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By:  지호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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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차 베테랑 스턴트우먼 강채원은 사극 촬영 중 낙마 사고로 죽고, 역모로 몰려 가문이 도륙된 세자빈 윤서아의 몸에서 눈을 뜬다. 배후는 늙은 왕을 등에 업고 권력을 노리는 귀비. 채원은 애원 대신 압도적 무력과 냉정한 계산으로 정면 승부에 나서고, 아무도 믿지 않던 냉혹한 세자 이운은 그런 그녀에게 서서히 무너진다. 누명을 벗기고 복수하는 여정 끝에 왕좌 곁에 서는, 액션과 로맨스가 함께 가는 궁중 복수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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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 대역의 추락

화약이 세 걸음 빨리 터졌다.

쾅― 하는 폭음과 함께 붉은 불꽃이 말의 오른쪽에서 솟구쳤고, 놀란 말이 날카롭게 울며 앞발을 치켜드는 순간 강채원은 고삐를 짧게 당기면서 반사적으로 앞을 확인했다.

안전 매트까지 세 걸음.

정확히는 말이 세 걸음을 더 달린 뒤, 낙마 지점에 진입하는 순간 터져야 할 화약이었다.

‘젠장.’

몇 분 전 채원은 안장과 복대, 말이 달릴 동선과 낙마 지점에 깔린 매트까지 직접 확인했고, 화약이 터지는 순서와 타이밍도 스태프에게 재차 물었다.

“선배, 저 화약 타이밍 진짜 괜찮겠죠? 말 놀라면 위험할 것 같은데.”

후배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을 때도 제작진은 몇 번이나 점검했다며 문제없다고 장담했지만, 채원은 그 말을 믿는 대신 현장을 자기 눈으로 다시 확인했다.

스턴트 대역으로 십 년을 버티면서 배운 게 있다면, 촬영장에서 누군가 ‘괜찮다’고 말하는 것과 정말 괜찮은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확인했다.

안장도, 복대도, 매트도 이상이 없었다.

화약만 제시간에 터졌다면.

쾅―!

두 번째 폭발이 터지자 말이 머리를 거칠게 흔들며 옆으로 몸을 틀었고, 채원의 머릿속에서 조금 전까지 있던 생각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말을 진정시키기엔 늦었다.

왼쪽.

고삐를 놓는다.

턱을 당기고, 어깨부터.

수백 번 반복한 동작을 몸이 생각보다 먼저 실행했다.

채원은 말이 다시 앞발을 드는 순간 고삐를 놓으며 안장에서 몸을 빼냈고, 허공으로 떠오른 몸을 왼쪽으로 틀었다.

된다.

낙법만 제대로 들어가면 된다.

그 순간 놀란 말이 반대쪽으로 몸을 거칠게 비틀었고, 발끝에 걸려 있던 등자가 빠지면서 채원의 몸이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머리가 아래로 향했다.

눈앞으로 검은 흙바닥과 군데군데 튀어나온 돌멩이가 빠르게 가까워졌고, 그 너머에는 조금 전 자기 눈으로 확인했던 파란색 안전 매트가 보였다.

세 걸음.

고작 세 걸음이었지만 지금은 닿을 수 없는 거리였다.

‘안 돼.’

채원은 본능적으로 어깨를 안쪽으로 말며 몸을 한 번 더 틀었다.

쾅!

머리 뒤쪽을 둔탁한 충격이 때렸다.

소리가 끊겼다.

눈앞이 새하얗게 번졌다가 천천히 색을 되찾았을 때는 새벽빛이 희미하게 번지는 하늘과 그 아래로 다급하게 달려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 채원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지만 목소리는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뭉개졌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손가락과 발끝 어디에서도 감각이 따라오지 않았다.

채원은 움직이려던 힘을 즉시 풀었다.

‘목.’

움직이면 안 된다.

낙상 사고를 수도 없이 재현해 온 몸이 공포보다 먼저 위험을 알아챘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누군가 채원의 목 양옆을 잡아 고정했고, 다른 사람이 맥을 확인하는 사이 조금 전 함께 촬영했던 후배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계속 무언가를 외쳤다.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채원은 눈동자만 움직여 자신이 달려온 길을 바라봤다.

파란 안전 매트는 세 걸음 앞에 그대로 있었다.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그제야 실감이 났다.

잘못된 것은 단 하나였다.

화약이 예정된 순간보다 세 걸음 빨리 터졌다.

그 세 걸음이 사람 하나의 목숨을 가를 줄은 몰랐다.

“산소마스크!”

“들것 가져와요! 빨리!”

목을 고정한 채 몸이 들것 위로 옮겨졌고, 산소마스크가 얼굴을 덮었지만 숨은 갈수록 얕아졌다.

눈꺼풀도 무거워졌다.

정신을 붙잡아야 한다는 건 알았다.

그런데 그 순간, 사고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생각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엄마한테 전화해야 하는데.

어제도 촬영이 늦게 끝나서 못 했고, 오늘은 꼭 전화하겠다고 했는데.

채원은 손가락이라도 움직여 보려 했지만 아무 감각이 없었다.

사람들의 손이 다급하게 움직이는 사이 누군가 촬영용 가체와 장신구를 풀어냈고, 흐려지는 시야 끝으로 자기 몸을 덮은 붉은 비단옷이 스쳤다.

세자빈의 옷이었다.

오늘도 카메라 앞에서 남의 얼굴 대신 위험한 장면을 맡았고, 늘 그랬듯 무사히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맥박 떨어집니다!”

산소마스크 너머로 숨을 들이마시려 했지만 가슴이 움직이지 않았다.

새벽 하늘도,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람들의 얼굴도 빠르게 흐려졌다.

“맥박 없습니다!”

누군가 급하게 자리를 비키라고 외쳤고, 곧이어 의료진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선생님, 심정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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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s

최윤경
최윤경
흥미진진하고 재밌어요
2026-09-16 12:05:27
0
0
정기효
정기효
재밌게 보고 있어요 빠른 연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6-09-12 12:56:16
2
0
날아라 호빵
날아라 호빵
아주 재미있어요 여주도 똑똑하고 억울한집안을 하나씩 세자와 호흡이 찰떡!
2026-09-10 19:29:05
3
0
121 Chapters
1. 대역의 추락
화약이 세 걸음 빨리 터졌다.쾅― 하는 폭음과 함께 붉은 불꽃이 말의 오른쪽에서 솟구쳤고, 놀란 말이 날카롭게 울며 앞발을 치켜드는 순간 강채원은 고삐를 짧게 당기면서 반사적으로 앞을 확인했다.안전 매트까지 세 걸음.정확히는 말이 세 걸음을 더 달린 뒤, 낙마 지점에 진입하는 순간 터져야 할 화약이었다.‘젠장.’몇 분 전 채원은 안장과 복대, 말이 달릴 동선과 낙마 지점에 깔린 매트까지 직접 확인했고, 화약이 터지는 순서와 타이밍도 스태프에게 재차 물었다.“선배, 저 화약 타이밍 진짜 괜찮겠죠? 말 놀라면 위험할 것 같은데.”후배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을 때도 제작진은 몇 번이나 점검했다며 문제없다고 장담했지만, 채원은 그 말을 믿는 대신 현장을 자기 눈으로 다시 확인했다.스턴트 대역으로 십 년을 버티면서 배운 게 있다면, 촬영장에서 누군가 ‘괜찮다’고 말하는 것과 정말 괜찮은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사실이었다.그래서 확인했다.안장도, 복대도, 매트도 이상이 없었다.화약만 제시간에 터졌다면.쾅―!두 번째 폭발이 터지자 말이 머리를 거칠게 흔들며 옆으로 몸을 틀었고, 채원의 머릿속에서 조금 전까지 있던 생각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말을 진정시키기엔 늦었다.왼쪽.고삐를 놓는다.턱을 당기고, 어깨부터.수백 번 반복한 동작을 몸이 생각보다 먼저 실행했다.채원은 말이 다시 앞발을 드는 순간 고삐를 놓으며 안장에서 몸을 빼냈고, 허공으로 떠오른 몸을 왼쪽으로 틀었다.된다.낙법만 제대로 들어가면 된다.그 순간 놀란 말이 반대쪽으로 몸을 거칠게 비틀었고, 발끝에 걸려 있던 등자가 빠지면서 채원의 몸이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머리가 아래로 향했다.눈앞으로 검은 흙바닥과 군데군데 튀어나온 돌멩이가 빠르게 가까워졌고, 그 너머에는 조금 전 자기 눈으로 확인했던 파란색 안전 매트가 보였다.세 걸음.고작 세 걸음이었지만 지금은 닿을 수 없는 거리였다.‘안 돼.’채원은 본능적으로 어깨를 안쪽으로 말며 몸을 한 번 더 틀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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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멈췄던 숨
쨍그랑!설이의 손에서 찻잔이 떨어졌다.깨진 잔 사이로 대추차가 번졌지만 설이는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방 안쪽을 바라봤다.흰 버선을 신은 두 발이 허공에 떠 있었다. 그 위로 축 늘어진 치맛자락이 보였고, 천장 들보에서 내려온 흰 비단끈 끝에는 세자빈이 목을 맨 채 늘어져 있었다.“마마!”설이는 정신없이 의자를 끌어왔다. 떨리는 손으로 비단끈을 잘라내자 힘없이 늘어진 세자빈의 몸이 그대로 무너졌다.설이는 가까스로 그 몸을 받아 안은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마마! 정신 차리십시오!”코와 입가에 손을 가져갔지만 숨이 없었고, 떨리는 손으로 손목을 붙잡아봐도 맥을 찾을 수 없었다.설이는 다급하게 세자빈의 가슴을 누르며 몇 번이나 마마를 불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오늘 설이는 사가의 소식을 전했다.역모죄로 끌려간 아버지와 두 오라버니가 끝내 참형을 당했다는 소식이었다. 한 사람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그 말을 들은 세자빈은 울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그저 닫힌 문을 오래 바라봤다.누군가 그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설이는 곁에 남으려 했지만 세자빈은 혼자 있고 싶다며 자신을 내보냈다.그때 나가지 말았어야 했다.적어도 그분이 기다리던 사람이 올 때까지만이라도 곁에 있었어야 했다.눈물이 쏟아졌지만 울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의원을 불러야 했다.설이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문으로 달려갔다.역적의 딸이 가족의 참형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두려움이 스쳤지만, 망설임은 잠깐이었다.살리는 게 먼저였다.문을 열려던 순간이었다.“컥!”등 뒤에서 거친 숨소리가 터졌다.설이가 그대로 얼어붙었다.조금 전까지 미동도 없던 세자빈의 몸이 크게 들썩이고 있었다.“마……마?”설이가 달려가 입가에 손을 가져가자 약하지만 분명한 숨이 닿았다.“마마!”설이는 울음을 터뜨리며 세자빈을 끌어안았다.숨이 막혔다.채원은 본능적으로 공기를 들이마셨다.“컥!”목 안쪽이 찢어지는 듯 아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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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문이 열리기 전에
“저거부터.”채원이 입을 열자 목에서 바람 섞인 소리만 새어 나왔다.설이는 알아듣지 못한 채 다가오는 발소리만 바라봤고, 채원은 힘겹게 손을 들어 천장에서 늘어진 비단끈을 가리켰다.그제야 설이가 퍼뜩 움직였다.의자를 바로 세운 설이는 바닥에 떨어진 비단끈을 집어 들고 곧장 그 위로 올라갔다. 떨리는 손으로 들보에 묶인 끈을 풀어냈지만, 급하게 당겨진 매듭 자리와 들보에 남은 눌린 흔적까지 없앨 수는 없었다.“마마, 이것을…….”문밖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채원은 방 안을 빠르게 훑었다.깨진 찻잔과 엎어진 차, 풀어낸 비단끈.무엇보다 자기 목.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랐다. 다만 눈앞의 여자가 이 광경을 필사적으로 숨기려 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이불…….”갈라진 목소리에 설이가 채원을 바라봤다.채원이 침상을 가리키자 설이는 뒤늦게 뜻을 알아듣고 채원을 부축해 일으켰다.몸을 세우는 순간 무릎이 풀렸고, 설이가 허리를 붙잡지 않았다면 그대로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채원은 순간 굳었다.십 년 동안 몸으로 먹고살았다. 눈을 감고도 자신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알았고, 넘어지는 순간에도 어느 근육에 힘을 줘야 하는지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그런데 지금은 팔도, 다리도, 무게중심도 전부 낯설었다.‘정말 내 몸이 아니야.’“마마!”설이가 채원을 침상에 눕히고 급히 이불을 끌어올렸다.그 순간 문밖에서 나이 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최 상궁이옵니다. 안으로 들겠습니다.”설이의 얼굴이 굳었다.“마마께서 갑자기 몸이 좋지 않으십니다.”“몸이 좋지 않으시다고?”설이가 다급하게 대답했다.“예. 잠시 쉬고 계십니다.”그사이 설이는 풀어낸 비단끈을 둘둘 말아 침상 아래 깊숙이 밀어 넣었다.“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지금은…….”설이가 말을 잇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중년의 궁녀가 가장 먼저 들어왔고, 그 뒤로 두 명의 나인이 따라 들어왔다.최 상궁의 시선이 깨진 찻잔과 젖은 바닥을 훑고, 창백하게 질린 설이와 침상에 누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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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죽은 여자의 기억
“안에 이상은 없는가?”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최 상궁의 표정이 굳었다.그녀의 시선이 침상에 누운 채원에게 향했다. 붉게 부어오른 목은 이불로 가려져 있었고, 조금 전 천장에서 풀어낸 비단끈은 침상 아래 숨겨진 상태였다.잠시 침묵하던 최 상궁이 문밖을 향해 대답했다.“마마께서는 별다른 이상이 없으십니다.”“알겠습니다. 조금 전 발견된 수상한 자는 담을 넘어 달아났습니다. 처소 주변의 경계를 강화하겠습니다.”보고를 마친 남자의 발소리가 이내 멀어졌다.채원은 아무 말 없이 그 소리를 들었다. 수상한 자가 누구인지, 왜 이곳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금 당장 확인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마마.”최 상궁이 침상으로 돌아왔다.“조금 전 하신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여기가 어디냐고 물었으니 이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옆에 있던 젊은 궁녀도 불안한 얼굴로 다가와 채원의 안색을 살폈다.“혹시……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채원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처음 보는 얼굴과 처음 보는 방, 낯선 몸까지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부터 털어놓는 게 안전한지도 판단할 수 없었다.“잘…… 모르겠어요.”갈라진 목소리가 간신히 흘러나왔다.최 상궁의 표정이 무거워졌다.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박 의녀가 왔습니다.”최 상궁이 직접 문을 열어 들인 사람은 약상자를 든 나이 지긋한 여인이었다.박 의녀는 침상 앞에 앉아 채원의 손목을 짚었다. 한동안 말없이 맥을 살피던 얼굴이 조금씩 굳었다.“맥이 몹시 약합니다.”“목부터 보게.”이불이 내려가면서 붉게 부어오른 목이 드러났다.박 의녀는 상처를 살피기 위해 몸을 가까이했다. 손끝이 목에 닿으려던 순간이었다.쏴아―.갑자기 귓가에서 빗소리가 터졌다.채원은 눈을 크게 떴다.분명 침상에 누워 있었는데 차가운 빗물이 얼굴을 때리고 있었다. 눈앞에는 비에 젖은 돌바닥과 그 위에 놓인 두 손이 보였다.무릎이 아팠다.오래 꿇고 있었는지 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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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지막 추국
문밖이 소란스러워진 것은 박 의녀가 채원의 목에 약을 바르던 때였다.급하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처소 앞에서 멎었다.“저하.”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최 상궁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젊은 궁녀도 황급히 몸을 낮췄다.채원만이 침상에 누운 채 문을 바라봤다.저하?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짙은 색의 곤룡포를 입은 젊은 사내가 들어왔다. 흐트러진 곳 하나 없는 차림과 달리 호흡은 미세하게 거칠었다.방 안으로 들어온 그의 시선이 곧장 침상으로 향했다.채원과 눈이 마주쳤다.남자의 걸음이 멎었다.아주 잠깐이었다.그러나 채원은 분명히 봤다. 자신을 보는 순간 그의 얼굴에서 무언가가 흔들렸다.놀란 것 같기도 했고, 믿기지 않는 것을 확인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남자의 표정은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시선만큼은 채원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어찌 된 일이냐.”최 상궁을 향한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최 상궁이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짧은 침묵 사이 남자의 시선이 채원의 얼굴에서 목으로 내려갔다.박 의녀가 치료를 위해 걷어둔 옷깃 사이로 붉게 부어오른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남자의 얼굴이 굳었다.“저게 무엇이냐.”조금 전과 같은 낮은 목소리였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최 상궁이 입술을 달싹였다.“저하, 그것이…….”남자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그리고 손을 뻗었다.채원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움직임은 크지 않았지만 남자의 손이 허공에서 멎었다.방 안이 조용해졌다.채원은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처음 보는 남자가 갑자기 손을 뻗었으니 몸이 먼저 반응했을 뿐이었다.그런데 남자는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닿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바로 거두지도 못한 손.그의 시선이 채원의 얼굴에 머물렀다.이윽고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나가 있어라.”최 상궁이 흠칫했다.“저하.”“박 의녀는 남고.”짧은 말에 최 상궁은 더 묻지 않았다. 젊은 궁녀와 함께 물러나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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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나를 아는 사람
남자는 더 묻지 않았다. 채원 역시 입을 다문 채 그를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방 안을 채우고 있던 침묵이 이상할 만큼 무거웠다.“저하.”문밖에서 최 상궁의 목소리가 들렸다.“들어오너라.”문이 열리고 최 상궁과 젊은 궁녀가 다시 들어왔다. 남자는 어느새 처음 들어왔을 때와 같은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조금 전 “나도 기억나지 않는 것이냐.”고 묻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표정이 차분했다.“어찌 된 일인지 말해라.”최 상궁의 얼굴이 굳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젊은 궁녀를 돌아보자, 젊은 궁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제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왔을 때 마마께서…… 들보에 목을 매신 채 계셨습니다.”방 안이 조용해졌다.채원의 시선이 남자에게 향했다.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무릎 위에 놓인 손이 천천히 굳었다.“당시 상태는.”“숨도 없으셨고…… 맥도 잡히지 않으셨습니다.”이번에는 침묵이 조금 길었다.채원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적어도 젊은 궁녀가 발견했을 때는 숨도, 맥도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뒤에 자신이 눈을 떴다.“그런데 살아났다.”남자의 시선이 채원에게 향했다.“예. 끈을 잘라 마마를 내려드린 뒤 의원을 부르려 했는데, 갑자기 숨을 쉬셨습니다.”남자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믿기 어려운 이야기일 것이다. 정작 그 몸 안에서 깨어난 채원조차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이윽고 남자가 물었다.“네가 자리를 비우기 전에는.”젊은 궁녀가 잠시 머뭇거렸다.“마마께서 혼자 있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잠시 나가 있으라 하셔서…….”남자의 눈빛이 미세하게 가라앉았다.“그게 전부냐.”“예, 저하.”“이 일을 아는 자는?”이번에는 최 상궁이 대답했다.“이 아이와 저, 박 의녀뿐입니다.”“계속 그렇게 해라.”짧은 명령이었다.“오늘 이 방에서 있었던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예, 저하.”최 상궁과 젊은 궁녀가 동시에 몸을 낮췄다.채원은 가만히 남자를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기억하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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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기다리던 사람
“무슨 일이지.”규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채원의 목에 머물러 있었다. 붉게 부어오른 흔적을 바라보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저 상처는 무엇입니까.”이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규현의 시선이 최 상궁에게 향하자 그녀는 난처한 얼굴로 이운을 바라봤다. 그 짧은 움직임만으로도 무언가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설마…… 마마께서 스스로 목을 매신 겁니까?”방 안이 조용해졌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규현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던 모양이었다. 채원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지고, 옆으로 내려뜨린 손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윤 대감이 죽었습니다. 윤태경도 죽었고…… 재경이도 죽었습니다.”마지막 이름에서 목소리가 갈라졌다.채원은 가만히 규현을 바라봤다. 처음 듣는 이름들이었지만 누구를 말하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윤서아의 아버지와 두 오라버니. 이미 자신도 들었던 이야기였다.그런데 규현은 그들의 죽음을 단순히 전해 들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특히 마지막 이름을 입에 올린 뒤에는 한동안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하루아침에 셋이 목이 잘렸습니다. 그런데 이제…….”규현의 시선이 다시 채원에게 향했다.“서아까지 이 꼴이 됐는데…….”“조규현.”차갑게 떨어진 목소리에 규현의 입이 다물렸다.이운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목소리를 높인 것도 아니었고 자리에서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던 규현이 처음으로 말을 멈췄다.“네가 지금 누구 앞에 있는지 잊었느냐.”규현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잊지 않았습니다.”“그런데 세자빈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려?”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채원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세자가 세자빈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 신하를 꾸짖는 것은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단순히 법도를 지적하는 것처럼 들리지만은 않았다.규현 역시 곧바로 사과하지 않았다. 한동안 이운을 바라보던 그가 겨우 시선을 내렸다.“결례를 범했습니다.”말은 그렇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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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뜯긴 자물쇠
규현이 나간 뒤 방 안은 한동안 조용했다.채원은 닫힌 문을 바라보다 이운에게 시선을 돌렸다.규현이 왜 윤서아의 일에 저토록 감정을 드러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윤서아의 아버지와 두 오라버니의 죽음이 그에게 남의 일은 아닌 듯했다.채원은 방금 전부터 마음에 걸리던 것을 물었다.“저하.”“말해라.”“아버지 일은…… 이제 끝난 건가요?”이운의 눈빛이 미세하게 달라졌다.“무엇이 궁금한 것이냐.”“정말 역모를 꾸몄는지요.”잠시 침묵이 흘렀다.“아직 확인하지 못했다.”채원은 이운을 바라봤다.“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확인하고 있었다.”적어도 이운 역시 내려진 판결만으로 모든 의심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확인이 끝나기도 전에 세 사람은 죽었다.채원은 더 묻지 않았다.자신도 윤서아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의 결백을 호소하던 장면을 봤을 뿐이었다. 윤서아가 그렇게 믿었다는 것과 실제로 결백했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채원은 더 이상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침상에 등을 기대자 긴장이 풀린 탓인지 목 안쪽의 통증이 다시 선명해졌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부어오른 곳이 당겼다.이운이 바로 알아차렸다.“많이 아프냐.”“조금요.”“당분간은 가만히 안정을 취하거라.”채원은 눈을 감았다.그런데 이운은 가지 않았다.채원은 굳이 이유를 묻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방 안에는 설이가 물건을 정리하는 작은 소리만 간간이 이어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채원이 눈을 뜨자 이운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박 의녀에게 다시 들르게 하라.”“예, 저하.”“당분간 처소를 드나드는 사람도 줄이고.”이운이 잠시 말을 멈췄다.“밤에도 혼자 두지 마라.”“예.”이운이 문 쪽으로 향했다.그런데 채원은 문득 처음 그를 봤을 때를 떠올렸다.자신을 보는 순간 멎었던 움직임.채원이 움츠러들자 허공에서 멈춘 손.그리고.―나도 기억나지 않는 것이냐.평온하던 목소리가 처음으로 아주 조금 갈라졌던 순간.남편이라고 했다.그런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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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사라진 편지
며칠이 지났다.목의 붓기는 조금씩 가라앉았다. 침을 삼킬 때마다 느껴지던 통증도 전보다 덜했고, 목소리를 내는 것도 한결 수월해졌다.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었지만 계속 침상에 누워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채원은 그때부터 윤서아의 물건을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가장 먼저 알고 싶은 건 아버지의 일이었다.윤서아는 아버지가 결백하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채원은 그 이유를 몰랐다. 가족이기에 끝까지 믿었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었던 것인지.그것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평소에 제가 편지나 서류 같은 건 어디에 뒀어요?”설이가 방 한쪽을 가리켰다.“중요한 것은 대부분 저 문갑에 보관하셨습니다.”채원은 그쪽으로 걸어갔다.가까이 다가가자 자물쇠가 눈에 들어왔다.금속 장식 한쪽이 비틀린 채 들려 있었고, 그 아래의 나무에는 무언가를 밀어 넣은 듯 깊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채원은 문갑 앞에 몸을 낮춰 자물쇠를 살폈다.“이거 원래 이랬어요?”“예?”설이가 다가왔다. 자물쇠를 확인한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잘 모르겠습니다. 마마께서 직접 관리하셔서…….”언제 이렇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었다.다만 오래되어 저절로 망가진 흔적과는 달라 보였다.“열어봐요.”설이가 문갑을 열었다.“여기 있던 것 중에…… 없어진 게 뭔지 알아요?”설이는 안에 든 물건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서책과 종이뭉치, 작은 함까지 차례로 확인하던 손이 어느 순간 멈췄다.“서찰이 없습니다.”“무슨 서찰?”“윤 대감께서 보내신 것들입니다.”“전부요?”“예. 마마께서는 사가에서 온 서찰을 늘 이곳에 따로 보관하셨습니다. 윤 대감께서 보내신 것은 푸른 비단끈으로 묶어두셨고요.”설이는 문갑을 정리하며 그 묶음을 여러 번 보았다고 했다.다른 물건은 그대로였다.돈도 패물도 건드린 흔적이 없는데 윤정명이 보냈다는 편지만 보이지 않았다.누군가 문갑을 억지로 열었다.그리고 지금 윤정명의 편지가 사라져 있었다.두 가지가 연결된 일인지는 아직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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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얼어붙은 대전
대전으로 향하는 동안 이운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채원 역시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목의 통증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걷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다만 오래 말을 하면 목 안쪽이 금세 따끔거렸다.대전이 가까워질 무렵 이운이 입을 열었다.“전하 앞에서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채원이 그를 바라봤다.“어느 정도로요?”“묻는 말에만 답하고, 확실하지 않은 것은 입에 올리지 마라.”채원은 잠시 생각했다.틀린 말은 아니었다.이곳의 법도도, 왕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다. 굳이 아는 척해서 좋을 건 없었다.“알겠습니다.”순순한 대답에 오히려 이운의 시선이 머물렀다.“대신 제가 알아야 하는 건 물어볼게요.”“…….”“모르는 채로 대답할 수는 없으니까요.”잠시 채원을 바라보던 이운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그 정도면 된다.”대전 안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있었다.왕의 곁에는 중전이 앉아 있었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인이 있었다.채원이 들어서자 수십 개의 시선이 한꺼번에 쏟아졌다.호의적인 시선은 아니었다.채원은 그 시선을 그대로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전하를 뵙습니다.”“몸이 좋지 않다 들었다.”왕의 목소리는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괜찮으냐.”“예, 전하.”왕이 앞에 놓인 상소를 내려다봤다.“그렇다면 네가 직접 듣는 것이 좋겠구나.”채원은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윤정명과 그 두 아들이 역모죄로 참형을 당한 이상, 그 딸을 계속 세자빈의 자리에 둘 수 없다는 상소가 올라왔다.”폐위.그제야 자신을 반드시 대전으로 데려오라 한 이유를 알았다.“전하.”이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윤정명의 죄를 세자빈에게까지 물을 수는 없습니다.”대신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세자빈마마께 같은 죄를 묻자는 것이 아니옵니다. 역적의 딸이 국본의 배필로 남는다면 조정의 기강이 어찌 서겠사옵니까.”“죄가 없다면서 그 신분은 거두어야 한다는 것인가.”이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대신이 고개를 숙였다.“국본의 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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