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10년 차 베테랑 스턴트우먼 강채원은 사극 촬영 중 낙마 사고로 죽고, 역모로 몰려 가문이 도륙된 세자빈 윤서아의 몸에서 눈을 뜬다. 배후는 늙은 왕을 등에 업고 권력을 노리는 귀비. 채원은 애원 대신 압도적 무력과 냉정한 계산으로 정면 승부에 나서고, 아무도 믿지 않던 냉혹한 세자 이운은 그런 그녀에게 서서히 무너진다. 누명을 벗기고 복수하는 여정 끝에 왕좌 곁에 서는, 액션과 로맨스가 함께 가는 궁중 복수극.
View More산 공기가 차가웠다.
강채원은 종이컵에 남은 커피를 마저 비우고 보호모를 눌러썼다. 새벽 다섯 시부터 시작된 촬영이었다.
새벽빛이 필요한 장면이라 촬영 가능한 시간은 몇 시간뿐이었다.
능선 아래로 카메라 세 대가 자리를 잡았다.
스태프들이 매트와 와이어를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오늘 찍을 신은 세자빈이 자객에게 쫓겨 산길을 내달리다 말에서 떨어지는 장면이었다.
대본에는 "세자빈, 절박하게 말을 몬다"라고만 적혀 있었다.
그 절박함을 몸으로 옮기는 건 언제나 채원의 일이었다. 이번 작품에서만 다섯 번째 낙마였다.
"채원 씨, 오늘도 잘 부탁해요."
라인 프로듀서가 지나가며 손을 들었다.
채원도 목례로 답하고 대기하던 말 쪽으로 걸어갔다.
갈색 말은 어제 리허설에서도 순했던 녀석이었다.
옆에서 안전 장비를 챙기던 후배 스턴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언니, 저 폭죽 신호 타이밍 진짜 괜찮은 거예요? 말이 놀랄 것 같은데."
"연출부에서 아까 확인했대."
"그래도……"
"나도 어제부터 이 말 봤어. 순해."
"그래도 언니, 꼭 조심해요."
"알았어. 걱정 그만하고 가서 준비해."
채원은 후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낙마 지점과 말의 상태를 다시 살폈다.
예전에 남에게 맡겼다가 사고가 난 적이 있었다.
배대끈을 당겨보고 안장에 올랐다.
고삐를 두어 번 튕겨 반응을 지켜봤다.
여러 번 해봤어도 매번 눈으로 다시 챙기는 게 버릇이었다.
"이 실장님, 매트 위치 한 뼘만 더 왼쪽으로요."
이 실장이 손짓하자 스태프가 급히 매트를 끌어다 옮겼다.
저만치 트레일러 앞에서 세자빈 역의 배우가 매니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클로즈업이 필요한 앞부분은 어제 그 배우가 다 찍었고, 오늘 새벽에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뒷모습과 원거리 신만 남아 있었다.
위험한 몫은 전부 채원의 것이었다.
"레디, 스탠바이."
이 신은 편집 없이 한 번에 가는 게 목표였다.
다시 찍으려면 말도, 촬영 허가도, 이 새벽 시간도 전부 다시 맞춰야 했다.
무전기 소리에 고삐를 고쳐 쥐었다. 낙마는 여러 번 해봤다. 몸으로 부딪히는 건 언제나 채원의 몫이었다.
억울하진 않았다. 대역이란 원래 그런 일이었다. 이름 없이, 얼굴 없이, 남의 몫을 대신 살아내는 것.
"액션!"
채원은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 발뒤꿈치로 말의 옆구리를 찼다.
말이 튀어나가듯 달렸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바람이 얼굴을 스쳤고, 몸은 안장 위에서 정확한 리듬을 탔다.
표식까지 스무 걸음. 열다섯 걸음. 열 걸음. 채원은 속으로 숫자를 세며 다음 동작을 준비했다.
다음 표식에서 고삐를 당기며 낙법 자세로 무게를 미리 옮겨야 했다.
그런데 채원의 예상보다 말이 먼저 반응했다.
표식보다 세 걸음 앞에서 말이 갑자기 앞다리를 들며 몸을 뒤틀었다.
예정된 시각보다 폭죽이 먼저 터졌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채원의 몸이 순간 붕 떴다.
공중에 뜬 시간이 이상하게 길게 늘어졌다.
치솟는 말의 목덜미, 흩날리는 갈기, 저 멀리 흔들리는 카메라. 전부 한 장면씩 끊어져 보였다.
'타이밍이 안 맞아.'
머릿속에서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이대로 떨어지면 등부터 구른다. 턱을 당기고 몸을 둥글게 말아야 했다.
여러 번 해봤으니 이번에도 될 거라고, 몸이 먼저 그렇게 믿었다.
몸은 훈련대로 움직이려 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미처 몸을 다 말기도 전에 등이 먼저 허공을 갈랐다. 푸르스름한 새벽 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쿵.
구르지 못한 채 뒤통수가 먼저 땅에 닿았다. 시야가 하얗게 튀었다. 귓속에서 삐 소리가 울렸다.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컷! 컷, 스톱!"
누군가의 외침이 멀리서 들렸다. 발소리가 여럿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채원은 눈을 뜨려 했지만 시야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하늘과 사람들의 실루엣이 뒤섞였다.
"채원 씨! 정신 차려요!"
이 실장의 목소리였다. 채원은 대답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 목을 함부로 만지려 하자 다른 사람이 그 손을 쳐냈다.
"목 건드리지 마! 함부로 움직이면 안 돼! 119, 119 불러!"
"숨은 쉬어요, 숨은 쉬는데……"
"빨리, 빨리 좀!"
목소리들이 점점 멀어졌다. "하나, 둘, 셋" 하는 구령과 함께 몸이 들것에 실렸다.
흔들릴 때마다 통증이 번졌다. 팔 안쪽이 따끔했다. 구급대원이 무언가를 연결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사이렌 소리가 어딘가에서 점점 커졌다. 채원은 대답하려 했지만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온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엄마한테 전화해야 하는데.' 뜬금없이 그런 생각이 스쳤다.
누군가 붙잡고 있던 손의 감촉마저 점점 멀어졌다.
그 순간, 다급한 외침이 귓가를 스쳤다.
"선생님, 심정지입니다!"
시야가 하얗게 번지더니 곧 검게 꺼졌다.
서고가 조용해진 뒤에야 채원은 책상을 짚었다.긴장이 풀리자 다리가 떨렸다.이운이 팔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채원도 거절하지 않았다.그때 동궁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잠시 후 궁문에 말을 맡기고 뛰어온 무사가 서고로 들어왔다.옷자락은 군데군데 찢어졌고, 오른쪽 뺨에는 마른 피가 묻어 있었다."찾았다."무사는 예를 갖추기도 전에 말했다.이운이 처음으로 한도겸에게서 시선을 거뒀다."증인을?""증인은 박칠성이란 놈이다. 그놈만 찾은 게 아니다."무사의 이름은 백건이었다.이운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친구이자, 동궁 밖에서 그의 손발이 되어 움직이는 호위였다.증인을 찾느라 여러 날 도성을 비운 상태였다.백건은 채원을 본 순간 말을 멈췄다.돌아오는 길에 세자빈이 목숨을 끊었다는 소문을 들은 모양이었다."빈궁마마께서…….""살아 있다."이운이 짧게 대답했다.세자빈의 둘째 오라비인 윤재경과 오랜 벗인 백건과 이운은 윤서아와도 각별한 사이였다. 백건은 묻고 싶은 말을 삼킨 채 깊이 고개를 숙였다."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채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 증인은 어디 있습니까?"백건의 시선이 채원에게 머물렀다.예전의 윤서아라면 오랜만에 돌아온 피 묻은 무사에게 곧바로 본론부터 묻지 않았을 것이다."북한산에 있습니다."백건은 박칠성이 머물던 여관을 알아낸 뒤 나흘 동안 뒤를 밟았다.박칠성은 낮에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밤마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사람을 만났다."그동안 왜 소식을 보내지 않았지?""제가 행선지를 보고할 때마다 박칠성이 먼저 자리를 옮겼습니다.안에서 새는 곳이 있다고 생각해 나흘 동안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백건의 시선이 비어 있는 책상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 한도겸이 앉아 있던 자리였다."이제야 이유를 알겠군요."오늘 새벽에는 낯선 사내를 따라 북한산으로 들어갔다.백건은 말을 버리고 걸어서 뒤쫓았다.산 중턱에는 숯을 굽는 곳으로 꾸민 넓은 터가 있었다.그러나 안에서 들린 것은 나무를 패
호위의 보고가 끝나자 이운은 곧장 밖으로 나가려 했다.채원이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지금 들어가면 안 됩니다.""연주가 편지를 넘기는 순간을 놓칠 수 있다.""문을 여는 순간 안에 있는 사람이 편지부터 없앨 겁니다.누가 받는지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이운의 시선이 붙잡힌 소매로 내려갔다. 채원은 그제야 손을 놓았다."서고에는 드나들 수 있는 문이 몇 개입니까?""앞문과 뒤쪽 작은 문, 두 곳이다."이운은 호위에게 뒤쪽 문을 막고, 창 아래에도 사람을 두라고 명했다.연주를 따라간 사람에게는 안에서 다른 자가 나올 때까지 움직이지 말라는 지시를 보냈다.채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너는 여기 있어라.""제가 만든 미끼입니다.""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또 나서겠다는 것이냐?""서고까지 걷는 일은 할 수 있습니다."이운이 반박하려는 순간 채원이 먼저 방문을 나섰다.다리에 힘이 완전히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벽에 손을 대지 않고 걸을 수는 있었다.이운은 결국 채원의 걸음에 맞춰 속도를 늦췄다.앞서지도, 팔을 붙잡지도 않았다.다만 채원이 흔들릴 때마다 손을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서고는 세자가 신하들과 공부하는 곳 뒤편에 있었다.세자가 읽는 책뿐 아니라 상소의 사본과 조사 기록도 보관하는 곳이었다.등불 하나가 닫힌 창 안에서 흔들리고 있었다.호위가 어둠 속에서 다가와 속삭였다."나인은 안으로 들어간 뒤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도 들렸습니다."이운이 문으로 다가가자 채원이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은 열린 창틈 가까이에 몸을 붙였다.안에서 연주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분명 마마께서 직접 숨겨두신 곳에서 꺼냈습니다.""뒤를 밟힌 것은 아니냐?"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낮고 침착했다."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확실하겠지."잠시 종이가 스치는 소리가 났다.채원은 창틈으로 안을 살폈다. 연주가 책상 앞에 서 있었다.그 맞은편의 남자는 등불 아래에서 봉투의 붉은 점을 확인하고 있었다.그 얼굴을 본 이
설이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저런 곳이 있는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도둑도 몰랐겠지."채원은 빈 봉투 안에 서책에서 찢은 종이를 넣었다.겉에는 윤서아 아버지가 사용하던 붉은 점 하나를 찍었다. 남은 편지에서 본 표시였다.봉투를 숨은 칸에 넣되 판을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서랍을 열어본 사람이라면 어긋난 틈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만 남겼다.그날 저녁, 설이는 방문을 조금 열어둔 채 일부러 찻상을 정리했다.조금 전 상을 가져왔던 나인이 복도를 지나가다 걸음을 늦췄다.설이가 문밖의 그림자를 확인하고 물었다."마마, 없어진 편지에 정말 중요한 내용이 있었습니까?"채원은 목을 누르며 일부러 잠시 뜸을 들였다."아니. 중요한 것은…… 다른 곳에 있어."문밖에서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멎었다."아버지가 남긴 장부는 아직 무사해.""그 장부가 정말 아직 남아 있습니까?""응, 나만 아는 곳에 보관해 두었어"설이는 더 묻지 않고 문을 닫았다.해가 완전히 지자 이운이 보낸 호위 두 사람이 뒤뜰 담장 아래에 숨었다.최 상궁은 순찰을 핑계로 안쪽 뜰의 사람들을 물렸다.설이는 등불을 끈 뒤 바깥방으로 물러나 문 가까이에 앉았다.시간이 더디게 흘렀다.채원은 눈을 감은 채 방 안팎의 소리를 나눠 들었다.창호지를 긁는 바람, 바깥방에서 옷깃을 여미는 설이, 멀리서 교대하는 호위의 발소리.몸은 아직 오래 버틸 수 없었다. 낮에 무릎을 굽혔던 허벅지가 뻐근했고, 목 안쪽은 숨을 들이쉴 때마다 쓰렸다.그래도 정신만은 놓지 않았다.촬영장에서 눈을 감고 신호를 기다리던 때와 같았다.폭발음이 들리기 전, 상대 배우의 발이 움직이기 전, 몸은 작은 기척부터 기억했다.한밤중이 지나자 문고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문이 손가락 하나 들어갈 만큼 열렸다. 누군가 틈으로 방 안을 살폈다.채원은 숨을 고르게 유지했다.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침상 쪽으로 오지 않고 곧장 경대로 향했다. 서랍이 열리고, 나무판이 살짝 긁혔다.망설임 없는 손길이었다.
이운은 대전에서부터 채원을 따라왔다.동궁에 도착한 뒤에도 돌아가지 않고, 안쪽 문을 지키는 호위들에게 지시를 내렸다.그사이 먼저 방으로 들어온 채원은 기둥을 붙잡았다.설이가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달려와 팔을 받쳤다.채원은 그 손에 기대지 않고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가 일어났다.한 번.두 번째에는 허벅지가 떨렸다. 세 번째에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설이가 놀라 몸을 받쳤다."마마, 방금 대전에서 돌아오셨습니다.""그러니까…… 지금 해야 해."말할 때마다 목 안쪽이 따갑게 쓸렸다. 채원은 목을 누르고 숨을 골랐다.보름 안에 증거를 찾아야 했다.몸이 회복되기만 기다리면 그 보름은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 지나갈 것이다.움직이지 못할 때는 머리를 쓰고, 머리를 쓰는 동안에는 몸을 만들어야 했다.채원은 다시 기둥을 잡았다.힘보다 균형부터 확인했다.오른발에 무게를 싣자 무릎이 안으로 흔들렸다.허벅지와 허리가 모두 약했다.이 몸으로 누군가를 걷어차면 상대보다 자신이 먼저 넘어질 터였다.지금 필요한 것은 화려한 기술이 아니었다. 넘어지지 않을 다리와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 손이었다."설이야. 삶은 닭고기를 구해줄 수 있겠니?""닭을 말씀이십니까?""기름진 부분은 빼고 살코기로. 달걀도 있으면 가져오고."설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채원을 살폈다."목이 아프셔서 죽도 제대로 못 드셨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잘게 찢으면 돼. 약만 먹는다고 힘이 생기지는 않잖아.""알겠습니다. 수랏간에 일러두겠습니다."설이가 물러나자 채원은 다시 무릎을 굽혔다.이번에는 두 번 만에 다리가 떨렸다."당장 그만두어라."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호위들에게 지시를 마친 이운이 방으로 들어왔다.그의 시선이 채원의 떨리는 다리와 기둥을 움켜쥔 손을 차례로 훑었다.이운은 서아의 몸짓이 낯설었다. 죽었다 살아난 사람 같지 않았다.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보름을 받아낸 것도 모자라 몸까지 망가뜨릴 셈이냐?""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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