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수상한 엄마, 아빠

원래 비좁았던 원룸이 별안간 방 세 개짜리 고급 아파트로 바뀌었다.

방에는 커튼이 굳게 닫혀 있었고 전등이 켜져 있어서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었다. 벽에 걸린 시계는 아침 8시를 가리켰다.

거실 뒤쪽 벽에는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지만 칼로 그어 얼굴 부분이 전부 훼손되었다.

소파에는 중년 부부가 앉아서 한창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TV 화면에는 온통 잡음만 가득할 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발코니에는 어르신 한 분이 휠체어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선하윤은 그렇게 느닷없이 거실에 나타났고 신채린이 묵묵히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선하윤의 손에는 색바랜 쪽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스위트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곳은 행복한 가정입니다.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다음 룰을 반드시 준수하고, 딸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룰을 어기면 모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스위트홈 룰 상.]

[1. 당신은 엄마의 착한 딸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엄마는 당신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사랑에는 잘못이 없어요. 비록 그 방식이 옳지 않더라도.]

[2. 아빠는 이 가정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으니 요구를 너무 거부하지 마세요. 아빠도 어깨가 무거우니 만약 거부하고 싶다면 엄마에게 애교를 부리세요.]

[3. 당신은 착한 아이입니다. 착한 아이는 이른 연애를 금지해야 합니다.]

[4. 집 안에서는 애완동물을 키울 수 없습니다. 엄마는 애완동물을 혐오해요. 특히 고양이를요.]

[5. 할머니는 휴식이 필요합니다. 방해하지 마세요.]

[6. 당신은 서재에서 온라인 수업을 들어야 합니다. 수업 시간은 아침 9시 30분부터 12시까지, 오후 2시 30분부터 저녁 5시까지입니다. 온라인 수업 중에는 조용히 해야 합니다. 나머지 시간에는 서재가 없습니다.]

[7. 그들을 보고 싶지 않다면 침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세요. 그들은 당신을 방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8. 남동생은 장난기가 많습니다. 남동생이 할머니를 괴롭힌다면 반드시 제지하세요.]

신채린은 쪽지를 바라보며 경고했다.

“룰이 오염되었습니다. 주인님께서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셔야 합니다. 만약 오염이 심해지면 제가 한 번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방 안에 다른 사람들이 있는 연유로 선하윤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 중년 부부가 일제히 고개를 돌려 선하윤을 바라봤다.

엄마는 손짓하며 그녀를 불렀다.

“우리 딸, 인강 시작하려면 아직 시간 남았잖아. 엄마랑 같이 TV 보자.”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룰의 표면적인 내용만으로 판단하건대 엄마가 아빠보다 위험도가 낮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쪽지에는 [스위트홈 룰 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는 [룰 하]가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완전한 룰을 얻기도 전에 예측 불가능한 위험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아빠와 엄마는 선하윤만 볼 수 있는 듯 신채린을 눈치채지 못했다.

선하윤은 소파에 앉아 TV를 봤지만 화면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옆에 앉자 엄마는 미소를 지었고 아빠는 미간을 찌푸렸다.

TV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데 아빠의 표정은 점점 더 일그러져 갔다.

30분이 지나자 선하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아빠와 엄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 시간 뒤에 인강이라 먼저 방에 돌아가서 어제 수업 내용을 복습해야겠어요.”

그제야 아빠가 잔뜩 찡그렸던 미간을 풀며 말했다.

“애들은 역시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TV는 시간 있을 때 조금만 보고. 공부 안 하는 애는 커서 쓸모가 없어! 공부를 못하면 차라리 안 낳기만 못하지!”

그는 점점 격양된 모습을 보였다.

이때 엄마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무리하진 마. 할 때는 제대로 하고 놀 때는 신나게 놀아야지.”

이에 선하윤이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엄마 아빠 말씀이 다 맞아요.”

침실은 회색 방, 핑크색 방, 파란색 방으로 총 세 개였다.

회색 방에는 아빠와 엄마의 결혼사진이 걸려 있었고 파란색 방에는 스케이트보드와 농구공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분홍색 방에는 인형이 놓여 있었다.

별안간 아빠와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 TV를 끄고 거실에서 침실로 향하는 복도에 멈춰 서더니 선하윤을 쏘아봤다.

아빠가 어두운 표정으로 선뜻 물었다.

“왜 아직도 공부하러 들어가지 않는 거야? 계속 TV 보고 싶은 거니? 그럼 안 돼! 방금 공부하러 들어간다고 했잖아. 설마 나한테 거짓말한 거야?”

그의 언성이 점점 커졌다.

방을 잘못 들어간 것은 ‘공부하기 싫다’, ‘거짓말을 한 거다.’라는 의미였다.

선하윤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신채린에게 먼저 길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신채린이 침실에 들어가 안을 자세히 살펴본 후 나와서 말했다.

“파란색 방 옷장에는 운동복이 가득 차 있고, 바구니에는 생리대가 들어 있어요. 침대 옆 탁자에는 딸이 운동하는 사진이 놓여 있으니 아마도 딸 방인 것 같습니다. 분홍색 방에는 남자아이의 옷이 가득하고 인형 옆에는 남동생에게 전달을 부탁하는 쪽지와 누나에게 보내는 축하 카드가 놓여 있어요. 아들 방인 것 같았어요. 회색 방에는 죄다 어른 옷이에요. 아빠와 엄마의 방인 것 같아요.”

신채린이 말을 하는 동안, 아빠와 엄마의 시선은 줄곧 그녀에게 꽂혀 있었다.

그들이 신채린을 볼 수 있다니!

선하윤은 망설임 없이 파란색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바깥에서 분노 조로 쏘아붙이던 아빠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규칙 제7조.

[그들을 보고 싶지 않다면 침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세요. 그들은 당신을 방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선하윤은 바깥에 대고 말했다.

“아빠, 엄마, 저 이제 방에 들어가서 책 볼 테니까 문 잠글게요.”

아빠는 아무 말이 없었고 엄마는 고개만 끄덕였다.

룰이 맞다는 걸 확인한 그녀는 안심하고 문을 잠갔다.

책상으로 다가가 아무 책이나 펼쳤지만 종이에는 도통 알아볼 수 없는 낙서만 가득했다.

방안을 샅샅이 뒤져도 더 이상 그 어떤 룰도 찾아볼 수 없었다.

9시 30분부터는 서재에서 온라인 수업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파란색 방에는 알람이 하나뿐이었고 시간은 여전히 아침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던전에 처음 들어왔을 때 분명 거실에 있던 시계도 8시를 가리켰는데 1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시간이 잘못된 게 틀림없다.

문득 선하윤은 소름이 돋았다.

만약 지금 시간을 확인하러 나간다면 아빠에게 TV를 보고 싶어 한다는 오해를 사서 분노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렇다고 시간을 확인하지 않고 9시 30분 온라인 수업을 놓친다면 룰을 위반하게 된다.

룰 위반은 가볍게는 오염으로 이어지고, 심하면 끔찍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선하윤은 아까 아빠와 엄마의 시선을 떠올리며 신채린에게 물었다.

“채린 씨, 아빠랑 엄마가 채린 씨를 볼 수 있는 거지?”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채린 씨가 처음 나타났을 때는 쳐다보지 않았던 걸까?”

신채린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며 책상 옆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모던한 파란색 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저는 그분들의 룰 범위 밖에 있으며 그분들과는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어요. 그분들이 저를 알아차린 것은 제가 주인님을 도왔기 때문이에요.”

“아빠와 엄마가 채린 씨를 공격할 수도 있어?”

“룰의 범위 안에서 필요하다고 판단된다면 저를 공격할 것입니다.”

선하윤은 깊은 사색에 잠긴 채 시선을 내렸다. 그녀가 태운 종이 인형은 그리 많지 않았고 각각의 기능도 다를 것이 분명했다.

방금 신채린이 이미 한 번 그녀를 도와주었으니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거실에 내보낸다면 또다시 아빠와 엄마의 관심을 끌게 될 수도 있다.

그때 가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선하윤도 짐작할 수가 없다.

신채린은 아주 유용하지만 지금은 급박한 상황이 아니므로 굳이 희생할 필요가 없다.

선하윤은 또다시 공물 카드를 떠올렸다.

종이로 만든 여성용 명품 시계 콘스탄틴을 태웠던 기억이 떠오른 그녀.

공물은 오염되지 않으니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분명 정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