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결국 얼마나 있는지 알아냈어요?”그 뒤로 며칠 뒤,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반우희에게 물었다.반우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요. 입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진짜 일부러 그러는 거라니까요.”“왜 그렇게 생각해요?”“변호사님은 그렇게 해서 제 관심을 끄려는 거예요. 돈으로 유인해서 옆에 묶어두려고!”양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반우희는 자신이 아주 넘쳐 보였다.“실은 변호사님 저 엄청 좋아해요. 그래서 이렇게 머리 굴리는 거예요.”양시연은 엄지척을 하며 말했다.“그래요. 우희 씨 말이 맞아요. 승원 씨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그렇죠? 히히.”가을은 빠르게 지나가고 벌써 코끝이 시려오는 겨울이 다가왔다. 그리고 양시연은 반우희에게서 좋은 소식을 전해 들었다.결혼 날짜를 잡았다는 소식이었다.벌써 반우희도 결혼을 한다니. 넓은 사무실에 앉아 있던 양시연은 주변을 살펴보며 이 모든 게 정말 꿈만 같다고 생각했다.오늘 아침 기획팀에서 연말 행사 계획안을 반우희에게 제출했었다. 거액의 기획 금액 옆으로 반우희의 사인을 보며 반우희도 정말 많이 성장했다는 게 느껴졌다.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연정훈이 문자를 보내왔다.[신혼여행 어디로 가고 싶은지 정했어?]양시연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고 애교를 가득 담아 답장했다.[이렇게 바쁜데 언제 여행을 간다고 그래요.][부승원 시켜.]양시연은 빵 하고 터졌다.‘역시 못 말린다니까.’양시연은 사실 몇 가지 여행지를 찾아두긴 했으나 자세한 일정표를 작성하지는 않았다. 오늘 저녁 집으로 돌아가 연정훈과 상의를 하고 결정할 생각이었다.행사는 설 연휴가 끝나고 바로 시작되었고 이건 양시연이 몸을 회복하고 처음으로 복귀하는 행사였기에 모든 게 완벽하길 바랐다.연정훈은 미리 시간을 비워두어 양시연의 옆자리를 지켰다.넓고 화려한 강당에 수많은 사람이 자리를 채웠다.양시연은 천천히 무대 위로 올라갔고 빼곡하게 앉은 사람들을 쭉 훑다가 연정훈에게로 시선을 고정했
행사가 끝나고 애프터 파티가 시작되었다.양시연은 연정훈에게 팔짱을 낀 채로 많은 사람을 만났다.샴페인을 연거푸 비우고 양시연은 몰래 내용물을 주스로 바꿨다. 그러나 연정훈은 여전히 와인으로 채웠다.양시연이 몰래 연정훈에 말했다.“연 대표님 오늘 기분이 꽤 좋은가 봐요?”그러자 연정훈이 양시연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왠지 오늘이 우리 결혼식보다 더 결혼식 같은 느낌이 들어.”양시연은 잠시 과거를 떠올렸다. 그때의 연정훈은 양시연에게 모든 걸 털어놓지 않았고 양시연은 결혼식 당일 양혁수의 일까지 알게 되었으니 오늘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응할 수가 없었다.그런데 연정훈이 그걸 지금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 줄은 몰랐다.양시연은 주스를 한 모금 삼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결혼식 그날 나도 열심히 했잖아요.”연정훈이 이어 질문을 던졌다.“왼쪽 방향 가르마, 누구인지 알아?”양시연이 힐끔 보다가 대답했다.“정훈 씨 외숙부요.”연정훈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러자 양시연은 자신이 없어졌다. 그날 결혼식에서 인사를 건넨 그 사람이 맞는 것 같은데 말이다.“저기 파란색 넥타이를 매고 가르마를 한 사람이 외숙부야.”양시연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사람을 살폈다.그제야 아차 싶었지만 양시연은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아, 그쵸. 저는 정훈 씨가 저 사람 물어보는 줄 알고 답한 거예요. 같은 방향에 가르마 한 사람이 두 명이나 있는데 정훈 씨 질문이 잘못됐네요.”연정훈이 차가운 시선으로 양시연을 바라봤다“사실 뻥이야. 첫 번째 그 사람 외숙부 맞아.”“...”양시연은 혀를 차며 몰래 연정훈의 옆구리를 꼬집었다.‘지금 뭐 하자는 거야!’연정훈은 내색하지 않고 양시연의 손을 잡으며 귓가에 대고 말했다.“그러니까 결혼식 당일 넌 진심이 아니었던 거야. 내 외숙부가 어떻게 생긴 건지 아직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걸 봐.”“아니요.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데 정훈 씨가 장난한 거잖아요.”“네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면 내 꾀에 속았을까?”양시연
이미 지난 지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아이까지 생겼는데 양시연은 더 이상 과거에 연연하지 않았다.그냥 오늘처럼 농담으로 꺼내는 경우는 있었다.두 사람은 한참 속닥거리며 대화를 주고받았고 이제 흥미를 잃은 양시연을 보며 연정훈은 와인잔을 내려두고 양시연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여기에도 사람이 꽤 많네요.”“다들 볼일이 있나 보지. 우린 숨만 돌리고 다시 올라가자.”양시연은 연정훈의 뒤를 따랐고 호기롭게 행사장을 나서는 연정훈을 보며 왠지 지금 이 상황이 흥미롭게 느껴졌다.“처음 만났을 땐 정훈 씨가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계속 무게만 잡고 다닌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나이 먹고 점점 더 유치해지는 것 같은데요.”연정훈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꽤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앞으로 나이에 관한 얘기는 하지 말자.”“뭐예요? 화났어요?”“그래.”양시연은 웃음이 터졌다.“언제 나이에 그렇게 신경을 썼다고 그래요?”연정훈은 몸을 벽에 기대며 말했다.“예쁜 사람한테 못생겼다고 말하면 그냥 넘어갈지 몰라도, 못생긴 사람한테 못생겼다고 말하면 완전 실례라는 거 알지?”양시연은 바로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이젠 나이 얘기하면 서운할 나이가 됐다는 말이네요.”양시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정훈 씨 생일 지나면 서른 네살이네요.”그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연정훈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연정훈은 말문이 막혀버렸고 양시연을 차가운 표정으로 노려보기만 했다.양시연은 꾹 참던 웃음이 터졌고 연정훈의 허리에 손을 감으며 말했다.“농담이에요. 남자는 마흔이 넘으면 성숙한 와인이라는데 정훈 씨는 아직 한창 청춘이니까 벌써 속상해하지 마요.”연정훈은 그 말에 입꼬리가 올라갔고 양시연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양시연은 자연스레 연정훈의 품에 안겼다.“그러면 머리가 다 헝클어진다고요.”“내가 다시 빗겨줄게.”“됐거든요. 저번에 립스틱 발라준다고 했다가 끊어졌잖아요.”양시연은 입을 삐죽였으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연정훈의 품에 꼭
금발이라는 말에 양시연은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나도 금발 별로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경인으로 돌아가기 전에 정훈 씨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헤어 디자이너 쌤이 추천해 주는 금발로 한 거예요. 금발 하면 이목구비도 더 살고 카리스마도 넘칠 거라고 해서요.”“나한테 카리스마 넘치게 보이고 싶었어?”양시연은 앞장을 서서 걸었고 양손을 등 뒤로 모은 채로 말했다.“뭐 그런 것보다 절대 얕잡아 보이고 싶지 않았어요.”연정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시연은 정말 그렇게 해냈으니 말이다.그날 밤, 연정훈은 양시연의 변화에 깜짝 놀랐었다. 파격 변신한 외관과 한껏 여유로워진 모습에 놀란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남자 친구가 있다는 소식에 더 놀랐었다.“그때 날 처음 보고 어떤 생각을 했어요?”양시연이 발걸음을 멈추고 취재하듯 물었다.연정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사실 널 만나기 전에 승원이가 보내온 사진으로 확인했었어. 조금 놀라기도 했는데 솔직하게 말한다면 너무 예뻤어.”“정말요?”양시연이 고개를 쳐들고 연정훈을 바라봤다.“그런데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대했던 거예요?”연정훈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시연의 손을 잡았다.“항상 날 버리고 떠나는 사람은 너였다고 생각하는데?”양시연은 입을 삐죽였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그럼 그 뒤로는 어떻게 생각했는데요?”연정훈은 대답이 없었고 양시연이 대신 기억을 불러왔다.“그날 정훈 씨 엄청 차가웠는데 혹시 날 보고 이가 부득부득 갈렸던 거 아니에요?”연정훈은 사실 차가운 척을 했던 거였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건 아주 힘든 일이었다.당장 양시연을 잡아 제 곁에 두고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토로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으니 말이다.연정훈은 입을 달싹이다 다시 양시연의 옆자리에 섰다. 그때 길 한복판에 즉석 복권 가게가 보였다.“즉석 복권 사줄까?”“네?”양시연은 연정훈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전에도 나한테 즉석 복권 사줬던 거 기억
정인 그룹.도시의 네온 불빛이 한눈에 들어오는 사무실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양시연은 작게 숨을 헐떡였고 연정훈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양시연은 머릿속이 텅 비어졌고 고개를 들어 천장의 크리스털 전등을 바라보았다. 거침없이 휘몰아치는 감정에 양시연은 자신이 파도가 되어 바닷속을 헤엄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연정훈은 멈추지 않고 양시연에게 다가갔고 양시연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다.그러다가 양시연을 제품에 기대게 한 연정훈은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다정하게 닦아줬다.불빛이 어두운 사무실에서 양시연은 자신을 향한 연정훈의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은 양시연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가 아직 수술 자국이 남아있는 배로 향했다.양시연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그 흉터를 가렸고 목소리는 이미 낮게 잠겨 있었다.“보지 마요... 못생겼잖아요.”그러나 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잡고 손등에 짧게 키스하고 또 흉터에도 입맞춤했다.뜨거운 연정훈의 온도가 흉터에서 전해지고 그 온기는 빠르게 심장까지 타고 올라갔다.양시연은 길게 숨을 내쉬고 연정훈의 품에 안겨 키스로 대답을 대신했다.“아니. 전혀 못생기지 않았어.”연정훈은 이 흉터를 볼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팠고 양시연에게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교차했다.양시연은 진심 어린 연정훈의 말을 들으며 연정훈의 품속으로 더 파고들었다.연정훈은 두 팔로 지탱한 채로 양시연의 귓가에 속삭였다.귓가에 뜨거운 숨이 전해지자 양시연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고 연정훈이 움직이는 대로 다시 온몸을 맡겼다.사무실엔 달빛조차 비춰들지 않았다. 오직 침대 헤드 불빛 하나만 존재했는데 연정훈은 오직 자기 눈에만 이 광경을 담고 싶었다.양시연은 자신이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양시연이 잠이 든 뒤로 연정훈은 이런 양시연을 품에 안고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색색 숨소리를 내는 양시연은 잠결에도 미소를 지었다. 검은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 하얀 피부가 드러났으며 하얀 피부는 연정훈의 단단하고
배여진과 선기현은 결혼 4년 차였지만 결혼 생활에 금이 생겼다.선기현 쪽에서 남은 감정이 없다며 평화 이별을 요구했다.배여진은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서로의 옆을 지켜온 소꿉친구였고 가문끼리도 잘 알고 있는 사이였다. 배여진은 선기현을 몰래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짝사랑하다가 포기했고 부모님이 찾아준 남편감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나타난 선기현이 결혼을 뒤엎고 배여진을 설득해 결국 결혼까지 오게 되었다. 그렇게 온 세상이 떠들썩하게 사랑을 했던 두 사람이었는데 남은 감정이 없다는 말 한마디에 이혼이라니, 이건 배여진더러 죽으라는 소리였다.부승희와 배여진은 사이가 꽤 좋은 편이었다. 배여진이 전주로 찾아왔다는 소식에 부승희는 따로 자리를 마련해 배여진의 기분을 풀어주려 했다.이승우가 부승희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부승희는 배여진과 또 몇 명의 부잣집 자녀들과 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배여진은 여전히 기분이 저기압이었고 사람들은 배여진더러 내려놓으면 마음이 편해질 거라며 다독였다.부승희는 말없이 배여진을 살폈다.“여보세요? 너 지금 어디야?”“나? 지금 보드게임 하고 있는데.”“너 왜 그렇게 안일해? 오늘 피키 아기 낳을 것 같다고 내가 몇 번을 말했잖아.”부승희는 멜론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낳으면 낳는 거지. 피키 오빠가 키우고 있잖아. 이따가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잔소리하긴.’한 테이블에 앉은 다른 사람들은 피키, 그리고 아이를 낳는다는 소식에 말없이 귀를 쫑긋거렸다.배여진이 고개를 돌려 먼저 입을 열었다.“승우 오빠?”부승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너 지금 안 오면 후회할지도 몰라. 네가 내기에서 지게 내가 조작할 수도 있어.”부승희는 쯧 하고 혀를 찼다.‘아 짜증 나.’부승희와 이승우는 전주에서 농장을 차린 지 벌써 6개월이 되었다. 최근 돼지 농장까지 확장했는데 부승희와 이승우는 각각 몇 마리를 배정해 누가 더 많이 아기 돼지를 받을 수 있는
배여진의 충고를 부승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이승우에 대해 자신이 없다기보다는 배여진의 말이 설득력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배여진과 선기현이 결혼식에 부승희는 신부 들러리로 참석했고 배여진은 부승희더러 몇 년만 더 기다리면 이승우가 진심으로 다가올 거라며 충고해 줬었다.그런데 배여진은 자신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바탕으로 말을 바꿔 새로운 충고를 하지 않는가?부승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언니 괜한 충고는 하지 말고 좀 더 생산적인 일이나 하세요.’날이 어두워지고 배여진은 자리를 비워 전화를 받았다. 돌아올 때는 눈가가 빨개진 걸 보아 선기현에게 전화를 걸었던 거라 추측이 되었다.부승희는 배여진을 호텔로 바래다주고 본인은 돼지 농장으로 돌아왔다.요즘 농장은 시설이 많이 바뀌어 이제 건물에서도 돼지를 키울 수 있었다. 부승희가 평소 지내는 곳이 바로 돼지 농장의 옆 건물이었다.부승희가 건물 앞으로 다가가자 누군가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 핸드폰을 하는 게 보였다.그 인기척에 고개를 든 이승우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집이 있다는 걸 잊지는 않았나 보네?”부승희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키를 찾으려 가방을 뒤적였다.“왜 왔어?”“왜라니.”이승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에 쥔 물건을 들어 보였다.“농장에 돼지 사료가 떨어졌다고 해서 가지고 온 거잖아.”부승희는 웃음을 터뜨렸다.“오빠나 챙겨 먹어. 난 됐어.”그리고 이승우의 다른 손에 들려 있는 도시락을 보며 질문을 이었다.“그건 뭔데?”이승우는 짐을 집안으로 옮기며 말했다.“흰죽.”부승희는 또 쯧 하고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그리고 아침에 막 도착한 간장게장이야. 며칠 전에 먹고 싶다고 했잖아.”이승우는 부승희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섰다.그 말에 부승희는 괜스레 배가 고파지는 것 같았다.피곤해진 부승희는 크게 하품을 하며 고개를 까딱 움직이며 지시를 내렸다.“냉장고에 스팸 있으니 구워줘. 샤워만 하고 올 테니 같이 먹자.”이승우는 곧장 주방으로
“바람둥이는 언제가 되었든 또 떠날 사람이라고 했어.”부승희가 말을 이었다.“바람둥이가 왜 괜히 바람둥이겠어? 바람처럼 떠나고 사라지니 바람둥이라고 하는 거지.”“사람은 변해.”이승우의 말에 부승희가 대답했다.“그래도 타고난 본성 같은 건 있는 거잖아. 본성은 쉽게 안 바뀌어.”“네가 사람의 본성에 대해 뭘 그렇게 잘 안다고 그래? 인간은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것에 동물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이승우는 당황하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그러자 부승희는 미소를 지은 채로 말했다.“세상에 짐승보다 못한 사람들도 있잖아.”그리고 한 손가락으로 이승우의 턱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오빠는 어떤 사람인데?”“난 좋은 사람이지. 본인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부승희는 헛웃음을 내쉬었다.이게 최근 두 사람이 함께 지내는 모습이었다. 연인이라 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인이 아니라고 하기엔 모호했다. 두 사람은 의식적으로 그쪽으로는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여진이랑 가깝게 지내지 마. 괜히 네가 옆에서 지내다가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내일엔 나랑 원주 다녀오자. 여기에서 키운 돼지도 그쪽에 배송해 주고.”“우리가 직접 돼지 배송도 해?”“할 일도 없는데 원주나 다녀오지 뭐.”“오빠 지금 여진 언니가 무서워서 그러는 거지?”“여진이가 전주로 온 뒤로 계속 귀가 간지러운데 너라면 안 무섭겠어?”“귀 간지러우면 귀나 파.”“...”이승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부승희를 바라봤다.부승희는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저었다.“그래. 내일 다녀오지 뭐. 마침 가백산 등산하고 싶었는데.”“볼일 마치면 같이 가자.”부승희가 고개를 끄덕였다.식사를 마치고 부승희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그런데 선기현이 오빠한테 연락은 했어? 두 사람 정말 이혼한대? 여진 언니 엄청 힘들어 보이던데.”“그래도 소용없어. 이미 마음 떠난 사람한테 무슨 말을 하든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이승우는 다 먹은 밥상을 치우기 시작했다.부승희는 소파에
양석진은 아무 내색하지 않고 양지원을 이끌어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누가 너 괴롭혔어?”“아니요!”배는 자꾸 쿡쿡 쑤셔오고 멀리서 진병수가 모르는 여자를 껴안고 있는 걸 보면 양석진도 본인이 없는 곳에 저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배가 아팠다.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아빠도 늘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양지원은 저런 행동에 큰 반감을 느꼈고 양석진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면 화가 났다.그런 생각을 하는데 양석진이 옆으로 다가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혹시 생리 시작한 거야?”“...”양지원이 아무 대답이 없자 양석진은 바로 눈치를 챘다.“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그리고 룸을 나선 양석진은 따뜻한 꿀물을 한 잔 가지고 돌아왔다.마침 두 사람을 지나치던 진병수는 꿀물과 화가 잔뜩 난 ‘공주님’을 번갈아 보며 혀를 쯧쯧 찼다.‘이게 동생이야? 딸이야?’따뜻한 꿀물을 마시자 몸이 녹아내렸고 양지원은 소파에 푹 기대앉았다.그리고 양석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아까 그 여자 누구예요?”양석진은 멈칫하다가 바로 상황 파악을 마쳤다.“연예인인데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사정이 딱해 보여서 병수더러 도와주라고 했었어.”양지원은 바로 시선을 흘렸다.“오빠는 다른 사람한테도 다 이렇게 친절해요?”“그 사람 연예인이 된 이유가 어머니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어머니를 결국 지키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양지원은 침묵했다.‘사정이 딱하긴 하네.’“그래도 오빠는 조심해야 해요. 아빠가 오빠를 정치인으로 키우려고 하는데 병수 오빠처럼 헤프게 행동하면 안 돼요.”양석진은 자신에게 훈수를 드는 양지원을 보며 며칠 전 양지원이 벌인 일을 떠올렸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알겠어.”구석 자리에서 양석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양지원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래서 양석진에게 청아에 대한 얘기를 더 들려달라고 했다.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양창수가 옆자리에 와 있었다.양지원은 양창수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손명우는 안경을 고쳐 쓰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날 그냥 보러 온 건 아니고, 드레스샵 깨부순 것 때문이지?”양지원은 조금 계면쩍은 기분이 들어 목을 가다듬었다.진병수는 장난기가 많았고 술잔을 들고 옆으로 앉으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뭐야? 우리 지원이가 언제부터 드레스에 관심을 가졌지? 혹시 연애라도 하는 거야?”소파에 앉아 있던 양석진은 제게 걸어오려는 여자를 눈빛으로 제압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양지원은 그걸 발견하고 득의양양해서 턱을 치켜들었다.‘역시 우리 오빠가 제일 멋있어.’“내가 왜 연애해요?”양지원은 다시 양석진의 옆자리로 앉으며 말을 이었다.“드레스 입는 사람은 꼭 연애하고 결혼할 사람이어야 하는 거예요? 드레스가 예쁘면 그냥 입을 수도 있는 거죠.”“그래도 굳이 창을 깨부술 필요는 없잖아.”진병수는 손명우를 가리키며 말했다.“명우한테 말만 하면 드레스는 얼마든지 입을 수 있어.”손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가게에 새로 턱시도 모델 많이 들어왔는데 관심 있으면 같이 사진도 찍어줄 수 있어.”양지원은 크게 관심이 생긴 건 아니었으나 손명우를 거절하기 애매했다.그때, 양석진이 디저트를 양지원의 앞으로 당겨주며 말했다.“아직 나이도 어린 게 무슨 웨딩드레스 사진을 찍는다고.”“오빠, 방금 너무 촌스러운 거 알아요?”양지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옆 사람들한테 말했다.“내 나이가 어려요? 진씨 고모는 내 나이 때 벌써 결혼 1주년이었어요.”“그건 예전 얘기고.”한강시 쪽은 말이 달랐지만 화서시는 한 10년 전만 해도 다들 결혼을 아주 어린 나이에 했었다.“그냥 모델이랑 같이 사진 찍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잖아.”진병수의 말에 양지원은 양석진의 표정을 살폈고 고민하다가 손을 저었다.“어휴, 내가 무슨 모델이랑 사진을 찍어요. 됐어요.”그렇게 사진 촬영은 일단락이 되었다.양지원이 들어온 뒤로 룸 안의 사람들은 행동을 조심하기 시작했다.양석진은 동생 양지원을 끔찍하게 챙겼고 진병수와 손명우는 크게
오토바이를 타고, 쓰레기통 따위로 창을 깨부수는 건 가히 그해의 유행이라 할 수 있었다.양지원은 그런 반항적인 일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기분이 저기압이라 분출한 곳이 필요했다.양석진이 옆에 있었다면 얼리고 달랬을 테지만 양창수는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했을 것이다.양홍두가 자리를 비우자 두 사람은 입에 모터가 달렸다.“형,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드레스샵은 손명우네 가게니 아무 문제 없어요.”양지원은 팔짱을 척 끼고 양석진의 앞으로 걸어갔다.“그냥 드레스뿐인데 아빠가 괜히 오바하시는 거예요. 내가 전에 그 불여우한테 전화했다고 지금 아니꼽게 보시는 거라고요.”양석진이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향해 말했다.“말 가려서 해.”양지원은 여전히 불만이라는 듯 입을 삐죽였다.‘계속하면 내가 손해니까 참아야지 뭐.’그리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오빠한테 굳이 이런 일로 마음 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양지원은 어린 시절처럼 양석진에게 딱 붙어 말했다.“참, 내 친구가 오빠한테 편지도 쓰고 선물도 챙겨줬어요.”양석진은 익숙하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난 그런 쪽으로 관심 없으니까 친구한테 다시 그런 걸 보내지 말라고 해. 난 공부에만 집중하고 싶으니까.”평소의 양지원은 양석진이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아주 흡족한 대답이었다.‘그래, 이게 맞아. 감히 누가 우리 오빠 옆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겠어?’‘꿈 깨라고!’양지원은 기분이 퍽 좋아졌고 제 친구들한테 전화를 돌려 오빠의 말을 전했다.다른 사람은 그냥 알겠다고 넘어갔지만 친구 길예은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너희 오빠 정말 아무한테도 관심이 없다고? 네가 애초에 편지를 건네지 않은 건 아니고?”“야, 길예은,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저번에 너한테 석진 오빠 선물 부탁했더니 그대로 다시 돌려줬잖아. 너희 오빠는 무슨 눈이 그렇게 높아? 정말 우리 중에서 한 명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길예은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작가의 말:아래 내용은 네 시기로 나뉘어 진행됩니다.소년 — 짝사랑이라는 이름의 시작.청년 — 서른 번째 생일, 그리고 아련한 재회.중년 — 오랜 시간 끝에 처음으로 엮인 둘의 이야기.결혼 후 — 이제는 함께 걷는 달콤한 나날들.각 시기를 함께하며, 두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깊어지는지 지켜봐 주세요.--------[소년기]양석진과 양지원이 혼인 신고서를 제출한 당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사무실부터 관저까지 하루 종일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았다.양석진에게 결혼 축하 인사를 건넨 첫 번째 사람이 드물게 보인다는 양석진의 미소를 목격했다는 소문이 전해진 뒤로, 다들 기회를 찾아 양석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그 미소를 직접 확인하려 했다.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고, 나이가 지긋한 기사가 관저로 바라대 주다가 낮에 들었던 소문을 듣고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의원님, 결혼 축하합니다. 내일에도 같은 시간으로 마중 오면 될까요?”양석진은 꽉 채운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며 미소를 지은 채 차에서 내렸다.“내일은 휴가입니다.”홀로 차에 남겨진 기사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예쁜 노을 아래, 양석진이 정원 안으로 걸어가다가 원피스를 입은 양지원이 얇은 외투 하나 걸치고 무언가 휘젓고 있는 게 보였다.그러자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른기침을 몇 번 했다고 양지원이 배즙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그런데 뭘 또 정원에서, 그것도 이렇게 큰 가마에 만들고 있는 거야?’양석진이 양지원을 부르려는 찰나, 우지끈하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양지원이 너무 힘을 주어 젓다가 나무 주걱이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양석진은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양지원이 이어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 지켜봤다.양지원은 외투를 다시 고쳐 입으며 주변을 살폈고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걸 확인하고는 위층을 향해 외쳤다.“창수 씨! 왜 부러진 나무 주걱을 주신 거예요!”“...”이어 2층 창문이 열리고 양창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양지원의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