جميع فصول : الفصل -الفصل 10

23 فصول

제1화

한연희는 얇은 침의를 꼭 여미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예, 정했습니다. 제 소원은 바로, 이 궁을 떠나는 것입니다.”무연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그대의 이름은 이미 궁의 명부에 올라 있소. 궁을 나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지. 죽음을 가장하고 신분을 바꾸는 수밖에...”“알겠습니다.”한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죽음을 가장하든, 신분을 바꾸든 상관없었다. 이 황궁만 떠날 수 있다면 무엇이든 좋았다. “허면 보름 뒤에 데리러 오겠소.”검은 그림자는 그 말을 남기고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한연희는 하늘에 걸린 가느다란 달을 바라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드디어... 악몽이 끝나는구나.그녀는 애초에 궁중 사람이 될 운명이 아니었다. 이곳에 들어온 것 또한 그저 뜻밖의 우연에 불과했다.3년 전만 해도 그녀는 승상부에서 가장 천대받는 서녀였다.반면 적녀인 언니 한소희는 승상부의 모든 사랑과 기대를 한몸에 받는 귀한 딸이었다. 당시 여섯째 황자였던 선우익과 서로 마음을 나누며 훗날을 약속한 사이이기도 했다.하지만 아버지 한태원은 넷째 황자 선우진이야말로 황위에 오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여겼다.그러나 세상일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끝내 황위에 오른 이는 선우진이 아니라 선우익이었다.황제의 노여움은 하늘을 찔렀고, 결국 승상은 좌천되었다.성난 황제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한태원은 집안에서 가장 천대받던 서녀 한연희를 궁으로 들여보내 선우익을 가까이에서 시중드는 궁녀로 삼았다. 그리고 그녀가 어떤 수모를 당하든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한연희는 처음 선우익을 마주했던 그날을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젊고 위엄 있는 선우익은 검은 용포를 걸친 채 싸늘한 눈빛으로 바닥에 엎드린 한연희를 내려다보았다.“승상 댁의 여식이라?”역시나 그날부터 선우익은 품고 있던 모든 원한을 그녀에게 쏟아부었다.채찍질과 벌세우기는 일상이었고, 혹독한 겨울밤에는 깨진 도자기 조각 위에서 무릎까지 꿇게 했다...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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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한연희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녀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우고,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소인이 병으로 정신이 혼미해져 허튼말을 하였사옵니다... 방금은 병세가 너무 깊어 곧 죽을 것만 같아 그만...”선우익은 그녀의 얼굴을 날카롭게 훑어보더니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짐이 보기엔 기운이 아주 넘치는구나.”그 말을 남긴 채 그는 그대로 떠나버렸다.전각 문이 닫히자마자 나연이 다시 달려들었다.“감히 폐하를 홀리다니? 오늘 아주 네년을 죽여버리겠어!”나연은 한연희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침상 기둥에 거칠게 내리쳤다.한연희는 이미 고열로 몸을 가누기도 힘든 상태였다. 거센 충격이 더해지자 눈앞이 아찔하게 뒤흔들렸다.저항하고 싶었지만 손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었다.나연의 손찌검은 빗발치듯 쏟아졌고, 날카로운 손톱은 한연희의 얼굴을 할퀴며 붉은 핏자국을 남겼다. “폐하께서 정말 너를 아끼시는 줄 아느냐? 너는 그저 잠시 가지고 노시는 노리개일 뿐이야!”곧바로 나연이 한연희의 가슴팍을 걷어찼다.극심한 통증이 밀려오자 한연희의 눈앞이 캄캄해졌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다시 눈을 떴을 때, 마당에서는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폐하!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제발 살려 주시옵소서...”한연희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창살 너머로 보인 광경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나연은 형틀에 묶인 채 엎드려 있었고, 두 태감이 번갈아 곤장을 휘두르고 있었다.그녀의 하체는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고, 울음소리도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반면 선우익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검은 용포 자락이 바람에 거칠게 휘날리고 있었다.시선이 느껴지자 그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창가의 한연희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순간 경멸이 스쳐 지나갔다.“쓸모없는 것.”그는 성큼성큼 전각 안으로 들어왔다.“그 꼴이 되도록 당하고도 고할 줄도 몰랐느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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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선우익은 일부러 잔인하게 그녀를 몰아붙이듯 말했다.“짐이 누구를 총애하든, 어디에서 총애하든 네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한연희는 곁눈질로 한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손수건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그제야 알았다. 선우익은 질투했고, 그래서 한소희도 질투하기를 바랐을 뿐이었다.그렇다면 자신은?같은 여인으로서 이런 자리에서 이런 수모를 당하면 얼마나 치욕스러울지, 그는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었을까.조정 대신들은 일제히 몸을 돌렸고, 악사(樂師)들마저 연주를 멈추었다.넓은 전각은 순식간에 적막에 잠겼다.들려오는 것은 옷감이 찢어지는 소리와 그녀의 흐느낌뿐이었다.선우익이 마침내 만족한 듯 몸을 일으켰을 때, 한연희는 이미 옷이 군데군데 찢어진 채 처참한 몰골이 되어 있었다.그녀는 마치 너덜너덜한 헝겊처럼 용교의에서 미끄러져 내렸다.하지만 선우익은 그녀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전각 밖으로 걸어 나갔다.궁인들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방금 전의 치욕스러운 일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서 있었다.한연희는 바닥에 몸을 웅크렸고, 손톱이 손바닥을 깊게 파고들었다.그 순간, 그녀는 마침내 선우익의 눈에 자신은 사람조차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연회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지자, 한연희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처소로 돌아갔다.다리에 힘이 풀려 그녀는 제대로 걷기도 힘들었다.바로 그때, 갑자기 등 뒤에서 거센 힘이 밀쳐왔다.“꺄악!”그녀는 그대로 차가운 호수에 곤두박질쳤다.곧 비릿하고 쓴 호숫물이 입안 가득 밀려들었다.필사적으로 몸부림치다가 간신히 손끝이 물가의 돌에 닿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를 다시 물속으로 거칠게 눌러 버렸다.“읍... 살... 려...”물이 코와 입으로 밀려들고 시야도 점점 흐려졌다.마지막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그녀는 물가에 서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을 희미하게 보았다.한소희였다.다시 눈을 떴을 때, 한연희는 별채에 누워 있었다.목은 불에 덴 듯 화끈거렸고, 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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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쓸데없는 소리!”선우익은 갑자기 상소문을 집어 던졌다.“짐의 일을 네가 감히 참견하려 드느냐?”이강해가 황급히 제 입을 한 대 때렸다.“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시옵소서.”...한연희는 자신의 처소로 돌아와 동경 앞에 앉아 연고를 발랐다.진상품으로 들어온 연고는 효력이 뛰어나 하루이틀이 지나자, 얼굴의 상처도 제법 많이 가라앉았다.모처럼 찾아온 한가한 틈을 이용해 그녀는 가져갈 짐을 정리하고 쓸모없는 장신구들은 은전으로 바꾸어 두었다.그러던 어느 날, 태후가 폐하와 한소희, 그리고 선우진을 불러들였는데 한연희 역시 선우익을 따라 함께 그 자리에 가게 되었다.점심 수라가 끝난 뒤, 태후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타일렀다.“후궁 자리가 3년째 비어 있으니, 이제는 후궁을 들여 자손을 번성하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선우익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담담히 답했다.“강산이 아직 안정되지 않아, 소자는 후궁에 마음을 둘 생각이 없습니다.”그 말을 들은 태후는 깊은 무력감에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저으며 씁쓸하게 웃었다.3년 동안 그는 줄곧 같은 핑계를 댔지만, 태후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선우익이 누구 때문에 이러는지 태후 역시 알고 있었기에, 결국 화살을 한소희에게 돌렸다.“왕비.”태후가 부드럽게 말했다.“자네와 우진도 이제 슬슬 아이를 가져야 하지 않겠느냐.”우드득.갑자기 선우익의 손안에 있던 찻잔이 산산이 부서지며 깨진 조각에 손바닥이 베이면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그는 곧바로 곁에서 차를 따르던 한연희를 끌어당겨 무릎 위에 앉혔다.“짐을 치료해라.”짙은 피비린내가 코끝을 찌르자, 한연희는 속이 울렁거렸다.“우웁...”그녀는 급히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하지만 태후는 오히려 반색하며 일어섰다.“설마 회임한 것이냐? 어서 태의를 불러라!”선우익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졌고, 한소희 역시 눈시울을 붉히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진맥 결과가 나오자, 한연희는 마치 얼음물 속에 빠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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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한연희는 순간 멍해졌다.분명 선우익은 아직도 한소희를 마음에 품고 있어, 머지않아 그녀를 다시 궁으로 데려올 것이다.헌데 어째서... 여전히 그녀를 곁에 붙들어 두려는 걸까?한연희는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말했다.“소인이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선우익은 그녀의 창백한 낯빛과 야윈 몸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이만큼 쉬었으니 충분하겠지. 오늘부터는 밤낮으로 짐의 곁에서 시중을 들라.”그날 이후 선우익은 다시 음식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수라간에서 온갖 보양식을 올려도 그는 한 입만 맛본 뒤 곧바로 한연희에게 넘겼다.“맛이 없군. 너에게 상으로 내리겠다.”한연희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시선을 받으며, 진귀한 음식들을 한 입 한 입 삼켜야 했다.그렇게 지내는 동안 그녀의 몸도 어느새 눈에 띄게 회복되어 갔다.가을 사냥이 열린 날, 선우익은 기어이 한연희를 데리고 나섰다.그러다 사냥터에서 한소희가 선우진과 나란히 말을 달리는 모습을 보자,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더니 갑자기 한연희를 끌어당겨 자신의 말 위에 태웠다.“꺄악!”한연희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조용히 하거라.”선우익은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은 채 귓가에 차갑게 속삭였다.“너와 한소희는 자매 아니더냐? 그 아이는 너처럼 겁이 많지 않던데. 한 번만 더 소리를 지르면 말 아래로 던져 짓밟혀 죽게 하겠다!”한연희는 입술을 세게 깨물고 눈을 감고선 더는 아래를 내려다보지 못했다.선우익은 코웃음을 치더니, 그녀를 데리고 사냥감을 여럿 잡았다.그때였다.숲속에서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수십 명이나 튀어나왔다.“폐하를 보호하라!”금군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 들고 맞섰다.혼란 속에서 한연희와 한소희는 납치되고 말았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절벽 끝이었다.납치범은 흉악한 웃음을 지으며, 한연희와 한소희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선우익! 네놈이 내 가족을 몰살시켰으니, 오늘은 나도 네가 가장 아끼는 두 여인을 잃는 고통을 맛보게 해 주겠다!”선우익은 그를 차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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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그 후로도 선우익은 매일같이 그녀를 찾아왔다.다만 상처가 얼마나 나았는지 확인하고, 살아 있다는 것만 확인하면 곧바로 돌아갔다.그는 언제나 그랬듯 불필요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러던 어느 날. 한소희가 갑자기 찾아왔다.“연희야, 몸은 좀 어떠니?”그녀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친히 한연희를 부축해 침상에서 내려 걷게 했다.“언니가 특별히 폐하께 청을 올려 널 보러 왔단다.”한연희는 경계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대체 뭐 하려는 겁니까?”“연희야, 그게 무슨 말이냐?”한소희는 억울한 듯 눈을 깜빡였다.“언니가 동생을 걱정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니?”바로 그때, 선우익이 안으로 들어왔다.한소희는 돌연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폐하, 폐하께서 예전에 제게 주셨던 옥패가 사라졌습니다! 폐하께서 훗날 저를 맞이하시겠다며 주신 증표였는데...!”한연희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무슨 일이냐?”선우익이 미간을 찌푸렸다.한소희는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한연희를 바라보았다.“오늘 제게 다녀간 사람은 연희뿐이었습니다. 저 아이가 훔친 것이 아니라면 달리 누가 있겠습니까...”한연희는 얼굴이 굳어졌다.“전 아닙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궁인들이 그녀의 베개 밑에서 산산조각 난 옥패를 찾아냈다.“연희야!”한소희는 더욱 서럽게 울부짖었다.“이 옥패가 내게 얼마나 소중한 물건인지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설마 나와 폐하가 한때 혼인을 약조했던 것을 투기해... 그래서 이런 짓을 한 것이냐?”선우익의 시선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그리고 마침내 한연희에게 머물렀다.“네가 한 일이냐?”한연희는 바닥에 엎드려 차분하게 말했다.“소인은 제 분수를 잘 알고 있습니다. 감히 분에 넘치는 마음을 품은 적도 없으니, 부디 폐하께서 밝혀 주시옵소서.”선우익의 눈빛에 복잡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그가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두 명의 궁녀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나섰다.“소인이 한 나인이 그 옥패를 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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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한연희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등이 불에 덴 듯 화끈거리고 있었다.침상 곁에서 약사발을 들고 서 있던 이강해는 한연희가 눈을 뜨자, 얼른 다가와 몸을 부축했다.“한 나인, 드디어 깨어나셨군요.”이강해는 한숨을 내쉬며 약사발을 건넸다.“어찌하여 폐하와 그렇게 맞서려 하는 것입니까? 제가 폐하를 모신 지도 수십 년이 되었지만, 사람을 벌한 뒤 전각 밖에 서서 반나절이나 서성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한연희는 약사발을 받아 들었다.씁쓸한 약물이 목을 타고 넘어갔지만, 마음속 쓰라림에는 미치지 못했다.“심려마십시오.”그녀가 조용히 말했다.“소인은 감히 폐하께 불만을 품은 적이 없습니다.”이강해는 고개를 저었다.“제가 주제넘게 말씀드리는 것을 탓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한 나인께 유독 엄하신 것은 사실이나, 매번 벌을 내리신 뒤에는...”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아무튼 한 나인 부친께서 예전에 줄을 잘못 서신 탓에 한 나인께서도 화를 입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훗날 왕비께서 입궁하시면 조금만 맞춰 드리십시오. 그러면 생활도 한결 편해질 것입니다.”한연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대신 베개 밑에서 작은 향낭 하나를 꺼내 이강해에게 내밀었다.“그동안 돌봐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이강해는 향낭의 무게를 가늠해 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한 나인, 이것은...”“작은 성의입니다.”한연희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부디 받아 주십시오.”이강해는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결국 향낭을 받아 들었다.그날 밤, 선우익은 갑자기 한연희를 침전에 들라고 명했다.한연희는 용상 앞에 무릎을 꿇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폐하, 소인의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아 괜히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힐까 염려되옵니다...”“벗어라.”선우익은 차갑게 말을 끊더니 음울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한연희는 입술을 깨물었다.내일이면 떠난다.허니 마지막 밤까지 그의 손에 짓밟히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명을 거역했다가는 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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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선우진 왕부(王府).선우익은 이유도 없이 가슴 한구석이 텅 빈 듯 허전해 미간을 꾹 눌렀다.마치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그저 착각이겠지.그는 한소희의 침상 곁을 지키며 그녀가 해독되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고요히 잠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중, 문득 궁에 있는 한연희가 떠올랐다.그녀는 잠이 들면 늘 몸을 웅크렸고, 미간에는 언제나 옅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마치 셀 수 없이 많은 근심을 품고 사는 사람처럼. 그때, 한소희의 속눈썹이 가볍게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선우익을 보는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환한 기쁨이 번졌다.“폐하께서 저를 구하러 오신겁니까?”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너무 아프고 무서웠습니다. 이대로 죽어 다시는 폐하를 뵙지 못할까 두려웠고, 폐하와 혼인...”‘하지 못할까 봐’는 끝내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하지만 선우익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충분히 알아들었다.그는 거리를 두며 쌀쌀맞게 자리에서 일어났다.“거의 해독되었으니 다행이군.”그가 담담하게 말했다.“짐은 아직 볼일이 있으니 먼저 가 보겠다.”한소희는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그리고 용기를 내어 그의 옆에 늘어진 손을 붙잡았다.“폐하, 조금만 더 계셔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그녀가 애절하게 말했다.“이번 중독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저는... 그날 폐하께서 연희를 곤장 치신 일로 인해 그 아이가 원한을 품고 사람을 매수해 저에게 독을 탄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습니다.”“전 평소 왕부에서 원한을 살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저를 미워하는 사람이라면 오직 연희뿐입니다.”“비록 서녀이긴 하나 제 여동생이기에 그날도 잘못을 인정하라고 타일렀습니다. 하지만 연희는 끝내 듣지 않았고, 오히려 저를 협박하며...”한소희는 말을 멈추었다가 조심스럽게 이었다.“만약 다시 폐하의 총애를 받게 되면, 반드시 베갯머리에서 폐하의 마음을 움직여 복수하겠다고 했습니다. 다만 그 아이가 이렇게 빨리 복수할 줄은 몰랐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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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저수궁의 불길은 꼬박 하루 동안 이어졌다.한연희가 살던 작은 마당은 완전히 잿더미로 변해 버렸고, 검게 탄 폐허만 남아 있었다.짙은 그을음 냄새가 매캐하게 풍겨왔고, 원래 붉은빛을 띠던 궁벽도 넓은 면적이 새까맣게 그을려 본래 모습을 알아보기 어려웠다.방 안의 집기들은 대부분 형체조차 남지 않았다.원래 침상이 있던 자리에는 검게 탄 시신 한 구가 부자연스럽게 몸을 웅크린 채 놓여 있었는데, 아마 생전에 극심한 고통을 겪은 듯한 모습이었다.그 광경을 본 선우익의 동공은 급격히 흔들리며, 가슴 한가운데가 거칠게 찢겨 나간 것처럼 아프고 허무했다.한연희가... 죽었다고?어째서?어젯밤까지만 해도 멀쩡하지 않았던가.오늘 밤 다시 침전에 들겠다고 분명 대답하지 않았던가.선우익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곧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흘러내려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저수궁 화재를 즉시 조사하라! 범인을 찾지 못하면 모두 목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이마에는 푸른 핏줄이 선명하게 돋아올라 있었다.마지막 남은 이성이 아니었다면, 당장 칼을 뽑아 사람을 죽였을지도 몰랐다.주변 사람들은 겁에 질려 몸을 움츠렸다.폐하가 이토록 분노한 모습은 오랜만이었다.지난번 이 정도로 격노했던 때는 한소희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을 때였다.그런데 지금은...모두가 벌벌 떨며 황급히 명을 받들고 조사에 나섰다.그때, 하늘에서 천둥이 터져 나왔다.순식간에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폭우가 쏟아질 듯 하늘이 어두워졌다.시신 곁에는 잿빛으로 변한 장신구들이 흩어져 있었는데, 모두 그가 한연희에게 하사했던 것들이었다.손목에 차고 있던 팔찌도, 불에 타다 남은 옷 조각들 역시 마찬가지였다.모든 흔적이 이 시신의 주인이 한연희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의심할 여지가 없었다.선우익이 아무리 믿고 싶지 않아도, 그것은 이미 바꿀 수 없는 현실이었다.아무리 그가 황제라 해도, 천하의 보물과 권세를 모두 손에 쥐고 있다 해도, 이제 다시는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뒤늦게 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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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그때, 이강해가 벌벌 떨며 안으로 들어왔다.“폐하, 아룁니다. 저수궁 화재에 대해 철저히 조사한 결과가 나왔사옵니다. 한 나인을 해치려 한 자는 없었으며... 그게... 그게...”하지만 진실을 입에 담는 일은 쉽지 않았다.그가 몇 번이고 말을 더듬으며 끝내 제대로 말하지 못하자, 선우익은 억눌러 두었던 분노를 터뜨렸다.“대체 무슨 일이냐? 제대로 말을 못 한다면 당장 네 목을 베어 버리겠다!”이강해는 죽음을 각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한 나인은 직접 불을 지른 겁니다. 누가 해친 것도 아니고, 한 나인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본 사람도 없었사옵니다. 한 나인이 스스로 살고 싶지 않아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 선우익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하,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고?”그는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헛웃음을 지었다.“짐이 그 아이에게 그리도 부족했단 말이냐? 그토록 짐을 떠나고 싶었던 것이냐!”“자유를 주지 않은 것 말고는 짐이 언제 그 아이를 박하게 대한 적이 있었느냐? 헌데 그 아이는 짐을 떠나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버리다니.”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것 같았다.수많은 칼날이 심장을 헤집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그때, 선우익의 눈가를 따라 붉은 핏빛 눈물이 얼음관 위에 떨어졌다.눈부시게 붉고도 처참했다.이강해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폐하, 소인의 주제넘은 말씀을 용서해 주십시오.”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한 나인은 원래부터 성정이 강직했습니다. 당시 일도 애초에 한 나인의 잘못이 아니었고, 승상께서 잘못된 편에 서신 탓에 화를 함께 입은 것뿐이지요. 입궁 또한 본인의 뜻이 아니었사옵니다. 지난 오 년 동안 수많은 벌을 받고 그토록 많은 고생을 겪었지만, 어느 누가 한 나인이 나이가 차 출궁하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는 사실을 모르겠사옵니까. 하지만 폐하께서는 보내 주지 않으시고 억지로 곁에 붙들어 두셨습니다.”이강해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만약 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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