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17화. 키스의 조건“다만 이 부분은 바꿔. 다음 투자자가 디자인을 담보로 달라고 하면 아르덴도 반대할 수 있게.”“내 권리를 지키겠다는 핑계로 거부권을 챙기시겠다고요?”“네가 반대할 때 같은 표를 던지는 조건으로.”채원은 펜을 들어 그 문장을 직접 고쳤다. 도현은 수정된 조항을 읽고 서류를 덮었다.“투자자 차도현은 제법 쓸 만하네요.”“다른 차도현은?”“평가 보류.”“기한은.”그 질문이 지나치게 진지해 채원은 농담으로 넘기지 못했다. 도현은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 절제가 또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오후에 루네로 돌아오자 홍보팀이 아르덴 창업자 간담회 자료를 가져왔다. 주최 측은 갈라 이후 처음 열리는 아르덴 주최 공동 일정에 선 두 사람을 메인 기사에 쓰고 싶어 했다.채원은 인터뷰 문항을 읽은 뒤 연애 관련 질문 세 개를 지우고, 루네 선주문 페이지의 연결 주소를 넣었다.“계약 연애도 판매 경로로 쓰겠다는 거야?”서민지가 물었다.“사람들이 내 사생활을 구경하러 올 거면 입장료는 내야지.”“차 대표가 좋아하겠네.”“그 사람 기분은 계약 조건에 없어.”하지만 도현은 수정안을 보고 어떤 문항도 되살리지 않았다. 차 안에서 그는 채원이 만든 연결 주소의 유입 예상치만 확인했다.“내 이름을 써도 돼.”“허락받으려고 넣은 거 아니에요. 오늘은 내가 차 대표님을 이용하는 날이니까.”“공평하네.”도현이 태블릿을 끄며 덧붙였다.“더 이용해도 돼. 네가 정한 범위 안에서는.”채원은 창밖으로 얼굴을 돌렸다. 무엇이든 줄 수 있다는 남자가 정작 자신이 가장 의식하는 한 걸음만 내딛지 않는 것이 못마땅했다.저녁에는 아르덴의 창업자 간담회가 있었다. 공식 연인 역할이 필요한 일정이라는 이유로 채원도 참석했다.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도현의 손이 그녀의 등 뒤를 따라 움직였다. 닿지 않았는데도 손바닥의 자리를 알 것 같았다.사진기자 한 명이 웃으며 주문했다.“두 분 조금만 더 붙어 주세요. 사이가 너무 정중해 보입니다.”채원이 먼저 반 걸음 다가갔다.
Last Updated: 2026-08-15
Chapter: 016화. 계약 15일째계약 15일째 아침, 채원은 식탁 위 달력을 뒤집었다.검은 펜으로 그어진 날짜가 정확히 절반에 닿아 있었다. 남은 15칸을 세는 동안 등 뒤에서 토스터가 튀어 올랐다.도현은 평소처럼 커피만 들고 나갈 차림이었다. 그런데 채원의 자리에는 버터를 바르지 않은 토스트와 블루베리 잼, 껍질을 벗긴 복숭아가 놓여 있었다.“복숭아 껍질까지 벗겼네요.”채원이 괜히 말했다.“손에 과즙 묻는 걸 싫어하잖아.”“먹는 데 지장 없는데.”“알아.”도현은 어젯밤 일을 꺼내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말려 주던 손도, 거울 속에서 입술로 떨어졌던 시선도 없었던 일처럼 셔츠 단추를 잠갔다.채원은 잼을 바른 칼을 접시 끝에 반듯하게 놓았다.“차 대표님은 아침 안 먹잖아요.”“오늘은 먹어.”그가 맞은편에 앉아 토스트를 집었다. 무슨 일이든 결정한 뒤에야 행동하는 남자였다. 채원이 밤마다 식탁에 남겨 둔 샌드위치의 포장이 다음 날 비어 있던 것도, 주방 한쪽에 그녀가 마시는 원두가 떨어지지 않았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그 사실을 깨닫자 식탁의 폭이 전보다 좁아 보였다.“오늘 투자 조건 협상은 11시야.”도현이 말했다.“대표님은 또 빠지시고요?”“응. 협상 끝날 때까지 밖에 있을게.”“그게 맞겠죠.”“그럴 줄 알았어.”도현이 컵을 들자 채원은 복숭아 조각을 필요 이상으로 잘게 나눴다.“협상보다 복숭아가 더 긴장되나?”채원은 포크를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아는 척하지 마요.”“이미 아는데 어떻게 그래.”그가 먼저 현관으로 향했다. 단정한 뒷모습이 사라진 뒤, 채원은 입도 대지 않은 복숭아를 포크로 오래 눌렀다.***조건 협상은 예상보다 거칠었다.아르덴 측은 30억 원을 제시하면서 매출 목표를 두 번 연속 놓치면 다음 투자자를 들일 때 먼저 승인을 받으라고 요구했다. 채원은 그 문장을 세 번 고쳐 돌려보냈다.“목표를 못 맞췄다고 다음 자금줄까지 아르덴이 고르면, 루네는 한 번 흔들린 뒤 영원히 묶입니다. 시장 전체가 얼어붙어도 똑같고요.”담당 심사
Last Updated: 2026-08-15
Chapter: 15화 · 투자자는 사랑하지 않는다채원은 서민지와 고객 주문지를 지역별로 다시 나눴다. 독립 편집숍에는 위탁 판매 대신 판매분 정산을 7일로 줄이고, 루네가 직접 고객 데이터를 공유하겠다고 제안했다. 물류 스타트업에는 빈 창고를 요구하는 대신 야간 집하량을 보장했다.가장 어려운 상대는 생산 공장이었다. 선주문 방식은 공장에 여러 번 라인을 바꿔야 하는 부담을 줬다.채원은 공장 대표 앞에 지난 3년 치 발주서를 펼쳤다.“최소 수량을 낮춰 달라는 부탁이 아닙니다. 12개 품목의 원단을 공용화하겠습니다. 재단 일정은 루네가 양보하고, 1차 대금은 사전 주문금이 들어오는 날 바로 지급하죠.”“세림도 빠졌다면서 뭘 믿고 갑니까?”“저를 믿으라는 말은 안 하겠습니다. 여기, 고객 6천 명에게 받은 출시 알림 신청입니다. 오늘 밤까지 8천을 넘기면 1차 생산을 진행해 주세요. 못 넘기면 제가 원단 예약금까지 책임지겠습니다.”마감 20분 전, 출시 알림 신청자는 9천 명을 넘겼다. 편집숍 아홉 곳이 팝업 진열에 합의했고, 물류사와는 수도권 당일 집하 계약을 맺었다.채원이 아르덴 심의실로 보낸 보완안의 마지막 장에는 세림 없이도 첫 달 고정비 대부분을 회수할 수 있다는 계산이 들어갔다.심사는 조건부 통과로 바뀌었다.조건은 합의한 선주문 전환율과 편집숍 다섯 곳의 확정 발주였다. 채원은 승인 메일을 직원들에게 그대로 공유했다. 축하 이모티콘이 쏟아졌지만, 그녀는 아직 투자금이 들어온 게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오늘은 살아난 날이 아니라 다음 문턱을 얻은 날이야. 주말에 쉬고, 다음 주에는 실제 주문으로 조건을 채우자.”말은 단단했으나 전화를 내려놓는 손에는 사흘 치 피로가 묻어 있었다.사무실을 나온 순간, 사흘 동안 참았던 비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우산은 서민지가 공장에 두고 왔고 호출한 차는 20분 뒤에나 도착한다고 했다.검은 세단 한 대가 길가에 멈췄다. 뒷문을 연 도현이 채원을 바라봤다.“타.”“오늘은 대표님 기사까지 하세요?”“계약 상대가 감기 걸리면 일정이 꼬여.”채원은
Last Updated: 2026-08-14
Chapter: 14화 · 48시간의 불빛《너를 삼킨 밤의 계약》014화. “한마디쯤 보태 줄 수 있었잖아요.”“그러길 바랐어?”채원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도현의 눈에 아주 얕은 빛이 스쳤다. 그녀가 기대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은 사람의 눈이었다.“투자자는 사랑에 빠지면 안 됩니다.”채원이 먼저 선을 그었다.“그래서 빠졌어.”도현은 빈틈도 주지 않고 답했다.“심사에서만.”도현은 곁에 기다리던 한지혁을 돌아봤다.“8년 전 태강이 내게 보낸 투자 제안과 익명 서버 지원금 경로를 확인해 주세요.”채원의 걸음이 잠깐 느려졌다. 지혁이 이유를 묻자 도현은 그녀가 들을 수 있는 거리에서 답했다.“서로 기억하는 마지막이 다르니까.”그가 지나간 뒤에도 채원은 한동안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12일째 오후, 세림리테일에서 계약 해지 통보가 왔다.루네 매출의 38퍼센트를 맡던 온라인 유통사가 다음 시즌 입점을 전면 취소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확정한 물량에 대해서는 위약금을 물겠지만, 메인 화면과 물류 창고를 내줄 수 없다고 했다.서민지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며 이를 갈았다.“태강캐피탈이 세림에 납품업체 금융을 묶어 줬대. 이태준이 우리 하나 빼겠다고 세림 숨통을 잡은 거야.”“위약금 받으면 한 달 급여는 막아.”“그 뒤는?”“지금부터 만들면 돼.”채원은 화이트보드에서 세림리테일 로고를 지웠다. 그 아래에 자사몰, 사전 주문, 독립 편집숍, 당일 배송권역을 새로 적었다.저녁 7시, 아르덴 회의실에서 열린 추가 검토는 처음보다 더 차가웠다. 심사위원들은 최대 판매처가 사라진 회사에 투자할 근거를 요구했다.도현은 이번에도 의결석에 앉지 않았다. 대신 별도의 정보 제공자로 들어와 채원 맞은편에 섰다.“세림의 해지 통보는 유감입니다.”그의 말투에는 사적인 온기가 한 조각도 없었다.“아르덴이 확보한 독립 편집숍의 가동률과 지역별 물류 단가를 공유하겠습니다. 연락처는 제외합니다. 법무팀은 세림의 위약 조항과 태강캐피탈의 개입이 공정거래상 문제인지 검토하죠.”한
Last Updated: 2026-08-14
Chapter: 13화 · 연인의 자격“용기까지 내면서 날 찾아온 이유가 뭔데요.”채원이 서재 책상 위에 놓인 루네의 분석 자료를 덮었다. 표지에 찍힌 날짜는 3년 전이었다. 브랜드가 첫 쇼룸을 열기도 전, 채원이 직원 셋과 밤을 새워 온라인 판매를 시작하던 무렵이었다.도현의 손끝이 닫힌 표지 위에 잠깐 머물렀다.“투자할 가치가 있었으니까.”“회사 얘기 말고요.”“그 답이 내일 네 숫자를 더럽히게 하고 싶지 않아.”“아주 편리하게 미루네요.”도현이 자료를 그녀 쪽으로 밀었다.“내일 심사에는 네가 낸 자료만 올라가. 나는 질문도, 표결도 하지 않아.”“대표가 빠져도 돼요?”“내가 들어간 순간, 심사는 네 숫자보다 우리 관계부터 봤을 테니까.”계약 8일째 밤이었다.다음 날 오전, 아르덴파트너스의 투자심의실에는 일곱 명이 앉아 있었다. 긴 테이블 맨 끝에 도현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채원은 준비해 온 샘플 행어를 세우고도 한동안 그 빈 의자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이해충돌을 피하기 위해 의결에서 빠질 거라는 통보는 회의 시작 10분 전에 한지혁이 전했다.특혜를 원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도현이 아예 나타나지 않자, 매끈하게 정리한 숫자 어딘가가 느슨해진 것처럼 기분이 거슬렸다.심사위원 한 명이 물었다.“윤 대표님 개인 채무와 거주 문제가 당사 대표와 얽혀 있습니다. 루네 투자 판단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채원은 리모컨을 내려놓았다.“그 질문이 나올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스크린에 지분 구조와 자금 사용처가 떴다. 채원은 아르덴이 가져갈 수 있는 지분의 한도와 자신이 지킬 의결권, 디자인과 상표를 넘기지 않는 조건을 차례로 짚었다.“제 개인 사정은 투자 근거가 될 수도, 투자 철회 사유가 될 수도 없습니다. 아르덴이 사는 건 제 곤란이 아니라 루네가 앞으로 만들 현금 흐름이어야 하니까요.”다른 위원이 팔짱을 풀었다.“그 현금 흐름을 설명해 보시죠. 기존 백화점 매출이 빠지면 3개월 뒤 운전자금이 바닥납니다.”채원은
Last Updated: 2026-08-14
Chapter: 12화 · 다시 나타날 용기낯선 집에 두 사람의 습관이 조금씩 생겼다.8일째 밤, 채원은 다음 날 투자 심사에 쓸 자료를 출력하려 서재에 들어갔다. 도현은 전략회의 중이라 늦는다고 했다. 프린터 아래 서랍에서 여분 용지를 찾다가 ‘LUNE’이라고 적힌 회색 바인더들을 발견했다.한 권이 아니었다.2023년 고객 구조 분석. 2024년 유통 채널 변화. 2025년 공개 재무 지표와 상품군별 온라인 반응. 기사와 공시 자료, 루네가 배포한 룩북을 정리한 보고서가 연도별로 꽂혀 있었다.가장 오래된 자료는 3년 전 것이었다. 채원이 도현과 재회하기 훨씬 전이었다.채원은 첫 장부터 빠르게 넘겼다. 밑줄과 메모는 도현의 필체였다. ‘디자인 정체성 유지’, ‘대표 의사결정 속도 우수’, ‘자금 구조만 개선되면 확장 가능’. 그 아래에는 투자 검토 보류라는 문장이 반복되어 있었다.현관 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도현이 서재에 들어왔을 때, 채원은 바인더 세 권을 책상 위에 펼쳐 둔 뒤였다.“설명해요.”도현은 외투를 벗지도 않은 채 자료를 보았다.“뭘 알고 싶어?”“나를 언제부터 조사했는지.”“루네가 첫 외부 투자를 받았을 때부터.”“3년 전이네요.”“그래.”“우리가 우연히 다시 만난 게 아니었군요.”채원의 목소리가 차갑게 굳었다.“내가 망하는 과정을 계속 들여다보다가, 채권하고 집까지 살 적당한 때를 기다렸어요?”“아니.”도현이 단호하게 잘랐다.“여기 있는 건 전부 공시, 기사, 루네가 공개한 자료로 만든 사업 분석이야. 네 통화나 동선, 사적인 관계를 확인한 적 없어. 할 생각도 없고.”“그 차이가 나한테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중요해야 해. 네 경계를 넘지 않았다는 뜻이니까.”“내 허락 없이 3년 동안 내 회사를 지켜본 건 경계 밖이고요?”“기업을 분석하는 데 대표 허락은 필요 없어.”투자자로서는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바인더 곳곳에 남은 메모는 보통의 검토 자료보다 집요했다. 루네가 사라질 위기마다 자금 구조를 다시 계산했고, 채원이 인터
Last Updated: 2026-08-14
Chapter: 외전 03 · 완벽한 다음 계약을 시작하는 법대기실의 조명은 너무 밝았다.흰색 생화가 가득 채워진 대기실 안쪽, 거울 앞에 주아가 앉아 있었다. 오프숄더 디자인의 실크 드레스는 가녀린 쇄골 라인과 목선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단정하게 묶어 올린 머리 아래로 가느다란 목덜미가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주아는 거울 속 제 모습이 어색해 자꾸만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늘 모니터 앞에서 편한 후드티나 셔츠를 걸치고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자판을 두드리던 일상에서 가장 멀리 도망쳐 온 옷이었다.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대기실 문이 열렸다.짙은 남색 예복을 차려입은 지혁이 들어섰다. 평소 센터에서 회원들을 지도할 때 입던 티셔츠도, 외근 나갈 때 입던 세미 정장도 아니었다. 단단한 어깨와 곧은 등판의 실루엣을 정교하게 살려낸 턱시도가 지혁에게 맞춤옷처럼 어울렸다.지혁은 문손잡이를 잡은 채 한동안 걸음을 떼지 못했다.“야. 뭘 그렇게 넋을 놓고 봐.”주아가 긴장감을 감추려 일부러 퉁명스레 말을 건넸다. 그제야 지혁의 긴 다리가 움직였다. 주아의 의자 옆에 멈춰 선 그의 시선은 여전히 드레스의 목선과 주아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잘 어울려서.”1년 전, 소개팅 옷을 골라주던 소파 앞에서의 대답과 똑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무심한 척 삼키던 눈빛과 달리, 지금 지혁의 눈에는 소유욕과 깊은 애정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었다.“귀걸이가 자꾸 고개가 비뚤어지네.”주아가 거울을 보며 귓불에 걸린 작은 다이아몬드 장식을 만지려 하자, 지혁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뒤로 다가왔다.거울 속에 두 사람의 실루엣이 겹쳤다. 187센티미터의 커다란 지혁이 몸을 굽혀 주아와 눈높이를 맞추자, 주아의 작은 어깨가 그의 넓은 품 안으로 고스란히 들어갔다.“가만있어.”“가만있는데.”“또 굳었어.”익숙한 대화법이었다. 지혁의 뜨거운 숨결이 주아의 귓가와 가녀린 어깨 위로 여과 없이 흩어졌다. 지혁의 큰 손가락 끝이 주아의 귓불에 닿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주아의 숨소리가 지혁의 손끝에 닿자, 그의 아래턱이 굳었다.“수선
Last Updated: 2026-08-14
Chapter: 외전 02 · 로맨스팀의 S급 실존 남주사무실의 공기는 언제나 건조하고 미지근했다.오후 2시, 론칭을 앞둔 신작의 예약 배너 이미지 시안을 검수하는 이주아의 눈이 모니터 안쪽을 사섭게 파고들었다.웹소설 PD의 하루는 독자들의 아주 미세한 피드백 하나, 배너 글자체의 각도 하나를 잡아내는 사소하고 피곤한 조율의 연속이었다.“선배님, 시안 3번으로 결정하면 마케팅팀이랑 조율은 제가 할까요?”옆자리 신입 PD가 의자를 당기며 조심스레 묻자 주아가 마우스를 가볍게 딸각였다.“아니, 디자인팀이랑 시안 확정은 내가 직접 할게. 대신 예약 배너 문구 수정한 것만 마케팅팀에 바로 공유해 줘.”“네, 알겠습니다!”신입이 의자를 뒤로 밀며 대답하는 순간, 파티션 너머로 단정한 단발머리의 한서영 팀장이 고개를 내밀었다.“이 PD, 로비 안내 데스크에서 연락 왔던데. 어떤 잘생긴 분이 너 앞으로 종이 봉투 하나 맡겨 놨다고.”주아는 키보드 위에 올렸던 손가락을 일순간 멈췄다. 물어보지 않아도 그 ‘잘생긴 분’이 누구인지 뻔했다.로비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주아의 입가가 미세하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지하 1층 안내 데스크 옆, 커다란 통유리창을 등지고 서 있는 권지혁은 멀리서도 튀었다. 짙은 회색 반소매 티셔츠에 편안한 트레이닝 바지 차림이었지만, 수영으로 다져진 넓은 어깨와 반듯한 체격은 로비를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바쁘다면서 직접 온 거야?”주아가 다가가자 지혁이 들고 있던 하얀 종이 봉투를 건넸다.봉투 안에는 따뜻한 기운이 남은 소금빵 두 개와 투명한 용기에 정성스럽게 깎아 담은 사과가 들어 있었다.“근처 스포츠 브랜드 미팅하러 가는 길이야. 네가 아침에 사과 남기고 갔길래.”지혁의 어조는 늘 그렇듯 무심하고 건조했다. “나 밥 잘 챙겨 먹는다고 몇 번을 말해. 이렇게 매번 사다 주면 사내에 소문 다 나, 권 대표님.”“책임지려고 온 거 아니야. 그냥 보고 싶어서 온 거지.”지혁이 주아의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매만지며 낮게 속삭였다.
Last Updated: 2026-08-14
Chapter: 외전 01 · 파란 실팔찌를 묶던 소년의 여름수영장의 온도는 늘 미지근했다.락스 냄새가 밴 공기와 끊임없이 철퍽이는 물소리.권지혁의 십 대는 그 단조로운 소음 속에 잠겨 있었다.물속에 들어가면 세상의 모든 시끄러운 것들이 단번에 지워졌다.숨을 참는 동안 들리는 건 제 심장박동뿐이었다.지혁은 그 서늘한 고요가 좋았다.중학교 2학년, 그 시끄러운 여자애가 제 궤도에 침입하기 전까지는 그랬다.“야, 너 수영 진짜 잘한다!”체육관 구석에서 홀로 흙이 묻은 신발 끈을 묶고 있던 지혁에게 다짜고짜 말을 걸어온 것은 이주아였다.낯가림이 심하고 무뚝뚝하던 소년의 세계에서 주아는 지나치게 선명했다.남들은 무서워하는 지혁의 서늘한 눈빛에도 주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날 이후로 주아는 매일 방과 후 수영장 관중석 맨 앞줄에 턱을 괸 채 앉아 지혁의 훈련을 구경했다.수영모를 눌러쓰고 수영복 한 장만 걸친 채 숨을 헐떡이는 지혁을 보며 주아는 잘도 웃었다.“야, 너 수영복 진짜 작아 보인다. 엉덩이 안 껴?”“……대회용이야, 바보야.”귀가 벌개져서 물속으로 다시 뛰어드는 소년을 보며 주아는 관중석을 뛰어다녔다.소년에게 수영 레인 너머의 다른 것을 보게 만든 첫 번째 균열이었다.고등학교 1학년, 첫 전국대회를 앞둔 여름날이었다.경기장에 함께 갈 수 없게 된 주아는 지혁을 찾아와 엉성한 실팔찌를 내밀었다.문구점에서 산 파란 실과 구슬로 서툰 솜씨로 꼰 물건이었다.자세히 보니 가운데 하얀 플라스틱 구슬 하나가 한 칸 툭 튀어나와 있었다.지혁은 제 손바닥 위에 놓인 엉성한 실뭉치를 내려다보았다.“이게 뭔데.”“부적이야, 부적. 너 또 혼자 덜덜 떨면서 속 썩이고 있을까 봐 만들었지.”“유치하게 이런 걸 왜 차고 뛰어. 물에 들어갈 때 방해되잖아.”“그럼 왜 줘.”지혁이 툴툴거리자 주아가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가방에 넣어 둬. 네가 또 혼자 긴장할까 봐 주는 거야.”지혁은 잠시 주아의 손길이 닿은 손목을 내려다보다가, 낡은 수영 가방 안쪽에 실팔찌를 밀어 넣었다.주아가
Last Updated: 2026-08-14
Chapter: 12화 · 남사친의 유효기간1년 뒤, 주아는 원고 중반에서 커서를 멈췄다.여자 주인공이 10년 된 남자 사람 친구의 고백을 받고 곧장 사랑을 깨닫는 장면이었다. 예전의 주아라면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코멘트부터 남겼을 것이다.주아는 문장 옆에 메모를 달았다.남주의 오래된 마음이 여주의 대답까지 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고백 전부터 여주가 이 사람을 특별하게 대했던 장면과, 고백 뒤 혼자 선택하는 시간을 보강해 주세요.저장 버튼을 누르자 옆자리의 신입 PD가 의자를 밀고 다가왔다.“선배님, 진짜 오래된 친구끼리 갑자기 키스하면 안 어색할까요?”“어색하지.”“그럼 어떻게 연애해요?”“어색한 채로 하는 거야. 친구였던 시간이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역시 로맨스는 어렵네요.”“남의 로맨스는 쉬워.”주아가 무심코 대답하자 지나가던 서영이 웃었다.“본인 것도 이제 꽤 잘하던데?”신입의 눈이 반짝이자 주아는 원고로 그 시선을 가렸다.“팀장님, 쓸데없는 정보 주지 마세요.”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권지혁이었다.오늘 7시. 잊지 마.주아는 달력을 확인했다. 아무 일정도 적혀 있지 않은 날이었다.뭘?답장은 금세 왔다.1년.주아는 날짜를 다시 봤다.정말로 연애를 시작한 지 정확히 1년 되는 날이었다. 작년 이맘때 옷장을 비우던 지혁에게 최소 1년은 만나고 결혼을 이야기하자고 했었다.설마.주아가 화면을 보고 있자 서영이 옆에서 슬쩍 물었다.“왜, 프러포즈한대?”“누가요.”“표정이 계약서 사인 직전인데.”“그냥 저녁 먹자는 거예요.”주아는 휴대전화를 엎어 놨다. 얼마 못 가 다시 들어 확인했지만 추가 메시지는 없었다.그 무뚝뚝함까지 평소의 지혁과 같았다.***지혁의 운동센터는 지난 1년 동안 한 층을 더 넓혔다.일반 회원 수업과 선수 재활 공간을 분리했고, 은퇴를 준비하는 선수들의 진로 프로그램도 시작했다.주아가 6시 반쯤 센터에 도착했을 때 지혁은 신입 트레이너의 수업 기록을 검토하고 있었다.“통증 있다고 했으면 중량부터 낮추고 가동 범
Last Updated: 2026-08-14
Chapter: 11화 · 1일 차 연애주아는 눈을 뜨자마자 허리를 감은 팔부터 확인했다.어젯밤의 대답을 아침에도 듣겠다던 사람은 정작 깊이 잠들어 있었다. 평소보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고, 베개에 눌린 뺨에는 희미한 자국이 남았다.15년 동안 지혁이 자는 모습은 여러 번 봤다. 경기 전날 대기실에서도, 밤새 영화를 보다 잠든 소파에서도 봤다.같은 침대에서 눈을 뜬 것은 처음이었다.주아가 팔을 살짝 들어 보려 하자 지혁의 손이 허리에서 움직였다. 눈은 감은 채였다.“가지 마.”“화장실 가려고.”“갔다 와.”“그러려면 놔야지.”그제야 팔이 풀렸다. 주아가 침대에서 내려서자 지혁이 눈을 떴다. 잠이 덜 깬 얼굴로 주아를 위아래로 확인하더니 상체를 일으켰다.“후회해?”“아침부터 진짜.”“대답해 준다며.”주아는 침대 옆에 서서 지혁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었다.“안 해. 어제보다 더 좋아해. 됐어?”지혁이 손목을 잡아당겼다. 중심을 잃은 주아가 침대 위로 다시 넘어가자 그가 웃으며 받아 냈다.“안 됐어. 한 번 더.”“욕심이 아주 끝이 없네.”“이제 참을 이유가 없잖아.”입술이 닿기 직전, 주아가 손바닥으로 그의 얼굴을 막았다.“양치.”지혁의 눈썹이 구겨졌다.“이주아.”“현실 연애는 구강 위생부터야.”주아는 웃으며 방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맨발로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평소와 똑같이 세수하고, 출근 준비를 하고, 식탁에 마주 앉아 달걀을 먹었다. 달라진 것은 사소했다. 지혁은 주아의 커피를 건네면서 손가락을 굳이 맞닿게 했고, 주아는 그가 토스트를 먹는 동안 발끝으로 종아리를 건드렸다.친구일 때도 거리 없이 지냈다. 그런데 이제는 접촉 하나마다 의도가 있었다.지혁이 달걀 하나를 더 접시에 올려놓았다.“오늘 숙소 짐 가지러 가자.”“내가 퇴근하고 갈게.”“같이 가.”“대표님 안 바쁘세요?”“바쁜데 가.”“통제하려고 들면 바로 감점이야.”지혁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네가 오라고 하면 갈게.”“그렇게 빨리 알아들으면
Last Updated: 2026-08-14
Chapter: 10화 · 연습은 끝났어지혁의 손이 문손잡이에서 천천히 떨어졌다.“물건 가지러 온 거면 내가 챙겨 줄게.”며칠 동안 준비한 사람처럼 말이 빨랐다. 주아는 대답 대신 신발을 벗었다. 지혁이 막지는 않았지만, 예전처럼 슬리퍼를 꺼내 주지도 않았다.현관에 나란히 놓인 운동화 사이로 주아가 신던 실내화가 보였다. 그대로였다. 욕실 앞의 머리끈도, 거실 소파에 두고 간 쿠션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집만 보면 주아가 잠깐 외출했다 돌아온 것 같았다.두 사람만 그렇게 행동하지 못했다.“차 마실래?”“아니.”“그럼 앉아.”“지혁아.”그가 돌아봤다.15년 동안 수없이 부른 이름인데 지혁의 어깨가 굳었다. 주아도 그 변화를 모른 척하지 않았다.“그날 키스, 너한텐 뭐였어?”뜸을 들일 거라 생각했다. 지혁은 바로 답했다.“연습 아니었어.”“처음부터?”“한 번도.”“그럼 왜 그렇게 말했어.”“내 마음을 들키지 않고 네게 다가갈 핑계가 필요했으니까.”지혁의 얼굴에는 변명할 마음이 없었다.“네가 싫다고 했으면 안 했을 거야. 그래도 내가 친구라는 걸 이용한 건 맞아. 미안해.”주아는 며칠 전부터 품고 있던 말을 골라 꺼냈다.“나, 그게 제일 화났어. 너라서 허락한 건데. 세상에서 제일 안전하다고 믿는 친구가 연습이라고 하니까 받아들인 건데, 넌 나랑 다른 곳에 서 있었잖아.”“알아.”“모르면서 안다고 하지 마.”“알려고 하는 중이야.”지혁은 한 발도 다가오지 않았다.“그래서 네가 나간 뒤에 안 잡았고, 연락도 안 했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네가 정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니까.”현관에서 비켜서며 선택을 돌려주던 지혁의 얼굴이 떠올랐다. 미안하다는 한마디 뒤에 변명도, 붙잡는 손도 없었다. 주아는 그가 잘못하지 않았다고 말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잘못한 뒤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까지 보고 왔다.주아는 거실 한가운데 선 지혁을 오래 바라봤다.“나는 네가 날 오래 좋아했다는 이유로 온 거 아니야.”“알아.”“아직 다 이해한 것도 아니고, 속인 게 안 화나
Last Updated: 2026-08-14
Chapter: [외전-8] 영원한 만찬, 사슬의 종장 (完)제국 북부의 거대한 설산을 집어삼킬 듯 무섭게 몰아치던 동토의 새벽바람이 마침내 잔인한 비명을 거두고 흔적도 없이 사그라들었다.블레이크 공작성의 가장 높은 탑 위로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자, 수십 년간 얼어붙어 있던 성벽의 성에들이 투명한 보석처럼 부서지며 눈부신 황금빛을 사방으로 반사해 내기 시작했다. 길고 길었던 황궁의 더러운 암투도, 마차 안과 귀빈실을 거쳐 이곳 공작가의 대침실까지 이어지던 파괴적이고도 농밀한 탐닉의 밤도 마침내 잿빛 안개 속으로 완전히 녹아내린, 지독하리만치 평화로운 아침이었다.그러나 오직 두 사람만의 숨소리와 맥박으로 가득 찬 공작의 대침실 내부만큼은 여전히 시간이 완전히 정지한 듯, 낮고 진득한 열기가 고스란히 정체되어 있었다.사방으로 어지럽게 흩어진 순백의 예복 실크 조각들과 뜯겨 나간 은색 단추들, 지난밤의 격렬했던 신체적 마찰을 증명하듯 기괴하게 뒤틀린 채 젖어 있는 침대 시트, 그리고 공간을 가득 메운 짙은 샌달우드 향과 달콤한 무화과 향의 잔향이 뇌리를 묵직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방 안의 밀도는 여전히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웠다.“으음…….”엘리제는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 올리며 가녀린 신음을 입술 사이로 흘렸다.전신을 지독하게 난도질하는 듯한 뻐근한 통증이 척추 뼈마디 하나하나를 타고 무겁게 밀려왔다. 단 한 치의 자비도, 단 한 순간의 유예도 없이 그녀의 살결을 탐닉해 들어왔던 칼릭스의 잔인한 소유욕이 남긴 흔적이었다. 전생의 강서진으로서 그 어떤 혹독한 주방의 노동과 폭군 같은 선배들의 압박도 버텨냈던 그녀였지만, 모든 감각을 회복한 북부의 괴물이 밤새도록 쏟아부은 원초적인 집착을 받아내는 것은 차원이 다른 파멸적인 피로였다.그녀가 몸을 미세하게 움직이려 하자마자, 허리를 부서질 것처럼 움켜쥐고 있던 거대하고 단단한 팔뚝에 소름 끼칠 정도로 강한 악력이 다시금 들어왔다.“깨웠나.”낮고 진득하게 잠긴, 낮의 태양마저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서늘하고도 뜨거운 목소리가 엘리제의 뒷덜미를 거칠게 긁어내렸다.칼릭
Last Updated: 2026-08-15
Chapter: [외전-7] 침실의 봉인, 사슬을 쥔 여왕수도에서 북부의 심장으로 이어지는 길고 긴 밤의 질주가 마침내 끝을 고했다.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블레이크 공작성의 거대한 대문이 육중한 쇳소리를 내며 열렸고,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마필들의 더운 숨결을 흩날리며 안뜰 정중앙에 멈춰 섰다. 북부의 한밤동을 지배하는 동토의 차가운 바람이 마차 외벽을 사정없이 때려대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지만, 그 서늘한 냉기조차 마차 내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지독하고 끈적한 열기를 식히지는 못했다.달각.마차 문이 열리자마자 칼릭스는 무릎 위에 늘어져 있던 엘리제를 단 한 순간도 바닥에 디디게 하지 않은 채, 자신의 두꺼운 모피 망토로 그녀의 전신을 빈틈없이 감싸 안았다. 아침에 드레스룸에서 그토록 정성스럽게 채웠던 미드나잇 블루 빛의 실크 예복은 이미 마차 안에서 벌어진 난폭한 탐닉으로 인해 단추가 전부 뜯겨 나가고 옷깃이 처참하게 찢어진 상태였다. 다른 하녀들이나 성 안의 기사들에게 아내의 노출된 살결과 자신이 새겨놓은 붉은 낙인들을 단 한 자락도 보이지 않겠다는 괴물의 철저한 구속이자 독점욕이었다.“공작 전하를 뵙습니…….”성 문을 지키던 호위 기사들과 하녀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으나, 칼릭스는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성큼성큼 본관의 대리석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슬 퍼런 살기와 제압감은 전장으로 향하는 총사령관의 그것보다 훨씬 더 서슬 퍼런 위압감을 품고 있었다. 엘리제는 그의 단단한 목덜미에 두 팔을 감아쥔 채, 모피 망토 안쪽의 은밀한 어둠 속에서 가쁜 숨을 골랐다. 셔츠 자락 틈새로 느껴지는 그의 우람한 가슴팍 근육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은 채 터질 것처럼 거칠게 맥박치고 있었다.복도를 지나 오직 두 사람만을 위해 허락된 성의 가장 깊숙한 안동, 공작의 대침실 문이 열렸다. 칼릭스는 발끝으로 문을 부서질 것처럼 거칠게 닫아걸었다.쿵! 철컥.육중한 참나무 문이 닫히고 묵직한 금속 걸쇠가 완전히 잠기는 순간, 엘리제는 비로소 자신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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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외전-6] 구속의 비단, 폭주하는 포식자황제와의 숨이 막힐 듯한 공식 오찬이 마침내 마침표를 찍고, 황궁 안동의 깊숙하고 창백한 대리석 통로를 지나 마침내 블레이크 공작가의 대형 마차 문이 닫히는 순간.장내를 압박하던 화려하고 가식적인 금빛 세계는 완벽하게 차단되었고, 마차 내부에는 오직 두 사람만이 호흡할 수 있는 지독하리만치 은밀하고 거대한 어둠의 장막이 내려앉았다. 마차 바퀴가 수도의 거친 돌길을 짓이기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둔탁한 소음이 정적을 흔들었으나, 그 소음마저 마차 안을 가득 채운 칼릭스의 파괴적인 살기와 소유욕 앞에서는 한 자락의 먼지처럼 흩어질 뿐이었다.철컥, 철컥.마차가 코너를 돌 때마다 육중한 차체가 크게 흔들렸지만, 칼릭스는 엘리제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힌 채 그녀의 허리를 부서질 것처럼 강하게 껴안고 있었다.그는 오찬이 진행되는 내내, 그리고 황제가 엘리제에게 호의 어린 손을 내밀며 “조련”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던 그 찰나의 순간부터 이성의 끈이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완벽하게 재단된 검은색 제복 상의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심장 박동은 평소의 침착함을 완전히 잃은 채, 폭주하는 마법 엔진처럼 거칠고 폭력적으로 맥박치고 있었다. 그 무자비한 박동이 엘리제의 둔부를 통해 전신으로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칼릭스…… 하아, 손아귀 힘이 너무 강해요. 허리가 부러질 것 같아요.”엘리제가 그의 단단하고 넓은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속삭였다.그녀가 입은 미드나잇 블루 빛의 실크 드레스는 목끝까지 촘촘하게 은색 단추가 채워져 있어 레이스가 턱밑까지 감싸 안고 있었지만, 남자의 거친 호흡이 깃을 타고 내려올 때마다 맨살 위로 소름 끼치는 열기가 전해졌다. 목을 죄어오는 굵은 은색 사슬과 핏빛 루비 초커가 그의 악력에 들려 올라가며 엘리제의 가느다란 목선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가죽 장갑을 벗어 던진 그의 맨손가락이 초커의 날카로운 테두리를 따라 피부를 파고들 듯 강하게 짓눌렀다.“황제의 눈빛이 네 쇄골 라인이 시작되는 그 깃 끝에 머물렀다.”칼릭스의
Last Updated: 2026-08-15
Chapter: [외전-5] 금빛 장막 뒤의 탐식황궁의 정오를 알리는 거대한 청동 종소리가 제국의 심장부를 무겁게 울렸다.블레이크 공작 부부를 마중하기 위해 열린 황실 안동의 귀빈 대기실은 대연회장과는 또 다른 의미로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이 감돌고 있었다. 사방의 벽면을 가득 채운 순금 문양의 휘장들과 화려한 크리스탈 샹들리에에서 쏟아지는 백색의 불빛은 지나치게 사치스러웠고, 바닥에 깔린 붉은 벨벳 카펫은 발소리 하나조차 완벽하게 집어삼키며 은밀한 정적을 자아내고 있었다.“공작부인 전하, 예복의 선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드리겠습니다.”황실 최고위 하녀장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엘리제의 드레스 자락을 매만졌다.칼릭스가 직접 골라 입힌 미드나잇 블루 빛의 실크 예복은 레이스가 목끝까지 촘촘하게 짜여 있어 단 한 치의 살결도 밖으로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 완벽한 폐쇄성이 엘리제의 가느다란 목선과 유려하게 떨어지는 골반의 곡선을 노골적으로 부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목을 옥죄듯 감싸 안은 블레이크 가문의 핏빛 루비 초커는, 그녀가 제국의 구원자이기 전에 오직 한 사내의 지독한 소유물임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사슬과 같았다.엘리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얕은 숨을 내쉬었다.단추를 목끝까지 채운 드레스는 주방의 화구 열기를 견디던 전생의 가운보다 훨씬 더 답답하게 심장을 조여왔다. 하지만 그 답답함의 진짜 원인은 옷이 아니었다. 드레스룸에서부터 마차, 그리고 이 황궁의 복도를 걸어오는 내내 자신의 허리를 부서질 것처럼 움켜쥔 채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던 남자의 파괴적인 독점욕 때문이었다.스윽.그때, 대기실 안쪽의 대리석 기둥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였다.완벽하게 재단된 검은색 황실 제복을 입은 칼릭스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제국의 검이자 북부의 지배자다운 오만한 아우라가 공간을 단숨에 압도하자, 황실 하녀들은 공작의 서슬 퍼런 기운에 질려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칼릭스의 투명하면서도 깊은 보랏빛 눈동자가 엘리제에게로 향했
Last Updated: 2026-08-15
Chapter: [외전-4] 오만의 마침표, 탐닉의 시작황궁 귀빈실의 높은 창문 틈새로 아침 햇살이 가늘고 길게 조각되어 쏟아졌다.수도 위를 수놓은 창백한 새벽안개가 황금빛 태양에 녹아내리는 시간이었지만, 두꺼운 암막 벨벳 커튼이 드리워진 침실 내부만큼은 여전히 어둡고 진득한 밤의 열기가 고스란히 정체되어 있었다. 사방으로 흩어진 순백의 실크 드레스 자락,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공작의 제복 훈장들, 그리고 벽난로 안에서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장작의 매캐한 잔향이 방 안의 밀도를 숨이 막힐 정도로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으음…….”엘리제는 얕은 신음을 삼키며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전신을 지독하게 난도질하는 듯한 뻐근한 통증이 척추 마디마디를 타고 밀려왔다. 단 한 치의 자비도 없이 그녀를 몰아붙였던 지난밤의 흔적이었다. 온전한 감각을 되찾은 괴물이 십수 년의 굶주림을 보상받겠다는 듯 탐욕스럽게 탐닉해 온 결과물은 엘리제의 하얀 피부 위로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었다.그녀가 몸을 미세하게 뒤틀자마자, 허리를 빈틈없이 옭아매고 있던 거대하고 단단한 팔뚝에 더욱 강한 힘이 들어갔다.“더 누워 있어라.”낮고 잠긴, 짐승의 르누아르 같은 목소리가 엘리제의 귓가를 긁어내렸다.칼릭스는 언제나처럼 소리도 없이 눈을 뜬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헝클어진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그의 이마 위로 흘러내려 야성적인 분위기를 더했고, 실크 이불 밖으로 드러난 그의 넓고 탄탄한 어깨와 흉판에는 엘리제가 쾌감에 겨워 가늘게 긁어내린 손톱자락 자국이 붉게 선을 그리고 있었다.거울처럼 투명해진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오직 엘리제 한 사람만을 담은 채 기묘한 포만감과, 여전히 가시지 않은 지독한 독점욕으로 일렁였다.“칼릭스, 날이 벌써 다 밝았어요. 황실 시종들이나 하녀들이 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 팔 좀 놓아주세요.”엘리제가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려 손을 올렸으나, 칼릭스는 오히려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씩 붙잡아 자신의 입술 앞으로 가져갔다.검은 장갑을 벗어 던진 그의 맨손 지문이 엘리제의 가느다란 손
Last Updated: 2026-08-15
Chapter: [외전-3] 밤의 장막과 귀빈실의 지배자황궁의 온실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창백한 달빛은 두 사람의 엉킨 그림자를 은밀하게 비추고 있었다.온실 안을 가득 채운 진득한 장미 향은 엘리제의 가쁜 숨결과 뒤섞여 기묘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차가운 대리석 돌벽에 등이 밀착된 엘리제는 전면에서 저돌적으로 밀려드는 칼릭스의 거대한 신체를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칼릭스는 그녀의 두 손목을 조리대 벽 위로 거칠게 잡아 내리누른 채, 마치 사냥감을 온전히 가두어둔 맹수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칼릭스…… 하아, 사람들이 언제 이곳으로 들어올지 몰라요. 제발 이 손 좀……”엘리제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다그치려 했으나, 칼릭스의 투명한 눈동자에 서린 열망은 이미 이성의 끈을 아슬아슬하게 잡아당기고 있었다.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더 깊숙이 숙여, 엘리제의 새하얀 목덜미와 핏빛 루비 초커가 닿아 있는 그 예민한 경계선을 사정없이 입술로 핥아 내렸다. 쪽, 소리와 함께 질척한 점막의 마찰음이 온실의 정적을 집요하게 깨부수었다.“흐읏……! 아, 칼릭스……!”엘리제의 입술 사이로 참지 못한 신음이 튀어 나왔다. 거칠게 살을 파고드는 남자의 맨손 악력과, 전신을 불덩이처럼 달구는 배덕감이 그녀의 척추 뼈마디를 타고 뇌수까지 일직선으로 치솟아 올랐다.모든 미각과 감각을 회복한 칼릭스에게 엘리제라는 존재는 이제 단순히 맛을 느끼게 해주는 도구가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원색을 뛰어넘어, 자신의 피와 살을 통째로 지배하는 지독한 마약이자 유일한 구원이었다.칼릭스는 엄지손가락으로 엘리제의 붉게 퉁퉁 부어오른 입술 점막을 강하게 비벼대며, 가쁜 숨을 그녀의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말했을 텐데, 엘리제. 세상이 선명해질수록 내 식욕은 너 하나만을 향해 폭주한다고. 저 연회장에 서 있는 천박한 놈들이 네 어깨와 등을 바라보는 그 짧은 순간 동안, 나는 제국 전체를 불태워버리고 싶었다.”그의 목소리는 짐승의 낮은 으르렁거림처럼 뇌리를 긁어내렸다. 칼릭스는 결코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듯, 엘리제의 허리를
Last Updated: 2026-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