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화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유라는 마치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오듯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짙은 어둠이 깔린 방 안, 코끝을 스치는 낯선 향과 피부에 닿는 서늘한 감촉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식은땀으로 젖은 몸을 일으키자 머리가 깨질 듯 울렸지만, 이곳이 김도진의 집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당혹감이 전신을 지배했다.‘어떻게 된 거지? 분명 화장실 청소를 하고 음료를 마신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끊긴 기억의 실타래를 붙잡을 겨를도 없었다. 이 집에서, 특히 그의 침실에서 당장 벗어나야 한다는 본능적인 공포가 앞섰다. 유라는 헐렁한 티셔츠 자락을 움켜쥔 채 허겁지겁 방을 뛰쳐나왔다.텅 빈 거실은 고요했다. 유라는 숨을 죽인 채 발걸음을 죽이며 현관으로 향했다. 다급하게 구두에 발을 밀어 넣던 그때, 등 뒤에서 얼음장처럼 차갑고 낮은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다.“어딜 가게.”“앗…!”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유라가 뻣뻣하게 굳은 몸을 돌리자, 소파에 깊숙이 몸을 기댄 채 와인 잔을 돌리고 있는 도진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도 번뜩이는 그의 눈빛이 유라의 전신을 훑어 내렸다.“아, 안녕하세요…. 그게, 제가 지금 정신이 좀 없어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왜 여기서 잠을 자고 있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나서….”횡설수설하며 고개를 숙이는 유라를 보며 도진이 어이없다는 듯 픽, 실소를 터뜨렸다. 그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천천히 일어나 유라에게 다가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위압감에 유라는 뒷걸음질을 쳤다.“내 집에 들어와서 청소하라고 했지, 내 침대에서 소란 피우라고 한 적은 없는데.”“죄송합니다… 정말 드릴 말씀이 없어요.”“그리고, 그 꼴로 지금 집에 가겠다는 거야?”도진의 시선이 멈춘 곳을 따라 유라도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순간, 유라의 얼굴이 다시 한번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허벅지 중간까지 내려오는 그의 커다란 셔츠 사이 아래로 맨다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아, 옷은… 제가 화장실 청소를 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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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화그대로 이유라를 안고 있던 김도진은 이유라의 뜨거운 몸에 깜짝 놀랐다젖은 옷을 입은 채 돌아다닌 탓인지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예사롭지 않았다.도진은 손등에 닿는 뜨거운 열기에 깜짝 놀라 미간을 찌푸렸다.“왜 이렇게 뜨거워….”감기기운에 술기운까지 올라온 모양이었다. 도진은 서둘러 두꺼운 이불을 가져와 덮어주려 했으나, 이유라의 모습을 보고 잠시 멈칫하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무방비하게 누워있는 이유라 새하얀 피부는 열꽃이 피어 붉게 달아올랐고, 헐렁한 셔츠 사이로 드러난 가냘픈 선은 묘하게 매혹적인 아우라를 풍겼다. 김도진의 주위에 늘 화려한 여자들이 많았지만, 이토록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처연한 분위기는 처음이었다.넋을 잃고 바라보던 도진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비상약 상자에서 해열제를 찾아왔다.“이유라, 정신 좀 차려봐. 이거 먹어야 해.”그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고개를 들어 알약을 입안에 넣어주었지만, 의식이 몽롱한 이유라는 쓴맛이 느껴지자 미간을 찌푸리며 약을 뱉어버렸다. 몇 번을 시도해도 막무가내였다. 억지로 입을 벌리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결국 도진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해열제를 자신의 입에 넣고 물 한 모금을 머금었다. 그러고는 한쪽 손으로 유라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받쳐 들고, 거칠게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읍…!”순간적으로 입술을 막아선 낯선 감촉과 무게감에 유라가 본능적으로 두 손을 뻗어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하지만 도진의 몸은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신이 혼미한 유라는 입안으로 밀려드는 쓴 액체가 독한 술이라도 되는 양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도진은 그녀의 턱을 단단히 고정하며 끝내 약을 삼키게 만들었다.꿀꺽, 약이 이유라의 목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도진은 천천히 입술을 떼어냈다.“하아, 하….”유라는 갑작스럽게 돌아온 공기에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도진은 자신의 입술 끝에 묻은 약 기운을 엄지손가락으로 느릿하게 문지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그러게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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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화“또 시작이네. 김건, 좋은 시간 보내라.”평소처럼 냉소적인 한마디를 내뱉으며 문을 닫으려던 찰나였다. 문틈 사이로 보인 여자의 마른 팔과 거칠게 발버둥 치는 실루엣이 묘하게 눈에 밟혔다. 평소라면 남의 유희에 신경도 쓰지 않았을 그였지만, 오늘따라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한 기분에 그는 닫으려던 문을 다시 열었다.“야, 김건.”낮게 깔린 호출에 김건이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아래, 엉망이 된 채 드러난 얼굴을 확인한 도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유라의 얼굴은 술기운에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반쯤 말려 올라간 티셔츠 아래로 하얀 쇄골과 가슴 라인이 아슬하게 드러났고, 김건에게 붙잡혀 있던 두 손목에는 이미 시퍼런 멍이 피어오르고 있었다.도진의 미간이 순간 일그러졌다. 설명할 수 없는 불쾌감이 속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뭐야?”“아, 도진아. 우선 나가 있어 봐. 금방 끝내고 나갈 테니까.”“지금 뭐 하냐고 물었어, 김건.”도진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목을 칠 것 같은 살기에 김건은 흠칫 놀라 변명을 늘어놓았다.“아니, 유라 씨 옷이 젖었길래 음료에 술 좀 타 줬더니 정신을 못 차리더라고. 나한테 안아달라고 기대길래 좀 예뻐해 주려던 것뿐이야.”“……나가.”단 한마디였지만 그 안에 공간 분위기 전체를 얼려버릴 듯한 압도적인 위압감이었다. 김건은 못마땅한 듯 혀를 차며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정적이 찾아온 방안, 도진은 침대 위에 쓰러져있는 유라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녀를 위해 옷을 정리해주려 침대에 앉자, 유라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방어 기제를 보였다. 그럴수록 가느다란 손목에 새겨진 붉은 멍은 더욱 선명하게 도진의 시야를 찔렀다.뜨거운 입김을 내뱉으며 고통스러워하는 유라를 보던 도진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멍든 손목을 감싸 쥐었다. 그 온기에 유라가 힘겹게 눈꺼풀을 떨며 신음하듯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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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화그가 건넨 컵 안에는 달콤한 향이 감도는 따뜻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젖은 옷 때문에 한기를 느끼던 유라는 별다른 의심 없이 음료를 단숨에 들이켰다.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 몸 안쪽에서부터 낯선 열기가 화르르 타오르기 시작했다.“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가볼게요……?”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던 유라의 시야가 크게 일렁였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비틀거리는 그녀를 기다렸다는 듯 김건이 다가와 어깨를 붙잡았다.“괜찮으세요? 얼굴이 너무 붉은데.”“괜찮아요… 살짝 어지러워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유라는 억지로 정신을 붙잡으며 신발장으로 향했지만,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질 뻔했다. 김건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아 일으켜 세웠다.“몸이 안 좋으면 좀 쉬다 가요. 무리하지 말고.”“아, 아니에요… 갈 수….”말을 끝내기도 전에 유라의 고개가 툭 꺾였다. 김건의 어깨에 기댄 채 의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김건은 잠시 당황하는 척하더니, 이내 입가에 비열한 웃음을 띠며 유라를 안아 들고 침실로 향했다.침대 위에 눕혀진 유라의 모습은 지독하게 치명적이었다.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커다란 티셔츠, 붉게 달아오른 뺨과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거친 숨소리. 다정한 매너남의 가면 뒤에 숨겨진 김건의 추악한 본능이 깨어났다. 그는 유라의 가녀린 두 손목을 한 손에 쥐고 제압하며 그대로 입을 맞췄다.“웁…!김건의 강압적인 입맞춤에 유라는 숨이 막혀왔다. 필사적으로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술 기운이 도는 몸은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고 단단한 체구의 김건은 요지부동이었다. 유라의 가느다란 신음이 이어질수록 김건의 눈빛은 더욱 번들거렸고, 그의 손이 유라의 얇은 티셔츠 안으로 파고든 순간이었다.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김도진은 나란히 놓인 신발 두 켤레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고요해야 할 집안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억눌린 신음소리.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가 나는 방으로 향한 그는 침대 위에서 엉겨 붙어 있는 남녀를 발견했다. 김건의 넓은 등에 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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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화“도진이 집에 없나요? 난 도진이 친구, 김건이라고 합니다.”“아… 안녕하세요. 저는 김도진 씨 매니저인 이유라라고 합니다. 지금 외출 중이신 것 같은데, 들어와서 기다리세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유라가 고개를 숙인 채 도망치듯 현관으로 향하자, 김건이 긴 팔을 뻗어 유라의 앞을 가로막았다. 젖은 옷 위로 비치는 유라의 가느다란 실루엣과, 물기 어린 속눈썹 아래 발그레해진 뺨. 그 모습은 지독하게 위태롭고 매혹적이었다.“그 꼴로 나가면 감기 걸려요. 옷이라도 말리고 가야죠.”“아뇨, 괜찮습니다!….”“숙녀분을 이런 모습으로 보낼 순 없죠. 들어와요.”김건의 커다란 손이 유라의 가느다란 손목을 낚아챘다. 거절할 틈도 없이 거실로 이끌려 들어온 유라는 전면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몰골을 보고 경악했다. 물에 젖은 하얀 티셔츠는 속옷 라인까지 투명하게 비추고 있었다.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웅크리는 유라를 보며 김건이 낮게 웃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도진의 방으로 들어가 검은색 티셔츠 한 장을 들고 나왔다.“우선 이걸로 갈아입어요. 미녀분이 감기 걸리면 안되죠”김건이 능글맞은 제스처와 멘트를 날리며 웃음을 지었다. 이유라는 김도진과 마주치지 않게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유라는 서둘러 욕실로 들어가 김건이 가져다 준 티셔츠로 갈아 입고 나왔다.도진의 체취가 밴 커다란 티셔츠가 유라의 허벅지 중간까지 내려왔다. 문을 열고 나온 유라를 본 김건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일렁였다.“…….”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그녀의 묘한 분위기가 김건의 사냥 본능을 자극한 듯했다.“이유라 씨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얼굴이네.”김건이 혼잣말로 낮게 중얼거렸다.김도진과 마주칠까 무서웠던 이유라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도진의 거대한 체격 탓에 그가 준 티셔츠는 유라에게 거의 원피스처럼 내려왔고, 헐렁하게 늘어진 네크라인 사이로 가녀린 쇄골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어설프게 젖은 머리카락과 커다란 옷에 파묻힌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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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화유라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녀가 발을 들인 곳은 직장이 아니라, 빠져나갈 수 없는 늪이었다는 것을.월급 액수에 홀려 계약서 뒷장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대가는 혹독했다. 뒤통수를 얻맞은 기분이었지만, 유라는 당장 길바닥에 나앉지 않게 된 것에 안도하며 고개를 숙였다.“네, 알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우리 집으로 와서 청소 좀 해둬.”“네 알겠습니다”김도진은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타인이 자신의 영역에 발을 들이는 것을 혐오했다. 그래서 청소는 늘 전담 매니저의 몫이었다. 이유라는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청소하기 편한 헐렁한 박시 티셔츠를 챙겨 입었다. 평소처럼 마스크로 얼굴을 꽁꽁 가린 채 도진의 펜트하우스로 향했다.위압감이 느껴지는 거대한 문 앞에서 숨을 크게 들이마신 유라가 비밀번호를 눌렀다. 높은 층고와 갤러리처럼 정막이 흐르는 거실은 차가운 도진의 성품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집에 없는 것 같네. 다행이다.’안도의 한숨을 내쉰 유라는 로봇 청소기를 서둘러 가동시키고 부엌에 널브러진 술병들을 정리했다. 이어 화장실 청소를 위해 뜨거운 물을 뿌리던 중, 낡은 샤워기 헤드가 제멋대로 돌아가며 유라의 온몸을 덮쳤다.“아앗! 정말 되는 일이 없네, 진짜…!”순식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홀딱 젖어버렸다. 이유라는 젖은 마스크를 벗어 주머니에 넣고 대충 화장실 정리를 마무리했다. 축축하게 젖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티셔츠 끝단을 잡아 물기를 짜냈지만, 얇고 하얀 면 티셔츠는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물기를 머금은 티셔츠가 몸에 달라붙어 유라의 매끄러운 어깨선과 속살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빨리 가야 해. 김도진이랑 마주치기라도 하면…일하나 제대로 못해 성가시게 한다고 짤릴지도 몰라.’불안한 예감에 서둘러 짐을 챙기려던 그때, 도어락의 기계음이 고요한 집안을 울렸다.띠띠띠띠, 삐릭.유라의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김도진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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