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휴대폰을 꺼내 무의식적으로 강하리를 찾으려다 손가락이 멈칫했다.그는 카톡을 한 번 살펴본 후 급하게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 쪽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구승훈의 심장이 세차게 내려앉았다.“지금 당장 국내로 돌아가!”구승훈은 귀국해 곧장 손연지의 집으로 향했고 반나절 동안 문을 두드렸지만 집 안에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자 그는 돌아서서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손연지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구승훈이라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나지 않았고 구승훈은 손연지가 퇴근할 때까지 병원 앞에서 기다렸다가 그녀를 만나러 왔다.“강하리 어딨어요?”손연지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구승훈 씨 전에는 뭐하고 이제와요? 하리가 그날 공동묘지에서 하루 종일 당신만 기다린 거 알아요?”구승훈의 얼굴에 고통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하리 어딨어요?”손연지가 말을 돌렸다.“나도 모르니까 나한테 와서 물어보지 마요. 알아도 말 안 해요. 구승훈 씨, 누구도 제자리에서 가만히 당신 기다려주지 않아요.”손연지는 말을 끝내고 그냥 그렇게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의 가슴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가라앉았고 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노진우에게 연락했다.“강하리 어디 갔어?”노진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답했다.“강하리 씨는 지난 며칠 동안 저를 못 따라다니게 했어요. 그날 묘지에서 쓰러져서 병원에 하루 입원한 뒤로 손 선생님이 저를 떼어냈고요.”구승훈은 미간을 찌푸렸다.“그 여자가 비키라고 해서 안 따라다닌 거야?”“대표님 죄송했다.”구승훈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다가 살짝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난 이틀 동안의 동선을 확인해서 연성을 떠난 건 아닌지 확인해 봐.”노진우는 서둘러 대답했고 그 후 구승훈은 심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강하리 지난 며칠 동안 B시에 갔었어?”백아영은 그날부터 아팠고 심준호는 지난 며칠 동안 그녀를 돌보느라 바빴기에 강하리에 대해선 전혀 몰랐다.“둘이 싸웠어?”구승훈은 한숨을 내쉬었다.“나한테 헤어지재.”심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게 하기 위해 의사는 전기 충격 요법까지 사용했다.나중에 그 기억은 정말 잊혀졌지만 그는 삶에 대한 희망도 잊은 것 같았다.그러던 어느 날 심준호는 그를 다시 찾아갔고 그의 이러한 말을 들었다.“하양이 데리러 가야 해.”그가 기억하는 건 이름뿐이다, 하양이.심준호는 기억을 더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승훈아, 내가 지나치게 의심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송유라가 정말 네 어릴 적 그 사람이 맞아? 나는 왜 네 말대로 송유라가 그렇게 따뜻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사악한 기운만 풍겨대는 것 같을까.”구승훈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심준호가 말하지 않아도 가끔 그녀가 어떻게 이렇게 됐는지 의아했다.“하지만 걘 강주에서의 내 어린 시절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어.”심준호가 멈칫했다.“뭘 아는데?”구승훈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멀리 내다보았다.“내가 언제 가고 언제 돌아왔는지, 거기서 어떤 모습이었는지, 내가 살던 곳과 걔가 살던 곳, 그리고 내가 거기 있을 때 돌봐준 가정부 이름과 얼굴까지도. 심지어 내가 아플 때 팥죽을 먹으면 낫는다고 말해준 것까지.”심준호는 미간을 찌푸렸다.“그래? 내가 괜히 의심하는 건가. 근데 그건 마음먹고 알아보면 다 알 수 있는 거잖아.”구승훈이 웃었다.“내가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미리 알았던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감히?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은 너랑 나, 우리 할아버지 말고 구승재조차 몰라.”심준호는 얼굴을 찡그렸다. “승훈아, 그때 그 정신과 의사는 믿을 만한 사람이었어?” 구승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할아버지가 찾은 사람이니까 믿을 만하겠지.”심준호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그냥 하는 말인데 송씨 가문도 의약 사업을 하고 있으니 그 정신과 의사와 접촉하기만 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잖아.”구승훈은 당황했다.송유라를 의심한 적이 없었던 것은 송유라가 많이 닮아서가 아니라 어린 시절의 사건들은 대외적으로 잘 감춰왔기 때문에 감히 구씨 집안을 상대로
B시, 강하리는 탑승 전 마지막 준비를 마쳤지만 날씨 때문에 비행기가 연착되었다.그녀는 터미널에 서서 밖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죄책감에 사로잡혔다.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손이 작은 배를 쓰다듬다가 나지막이 속삭였다.“미안해, 엄마는 너에게 행복한 가족을 만들어주지 못할지도 몰라.”그녀는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엄마는 널 정말 사랑하고 아껴서 아빠의 사랑까지 대신 채워줄 거야, 알았지?”주해찬은 옆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그녀가 멍하니 배를 만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이 먹먹해졌다.구승훈이 또다시 그녀를 아프게 하면 자신이 꼭 데려가겠다고 다짐했었다.하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상처받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그는 따뜻한 우유 한 잔을 가져와 강하리에게 건넸다.“비가 한동안 그치지 않을 것 같으니 휴게실 가서 좀 쉬어.”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또다시 천둥 번개가 하늘을 강타했다.그런데 이렇듯 궂은 날씨에도 공항 반대편에는 전용기가 착륙을 준비하고 있었다.구승훈은 비행기에 앉아 무심한 표정으로 밖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바람 때문에 동체가 심하게 흔들려 승무원들은 모두 긴장한 표정이었지만 구승훈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대표님, 착륙이 잘 안될지도 몰라요. 날씨가 안 좋아요.”구승훈은 시선을 들어 깊고 차가운 눈빛을 보였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대원들은 식은땀을 흘렸다.“즉시 착륙 준비를 하겠습니다.”승무원들은 말을 마친 후 심호흡을 하고 착륙 준비를 하러 갔다.밖에서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강하리는 얼굴이 살짝 하얗게 질린 채 터미널에 앉아있었다.웬일인지 자꾸만 마음이 불안했다.“왜? 몸이 안 좋아?”주해찬이 옆에서 묻자 강하리는 고개를 살며시 흔들었다.“아니요...”그녀가 말하자마자 옆에서 비명이 들렸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밖에 비행기 한 대가 활주로에서 미끄러졌대.”“세상에, 이런 날씨에 착륙하다니 기장 미친 거야?”“다친 사람은 없는지 궁금하네.”“없길
구승훈의 몸속에서 둔탁한 통증이 느껴지며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옆에서 주해찬이 다가와서 주먹으로 구승훈의 얼굴을 내리쳤다.주변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구승훈은 주먹을 맞고도 그대로 벌떡 일어나 웃었다.“왜, 내 아내를 납치하려다가 안 되니까 화난 거야?”주해찬은 불같은 눈빛으로 구승훈을 노려보았다.그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경우가 드문데 오늘은 참을 수 없었다.“구승훈, 잘해주고 지켜준다던 게 이런 거였어?”구승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하리야, 우리 둘이 따로 얘기하자.”강하리는 그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 남자의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가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다면 그녀가 떠나도 계속 귀찮게 굴 것이다.구승훈은 그녀가 거절하지 않는 것을 보고 옆에 있는 VIP실로 그녀를 끌어당겼다.주해찬이 따라가려 했지만 강하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만 했다.VIP실 문이 닫히자 순식간에 외부의 시선이 차단됐다.“하고 싶은 말 빨리 해요.”“너 안 보내.” 구승훈은 그녀에게 심플한 한마디만을 건넸고 강하리는 비웃었다.“구승훈 씨,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요? 우린 이미 헤어졌잖아요!”“헤어지기로 한 적도 없고 더군다나 난 아직 네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아빠잖아!”구승훈의 눈빛이 복잡했다.“하리야, 난 이미 정말로 송유라와 선 그었어.” 강하리의 코끝이 시큰거렸다.선을 그었다고?왜 그 말이 믿기지 않을까.송유라가 살아 있는 한 그 선은 절대 그어지지 않을 텐데.“구승훈 씨, 수없이 했던 그 말을 내가 아직도 믿을 것 같아요?”그녀는 시선을 내린 채 그를 떼어냈다.“게다가 우리 사이에는 송유라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그가 다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하리야, 정말 우리 애가 사생아가 되길 바라는 거야? 넌... 불완전한 가정이 아이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구승훈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가득했다.행복하고 건강한 가정에서
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무슨 상황인데요, 왜 갑자기 연기된 거예요?”주해찬은 고개를 저었다.“자세한 건 부서로 가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아.”강하리는 구승훈을 쳐다보지도 않고 돌아서서 문밖으로 나갔고 구승훈도 말리지 않고 바로 뒤따라 나갔다.주해찬은 그를 쳐다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세 사람이 대기실 밖으로 나왔을 때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강하리는 곧장 주해찬의 차로 향했고 구승훈은 뻔뻔하게도 그 뒤를 바짝 쫓았다.주해찬은 미간을 찌푸리다가 결국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차의 시동을 걸었다.구승훈만큼 뻔뻔한 사람은 정말 본 적이 없었다.강하리가 이미 몇 번이나 거절했는데도 여전히 귀찮게 매달리고 있었다.주해찬은 아마도 이것이 자신과 구승훈의 차이점일 거라고 생각했다.외교부에 도착하니 진태형이 기다리고 있었고 약간 어두워진 얼굴이 강하리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진 장관님, 무슨 일 있으세요?”진태형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강하리에게 편지 한 통을 건넸다.강하리는 편지를 받아 살펴본 뒤 머릿속이 윙윙 울렸다.내부 고발 편지인데 자신이 누군가의 스폰을 받았다는 것이다.주해찬의 얼굴도 어두워졌다.“이미 이 문제에 대해 부서에서 회의했고 감찰위원회 사람들도 왔어. 구승훈이 둘 사이를 밝히는 걸 녹음까지 했는데 그래도 해외 파견에 영향이 생겨서 좀 미뤄질 것 같아.”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이제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네요?”진태형이 한숨을 쉬었다.“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어. 구 대표가 한 걸 녹음해 둬서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이번에 당장 외교부를 떠나야 할지도 몰라. 지금은 불안해하지 마, 일 해결하고 내가 최대한 힘 써볼게,”강하리는 짜증을 참으며 나지막이 말했다.“네, 알겠어요. 진 장관님 감사해요.”밖으로 나와서 구승훈은 차에서 내린 뒤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병원에 가서 강하리 임신 검사 기록을 모두 과로로 병명을 바꾸고 임신에 대한 모든 정보를 삭제해.”그가
강하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라앉았지만 구승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두 마디만 할게. 병원에 임신 검사 기록을 지워달라고 부탁해 놓았어.”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고마워요.”원래 손연지가 해주길 바랐던 일이지만 구승훈이 먼저 생각할 줄이야.“하리야, 내가 당연히 할 일이야.” 구승훈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고 강하리는 웃었다.“구승훈 당신이 송유라한테 간 순간부터 내가 돌아보지 않을 거란 걸 알았어야지!”“하리야, 난 그냥...”강하리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가서 인연 끊으려고 했다는 말은 하지 마요. 당신은 평생 모르겠지. 정말 내버려둘 생각이었으면 그 여자한테 무슨 일이 있어도 신경 쓰지 않았겠지. 구승훈 씨, 당신이 아무리 부정해도 송유라는 여전히 당신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어.”구승훈은 강하리의 말에 얼굴을 찡그리며 한동안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나는 걔한테 고맙고 감사한 마음뿐이야.”“그럼 그 마음 갖고 가세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그를 밀어냈다.도저히 마음속으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말을 못 할까.대체 그의 마음속에 어떤 존재이기에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했던 그가 또다시 송유라를 찾아간 걸까구승훈의 비밀 애인일 땐 뭐라 해도 참을 수 있었지만 정식으로 사귀고 결혼까지 전제로 한 이상 자기 남자가 한눈파는 걸 용납할 수가 없었다.구승훈은 다시 문을 두드리지 않고 프런트로 가서 강하리 옆에 있는 방을 달라고 했다.그러고는 소파 앞 카펫에 앉아 밤새도록 담배를 피웠다.새벽이 되자 심준호에게 전화를 걸어 프런트로 가서 강하리 방의 방 카드를 달라고 한 뒤 문을 열고 들어갔다.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는 평화롭게 잠들어 있지 않았다.구승훈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가슴 아픈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병원으로 달려가 영안실에서 나오는 그녀를 봤을 때의 그 눈빛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게 남아있었다.눈과 코는 빨갛고 슬픔이 가득했지만 미련은
강하리는 반지를 그에게 그대로 던지고는 뒤돌아 탑승 게이트로 향했다.구승훈은 서둘러 반지를 잡았고 손에 놓인 반지를 바라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더니 서둘러 뒤를 따랐다.“반지가 싫다면 됐어. 뭐 좋아해? 내가 다 줄게, 응?”강하리의 발걸음이 주춤하더니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나 그 경매에 나왔던 귀걸이 정말 마음에 드는데.”애초에 그가 먼저 귀걸이를 주겠다고 해서 무척 기대했지만 결국 그 귀걸이는 송유라에게 돌아갔다.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모든 것이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원래 그녀에게 주기로 약속된 것도 송유라의 손짓 한 번이면 주저 없이 그녀에게 가져다 바칠 거니까.구승훈은 숨이 턱 막히며 한참이 지난 후에야 물었다.“왜 그때 말 안 했어?”강하리는 씁쓸한 눈빛으로 웃었다.“내가 말해도 소용 있었을까요? 구승훈 씨, 그거 알아요? 그때는 내가 꼭 광대가 된 것 같았어요.”강하리는 이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지나간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다시 언급해 봤자 무의미했으니까.하지만 마음속으로 참아왔던 울분이 터졌다.왜 자신만 계속 억울하게 참고 있어야 하나.구승훈은 가슴이 꽉 막힌 듯했다.“미안해, 난 몰랐어. 난 네가 귀걸이 정말 싫어하는 줄 알고...”“난 단지 그 여자한테는 제일 좋은 걸 주면서 나한텐 대충 아무거나 골라주려는 당신 태도가 싫었던 것뿐이야.”강하리가 말하며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가는데 구승훈의 심장에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하리야, 앞으로는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만 너한테 줄게.”하지만 강하리는 곧바로 그의 손을 뿌리쳤다.그런 건 진작에 필요 없었다.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이미 잃어버렸으니까.지금은 그저 아이만 지키고 싶을 뿐이었다.비행기가 연성에 착륙하고 강하리는 간병인 아줌마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구승훈은 강하리를 계속 따라다니며 그녀가 통화를 마치자 곧장 차에 태웠다.“구승훈 씨, 당신...”“저번에 묘지로 불렀을 때 물어보고 싶었던 게 뭐였어? 아주머니한
“미안하다고 할 필요 없어.”강하리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호흡을 가다듬었다.“구승훈, 송유라한테 갔을 때도 당신은 내가 한 말을 잊은 게 아니야. 다만 원하는 대로 선택한 것뿐이지.”“하리야, 다 알면서 왜 그래. 내가...”“난 몰라. 내가 아는 건 내가 필요할 때 당신이 송유라에게 갔다는 것뿐이야. 구승훈, 그때 엄마가 그렇게 됐을 때 내가 얼마나 무기력했는지 알아? 얼마나 당신이 곁에 있어 주길 바랐는지 알아? 근데 당신은 없었어. 당신은 두 번이나 그렇게 날 버렸어. 난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구승훈은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저릿한 통증이 밀려왔다.“미안해,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하리야, 약속할게.”그는 그녀에게 부드럽게 입맞춤하며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했다.“하리야, 나한테 속죄할 기회를 줘, 응? 난 너를 지키고 우리 아이도 돌보고 둘에게 온전한 집을 주고 싶어.”강하리의 가슴이 아플 정도로 답답해 났다.집이라...간절히 원했지만 헛된 꿈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던 그녀는 곧바로 그를 밀어붙였다.“모든 잘못에 속죄할 기회가 주어지진 않아.”구승훈의 심장이 철렁하며 곧 그의 시선이 그녀의 작은 배로 향했다.“하리야, 그냥 우리 아이에게 기회를 준다고 생각하면 안 될까?”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배에 내려앉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그 모습이 정말 아이의 탄생을 고대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의 모습처럼 보였지만 강하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이 남자는 결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그가 정말 송유라와 선을 그으려고 노력하는 걸지도 모른다.하지만 그 경계는 너무나도 약하고 허무했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다가 한참 후 그의 손을 밀어냈다.그런데 그 순간 구승훈이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았다.“하리야, 이제부터 내가 너와 아이를 지켜줄게.”강하리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기만 했다.하지만 그녀의 눈가는 살짝 붉어져 있었다.간병인 아주머니는 강하리의 모습에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