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1화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투명하게 새하얗던 그녀의 얼굴 위로 발그레한 열기가 번져갔다. 설아는 한순간이라도 흐트러지지 않으려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고 있었다.그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유서진은 슬쩍 술잔을 기울이며 비틀린 미소를 흘렸다. 곁에 앉은 박수현은 이미 분위기에 취해 옆자리 사람과 신나게 떠들어대고 있는 중이었다.서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설아의 비어 있는 맞은편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유씨 그룹의 수장이 직접 자리를 옮겨 앉자, 주변에 있던 기업인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서진에게로 쏠렸다. 반가운 표정의 한 대표가 냉큼 서진에게 잔을 건넸다."아, 유서진 대표! 왜 이렇게 요즘 얼굴 보기가 힘들어요? 모임에도 얼굴을 잘 안 비추고 말이야.“"아, 최근에 조금 바쁜 일이 있었습니다. 이젠 거의 정리되었으니 언제든 불러주세요.“서진은 여유롭고 능숙한 태도로 응대하며 단숨에 술잔을 비워 냈다.빈 잔을 내려놓은 서진의 서늘한 시선이 설아에게로 똑바로 꽂혔다. 그는 묵직한 병을 들어 설아의 잔에 술을 채우며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축하드립니다, 이음의 이설아 씨. 한 잔 받으시죠.“예상치 못한 서진의 접근에 설아는 순간 굳어졌지만, 수많은 눈이 보고 있는 자리였기에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잔을 받아들었다."자, 이음의 성과를 위해 다 같이 한 잔 하시죠.“서진의 주도 아래 또다시 독한 술잔이 오갔다. 안 그래도 한계에 다다랐던 설아는 핑 돌며 밀려오는 어지러움에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것을 직감했다.설아는 테이블 아래로 두 손을 꼭 쥐어 짜며 떨림을 참아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온 힘을 다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설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흐트러지지 않으려 발끝에 바짝 힘을 주고 걸었지만, 미세하게 흔들리는 어깨와 지탱하듯 테이블 끝을 살짝 짚는 손끝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3년의 결혼생활 동안 그녀의 모든 행
Dernière mise à jour: 2026-08-11
Chapter: 110화거래처가 다 막혀 아무것도 진척시키지 못한 채, 죽상을 하고 나타날 그의 꼴이 머릿속에 그려지자 서진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마침내 만찬회 당일.강윤과 설아는 함께 일을 마치고 조금 일찍 회사를 나섰다. 금요일 저녁의 빽빽한 도로를 뚫고, 약속된 식당으로 향하던 그때 운전대를 잡고 있던 강윤이 컵 홀더에 놓인 커피를 집어 들었다.그 순간, 앞차가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았다!"읏……!“강윤 역시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고, 콰쾅 소리와 함께 몸이 앞으로 쏠리며 컵 홀더에 있던 커피가 그의 셔츠와 재킷 위로 왈칵 쏟아져 내렸다."강윤 씨! 괜찮아요?“설아가 깜짝 놀라 얼른 손수건을 꺼내며 묻자, 정작 강윤은 쏟아진 커피보다 설아의 상태를 먼저 살피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설아 씨는 괜찮아요? 많이 놀랐죠?“"전 멀쩡해요! 저는 괜찮은데…… 어떡해요, 옷이 커피로 다 젖어버려서…….“짙은 아메리카노 물이 들어버린 옷을 보며 설아가 울상이 되자, 강윤은 그녀가 너무 걱정할까 봐 일부러 대수롭지 않다는 듯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옷이야 다시 빨거나 갈아입으면 되죠, 설아씨가 안 다쳤으니 다행이에요."하지만 당장 갈아입을 여분의 옷이 없는 상태였기에, 엉망이 된 재킷을 내려다보던 강윤의 눈빛에 곤란한 기색이 스쳤다. 시계를 확인한 그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결단을 내린 듯 설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설아 씨, 시간이 거의 다 됐는데…… 좀 불편하겠지만 설아 씨가 먼저 들어가 있을래요? 난 집에 들러서 옷만 갈아입고 금방 갈게요. 진짜 오래 안 걸릴 테니까.“"네,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운전 조심하시구요.“"금방 갈 테니 먼저 들어가 있어요.“강윤은 만찬회장 입구에 설아를 먼저 내려준 뒤, 옷을 갈아입기 위해 곧장 차를 돌려 집으로 향했다.설아는 묵직한 목재 문 앞에서 얇게 한숨을 내쉬며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천천히 예약된 단독 룸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달칵—문이 열림과 동시에, 이미 도착해 담소를 나누던
Dernière mise à jour: 2026-08-11
Chapter: 109화끝까지 우아함을 잃지 않은 채 대놓고 서진을 무시하는 그녀의 태도에, 서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 앉았다.서진이 차갑게 돌아서려던 찰나, 그녀의 고급스러운 원목 책상 위에 놓인 자그마한 명패로 시선이 꽂혔다.[ 대표 강서윤 ]'강서윤…….‘숍을 나와 차에 올라탄 서진은 핸들을 쥔 채 미간을 찌푸렸다. 명패의 이름도 이름이었지만, 방금 전 자신을 쏘아보던 그녀의 눈빛과 분위기가 묘하게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어디서 본 적이 있었나?‘생각을 더듬던 서진의 머릿속에 순간 떠오르지 말아야 할, 가장 불쾌한 얼굴 하나가 겹쳐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눈이 번뜩였다.강윤. 그리고 강서윤.서늘한 눈매와 상대를 압도하는 특유의 오만한 분위기.'그래…… 저번에 수현이가 숍 에서 이설아를 봤다고 했었지.‘뇌릿속에서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소름 끼칠 정도로 딱딱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서진의 입가에서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그리고 조금 전, 그 맹랑한 대표가 자신을 향해 쏘아붙였던 말이 환청처럼 귓가를 울렸다.'손님의 개인정보라 성함을 직접 말씀드릴 수는 없네요. 하지만…… 어머님과 그쪽 친구분께서 누구보다 아주 잘 알고 계시지 않겠어요?‘"하……이것들 봐라.“서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차가운 분노가 눈동자 깊은 곳에서 피어올랐다."기분 상하게 만들었다는 그 대단한 손님이…… 이설아였어?“서진은 곧장 차를 거칠게 몰아 회사로 향했다.대표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선 서진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곧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수화기 너머로 이사의 정중한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서진의 차가운 목소리가 상대를 몰아붙였다."강윤 회사의 거래처들, 확실하게 끊어버린 거 맞습니까?“갑작스러운 서진의 날 선 태도에 수화기 너머의 이사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침착하게 답했다."네, 대표님. 현재 그만한 물량을 감당해 줄 만한 대체 거래처를 찾기도 힘든 상황이라 아마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을 겁니다.“"다시 한번 확실하게 단속하세요.”"
Dernière mise à jour: 2026-08-11
Chapter: 108화유씨 그룹 사람을 받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것, 그것은 명백히 자신과 가문에 대한 도전이었다.'감히 내 집안 사람들을 건드려?‘서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깟 관리숍 하나쯤은 당장 없애버리는 건 유서진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수화기를 들고 지시를 내리려던 서진은 이내 들었던 수화기를 천천히 내려놓았다.문득 그 무모하고 맹랑한 대표라는 여자의 얼굴이 직접 보고 싶어졌다.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이렇게까지 건방지게 굴 수 있는지, 참을 수 없는 호기심과 불쾌함이 동시에 치밀었다.서진이 수화기를 든 채 잠시 멈칫하자, 수현이 서진의 팔을 자신의 가슴쪽으로 잡아 당기며 말했다."서진아, 왜 그래? 응?“서진은 수화기를 도로 내려놓으며 차분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우선 들어가 있어. 내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서진의 미지근한 대답에 수현의 미간이 살짝 틀어졌다. 당장 제 눈앞에서 전화를 걸어 그 숍을 박살 내주길 바랐건만, 기대에 못 미치는 반응에 서운함과 불쾌감이 슬그머니 밀려왔다.수현은 살짝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티를 냈지만, 이내 퉁퉁 불어터진 눈가를 대충 훔쳐내고는 조용히 대표실을 나섰다.수현이 대표실을 나서자, 소파에 기댄 채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 있던 서진이 마침내 눈을 떴다. 감정 없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제 어머니와 수현에게 감히 수치심을 안겨준 에스테틱 숍으로 향했다.고급스러운 건물 앞에 차를 댄 서진은 망설임 없이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눈에 보기에도 화려하고 웅장한 인테리어가 압도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선 서진이 안내 데스크 앞에 서자, 직원이 살가운 미소로 그를 맞이했다."어서 오세요, 예약하셨을까요?""이곳 대표를 좀 만나고 싶은데요.“서진의 차가운 태도에 직원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정중하게 물었다."무슨 일때문에 오셨다고 전달해 드릴까요?“"유씨 그룹이라고 하면 알 겁니다.“직원은 서진의 싸늘한 기류를 느꼈는지 곧바로 대표실로 내
Dernière mise à jour: 2026-08-10
Chapter: 107화"맞아요, 대표 당장 나와서 설명하라고 하세요! 어디서 감히 손님을 골라 받겠다는 건지……!“두 사람의 안하무인 격 고함에 숍 안은 순식간에 차가운 정적으로 휩싸였고, 다른 사모님들의 시선은 점점 더 흥미진진하게 몰려들었다.바로 그때, 안쪽 인포메이션 문이 열리며 단정하고 우아한 정장 차림의 여성이 유유히 걸어 나왔다. 강윤의 사촌누이자, 이 최고급 에스테틱 숍의 진짜 주인이었다."무슨 일이시죠, 이렇게 소란스럽게?“그녀는 눈 하나 눈하나 꼼짝하지 않는 여유로운 태도로 두 사람 앞에 섰다. 수현은 그녀의 묘하게 품격 있는 분위기에 순간 주눅들었지만, 지기 싫다는 듯 앙칼진 눈빛으로 쏘아보며 따져 물었다."그래, 당신이 여기 대표 맞아? 지금 저 실장이 유씨 그룹 관련된 사람들은 절대 받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똑바로 설명해 봐. 어디서 감히 우리 어머니하고 나한테 이딴 몰상식한 대접을 해?“아무렇지도 않게 반말을 짓거리며 머리 끝까지 화가 나 씩씩대는 수현을 향해, 강윤의 사촌누나는 기가 차다는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려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눈빛에는 날카로운 멸시와 비웃음이 가득 차 있었다."엊그제 저희 실장한테 '이설아'라는 여자분 이야기를 아주 당당하게 하셨다던데…… 두 분은 남의 손님에 대해 그런 저급한 뒷담화를 하셔도 되고, 저는 제 숍에서 고객을 골라 받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강윤의 사촌누나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고상한 미소를 띤 채,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두 사람을
Dernière mise à jour: 2026-08-08
Chapter: 106화강윤은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다는 듯 전화기를 들어 뒷조사를 담당했던 강율 그룹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신호음이 불과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이사가 전화를 받았다.[네, 대표님.]"이 이사님, 추가로 손을 써주셔야 할 일이 있어서 연락드렸어요.“[네, 말씀하십시오. 어떤 건입니까?]강윤은 서류를 무심하게 툭 던져놓으며, 서늘할 정도로 담담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박수현이라는 여자, 그 부모가 운영하는 회사의 자금줄을 완벽하게 차단해 주세요. 파산 직전까지 몰리면, 곧바로 헐값에 매각 절차를 밟아 우리 쪽에서 사들이는 겁니다. 원래 자금력이 그리 탄탄한 곳은 아니니 그리 어렵진 않을 겁니다.“수화기 너머로 잠시 멍한 정적이 흘렀다. 이사는 뜻밖의 지시라는 듯 의아한 목소리로 물어왔다.[네? 처리하는 것 자체야 어렵지 않습니다만…… 굳이 그런 실익 없는 소규모 회사를 인수까지 하려는 이유가 있으십니까?]그 질문에 강윤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상대들이 워낙 감정적으로 일하는 부류라, 저도 이번만큼은 그 방식 그대로 한번 놀아주려고요.“[네……?]이사는 여전히 상황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지만, 강윤은 옅은 웃음과 함께 나지막이 덧붙였다."그럼 부탁드립니다, 이사님.“짧은 인사를 끝으로 강윤은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었다.한편, 유서진의 대표실 안.유서진은 의자에 깊숙이 기댄 채, 어제 저녁 이후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은 휴대폰을 무심하게 지그시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강윤이 자신을 찾아와 무릎을 꿇기는커녕, 제발 거래처 압박을 풀어달라는 전화 한 통 조차 걸어오지 않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이설아가 말을 안 한 건가?‘만약 이설아가 사실대로 다 털어놓았다면 강윤이라는 남자가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었다. 설령 말을 안 했다 치더라도, 당장 핵심 거래처들이 연달아 계약 파기를 통보해 와 회사가 발칵 뒤집혔을 텐데……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이 상황에 자존
Dernière mise à jour: 2026-08-07
Chapter: 173화유라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도진이 서늘한 음성으로 단호하게 말을 끊어냈다.“너를 이렇게 망가뜨린 그 자식을 지금 용서하겠다는 거야? 이유라, 너 자칫하면 정말 죽을 수도 있었어. 그런데 용서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도진의 목소리가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젖어 거칠게 튀어나왔다. 그의 핏발 선 눈동자에는 유라를 향한 걱정과 억눌린 감정이 아슬아슬하게 부딪히고 있었다.유라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하지만…… 도현 오빠 아버님도 그렇고, 도현 오빠도 제 학창 시절엔 분명 고마운 분들이었던 건 사실이에요. 그분들이 완전히 망가지는 건 저도 원치 않고…… 무엇보다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않겠다는 확실한 약속도 받았어요.”유라는 굳어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도진의 손등 위에 조용히 제 손을 포갰다.“그리고 제가 경찰 조사를 받기 시작하면, 어쨌든 오빠 에게까지 수사가 미치게 될 거예요.”유라는 도진의 손을 꼭 쥐며 나지막하지만 단단한 어조로 이어 말했다.“가뜩이나 연이어 터진 안 좋은 기사들 때문에 힘든데 저 때문에 또다시 곤욕을 치르고 힘들어하는 모습…… 저, 더 이상은 정말 보기 싫고 힘들어요.....”“난 내가 가진 거 다 잃어도 상관없어. 그러니까 그런 거 신경 쓰지 마.”도진의 눈빛에 짙은 분노가 아른거렸다,“너를 이 지경으로 만든 이도현 그 자식은 물론이고, 옆에서 도운 놈들까지…… 난 절대로 그냥 안 둬. 전부 다 빠짐없이 대가 치르게 만들 거야.”도진의 단호한 태도와 눈빛을 확인한 유라는 결국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설득하고 달래 보아도, 한 번 뜻을 굳힌 도진이 절대 물러서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 뒤로도 유라가 몇 번이고 그를 설득하려 애썼지만, 도진의 뜻은 굳건했다.그렇게 도진은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기획사 대표와의 약속대로 남아 있던 모든 스케줄을 차질 없이 완벽하게 소화하고 마무리 지었다.그 끝을 향해 달리는 동안, 도진의 마음
Dernière mise à jour: 2026-07-29
Chapter: 172화“유라 학생……?”보육원 시절, 아이들과 자신에게 가식 없는 미소로 따뜻한 조언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인자한 목소리. 국내 최고 대형 병원의 병원장이이자, 이도현의 아버지인 그의 목소리였다.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의 연락에 유라는 당황스러움으로 굳어버려 선뜻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수화기를 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그 묵직한 정적을 깨고 다시 한번 도현 아버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유라 학생, 나 도현이 아빠예요. 듣고 있나요?”유라는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가다듬으며 나지막하게 대답을 건넸다.“네…… 안녕하세요.”수화기 넘어 유라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도현의 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정중하고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오랜만에 목소리를 들으니 반갑기도 하고, 마음이 무겁기도 하구나…… 다름 아니라, 우리 도현이가 유라 학생에게 큰 실수를 했다고 들었어요...”여전히 기억 속 모습 그대로 자상하고 신사적인 말투였다.“아비 된 마음으로 우리 도현이의 잘못된 행동은 내가 엄하게 꾸짖고, 다시는 유라 학생 앞에 나타나지 못하도록 확실히 조치 할테니. 그러니 부디 이번 한 번만 우리 도현이를 용서해 줄 수 없겠어요?”유라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도현의 아버지에게는 사실 감사한 마음이 컸던 탓이다. 과거 보육원 봉사활동을 오며 시설에 아낌없는 금전적 지원을
Dernière mise à jour: 2026-07-28
Chapter: 171화게다가 사건은 끝난 게 아닌,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그저 유라의 건강 상태를 고려해 조사가 잠시 지연되고 있었을 뿐. 만약 조사 과정에서 유라의 입을 통해 이상한 말이라도 터져 나오는 날엔, 제 아들이 쌓아 올린 커리어와 가문의 명예는 그야말로 나락으로 처박힐 게 뻔했다.도현의 부모는 식은땀이 흐르는 손을 쥐어짜며 깊은 초조함에 휩싸였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아들이 망가지는 걸 지켜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도현의 아버지가 도현의 집 문을 열고 들어섰다.두꺼운 암막 커튼마저 치지 않아 어둠이 짙게 깔린 집안, 거실 한복판에는 도현이 술에 취해 쓰러지듯 잠들어 있었다. 며칠 새 살이 쏙 빠진 그의 차가운 인상은 더욱 날카로워 보였다.‘철컥-’아버지가 거칠게 커튼을 젖히자, 창문 너머로 쏟아져 들어온 눈부신 햇살에 도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붉게 충혈된 눈에 차가운 표정의 아버지가 담기자, 도현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소파에 기대앉았다.“……왜 오셨어요.”“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니? 너 도대체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아버지는 참아왔던 분통을 터뜨리며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도현은 초점 없는 눈으로 초라한 술병들을 바라볼 뿐이었다.“아버지가 신경 쓰실 일 아니에요.”“뭐?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너 지금 이 얘기가 조금이라도 밖으로 새어 나가서 잘못된 기사라도 터지면, 우리 병원 이미지 나락 가는 건 한순간이야! 네 인생도 끝이고!”병원과 가문의 명예를 먼저 들먹이는 아버지의 호통에 도현의 눈매가 차갑게 일그러졌다. 그는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르며 낮게 읊조렸다.“……제 뒤 캐셨어요?”“지금 그게 중요해?! 이도현, 너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망가진 거야! 대체 뭣 때문에…… 그깟 여자애 하나 때문에 이 미친 짓을 벌인 거냐고!”“....”“내가 너를 보육원 봉사활동에 데려가는 게 아니었는데…….”도현의 아버지 입에서 짙은 후회가 섞인 한숨이 털썩 새어 나왔다.“처음부터 그
Dernière mise à jour: 2026-07-27
Chapter: 170화“……알겠어요.”피해를 최소한의 방식으로 해결하자는 대표의 지극히 현실적인 설득에 도진도 마침내 나지막이 응했다.어쨌든 자신의 선택으로 자신을 위해 일하고 있는 직원들의 생계와 노력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전화를 끊은 도진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그리고는 소파 한쪽 구석에 안절부절못하고 불안해하는 유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자신과 진심으로 사랑해서 품게 된 소중한 생명이었건만, 유라는 마치 커다란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온통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위축된 모습이 도진의 가슴을 또 한 번 시리게 만들었다.도진은 유라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추었다.“이유라.”유라를 담아내는 그의 눈동자에는 오직 깊고 다정한 온기만이 남아 있었다.“네가 죄인처럼 굴 이유 단 하나도 없어. 이건 우리가 사랑해서 생긴 가장 축복받아야 할 일이야. 내가 다 해결할 테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마.”“하지만…… 이 시기에……”유라가 여전히 근심 어린 얼굴로 입을 열려 하자, 도진은 그녀의 말을 부드럽게 잘라내며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그건 네가 걱정할 일 아니야. 온전히 내 몫이지.”도진의 커다란 손이 유라의 뺨을 다정하게 감싸 쥐었다.“뱃속에 있는 아이, 내 아이기도 해. 내가 전부 감내해야 할 일이야.”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도진의 눈빛에는 유라를 향한 깊은 미안함과 단단한 책임감이 서려 있었다.“밥 먹자.”도진은 무거워진 분위기를 돌리려는 듯 자연스럽게 말을 바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오늘 계속 토하느라 빈속이잖아. 먹고 싶은 거 없어?”유라가 여전히 입맛도, 마음의 여유도 없어 가만히 고개를 저어 보이자, 도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며 말을 이어갔다.“생각 없어도 먹어야지. 아까 병원에서 선생님 이야기 못 들었어? 영양 불균형이 심하다고 했잖아.“너를 위해서, 그리고 뱃속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조금은 먹어야 해.”말을 마친 도진은 주방으로 향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이
Dernière mise à jour: 2026-07-26
Chapter: 169화주치의의 긴 설명이 끝나고 진료실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도진은 단 한마디 입을 열지 않았다.슬픔과 미안함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유라는 꾹 눌러 참았다. 차마 도진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조차 나지 않아, 유라는 병원을 나서는 내내 숙인 고개를 끝내 들지 못했다.차에 올라탄 도진의 반응은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집으로 향하는 내내 차 안에는 숨 막히는 정적만이 감돌았다.도진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단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그의 차가운 옆모습은 낯설다 못해 무섭기까지 했다.도진의 차가운 옆모습에 유라는 가녀린 몸을 더욱 말아 웅크렸다. 스쳐 지나가는 창밖의 어두운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는 유라의 손가락 끝이 불안하게 마구 짓눌렸다.차 안을 짓눌러 오는 이 무거운 침묵이 마치 마지막을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펜트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도진은 유라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그는 거친 숨을 내쉬며 냉수를 컵 가득 따라 한 번에 들이켰다.차갑게 굳어 있는 그의 등 뒤에서, 유라는 떨리는 손으로 옷자락을 꼭 쥔 채 참아왔던 목소리를 내어놓았다.“…… 이 아이로 발목 잡을 생각 전혀 없어요.”차가운 정적 속에서 유라의 떨리는 음성이 서글프게 울려 퍼졌다.“제가…… 제가 떠날게요.”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물컵을 내려놓는 도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식탁 위에 '탁' 소리를 내며 놓인 유리컵 주변으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이유라.”낮게 가라앉은 도진의 목소리가 펜트하우스의 차가운 공기를 갈랐다. 천천히 몸을 돌려 유라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참아왔던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넌 정말…… 나한테 비밀 같은 건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무슨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이야기하기로 했잖아!”억눌렸던 도진의 소리가 결국 거칠게 터져 나왔다. 화가 잔뜩 난 그의 목소리에는 서운함과 울분, 그리고 속을 태우던 애타는 심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도대체 이렇게 큰 일을 나한테
Dernière mise à jour: 2026-07-25
Chapter: 168화얼마 지나지 않아 적막을 깨고 벨 소리가 울렸다. 문을 열자 숨을 헐떡이는 매니저가 서 있었다. 도진의 성화에 못 이겨 겨우 외투를 걸친 유라는 차마 떼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차는 도로를 내달려 순식간에 병원 앞에 도착했다. 도진의 전담 주치의가 기다리고 있는 프라이빗 진료실로 안내받은 유라는 긴장으로 바짝 마른 입술을 짓씹으며 검사실로 들어섰다.하지만 첫 검사부터 커다란 난관이 찾아왔다.기본 검사를 마친 뒤 흉부 엑스레이 촬영을 준비하던 방사선사가 유라를 향해 무심하게 물었다.“이유라 씨, 혹시 임신 가능성 있으신가요?”갑작스러운 질문에 유라는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 굳어버렸다. 입술만 벙긋거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유라를 보며, 옆에 서 있던 간호사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혹시라도 임신 가능성이 있으시면 배를 가리고 촬영해야 해서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실까요?”“네……”유라의 입술 사이로 들릴 듯 말 듯한 대답이 새어 나왔다. 자신 때문에 혹시라도 아이에게 나쁜 영향이 갈까 차마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준비하는 동안, 유라는 떨리는 손으로 옷자락을 꼭 쥐며 나지막이 물었다.“저기…… 혹시 제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보호자에게 비밀로 해주실 수 있나요?”갑작스러운 부탁에 간호사는 의아한 눈빛으로 유라를 바라보았다.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유명 연예인 도진과 어떤 관계인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는 듯했지만, 이내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하게 답했다.“음, 그건 저희 쪽에서 임의로 숨겨드리기는 어려워요. 검사가 다 끝나고 담당 의사 선생님과 상담하실 때 직접 말씀해보셔야 할 것 같아요.”".........."“자, 찍습니다. 숨 크게 들이마시고 참으세요.”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흉부 엑스레이 촬영은 금세 끝이 났다. 이어 피검사를 비롯해 각종 검사를 차례로 마친 유라는 옷을 갈아입고 검사실 밖으로 나왔다.아침부터 빈속이었던 데다 긴장 속에 여러 검사를 치르
Dernière mise à jour: 2026-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