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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이혼 전 금욕주의: Chapter 11 - Chapter 20

124 Chapters

11화

서인은 그대로 방으로 올라갔다.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서로 얼굴을 제대로 볼 시간조차 없었다.둘 다 아침 일찍 나갔다가 늦게 들어왔다. 같은 집에 살아도 하루 종일 마주치지 않는 날이 있었고, 운이 좋으면 아침 식탁에서 십 분 남짓 얼굴을 보는 게 전부였다.금요일에는 서인이 평소보다 일찍 집에 들어왔다.거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보던 재하가 현관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오늘은 일찍 왔네요.”“저녁 약속이 취소됐어요.”“왜요?”“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대요.”재하가 다시 화면을 보며 물었다.“누가요?”“도윤 씨요.”트랙패드를 움직이던 손이 잠깐 멈췄다.“차도윤 변호사랑 저녁도 먹는 사이가 됐습니까?”서인은 구두를 벗다 말고 재하를 봤다.“사적인 약속 아니었어요.”“저녁 약속이 사적인 게 아니면 뭡니까?”“이혼 서류 때문에 따로 확인할 게 있었어요. 겸사겸사 저녁 먹기로 한 거고.”재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건 사무실에서도 볼 수 있지 않나.”서인이 그를 잠깐 바라봤다.“재하 씨.”“네.”“내가 아니라면 아닌 거예요.”재하가 먼저 시선을 거뒀다.“알겠습니다.”노트북 화면을 한 번 넘긴 뒤 재하가 덧붙였다.“그래도 조심해요.”“뭘요?”“우리 아직 발표 안 했잖아요. 괜히 둘이 있는 사진이라도 찍히면 설명하기 귀찮아집니다.”맞는 말이었다.앞으로 두 달 동안은 여전히 부부로 보여야 했다. 하필 이혼을 맡은 변호사와 단둘이 저녁을 먹는 사진이라도 찍히면 쓸데없는 추측이 붙을 게 뻔했다.“그건 그렇네요.”“네.”“앞으로 조심할게요.”서인은 가방을 내려놓고 주방으로 향했다.“밥은요?”“아직요.”“저녁 먹을래요? 간단하게.”재하가 노트북에서 눈을 들었다.“그래요.”서인이 냉장고를 열었다.“와인도 하나 있는데.”“뭔데요?”“선물 받은 거요.”재하가 노트북을 덮었다.“좋네.”간단한 음식과 와인을 꺼내놓고 둘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 늦은 저녁을 먹는 동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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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서인은 그대로 위층으로 올라갔다.재하는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조금 전까지 읽던 대목을 찾는 데 몇 초가 걸렸다.***토요일 아침이었다.늦게 눈을 뜬 서인은 커튼 사이로 들어온 빛이 침대 끝까지 번진 걸 보고서야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한성 재무팀에서 밤새 수정한 자구안이 와 있었다. 매각 대상 자산과 상환 일정을 다시 맞춘 자료였다.몇 군데 숫자를 확인하고 의견을 달아 회신하다 보니 어느새 11시가 가까웠다. 마지막 메일까지 보내고 나서야 서인은 노트북을 덮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계단을 내려가자 커피 향이 먼저 올라왔다. 주방에는 운동을 마치고 막 돌아온 듯한 재하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땀에 젖은 검은 티셔츠가 몸에 얇게 들러붙어, 넓게 벌어진 어깨와 가슴에서 허리로 좁아지는 윤곽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서인은 그쪽을 잠깐 보고 냉장고를 열었다.“밥은?”“아직.”“파스타 해먹으려고요.”“나도 먹을래요.”“그래요.”재하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익숙하게 냉장고 안을 훑어 마늘과 파슬리를 꺼냈다. 찬장에서는 페페론치노까지 찾아냈다.그걸 본 서인이 말했다.“알리오 올리오네요. 재하 씨가 해주는 거 맛있는데.”재하는 별말 없이 재료를 들고 조리대로 갔다.서인은 평소 마시던 탄산수를 꺼내려고 냉장고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다른 병들 뒤로 밀려 있어 허리를 숙여 팔을 넣었지만, 손끝에 겨우 닿은 병목이 미끄러지며 다시 안쪽으로 굴렀다.서인이 냉장고 선반을 짚고 조금 더 몸을 숙였다.그때 바로 뒤로 재하가 다가왔다.재하는 서인의 등 뒤에 서서 한 손으로 열린 냉장고 문 위쪽을 짚은 채, 다른 팔을 서인의 어깨 너머로 길게 뻗었다.탄산수를 대신 꺼내려는 것뿐이었다.냉장고 안쪽을 들여다보느라 허리를 숙인 서인과 그 위로 몸을 낮춘 재하 사이에는 애초에 거리를 둘 만한 공간이 없었다.운동으로 열이 오른 재하의 가슴이 서인의 등에 닿았다.서인은 자세를 바꾸지 않았고, 재하도 굳이 물러나지 않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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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뒤에서는 다시 칼질 소리가 이어졌다.서인은 찬장을 열어 접시 두 장을 꺼냈다. 결혼한 해 집들이 때 선물받은 고가의 식기였는데, 손님들에게 내놓으라고 받은 것치고는 정작 두 사람이 훨씬 자주 썼다.접시를 하나씩 식탁에 놓는 사이 팬이 달아올랐다. 얇게 저민 마늘이 기름에 닿자 금세 고소한 향이 퍼졌다.“배고파요?”재하가 면을 건지며 물었다.“조금.”“금방 돼요.”“네.”재하가 건져낸 면을 팬에 넣어 한 번 크게 뒤집었다. 서인은 식탁에 기대 그 모습을 보다가 탄산수를 한 모금 더 마셨다.***오후에는 재하가 집을 나섰다.주말의 우진 본사는 평일보다 지나치게 조용했다. 다음 주 투자심의위원회에 올릴 해외 법인 인수안 때문에 출근한 사람도 재무담당 임원과 법무팀장을 비롯한 몇 명뿐이었다.회의는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환율 변동분까지 넣으면 이쪽 수익률은 다시 봐야 합니다.”재하가 자료 한 장을 넘겼다.“낙관치 말고 보수적으로 다시 잡죠.”“네. 월요일 오전까지 수정하겠습니다.”“법무 검토는요?”“조건부 승인 가능합니다. 현지 계약서에서 두 조항 정도만 조정하면 됩니다.”재하는 표시된 부분을 훑으며 몇 가지를 더 짚은 뒤 회의를 끝냈다.임원들이 빠져나가고 문이 닫히자 재하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업무 연락 사이로 읽지 않은 메시지가 수십 개 쌓여 있었다.대학 시절부터 이어진 한국인 친구들의 단체방이었다. 대부분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 유학을 마친 뒤 한국으로 돌아온 놈들이었다.다음 달 결혼하는 친구가 청첩장을 올린 뒤부터 대화가 길어진 모양이었다.[결국 하네][양가에서 날짜 잡아준 지 몇 년 됐냐][2년][축하한다]신랑이 웃는 이모티콘을 하나 보냈다.재하는 밀린 대화를 대충 훑어 내렸다. 그러다 신랑이 새로 올린 메시지에서 손이 멈췄다.[유부남들한테 진지하게 묻는다][결혼할 만하냐][권재하한테 물어봐]곧바로 답이 달렸다.[쟤는 표본에서 빼야지][왜][형수님이 한서인이잖아][결혼식에서 처음 뵀는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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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집에 돌아온 건 6시가 조금 넘어서였다.위층으로 올라가자 드레스룸 쪽에서 드라이어 소리가 들렸다.재하는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서인은 먼저 샤워를 마친 모양이었다. 가운 차림으로 화장대 앞에 앉아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왔어요?”드라이어 소리 사이로 목소리가 묻혔다.“네.”재하는 재킷을 벗어 걸고 넥타이를 풀었다. 시계를 내려놓은 뒤 셔츠 단추를 풀자 거울 한쪽으로 서인의 모습이 들어왔다.한 손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걷어 올리고, 다른 손으로 드라이어를 움직였다. 바람이 닿을 때마다 희고 가느다란 목선이 나타났다 다시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가려졌다.재하는 셔츠를 벗었다.등을 돌리자 오른쪽 등을 비스듬히 가르는 오래된 흉터가 드러났다.거울 너머로 서인의 눈이 잠깐 그곳을 스쳤지만, 삼 년 동안 수없이 본 흔적이라 시선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드라이어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뜨렸고, 재하는 벗은 셔츠를 옷걸이에 걸었다.샤워실로 향하려던 재하의 걸음이 멈춘 건 서인이 젖은 머리를 한쪽 어깨 뒤로 넘겼을 때였다. 바람에 밀린 가운 깃이 살짝 벌어졌다.왼쪽 가슴 위.쇄골 아래에서 가운 안쪽으로 이어지는 희고 부드러운 살 위에 붉은 자국 하나가 보였다.옅은 흔적은 아니었다. 손가락 한두 마디만 한 자국이 붉게 올라와, 가운이 흔들릴 때마다 반쯤 드러났다 가려졌다.재하의 시선이 거기에서 멈췄다.“이거 왜 이래요?”서인이 드라이어를 끄고 거울을 봤다.“뭐가요?”재하가 제 가슴께를 손끝으로 짚었다.“여기.”서인은 머리카락을 걷고 가운 깃을 조금 당겼다.그제야 발견한 듯 붉은 부분을 손끝으로 만졌다.“아. 이거?”“네.”“몰라요. 어디서 긁혔나.”재하는 그 자리를 한 번 더 내려다봤다.목 바로 아래도 아니고, 바깥으로 드러난 어깨도 아니었다.딱 옷 안쪽에 숨을 자리였다.“위치가 절묘하네.”“뭐가요?”“다른 남자랑 벌써 섹스하고 온 줄 알았네요.”서인의 손이 멈췄다.거울 속에서 서인이 재하를 봤다.서인의 입술이 아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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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식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와인은 반쯤 남았고, 대화는 자연스럽게 한성의 자구안으로 넘어갔다. 서인은 오전에 회신한 자료에서 매각 대상이 하나 더 늘었다는 얘기를 꺼냈다.재하는 들으면서 필요한 만큼만 말을 보탰다.“그쪽은 매수자 있어요?”“두 군데요. 아직 조건 보는 중이고.”“급하게 팔면 가격 많이 빠질 텐데.”“알아요. 그래도 현금화 순서는 앞쪽이에요.”“그럼 경쟁 붙이는 게 낫겠네요.”“저도 그렇게 생각해요.”대화는 그 정도였다.식사를 마친 서인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올라갈게요.”“네.”서인은 빈 잔을 싱크대에 내려놓고 주방을 나갔다.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차츰 멀어졌다.재하는 식탁에 남아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잔 가장자리에 묻은 와인이 입술을 적셨지만, 삼키고 나서도 이상하게 입안이 말랐다.재하는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욕실에 들어온 재하는 샤워기를 틀었다.뜨거운 물이 머리 위로 쏟아지자 하루 종일 굳어 있던 목덜미와 어깨가 느슨하게 풀렸다. 재하는 눈을 감은 채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내일 오전에 확인해야 할 인수안과 월요일 투자심의위원회, 아직 넘어오지 않은 현지 법무법인의 수정 계약서까지.머릿속에는 평소처럼 일이 차례대로 떠올랐다.그러다 전혀 상관없는 향 하나가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달고 서늘한 향이었다.재하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욕실의 습기와 물 냄새뿐인데도 코끝에는 그 향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냉장고 앞에서 서인의 뒤로 몸을 숙였을 때 맡았던 향이었다. 찬 공기 속에서 바로 앞에 닿았던 체온과, 고개를 돌렸을 때 턱 아래를 스쳤던 머리카락까지 뒤늦게 따라붙었다.샴푸인지 바디워시인지 구분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삼 년 동안 수도 없이 맡아온 향이기도 했다.그런데 오늘은 이상할 만큼 오래 남았다.재하가 눈을 떴다.물줄기 너머로 타일 벽이 희게 번졌다. 재하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다 문득 아래를 내려다봤다.“…….”성기가 어느새 묵직하게 솟아 있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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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재하의 손이 그대로 멎었다.잡으면 그만이었다.몇 번 움직이면 오래 걸릴 일도 없었다.손가락이 천천히 말렸다.그러다.“……씨발.”재하는 손을 떼었다.젖은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리고 그대로 수전을 잠갔다. 쏟아지던 물줄기가 끊기자 욕실이 조용해졌다.침실로 돌아왔을 때는 멀쩡했다.재하는 머리를 대충 말리고 잠옷을 입은 뒤 침대에 앉아 읽지 않은 메일을 확인했다.그때 복도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서인의 방이었다.재하는 읽던 메일에서 눈을 들었다.문 하나.복도 하나.그 정도 거리였다.재하는 화면을 한 번 위로 밀었다.다음 메일이 열렸다.이번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월요일 아침.서인은 평소보다 먼저 집을 나갔다.재하가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식탁 한쪽에는 비어 있는 커피잔 하나만 남아 있었다.아주머니가 잔을 치우려다 말했다.“사모님 오늘 일찍 나가셨어요.”“그런가요.”“아침도 거의 못 드시고 가셨어요.”재하는 커피를 따르며 시계를 확인했다.7시 40분.“요즘 많이 바쁘신가 봐요.”“그렇죠.”재하는 커피잔을 들고 맞은편의 빈자리를 한 번 봤다. 그대로 한 모금 마시며 비서가 보내온 일정표를 열었다.오전 임원회의.점심 약속.오후 투자심의위원회.저녁에는 선친 기념재단 이사회까지 있었다.재하는 일정표를 끝까지 확인하고 화면을 내렸다.서인이 점심을 먹은 건 오후 2시가 가까워져서였다.오전 내내 이어진 회의가 예상보다 길어졌다.점심시간은 이미 지나 있었고 다음 일정까지 남은 시간은 40분 정도였다.비서가 사다 놓은 샌드위치 포장을 뜯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차도윤이었다.서인은 한 손으로 포장지를 접으며 전화를 받았다.“네.”― 바빠요?“조금요.”― 그럼 짧게 할게요.곧장 본론이었다.― 법원 일정 나왔어요. 다음 주 목요일 오후 2시.“재하 씨한테도 전달됐어요?”― 아직요. 서인 씨한테 먼저 연락한 거예요.“제가 말할게요.”― 그래요.서인은 캘린더를 열었다.다음 주 목요일 오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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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금요일 오후.서인은 사무실에서 마지막 메일을 보내고 노트북을 덮었다.시계는 5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책상 한쪽에는 비서가 가져다 놓은 검은색 드레스 커버가 걸려 있었다.오늘 저녁 일정은 우진문화재단 후원 행사였다.한성의 자구안 협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만큼 바빴지만, 오래전부터 잡혀 있던 공식 일정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서인은 드레스 커버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행사장은 청담동의 작은 갤러리였다.정식 만찬보다는 후원자와 재단 관계자들이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자리라 규모는 크지 않았다.서인이 도착했을 때 이미 사람들이 제법 모여 있었다.서인은 검은 드레스 위로 얇은 숄을 걸친 채 몇 사람과 인사를 나눴다.“한 전무님.”재단 이사가 반갑게 다가왔다.“오랜만이에요.”“그러게요. 잘 지내셨어요?”“나는 똑같죠. 그런데 권 대표는?”“회사에서 바로 온다고 했어요.”“웬일이래. 오늘은 따로 오나 봐요?”서인이 웃었다.“오늘 타이밍이 좀 안 맞았네요.”“그래도 금방 오겠죠?”“네. 거의 다 왔다고 했어요.”그때 입구 쪽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서인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권재하였다.짙은 네이비 슈트에 넥타이는 없었다. 셔츠 단추를 하나 풀어놓은 탓에 평소보다 목선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조명 아래로 걸어 들어오는 얼굴은 멀리서도 선이 또렷했다. 곧게 뻗은 콧대 아래로 입술은 단정하게 다물려 있었고, 사람을 마주칠 때마다 긴 눈매가 느슨하게 휘었다.반듯하게 차려입으면 차갑게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넥타이가 사라지고 셔츠 깃이 조금 풀어진 것만으로 인상이 묘하게 달라 보였다.재하는 입구에서 재단 관계자와 악수하고, 다가오는 사람에게 짧게 인사를 건넸다.지나가던 여자 둘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으로 향했다. 한 명은 걸음을 늦추며 한 번 더 돌아보기까지 했다.서인은 다시 잔을 들었다.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권재하는 원래 어딜 가든 눈에 띄었다.삼 년을 같이 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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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잔 부딪히는 소리가 귓가로 밀려들었다. 웃음소리와 샴페인 향, 천장에 매달린 조명의 빛까지 한꺼번에 제자리를 찾았다.그 한가운데 재하의 손만 여전히 허리에 남아 있었다.서인이 옆을 돌아봤다.재하는 이사의 말을 들으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걸고 있었다. 가끔 짧게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높은 콧대 위로 조명이 스쳤다.허리를 감싼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시선이 마주쳤다.재하가 눈썹을 살짝 들었다.“왜요?”“뭐가요?”“아까부터 보길래.”서인은 잠시 그의 얼굴을 봤다.“얼굴 좀 봤어요.”재하의 입꼬리가 느리게 올라갔다.“마음에 들어요?”“쯧.”서인이 고개를 돌렸다.낮은 웃음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그때 누군가 두 사람을 불렀다.“권 대표님, 한 전무님. 사진 한 장만 부탁드릴게요.”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몸을 돌렸다.재하의 손이 다시 서인의 허리를 감쌌다.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웠다.플래시가 터졌다.서인은 카메라를 보며 웃었다.행사는 그 뒤로도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사진을 몇 번 더 찍고, 후원자들과 인사를 나눴다. 재하는 중간에 재단 이사장에게 붙잡혔다.서인이 샴페인 잔을 바꾸려던 때, 태림그룹 부회장의 아내인 정혜원이 옆으로 다가왔다. 몇 년 전부터 우진문화재단 후원 행사에서 종종 마주치던 사람이었다.“두 분은 여전히 보기 좋네요.”서인이 웃었다.“감사합니다.”“결혼한 지 이제 삼 년 됐죠?”“네.”“아직도 신혼 같아.”마침 돌아온 재하가 그 말을 들었다.“제가 좀 잘합니다.”서인이 그를 돌아봤다.“뭘요?”재하가 옆에 서며 태연하게 말했다.“결혼 생활.”혜원이 웃음을 터뜨렸다.“자신감 좀 봐.”서인도 잔을 들며 웃었다.“본인 평가가 좀 후해요.”재하의 손이 다시 서인의 허리에 가볍게 얹혔다.“여보가 별말 없었으면 잘한 거죠.”서인이 그를 한번 쳐다봤다.재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있었다.서인은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또 그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거기 좋아…….서인은 마시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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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말이 생각보다 먼저 나갔다.서인의 시선이 아주 느리게 재하에게 돌아갔다. 재하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몇 초 동안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그러다 재하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그럴 수도 있죠.”서인이 그 얼굴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운동.”“…….”“요즘 못 했잖아요.”재하가 서인을 잠시 바라봤다.“그 얘기였어요?”“네.”재하의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나도.”뻔뻔한 얼굴이었다.서인은 혀를 한번 찼다.“누가 뭐래요.”재하가 낮게 웃었다.서인은 그대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리 위에 희미하게 비친 재하의 얼굴에는 아직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차가 완만한 커브를 돌았다.이번에는 무릎이 닿지 않았다.***주말이 지나자 법원에 갈 날이 가까워졌다.월요일 오후, 서인은 차도윤의 사무실에 들렀다.목요일에 제출할 서류와 이후 절차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도윤은 서류를 한 장씩 넘기며 필요한 부분만 짚었다.“이건 당일에 두 분 다 서명하시면 되고요.”“네.”“준비하실 건 이게 전부예요. 나머지는 목요일에 가시면 안내해줄 겁니다.”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날은 저희끼리 가면 되고요?”“네. 두 분이 직접 가시면 됩니다. 무슨 일 있으면 그때 연락 주세요.”“알겠어요.”도윤이 서류를 집으려다 손을 멈췄다.시선이 서인의 손으로 향했다.“손 베였어요?”“네?”서인이 손을 내려다봤다.검지 옆에 가느다란 상처가 나 있었다. 아침에 서류를 넘기다 종이에 베인 모양이었다.“아.”도윤이 서랍을 열어 작은 밴드 하나를 꺼내 서인 앞에 내려놓았다.“붙여요.”“이 정도 가지고.”“물 닿으면 따가워요.”도윤은 그 말만 하고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서인은 잠시 밴드를 내려다보다 포장을 뜯었다.“고마워요.”“별말씀을.”도윤은 이미 다음 페이지를 읽고 있었다.서인은 밴드를 붙인 뒤 다시 펜을 들었다.“다음은요?”도윤이 읽고 있던 서류를 그녀 쪽으로 돌려놓고 한 곳을 짚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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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목요일 오후.서인은 약속한 시간보다 십 분 먼저 법원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리기 전 가방 안을 한 번 확인했다. 신분증과 미리 준비해둔 서류, 도윤이 전날 보내준 확인 사항까지 빠진 것은 없었다.입구 근처에는 재하가 먼저 와 있었다.“왔어요?”“일찍 왔네요.”“나도 방금.”재하는 혼자였다. 주변을 한번 둘러본 서인이 물었다.“비서실은요?”“차에 있어요.”“웬일이에요.”재하가 법원 건물을 한번 올려다봤다.“이혼하는 것도 구경시켜야 합니까?”서인의 입가에 짧게 웃음이 걸렸다.맞는 말이었다.두 사람은 나란히 법원 안으로 들어갔다. 평일 오후인데도 건물 안은 제법 붐볐다. 서류봉투를 든 사람들이 민원실과 복도를 오갔고, 안내판 앞에는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층을 확인하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걸음을 옮기던 서인은 휴대폰을 꺼냈다. 도윤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도착하셨어요?][네. 지금 들어왔어요.][서류 확인하시고 문제 있으면 연락 주세요.][알겠어요.]답장을 보내고 화면을 끄자 옆에서 재하가 물었다.“차도윤?”“네.”“오늘도 친절하시네.”“담당 변호사니까요.”“그러네요.”그게 끝이었다.재하는 더 묻지 않았다. 서인의 손에 들린 휴대폰에도 다시 시선을 주지 않았다.엘리베이터 앞에는 이미 사람들이 여럿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뒤 문이 열리자 앞쪽에 있던 사람들이 차례로 들어갔고, 서인도 그 틈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재하가 마지막으로 타자 문 앞까지 사람이 찼다.서인은 안쪽 벽 가까이에 섰고, 재하는 서류봉투를 한 손에 든 채 자연스럽게 그 앞에 자리했다.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한 층 위에서 몇 사람이 내렸지만 그보다 많은 사람이 새로 들어왔다. 앞에 선 남자의 어깨가 서인 쪽으로 밀려오자 재하는 별말 없이 몸을 비스듬히 틀었다. 넓은 등이 사람들과 서인 사이를 가렸다.서인은 잠깐 그 등을 바라보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한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화면을 끄고 다시 가방에 넣었다.그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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