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사랑한 건 죄였어요.”유시아가 말했다.“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거예요.”유시아는 임재욱을 3년간 사랑했다. 그녀는 그를 온 마음을 다해 미친 듯이 사랑했지만 결국 얻은 것이라고는 3년간의 옥살이와 자격이 없다는 그의 말뿐이었다.임재욱이 사랑하는 여자가 죽자 유시아는 숨을 쉬는 것조차 죄가 되었다.울면서 웃는 유시아의 얼굴을 바라보면 임재욱은 왠지 모르게 옛 기억이 떠올랐다. 아기 새처럼 피곤한 줄도 모르고 자신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던 유시아가 말이다.“재욱 오빠, 날 좋아하면 죽기라도 해요?”당연히 아니었다.결국 임재욱은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한 임재욱은 유시아를 누구보다도 아껴주었고 심지어 그녀 대신 누명을 써서 5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남은 것이라고는 이미 떠나버린 유시아와 이혼합의서 한 장뿐이었다.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법이라는 걸.그가 사랑받게 될지 아니면 슬픔을 얻게 될지는 전부 유시아에게 달려있었다.
더 보기적나라한 협박에 용재휘는 순간 언짢았다.아직 어린 나이라 임재욱과 맞설 능력은 되지 못한다.그렇다고 하여 고개를 숙이고 싶지는 않아 바로 치고받았다.“얼마 전에 이혼하셨다던데, 이혼하자마자 시아 씨 찾는 거예요? 시아 씨는 몇 번째인가요? 임 대표님 여자 중에서 한 5위안에는 드나요?”“저랑 시아 사이의 일이니, 간섭하지 마세요.”화를 억누르고 있는 듯했지만, 그런대로 말투는 꽤 평화로웠다.“그쪽에 없다고 하니 그만 끊을게요.”끊어진 전화를 보면서 용재휘는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다.이윽고 몸을 돌려 다시 식탁으로 돌아가 밥을 먹으라고 했으나.고개를 돌리자마자 사색이 되어버린 유시아의 얼굴을 보게 되고 만다.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언제 나타났는지 모르겠지만, 조금 전 통화 내용을 들은 것 같은 눈치다.용재휘는 순간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시아 씨...”“그 사람이죠?”유시아는 가능한 한 평온하게 들리게끔 천천히 입을 열었다.“임재욱한테서 온 거 맞죠?”용재휘는 망설이다가 별거 아닌 것처럼 웃었다.“여기 있는 거 모를 거예요. 그냥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 온 것 같은데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편하게 쉬고 있어요. 설마 함부로 쳐들어오기까지 하겠어요.”그 말을 듣고서 마음이 평온해진 것이 아니라 더더욱 흔들리기 시작했다.충분히 쳐들어오고도 남을 사람이니.전에 홀로 밖에서 지내고 있을 때 임재욱은 수시로 찾아왔었다.갑자기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놀라게 했었다.그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돈이 있고 세력까지 있는 그에게 주어진다면 그토록 쉬운 일로 변해버린다.유시아는 아주 민감하게 촉이 왔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는 것.용재휘한테 피해만 줄 것이라고 단번에 확 느껴졌다.저녁, 유시아는 침실 침대에 누워 내내 불안해했다.머리가 아직 아프지만 며칠 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진 축이다.이젠 슬슬 용재휘의 곁을 떠나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정운시에서 유시아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고 지금껏 집에 머물도록 해
유시아는 그제야 천천히 몸을 일으키면서 의자를 다시 조절했다.아직도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뒤로 한 번 보았는데, 마이바흐가 보이지 않자 서서히 진정을 되찾게 되었다.그전까지만 해도 임재욱에 대한 두려움과 역겨움으로 만나고 싶지 않았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를 바탕으로 임재욱에 대한 미안함이 더 해진 상황이다.정유라의 아이에 대해서 뭐라고 해명할 길도 없다.임재욱에게 있어서 그녀는 또다시 임재욱의 차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자로 변했을 것이다.그의 편견과 오해는 유시아에게 있어서 숨통을 조여오는 가쇄와 다름이 없다.목을 단단히 조여 고개를 들 수도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시아야.”심하윤이 운전을 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런 유시아의 모습을 보면서.“이렇게 숨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임재욱 저 사람이 포기하지 않고 널 찾고 있다면 언젠가는 찾아내고 말 거야.”심하윤은 아직도 유시아가 용재휘와 함께 해외로 떠나 다시 시작했으면 한다.앞으로 심씨 가문에 관련된 일들도 복잡한 분쟁들도 더 이상 유시아에게 엮지 않게끔.유시아는 아랫입술을 살포시 사리물었다.“나중에 다시 얘기해요.”용재휘 따라 해외로 떠나는 건 그 누가 봐도 좋은 선택이다.하지만 만약 임재욱이 그 행적을 알게 된다면 용재휘한테 불꽃이 튕길 것이 뻔하다.그래서 지금 도망갈 수도 그렇다고 임재욱을 찾아갈 수도 없는 것이다.짐승한테 몰려 벼랑 끝으로 서 있는 사람처럼 짐승에게 먹히거나 아니면 두 눈 감고 떨어지거나 그러한 상황이다.저녁, 용재휘가 화실에서 돌아왔고 심하윤은 집으로 돌아갔다.유시아 혼자 집에서 깨끗이 청소하고 저녁상까지 차렸다.깨끗해진 집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 식탁 위를 보면서 용재휘는 절로 웃음이 났다.“시아 씨 실은 우렁각시죠? 몰래 청소도 해주고 밥도 해주고 말이에요.”유시아는 소파에 앉아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너스레 떠는 그의 말에 덩달아 같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며칠 동안 신세도 많이 지고 해서 미안해서요. 마
“청아야...”책망하는 듯한 눈빛으로 임청아를 바라보더니 임태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나가 있어. 쟤랑 할 말 있으니.”“...”속으로 무척이나 달갑지 않지만, 임태훈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습관이 있는 임청아이다.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병실에서 나와 밖에서 기다렸다.병실 안에는 또다시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임재욱은 침대 머리로 다가와 앉아 입을 열었다.“괜찮으세요? 의사는 뭐라고 하던가요?”“아직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 거라.”“유시아는? 찾았어? ZH 빌라에서 아무것도 못 찾아냈어?”호기심을 가지고 물어보는 듯한 그의 말투에 마치 유시아의 실종이 자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만 같았다.임재욱이 덤덤하게 대답하는데.“만약 할아버지께서 거짓말을 하신 게 아니시라면 정말로 ZH 빌라에 시아를 버리신거라면 지금 아마 살아있을 거예요.”“살아있으면 됐어. 명줄이 긴 아이인가 보네.”말하면서 임태훈은 가볍게 씩 웃기까지 했다.“신서현보다는 복이 좀 있는 편인가 봐, 아직 살아 있는 걸 보면...”임재욱은 그런 그를 흘겨보고는 또다시 입을 열었다.“자꾸 서현이 일에 대해서 언급하지 마세요. 서현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 서현이는 서현이고 시아는 시아예요. 그 정도는 똑똑히 할 수 있단 말이에요.”전에 유시아한테 잘해 주려고 마음만 먹으면 임태훈은 지금처럼 신서현을 언급하고 그랬었다.신서현으로 유시아 그리고 유시아 아버지에 대한 원한을 되새기라는 뜻으로.하지만 임태훈이 아무리 이간질한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어졌다.임태훈은 허허 웃었다.“그래. 이해할 수 있어. 모든 걸 버리고 여자를 선택하겠다는 거잖아.”“아니요.”임재욱은 눈을 가늘게 뜨고 병상에 누워있는 임태훈을 바라보며 덧붙였다.아주 무심해 보이는 듯한 눈빛과 그러한 뉘앙스로.“여자도 사업도 모두 손에 넣을 거예요. 유시아도 대우 그룹도.”“그래. 대우 그룹은 이미 네 손에 건너갔으니, 앞으로 상관하지 않
채경숙의 행위에 대해 심하윤은 무척이나 부끄러웠다.하지만 이득을 얻은 입장이고 채경숙의 딸이기도 하기에 차마 뭐라고 할 수도 없어 몰래 토지 양도 계약서를 가지고 임재욱을 찾아간 것이다.만약 유시아에 대해서 채경숙이 알게 된다면 임재욱한테 알릴 가능성도 있다.유시아를 또다시 임재욱 그 악마 같은 남자한테 돌려보내게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다.일단은 속일 수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보려고 한다.“그만 놀고 리안 클럽으로 와 봐. 엄마 지금 친구들이랑 티 타임 가지고 있는데 미연이가 너한테 좋은 남자 소개해 준데. 어서 와서 한 번 만나보고 가.”살짝 언짢은 심하윤은 바로 거절해 버렸다.“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어요. 연애하고 싶지도 남자 만나고 싶지도 않다고요. 저 필요 없으니 제발 좀 신경 꺼주세요.”“너 그러다가 노처녀 소리 들어! 언제든 가야 할 건데 좋은 임자 있으면 일찍 차지해서 가는 게 맞지...”비록 심씨 가문의 상황은 많이 좋아지고 있지만 전에 당했던 일들로 심하윤을 호시탐탐 노리던 채권자의 모습을 떠올리면 채경숙은 여전히 소름이 돋곤 한다.내일을 알 수 없는 ‘전쟁터’에서 오늘 벌었다고 하여 내일 꼭 번다는 소리도 없다.그러므로 심씨 가문 현재 상태가 괜찮을 때 알맞은 사람으로 찾아 심하윤을 시집보내려고 하는 것이다.훗날 갑자기 또다시 힘든 상황에 부닥쳐 지더라도 심하윤에게는 처가댁이 있으니, 전처럼 그렇게 외롭게 동떨어져 있지 않아도 된다.하나뿐인 귀한 딸이니 그녀의 미래에 대해 잘 안배해 주려는 것이다.심하윤 또한 채경숙의 마음을 알고 있으니 순순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때마침 유시아가 검사실에서 걸어 나왔다. 심하윤은 다급하게 몇 마디하고서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나중에 다시 얘기해요.”그러고는 유시아를 향해 걸어갔는데.“시아야, 어떻게 됐어?”“이제 막 CT 촬영했어요. 좀 있으면 결과 나올 거예요.”“그럼, 저기 휴게실에서 좀 기다리고 있자. 뭐 마시지 않을래? 밀크티 어때?”심하윤이 웃으며 그
심하윤의 말을 듣고서 유시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순간 뭐라고 할지 몰랐는데.그전까지만 해도 유시아와 심하윤과 같은 마인드였다.아빠의 차에 신서현이 치이고 죽고 나서 유시아는 3년간의 감옥 생활로 임재욱에게 그 빚을 갚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소현우가 죽고 나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빚이 있다는 것을.소현우는 유시아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심지어 목숨으로 바꿀 수 있는 그런 남자다.임재욱이 무엇을 하든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더라도 절대 그 빚을 갚을 수 없다.마찬가지로 임재욱에게 있어서 신서현이 바로 그러한 존재이다.유시아는 임재욱에게 빚진 게 없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그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아빠가 차로 치어 죽고 정유라와의 아이까지 자기 손에 죽었으니 그 어떠한 방식으로도 두 사람의 목숨을 갚을 수 없는 것이다. 수심이 가득한 유시아의 모습을 보고서 심하윤은 그녀의 작은 손을 잡았다.“시아야, 그만 생각해. 신서현은 이미 죽었고 임재욱 일은 앞으로 너랑 아무런 상관도 없어. 넌 그냥 빠른 시일 내로 건강 회복하기만 하면 돼. 해외로 나가든 말든 정운시에 계속 남든 말든 난 언제나 네 편이야.”유시아는 고개를 들어 진지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며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 하윤 언니.”“그런 소리 하지 마.”심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우리 집안을 위해 그런 일까지 했는데, 난 이보다 더한 것도 해 줄 수 있어. 그러니 앞으로 절대 나한테 고맙다는 소리 따위 하지 마.”유시아는 살짝 놀라긴 했지만,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우리 사이가 얼마나 돈독한지 잠깐 깜빡했어요.”손을 내밀어 핏기 하나 없는 유시아의 얼굴을 만지고 나서 심하윤은 입을 열었다.“그럼, 아침 좀 먹고 쉬고 있어. 오후에 병원으로 갈 거야. 재검사하러 오라고 병원에서 전화가 왔었어.”유시아의 현 상황으로서는 응당 입원해야 한다.걱정이 앞선 심하윤이 말린 것이다
마지막 한마디를 듣고 난 뒤 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신서현에 관해서 이러한 소리를 들은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정월 대보름에 클럽 룸안에서 도승우라고 하는 재벌 2세가 많은 이들 앞에서 신서현의 스트립쇼에 대해 평가한 적이 있다.그로 인해 임재욱의 손에 죽을 뻔도 했었고.그리고 지금, 심하윤 역시 같은 뉘앙스로 신서현을 언급하고 있다.‘천한 X’은 말 그대로의 뜻인데, 그렇다면...유시아는 고개를 번쩍 들어 심하윤을 바라보았다.“하윤 언니, 신서현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어요?”“꽤 많이.”심하윤은 꿀꺽 침을 삼키더니 운을 떼기 시작했다.“우리 아빠 친구가 엔터테인먼트를 운영하고 계시는데 연예인들이 엄청 많아. 그래서 그쪽 업계에 대해서 좀 알고 있는 거야. 신서현은 겉으로 보기에만 청순하지 사생활은 입에 담기 버거울 정도야. 스폰서도 엄청 많고 이 남자 저 남자랑 마구 자는 것도 그리 놀라운 것도 아니야. 같은 여자로서 부끄러울 정도로 천하고 마지노선이 없어. 노래며 연기며 뭐 하는 잘하는 것 없는데, 대중들 앞에 보여 준 모든 것들을 잠자리로 바꾼 거래.”“...”유시아는 어느새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일반인에게 있어서 연예계는 단지 눈으로 보인 것이 전부다.전에 신서현에 대해 알아본 것도 사이트와 기사 보도에 적힌 것이 전부였다.기사에서 신서현은 청순한 이미지를 지닌 노력형 배우로서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며 마음이 더없이 넓고...단점 하나 없는 사람으로 포장되어 있었다.회사에서 소속 연예인의 콘셉트를 잡고 그와 관련된 허위 사실을 마구 지어내 콘셉트를 유지하게끔 하는 걸 유시아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다만 신서현이 심하윤한테서 그러한 이미지인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세상 천박한 여자로 각인되어 있었으니.유시아는 순간 뭐라고 하면 좋을지 몰랐다.도승우의 말까지 다시 떠올려보니 신서현이 살아 있을 때 정말로 그러한 사람으로 살았던 것만 같았다.하지만 그 모든 걸 임재욱은 알고 있을까
유시아는 밤새 잠을 설쳤다.정유라 사건 이후로 유시아는 종종 악몽에 시달리곤 했다.폭발 소리, 폐허, 그린레이크 문 앞...실수로 정유라를 밀친 화면, 유산으로 바닥에 피가 낭자한 광경, 끊이지 않은 아이의 울음소리...그렇게 오랫동안 유시아는 유산한 사람이 대체 정유라인지 아니면 자기인지 심하게 착각할 정도였다.두 사람 모두 임재욱의 아이를 품었었고 똑같이 아이를 잃었으니.밤새 몇 번이나 악몽에서 깨어나서 또다시 잠들었는지 다음 날 아침 유시아는 정신이 흐리멍덩했다. 다크서클도 턱 밑까지 내려오고.용재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장난삼아 말했다.“어머, 판다가 우리 집에도 있었네요? 시아 씨 지금 판다 같아요. 동물원에 넘기면 부르는 게 값일 거예요.”너스레 떠는 그의 농담에 유시아의 입가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한참을 웃다가 유시아는 순간 가슴 한쪽 곁이 미어져 왔다.심씨 가문을 위해 임재욱과 그런 거래하여 대출도 땅도 대신 얻어왔으니 그만하면 꽤 값어치가 있는 게 아닐까?표정이 한껏 어두워진 유시아를 바라보며 용재휘는 말실수한 것 같다는 거 알아차렸다.멋쩍은 말투와 어색한 모습으로 다급히 입을 여는데.“어... 난 이만 화실에 가봐야 해요. 그리고 누나는 아침 일찍 조식사러 나갔어요. 이제 곧 올 것 같은데...”말하면서 그는 자기 태블릿을 유시아에게 건네주었다.“심심하면 게임이라도 좀 하고 있어요. 누나 오고 나면 아침 먹어도 되니 좀 만 기다리고 있어요. 그럼, 먼저 가 볼게요.”용재휘가 떠나고 홀로 방안에 남겨진 유시아는 지루하기 그지없었다.심심하기도 하여 용재휘의 태블릿을 열었는데, 다소 놀라운 것들을 보게 된다.배경 화면이 유시아인 것은 물론이고 그 사진은 심지어 유시아가 18살 때 찍었던 프로필 사진이다.일찍이 유시아는 그 사진을 SNS에 올린 적이 있다.그때 그 SNS를 로그오프한 지 한참 되었으나 용재휘가 그 사진들을 가지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옛 사진을 바라보며 유시아는 살짝 웃었다.그러고는 아
만약 심하윤이 목격하고 뒤따라 가지 않았더라면 유시아는 이미 말 그대로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다시 그때 그 상황을 떠올려보니 저절로 살이 떨리는 심하윤이다.지금으로서는 용재휘가 있는 이곳이 가장 안전해 보인다.심하윤은 유시아의 작은 손을 잡고 감개무량한 듯이 운을 떼었다.“시아야, 전에 일들에 대해서 엄마한테 들었어. 미안해... 진심으로. 우리 집안 때문에 네가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비록 심하윤도 그 계약서를 가지고 유시아를 놓아달라고 임재욱을 찾아간 적이 있지만,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심지어 유시아에게 우환까지 안겨다 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내내 자책하며 미안해했다.그렇다고 하여 해결할 방법 따위는 없었다.그러나 이번이야말로 좋은 기회인 듯싶었다.다시 임재욱의 곁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될뿐더러 임재욱과 심씨 가문 사이에서 등이 터지지 않아도 된다고.유시아는 야식을 간단하게 먹고서 다시 침대에 올랐다. 옆에는 심하윤도 함께했다.가장 친하게 지냈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메인 침실을 기꺼이 내준 용재휘는 거실 소파에서 자고.“시아야, 오늘 외삼촌한테서 전화가 왔었어. 재휘가 다시 해외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심하윤은 말하고서 몸을 돌렸다.스탠드의 불빛에 은은하게 비친 유시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계속 덧붙였다.“너도 같이 갔으면 해. 나도 그랬으면 좋겠고. 어쩌면 너한테 있어서 좋은 기회일지도 몰라. 해외로 나가서 일하고 그림도 그리고 계속 학교에 다녀도 되고.”유시아는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재휘 씨랑 같이 가는 거예요?”“음. 재휘가 너한테 어떤 마음인지 너도 잘 알고 있을 건데?”흔들린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서 심하윤은 바로 몸을 일으켜 앉아 설득에 나섰다.“외삼촌은 지금 해외에서 회사를 운영 중이시고 외숙모도 현지에서 알아주는 대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일하고 계셔. 다들 좋은 분들이시니 네가 가게 된다면 틀림없이 양팔 벌려 널 환영할 거야.”임재욱이 아무리 쫓아온다고 한들 해외로 쫓아오지는 않을 것이다.만약 그의
침실 안은 순간 더없이 밝아졌다.조금 전 유시아가 부주의로 깨버린 물 잔도 용재휘가 30분 전에 침대 머리에 놓았다.유시아가 하도 긴 시간 동안 혼수 상태에 빠져서 깨어나자마자 물을 찾을까 봐 걱정되는 마음에 그곳에 올려놓은 것인데.“시아 씨, 깼어요?”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용재휘는 부엌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깨끗한 흰 셔츠에 앞치마를 두르고 소매까지 거둔 모습으로.용재휘는 침실에서 소리가 나자마자 바로 달려온 것이다.“시아 씨, 괜찮아요? 좀 어때요?”손을 내밀어 이마를 짚고 미간까지 찌푸린 유시아가 대답하는데.“머리가 좀 아프네요.”그러자 용재휘는 바로 그녀를 도로 천천히 눕히고 안심을 주었다.“뇌진탕이 좀 있는데 큰일은 아니라고 그랬어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고 여기 가만히 누워있어요. 좀만 더 쉬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예요.”핏기 하나 없는 유시아의 예쁜 얼굴을 바라보면서 용재휘는 가슴이 미어졌다.지난번 병원에서 마주쳤을 때만 해도 지금처럼 초췌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그때는 얼굴에 살도 좀 있고 두 눈도 반짝반짝 빛이 났었다. 모든 걸 잃은 지금 이 모습과는 달리.활발하고 생기가 넘쳤던 유시아는 불과 며칠 만에 임재욱의 손에 살아있는 송장이 되어 버렸다.‘임재욱! 나쁜 놈!’용재휘는 아랫입술을 사리물고 다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시아 씨, 곰탕 끓이고 있어서 나 이만 부엌에 가봐야 해요. 잠시 쉬고 있어요. 거의 다 끓여가요.”유시아의 허락을 받고 나서야 용재휘는 유리 파편을 대충 치우고 부엌으로 달려갔다.가스레인지 불을 끄자마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는데, 심하윤이었다.밤바람이 따뜻한 계절에 심하윤은 베이지 코트를 입고 그렇게 나타났다.양손에 각종 영양제를 바리바리 챙겨서 허겁지겁 달려온 모습으로.“재휘야, 시아는 좀 어때? 깨어났어?”“조금 전에 깨어났어요. 곰탕을 좀 끓였는데 시아 씨한테 가져다주려던 참이었어요.”“알았어.”심하윤은 천천히 침실 문을 열었다.용재휘의 아파트에는 침실이 두 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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