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대전이 조용해졌다.
귀비는 한동안 채원을 바라보다 천천히 미소를 되찾았다.
“세자빈께서 큰일을 겪으시더니 생각이 많아지신 모양입니다.”
부드러운 말이었지만 뜻은 달랐다.
쓸데없는 의심을 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새로운 배필을 말씀드린 것은 국본의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셨다면 유감이군요.”
“그렇습니까.”
채원은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 근거가 없는 곳까지 들어가면 자신만 불리해진다.
그때 대신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전하, 세자빈마마께서 역모에 가담하지 않으셨다 하여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옵니다. 윤정명과 두 아들에게 이미 참형이 집행된 이상, 역적의 딸을 국본의 배필로 둘 수는 없사옵니다.”
다른 대신들도 동조하기 시작했다.
채원은 그 말을 들으며 입을 다물었다. 이제야 상대의 논리가 정확히 보였다.
자신에게 죄가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역적으로 판결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아무리 결백하다고 말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문제를 뒤집으려면 시작점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버지가 정말 역적인가.
왕이 채원을 바라봤다.
“그래서 너는 어찌하고 싶으냐.”
그제야 채원은 자신을 이곳까지 부른 이유를 알았다. 상소를 들려주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왕은 자신의 입으로 대답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하.”
채원이 입을 열었다.
“보름만 주십시오.”
대신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왕의 표정이 굳었다.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냐.”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에게 내려진 판결이 정말 옳았는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세자빈.”
왕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미 추국도, 형의 집행도 끝난 일이다.”
채원의 손끝이 굳었다.
알고 있었다. 아버지도, 두 오라버니도 이미 죽었다. 지금 자신이 무언가를 찾아낸다고 해서 그들을 다시 살릴 수는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끝난 역모 사건을 다시 뒤집겠다는 것이냐.”
“잘못된 게 없다면 뒤집을 수도 없겠지요.”
왕의 눈이 가늘어졌다.
채원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가 아는 건 아버지의 결백을 믿었다는 것뿐입니다.”
그 믿음에 근거가 있었는지는 자신도 몰랐다. 가족이기에 끝까지 믿었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아직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인지.
“그래서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무엇을.”
“그 판결이 정말 틀리지 않았는지요.”
대전 안이 조용해졌다.
왕은 한동안 채원을 내려다봤다.
“네가 확인한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느냐.”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한다면 달라질 건 없습니다.”
채원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때는 제가 스스로 세자빈 자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안 된다.”
이운의 목소리가 즉시 날아들었다.
채원은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제가 실패한다면 아버지의 죄를 의심할 근거도, 역적의 딸인 제가 이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할 근거도 없으니까요.”
“서아야.”
낮게 새어 나온 목소리가 이전과 달랐다.
채원은 잠시 멈췄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보름입니다.”
이번에는 왕만 바라봤다.
“보름 안에 전하께서 그 판결을 다시 살펴보셔야 할 이유를 찾아오겠습니다.”
“어떻게 찾겠다는 것이냐.”
“판결에 쓰인 기록을 보게 해주십시오.”
왕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사건을 다시 조사해달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미 판결의 근거가 된 기록만 확인하겠습니다.”
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채원은 기다렸다.
폐빈을 요구하는 상소는 이미 올라와 있었다. 자신이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한다면 보름 뒤 스스로 물러난다. 반대로 정말 판결에 문제가 있었다면 왕 역시 그대로 외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채원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찾지 못한다면 네가 스스로 물러나고.”
“예.”
왕이 손가락으로 상소의 가장자리를 천천히 눌렀다.
“좋다.”
왕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보름을 주겠다.”
대신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판결에 쓰인 기록은 보게 해주겠다. 그뿐이다.”
“예, 전하.”
“보름 뒤에도 내가 이 사건을 다시 살펴야 할 이유를 찾아오지 못한다면.”
왕의 시선이 채원에게 머물렀다.
“네가 한 약조대로 세자빈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반대로 그럴 만한 이유를 찾아온다면.”
왕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때는 내가 직접 윤정명의 사건을 다시 살피겠다.”
채원은 시선을 내렸다.
“감사하옵니다.”
“감사는 보름 뒤에 하거라.”
대전을 나선 채원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름.
자신은 아직 판결에 어떤 증거가 쓰였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손에 있는 것은 뜯긴 문갑과 사라진 아버지의 편지뿐이었다.
아버지의 결백을 호소하던 기억은 있었지만 그것도 증거가 될 수는 없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아직 몰랐다.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판결이 옳았다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윤서아가 끝까지 아버지의 결백을 믿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정말 가족이었기에 믿고 싶었던 것뿐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인지는 아직 모른다.
보름 안에 확인해야 했다.
판결을 떠받치고 있는 것들 가운데.
정말 거짓이 하나라도 있는지.
“이 사람들을 모두 부르겠다고?”진원군이 명단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 위에는 김태겸이 몰락하자 앞다투어 등을 돌렸던 집안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예. 한 사람도 빠뜨리지 말아 주십시오.”“네 아비가 어려울 때 문전박대하던 자들이다. 혼례까지 찾아와 네 얼굴을 보는 것이 즐겁겠느냐?”“즐겁지 않을 것입니다. 저도, 그들도.”서령의 대답에 진원군의 눈썹이 꿈틀했다.“그런데도 부르겠다는 것이냐?”“그들이 오지 않으면 사람들은 김씨 집안이 여전히 외면받는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참석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요.”서령은 명단의 한 이름을 짚었다.“이 사람은 아버지께서 곤경에 처하셨을 때 가장 먼저 왕래를 끊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혼례에 와서 축하를 올린다면,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김씨 집안이 다시 일어섰다고 생각하겠지.”“그리고 그 집안을 다시 일으킨 분이 누구인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진원군은 서령을 빤히 바라봤다.“나를 치켜세우려고 찾아온 것이냐?”“대감께서 바라시는 일이기도 하지 않습니까?”순간 방 안이 조용해졌다.진원군은 얼마 전 이휘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왕실의 혼인은 두 사람만의 일이 아니라고. 서령은 그 뜻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그렇다면 네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도 있겠구나.”진원군은 명단에서 이름 하나를 짚었다.“이자는 네 아비와 등을 진 뒤 내게 찾아와 충성을 맹세했다. 지금은 내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지. 그런데 네 혼례에 초대하면 그가 기꺼이 오겠느냐?”“오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까?”“김태겸의 딸 앞에서 지난 일을 떠올려야 할 텐데.”“그렇기에 와야 합니다.”서령은 물러서지 않았다.“그분이 참석하면 아버지를 버린 일을 모두가 기억할 것입니다. 하지만 참석하지 않으면 대감의 초대까지 거절한 사람이 되겠지요.”진원군의 웃음이 사라졌다.서령은 덧붙였다.“그분께 선택을 맡기십시오. 어느 쪽이든 제게 손해는 아닙니다.”진원군은 잠시 침묵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네가 사람을 제법 곤란
진원군이 이휘의 혼례를 앞당기겠다고 밝힌 것은 윤재경에 대한 조사가 조정의 입에 오르내리던 때였다. 세자의 측근을 둘러싼 의혹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가운데, 진원군은 왕실에 경사가 필요한 시기라며 혼례 날짜를 다시 의논하자고 했다.이휘는 부친의 뜻을 전해 듣고 곧장 찾아갔다. 혼례를 치르는 데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정해진 일정을 굳이 바꿀 이유가 보이지 않았다.“아버님, 서령과의 혼인을 서두르시는 까닭이 무엇입니까?”“조정이 어수선하니 그러는 것이다. 나라에 근심이 있다고 왕실의 경사까지 미룰 필요는 없지 않으냐.”“오히려 이런 때일수록 조용히 치르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진원군은 아들의 말을 듣고도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너는 혼례를 그저 두 사람이 부부가 되는 일로만 여기는구나. 왕실의 혼인은 그보다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이휘는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얼마 전까지 세자의 자리를 입에 올리던 사람이었다. 이 혼례에도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혼례를 빌미로 제게 다른 일을 바라시는 것은 아니겠지요?”진원군의 눈빛이 잠시 차가워졌다.“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안다. 하지만 혼례를 치르는 일까지 의심한다면 내가 네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느냐.”이휘는 더 묻지 못했다. 부친은 날짜를 앞당기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혼례 준비를 돕겠다며 사람까지 붙여 주었다.서령에게도 곧 소식이 전해졌다. 그녀는 혼례가 빨라졌다는 말보다 진원군이 준비에 직접 관여한다는 사실에 더 신경이 쓰였다. 몰락한 김씨 집안의 딸인 자신에게 왕실 혼례를 치를 만한 힘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일을 진원군에게 맡길 생각도 없었다.“혼례에 필요한 물목과 일을 맡을 집안들을 적어 오너라. 빠짐없이 살펴야겠다.”시녀가 가져온 목록에는 예물과 비단을 마련하는 상인들뿐 아니라 혼례 준비를 거들겠다고 나선 관리들의 집안도 적혀 있었다. 서령은 처음에는 별다른 의심 없이 읽었다. 왕실과 혼인하는 만큼 여러
“그날 밤, 자신을 살려 준 사람이 누구였는지.” 담당 관원이 쪽지의 마지막 문장을 읽자 윤재경의 얼굴이 굳었다. 자신이 살아 돌아온 경위를 묻는 것과는 전혀 다른 질문이었다. 누군가 그날 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윤재경,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느냐?” 재경은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행방불명되었던 동안의 기억은 온전하지 않았다. 의식을 잃기 전후의 일도 분명하게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쪽지를 보낸 자는 자신을 살려 준 사람이 있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소인도 그 뜻을 알지 못하옵니다.” “허면 어찌 그리 놀랐느냐?” “소인조차 알지 못하는 일을 누군가 알고 있는 듯하여 놀랐사옵니다.” 담당 관원은 쪽지를 다시 살폈다. 재경의 대답이 거짓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었다. 하지만 쪽지를 남긴 자가 실제로 그날의 일을 목격했다면 조사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었다. “증언을 거두겠다는 자를 다시 불러오라.” 잠시 뒤 사내가 끌려왔다. 이름은 박만수였다. 그는 처음 조사에 나섰을 때, 재경이 행방불명되었던 무렵 도성 밖에서 그에게 서찰 한 통을 전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작 그날의 상황을 자세히 묻자 대답을 흐렸고, 끝내 증언을 거두겠다며 쪽지 한 장을 남겼다. 지금 담당 관원이 읽은 바로 그 쪽지였다. “네가 직접 쓴 것이냐?” “아니옵니다. 어떤 분이 전해 달라 하였사옵니다.” “그자가 누구냐?”“이름은 밝히지 않았사옵니다. 다만 윤재경 나리께 반드시 전하라 하였사옵니다.”담당 관원이 재경을 돌아봤다. 재경은 사내의 얼굴을 살폈지만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의식을 잃었던 시기가 있었으니 그를 만난 적이 없다고 단언할 수도 없었다.“서찰을 전한 곳이 어디냐?”“도성 서쪽 산길이옵니다. 윤 나리께서 홀로 계셨사옵니다.”“그대가 나를 알아본 까닭은 무엇이오?”“서찰을 맡긴 분께서 용모와 차림새를 일러주셨사옵니다.”재경은 더 묻지 않았다. 사내가 자신을 알아본 것만으로는 거짓을 밝힐 수 없었다
윤재경이 의금부에 모습을 드러내자 기다리던 관리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윤재경. 그대의 생존 경위를 밝히라는 상소가 올라왔소.”“알고 있사옵니다.”“그렇다면 묻겠소.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사람이 어찌 살아 돌아왔소?”재경은 준비해 온 진술서를 내놓았다.“제가 직접 겪은 일은 모두 적었사옵니다. 다만 의식을 잃었던 동안의 일까지 안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사옵니다.”담당 관원이 진술서를 훑었다.“그렇다면 이 기록에 빈 부분이 있다는 뜻이오?”“그렇사옵니다.”“그대에게 불리할 수도 있는데?”“모르는 일을 안다고 하는 편이 더 큰 죄라 생각하옵니다.”관원은 잠시 말을 멈췄다.재경은 고개를 숙인 채 다음 질문을 기다렸다.“그대가 살아 돌아온 뒤 세자 저하께서 여러모로 보살피셨다고 들었소.”“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사이이옵니다.”“그뿐이오? 세자빈마마께서는 그대의 누이이기도 하지 않소?”“그렇사옵니다.”“그렇다면 세자 저하께서 그대의 진술을 보증하실 수 있겠구려?”재경이 고개를 들었다.“어찌 저하께서 제 진술을 보증하셔야 합니까?”“그대와 각별한 사이이니 묻는 것이오.”“각별한 사이인 것과 제가 겪은 일을 아시는 것은 다르옵니다.”관원의 눈썹이 꿈틀했다.“그대는 지금 세자 저하께서도 모르는 일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오?”“제가 의식을 잃었던 동안의 일은 저 자신도 모르옵니다. 저하께서 어찌 아시겠사옵니까?”옆에 앉아 있던 다른 관리가 끼어들었다.“허나 세자 저하께서 그대를 믿으신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겠소?”재경은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소인의 진술이 거짓이라면 소인을 벌하시면 됩니다. 어찌 저하의 이름을 물으십니까?”순간 조사장 안이 조용해졌다.재경이 말을 이었다.“저하께서 저를 믿으신다는 이유로 제 말이 참이 되는 것도 아니고, 믿지 않으신다는 이유로 거짓이 되는 것도 아니옵니다.”“말은 잘하는군.”“저는 제 일로 이 자리에 왔사옵니다. 다른 분의 이름을 빌릴 생각은 없사옵니다.”담당 관원이 진술서를 내려
“윤재경의 생존 경위를 밝혀야 한다는 상소가 다시 올라왔사옵니다.”내관의 보고에 이운이 눈살을 찌푸렸다.“지난번에도 논의했던 일이 아니더냐?”“이번에는 윤재경을 직접 불러 문초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사옵니다.”“문초요?”채원이 벌떡 일어났다.“오라버니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요?”이운은 상소를 펼쳤다. 마지막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세자 저하께서 사사로운 인연으로 윤재경을 비호하신다면 조정의 기강이 흔들릴 것이옵니다.“결국 나를 겨냥한 것이군.”이운이 상소를 내려놓았다.“재경을 동궁으로 들라 하라.”---“제가 직접 나가겠습니다.”재경은 상소를 읽자마자 말했다.“오라버니!”채원이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할 줄 알고요?”“그러니 나가야지.”“오라버니는 죄인이 아니잖아요.”재경이 동생을 바라봤다.“서아야. 나도 그걸 안다. 하지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저들은 계속 떠들 거다.”이운이 끼어들었다.“재경아, 네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다. 저들이 무슨 속셈인지 뻔하지 않느냐.”“알고 있사옵니다, 저하.”“그런데도 가겠다는 것이냐?”“예.”재경은 물러서지 않았다.“제가 살아 돌아온 일로 저하께서는 물론 서아까지 공격받고 있사옵니다. 더는 두 분께 짐을 지울 수 없습니다.”“내가 너 하나 지키지 못할까 봐 그러느냐?”“그런 뜻이 아니옵니다.”재경은 잠시 숨을 골랐다.“저하께서 저를 지켜주시려는 마음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허나 이번 일은 제가 감당해야 합니다.”“네가 직접 나선다고 의심이 사라질 것 같으냐?”“그렇지 않을 수도 있사옵니다.”“그걸 알면서도?”“예. 그래도 제 입으로 말하겠습니다.”재경이 이운을 똑바로 바라봤다.“제 삶을 두고 남들이 옳다 그르다 떠드는 동안 저만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사옵니다.”이운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어릴 적부터 네 고집은 알아줬지만, 이번만큼은 말리고 싶구나.”“송구하옵니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습니다.”---같은 시각
“세자빈마마께서 죽은 사람을 살려내셨다지?”“죽은 사람이 아니라 세자 저하시잖아. 말조심해!”궁녀들이 물동이를 내려놓고 수군거렸다.“의원들도 포기했다는데 마마께서 저하의 가슴을 마구 누르셨다더라.”“그랬더니 숨이 돌아왔다지 뭐야.”“정말 신통한 재주를 지니신 모양이야.”그때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궁 안에서 입이 그리 가벼워서야 되겠느냐!”최 상궁이었다.궁녀들이 놀라 고개를 숙였다.“송구하옵니다!”“세자 저하께서 아직 회복 중이시다. 근거 없는 말을 퍼뜨리지 말거라.”궁녀들이 흩어지자 최 상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나 소문은 이미 동궁을 넘어 궁 전체로 퍼지고 있었다. ---“제가 신통한 재주를 부린다고요?”채원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최 상궁이 난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러하옵니다. 죽은 사람도 살리는 비법을 아신다는 말까지 돌고 있사옵니다.”“그런 비법이 어디 있어요.”채원은 이마를 짚었다.촬영장에서 응급처치 교육을 받을 때마다 강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심장이 멈췄다고 무조건 살아나는 건 아닙니다.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습니다.그날 이운이 살아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같은 방법으로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소문이 더 커지면 곤란해요. 제가 무슨 신선도 아니고.”“소인이 단속하겠사옵니다.”그때 문밖에서 내관이 아뢰었다.“마마, 의관 한 분이 뵙기를 청하옵니다.”“들어오시라 하세요.”들어온 의관은 예를 올린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마마, 세자 저하를 구하신 일로 의원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사옵니다.”“어떤 말입니까?”“마마께서 의원의 진료에 앞서 저하의 몸에 손을 대신 일을 두고 우려하는 이들이 있사옵니다.”채원의 표정이 굳어졌다.“제가 잘못했다는 겁니까?”“그런 뜻은 아니옵니다. 다만 의술을 익히지 않은 사람이 함부로 따라 하다가는 도리어 사람을 해칠 수도 있다는 것이옵니다.”그 말에는 채원도 반박할 수 없었다.“그건 맞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