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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늦은 진심
가장 늦은 진심
مؤلف: 그림

제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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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연희는 얇은 침의를 꼭 여미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예, 정했습니다. 제 소원은 바로, 이 궁을 떠나는 것입니다.”

무연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대의 이름은 이미 궁의 명부에 올라 있소. 궁을 나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지. 죽음을 가장하고 신분을 바꾸는 수밖에...”

“알겠습니다.”

한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을 가장하든, 신분을 바꾸든 상관없었다. 이 황궁만 떠날 수 있다면 무엇이든 좋았다.

“허면 보름 뒤에 데리러 오겠소.”

검은 그림자는 그 말을 남기고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한연희는 하늘에 걸린 가느다란 달을 바라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악몽이 끝나는구나.

그녀는 애초에 궁중 사람이 될 운명이 아니었다. 이곳에 들어온 것 또한 그저 뜻밖의 우연에 불과했다.

3년 전만 해도 그녀는 승상부에서 가장 천대받는 서녀였다.

반면 적녀인 언니 한소희는 승상부의 모든 사랑과 기대를 한몸에 받는 귀한 딸이었다. 당시 여섯째 황자였던 선우익과 서로 마음을 나누며 훗날을 약속한 사이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 한태원은 넷째 황자 선우진이야말로 황위에 오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여겼다.

그러나 세상일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끝내 황위에 오른 이는 선우진이 아니라 선우익이었다.

황제의 노여움은 하늘을 찔렀고, 결국 승상은 좌천되었다.

성난 황제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한태원은 집안에서 가장 천대받던 서녀 한연희를 궁으로 들여보내 선우익을 가까이에서 시중드는 궁녀로 삼았다. 그리고 그녀가 어떤 수모를 당하든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한연희는 처음 선우익을 마주했던 그날을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젊고 위엄 있는 선우익은 검은 용포를 걸친 채 싸늘한 눈빛으로 바닥에 엎드린 한연희를 내려다보았다.

“승상 댁의 여식이라?”

역시나 그날부터 선우익은 품고 있던 모든 원한을 그녀에게 쏟아부었다.

채찍질과 벌세우기는 일상이었고, 혹독한 겨울밤에는 깨진 도자기 조각 위에서 무릎까지 꿇게 했다...

그렇게 쌓인 상처로 한연희의 몸에는 성한 살갗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술에 취한 선우익은 그녀를 한소희로 착각한 채 강제로 품었다.

그날의 실수는 그렇게 3년 동안 이어졌다.

한연희는 매일 밤 선우익의 침전으로 불려 갔다. 몸도 마음도 이미 지칠 대로 지쳤지만, 정해진 나이가 되면 출궁할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버텨 왔다.

하지만 오늘, 출궁패를 받으러 간 그녀는 문전에서 가로막혔다.

“폐하께서 명하시길, 출궁은 불가하다.”

태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 순간 한연희는 깨달았다.

어쩌면 자신은 평생 이 화려한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행히도 1년 전, 한연희는 우연히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던 검은 옷 차림의 사내를 구한 적이 있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살수 명단의 최상위에 올라 있던 무연이었다.

“네가 내 목숨을 살렸으니, 소원 하나쯤은 들어주겠다.”

무연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지금, 한연희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이곳을 벗어나는 것!

한연희는 몸을 돌려 전각으로 향했다.

그러나 문턱을 넘으려는 순간, 서늘하고 깊은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선우익은 어느새 잠에서 깨어 회랑 아래에 서 있었다.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그녀를 꿰뚫어 볼 듯 응시했다.

“방금 어디를 다녀온 것이냐?”

“목이 말라 물 좀 마시고 왔사옵니다.”

한연희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선우익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어서 오지 않고 무엇 하는 것이냐.”

한연희가 순순히 용상으로 돌아가자, 선우익은 그녀의 턱을 거칠게 틀어쥐었다.

“똑똑히 들어라. 짐의 허락 없이는 단 한 발짝도 벗어나선 안 된다.”

“예, 폐하.”

그녀의 대답에 만족한 듯 선우익은 손을 놓더니,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한연희는 그의 몸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용연향을 맡으며 물시계 소리를 세었다.

오직 날이 밝기만을 기다리면서.

다음 날 아침.

한연희는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선우익은 비웃듯 피식 웃었다.

“한심하구나. 몇 번 안았다고 벌써 다리에 힘이 풀렸느냐? 짐의 가마를 타고 돌아가거라.”

“소인이 어찌 감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선우익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전각 밖에 대기하고 있던 가마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폐하! 이러시면 법도에 어긋나옵니다...”

놀란 한연희가 황급히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조용히 해라.”

선우익은 냉랭하게 말을 끊더니, 그대로 그녀를 가마 안에 태워 버렸다.

잠시 후 가마가 완의국(浣衣局)을 지날 때, 선우익은 문득 손을 들어 행렬을 멈추게 했다.

한연희는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쪽빛 궁복을 입은 어린 궁녀 하나가 마당에서 비단을 널고 있었다.

나연이라는 이름의 그 궁녀는 놀랍게도 눈매와 분위기가 한소희를 제법 닮아 있었다.

“저 궁녀를 오늘 밤 시침 들게 하라.”

선우익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감 총관 이강해는 즉시 뜻을 알아차리고 사람을 보내 나연에게 소식을 전했다.

나연은 기쁨에 어쩔 줄 몰랐다.

하루 종일 옷을 갈아입고 또 갈아입었고, 밤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목욕도 몇 번이나 했다.

반면 한연희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어젯밤 선우익이 지나치게 무리하게 군 탓에 머리는 아직도 지끈거렸고,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게다가 열까지 올라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당직 시간이 되었는데도 그녀가 나타나지 않자, 이강해가 직접 그녀의 처소로 찾아왔다.

“몸이 좋지 않사오니 오늘만 대신 말씀 좀 전해 주시겠사옵니까?”

한연희는 침상에 누운 채 힘없이 말했다.

이강해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십시오. 폐하께는 제가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나인은 편히 쉬세요.”

그가 돌아간 뒤 마당은 다시 조용해졌다.

한연희는 침상에 누운 채 고열에 시달렸다. 온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약을 먹어도 상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고 의식마저 흐릿해질 무렵이었다. 이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눈가가 붉게 충혈된 나연이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다짜고짜 한연희의 뺨을 후려쳤다.

짝!

“한연희! 너 일부러 그런 거지?! 어렵게 폐하의 눈에 들었는데, 아직 용상에도 오르기 전에 네가 여기서 열이 난 척하는 바람에 폐하께서 안절부절못하시며 나를 내버려 두고 널 보러 가시려 했단 말이야!”

“폐하께선 수년째 후궁 하나 들이지 않으셨고, 시침을 허락하신 것도 오직 너 하나뿐이었어! 설마 폐하를 혼자 독차지하려던 것이야?”

고열에 시달리던 한연희는 눈앞이 핑핑 돌았다. 나연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선우익이 자신을 보러 온다고?

“나 열 나는 거 맞아...”

하지만 나연은 조금도 믿지 않았다. 그녀는 울분을 터뜨리듯 한연희를 마구 밀치고 때렸다.

“사내 홀리는 재주밖에 없는 천한 계집년! 이 여우 같은 년! 오늘 네 그 낯짝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야 말겠어!”

원래도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한연희는 억울한 비난까지 듣자,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어차피 난 곧 떠날 사람인데, 폐하를 유혹해서 뭘 하겠어?”

“떠난다고?”

그때 문밖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한연희는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했다.

고개를 돌리자 황금빛 용포를 입은 선우익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음산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연희, 짐의 허락도 없이 어디를 가려 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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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장 늦은 진심   제23화

    한연희의 뒤를 계속 추적할 사람들을 남겨 둔 뒤, 선우익은 궁으로 돌아가 정무를 처리했다.한연희가 어디를 가든 선우익은 정무를 마치고 나면 늘 적당한 거리를 둔 채 그들의 뒤를 따라다녔다.그녀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그걸로 충분했다.무연은 한연희의 손을 잡고 걸으면서도 속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달리 방법도 없었다.그는 천하제일의 살수였지만, 선우익이 거느린 끝도 없이 쏟아지는 사사(死士)와 암위들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었다.더구나 죄 없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죽였다가 한연희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그녀는 분명 크게 화를 낼 터였다.결국 무연은 못 본 척 넘길 수밖에 없었다. 대신 한시도 그녀의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늘 한연희 곁을 맴돌며 그림자처럼 함께했다.어느덧 5년이 지나갔다.진호는 어느새 의젓하고 속 깊은 소년으로 성장해 있었다.생일잔치가 열린 날, 무진호는 상자 하나를 품에 안고 한연희의 앞으로 다가왔다. 늘 냉정하고 침착하던 아이였지만, 이날만큼은 드물게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어머니, 이 생일 선물을 받아도 되는 것입니까?”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던 한연희는 상자를 열어 보았다.소박하면서도 고급스러운 금사남목(金絲楠木) 상자 안에는 다섯 마리 용이 서로 몸을 휘감고 있는 옥새가 놓여 있었다.쨍그랑.한연희는 너무 놀란 나머지 손에 힘이 풀렸고, 상자는 그대로 탁자 위로 떨어졌다.다행히 옥새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진호야, 이 선물은 누가 준 것이냐? 어찌 이런 것을 너에게 준 것이냐? 그 사람을 아느냐?”한연희는 마음속 불안을 억누를 수 없었다.이런 물건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한연희는 지난 5년 동안 선우익이 약조대로 다시는 자신을 찾아오지 않고, 앞으로도 두 사람이 다시 얽힐 일은 없을 거라 여겼다.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다시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한연희의 표정을 살피던 무진호는 긴장한 듯 고개를 숙였다.“어머니, 이걸 보내 주신 분은 제 망년지

  • 가장 늦은 진심   제22화

    진호를 보자 이강해의 얼굴에는 자애로운 미소가 번졌다.그는 진호를 안아 주고 놀아 주며 연신 재롱을 부렸다.신기한 것은 진호가 유독 선우익만 싫어한다는 점이었다. 그를 보기만 하면 입술을 삐죽이며 울음을 터뜨렸다.덕분에 하루에도 몇 번씩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한연희는 갈수록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결국 그녀는 다시 떠날 생각을 굳혔다.“무연, 저들이 이곳을 그리 좋아한다면 기꺼이 내어 주지요. 앞으로는 우리 세 식구가 함께 산천을 유람하며 마음 가는 대로 살아가면 되잖아요.”“좋소. 전부 당신 뜻대로 하겠소.”무연은 원래 어디에서 사는지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그에게는 어디든 다 똑같았다. 오직 한연희가 있는 곳만 달랐다.한연희가 있는 곳이 곧 그의 집이었다.무연은 손이 빨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가져갈 짐을 모두 정리했고,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쳤다.하지만 세 식구가 새로운 거처에 도착하자마자 또다시 선우익과 마주쳤다.한연희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 결국 그녀는 참지 못하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선우익, 당신은 황제입니다. 조정에는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텐데, 이제 그만 따라다니십시오. 저는 절대 당신과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이러실수록 저는 폐하를 더욱 혐오하게 될 뿐입니다.”싫어한다?그녀는 예전에도 자신을 이토록 생각했던 것이었구나.궁을 떠난 뒤의 한연희는 예전과 전혀 달라져 있었다. 예전의 그녀는 결코 이렇게 대담하지 않았다.언제나 고개를 숙인 채 말수가 적었고, 눈빛에는 짙은 우울과 슬픔이 어려 있었다. 가끔 하늘을 올려다볼 때면 마치 날개가 꺾인 새처럼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다.선우익은 이따금 생각했다. 그녀는 어째서 제 앞에서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웃어 주지 않았을까. 정말 그토록 자신이 싫었던 것일까.이제야 그는 답을 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혐오하고 있었다.하지만 선우익은 여전히 포기하지 못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물었다.“한연희, 지난 세월 동안 단 한 번이라도 짐

  • 가장 늦은 진심   제21화

    선우익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연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이내 그는 주먹을 휘둘러 선우익의 얼굴을 그대로 가격했다.무연의 움직임은 날렵하고 민첩했다. 선우익 역시 오랜 훈련을 받았고 전장까지 누빈 몸이었지만, 수많은 시체더미 속에서 살아남은 천하제일 살수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무연의 주먹은 한 치의 사정도 없었다. 주먹마다 살기가 서려 있었고, 모든 공격은 선우익의 급소를 노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를 죽여 버릴 듯한 기세였다.본디 살수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법. 암기를 이용한 기습 또한 서슴지 않았다.하지만 선우익은 황제였다. 위험에 처하자 사방에 숨어 있던 암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그들은 끊임없이 무연을 공격하며 그의 수를 받아치고, 선우익을 빈틈없이 호위했다.독이 발린 은침 몇 가닥이 선우익을 향해 날아들었지만, 암위 하나가 망설임 없이 몸을 던져 대신 막아 냈다.평범한 무예만으로는 무연을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암위들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무연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마침내 마지막 수를 꺼내려 했다.선우익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연희와 진호만큼은 자유롭게 해 줄 생각이었다.이를 본 한연희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다급하게 외쳤다.“무연! 안 돼요!”그녀는 그가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그 절박한 외침에 무연의 움직임이 순간 멈칫했다.바로 그때, 한 암위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한기를 머금은 비수를 움켜쥔 채 무연의 심장을 향해 찔러 들었다.한연희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고, 앞뒤 가릴 것 없이 무연의 앞을 막아섰다.그러나 예상했던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한연희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의 광경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선우익이 비수의 칼날을 맨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다.손바닥은 이미 피로 흥건했고, 살점이 찢겨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붉은 피가 손가락 끝을 타고 끊임없이 떨어졌지만, 그는 조금도 손을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연희야, 괜찮으냐?”

  • 가장 늦은 진심   제20화

    두 사람은 주막 일을 모두 정리한 뒤 평소보다 일찍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갔다.그런데 꽃잎이 흩날리는 작은 마당에는 뜻밖의 손님이 와 있었다.준수한 용모에 비범한 기품을 지닌 사내가 싸늘한 얼굴로 서 있었다. 품에는 아이 하나를 안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 아이가 목이 터져라 울고 있다는 것이었다.아이를 안은 사내의 손길은 몹시 서툴렀고, 달래는 모습 또한 어색하기 짝이 없어 우스울 정도였다.반면 아이는 옥처럼 곱고 사랑스럽게 생겼으나, 좀처럼 울음을 그칠 기미가 없었다.선우익을 마주한 순간, 한연희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 내리는 듯했다.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리고, 몸은 저도 모르게 떨리기 시작했다.어째서 이자가 이곳에 있는 것인가? 심지어 자신의 아들을 안은 채로.한연희는 밀려오는 공포를 억누를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아이를 안고 도망치고 싶었다.“만옥아, 괜찮소?”무연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그녀를 부축하며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마당 안으로 걸어갔다.“대인, 송고하오나 저와 만옥의 아이를 내려놓아 주시겠습니까? 아이가 낯을 많이 가리는 터라 낯선 사람 품에 안기면 저리 울어 대곤 합니다.”한연희도 미친 듯 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목소리를 바꾸어 말했다.“예, 진호가 워낙 낯을 가려서요. 저러다 목이 쉴까 걱정됩니다. 아이를 제게 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하, 낯을 가린다고?”선우익은 비웃음을 흘렸다.마음속에서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들끓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침착했다. 그러나 그 고요함은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의 적막과도 같았다. “나는 이 아이의 아비나 다름없는데, 어찌 낯을 가린단 말이냐? 내 말이 틀렸느냐, 한연희?”“대인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의 서방님은 오직 한 사람뿐입니다. 더구나 저는 한연희가 아닙니다. 사람을 잘못 보셨습니다.”한연희는 얼굴을 굳힌 채 끝까지 부인했다.무연은 더 이상 선우익과 말다툼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곧바로 앞으로 나아가 아이를 빼앗아 왔다.“진호는 그

  • 가장 늦은 진심   제19화

    그 말이 떨어지자 한연희는 숨이 턱 막혔다. 눈물이 순식간에 시야를 가렸고, 온몸은 저도 모르게 떨리기 시작했다.“무연, 저 그 사람한테 붙잡혀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또다시 그런 고초를 겪고 싶지 않습니다.”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궁에서 보낸 날들은 여전히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아무리 떨쳐 내도 지워지지 않는 악몽이었다.그날, 그녀는 무연과 함께 황궁을 빠져나왔다.두 사람은 내내 몸을 숨기며 도망쳤고, 변장 가면도 몇 번이나 바꿔 써야 했다.그렇게 어렵사리 경성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그제야 한연희는 뒤늦게 깨달았다.자신이 얼마나 불안했고, 얼마나 막막했는지를.그녀는 비록 승상부에서 사랑받지 못하던 서녀였고, 고된 나날을 보내며 자랐지만 한 번도 혼자 힘으로 세상을 살아 본 적은 없었다.계례를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궁으로 보내졌고, 궁 안에서는 남을 시중드는 일만 하며 살았다.수없이 다치고 상처받았지만, 적어도 먹고사는 걱정은 없었다.자유를 얻기는 했으나, 정작 갈 곳도 없었다.그래서 한연희는 무연 곁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놓지 않았고,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녔다.도망치던 길에서 무연은 거의 내내 그녀를 안고 다녔다.끼니때가 되면 꼬박꼬박 먹을 것을 챙겨 주고, 물도 먹여 주었다.어느새 곁에 붙어 있는 그녀가 익숙해졌는지, 무연도 더 이상 그녀를 쫓아내지 않았다.그저 예쁜 짐승 한 마리쯤 거둔 셈이라 여긴 듯했다.시간이 흐르며 한연희는 조금씩 홀로 서는 법을 배웠다.그녀는 무연에게서 무예를 배웠고, 손에 쥔 은자와 예전에 익혀 두었던 재주를 바탕으로 장사 수완까지 하나하나 익혀 나갔다.한편 무연은 이따금 의뢰를 받고 떠났다가 상처를 입고 돌아오곤 했다.그럴 때면 한동안 그녀 곁에 머물며 몸을 추슬렀고, 변장 가면을 만드는 일도 도와주었다.세월이 흐르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부부로 여겼다.한연희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혼인한 여인이라는 신분이

  • 가장 늦은 진심   제18화

    어느덧 3년의 세월이 흘렀다.한연희는 변방의 작은 성에서 주막을 운영하며 살아가고 있었다.이때 덩치가 크고 피부가 거무스름한 대장장이가 심부름꾼에게 은자 한 조각을 툭 던지며 말했다.“늘 마시던 청화주 세 병 가져다주게. 집사람이 그 술을 가장 좋아해서 말일세.”주막 1층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술잔을 기울이는 남녀들은 격식 따위는 개의치 않은 채 웃고 떠들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만옥아, 자네 서방님은 아직도 물건을 호송하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는가? 벌써 얼마나 됐지? 한 달 가까이는 된 것 같은데. 이토록 소식이 없는 것을 보니 혹시 밖에서 무슨 변고라도 당한 건 아닌지 걱정되는군.”“내가 보기엔 자네도 참 아까운 사람이네. 피부도 희고 인물도 곱지 않은가. 빼어난 절세미인은 아니라 해도 착실한 사내 만나 한평생 의지하고 살기엔 부족함이 없지. 서방은 늘 집을 비우는데, 혹 재가할 생각은 정녕 없는 겐가?”“그래.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자네도 기댈 사람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처럼 청상과부나 다름없이 사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사람들은 웃으며 농을 건넸지만, 그 말에는 진심 어린 걱정도 담겨 있었다.그들 사이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던 중매쟁이는 며칠째 이 주막를 드나들고 있었다.근처 관청의 하급 관리 하나가 만옥, 즉 한연희를 눈여겨본 탓에 중매를 서 보려는 것이었다.한연희는 무심코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변장 가면이 여전히 제대로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괜찮습니다. 저는...”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이때 주막 문이 열리며 검은 옷을 입은 사내 하나가 안으로 들어섰다.키가 크고 체격이 건장한 그는 들어서는 순간부터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온몸에서는 서늘한 살기가 흘러나왔다.“그럴 것 없소. 만옥에겐 나 하나면 충분하오.”무연의 목소리는 사람만큼이나 차가웠다. 그 말이 떨어지자 시끌벅적하던 주막 안이 순식간에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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