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시아는 주황색 박스를 통째로 들고 나와 거실 테이블 한가운데에 반듯하게 올려두었다. 다음 날 아침, 출근을 위해 서재에서 나온 도혁은 테이블 위의 박스를 발견하고 미간을 좁혔다.
“이게 왜 여기 나와 있습니까?”
“제 방 서랍에 잘못 들어가 있더군요. 고용주님의 물건인 것 같아 정돈해 두었습니다.”
시아의 대답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단정했다. 도혁의 턱 근육이 굳어졌다.
수천만 원짜리 명품 가방을 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돌려놓다니.
‘남의 물건에 손대지 않는다는 결백함을 증명하려는 건가. 아니면 가방 하나로 자신을 길들이려 한다고 오해한 건가.’
도혁은 시아의 차분한 얼굴을 보며 혼자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군. 좋아, 그렇다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지.’
사흘 뒤, 시아의 방 옷장에는 5,000만 원짜리 샤넬 컬렉션 캐시미어 롱코트가 걸려 있었다. 시아는 그것 역시 먼지 하나 묻히지 않고 도혁의 드레스룸 메인 행거로 조용히 옮겨놓았다.
그다음 날에는 8,000만 원짜리 바쉐론 콘스탄틴 여성용 다이아몬드 시계가 서랍에 들어 있었다. 시아는 시계를 조심스럽게 꺼내 도혁의 서재 금고 옆 트레이에 완벽한 수평으로 올려놓았다.
‘이 남자가 점점 이상해지네. 귀한 물건들을 왜 자꾸 아무 데나 흘리고 다니는 거지.’
그날 저녁, 도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강시아 씨는 갖고 싶은 물건이 없습니까?”
“있습니다.”
도혁의 눈빛이 즉시 밝아졌다.
“말해보십시오.”
“주방 후드 틈새용 6mm 브러시와 무향 실리콘 세정제요. 기존 제품은 헤드가 2mm 넓어서 모서리에 닿지 않습니다.”
도혁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아는 그 침묵을 주문 품목을 메모하는 시간으로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개씩이면 충분합니다.”
도혁은 명품 가방보다 몇천 원짜리 브러시를 더 진지하게 원하는 여자를 보며, 자신의 오해를 바로잡기는커녕 더 깊이 빠져들었다. 시아가 돌아서자 도혁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혼자 중얼거렸다.
‘다이아몬드 시계까지 돌려놔?’
도혁은 답답한 듯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시아가 돈의 가치를 모르는 게 아니라, 호의를 받는 일 자체를 경계한다고 확신했다.
거절당할수록 포기하기는커녕 다른 방법을 궁리하게 되는 자신도 정상은 아니었다.
***
그날 밤 12시 반. 갑작스럽게 쏟아진 거센 폭우와 천둥 번개로 펜트하우스의 거대한 통유리창이 요란하게 덜컹거렸다.
다용도실에서 런던 증시 개장 동향과 글로벌 채권 금리 변동을 위성 단말기로 점검하고 나오던 시아는, 서재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거칠고 불규칙한 숨소리를 들었다.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 속에서, 도혁이 가죽 소파에 몸을 웅크린 채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다.
“……도혁 씨?”
시아가 조용히 다가가자, 창백하게 질린 도혁이 핏발 선 눈으로 시아를 힘겹게 올려다보았다. 입술은 말라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비가 오면…… 머릿속에서 시계 초침 소리가 멈추질 않아. 뇌를 사정없이 파고드는 것 같아…….”
그 말이 낯설지 않았다. 시아도 새벽 3시마다 숫자와 계약 조항이 머릿속에서 되감겨, 눈을 감고도 잠들지 못한 밤이 수없이 많았다.
증상은 달라도 잠이 사람을 갉아먹는 방식은 비슷했다. 스트레스가 쌓인 데다 천둥 소리까지 겹치면서 불면 증상이 심해진 모양이었다.
시아는 그의 손목 안쪽에 손가락을 대 맥박부터 확인했다. 지나치게 빨랐지만 의식은 또렷했다. 시아는 망설임 없이 소파 옆 협탁 스탠드의 조도를 편안한 20럭스로 낮추고, 책장에 꽂혀 있던 낡은 영문 고전문학 서적을 집어 들었다.
커튼을 완전히 닫아 번개가 시야를 자극하지 않게 하고, 탁상시계는 서랍 안에 넣었다. 도혁은 자신을 둘러싼 변화가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시아가 움직이는 소리만 따라가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소파 옆 암체어에 앉아, 낮고 일정한 목소리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문장 끝마다 같은 길이로 쉬고, 천둥이 울릴 때는 읽는 속도를 조금 늦췄다.
서재를 채운 규칙적인 음성에 맞춰 도혁의 거친 호흡도 서서히 길어졌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그의 미간이 풀리고, 무거운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시아는 도혁의 손끝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다음 장으로 넘겼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도혁의 고른 숨소리를 확인한 시아가 책을 덮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였다.
탁.
어둠 속에서 도혁의 뜨거운 손이 번개처럼 시아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거친 숨결과 함께 번뜩 뜨인 도혁의 짙은 눈동자가 시아를 절박하게 응시했다.
“가지 마.”
억눌린 도혁의 목소리가 서재의 정적을 갈랐다. 손목을 쥔 손은 뜨거웠고, 힘은 잠든 사람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절박했다.
시아의 맥박이 처음으로 일정한 박자를 놓쳤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가까이 맞물렸다.
연회장 사건 뒤, 신태국 일가에 대한 수사와 발할라의 특별 실사가 동시에 시작됐다. 감사팀은 몇 주에 걸쳐 태국홀딩스 계열사의 거래를 추적했다.예비 보고서에서 드러난 8,000억 원대 매출 부풀리기와 중복 담보는 시작에 불과했다. 해외 페이퍼컴퍼니를 통한 비자금 조성과 조세포탈 정황까지 확인되면서 신태국은 구속기소 됐다.신채린 역시 보석 절도 증거를 조작하고 시아에게 누명을 씌운 혐의, 불법 신원 조회를 지시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사건 전에 출동 지령을 받아 체포 절차를 서두른 형사 반장과 관련 경찰관들은 감찰 조사를 받았고, 정치권의 부당한 개입 경로도 수사 대상에 올랐다. 이후 1심에서 두 사람에게 중형이 선고됐다.범죄수익은 추징·환수 절차에 들어갔고, 태국홀딩스는 채권자 관리 아래 정상 계열사와 부실 회사를 분리한 뒤 청산 수순을 밟았다. 시아는 끝까지 개인 감정으로 결론을 앞당기지 않았다.태성중공업 투자 건에서는 공식적으로 회피 상태를 유지했다. 그 사이 태성중공업은 발할라 캐피털의 독립 심의위원회로부터 정식 실사를 거쳐 3조 원 규모의 유상증자 투자를 전격 유치했다.투자 유치 뒤 태성중공업은 유동성 위기를 넘겼고, 차도혁은 이사회의 지지를 받아 태성그룹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가 가장 먼저 손본 것은 가족이 경영과 인사에 사적으로 개입하던 관행이었다.한명숙은 이사회와 도혁의 집에서 모두 한 발 물러났다. 시아에게는 변명 없이 사과문을 보냈고, 직접 만나고 싶다는 요청도 시아가 허락할 때까지 기다렸다.시아는 사과를 받아들이되 없던 일로 만들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다정한 고부 사이보다, 지켜야 할 선을 아는 가족에 가까워졌다.***그리고 1년 뒤, 5월의 화창한 봄날. 두 사람의 결혼식은 서울의 한 프라이빗 가든에서 열렸다.시아가 가장 오래 바라본 사람은 단상 끝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도혁이었다. 도혁은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도 태연하던 사람답지 않게 손끝을 굳게 말아 쥐고 있었다.시아가 가까워지자 그가 아주 작게 물었다.
“나한테도 전부 거짓말이었습니까?”도혁의 물음이 텅 빈 대연회장에 낮게 울렸다. 배신감보다 더 큰 것은 자신이 시아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가난한 하우스키퍼라 지레짐작해 명품 가방을 몰래 넣고, 월 2,000만 원이면 생활고를 덜어줄 수 있다고 믿었던 일이 차례로 떠올랐다. 시아가 그 모든 행동을 재미있는 구경거리로만 여겼을까 봐 견디기 어려웠다.도혁은 마른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구었다.“당신 눈에는 내가 얼마나 우스웠겠습니까. 10조를 가진 사람 앞에서 몇 푼으로 지켜주겠다고 나섰으니.”시아는 도혁의 앞으로 다가왔다. 넓은 연회장에는 이미 두 사람뿐이었다.시아는 그의 정면에 서서 바로 답했다.“처음 시작은…… 거짓말이 맞았습니다.”시아의 낮고 맑은 음성이 도혁의 귓가에 닿았다. 도혁의 단단한 어깨가 눈에 띄게 굳어졌다.“3년 동안 하루 2시간도 제대로 못 자며 일했습니다. 사람을 만나면 먼저 계산부터 의심하게 됐고, 청소하고 물건을 정돈할 때만 머리가 조용해졌어요. 그래서 신분을 숨기고 당신 집에 들어갔습니다.”시아는 도혁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했다.“회장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 건 거짓말이 맞아요. 하지만 이름과 나이도, 청소가 좋다는 말도, 당신 곁에서 편해졌다는 마음도 거짓이 아닙니다.”도혁의 눈꺼풀이 떨렸다.“나를 불쌍해서 받아준 겁니까?”“아니요.”시아는 망설이지 않았다.“처음에는 고용주였고, 그다음에는 잠을 걱정하게 되는 사람이 됐고, 지금은 좋아하는 사람입니다.”도혁은 한참 뒤에야 물었다.“그럼 왜 끝까지 말하지 않았습니까?”시아의 시선이 처음으로 조금 내려갔다.“당신이 내 직함을 알기 전의 강시아를 어떻게 대하는지 더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사실을 말한 순간 지금의 관계가 끝날까 봐 겁났어요.”시아가 먼저 두려웠다고 인정한 것은 처음이었다.“그렇다고 당신의 선택권을 늦게 준 일이 정당해지는 건 아닙니다. 미안해요.”도혁은 곧바로 괜찮다고 하지 않았다. 상처가 없던
시아의 가늘고 하얀 손가락이 태블릿 화면 위에 머물렀다. 신태국과 신채린은 숨이 멎을 듯한 공포 속에서 시아의 손끝만을 응시했다.승인 버튼을 누르면 기사회생이지만, 거절을 누르면 계열사 전체가 유동성 위기에 빠진다. 하지만 시아의 손가락은 승인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그녀는 차분하게 화면을 밀어내며 비서실장을 향해 지시했다.“승인 보류.”신태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강 회장님, 오늘 일과 투자 판단은 별개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그래서 거절하지 않은 겁니다.”시아의 목소리는 낮고 분명했다.“승인 보류. 발할라 국제 감사팀과 외부 회계법인을 투입해 태국홀딩스 전 계열사 특별 실사를 시작하세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신규 자금 집행은 중단합니다.”“다만 직원 급여와 정상 납품 대금은 별도 관리 계정으로 분리하세요. 대주주의 사적 인출만 막고 운영 자금까지 끊지는 않습니다.”그 아래에서 일하는 직원들까지 벌줄 생각은 없었다.“그건 사실상 사형 선고요! 감정적인 보복 아닙니까?”“발할라의 자금은 누군가의 정치적 방패가 아닙니다. 투자 가치가 있는지부터 원칙대로 검증하죠.”시아는 화면에 표시된 위험 항목을 하나씩 열었다.“실사는 신청 회사가 발할라와 체결한 약정에 포함돼 있습니다. 자료가 정상이라면 지원안은 다시 심사됩니다. 문제가 있다면 오늘 일이 없어도 자금을 받을 수 없고요.”신태국은 더 반박하지 못했다. 발할라는 차환 심사를 위해 태국홀딩스의 재무제표와 담보 자료를 이미 확보한 상태였다.자료는 실사 서버에 모였다. 1시간 뒤 나온 것은 확정 판결이 아니라 예비 보고였다.계열사 사이에서 반복된 매출 8,000억 원, 같은 부동산을 여러 차례 담보로 잡은 정황, 해외 페이퍼컴퍼니로 흘러간 자금. 제출 자료만 대조해도 설명되지 않는 구멍이 너무 컸다.비서실장이 연회장 한쪽에서 보고서를 읽었다.“허위 재무정보 제출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존 대출 1조 2천억 원도 약정 위반 여부를 심사해야 합니다.”시아는 곧바로 지시했다.“추가 인출
“회, 회장님……?”신채린은 입을 벌린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도둑으로 몰아세운 하우스키퍼 앞에 발할라 임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그 여자가 개인 자산 10조 4,000억 원을 보유한 발할라 캐피털의 최대주주이자 회장이었다. 연회장의 웅성임이 한순간 끊겼다.“저분이 얼굴을 공개하지 않기로 유명한 강시아 회장이었어?”“발할라 의결권 지분을 혼자 쥔 그 최대주주 말이야?”하객들의 휴대전화 화면에 발할라가 방금 배포한 신원 확인 보도자료가 떴다. 그동안 이니셜로만 알려졌던 최대주주의 실명, 강시아와 직함, 자산 규모가 처음으로 함께 공개돼 있었다.누군가 촬영 영상을 지우려 하자 시아가 법무팀에 말했다.“현장 영상은 증거가 될 수 있으니 강제로 삭제시키지 마세요. 제 얼굴을 상업적으로 유통할 때만 정식 절차로 대응하고요.”법무팀장이 고개를 숙였다. 형사 반장은 수갑을 집어넣고 증거 보존 절차부터 다시 지시했다.한명숙 여사는 충격과 공포로 호흡 곤란을 일으키며 비틀거리다 소파를 짚고 주저앉았다.“바, 발할라의 총수 강시아……? 그 10조 자산가가 왜 내 아들 집에서 걸레질을 하고 있어……!”시아는 한명숙의 질문에 시선을 돌렸다.“제 개인 일정입니다.”그 한마디로 설명은 끝이었다. 백지수표를 내밀며 얼마면 나가겠느냐고 묻던 사람이, 이제는 시아가 왜 자기 아들 집을 선택했는지조차 감히 캐묻지 못했다.한명숙은 자신이 수표에 적힌 ‘0원’을 조롱했던 순간을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가장 말을 잃은 사람은 차도혁이었다.도혁은 멍하니 눈앞의 시아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생활고에 시달린다고 지레짐작해 에르메스 가방과 다이아몬드 시계를 서랍에 넣고, 월 2,000만 원이면 마음을 놓을 거라 믿었던 여자였다.방탄 세단을 거절한 이유도, 법인 카드에 관심이 없던 이유도 이제야 너무 명확했다. 그런데 시아는 그 모든 오해를 비웃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준 가방을 선물이라는 이유로 받아줬다.그 사실까지 떠올리자 도혁의 얼굴이
“3분? 교도소로 끌려갈 시간이라도 세는 거니?”신채린은 콧방귀를 뀌며 형사들에게 손짓했다.“반장님, 뭐 해요? 당장 체포하세요!”형사 반장이 도혁에게 비켜서라고 경고한 순간, 시아의 손목시계가 짧게 진동했다. 오후 7시.정지돼 있던 보안 채널이 열리고 현장 기록 전송 완료 표시가 떴다. 도혁이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바깥에서 굵은 회전익 소리가 가까워졌다.두두두두—!성북동 저택의 통유리창이 낮게 떨렸다. 한명숙과 신채린, 하객들이 일제히 창밖을 돌아봤다.검은 헬기 한 대가 인근 전용 헬리포트로 고도를 낮추고 있었다. 동체에는 발할라 캐피털의 금빛 문장이 선명했다.“발할라 전용기……?”신태국 의원이 사색이 되어 중얼거렸다. 곧이어 검은 세단 6대가 정문 검색대를 통과해 대연회장 앞에 멈췄다.먼저 내린 발할라 보안팀이 태성가 경호 책임자에게 신원을 제시했고, 뒤이어 법무팀과 디지털 포렌식 담당자들이 들어왔다. 누구도 무기를 들거나 길을 막지 않았다. 대신 현장 책임 변호사가 형사 반장 앞에 증거 보존 요청서와 변호인 선임계를 내밀었다.“강시아 씨의 대리인입니다. 체포 절차를 진행하기 전에 새로 확보된 증거와 현장 훼손 정황부터 확인해 주십시오.”형사 반장이 서류를 받아드는 사이, 발할라 한국 지사 대표와 아시아 투자 총책임자, 비서실장이 빠른 걸음으로 연회장에 들어왔다. 비서실장은 손에 든 태블릿을 켜며 연회장 메인 스크린에 전송했다.첫 화면에는 역추적을 확인한 블랙오션 대표가 법무팀에 제출한 의뢰서와 결제 영수증, 전날 발할라 보안망에 접속한 기록이 떴다. 다음 화면에는 연회장 서비스 통로의 독립 백업 영상이 재생됐다.정전 직전, 채린의 수행비서가 보석 감정사에게 봉투를 건네고 비상 전원실로 들어가는 모습. 암전 중에는 같은 수행비서가 시아와 부딪친 뒤 열린 가방 안으로 목걸이를 밀어 넣는 장면이 적외선 카메라에 남아 있었다.시아의 손목시계가 기록한 충돌 시각과 영상의 타임코드도 일치했다. 마지막으로 경찰 출동 요청이 보석 분실 신
80억 원짜리 블루 다이아몬드 목걸이 ‘바다의 눈물’이 대리석 바닥 위로 떨어져 짧은 금속음을 냈다. 푸른 보석이 조명 아래서 번뜩이자 성북동 태성가 본가 대연회장이 일시에 조용해졌다.“저 여자 가방에서 나온 거 맞지?”“세상에, 80억짜리를…….”경악과 멸시가 뒤섞인 수군거림이 연회장에 번졌다. 신채린은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빼도 박도 못할 현장 물증이 나왔어요! 저 천박한 도둑년이 태성가의 고가 보석을 훔친 게 만천하에 드러났다고요!”한명숙 여사 역시 시뻘겋게 상기된 얼굴로 삿대질을 해댔다.“천하의 더러운 손버릇을 가진 계집 같으니! 감히 태성가 자선 연회에서 80억짜리 보석을 훔쳐? 당장 경찰 불러! 수갑 채워서 끌고 가!”연회장 정문이 열리며 인근에서 대기하던 형사와 경찰관 6명이 들어왔다. 신태국 의원실 신고는 분실 확인 전에 접수돼 있었다.형사 반장은 현장 보존이나 목격자 분리보다 수갑부터 꺼내 들고 시아에게 다가왔다. 정전이 끝난 뒤 경찰이 연회장에 들어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2분 43초였다.성북동 관할 순찰차가 신고를 받고 출동해 도착하기에는 지나치게 짧았다. 시아는 천장 카메라와 형사 반장의 보디캠을 차례로 확인했다.“출동 지령 접수 시각을 말씀해 주시죠.”반장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피의자가 따질 일이 아닙니다.”“그럼 지금 답변도 기록에 남겠군요.”하객들이 휴대전화를 들어 촬영하자 반장은 입술을 굳혔다. 채린은 체포를 재촉했다.“강시아 씨, 고가 보석 절도 혐의 현행범으로 체포합니다.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으며 묵비권을—”시아가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가방은 제가 독점 관리하지 않았고, 강제 수색 전에 사진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쇼케이스와 비상 전원 기록부터 보존하세요.”“그건 조사실에서 말하십시오.”반장의 대답은 지나치게 빨랐다. 시아의 시계는 그 목소리까지 기록했다.“그 더러운 손 치워!”연회장 입구를 가르고 벼락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숨을 헐떡이며 들이닥친 차도혁이 인파를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