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훈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 그는 빨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 내가 여러 번 말했잖아.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넌 끝낼 수 없다고. 구승현은 내가 처리할 거니까 넌 몸부터 챙겨. 소란 피우지 말고.”구승훈의 말을 들은 강하리의 마음은 고통으로 가득 찼다.그녀는 살짝만 건드려도 부서질 것 같은 인형처럼 침대에 기대어 있었다. 하지만 두 눈에는 단호함이 가득했다.“구승훈 씨, 난 이제 정말 당신 옆에 있고 싶지 않아요. 우리 엄마가 위독하셨을 때 당신은 나를 혼자 남겨뒀고 내 옆에 위험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송유라를 찾으러 갔어요. 난 그 순간부터 당신과 그만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이번에 납치를 당하지 않았더라도 난 당신을 떠날 생각이었어요.”강하리는 말을 마친 뒤 눈가가 살짝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구승훈은 눈앞에 있는 연약한 여자를 바라보자 마음이 아팠다.“네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나에게는 널 떠날 수 없게 만들 방법이 많다는 걸 너도 알잖아.”강하리는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들어 눈물이 가득 맺혀있는 두 눈으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네. 나도 알아요. 당신 앞에서 나 강하리는 영원히 하찮은 존재라는 걸. 영원히 반항할 여지도 없다는걸. 당신한테 날 다시 돌아오게 만들 방법이야 많겠지만 이제는 정말 지긋지긋해요. 어떤 방법으로 나에게 강요할 건데요? 위약금이요? 줄게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위약금 줄게요. 그것도 아니면 또 우리 엄마로 날 협박하려고요? 만약 구승훈 씨가 더 이상 우리 엄마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 거예요. 정말로 다른 방법이 없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엄마를 포기해야겠죠.”그녀는 구승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이제 구승훈 씨는 어떤 방법을 날 막으려고요?”강하리는 말을 마친 후 온몸에 힘이 빠진 듯 종잇장보다 창백한 얼굴을 하고서는 침대에 기대었다.구승훈은 관자놀이가 갑자기 지끈거렸다.그는 강하리가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예상했었다.
강하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연지는 케이크에 초를 꽂은 뒤 불을 붙여주었다.“자 이제 소원 빌어. 앞으로 건강할 거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강하리는 눈앞에서 일렁이는 촛불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소원을 빌었다.‘앞으로는 자유로울 수 있기를 기도할게요.’그녀는 촛불은 껐지만 케이크를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손연지도 굳이 강요하지 않았다.“크림은 소화가 잘 안돼. 기다려. 내가 소화 잘되는 음식으로 사다 줄게.”강하리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며 말했다.“연지야, 나 핸드폰 좀 사다 줘. 집에 가서 계약서도 가져다줄래? 그리고 약도 좀 준비해 줘.”손연지는 미간을 찌푸렸다.“어떤 약?”“음식을 먹을 수 없게 만드는 약 있지? 음식을 먹기만 해도 바로 다 토해내는 약 말이야.”강하리는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손연지는 경악했다.“너 미쳤어? 지금 네 몸이 얼마나 많은 영양소를 필요로 하는지 알아?”강하리는 씁쓸하게 웃었다.“이제 나한테 다른 선택은 없어.”만약 구승훈이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는다면 그녀는 떠날 방법이 없었다.그렇기에 그녀는 한 번 도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구승훈이 조금이라도 그녀를 신경 쓰길 바랄 뿐이었다.만약 며칠 동안의 고통으로 미래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그녀는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손연지가 입을 열었다.“너 정말 결정했어?”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손연지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하리야 나 정말 속상해 죽겠어. 넌 왜 저런 놈을 좋아하는 거야.”강하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맞다. 그녀는 왜 저런 남자를 좋아했을까?손연지는 강하리의 옆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고 바로 떠났다.구승훈이 밥을 사 왔을 때 강하리는 침대에 기대어 옆 탁자에 놓여 있는 작은 케이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그는 눈썹을 추켜세웠다.“누가 사 온 거야?”강하리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연지가요.”구승훈은 흥하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네 친구는 네 입맛을 잘 알고 있네
송유라는 강하리의 말에 순간 숨이 막혔다.그녀는 강하리가 공개적으로 이런 말을 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그러나 송유라의 표정은 이내 다시 어두워졌다.송유라는 강하리의 말이 끝내자 구승훈의 표정이 싸늘하다 못해 얼음처럼 굳어진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구승훈은 강하리의 말에 기뻐하지 않았다. 이 남자는 강하리와 헤어질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 같아 보였다.“송유라, 너 먼저 돌아가.”그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자 송유라의 표정은 더 일그러졌다. 그녀는 구승훈의 말을 무시한 채 계속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 부장님 내 뜻은 그런 게 아니라 난...”“꺼지라고.”강하리는 더 이상 그녀의 가식적은 말들을 듣고 싶지 않아 돌직구를 던졌다.“내가 경비원이라도 불러야 하는 건가요? 송유라 씨 공인이잖아요? 쫓겨나는 모습 보이면 안 될 텐데.”송유라는 강하리의 말에 멈칫하더니 바로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억울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승훈 오빠. 난 그저 강 부장님과 오빠가 싸울까 봐 걱정돼서 설명하러 온 건데 강 부장님은 이게 무슨 태도야?”구승훈의 표정은 정말 안 좋아 보였지만 강하리의 태도 때문이 아니었다. 강하리는 송유라를 항상 마음에 걸려 했다. 이런 상황에 송유라가 찾아온 것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것밖에 더 되지 않았다. 강하리의 꺼지라는 한 마디는 사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구승훈은 방금 강하리가 한 말에 화가 났을 뿐이었다. 강하리는 화가 나니 아주 자연스럽게 그가 필요 없다는 말을 뱉어냈다. 이 여자가 감히 더 이상 그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다니.구승훈은 마음속에서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지만 어디에 풀 곳이 없었다.그의 차가운 눈빛이 송유라에게로 향했다.“내가 먼저 돌아가라고 한 말 못 들었어?”송유라는 그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구승훈은 눈물을 흘리는 송유라의 모습에 그제야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먼저 돌아가. 여기에서 네가 더 설명할 건 없어.”송유라도 이쯤
손연지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오늘 너하고 함께 있으려고 VIP 병동 당직을 신청했거든. 근데 그 나쁜 년이 나한테 물을 가져다 달라 과일 깎아달라 아주 다 시키는 거야. 참다못해 내가 난 의사지 그쪽의 간병인이 아니라고 몇 마디 했더니 글쎄 컴플레인을 제기한 거 있지? 결국 과장님한테 불려 가서 혼났어. 진짜 화가 나 죽겠네.”“그리고 구승훈 그 개자식은 자기 때문에 네가 이렇게 힘든데 송유라 생일을 축하해줄 정신은 있나 보지. 정말 생일 케이크를 그놈 머리에 던져버리고 싶었어. 그 자식 네 생일은 챙겨줬니?"강하리는 씁쓸한 웃음을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미안해. 나 때문에 너까지 힘들게 만들었네.”“뭐가 너 때문에 힘들다고 그래. 다 그 나쁜 놈들 때문이야. 난 구승훈이 꽤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어. 지난번 인터넷 폭로 때도 옳고 그름은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었잖아. 근데 이번에는 정말 역겨워. 빨리 송유라 그년이 구승훈 그 개자식을 뺏어가야 할 텐데. 두 사람 아주 잘 어울려. 다시는 널 괴롭히지 말아야 할 텐데. 너 구승훈하고 헤어지면 내가 좋은 남자 소개해 줄게.”손연지는 강하리에게 윙크를 날리며 말했다.강하리는 웃으며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고 손연지의 손에 들려있는 물건을 바라보았다.옷 몇 벌과 새 핸드폰 외에 강하리가 말한 계약서도 들려있었다.강하리는 핸드폰을 가져와 카톡을 로그인한 뒤 바로 심준호에게 문자를 보냈다.[심 대표님 혹시 제가 부탁을 좀 드려도 될까요?]문자를 보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심준호에게서 전화가 왔다.“강하리 씨 나한테 부탁할 일이 있다고요?”강하리는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저한테 계약서가 하나 있는데 대표님이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계약을 해지하고 싶어서요.”“알겠어요. 나한테 보내줘요.”강하리는 계약서를 사진 찍어 심준호에게 보냈고 곧 심준호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이 계약을 끝내고 싶은 거예요?”강하리는 웃으며 말했다.“네.”심준호는 한참을 말이 없더니 입을 열었다.
강하리는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구 대표님. 잠깐 자리 좀 피해줄래요? 심 변호사님과 단둘이 얘기를 나눠야 해서요.”구승훈은 비웃음을 터트렸다.“왜? 내가 여기 있으면 얘기를 못 나눠?’심준호는 손에 든 자료를 정리하며 말했다.“당연히 가능하지. 단지 우리 구 대표님이 좀 진정해 주길 바랄 뿐이야.”일 얘기가 시작되자 심준호의 부드러운 분위기는 한순간에 사라지고 예리함과 프로패셔널함만이 남아 있었다.강하리는 잠시 말이 없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변호사님 저희 나가서 얘기 나눠요.”심준호는 구승훈을 한 번 쳐다보고서는 대답했다.“그래요.”구승훈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마침내 강하리가 몸을 일으키자 그가 일어서면서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고 얘기 나눠.”말을 마친 뒤 그는 병실을 떠났다.병실의 문이 다시 닫히자 강하린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심준호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아침 안 먹었어요?”강하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배가 고프지 않아서요.”심준호는 동의하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무슨 일이 있어도 밥은 먹어야죠.”강하리는 바로 단도직입적으로 일 얘기를 꺼냈다.“변호사님 이 계약을 해지하고 싶은데 위약금을 좀 깎아주실 수 있을까요?”심준호는 강하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꺼내 건네주었다.“밥 먹고 싶지 않으면 몰래 간식을 먹으면 되죠. 정말로 굶지는 말고요.”강하리는 심준호가 건넨 초콜릿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올리며 받았다.“감사합니다 변호사님.”심준호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하리 씨가 보여준 계약서는 하리 씨에게 많이 불리해요. 하지만 하리 씨가 반드시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하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구승훈도 계약을 많이 어겼고요...”심준호는 강하리의 앞에서는 무의식적으로 목소리가 많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강하리에게 계약서 내용을 조목조목 분석해 주었다.어느덧 두 시간을 훌쩍 넘어버렸다.“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하리
”여기서 두 시간을 기다렸다고?”구승훈이 그를 바라보았다.“정말 도와줄 생각인가?”“당연한 거 아니야?”심준호가 눈썹을 올렸다가 내렸다.“미리 말해주는 거지만, 강하리는 그쪽 대리비를 감당하기 힘들 거야.”심준호가 맡는 사안들은 건당 억대 대리비용이 지급되는 명문가 경제적 갈등이나 이혼소송 건이었다.구승훈의 냉소에 심준호가 미소로 대답했다.“뭐, 가끔씩은 공짜로 재능기부 하기도 해.”그러자 구승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재능기부로 포장된 흑심이 아니라?”“너, 지금 아무나 막 물고 늘어지는 미친개 같은 거 알아?”심준호의 표정 역시 서늘해졌다.“그럴 시간 있으면, 왜 너를 떠났는지 잘 돌이켜보고 뉘우치는 게 어때?”구승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한참 뒤, 다시 입을 열었다.“내가 뭐 하든 내 자유고. 하지만 계약은 계약이니까.”“맞아. 그러니까 내가 도와주든 말든, 그것도 내 자유지. 나 알잖아. 일할 때는 공과 사 철저하게 구분하는 거.”구승훈이 고개를 숙여 담배 한 대를 붙였다.한 모금 빨고 다시 입을 열었다.“성질 부리는 것 뿐이야. 좀 지나면 괜찮아져.”“성질 부린다고? 애 잃고 자기 목숨까지 잃을 뻔한 게 고작 성질 부릴 일이라고?”심준호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구승훈은 어두운 얼굴로 담배만 빨다가, 이윽고 한 마디 뱉었다.“아무튼 난 절대 안 놓아줄 거다.”그러고는 담배를 끄고 병실로 들어갔다.강하리가 여전히 침대맡에 몸을 걸치고 앉아있었다.옆에 놓인 음식들은 다치지도 않았다.구승훈은 점점 가슴이 더 답답해져 강하리를 바라만 보다가, 이윽고 픽 웃었다.“강하리, 3년이나 살 맞대고 지냈는데, 정말 아무 감정도 없어? 나한테?”강하리는 눈을 내리깐 채 대답이 없었다.하지만 눈 속에 복잡하고 씁쓸한 감정은 숨겨지지 않았다.참기 힘들었다. 막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겨우 웃음 한 줌을 짜냈다.“그냥 거래일 뿐이라고 한 건 그쪽 아닌가요?”그 말에 구승훈의 눈길에 고통스러움 한 결이 스쳤다가 사
힘없이 화장실 문 손잡이에 몸을 지탱하며 강하리가 쓴웃음을 지었다.“아니에요. 음식 때문이 아니라 제가 컨디션이 좀…….”저쪽에 얼굴이 시커매진 구승훈이 보였다.“강하리, 언제까지 이러는지 두고 보자.”낮은 웃음소리로 화답하는 강하리.그제야 아줌마는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의 불꽃이 튀고있단 걸 알아챘다.구승훈이 떠난 뒤, 아줌마가 강하리를 타이르기 시작했다.“아가씨. 이러시면 아가씨 몸만 망가지세요.”“다 이유가 있어서 이러는 거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그렇게 강하리는 사흘을 버텼다.구승훈의 강권에 저항하듯 단식 투쟁을 이어갔다.그동안 구승훈의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고.그러면서도 갈 데까지 가보자는 듯 타협하지 않았다.총성 없는 사흘 간의 전쟁.“형, 강 부장은 요즘 좀 어때?”나흘째 되는 날, 얼굴색이 말이 아닌 형에게 구승재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꾸준히 고얀 짓 중이시다.”구승훈의 냉랭한 말투에 구승재가 멈칫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 뭐야. 형이 먼저 잘못했다고 수그려 보는 건 어때?”“안 한 줄 아냐?”정말이지, 여자한테 이렇게까지 굽실댄 건 처음이다.물론 어디까지나 구승훈의 기준에서.다른 의미로는, 강하리만큼 고집 센 여자가 구승훈에겐 처음이다.구승재가 속으로 욕을 뱉었다.형 성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어떤 식으로 수그렸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내 말은, 윽박지르지만 말고 차근차근 잘 좀 달래 보라고. 강압적 포스남 컨셉이 모든 여자한테 먹히는 건 아니니까.” 구승훈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그 고집불통이 좋은 말로 달랜다고 퍽이나 잘 듣겠다.”“그건 형 추측일 뿐이잖아.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승재의 말에 구승훈의 눈에 살짝 광채가 감돌았다.그날 퇴근 후.구승훈은 액세서리 매장에 와 있었다.어렴풋하게나마, 강하리가 귀걸이는 안 좋아한다던 기억이 떠올랐다.꼼꼼히 둘러보며 고르고 골라, 목걸이 하나를 정교하게 포장했다.지이잉-!휴대폰이 울렸다.“대표님! 어디세요
강하리는 멍한 표정이었다.시종일관 한 마디도 없었다.소리 없는 눈물 한 방울이 눈가에서 흘러내렸을 뿐.드디어 원하던 결말인가.하지만 하나도 안 기쁜 건 왜일까.온통 상처만 남긴 둘의 관계.아주 미약하게나마 섞여있는 달콤함도.이런 방식으로 끝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아름답게 마무리를 지으려고 했었다.구승훈이 질리면 조용히 사라져 주는 시나리오도 생각했었다.하지만 이런 식으로 그녀가 먼저 떠날 줄은 몰랐다.구승훈의 눈길이 그녀의 눈물에 멈췄다. 저도 모르게 닦아주려고 손이 올라갔다.하지만 강하리가 고개를 돌려 비켜버렸다.구승훈의 손이 허공에 얼어붙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손을 거둬들였다.“아줌마가 죽 보내왔으니까 조금이라도 먹어.”구승훈은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 약은 안 먹어도 돼. 억지로 먹이지 않을게.”말을 마친 뒤, 뒤돌아 서서 아줌마가 가져온 죽을 그릇에 옯겨담았다.그릇을 든 손에 뼈마디가 하얗게 튀어올라와 있었다.다 뜨고 돌아서니, 강하리가 안간힘을 쓰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구승훈이 급급히 그릇을 한쪽에 놓고 강하리를 부축해 일으켰다.강하리의 입술이 일 자로 꽉 다물어졌다. 소리 없이 옆에 놓인 그릇과 숟가락을 가져와, 조용히 죽을 떠 먹기 시작했다.1인분이 채 안 되는 죽을 강하리는 30분동안이나 먹었다.구승훈은 조용히 서서 강하리가 죽을 다 먹기를 기다렸다가, 그녀가 그릇을 놓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앞으로 어떻게 지낼 건데?”“회사 다니면서 먹고 사는 거죠 뭐.”“회사는 다 나은 뒤에 나오는 걸로.”강하리가 멍해졌다가 곧 웃었다.“구 대표님,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저 에비뉴에서 이직하려고요.”“이유는?”구승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가급적 그쪽이랑 직장에서 마주칠 일이 없었으면 싶어서요.”“지금 나랑 생판 남남이 되겠다는 건가, 강 부장?”구승훈의 입에서 상처 입은 짐승 같은 으르렁거림이 흘러나왔다.“끝낼 거면 깨끗이 끝내는 게 좋을 것 같네요.”구승훈의 얼굴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