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Chapter 11 - Chapter 20

121 Chapters

11. 보름을 걸다

대전이 조용해졌다.귀비는 한동안 채원을 바라보다 천천히 미소를 되찾았다.“세자빈께서 큰일을 겪으시더니 생각이 많아지신 모양입니다.”부드러운 말이었지만 뜻은 달랐다.쓸데없는 의심을 하고 있다는 소리였다.“새로운 배필을 말씀드린 것은 국본의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셨다면 유감이군요.”“그렇습니까.”채원은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 근거가 없는 곳까지 들어가면 자신만 불리해진다.그때 대신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전하, 세자빈마마께서 역모에 가담하지 않으셨다 하여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옵니다. 윤정명과 두 아들에게 이미 참형이 집행된 이상, 역적의 딸을 국본의 배필로 둘 수는 없사옵니다.”다른 대신들도 동조하기 시작했다.채원은 그 말을 들으며 입을 다물었다. 이제야 상대의 논리가 정확히 보였다.자신에게 죄가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역적으로 판결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아무리 결백하다고 말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문제를 뒤집으려면 시작점으로 돌아가야 했다.아버지가 정말 역적인가.왕이 채원을 바라봤다.“그래서 너는 어찌하고 싶으냐.”그제야 채원은 자신을 이곳까지 부른 이유를 알았다. 상소를 들려주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왕은 자신의 입으로 대답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전하.”채원이 입을 열었다.“보름만 주십시오.”대신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일었다.왕의 표정이 굳었다.“무엇을 하겠다는 것이냐.”“아버지와 오라버니들에게 내려진 판결이 정말 옳았는지 확인하고 싶습니다.”“세자빈.”왕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이미 추국도, 형의 집행도 끝난 일이다.”채원의 손끝이 굳었다.알고 있었다. 아버지도, 두 오라버니도 이미 죽었다. 지금 자신이 무언가를 찾아낸다고 해서 그들을 다시 살릴 수는 없었다.“알고 있습니다.”“그런데 이미 끝난 역모 사건을 다시 뒤집겠다는 것이냐.”“잘못된 게 없다면 뒤집을 수도 없겠지요.”왕의 눈이 가늘어졌다.채원은 천천히 말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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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지켜봐야 할 얼굴

보름.대전에서 얻어낸 시간은 고작 보름이었다. 그 안에 이미 끝난 역모 사건을 다시 살펴야 할 이유를 찾아내야 했다. 그러지 못하면 약속대로 세자빈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채원은 뜯긴 문갑 앞에 앉아 안을 다시 살폈다. 돈도 패물도 그대로였고, 사가에서 들어온 물건들 역시 대부분 제자리에 있었다.사라진 것은 아버지가 보낸 서찰이었다.“아버지가 보내신 편지는 원래 전부 여기에 있었어?”“예, 마마. 윤 대감께서 보내신 서찰은 버리지 않고 보관하셨습니다.”“전부 한곳에?”설이가 잠시 생각했다.“아닙니다. 중요하게 여기시는 서찰은 따로 챙겨두실 때도 있었습니다.”“어디에?”“그것까지는 소인도 모릅니다. 마마께서 직접 보관하셨습니다.”그렇다면 문갑만 들여다보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채원은 설이에게 자신이 평소 자주 쓰던 곳을 물어 방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작은 궤와 서책이 꽂힌 곳, 자주 쓰는 물건을 넣어두었다는 서랍까지 열어봤지만 특별한 것은 나오지 않았다.윤서아가 직접 감춰둔 물건이라면 가까이 두고도 다른 사람의 손은 잘 닿지 않는 곳일 가능성이 컸다.채원의 시선이 경대에서 멈췄다.매일 사용하지만 설이가 안쪽까지 굳이 손댈 이유는 없는 곳이었다.서랍을 하나씩 열어보다 마지막 서랍을 당겼을 때였다. 중간에서 무언가에 걸렸다.다시 천천히 당겼다.툭.안쪽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손을 넣어 더듬자 평평해야 할 나무판 한쪽에 얇은 틈이 잡혔다. 손톱을 걸어 밀자 판이 움직이며 그 뒤로 좁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비어 있었다.“저런 곳이 있는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채원은 안쪽을 살폈다.여기에 서찰이 있었을까.알 수 없었다. 비밀공간이 있다는 것과 윤서아가 이곳에 서찰을 보관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설아. 이 경대는 누가 정리했어?”“평소에는 소인이 하였습니다. 다른 아이들도 빗이나 장신구를 가져다 놓는 정도는 합니다.”채원은 다시 빈 공간을 바라봤다.사라진 서찰과 이곳이 연결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하지만 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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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가장 믿는 사람

다음 날.채원은 빈 봉투 안에 서책에서 떼어낸 종이를 접어 넣었다. 내용은 필요 없었다. 누군가 이 봉투를 찾으러 오는지만 확인하면 된다.봉투를 경대의 숨은 칸에 넣은 뒤 판을 닫았다. 다만 완전히 맞물리지는 않게 했다. 작정하고 경대를 뒤진다면 발견할 수 있을 정도였다.잠시 후 설이는 평소 처소를 드나들던 나인 둘을 불러 경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채원은 그들이 들을 수 있는 곳에 앉아 서책을 보고 있었다.빗과 장신구가 하나씩 밖으로 나오고 서랍 안에 있던 물건들이 정리되었다. 한참 뒤 설이가 마지막 서랍을 열며 말했다.“마마, 전에 이 근처에 따로 두셨다는 서찰은 보이지 않습니다.”“없어?”“예. 윤 대감께서 마지막으로 보내신 서찰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채원은 일부러 잠시 침묵했다.“중요한 거야. 다시 찾아봐.”“예, 마마.”옆에서 장신구를 정리하던 나인들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중 하나가 연분홍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연주였다.그날 저녁, 설이는 방문을 조금 열어둔 채 찻상을 정리했다. 마침 복도를 지나던 연주의 걸음이 문 앞에서 조금 느려졌다.설이가 물었다.“마마, 아까 찾으시던 서찰 말입니다. 정말 그렇게 중요한 것이옵니까?”채원은 일부러 대답을 늦췄다.“편지 자체보다 그 안에 적힌 게 중요해.”“무엇이 적혀 있는지는 기억나지 않으십니까?”“기억나지 않아. 그래서 찾아야 해.”설이가 문을 닫았다. 잠시 후 멈췄던 발소리가 다시 멀어졌다.그 정도면 충분했다.윤정명이 마지막으로 보낸 중요한 서찰 하나가 아직 남아 있고, 그것이 경대 근처 어딘가에 있다는 것. 누군가 그 서찰에 관심이 있다면 움직일 이유는 만들어졌다.해가 완전히 지자 이운이 보낸 호위 두 사람이 뒤뜰에 자리를 잡았다. 최 상궁은 순찰을 핑계로 안쪽 뜰의 사람들을 물린 뒤 바깥방에서 설이와 함께 기다렸다.한밤중이 지나자 문고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채원은 눈을 감은 채 숨을 고르게 유지했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거의 들리지 않던 발소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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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한도겸

호위의 보고가 끝나자 이운은 곧장 밖으로 나가려 했다.채원이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지금 들어가면 안 됩니다.”“연주가 편지를 넘기는 순간을 놓칠 수 있다.”“문을 여는 순간 안에 있는 사람이 편지부터 없앨 겁니다. 누가 받는지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이운의 시선이 붙잡힌 소매로 내려갔다. 채원은 그제야 손을 놓았다.“서고에는 드나들 수 있는 문이 몇 개입니까?”“앞문과 뒤쪽 작은 문, 두 곳이다.”이운은 호위에게 뒤쪽 문을 막고 창 아래에도 사람을 두라고 명했다. 연주를 따라간 사람에게는 안에서 다른 자가 나올 때까지 움직이지 말라는 지시를 보냈다.채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너는 여기 있어라.”“제가 만든 미끼입니다.”“아직 몸도 성치 않으면서 또 나서겠다는 것이냐?”“서고까지 걷는 일은 할 수 있습니다.”이운이 반박하려는 순간 채원이 먼저 방문을 나섰다. 이운은 결국 채원의 걸음에 맞춰 속도를 늦췄다. 앞서지도, 팔을 붙잡지도 않았다. 다만 몇 번인가 손을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서고는 세자가 신하들과 공부하는 곳 뒤편에 있었다. 세자가 읽는 책뿐 아니라 상소의 사본과 조사 기록도 보관하는 곳이었다.등불 하나가 닫힌 창 안에서 흔들리고 있었다.호위가 어둠 속에서 다가와 속삭였다.“나인은 안으로 들어간 뒤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도 들렸습니다.”이운이 문으로 다가가자 채원이 낮게 말했다.“아직요.”두 사람은 열린 창틈 가까이에 몸을 붙였다.안에서 연주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분명 마마께서 직접 숨겨두신 곳에서 꺼냈습니다.”“뒤를 밟힌 것은 아니냐?”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낮고 침착했다.“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확실하겠지.”잠시 종이가 스치는 소리가 났다.채원은 창틈으로 안을 살폈다. 연주가 책상 앞에 서 있었고, 그 맞은편의 남자는 등불 아래에서 서찰을 확인하고 있었다.그 얼굴을 본 이운의 호흡이 멈췄다.“한도겸.”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이름이 숨처럼 새었다.한도겸은 세자시강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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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미끼를 물다

서고가 조용해지자 채원은 책상을 짚었다.이운이 팔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채원도 거절하지 않았다.그때 동궁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잠시 후 무사가 서고로 들어왔다.“찾았다.”무사는 예를 갖추기도 전에 말했다.“증인은 박칠성이란 놈이다. 그놈만 찾은 게 아니다.”무사의 이름은 백건이었다.이운의 죽마고우이자 동궁 밖에서 그의 손발이 되어 움직이는 호위였다.백건은 채원을 본 순간 말을 멈췄다.돌아오는 길에 세자빈이 목숨을 끊었다는 소문을 들은 모양이었다.“살아 있다.”이운이 짧게 대답했다.백건은 묻고 싶은 말을 삼킨 채 깊이 고개를 숙였다.“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채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 증인은 어디 있습니까?”“북한산에 있습니다.”백건은 박칠성이 머물던 여관을 알아낸 뒤 나흘 동안 뒤를 밟았다.“그동안 왜 소식을 보내지 않았지?”“제가 행선지를 보고할 때마다 박칠성이 먼저 자리를 옮겼습니다안에서 새는 곳이 있다고 생각해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오늘 새벽, 백건은 낯선 사내를 따라 말을 버리고 북한산으로 걸어서 뒤쫓았다.산 중턱에는 숯을 굽는 곳으로 꾸민 넓은 터가 있었다.그러나 안에서 들린 것은 나무를 패는 소리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같은 동작으로 검을 휘두르는 소리였다.“역모 사건에서 윤 대감의 병사라고 지목된 자들이 그곳에 있었습니다.”이운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확실하냐?”“초기 조사 때 의금부 뜰에서 직접 본 자들입니다. 다섯 가운데 셋이 그곳에서 훈련하고 있었습니다.”“그들을 지휘한 사람은?”“조필규였습니다.”이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채원에게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누구죠?”“병조판서 김태겸의 심복입니다.”“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지?”“병사들을 둘로 나눠 훈련시키고 있었습니다. 수레 세 대에는 활과 칼이 실려 있었고, 천막 안에서는 군량 자루도 보였습니다.”“김태겸의 표식은?”김태겸과 직접 이어지는 물증은 없었다. “조필규의 얼굴을 확인한 사람이 또 있습니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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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다른 사람

지도 위에서 길이 둘로 갈라졌다.무기와 상자를 실은 수레는 북한산 남쪽 길로 내려오고 있었고, 박칠성은 혼자 말을 타고 서쪽 산길로 빠졌다.어느 쪽을 놓쳐도 좋지 않았다.한도겸은 동궁 안쪽의 빈방에 따로 가둬 두었다.연주와 말을 맞추지 못하도록 문도 서로 다른 곳에 두었고, 지키는 사람도 따로 붙였다.“누구도 한도겸을 만나게 하지 마라. 음식과 물을 들이는 자도 정해진 사람만 드나들게 하고.”이운이 명을 내렸다. 한도겸은 정보가 새어나간 사실은 인정했지만 누구에게 넘겼는지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지금은 그 입을 열게 할 물증부터 찾아야 했다.“수레는 제가 맡겠습니다.”백건이 남쪽 길을 짚었다.“박칠성은 산 아래에 남겨둔 제 사람이 따라가고 있습니다. 들키지 않을 정도로만 거리를 두라고 해두었습니다.”채원이 서쪽 산길을 보았다.“더 가까이 붙지 않는 게 좋겠어요. 박칠성이 어디까지 가는지 본 다음, 멈추는 곳에서 잡아야 합니다.”이운은 대답 대신 채원을 잠시 바라봤다.전에는 남의 말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던 여자였다.지금은 판단이 빠르고, 자신의 생각을 망설임 없이 내놓았다.큰일을 겪은 뒤 사람이 달라질 수는 있다. 이운도 그렇게 생각했다.하지만 달라진 정도가 어디까지인지, 그는 아직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다.“백건은 수레를 맡아라. 나는 박칠성을 쫓겠다.”“저도 갑니다.”채원이 바로 말했다.이운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서 아래로 내려갔다.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이었다. 잠시 서 있기만 해도 안색이 옅어질 때가 있었다.“지금 네 몸으로 산길을 오르겠다고?”“산 아래까지는 가마를 타면 됩니다. 그다음엔 말을 빌려주세요.”이운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말을 탈 줄 아느냐?”채원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질문 자체가 이상한 건 아니었다. 문제는 이운이 윤서아를 오래 알았다는 데 있었다.자신은 자꾸 채원의 기준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윤서아를 알던 사람들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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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두 갈래 추적

화살이 빗나가자 박칠성이 뒤를 돌아봤다.다시 화살을 꺼내는 사내를 보자, 다친 다리를 끌며 필사적으로 비탈을 올라왔다.“살려주시오! 제발 살려주시오!”이운이 고삐를 당겨 말을 세웠다.먼저 땅으로 내려선 그가 채원에게 손을 내밀었다.채원은 그 손을 잡고 내려오자마자 박칠성의 뒤를 확인했다.검을 든 사내 셋이 빠르게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활잡이는 뒤쪽에서 다시 활을 들었다.“박칠성을 살려야 합니다.”“알고 있다.”이운이 검을 뽑았다.“둘은 뒤로 돌아가라. 나머지는 앞을 막아.”호위들이 양쪽으로 흩어졌다.박칠성이 그들 사이로 뛰어들었고, 검은 옷의 사내 셋이 그대로 따라붙었다.곧바로 검이 부딪쳤다.이운이 가장 앞선 사내의 검을 받아냈고, 호위들이 나머지 둘을 막아섰다.채원은 한쪽으로 물러나 박칠성을 찾았다.놈은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바지 한쪽이 피로 젖어 있었다.“움직이지 마세요.”박칠성이 채원을 올려다봤다.“당신들은 누구요?”“적어도 당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은 아니에요. 살고 싶으면 움직이지 마세요.”박칠성의 시선이 채원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채원이 바로 뒤를 돌아봤다.사내 하나가 호위를 밀어내고 검을 낮게 든 채 박칠성에게 달려들고 있었다.채원이 앞으로 나섰다.사내가 박칠성을 향해 검을 내지르는 순간, 채원은 옆으로 몸을 틀었다.칼끝을 피하며 소매와 팔을 함께 잡아당겼다.달려오던 힘에 사내의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채원은 한쪽 발로 그의 발목을 걸고, 잡은 팔을 같은 방향으로 밀었다.사내가 바닥에 처박히며 검을 놓쳤다.채원은 검을 발로 멀리 밀어냈다.숨이 거칠어졌다.고작 한 사람을 넘어뜨렸을 뿐인데 다리에 힘이 빠졌다.넘어진 사내가 채원의 발목을 붙잡았다.채원이 중심을 잃는 순간, 다른 사내가 호위를 뿌리치고 들어왔다.그의 검이 채원을 향해 움직였다.챙!이운의 검이 앞을 막았다.이운은 상대의 검을 밀어낸 뒤 앞으로 파고들었다.두어 번 검이 부딪친 끝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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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증거

가파른 비탈을 내려온 말이 계곡 가까이에서 속도를 줄였다.앞서 달리던 호위가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자 이운도 고삐를 당겼다.채원은 아래쪽을 살폈다.계곡 건너편에 박칠성이 있었다.허벅지의 상처 때문인지 더는 달아나지 못하고 물가에 주저앉아 있었다.박칠성 뒤 나무 사이로 칼끝이 보였다.“저하, 왼쪽 나무 뒤에 한 명 있습니다.”이운의 시선이 곧바로 그쪽으로 향했다.“보인다.”호위들이 검을 뽑으며 좌우로 퍼졌다.박칠성이 고개를 들었다.채원 일행을 발견한 순간 움직이려 했지만, 목 옆으로 칼날이 들어오자 그대로 멈췄다.나무 뒤에 숨어 있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더 오면 이자의 목부터 벤다.”호위들의 움직임이 멈췄다.이운이 검을 든 채 사내를 바라봤다.“박칠성을 죽이면 너도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한다.”“상관없다.”사내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증인만 없어지면 된다.”허세가 아니었다. 박칠성만 죽이면 된다는 태도였다.채원은 주변을 훑었다.사내는 박칠성의 왼쪽 뒤에 붙어 있었고, 오른쪽은 계곡이었다.채원의 발밑에 주먹만 한 돌 하나가 보였다.채원이 천천히 발을 옮기자 사내가 채원을 노려봤다.“움직이지 마시오.”칼날이 박칠성의 목을 눌렀다.“가만히 있겠습니다.”채원이 멈췄다.이운이 옆에서 낮게 물었다.“뭘 하려는 거지?”채원은 사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칼만 잠깐 치우면 됩니다.”이운은 더 묻지 않았다.사내의 시선이 이운에게 향하는 순간, 채원이 발끝으로 돌을 걷어찼다.돌은 낮게 날아가 칼을 쥔 손등을 때렸다.퍽!검이 박칠성의 목에서 떨어졌다.이운이 곧장 달려들어 사내의 칼을 쳐냈고, 호위가 사내의 팔을 뒤로 잡아 바닥에 눌렀다.채원은 박칠성의 옷깃을 잡아당겼다.“이쪽으로!”목에 가느다란 상처가 났지만 깊지는 않았다.사내가 바닥에 눌린 채 몸부림쳤다.“입부터 막아라. 독을 숨겼을 수도 있다.”이운의 명에 호위가 사내의 턱을 잡아 입안을 확인한 뒤 재갈을 물렸다.다른 호위 하나가 비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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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살아 있는 증인

“이제 처음부터 전부 말해.”채원의 손에 잡힌 박칠성의 옷깃이 떨렸다.박칠성은 입을 열지 못했다. 허벅지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지자락을 적시고 있었다.붙잡힌 자객을 한번 본 뒤 이운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어느 쪽에도 오래 머물지 못했다.“여기서 다 말하게 할 생각이냐?”이운이 물었다.채원은 박칠성의 옷깃을 놓았다.“아니요. 먼저 살려야죠.”그를 잡으려고 여기까지 왔다. 상처를 방치해 죽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무엇보다 죽은 사람에게서는 아무런 증언도 받아낼 수 없다.박칠성의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채원이 붙잡으려는 순간 이운이 먼저 팔을 뻗어 그를 받쳤다.“들것을 만들어라. 자객은 손과 발을 따로 묶고, 입 안에 독을 숨겼는지 확인해.”호위들이 곧바로 움직였다.한 명은 박칠성의 상처를 천으로 압박했고, 다른 사람들은 주변의 나뭇가지를 모아 들것을 만들었다.“독은 없습니다.”자객의 입을 확인한 호위가 보고했다.“혀 밑과 어금니 안쪽까지 다시 확인해. 동궁에 데려가기 전에 죽게 둬서는 안 된다.”호위가 다시 자객의 턱을 벌렸다.채원은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이운은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귀비를 오래 의심해왔다는 말대로라면 그동안 혼자 확인해온 것이 적지 않을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백건도 수레를 확보한 사람들과 합류했다.장부가 든 상자는 다시 봉해져 있었고, 무기와 군량을 실은 수레 세 대도 그대로였다.“몇 명이나 잡았어?”“아홉입니다. 한 명은 달아났지만 뒤를 밟게 했습니다.”“잡으려고 무리하지 말고 어디로 가는지만 확인해. 지금은 저쪽에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들키지 않는 게 중요하다.”“이미 그렇게 명했습니다.”백건이 들것에 실린 박칠성을 내려다봤다.“저놈 하나 때문에 북한산을 며칠이나 뒤졌는지 모르겠습니다.”박칠성은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채원이 물었다.“수레를 지키던 사람들은 장부에 관해 뭐라고 했습니까?”“모두 모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놈이 마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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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외운 증언

“김태겸은 조필규가 제멋대로 군사를 키웠다고 하고 버릴 겁니다.”채원이 펼쳐진 장부를 보며 말했다.백건의 표정이 굳었다.“조필규가 병조판서의 심복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소.”“그 사실만으로 김태겸을 잡을 수 있으면 좋겠죠.하지만 백건 나리는 김태겸과 원한이 있습니다.그쪽에서 마음만 먹으면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조필규를 엮었다고 할 수도 있어요.”백건은 불쾌한 기색을 보였지만 반박하지 않았다.채원은 장부와 명령서를 나란히 놓았다.“조필규가 누구의 돈으로 무기를 샀는지, 누구의 명령을 받아 윤 대감 집으로 옮겼는지 찾아야 합니다. 그 연결이 없으면 김태겸은 조필규 하나를 버리고 끝낼 겁니다.”이운이 장부를 다시 펼쳤다.“돈을 낸 사람의 이름은 없다. 보름 안에 그 뒤까지 찾아낼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고.”“그러니까 순서를 정해야죠.”채원이 장부에 적힌 ‘윤정명 집 서쪽 창고’라는 글자를 짚었다.“먼저 아버님의 죄부터 뒤집어야 합니다.”아버님이라는 호칭은 아직도 입에 붙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윤정명은 강채원에게도 아버지여야 했다.“이 장부가 사실이라면 우리 집에서 나온 무기는 역모의 증거가 아닙니다. 누군가 일부러 가져다 놓았다는 증거가 되겠죠.”이운이 채원을 봤다.“김태겸을 잡는 건 그다음이다?”“네. 처음부터 가장 높은 곳만 보다가 지금 손에 쥔 것까지 놓치면 안 됩니다.”이운은 잠시 장부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서로 간다. 우선 윤가의 역모가 조작됐다는 것부터 증명하지.”방향이 정해지자 채원은 확인이 끝난 문서와 아직 살펴보지 않은 문서를 따로 나눴다.누가 어떤 문서를 확인했는지도 빠짐없이 적게 했다.밤사이 한 장이라도 사라지거나 바뀌면 곧바로 알아차리기 위해서였다.휴대폰 한 대만 있었어도 사진부터 찍어뒀을 텐데.이럴 때마다 원래 살던 세상이 아쉬웠다.사진 한 장이면 끝날 일을 사람을 붙여 지키고, 일일이 기록까지 남겨야 했다.“이 상자는 누가 열었는지도 적어주세요. 다시 봉한 사람까지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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