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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곰돌이의 정체

Author: 은지수
선하윤은 방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아빠가 고개를 숙인 채 그녀를 가리키며 큰소리로 외쳤다.

“이런 배은망덕한 년이! 당장 내 술 내놔! 술 먹고 싶단 말이야, 끄흐흐... 내 술 내놔!”

[아빠는 이 가정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합니다. 아빠를 거부하지 마세요. 아빠는 스트레스가 많습니다. 만약 거부하고 싶다면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세요.]

선하윤은 아빠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알코올은 아빠의 오염을 가중시킬 것이다.

그녀는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지만 엄마가 한창 부엌에서 청소 중이었다. 그릇들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조각났고 엄마는 맨발로 유리 조각 위를 밟고 있었다.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데도 마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엄마...”

선하윤이 엄마를 불렀지만 듣는 척도 않았다.

이러니 어리광을 부릴 수 있을까?

술병은 소파 밑에 숨겨진 상태, 선하윤은 이 어수선한 거실에 단 1분도 더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대충 찾는 척 몇 번 뒤져보다가 소파 밑에서 3분의 1만 남은 술병을 꺼내 아빠에게 건넸다.

이에 아빠는 고개를 들고 꿀꺽꿀꺽 들이켰다.

선하윤은 방에 돌아가겠다고 말한 뒤 뒤돌아보지 않은 채 곧게 침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술병이 부서지는 소리가 뒤에서 울려 퍼졌다.

아빠는 때로는 날카롭게 웃다가 때로는 격하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 망할 년, 배은망덕한 년! 내가 매일... 끄흐흐... 밖에서 목숨 걸고 돈 버는 게 다 너를 위해서인데 이렇게 외면해?”

방 안에서 신채린이 어두운 눈길로 선하윤을 쳐다봤다.

“주인님, 이미 경미하게 오염되었습니다.”

위어드로서 신채린은 오염을 감지할 수 있었다.

‘안 돼!’

선하윤은 침대에 앉아 예쁜 눈썹을 찡그렸다.

이건 분명 아빠와 엄마의 회색 침실에 들어간 이후로 오염됐을 것이다.

창문은 단언컨대 가장 위험한 장소였다.

밤이 되자 할머니는 어젯밤처럼 문을 두드리러 오지 않았지만 침실 문에서 계속 쿵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외부의 위어드가 문을 열려고 시도하는 듯했다.

블랙캣은 새벽에 침대 밑에서 기어 나올 것이고 어젯밤처럼 그녀의 얼굴과 손바닥을 핥을 것이다.

경미하게 오염된 선하윤은 밤새도록 악몽을 꾸었다.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밤이 깊어질수록 더욱 심해졌다.

처음에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꿈을 꾸었는데 어두운 골목길에서 계속 카메라가 찰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학교 화장실에서 칸막이 아래로 별안간 새까만 카메라가 튀어나왔다.

누군가 어둠 속에서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귀엽네, 내 모델 해줄래? 사진 완벽하게 찍어줄게!”

“바지는 너한테 안 어울려. 지난번 치마가 훨씬 예뻤어.”

“넌 잠든 옆모습이 정말 매혹적이야.”

“내 카메라 앞에서 쑥스러워하지 마.”

“왜 도망가는 거야! 말 안 듣는 아이는 벌을 받아야지!”

“영원히 아름답게 잠들어 있는 나만의 모델이 되었으면...”

신문지에서 다양한 크기의 단어를 골라 쪽지를 만들었고 그걸 책상 안에 쑤셔 넣었다.

섬뜩한 말투와 뱀처럼 끈적거리는 시선...

악몽에 시달린 선하윤은 얼른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며 눈을 뜨려고 했지만 마치 가위라도 눌린 것처럼 악몽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악몽은 그녀의 의지를 어지럽혔다.

카메라는 곳곳에 있었고 마치 벗어날 수 없는 도깨비처럼 모든 각도에서 튀어나왔다.

그녀는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탈수된 물고기처럼 숨까지 헐떡이면서...

어두운 골목길은 아득할 따름이었다.

야옹.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자 카메라들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선하윤도 그제야 평온을 되찾았다.

졸음이 쏟아지고 그녀는 또다시 꿈을 꾸었다.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블루 앤 화이트 교복 차림에 댄디 컷 머리를 한 껄렁한 남학생에게 끌려서 학교 뒤 정원으로 가더니 고백을 받았다.

남학생은 공부가 엉망진창이고 학교에서 유명한 문제아였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남학생은 그림을 잘 그리고 쨍쨍 내리쬐는 햇살 아래 농구 하는 모습도 멋있다는 것을.

반항아 같은 외모와 달리 실은 섬세하고 부드러운 아이였다.

남학생은 그녀에게 편지도 쓰고 인형도 선물하고 격려의 말도 많이 해줬었다...

아침이 되자 신채린이 그녀를 깨웠다.

눈을 떠보니 익숙한 파란색 방이었다.

억압적이고 창문이 없는 방.

왠지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어제 분명 잘 잤는데 머리가 왜 이렇게 무거운 걸까?

이 괴담은 의도적으로 그녀를 배고프고 잠 못 들게 만들었다.

첫날 밤의 노크 소리. 둘째 날 밤의 악몽.

항상 그녀가 실수하기를 바랐다.

선하윤은 눈 밑의 다크서클을 문지르며 하루빨리 이 던전을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규칙 위반으로 죽지 않더라도 수면 부족으로 쓰러질 테니까.

“주인님, 몸에 있던 오염이 사라졌어요.”

“뭐라고?”

선하윤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가. 어제의 경미한 오염이 없었다면 선하윤은 그 두 가지 꿈을 꾸지 못했을 것이다.

[S등급: 던전의 모든 진실을 밝혀낸다.]

꿈속의 내용들이 바로 S등급 통과의 핵심 단서였다.

꿈과 찾아낸 단서들을 종합하면 딸은 계명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곰돌이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며 둘은 함께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노력하자고 약속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딸은 어떤 변태에게도 시달렸던 것 같다. 그 사람은 종종 몰래 사진을 찍고 딸의 책상 서랍에 괴롭힘 편지를 찔러 넣었다.

방 안의 벽은 누렇게 변색되기 시작했고 문 아래쪽은 얼룩덜룩하고 낡았다.

아직 통과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오염이 사라질 수 있을까?

오염은 만성 질환과 같아서 이성을 삼키고 육체를 변형시킨다.

문을 열자 잠금장치가 느슨해져 일부가 빠져나왔다.

거실 벽은 더욱 심하게 노화되어 벗겨진 벽지가 썩어 문드러진 피부 같았다.

아빠는 집에 없고 소파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부엌은 엉망이었다. 엄마는 등을 구부리고 쓰레기통의 오물 덩어리를 땅에 던지고 있었다.

“어젯밤에 또 블랙캣 울음소리를 들었어! 빌어먹을! 고양이가 내 쓰레기통을 뒤집어 놓았어. 내 부엌을 더럽혔다고!”

“왜 아무도 내 노고를 알아주지 않는 거야!”

“짜증 나 정말! 이 집에서 나만 힘겹게 버티고 있잖아!”

엄마는 매우 난폭했지만 내뱉은 말은 전부 인간의 언어였다.

“엄마, 좋은 아침이에요.”

선하윤이 나오자 엄마는 쓰레기를 뒤지는 걸 멈추고 그녀를 향해 억지 미소를 지었다.

“우리 딸, 일어났어? 엄마가 아침 차려줄게.”

선하윤이 물었다.

“엄마, 쓰레기통에서 뭘 찾고 있었어요?”

“당연히 그 빌어먹을 고양이지! 고양이가 내 보물을 훔치려 했어. 절대 가만 안 둘 거야!”

엄마는 일어서서 코를 찡그리더니 고개를 숙이고 하얀 앞치마를 보았다.

그제야 앞치마가 얼룩진 걸 발견하고 말했다.

“어머나! 내 옷이 왜 이렇게 더럽지? 아가, 아침은 부엌에 있어. 엄마 먼저 씻고 올게.”

“네, 엄마.”

선하윤은 까치발로 부엌에 들어가며 오물을 밟지 않으려 애썼다.

건강식품은 냉장고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었고 그 앞에는 악취를 풍기는 고기들이 놓여 있다.

음식을 다 먹자 발코니에서 쨍그랑하는 소리가 났다.

휠체어가 부서지니 할머니는 끔찍한 살덩어리처럼 바닥에 쓰러져 움직이지 못했다.

부서진 휠체어 철근이 그녀의 몸을 꿰뚫었다.

할머니는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신음했다.

분명 눈알이 땅에 떨어졌는데 선하윤은 여전히 할머니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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