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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이혼 전 금욕주의: Chapter 21 - Chapter 30

124 Chapters

21화

서인은 고개를 들었다.어느새 돌아선 재하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네.”“왜 그래요?”서인은 대답하려 했지만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재하가 곧바로 다음 층 버튼을 눌렀다.“잠깐만요. 내릴게요.”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돌아보자 재하가 몸을 틀었다. 서인을 제 쪽으로 당기고, 문 쪽으로 돌아설 자리를 먼저 확보했다.“다음 층에서 내릴 거예요.”서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시야 가장자리부터 흐려지고 있었다.엘리베이터가 멈췄다.문이 열렸지만 앞에 있던 사람들이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내립니다. 잠깐 비켜주세요.”사람들이 조금씩 몸을 틀어 길을 만들었다. 재하는 서인의 팔을 잡은 채 밖으로 이끌었다.첫발은 괜찮았다.두 번째 발을 내딛다가 발을 헛디뎠다. 손에서 가방이 떨어지고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재하가 그대로 받아냈다.“한서인 씨.”서인은 반사적으로 재하의 재킷을 움켜쥐었다.바닥이 기울어지는 것 같았다. 숨을 쉬려고 할수록 호흡은 더 엉켰고, 눈앞의 윤곽이 자꾸 흐려졌다.“잠깐…….”재하가 몸을 낮췄다.“나 봐요.”서인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한서인 씨.”손등 위로 재하의 손이 덮였다.“나 보라고.”짧은 말이 이상할 만큼 또렷하게 들렸다.서인은 겨우 고개를 들었다.흐릿한 시야 안으로 재하의 얼굴이 들어왔다.“숨 쉬어요. 천천히.”서인은 그의 목소리를 따라 숨을 들이마셨다.한 번.다시 한 번.처음에는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몇 차례 반복하자 짧게 끊기던 호흡이 조금씩 길어졌다.재하는 서인을 복도 한쪽 의자까지 데려가 앉혔다. 떨어진 가방을 주워 옆에 내려놓고는 서인 앞에 몸을 낮췄다.“그대로 있어요.”서인은 눈을 감았다.귓속을 채우던 이명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차갑게 식었던 손끝에도 감각이 돌아왔고, 멀리서 지나가는 발소리와 안내 방송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눈을 떴을 때 재하는 여전히 앞에 있었다.“어때요.”“괜찮아졌어요.”“어지러운 건.”“조금.”그 말을 끝내자마자 속이 울렁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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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그 정도는 돼요.”서인은 손을 잡고 일어났다.몸을 세우자 아직 남아 있던 어지럼증에 중심이 잠깐 흔들렸다. 재하가 곧바로 팔을 붙잡았지만 서인이 제대로 선 것을 확인한 뒤에는 손을 놓았다.두 사람은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 때마침 문이 열렸고, 안에는 네댓 명이 타고 있었다.서인은 별생각 없이 발을 내딛으려 했다.그런데 움직이지 않았다.문턱을 넘기 직전 발이 그대로 바닥에 붙었다. 안에 사람이 많아서도 아니었다. 아까보다 훨씬 여유가 있었고, 숨도 이미 정상으로 돌아온 뒤였다.그런데도 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대로 서 있는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혔다.재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닫힌 문을 한 번 본 재하의 시선이 옆에 붙은 비상계단 표지로 옮겨갔다.“계단으로 가죠.”서인이 그를 봤다.“여기 4층이에요.”“알아요.”“나 멀쩡해요.”재하는 이미 비상계단 문을 열고 있었다.“천천히 가면 됩니다.”서인은 더 말하지 않고 뒤따라 들어갔다.재하가 먼저 한 계단을 내려가 몸을 돌렸다.“와요.”“혼자 내려갈 수 있어요.”“압니다.”그러면서도 재하는 서인보다 한 계단 아래에 있었다.붙잡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앞서가지도 않았다.서인이 난간을 짚고 뒤를 따랐다.결국 이혼 신청은 하지 못했다.재하가 이미 병원에 연락까지 해둔 탓에 더 실랑이를 벌이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기본적인 검사를 받고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뒤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이번에도 큰 이상은 없었다.과로하지 말 것.당분간 비슷한 증상이 반복되는지 지켜볼 것.필요하다면 추가 검사를 받아볼 것.지난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였다.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이었다.서인은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내려왔다.테이블 위에는 법원에서 그대로 들고 돌아온 서류봉투가 놓여 있었다. 오후 내내 가방 안에 있었던 탓인지 한쪽 모서리가 조금 구겨져 있었다.서인은 손끝으로 그 부분을 눌러 폈다.오늘 처리할 생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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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다음 날 아침.서인은 평소와 같은 시간에 아래층으로 내려왔다.재하는 먼저 식탁에 앉아 있었다.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들고 있었고, 앞에 놓인 커피 위로 옅은 수증기가 피어올랐다.“잘 잤어요?”“네.”서인은 맞은편에 앉아 빵 한 장에 잼을 발랐다. 커피를 마시는 사이 휴대폰에 들어온 메일 몇 통을 확인하고, 평소처럼 답장이 필요한 것만 따로 표시해두었다.빵을 한입 베어 물다 고개를 들자 재하와 눈이 마주쳤다.“왜요?”재하는 대답 대신 서인의 얼굴을 한 번 더 살폈다.“멀쩡하네.”“그럼요.”어제 법원 복도에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던 사람을 확인하는 말치고는 싱거웠다. 서인은 남은 빵을 마저 먹었고, 재하도 더 묻지 않았다.잠시 뒤 서인의 휴대폰이 울렸다. 도윤이었다.[몸은 좀 괜찮으세요?][네. 괜찮아요.][다행이네요. 법원 일정은 다시 확인해볼게요.][네. 부탁드릴게요.]서인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 뒤로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아침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 각자 준비를 했고, 출근 시간에 맞춰 차례로 집을 나섰다.***점심을 조금 넘긴 시간.회의를 마치고 대표실로 돌아온 재하는 오전부터 검토하던 자료를 다시 열었다. 데스크톱 화면 한쪽에 사내 메신저 알림이 떠 있었다.[대표님, 14시 전략회의 자료 업데이트되었습니다.]수정된 부분을 확인하던 중 메신저 창 하나가 더 올라왔다. 발신자는 서인이었다.[법원 일정 다시 잡혔어요.][다음 주 목요일 2시.]재하는 캘린더를 열었다. 같은 시간에 투자위원회 보고가 잡혀 있었다.[다음 주 목요일 2시 투자위원회 보고 일정 조정 부탁드립니다.][네, 대표님. 변경 후 공유드리겠습니다.]재하는 서인과의 대화창을 열었다.[시간 비워둘게요.][네.]짧은 답장을 확인하고 대화창을 닫자 검토하던 보고서가 다시 화면을 채웠다. 재하는 멈춰 있던 페이지부터 읽어나갔다.그날 재하가 집에 들어온 건 밤 11시가 조금 넘어서였다.거실은 비어 있었다. 재하는 재킷을 벗어 소파 등에 걸고 넥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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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퇴근을 앞두고 서인은 차도윤에게 연락했다.다음 주 목요일로 다시 잡힌 법원 일정 때문에 확인할 서류가 하나 있었다. 메일로 받아도 되는 내용이었지만 원본에 서명이 필요했다.도윤은 서류도 볼 겸 저녁이나 같이 먹자며 장소를 하나 보내왔다.서인의 회사에서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일식집이었다. 전부 독립된 룸이라 아는 사람과 마주칠 걱정도 덜했다.서인이 도착했을 때 도윤은 먼저 와 있었다.문이 열리자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자연스럽게 서인의 가방을 받아 옆 의자에 놓아주었다.“일찍 왔네요.”“도윤 씨가 더 일찍 왔는데요.”“저는 근처에 있었어요.”테이블 위에는 얇은 서류 봉투가 놓여 있었다.서인이 맞은편에 앉자 도윤이 봉투를 밀어주었다.“지난번에 준비하신 건 그대로 두시면 되고요. 이것만 새로 작성하면 돼요.”서인은 서류를 꺼내 한 장씩 넘겼다.“여기?”“네. 날짜는 비워두세요.”필요한 곳에 서명한 뒤 펜을 내려놓았다.도윤은 서류를 받아 빠진 곳이 없는지 확인한 뒤 다시 봉투에 넣었다.“됐어요.”“이번에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그러게요.”도윤이 봉투를 옆으로 치우다 서인을 봤다.“몸은 이제 괜찮아요?”“네.”“병원은 다녀왔고요?”“갔어요.”“검사도 했어요?”서인이 눈을 들었다.“잔소리하는 거예요?”도윤이 웃었다.“그렇게 들리긴 하겠네요.”그는 더 묻는 대신 서류 봉투를 테이블 한쪽으로 밀어두었다.“그럼 여기까지만 할게요.”그리고 정말 더 묻지 않았다.잠시 뒤 직원이 들어왔다.“식사는 미리 주문해뒀어요.”도윤이 말했다.“오마카세인데 못 먹는 거 있어요?”“없어요.”“다행이네요.”직원이 첫 번째 접시를 내려놓고 나갔다.서인은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낮은 조명 아래 짙은 목재로 마감된 공간은 조용했다. 테이블 너머로는 조명을 받은 작은 정원이 보였다.“여기 좋네요.”“괜찮죠?”“네.”도윤이 물을 따라주었다.“서인 씨도 좋아할 것 같았어요.”서인이 고개를 들었다.“내가요?”“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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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식사는 생각보다 길어졌다.지난달 행사에서 정 회장 사모가 또 며느리 자랑을 했다는 이야기며, 얼마 전 귀국했다는 태성가 막내아들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누구인지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비슷한 자리에서 몇 번씩 얼굴을 마주친 사람들이었다. 집안끼리 한두 다리만 건너면 대부분 연결되는 이름들이라, 어느 쪽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도 상대가 못 알아듣는 일은 거의 없었다.“태성 막내는 아예 들어온 거래요?”“그런가 봐요. 본사 들어간다는 얘기는 들었어요.”“이번에는 오래 있으려나.”“글쎄요. 지난번에도 세 달 있다 갔잖아요.”“그때도 본사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어요?”“했죠.”도윤이 웃었다.“이번에도 세 달이면 인사팀만 억울하겠네요.”“왜요?”“자리 만들고 명함 파고 조직도 바꾸고.”서인이 웃었다.“변호사가 인사팀 걱정까지 해줘요?”“남 일이라서요.”도윤은 아무렇지 않게 다음 요리를 집으며 덧붙였다.“제 일이면 안 웃죠.”별것 아닌 이야기는 그렇게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어느 쪽도 굳이 다음 화제를 찾지 않았고, 직원이 접시를 바꾸고 나가면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가 시작됐다. 할 말이 없을 때는 그대로 식사를 했다.그렇게 몇 번 접시가 바뀌고,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도윤이 물잔을 내려놓았다.“하나 물어봐도 돼요?”“뭔데요?”“두 분은 왜 이혼하는 거예요?”서인의 젓가락이 접시 위에서 멈췄다.도윤은 바로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처음 상담할 때 사이 좋다고 했던 건 기억해요.”“그런데요?”“몇 번 뵀는데 볼 때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서요.”“어떻게요?”도윤은 물잔을 만지작거리며 잠깐 생각하더니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욕을 안 해요.”서인이 웃었다.“누구 욕을요?”“배우자 욕.”“아.”“상담하다 보면 대부분 그것부터 하거든요.”“재하 씨는 욕할 게 별로 없는데.”도윤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서인을 한 번 바라봤다.“좋은 남편인가 보네요.”이번에는 서인이 대답할 차례였다.좋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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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이번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지난번과 같은 법원, 같은 시간대였지만 서류에는 빠진 곳이 없었고 엘리베이터도 한산했다. 서인의 안색 역시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괜찮아요?”옆에서 재하가 물었다.서인이 돌아봤다.“보면 모르겠어요?”재하의 시선이 얼굴을 한 번 훑었다.“괜찮아 보이긴 하네요.”그걸로 확인은 끝이었다.두 사람은 나란히 복도를 걸어 접수 창구를 안내받았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서인은 휴대전화를 꺼내 밀린 알림을 확인했다.한성에서 온 메일 두 통과 비서가 보낸 오후 일정. 그 아래에는 우진그룹 비서실에서 온 내일 저녁 식사 확인 메시지가 있었다.[내일 19시, 회장님 자택에서 뵙겠습니다.]화면을 끄는데 옆에서 재하가 말했다.“내일 7시죠?”“네.”“시간 맞춰 갈게요.”“나도요.”그걸로 끝이었다.잠시 뒤 두 사람의 차례가 왔다.절차는 생각보다 빨랐다. 준비해온 서류를 제출하고 안내에 따라 필요한 곳에 서명하는 것으로 대부분 끝났다.서인이 마지막 장을 앞으로 밀고 펜에서 손을 떼는 순간, 왼손 약지의 반지가 책상 위에 가볍게 부딪혔다.서인은 손을 거두다 잠깐 반지를 내려다봤다.결혼한 뒤 줄곧 끼고 다닌 반지였다.맞은편에서 재하가 서류를 넘겼다. 종이를 짚은 그의 왼손에도 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서류가 직원의 손으로 넘어가고 몇 가지 안내가 이어졌다. 숙려기간을 거친 뒤 확인기일에 다시 출석해야 했고, 이후 이혼 신고까지 마쳐야 절차가 모두 끝난다고 했다.확인기일은 한 달 뒤였다.서인은 휴대전화를 꺼내 캘린더를 열었다. 이미 잡혀 있던 일정을 확인한 뒤 빈칸에 새 일정을 입력했다.[협의이혼 확인기일]저장을 누르자 화면이 다시 월간 일정으로 돌아갔다.맞은편의 재하는 직원에게 받은 안내문에서 날짜를 확인한 뒤 다른 서류와 함께 챙겼다.법원을 나올 때까지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건물 밖으로 나오자 오후 햇빛이 눈부셨다. 서인은 가방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고, 재하는 걸음을 옮기며 재킷 단추를 풀었다.“끝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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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다음 날 저녁.우진가 현관에 들어서자 직원이 다가와 서인의 코트를 받아갔다. 재하가 옆에서 재킷을 벗는 사이, 거실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왔어?”이윤경이 직접 현관까지 걸어나왔다.차분한 실크 블라우스에 긴 스커트, 흐트러짐 없이 정돈된 머리까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밖에서는 좀처럼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서인을 보자 눈매부터 달라졌다.“어머님.”“어서 와.”서인이 가까이 가자 윤경이 자연스럽게 두 손을 잡았다. 얼굴을 찬찬히 살피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살 빠졌니?”“아니에요.”“아닌 것 같은데.”서인이 웃었다.“어머님 뵙는다고 오늘 화장을 좀 열심히 해서 그런가 봐요.”윤경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졌다.“듣기 좋은 말은 잘해.”“진짜인데요.”“그래. 예쁘긴 하네.”윤경은 서인의 손등을 한 번 가볍게 쓸었다.“요즘 많이 바쁘지?”“조금요.”“너무 일만 하지 마. 얼굴 볼 틈도 없잖아.”“죄송해요. 제가 먼저 연락드렸어야 했는데.”“바쁜 거 아는데 뭘.”윤경은 그제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그래도 가끔 얼굴은 보여줘. 보고 싶잖아.”“네. 그럴게요.”대답을 듣고 나서야 윤경이 서인을 안쪽으로 이끌었다.“마침 오늘 좋은 고기가 들어왔어. 해산물도 아침에 들어온 걸로 준비했고.”서인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맛있겠다. 저 배고파요.”“잘됐네. 들어가자.”그때 직원이 서인이 들고 온 쇼핑백을 받아가려 했다. 윤경이 상호가 찍힌 쇼핑백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저건 또 뭐야?”“어머님 드리려고요.”“이걸 또 사 왔어.”“좋아하시잖아요.”“집에도 먹을 건 많아.”“제일 좋아하시는 거니까요.”윤경은 잠깐 서인을 보다가 결국 웃었다.“차 마실 때 같이 내줘요.”“네, 사모님.”쇼핑백이 직원의 손으로 넘어가고 나서야 윤경이 뒤쪽을 돌아봤다.재하는 직원에게 재킷을 건네고 있었다.“재하도 왔구나.”재하가 헛웃음을 흘렸다.“서인이랑 같이 왔어요.”“그래?”“아까부터 여기 있었습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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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식당에는 이미 권태준이 앉아 있었다.서인과 재하가 들어서자 읽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든 태준이 안경을 벗었다.“왔니.”“아버님.”“그래.”태준은 서인을 한번 살폈다.“요즘 바쁘다며.”“조금 바빠요.”“그래.”그는 더 묻지 않았다. 서류를 접어 옆으로 치우며 덧붙였다.“도와줄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서인이 잠시 태준을 바라봤다.“네. 감사해요.”“앉아. 밥부터 먹자.”윤경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옆자리에 서인을 앉혔다. 재하는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곧 직원들이 음식을 내오기 시작했다.윤경이 말했던 대로 좋은 고기와 해산물이 차례로 올라왔다. 서인이 좋아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이건 서인이 앞에 조금 더 놔줘요.”“네, 사모님.”접시가 놓이자 서인은 젓가락을 들었다. 한 점을 집으려다 맞은편의 재하를 보고 그대로 그의 접시에 올려놓았다.“재하 씨 이거 먹어요.”재하가 접시를 내려다봤다.“왜요?”“좋아하잖아요.”재하는 별말 없이 젓가락을 들었다.“잘 먹겠습니다.”윤경의 시선이 두 사람 사이를 한번 오갔다.별것 아닌 광경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얼굴이었다.서인은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식사가 시작되고 대화는 자연스럽게 흘렀다.지난달 재단 행사와 태준이 최근 만난 사람들, 윤경이 다음 주 참석해야 할 전시회 이야기까지. 어느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들이었다.“지난번 행사 사진 봤어.”윤경이 말했다.“재단 행사요?”“응. 기사에 난 거.”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사진 잘 나왔더라. 드레스도 예뻤고.”“감사해요.”윤경은 잠시 맞은편의 재하까지 바라봤다.“둘이 나란히 있으니까 얼마나 보기가 좋은지.”서인이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그래요?”“응.”윤경은 별다른 의미도 두지 않은 채 다시 식사를 이어갔다. 맞은편의 재하도 아무 말이 없었다.잠시 후 태준이 재하에게 다음 주 미팅 일정을 물었고, 대화는 곧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서인은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평소와 다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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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은 조용했다.도로 위의 불빛이 창문을 따라 흘렀다.옆에서는 재하가 노트북으로 메일을 확인하고 있었다.서인은 창밖을 바라보다 조금 전 윤경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다음 주 목요일.“재하 씨.”“네.”“다음 주에 어머님이랑 전시 보기로 한 거요.”재하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네.”“그냥 가도 되겠죠?”재하가 서인을 봤다.“왜 안 돼요.”“그렇긴 한데.”재하는 잠시 서인을 바라보다 다시 노트북으로 눈을 내렸다.“가요.”“그래야겠네요.”그 말로 대화는 끝났다.차는 말없이 집을 향해 달렸다.***집에 도착했을 때는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현관에 들어선 서인은 구두를 벗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뒤따라 들어온 재하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계단을 올라간 두 사람은 각자의 방 앞에서 멈췄다.“잘 자요.”“서인 씨도요.”두 사람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씻고 나온 서인은 침대에 기대앉아 휴대전화를 들었다.몇 개의 메시지에 답하고 내일 일정을 확인하다가 캘린더를 열었다.다음 주 목요일을 눌렀다.[어머님 전시]저장을 누른 뒤 화면을 넘겼다.회의와 출장, 재단 일정 사이로 며칠 전 직접 등록해둔 문구가 보였다.[협의이혼 확인기일]서인의 손가락이 멈췄다.다음 주에는 윤경과 전시를 본다.그보다 몇 주 뒤에는 다시 법원에 간다.두 일정은 같은 달력 안에 있었다.서인은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누워서 눈을 감았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몇 번 자세를 바꾸다 다시 눈을 떴다.확인기일이 지나도 당장 달라질 건 없었다.이혼 사실을 알리는 건 그보다 뒤였다. 그때까지는 이 집에서 지내야 했고, 밖에서는 지금처럼 부부로 보여야 했다. 다음 달 재단 행사에도 참석할 예정이었다.오늘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함께 저녁을 먹고 돌아왔고, 다음 주에는 윤경과 다시 만나기로 했다.그런데 하나만 먼저 달라졌다.섹스.서인은 눈을 뜬 채 천장을 바라봤다.처음 안 하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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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방에서 나온 서인은 복도를 걸었다.재하의 서재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문 아래로 길게 새어나온 빛 앞에서 잠시 멈춘 뒤 두 번 노크했다.“들어와요.”문을 열자 재하는 아직 셔츠 차림이었다. 소매를 걷어 올린 채 노트북을 보고 있다가 서인을 발견하고 손을 멈췄다.“안 잤어요?”“네.”“왜요.”“생각할 게 있어서.”서인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재하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그녀를 올려다봤다.“무슨 일인데요.”서인은 책상 앞에 멈춰 섰다.방에서는 꽤 간단했던 결론이었다.확인기일이 지나도 당장 달라질 건 없었다. 공식적으로 이혼을 알리기 전까지는 같은 집에서 살 것이고, 밖에서는 여전히 부부였다.그런데 섹스만 먼저 끝냈다.다시 생각해도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서인이 입을 열었다.“재하 씨.”“네.”“우리 섹스는 왜 안 하는 거였죠?”마우스 위에 있던 재하의 손이 멈췄다.몇 초쯤 아무 대답이 없었다.“……갑자기?”“네.”재하가 서인을 가만히 바라봤다.“서인 씨가 그러자고 했잖아요.”“알아요.”“그런데요.”“다시 생각해봤어요.”서인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이혼하는 데 필요한 것도 아니고, 다시 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잖아요.”재하의 시선이 서인의 얼굴에 머물렀다.“그래서요?”“기회비용이 너무 큰 것 같아서.”이번에는 재하가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인은 진지했다.“어차피 발표 전까지는 지금처럼 지내야 하잖아요.”“그렇죠.”“그런데 굳이 이것만 먼저 끝낼 이유가 없어서요.”재하가 천천히 노트북을 닫았다.탁.조용한 서재 안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한서인 씨.”“네.”“기회비용이라고 했습니까?”“네.”“지금 섹스 얘기하는 거 맞죠?”서인이 재하를 바라봤다.“맞는데요.”재하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웃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참 서인 씨답네.”“틀린 말 했어요?”“아니요.”재하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서인을 올려다봤다.“너무 맞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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