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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온라인수업

Author: 은지수
선하윤의 뇌리에 떠오른 생각과 동시에 하얀 연기 속에서 공물 카드가 나타났다.

그건 바로 바셰론 콘스탄틴 4605F 오토매틱 시계.

선하윤은 시계를 손목에 찼는데 강렬한 붉은색 가죽 시곗줄과 다이얼 안쪽에 박힌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가 유독 눈에 띄었다.

시계는 정확히 9시 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선하윤의 표정이 그제야 살짝 풀렸다.

‘그래도 쓸모없어 보이는 사치품을 잔뜩 태워서 참 다행이야.’

이 방에는 창문이 없어 책을 펼쳐 들고 있자니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또한 책에 적힌 글자들도 그저 엉망진창인 귀신 낙서였다.

선하윤은 책을 뒤적거리다 그 안에 끼워진 연애편지 한 통을 발견했다.

편지를 펼치자 그제야 알아볼 수 있는 글자가 나타났고 단정한 글씨체에서 진심 어린 사랑이 느껴졌다.

「너랑 함께 쏟아지는 별똥별의 찬란함을 보고 싶고, 초봄에 끓인 따뜻한 차 한 잔 마시고 싶어. 그리움에 관련된 책도 한 권 읽고 싶고... 나랑 함께해 줄래? 사랑한다는 말은 너무 부담되고 좋아한다는 말은 너무 가벼워서 아껴두기로 했어. 그림 실력이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야.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내가 본 모든 풍경 속에 너를 담아둘 텐데.]

맨 밑에는 [곰돌이가]라고 적혀져 있었다.

선하윤은 문득 세 번째 룰이 떠올랐다.

[당신은 착한 아이입니다. 착한 아이는 이른 연애를 금지해야 합니다.]

이 편지는 반드시 숨겨야 한다. 아빠와 엄마에게 들키는 일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편지를 어디에 숨겨야 할까?

그녀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다.

쓰레기통이 텅 비어 있어서 함부로 버렸다가는 너무 눈에 띌 것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침대 밑, 선하윤은 왠지 모르게 그 어둠 속에 섣불리 손을 뻗어서는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책장에는 책이 가득했는데 그중에서 눈에 띈 건 [고양이 생활 습관 가이드]라는 책이었다.

책갈피는 블랙캣을 안고 있는 소녀의 사진이었다.

룰에 따르면 엄마는 동물에 관한 모든 것을 혐오하므로 그 책을 펼쳐볼 확률은 매우 낮았다.

또한 아빠는 남자라서 딸의 방에 함부로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선하윤은 만일을 대비해 편지를 반으로 접어 [고양이 생활 습관 가이드] 안에 끼워 넣었다.

모든 것을 마치고 다시 시간을 확인하니 현재 시각은 9시 18분이었다.

신채린은 여전히 말없이 선하윤의 옆에 서 있었다. 선하윤이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마치 생명이 없는 목각 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고작 난이도 1의 던전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위험으로 가득 찼다.

그 시각, [스위트홈] 던전이 전 세계 곳곳에 강림하고 있었고 이미 크고 작은 피해가 속출했다.

누군가는 갑자기 집이 낯선 모습으로 변해 버린 걸 직관했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가 복도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또 누군가는 ‘아빠’와 ‘엄마’를 단순한 장난으로 치부하고 마구 대들다가 끔찍하게 잡아먹혔다.

심지어 미리 서재에 들어갔다가 비명과 함께 피투성이로 사라진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사망 원인은 천차만별이었다.

9시 30분, 선하윤은 책과 펜을 들고 방에서 나왔다. 원래는 아무것도 없었던 맞은편에 문득 굳게 닫힌 문이 하나 나타났다.

그녀는 그곳이 바로 서재라는 것을 짐작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싸늘한 기운이 엄습해왔다.

서재 안은 여전히 창문 하나 없이 칠흑같이 어두웠고 책상 위에 놓인 컴퓨터만이 희미한 빛을 내뿜었다.

선하윤은 스위치를 눌러 서재의 불을 켰다.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서재 전체가 환하게 밝혀졌고 이어서 그녀가 마우스를 움직여 컴퓨터를 켰다.

이때 모니터에 안경을 쓰고 타이트한 검은색 정장을 입은 여교사가 나타나 수업을 진행했다.

선생님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하면서 귀신 낙서들을 가리켰다.

지금 이 선생님은 귀신 낙서 문양 하나하나의 의미를 설명하는 중이었다.

보아하니 이 수업은 매우 중요했고 선하윤도 귀신의 언어를 익혀야만 했다.

그녀는 열심히 강의를 들으며 필기도 했고 항상 시간을 체크했다.

수업 중간, 갑자기 컴퓨터에 반사된 화면 속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아빠와 엄마가 소리도 없이 그녀의 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바로 뒤에서 선하윤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지금은 절대 뒤돌아봐서는 안 된다.

룰에 따르면 아빠는 그녀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TV를 즐겨 보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아빠는 그녀가 공부를 열심히 하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지금은 절대 딴짓을 하거나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된다.

억지로라도 열심히 수업을 듣는 모범생 연기를 해야 한다.

선하윤은 억지로 수업을 들었다.

시간은 1분 1초 흘러갔고 손목시계는 선하윤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12시가 되자 등 뒤에서 느껴지던 시선이 사라졌다.

이때 신채린이 나직이 속삭였다.

“주인님, 두 분 모두 떠나셨어요.”

선하윤은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마우스패드 밑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서재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시간은 이미 12시를 넘겼지만 서재는 사라지지 않았다.

밖에서 서재 안을 들여다보자 칠흑처럼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

수업 시간이 아닐 때는 서재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활짝 열린 서재 문이 자신의 침실 문과 맞대고 있다는 점이 으스스했다.

그건 마치 커다란 입처럼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삼켜 버릴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거실로 돌아온 선하윤은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봤는데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손목시계와 정확히 일치했다.

엄마는 부엌에서 한창 요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섬뜩한 냉기가 감도는 식칼을 높이 쳐들고 도마 위에 놓인 커다란 뼈다귀를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한편 아빠는 여전히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TV에서는 건설 노동자들의 임금 체불에 관한 뉴스가 방송되었다.

할머니의 휠체어는 발코니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옮겨졌고 집 안에는 아직 남동생이 보이지 않았다.

남동생은 룰에서 할머니와 관련이 있다.

룰이 오염되었는지 판단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선하윤은 감히 함부로 할머니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오후 온라인 수업까지 2시간 30분이 남아있었다.

선하윤은 방으로 돌아가 아까 얻은 쪽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때 아빠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곧 밥 먹을 시간이니 방에 들어가지 마라.”

룰 2조.

[아빠는 이 가정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으니 요구를 너무 거부하지 마세요. 아빠도 어깨가 무거우니 만약 거부하고 싶다면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세요.]

룰의 앞부분에서는 아빠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뒷부분에서는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방식으로 거부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앞뒤가 모순되는 룰이었다.

엄마는 한창 부엌에서 요리하는 중이라 만약 지금 엄마를 방해하는 것은 ‘착한 딸’의 이미지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결국 그녀는 아빠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네, 밥 먹고 방에 돌아갈게요.”

엄마는 정성껏 4가지 반찬과 국을 준비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시금치 무침, 탕수육, 족발, 그리고 미역국까지 푸짐한 한상이었다.

이미 알려진 룰에는 음식에 대한 내용이 없다.

하지만 모든 룰을 확인하지 못한 상황에서 선하윤은 함부로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아빠는 밥을 먹는 대신 식탁 밑에서 술을 꺼내 입에 들이부었다.

술을 마실 때 술병 입구를 입속 깊숙이 쑤셔 넣는 모습은 몹시 험악했고 붉은 혀가 입가에 드러나 끔찍했다.

그녀가 줄곧 수저를 안 들자 엄마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 왜 그러니? 입맛에 안 맞아? 고기 많이 먹어야 쑥쑥 크지.”

엄마는 젓가락으로 족발을 집어 선하윤의 밥그릇에 올려놓았다.

불현듯 아빠가 술병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식탁을 쾅쾅 두드리며 고함을 질렀다.

“그래! 네 엄마가 힘들게 만든 음식이니 많이 먹어야지. 엄마 기대를 저버리면 안 돼. 아빠가 밖에서 돈 버느라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아? 너 밥 먹여 주고 옷 사주고 학교까지 보내줬는데 대체 언제 돈 벌어서 우리한테 보답할래?”

선하윤은 아빠의 말에 더욱 경계심을 품었다.

그의 이전 행동으로 볼 때 분명 나쁜 존재였다.

그러니 이 음식을 함부로 먹을 수가 없다.

그녀는 배를 움켜쥐고 타고난 연기력을 발휘해 눈물을 글썽이며 엄마에게 애교를 부렸다.

“엄마가 해준 밥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지만... 저 오늘 생리통이 너무 심해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네요.”

엄마는 곧장 마음이 약해졌다.

“그래, 아프면 먹지 말고 어서 방에 가서 푹 쉬어.”

바로 이때 아빠가 젓가락을 내던지며 버럭 화냈다.

“저러니까 맨날 버릇만 나빠지는 거야! 아주 애를 망쳐놨어!”

선하윤은 즉시 자신의 방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잠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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