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By:  지호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goodnovel4goodnovel
Not enough ratings
15Chapters
41views
Read
Add to library

Share:  

Report
Overview
Catalog
SCAN CODE TO READ ON APP

10년 차 베테랑 스턴트우먼 강채원은 사극 촬영 중 낙마 사고로 죽고, 역모로 몰려 가문이 도륙된 세자빈 윤서아의 몸에서 눈을 뜬다. 배후는 늙은 왕을 등에 업고 권력을 노리는 귀비. 채원은 애원 대신 압도적 무력과 냉정한 계산으로 정면 승부에 나서고, 아무도 믿지 않던 냉혹한 세자 이운은 그런 그녀에게 서서히 무너진다. 누명을 벗기고 복수하는 여정 끝에 왕좌 곁에 서는, 액션과 로맨스가 함께 가는 궁중 복수극.

View More

Chapter 1

1. 대역의 추락

산 공기가 차가웠다.

강채원은 종이컵에 남은 커피를 마저 비우고 보호모를 눌러썼다. 새벽 다섯 시부터 시작된 촬영이었다.

새벽빛이 필요한 장면이라 촬영 가능한 시간은 몇 시간뿐이었다.

능선 아래로 카메라 세 대가 자리를 잡았다.

스태프들이 매트와 와이어를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오늘 찍을 신은 세자빈이 자객에게 쫓겨 산길을 내달리다 말에서 떨어지는 장면이었다.

대본에는 "세자빈, 절박하게 말을 몬다"라고만 적혀 있었다.

그 절박함을 몸으로 옮기는 건 언제나 채원의 일이었다. 이번 작품에서만 다섯 번째 낙마였다.

"채원 씨, 오늘도 잘 부탁해요."

라인 프로듀서가 지나가며 손을 들었다.

채원도 목례로 답하고 대기하던 말 쪽으로 걸어갔다.

갈색 말은 어제 리허설에서도 순했던 녀석이었다.

옆에서 안전 장비를 챙기던 후배 스턴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언니, 저 폭죽 신호 타이밍 진짜 괜찮은 거예요? 말이 놀랄 것 같은데."

"연출부에서 아까 확인했대."

"그래도……"

"나도 어제부터 이 말 봤어. 순해."

"그래도 언니, 꼭 조심해요."

"알았어. 걱정 그만하고 가서 준비해."

채원은 후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낙마 지점과 말의 상태를 다시 살폈다.

예전에 남에게 맡겼다가 사고가 난 적이 있었다.

배대끈을 당겨보고 안장에 올랐다.

고삐를 두어 번 튕겨 반응을 지켜봤다.

여러 번 해봤어도 매번 눈으로 다시 챙기는 게 버릇이었다.

"이 실장님, 매트 위치 한 뼘만 더 왼쪽으로요."

이 실장이 손짓하자 스태프가 급히 매트를 끌어다 옮겼다.

저만치 트레일러 앞에서 세자빈 역의 배우가 매니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클로즈업이 필요한 앞부분은 어제 그 배우가 다 찍었고, 오늘 새벽에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뒷모습과 원거리 신만 남아 있었다.

위험한 몫은 전부 채원의 것이었다.

"레디, 스탠바이."

이 신은 편집 없이 한 번에 가는 게 목표였다.

다시 찍으려면 말도, 촬영 허가도, 이 새벽 시간도 전부 다시 맞춰야 했다.

무전기 소리에 고삐를 고쳐 쥐었다. 낙마는 여러 번 해봤다. 몸으로 부딪히는 건 언제나 채원의 몫이었다.

억울하진 않았다. 대역이란 원래 그런 일이었다. 이름 없이, 얼굴 없이, 남의 몫을 대신 살아내는 것.

"액션!"

채원은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 발뒤꿈치로 말의 옆구리를 찼다.

말이 튀어나가듯 달렸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바람이 얼굴을 스쳤고, 몸은 안장 위에서 정확한 리듬을 탔다.

표식까지 스무 걸음. 열다섯 걸음. 열 걸음. 채원은 속으로 숫자를 세며 다음 동작을 준비했다.

다음 표식에서 고삐를 당기며 낙법 자세로 무게를 미리 옮겨야 했다.

그런데 채원의 예상보다 말이 먼저 반응했다.

표식보다 세 걸음 앞에서 말이 갑자기 앞다리를 들며 몸을 뒤틀었다.

예정된 시각보다 폭죽이 먼저 터졌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채원의 몸이 순간 붕 떴다.

공중에 뜬 시간이 이상하게 길게 늘어졌다.

치솟는 말의 목덜미, 흩날리는 갈기, 저 멀리 흔들리는 카메라. 전부 한 장면씩 끊어져 보였다.

'타이밍이 안 맞아.'

머릿속에서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이대로 떨어지면 등부터 구른다. 턱을 당기고 몸을 둥글게 말아야 했다.

여러 번 해봤으니 이번에도 될 거라고, 몸이 먼저 그렇게 믿었다.

몸은 훈련대로 움직이려 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미처 몸을 다 말기도 전에 등이 먼저 허공을 갈랐다. 푸르스름한 새벽 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쿵.

구르지 못한 채 뒤통수가 먼저 땅에 닿았다. 시야가 하얗게 튀었다. 귓속에서 삐 소리가 울렸다.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컷! 컷, 스톱!"

누군가의 외침이 멀리서 들렸다. 발소리가 여럿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채원은 눈을 뜨려 했지만 시야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하늘과 사람들의 실루엣이 뒤섞였다.

"채원 씨! 정신 차려요!"

이 실장의 목소리였다. 채원은 대답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 목을 함부로 만지려 하자 다른 사람이 그 손을 쳐냈다.

"목 건드리지 마! 함부로 움직이면 안 돼! 119, 119 불러!"

"숨은 쉬어요, 숨은 쉬는데……"

"빨리, 빨리 좀!"

목소리들이 점점 멀어졌다. "하나, 둘, 셋" 하는 구령과 함께 몸이 들것에 실렸다.

흔들릴 때마다 통증이 번졌다. 팔 안쪽이 따끔했다. 구급대원이 무언가를 연결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사이렌 소리가 어딘가에서 점점 커졌다. 채원은 대답하려 했지만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온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엄마한테 전화해야 하는데.' 뜬금없이 그런 생각이 스쳤다.

누군가 붙잡고 있던 손의 감촉마저 점점 멀어졌다.

그 순간, 다급한 외침이 귓가를 스쳤다.

"선생님, 심정지입니다!"

시야가 하얗게 번지더니 곧 검게 꺼졌다.

Expand
Next Chapter
Download

Latest chapter

More Chapters

To Readers

굿노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굿노벨에 등록하시면 우수한 웹소설을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완벽한 세상을 모색하는 작가도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로맨스, 도시와 현실, 판타지, 현판 등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읽거나 창작할 수 있습니다. 독자로서 질이 좋은 작품을 볼 수 있고 작가로서 색다른 장르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어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성한 작품들은 굿노벨에서 더욱 많은 관심과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No Comments
15 Chapters
1. 대역의 추락
산 공기가 차가웠다.강채원은 종이컵에 남은 커피를 마저 비우고 보호모를 눌러썼다. 새벽 다섯 시부터 시작된 촬영이었다.새벽빛이 필요한 장면이라 촬영 가능한 시간은 몇 시간뿐이었다.능선 아래로 카메라 세 대가 자리를 잡았다.스태프들이 매트와 와이어를 마지막으로 점검했다.오늘 찍을 신은 세자빈이 자객에게 쫓겨 산길을 내달리다 말에서 떨어지는 장면이었다.대본에는 "세자빈, 절박하게 말을 몬다"라고만 적혀 있었다.그 절박함을 몸으로 옮기는 건 언제나 채원의 일이었다. 이번 작품에서만 다섯 번째 낙마였다."채원 씨, 오늘도 잘 부탁해요."라인 프로듀서가 지나가며 손을 들었다.채원도 목례로 답하고 대기하던 말 쪽으로 걸어갔다.갈색 말은 어제 리허설에서도 순했던 녀석이었다.옆에서 안전 장비를 챙기던 후배 스턴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언니, 저 폭죽 신호 타이밍 진짜 괜찮은 거예요? 말이 놀랄 것 같은데.""연출부에서 아까 확인했대.""그래도……""나도 어제부터 이 말 봤어. 순해.""그래도 언니, 꼭 조심해요.""알았어. 걱정 그만하고 가서 준비해."채원은 후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낙마 지점과 말의 상태를 다시 살폈다.예전에 남에게 맡겼다가 사고가 난 적이 있었다.배대끈을 당겨보고 안장에 올랐다.고삐를 두어 번 튕겨 반응을 지켜봤다.여러 번 해봤어도 매번 눈으로 다시 챙기는 게 버릇이었다."이 실장님, 매트 위치 한 뼘만 더 왼쪽으로요."이 실장이 손짓하자 스태프가 급히 매트를 끌어다 옮겼다.저만치 트레일러 앞에서 세자빈 역의 배우가 매니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클로즈업이 필요한 앞부분은 어제 그 배우가 다 찍었고, 오늘 새벽에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뒷모습과 원거리 신만 남아 있었다.위험한 몫은 전부 채원의 것이었다."레디, 스탠바이."이 신은 편집 없이 한 번에 가는 게 목표였다.다시 찍으려면 말도, 촬영 허가도, 이 새벽 시간도 전부 다시 맞춰야 했다.무전기 소리에 고삐를 고쳐 쥐었다. 낙마는 여러 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Read more
2. 멈췄던 숨
그리고 전혀 다른 곳에서는, 또 한 여자의 숨이 끊어져 있었다.설이는 손에 든 등을 고쳐 잡았다.밤바람이 유난히 찼다. 설이는 옷깃을 여미며 걸음을 서둘렀다.세자빈의 처소로 이어지는 마지막 계단을 오르는 동안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두 달 전 대감마님 댁이 역모로 몰린 뒤로는 이 길목을 지키는 사람도 절반으로 줄었다.설이의 손에는 따뜻하게 데운 대추차가 들려 있었다.마마가 요 며칠 수라를 반도 채 드시지 않아 몰래 챙겨 온 것이었다.늘 이 시간이면 촛불 아래서 서책을 읽던 마마였다."마마, 저 설이입니다. 대추차 가져왔습니다."대답이 없었다.설이는 등을 고쳐 들고 문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다.손끝이 문고리에 닿았다. 문 안쪽에서는 숨소리 하나, 옷깃 스치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설이는 대추차를 문 옆에 내려놓고 문을 밀었다. 등을 들어 방 안을 비췄다.대들보에 걸린 비단 끈, 그 아래 늘어진 사람의 그림자가 한눈에 들어왔다.바닥에는 벗겨진 가체와 떨어진 은비녀 하나가 굴러다니고 있었다."마마!"등을 내던지고 뛰어들었다. 발밑에 엎어진 의자가 걸려 휘청거렸다.찰나, 소리를 질러 사람을 불러야 하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하지만 역적의 딸이 목을 맨 것을 다른 사람이 먼저 보면 그걸로 끝이었다.죽은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죄를 인정하고 죽은 것으로 기록될 터였다.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설이는 몸을 세워 끈에 매달린 몸을 두 팔로 받쳤다.무게가 고스란히 팔에 실렸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버텼다."안 돼요, 안 돼……"같은 말만 반복하며 품에서 작은 은장도를 꺼냈다.손이 떨려 날이 자꾸 끈을 비켜갔다.세 번째 시도에서야 끈이 끊어졌고, 몸이 설이의 팔 위로 무너져 내렸다.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바닥에 몸을 눕히고 뺨을 두드렸다."마마. 정신 차리세요, 마마."대답이 없었다. 설이는 차가운 손을 비비고 가슴을 두드렸다.무엇이든 하면 다시 숨을 쉴 것만 같았다."마마, 제발……"몇 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Read more
3.낯선 천장
어둠 속에서 채원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떨어졌다는 것, 그것만 알았다. 몸이 땅에 닿은 순간 이후로는 아무것도 이어지지 않았다.십 년 동안 몇 번이나 정신을 잃어봤지만 이런 어둠은 처음이었다.이런 순간에도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균형을 잡으려 했지만 잡을 곳이 없었다.손을 뻗어봐도 잡히는 게 없었다. 발을 디뎌봐도 닿는 게 없었다. 몸부림칠수록 오히려 더 깊이 가라앉았다.그러다 갑자기 몸 전체가 어딘가로 거세게 끌려갔다.채원은 벗어나려 했지만 붙잡을 것도, 밀어낼 것도 없었다. 어둠이 갈라지듯 사방이 흔들렸다.멀리서 사이렌 소리와 누군가 이름을 부르며 우는 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어느 쪽도 선명하지 않았다.가슴이 짓눌리는 압박, 그다음 목구멍을 찢는 듯한 통증. 익숙한 낙마의 충격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몸도 소리도 전부 이상했다. 뭔가 잘못됐다는 것만은 확실했다.숨을 쉬어야 했다. 반드시. 그 생각뿐이었다.채원은 온 힘을 다해 버텼다. 팔도 다리도, 몸이라는 감각조차 없었다.그냥 살아야 한다는 것 하나만 남아 있었다.채원은 그렇게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겨온 사람이었다. 여기서 놓으면, 정말 끝이었다.컥.목에서 거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폐 속으로 공기가 밀려들었다.손끝이 반사적으로 바닥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아프고 낯설었지만 틀림없는 숨이었다.눈꺼풀이 떨렸다. 채원은 눈을 떴다.가장 먼저 보인 건 낯선 천장이었다. 나무 서까래가 드러난 한옥의 천장. 촬영 세트도 병원도 아니었다.그다음 보인 건 자신을 내려다보는 얼굴이었다. 눈물로 얼룩진, 처음 보는 여자의 얼굴."마마?"여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설이는 눈을 크게 뜬 채 그 몸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세자빈마마! 정신이 드십니까?"채원은 대답하려 입을 열었지만 목에서는 바람 새는 소리만 났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설이는 몇 번이고 이름을 부르다, 문득 멈칫했다.방금까지 숨소리조차 없던 사람이 갑자기 눈을 뜨고 이곳이 처음인 사람처럼 방 안 구석구석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Read more
4.목에 남은 흔적
문이 열렸다.나인 둘이 등불을 들고 먼저 들어왔다.두 사람은 연분홍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남색 치마가 발끝을 따라 조용히 움직였다.초록색 당의를 입은 최 상궁이 그 뒤를 따랐다.야간 순찰을 돌던 나인이 세자빈의 처소에서 큰 소리를 들었다고 알려 직접 찾아온 참이었다.최 상궁은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걸음을 멈췄다.바닥에 주저앉은 채원과 그 곁에 붙어 앉은 설이.엎어진 의자와 떨어진 은비녀. 대들보에는 잘린 비단 끈이 짧게 남아 있었다.최 상궁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마마,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설이가 다급히 채원의 앞을 가렸다."마마께서 잠시 정신을 잃으셨습니다. 지금은 괜찮으십니다."최 상궁의 시선이 대들보에 남은 끈으로 향했다."저것도 정신을 잃다가 생긴 것이냐?"설이는 대답하지 못했다.최 상궁이 나인들을 돌아봤다."문부터 닫아라."열린 문이 닫혔다. 나인 하나가 바깥을 살핀 뒤 걸쇠까지 걸었다.복도에서 스며들던 바람이 막히자 방 안에는 다섯 사람의 숨소리만 남았다.최 상궁은 채원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굽혔다."마마, 소인을 알아보시겠습니까?"채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목 안쪽이 부은 것처럼 답답했고, 입을 열 때마다 갈라진 숨만 흘러나왔다.최 상궁의 눈이 목을 덮은 옷깃에서 멈췄다."설이야. 마마의 목을 보여라.""마마님.""당장."설이는 채원의 옷깃을 잡고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다 떨리는 손으로 옷깃을 조금 내렸다.등불 아래로 붉고 검게 번진 상처가 드러났다. 나인 하나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최 상궁은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얼마나 매달려 계셨느냐?""모릅니다."설이의 목소리가 울음에 잠겼다."제가 왔을 때는 이미 숨을 쉬지 않으셨습니다.끈을 자르고 가슴을 두드렸지만 맥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 갑자기……."설이가 말을 잇지 못하고 채원의 손을 움켜쥐었다."다시 숨을 쉬셨습니다."최 상궁은 놀라거나 되묻지 않았다.손을 뻗어 채원의 코와 입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Read more
5. 낯선 이름
박 의녀가 조심스럽게 상처를 살폈다. 목 앞쪽을 누르지 않고 주변의 붓기와 숨소리를 확인했다."지금은 숨을 고르게 쉬고 계십니다. 하지만 목 안쪽이 많이 부은 듯합니다. 오늘 밤은 곁을 비우시면 안 됩니다.""목소리는 돌아오겠느냐?"최 상궁이 물었다."붓기가 가라앉아야 알 수 있습니다. 당분간은 말씀하지 않으시는 편이 좋습니다.""상처는 언제쯤 사라지겠느냐?""며칠 안에 없어질 자국은 아닙니다."최 상궁의 표정이 무거워졌다."누가 물으면 마마께서 심한 감기로 목이 붓고 쓰러지셨다고 해라. 박 의녀는 오늘 밤부터 이곳에 머물러라.""예.""마마의 목을 본 사람은 이 방에 있는 사람뿐이다. 여기서 말이 새어나가면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최 상궁은 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두 나인과 박 의녀가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채원은 그제야 최 상궁이 그저 그런 상궁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이곳의 사람을 움직이고 입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최 상궁은 대들보에서 내린 비단 끈을 천으로 감싸 소매 안에 넣었다.방에 두었다가 다른 사람에게 발견되는 것보다 자신이 가져가는 편이 안전했다.흔적을 모두 정리한 최 상궁이 입을 열었다."오늘 밤 일은 세자저하께 알려야겠습니다."설이의 얼굴이 굳었다."마마님.""저하께는 알려야 한다.""마마의 친정이 역모로 몰린 뒤로 저하께서는 한 번도 찾아오지 않으셨습니다.마마께서는 날마다 저하를 기다리셨는데도요."최 상궁의 눈에도 잠시 안타까움이 스쳤다."저하께서 움직일 수 없는 사정이 있으셨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채원은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세자. 이 몸의 남편이었다. 윤서아가 죽기 직전까지 기다렸지만 끝내 오지 않은 사람.그에게 자신이 살아났다는 사실을 알려도 되는지 판단할 정보가 부족했다.그렇다고 최 상궁을 막을 수도 없었다.채원에게는 목소리도, 결정을 내릴 만한 정보도 없었다."마마의 안전은 저하의 안전과 이어져 있습니다. 저하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Read more
6. 늦은 걸음
"서아야."그가 다시 이름을 불렀다.채원은 대답하지 못했다.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만은 아니었다.처음 보는 남자의 한마디에 가슴이 아프도록 뛰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눈물은 계속 흘렀다. 닦아내도 금세 다시 맺혔다.낯선 장면 하나가 눈앞을 스쳤다.햇빛이 비치는 정원이었다.어린 윤서아가 연못가에 서 있었고, 지금보다 앳된 이운이 손을 내밀고 있었다.윤서아는 그 손을 잡기 전 소매에 묻은 흙부터 털었다. 이운은 그런 윤서아를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곧 장면이 사라졌다.채원은 눈앞의 남자와 기억 속 소년을 번갈아 맞췄다.얼굴은 달라졌지만 눈매가 같았다.윤서아가 이 남자를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기억과 함께 밀려온 감정은 반가움만이 아니었다.보고 싶었다는 마음과 이제야 왔느냐는 원망이 뒤엉켜 있었다.채원은 그 감정을 억누르며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윤서아가 무엇을 느꼈든, 이운을 판단하는 사람은 이제 자신이어야 했다.이운은 침상 앞에 선 채 채원을 바라봤다.급히 달려온 듯 검은 겉옷의 매듭도 제대로 여며지지 않은 상태였다.평소의 차분함을 잃은 얼굴을 본 설이와 박 의녀가 숨을 죽였다."모두 나가라."박 의녀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마마의 상태를 계속 살펴야 합니다.""그대는 남아라. 최 상궁과 설이도."이운은 문가에 서 있던 나인과 내관들만 물렸다.문이 닫히자 방 안이 조용해졌다.그제야 이운이 침상 가까이 다가왔다.손을 뻗으려다 채원의 목에 감긴 천을 보고 멈췄다. 손끝이 허공에서 천천히 내려갔다."목을 다친 것이냐?"아무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이운의 시선이 최 상궁에게 향했다."설명해라."최 상궁이 무릎을 꿇었다."설이가 발견했을 때는 대들보에 목을 매신 뒤였다고 합니다.끈을 끊었지만 숨도 맥도 느껴지지 않았답니다."이운의 얼굴에서 남아 있던 온기가 사라졌다."그런데 어떻게 살아난거지?""저희도 알 수 없습니다. 한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갑자기 다시 숨을 쉬셨다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Read more
7. 미안하다
설이는 더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채원은 이운을 새롭게 바라봤다.아랫사람에게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특히 이곳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가까운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윤서아는 실제로 죽었다. 이운이 늦었다는 사실도 달라지지 않았다.채원은 자신의 눈물이 멈춘 이유를 알 것 같았다.이운의 사과를 들은 것은 윤서아가 아니라 자신이었다.정작 그 말을 기다린 사람은 이제 이 몸 안에 흔적으로만 남아 있었다.이운이 채원을 바라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그 순간 이운의 얼굴에 후회보다 더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말하지 못하는 사정이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이운이 침상 곁으로 가까이 와 앉았다."몸은 어떠냐."채원은 목에 감긴 천을 손끝으로 눌렀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올라왔다.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려 했지만, 이운은 그 작은 움직임도 막았다."괜찮은 척하지 마라."그 말에 채원은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이운은 걱정하는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그런데 윤서아가 가장 절박했던 순간에는 이곳에 없었다.지금의 다정함만 보고 믿기에는 너무 늦게 온 사람이었다."빈궁과 잠시 단둘이 있겠다."설이가 채원의 손을 놓지 못했다."마마께서는 말씀을 못 하십니다.""대답을 들으려는 게 아니다."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설이가 천천히 손을 놓았다.최 상궁과 박 의녀도 문밖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한 뒤 물러났다.문이 닫히자 이운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채원도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가까이에서 본 이운의 눈 밑에는 옅은 그늘이 져 있었다.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 못한 사람처럼 보였다.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미안하다."짧은 말이 방 안에 떨어졌다.이운의 사과는 채원이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하지만 몸이 먼저 반응했다. 심장이 세게 조여들더니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이 몸의 주인인 윤서아가 듣고 싶었던 한마디였기 때문일 것이다.이운의 시선이 채원의 젖은 눈에서 목에 남은 상처로 내려갔다."가문이 무너지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Read more
8. 뜯긴 자물쇠
채원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윤서아의 슬픔인지 자신의 마음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가슴 안쪽에 웅크리고 있던 무언가가 그제야 울음을 터뜨리는 것 같았다.짧은 기억이 다시 스쳤다.밤마다 문밖의 발소리에 고개를 들던 윤서아.행여 이운일까 싶어 서책을 펼친 채 기다리다가, 날이 밝으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책장을 덮었다.기다렸다고 말하지도 못했다. 와달라고 사람을 보내지도 못했다.자신을 외면한 남자에게 매달리는 순간, 마지막 자존심마저 잃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채원은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자신이 달래줄 수 있는 슬픔이 아니었다.이운이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상처를 피해서 채원의 뺨에 흐른 눈물만 손끝으로 닦아냈다.채원은 피하지 않았다.그 손길을 받아들인 것은 자신이 아니라 윤서아일지도 몰랐다.지금만큼은 이 몸에 남은 마음이 원하는 대로 두고 싶었다."그간의 일을 지금 다 말할 수는 없다."이운의 목소리가 다시 낮아졌다."누가 거짓 증언을 만들었는지, 병력이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아직 밝히지 못했다. 섣불리 움직이면 남은 증거마저 사라질 것이다."채원은 눈물을 닦고 이운을 바라봤다.그의 말속에는 분명 숨긴 것이 있었다.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설이의 생각과 달리, 이운은 이미 누군가를 쫓고 있었다.그렇다고 곧바로 믿을 수는 없었다.실패한 계획은 윤서아의 가족을 살려내지 못했다.좋은 뜻으로 움직였다는 사실만으로 결과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다.채원은 사람의 말보다 행동을 믿었다.촬영장에서도 안전하다는 말보다 직접 확인한 매트의 위치를 믿었다.이운에게도 같은 기준을 적용할 생각이었다."용서해 달라고 하지 않겠다."이운이 말했다."네가 나를 원망해도 받아들이겠다."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다만 살아다오."채원의 손끝이 이불을 움켜쥐었다."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내가 하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다시는 네 목숨을 버리지 마라."이운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네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달려오는 동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Read more
9. 사라진 편지
사흘 밤낮을 거의 잠으로 보낸 채원은 눈을 뜨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목은 여전히 아팠지만 몸에는 제법 힘이 돌아와 있었다.채원은 곧장 부서진 서책함을 뒤졌다.안에 든 서책과 편지는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바닥 한쪽에는 손바닥 두 개만 한 빈자리만 남아 있었다."여기…… 무엇이 있었지?"사흘 만에 나온 목소리는 거칠게 갈라졌다.설이가 놀라 채원을 돌아봤다. 목소리가 나온다는 안도도 잠시, 곧 빈자리를 살피고 얼굴을 굳혔다."대감마님께서 보내신 편지를 모아둔 상자가 있었습니다.""내용은?""마마께서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누군가 윤서아가 죽은 사이 자물쇠를 부수고 그 편지들만 가져갔다.윤서아의 아버지가 딸에게 남긴 글을 없애야 했던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마지막 편지는 누가 가져왔지?""친정의 하인이 가져왔습니다.""지금은?"설이는 고개를 저었다."댁이 몰락한 뒤 소식이 끊겼습니다."채원은 남은 서책을 빠르게 훑었다.중전에게 도움을 청한 날, 임금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온 날, 친정으로 보낸 사람이 돌아오지 않은 날이 적혀 있었다.하지만 역모의 증거나 새로 들어온 하인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았다.가져간 편지 안에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채원이 서책을 챙기려는 순간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마마, 대전에서 사람이 왔습니다."최 상궁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평소와 달리 입술이 단단히 굳어 있었다."전하께서 세자저하와 빈궁마마를 함께 들라 하셨습니다.""무슨 일이지?"갈라진 목소리를 들은 최 상궁이 잠시 멈칫했지만 곧 대답했다."조정에서 마마를 폐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다고 합니다."방 안이 조용해졌다.설이가 들고 있던 편지를 떨어뜨렸다."폐하신다니요? 마마께서 이제 막 살아나셨는데…….""역적의 딸을 국모가 될 자리에 둘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최 상궁이 채원을 바라봤다."저하께서 먼저 대전에 드셨습니다.마마께서는 아직 말을 할 수 없다고 아뢰셨지만, 전하께서 직접 상태를 보겠다고 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Read more
10. 얼어붙은 대전
대전 안에는 임금과 중전이 먼저 앉아 있었다.임금의 오른편 아래에는 귀비 최씨가 자리하고 있었다.채원은 절하는 사람들의 동작을 눈으로 훑은 뒤 그대로 따라 했다.무릎을 굽히는 순간 다리가 떨렸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가까이 오너라."임금의 목소리는 나이만큼 무거웠다.채원은 이운과 함께 앞으로 나갔다.임금의 시선이 목에 감긴 흰 천에 머물렀다.중전도 채원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손끝을 움켜쥐었다.하지만 먼저 말을 건 사람은 귀비였다."빈궁, 몸은 좀 괜찮으냐?"걱정이 가득한 목소리였다.채원은 귀비를 바라봤다.단정하게 올린 머리와 흐트러짐 없는 옷차림, 부드럽게 내려간 눈매까지 어디에도 적의는 보이지 않았다.그래서 더 조심해야 할 사람이었다."염려해주신 덕분에…… 좋아지고 있습니다."쉰 목소리가 대전 안에 울렸다.귀비의 눈길이 목의 상처로 내려갔다가 빠르게 돌아왔다."다행이구나. 네가 쓰러졌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쓰러졌다는 말뿐이었다. 목을 맨 사실은 아직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임금이 탁자를 손끝으로 두드렸다."오늘 너를 부른 것은 네 병세를 묻기 위해서만은 아니다."이운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아바마마, 빈궁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상소에 관한 일은 제가 따로 아뢰겠습니다.""네가 나설 일이 아니다.""제 아내의 일입니다.""그래서 더 나서지 말라는 것이다."임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역모죄로 처형된 집안의 딸을 동궁에 두는 것도 모자라, 세자가 앞장서 감싼다는 말까지 듣고 싶은 것이냐?"이운의 턱이 굳었다.중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전하, 아직 죄인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빈궁의 죄까지 정해진 것은 아니옵니다.""빈궁이 죄를 지었다는 것이 아니다."임금이 상소 한 장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하지만 장차 중전이 될 사람이 역적의 딸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조정의 뜻이다."귀비가 안타까운 얼굴로 채원을 바라봤다."전하께서 빈궁을 벌하시려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을 모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Read more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