 번 크게 싸웠다.첫 번째는 도현이 며칠 입을 옷을 가져와 옷장 한 칸을 차지했을 때였다. 두 번째는 서아가 데이트 비용을 매번 십 원 단위까지 정산해 보냈을 때였다. 세 번째는 도현이 부동산 매물 링크를 보냈을 때였다.`신축 투룸, 역 도보 7분, 보증금 5천/월 95.`그전에도 둘은 매물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데이트를 하다 부동산 유리창 앞에서 멈춰 가격만 읽고 지나갔다. “이건 반지하인데 왜 구십이야”, “관리비 십오만 원에 뭐가 들어가는데” 같은 말만 했다. 함께 살자는 말은 누구도 먼저 꺼내지 않았다.서아는 링크만 읽고 답하지 않았다.그날 저녁 도현이 집에 왔다.“링크 봤어?”“봤어.”“주말에 볼래?”“왜?”“계약 끝나면 같이 살 집.”서아가 썰던 대파를 내려놨다.“누가 같이 산대?”“싫어?”“그 얘기를 왜 링크부터 보내.”도현이 현관 앞에 서서 신발도 벗지 못했다.“먼저 물어보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서.”“그러니까 또 네가 다 정하고 보여준 거네.”“정한 게 아니라 찾아본 거야.”“보증금 오천은 누가 내는데.”“내가 삼천, 네가 이천.”“봐. 정했잖아.”도현이 입을 다물었다.서아는 칼을 씻어 건조대에 놓았다. 예전 같으면 화부터 냈을 것이다. 이번에는 식탁을 가리켰다.“앉아.”“밥부터 먹고 얘기하면 안 돼?”“대파 다시 썰
서아는 인터폰 화면을 세 번 확인했다.도현이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봤다.“안 열어?”스피커에서 조금 찌그러진 목소리가 나왔다.서아가 현관문을 열었다.“여긴 어떻게 알았어?”“이사한 날 네가 보내 줬잖아.”“그걸 아직 기억해?”“응.”“무섭네.”“회사 앞에서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잖아.”도현의 머리는 전보다 짧아졌고 얼굴과 목은 현장 햇빛에 타 있었다.서아는 화분을 내려다봤다.“그건 왜 네가 갖고 있어?”“네 트럭에 실으려다가 내 상자에 들어갔어.”“반년 동안?”“키웠어.”“물을 너무 줬네. 잎이 물렀잖아.”“죽지는 않았어.”서아가 화분을 받아 들었다. 문 앞에서 계속 이야기할 수는 없어 몸을 비켰다.“들어와.”도현은 신발을 가지런히 벗고 방을 둘러봤다. 침대 하나와 작은 식탁, 옷장으로 꽉 찬 원룸이었다.“생각보다 괜찮네.”“생각보다가 뭐야.”“고시원 갈 줄 알았으니까.”“돈 없지 눈 없냐.”서아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냈다. 마실 만한 컵이 하나뿐이라 제 머그에 물을 따라 건넸다.도현이 두 손으로 컵을 받았다.“연락 왜 안 했어?”“내가 묻고 싶은데.”“네가 정리되면 한다며.”“그걸 진짜 기다렸어?”“응.”“시키는 건 더럽게 안 들으면서.”“그건 들으라고 한 말 같았으니까.”서아는 식탁 반대편에 앉았다. 둘 사이에 스투키 화분을 놓았다. 잎 하나가 옆으로 축 처져 있었다.“정리됐어?”도현이 물었다.“아니. 돈도 다 못 받고, 소송도 남았고. 아마 몇 년 걸릴 수도 있대.”“왜 연락 안 했어?”“하려고 했어.”“언제.”“네가 벨 누르기 직전.”서아가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관리비 삼천칠백 원 때문에.”“그건 라면값이라고 했고.”“라면을 얼마나 처먹었으면 삼천칠백 원이나 돼.”도현이 웃었다. 웃음이 끝난 뒤에도 둘 다 바로 말하지 않았다. 창밖에서 오토바이가 지나가고, 옆집 문 닫는 소리가 났다.“나 서울에 집 구했어.”도현이 먼저 말했다.“어디?”“회사 근처. 보증금
혼자 사는 집에서는 아무것도 제자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냉장고에 넣어 둔 즉석밥은 그대로 있었고, 검은 양말이 빨래에 섞이는 일도 없었다. 샤워를 삼십 분 해도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없었다.서아는 처음 한 달 동안 그 자유를 악착같이 누렸다.보일러를 스물여섯 도로 올렸다. 침대 위에서 과자를 먹었다. 설거지는 아침까지 미뤘다. 새벽 두 시에 드라이어도 돌렸다.그러다 옆집에서 벽을 세 번 두드렸다.“죄송합니다.”서아는 드라이어를 끄고 혼자 웃었다.웃고 나니 조용했다. 예전 집에서는 이 시간이면 도현이 벽을 두 번 두드렸다. 시끄럽다는 뜻 한 번, 이제 자겠다는 뜻 한 번. 둘이 정한 적도 없는데 어느 날부터 그렇게 됐다.서아는 벽에 손등을 댔다가 내렸다. 옆집 사람까지 놀라게 할 필요는 없었다.이사 일주일 뒤 마지막 전기료가 빠져나갔다. 도현은 생활비 모임통장 잔액을 십 원 단위까지 나눠 보낸 뒤 `정산 끝`이라고 썼고, 서아는 `응`이라고 답했다. 둘이 함께 보던 계좌는 그날 닫혔다.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경매 절차는 사람들이 처음 말한 것보다 오래 걸렸다.서아는 임차권등기 완료 서류와 배당요구 접수증, 대출 연장 서류를 챙겨 다녔다. 배당요구는 종기 전에 끝냈지만 보정과 확인 연락은 계속 왔다. 피해자 결정 통지서를 받은 날에도 회사에서는 순두부찌개 신제품 관능평가가 있었다.결정서를 받았다고 돈이 들어오는 건 아니었다. 바뀐 것은 지원대출 상담 창구와 안내 절차 정도였다. 서아는 결정서를 새 투명 파일에 넣고 겉면에 제 이름과 사건번호를 적었다.“대리님, 이거 끝맛이 너무 텁텁하지 않아요?”신입사원이 물었다.서아는 세 번째 컵의 국물을 삼켰다.“전분 줄이고 고춧가루 입자 바꿔봐요. 매운맛만 세게 하면 싸구려 같아.”“네.”그래도 서아는 매일 출근했고 기획안 마감도 맞췄다. 월급날이면 대출 이자와 월세가 같이 빠져나갔다. 통장 잔액은 여전히 보기 싫었지만 화장실에 숨어 확인하지는 않았다.엄마에게도 한 달에 한 번 진행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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