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회귀 안 했다.

나만 회귀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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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물

서양 로맨스

서양 로맨스 판타지

대공 부인

참교육

환생

후회물

자고 일어났더니 나를 구박하던 시댁 식구들과 무심했던 남편이 단체로 내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 나만 모르는 '나의 전생'을 둘러싼 대환장 착각계 로맨스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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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pitel 1

제1화. 어느 날 아침, 세상이 미쳐버렸다.

내 이름은 엘리아나. 마력 수치 '0'이라는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태어난 백작가의 골칫덩이이자, 피도 눈물도 없다는 북부 대공 카이엔과 정략결혼으로 팔려 온 허울뿐인 대공비다.

결혼 후 내 삶은 예상대로 비참했다. 남편은 나를 투명 인간 취급했고, 시어머니는 숨을 쉴 때마다 구박을 쏟아냈으며, 나를 차버리고 도망갔던 전 약혼자 이안은 가끔 찾아와 내 속을 뒤집어놓았다.

그래서 오늘 아침도 당연히 그런 지옥 같은 하루의 연장선일 줄 알았다.

눈을 뜨기 전까지는 말이다.

"……엘리아나."

짐승의 앓는 소리 같은 낮고 쉰 목소리.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다 말고 흠칫 놀라 굳어버렸다. 제국 최고의 무력이라 불리는 북부 대공 카이엔이, 내 침대맡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커다란 두 손이 내 작은 손을 부서질세라 조심스럽게 감싸 쥐고 있었다. 심지어 그 무자비한 남자의 뺨을 타고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 손등을 적셨다.

"살아… 있군. 정말 살아 있어……."

"……대공 전하?"

"전생에 널 죽인 나를 평생 원망해도 좋다. 아니, 원망해 다오. 평생 네 발닦개로 살며 속죄하겠다. 제발, 내 곁에서 숨만 쉬어 다오……!"

……뭐지? 이 남자가 드디어 미쳤구나.

발닦개? 전생? 속죄?

머리가 핑핑 돌았다. 북부의 혹한보다 차갑던 남자가 내 손에 얼굴을 묻고 오열하고 있다. 이건 백발백중 나를 방심하게 만든 뒤 쥐도 새도 모르게 독살하려는 고도의 심리전이 분명했다.

"저기, 대공 전하. 일단 진정 좀……."

쾅-!

내가 카이엔의 손을 뿌리치기도 전에 육중한 방문이 부서져라 열렸다. 평소라면 "이 게으른 것! 아직도 안 일어나고 뭣 하는 게냐!"라며 호통을 쳤을 시어머니였다.

"어머니……?"

그런데 시어머니의 상태도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문지방을 넘자마자 바닥에 납작 엎드리더니, 비싼 실크 드레스를 질질 끌며 내 침대를 향해 기어 오기 시작했다.

"며느님! 아니, 위대하신 대공비 마마!"

"……예?"

"부디 우리 가문을 멸문시키지만 말아주소서! 제가 미쳤었습니다! 대공가의 모든 권력과 금고 열쇠를 지금 당장 며느님께 바치겠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시어머니가 바닥에 머리를 쿵쿵 찧으며 울부짖었다.

나는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금고 열쇠? 권력?

아, 알겠다. 이번엔 공금 횡령죄를 나한테 뒤집어씌우려고 함정을 파놓은 거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저 오만한 시어머니가 내 발밑을 기어 다닐 리가 없지 않은가.

설상가상으로 열린 방문 너머 복도 끝에서 누군가 처절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아나! 제발 한 번만 나를 용서해 줘!"

딴 여자랑 바람이 나서 파혼을 선언했던 전 약혼자, 이안이었다. 그는 경비병들에게 양팔을 붙들려 질질 끌려가면서도 나를 향해 간절하게 손을 뻗었다.

"네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걸 그때는 몰랐어! 내가 쓰레기였어! 제발 한 번만 기회를……!"

나는 멍하니 이 아수라장을 번갈아 보았다.

침대 밑에서 내 손에 입을 맞추며 오열하는 남편.

바닥을 기어 다니며 가문을 살려달라 애원하는 시어머니.

복도에서 질질 끌려가며 회개하는 전 약혼자.

나는 조용히, 남편에게 잡히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프다.'

꿈이 아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이다.

이 쓰레기들이 단체로 나를 미치게 만들어서 가문에서 쫓아내려고 거대한 연극을 꾸미고 있는 것이다!

'웃기지 마. 내가 이딴 얄팍한 수작에 속아서 순순히 위자료도 없이 쫓겨날 줄 알고?'

나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무릎 꿇은 남편과 기어 다니는 시어머니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비스듬히 말아 올렸다. 영지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한, 뼈 깎는 철벽 방어태세의 시작이었다.

"좋아요. 어디 한번, 끝까지 해보시죠."

나의 비장한 선전포고에 카이엔의 눈물이 더 굵어졌고 시어머니는 아예 거품을 물고 기절해 버렸지만, 나는 그들의 지독한 열연에 박수를 보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나만 빼고 모두가 미쳐버린, 나의 기묘하고 피곤한 아침이 이렇게 막을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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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어느 날 아침, 세상이 미쳐버렸다.
내 이름은 엘리아나. 마력 수치 '0'이라는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태어난 백작가의 골칫덩이이자, 피도 눈물도 없다는 북부 대공 카이엔과 정략결혼으로 팔려 온 허울뿐인 대공비다.결혼 후 내 삶은 예상대로 비참했다. 남편은 나를 투명 인간 취급했고, 시어머니는 숨을 쉴 때마다 구박을 쏟아냈으며, 나를 차버리고 도망갔던 전 약혼자 이안은 가끔 찾아와 내 속을 뒤집어놓았다.그래서 오늘 아침도 당연히 그런 지옥 같은 하루의 연장선일 줄 알았다.눈을 뜨기 전까지는 말이다."……엘리아나."짐승의 앓는 소리 같은 낮고 쉰 목소리.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다 말고 흠칫 놀라 굳어버렸다. 제국 최고의 무력이라 불리는 북부 대공 카이엔이, 내 침대맡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그의 커다란 두 손이 내 작은 손을 부서질세라 조심스럽게 감싸 쥐고 있었다. 심지어 그 무자비한 남자의 뺨을 타고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 손등을 적셨다."살아… 있군. 정말 살아 있어…….""……대공 전하?""전생에 널 죽인 나를 평생 원망해도 좋다. 아니, 원망해 다오. 평생 네 발닦개로 살며 속죄하겠다. 제발, 내 곁에서 숨만 쉬어 다오……!"……뭐지? 이 남자가 드디어 미쳤구나.발닦개? 전생? 속죄?머리가 핑핑 돌았다. 북부의 혹한보다 차갑던 남자가 내 손에 얼굴을 묻고 오열하고 있다. 이건 백발백중 나를 방심하게 만든 뒤 쥐도 새도 모르게 독살하려는 고도의 심리전이 분명했다."저기, 대공 전하. 일단 진정 좀……."쾅-!내가 카이엔의 손을 뿌리치기도 전에 육중한 방문이 부서져라 열렸다. 평소라면 "이 게으른 것! 아직도 안 일어나고 뭣 하는 게냐!"라며 호통을 쳤을 시어머니였다."어머니……?"그런데 시어머니의 상태도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문지방을 넘자마자 바닥에 납작 엎드리더니, 비싼 실크 드레스를 질질 끌며 내 침대를 향해 기어 오기 시작했다."며느님! 아니, 위대하신 대공비 마마!""……예?""부디 우리 가문을 멸문시키지만 말아주소서! 제가 미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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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북부 대공의 수상한 덫
시어머니는 정말로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평소라면 내가 뺨이라도 맞았을 대형 사고였지만, 저택의 사용인들은 기절한 시어머니를 들것에 싣고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그들의 눈빛에는 나를 향한 정체불명의 경외감과 공포가 서려 있었다.그리고 문제의 남편, 카이엔은 아직도 내 방에 남아있었다."엘리아나, 안색이 창백하군. 의원을 부르겠다.""아닙니다. 저는 멀쩡합니다만.""아니야, 멀쩡할 리가 없어. 내가 널 얼마나…… 큭, 아니다. 내 입이 감히 무슨 자격으로."카이엔은 짐승처럼 앓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북부 제일의 검사라는 사내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꼴이라니.나는 침대 헤드에 바짝 붙어 앉아 이 수상한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경계했다.'대체 무슨 꿍꿍이지? 저렇게까지 해서 얻어낼 게 뭐란 말인가?'마력 수치 0의 껍데기뿐인 백작 영애. 지참금도 이미 대공가의 금고로 들어간 지 오래다. 이혼 사유를 내게 덮어씌워 위자료 한 푼 주지 않고 내쫓으려는 수작치고는, 제국 최고의 권력자인 북부 대공과 대공 부인이 직접 펼치는 연극의 스케일이 너무 컸다."식사부터 하지. 내가 직접 주방장에게 지시해 가장 부드럽고 소화가 잘되는 수프를 끓여오라 일러두었다."카이엔이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의 손에는 은쟁반이 들려 있었다. 평소에는 내가 굶어 죽든 말든 관심도 없던 인간이, 무려 '직접' 수프를 대령하다니!나는 확신했다.저 수프에는 맹독이 들어있다."전하, 저는 입맛이 없…….""독은 없다."내가 거절하기도 전에, 카이엔이 은수저를 들어 수프를 크게 한 입 떠먹었다. 그러고는 슬픈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덧붙였다."네가 불안해할 것을 안다. 앞으로 네 입에 들어가는 모든 것은 내가 먼저 기미를 하겠다. 혹여나 독이 있다면 내가 대신 죽을 테니, 너는 안심하고 먹어 다오.""……."그의 절절한 고백에 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대신 죽는다고? 아, 알겠다! 지효성 독이로구나!'당장 죽는 독이 아니라 며칠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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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파격 특가에는 반드시 함정이 있는 법이다.
카이엔의 소름 돋는 '사랑 고백'을 빙자한 살인 예고를 들은 후, 나는 침실로 돌아와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머릿속이 복잡했다. 시어머니가 떠넘기려 한 정체불명의 장부들과 다이아몬드 광산. 그리고 갑자기 나를 끔찍이 아끼는 척하는 남편.갑작스러운 혜택이나 파격적인 특가 제안에는 반드시 함정이 있는 법이다.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는 없고, 특히 저 북부 대공 일가처럼 뼛속까지 이득을 계산하는 자들이 나에게 무조건적인 '정품' 호의를 베풀 리가 없었다.이건 분명 나의 신뢰를 쌓아 안심시킨 뒤, 한 번에 나락으로 떨어뜨리려는 악질적인 기만술이다."하아, 들킬 뻔했네."나는 주머니에 숨겨둔 해독제 병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였다."엘리아나! 제발, 문 좀 열어줘!"테라스 창문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커튼을 젖히니, 어제 경비병들에게 질질 끌려갔던 전 약혼자 이안이 2층 테라스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아니, 저 미친놈이 경비가 삼엄한 대공저에 어떻게 기어들어 온 거야?"너, 넌 또 뭐야! 당장 내려가지 못해?""네가 내 진심을 알아줄 때까지 절대 안 내려갈 거야! 엘리, 내가 미쳤었어. 과거의 나는 그깟 가짜 사랑에 눈이 멀어 너라는 진짜 보석을 알아보지 못했던 개자식이야!"이안은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테라스 유리창에 얼굴을 비벼댔다.'진짜 보석?'나는 헛웃음을 쳤다. 가문에서 버림받은 마력 '0'의 영애를 버리고, 백작가의 권력과 다른 여자를 선택해 뻔뻔하게 바람을 피웠던 주제에 이제 와서 진심 타령이라니."엘리! 네가 내게 복수하고 싶다면 기꺼이 이 목숨을 바칠게. 네가 그 망할 대공저에서 겪는 끔찍한 일들, 내가 다 알아! 널 구출해서 내가 평생 모시고 살게 해줘. 내 모든 재산을 네게 넘길 테니까, 제발 나를 너의 방패로 삼아줘!"이안의 절규를 들으며 나의 이성적인 뇌파가 빠르게 회전했다.'나를 구출해? 자기 재산을 넘겨?'퍼즐이 맞춰졌다. 저놈은 지금 대공가의 횡령 사건(내가 덮어쓸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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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이 거대한 가스라이팅의 예산은 얼마인가.
테라스 사건 이후, 나는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방 안에 틀어박혀 방어만 하는 것은 적들의 '엘리아나 미치광이 만들기 프로젝트'에 장단을 맞춰주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내가 얼마나 멀쩡하고 이성적인지 똑똑히 보여주겠어.'나는 시어머니가 억지로 떠넘기고 간 영지 가계부와 다이아몬드 광산 서류를 챙겨 들었다. 이것들을 들고 대공성의 관리들이 모여 있는 집무실로 쳐들어가, 내게 장부 조작의 누명을 씌우려던 얄팍한 수작을 만천하에 까발릴 참이었다.집무실로 향하는 복도. 평소라면 나를 벌레 보듯 무시하며 지나갔을 북부의 정예 기사들이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살기가 뚝뚝 흐르는 북부 기사단은 시어머니보다 더 나를 괴롭히던 존재들이었다. 마력이 '0'인 대공비는 북부의 수치라며 대놓고 조롱하던 자들.'흥, 또 무슨 시비를 걸려고.'나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전투 태세를 갖췄다. 그런데 내가 다가가자, 복도를 꽉 채우고 있던 거구의 기사들이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양옆으로 쫙 갈라졌다."대공비 마마를 뵙습니다!"쩌렁쩌렁한 함성과 함께, 기사단장 레온을 필두로 수십 명의 기사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과거, 마마의 그 위대하고 숭고한 희생을 몰라보고 함부로 입놀림을 했던 저희의 머리를 베어주시옵소서!""저희 북부 기사단은 오늘부로 대공 전하가 아닌, 오직 대공비 마마의 검이 되어 마마의 앞길을 지키겠나이다!"기사들의 눈에서 뜨거운 참회의 눈물이 뚝뚝 떨어져 복도의 대리석 바닥을 적셨다. 그 우렁찬 울음소리에 대공성이 쩌렁쩌렁 울릴 지경이었다.나는 들고 있던 가계부를 꽉 쥐었다.'미쳤군. 진짜 다들 미쳤어.'시어머니와 남편, 전 약혼자에 이어 이제는 기사단까지 이 거대한 연극에 섭외된 것이다. 대체 나 하나를 가문에서 쫓아내기 위해 쏟아부은 이 가스라이팅의 예산은 얼마란 말인가? 북부 기사단 전체를 엑스트라로 동원할 정도라니, 대공가의 자금력에 새삼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머리를 베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나는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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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도망치려는 자와 쫓아가려는 미친놈들.
북부 대공직을 버리고 내 호위 기사가 되겠다는 남편.대공가를 하야하고 나를 따라 짐을 싸겠다는 기사단.이 집단 광기의 현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뿐이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 방으로 도망쳐 들어와 문을 걸어 잠갔다.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이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어.'나 하나를 빈손으로 쫓아내고 미치광이로 만들려고 대공작 지위까지 버리는 연기를 한다고? 저쯤 되면 연기가 아니라 진짜 단체로 정신병동에 집단 감염된 수준이었다. 대공가가 통째로 망해가는 이 시점에 내가 여기 계속 붙어있다간, 횡령죄 정도가 아니라 '북부 멸망의 원흉'이라는 희대의 대역죄를 뒤집어쓸 게 뻔했다."지금 당장 여길 뜬다."이 성의 인간들이 완전히 미쳐버리기 전에 탈출해야 했다.나는 침대 밑에서 오래전 백작가에서 올 때 가져왔던 낡은 가방을 꺼냈다. 대공가에서 준 보석이나 드레스는 단 하나도 담지 않았다. 가져갔다가 나중에 '절도죄'로 고소당하면 골치 아프니까. 오직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옷 몇 벌과 약간의 비상금만 챙겼다.가방 지퍼를 닫는 순간, 문밖에서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엘리, 나요. 들어가도 되겠소?"카이엔이었다. 나는 가방을 등 뒤로 숨기며 차갑게 말했다."문 안 열어줄 거니까 돌아가세요."철컥-!하지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고리가 부서져 내리며 문이 열렸다. 힘 조절을 못 해 문고리를 통째로 뽑아버린 카이엔이 당황한 얼굴로 서 있었다.그리고 그의 차림새를 본 나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그게 무슨 꼴입니까?"황실 연회에나 입고 갈 법한 화려한 대공 제복은 어디 가고, 카이엔은 가죽으로 된 투박한 기사 훈련복을 입고 있었다. 심지어 그의 등 뒤에는 집채만 한 배낭이 똬리를 틀고 있었고, 양손에는 황금과 보석이 가득 담긴 주머니 수십 개가 줄줄이 엮여 있었다."약속대로 대공직을 내려놓고 왔소. 이제 난 그대의 무급 호위 기사라오."카이엔이 아주 자랑스럽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이 자금들은 내가 대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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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대륙급 사기단에게 대처하는 자세.
제국 영토의 절반을 독립 영지로 바치겠다는 대마법사 르웰린 공작의 선언.보통 사람이라면 기절할 만큼 파격적인 제안이겠지만, 내 이성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가라앉았다. 대공가 비자금에 이어 이제는 국가 영토를 미끼로 던지다니. 사기꾼들의 스케일이 대륙급으로 커진 게 분명했다.'제국 영토의 절반? 하! 뻔하지.'마수가 득시글거리는 남부 황무지거나, 막대한 빚이 밀려 당장 파산하기 직전인 저주받은 영토가 틀림없다. 나한테 그 쓰레기 땅을 떠넘긴 뒤, 통치에 실패하면 '영지 관리 소홀 및 황실 모독죄'로 단두대에 세울 속셈이 오롯이 보였다."르웰린 공작님."나는 황금빛 영지 임명장을 냉정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마력 수치 '0'인 제가 제국 반토막을 다스리라니요. 앞뒤가 안 맞는 부실 채권을 떠넘기려는 수작은 그만두시죠. 전 전생이니 성녀니 하는 허황된 연극에 보증을 설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내 단호한 거절에 르웰린의 얼굴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부, 부실 채권이라니요! 마마, 이곳은 제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중부 곡창지대와 마탑이 위치한 핵심 영지입니다! 전생에 마마의 마력을 강제로 추출해 마탑의 동력으로 삼았던 제 대역죄를 속죄하고자, 마탑 전체를 마마의 발밑에 바치려는 것입니다!""마력 추출이요? 보시다시피 전 마력이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평범한 인간인데요. 자꾸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마력을 담보로 사기 치지 마세요.""아아……!"르웰린이 피를 토하듯 바닥을 긁으며 오열했다."전생의 기억이 없으시니, 우리가 씌운 저주가 그대로 남아 마력이 봉인되신 거군요! 이 어리석은 죄인을 죽여주십시오! 마마의 마력을 가로채 천재 소리를 듣던 제 손목을 지금 당장 자르겠습니다!"그가 진짜로 마력을 끌어모아 자신의 오른손을 날려버릴 기세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미친놈이 연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자해 공갈단으로 전업하려는 모양이었다."그 더러운 손 치워라, 르웰린!"쾅-! 한 걸음에 마당으로 뛰어내린 카이엔이 르웰린의 앞을 가로막았다.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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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성녀의 걸음걸이에는 자비가 없다.
"마마! 위험합니다! 제발 뒤로 물러서십시오!"르웰린 공작이 피를 토하듯 절규하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수십 조각의 불꽃 창들이 공중의 그림자 괴수들을 관통하며 화려하게 폭발했다.퍼퍼퍼펑-!하늘에서 붉고 푸른 마력의 파편들이 불꽃놀이처럼 화려하게 흩날렸다. 그 화려한 시각 효과를 배경으로, 나는 정문을 향해 아주 이성적이고 일정한 보폭으로 걸어갔다.'와, 진짜 돈 아끼지 않고 펑펑 썼네. 저 폭죽 이펙트만 해도 마석이 몇 개나 깨졌을까?'내 퇴직금과 위자료를 떼먹으려고 이 정도로 거대한 엔터테인먼트 쇼를 기획하다니, 어떤 의미로는 대단한 정성이었다."엘리! 제발 내 말을 들으시오! 저건 환영이 아니오!"카이엔이 붉은 피가 철철 흐르는 팔을 이끌고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거친 숨결과 함께 진한 피비린내가 밀려왔다. 연기자치고는 눈빛에 서린 공포와 절박함이 지나치게 생생했지만, 나는 속지 않았다. 21세기 K-소비자로서 사기꾼들의 눈물 연기에 속아 넘어가 대출 사기를 당한 지인들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니까."전하, 엑스트라 분들이 저렇게 열심히 괴수 수트를 입고 구르고 있는데 주인공이 퇴근하면 그림이 안 살긴 하죠."나는 카이엔의 찢어진 가죽 옷 사이로 보이는 상처를 빤히 쳐다보며 비스듬히 웃었다."근데 전 관객이지 배우가 아니라서요. 이쯤에서 가보겠습니다. 아, 그리고 그 가짜 피 분장, 냄새는 리얼한데 색이 너무 인위적으로 밝네요. 다음엔 좀 더 어두운 톤으로 준비하라고 분장팀에 전하세요.""가짜…… 피……?"카이엔이 자신의 팔에서 흐르는 피와 나를 번갈아 보며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그 순간, 하늘의 보랏빛 균열이 더 크게 벌어지며, 마침내 고대 신의 거대한 번뜩이는 눈동자가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그 압도적인 신위(神威)에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이 대공성을 짓눌렀다. 르웰린도, 기사들도, 심지어 강인한 카이엔마저 그 위압감에 무릎이 꺾여 바닥을 짚었다.오직 나만이 고개를 빳빳이 든 채 그 거대한 눈동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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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VIP 고객님들의 지독한 사후 관리(A/S)
대공성 정문을 빠져나온 나는 곧장 인근 수도행 마차 승강장으로 향했다. 하늘에 떠 있는 고대 신의 보랏빛 홀로그램이 뭐라고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소음 공해로 신고할 수도 없고 해서 가볍게 무시했다."수도행 가장 저렴한 일반 마차 한 자리 주세요."내가 매표소 직원에게 낡은 동전 몇 개를 내밀자, 직원은 내 얼굴과 내 뒤를 필사적으로 쫓아오던 수백 명의 기사단을 번갈아 보며 사색이 되었다."저, 저기…… 대공비 마마 아니십니까? 이, 이런 누추한 마차는…….""아니요, 전 이제 대공비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민간인 엘리아나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제일 싼 이코노미석으로 주세요. 마일리지 적립은 안 해도 됩니다."내 단호한 태도에 직원이 울상이 되어 마차 표를 끊어주려는 찰나, 내 등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 마차 회사, 내가 전부 사지."카이엔이었다. 그새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황금 궤짝을 통째로 매표소 책상 위에 쿵 내려놓은 남편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이 승강장에 있는 모든 마차와 말, 그리고 상단 전체의 소유권을 지금 이 순간부로 내 아내, 엘리아나에게 양도한다. 당장 제국에서 가장 안전하고 화려한 최고급 리무진 마차를 준비해라!""전하!! 치사하게 돈으로 밀어붙이기입니까?"뒤이어 쫓아온 대마법사 르웰린이 소리를 질렀다."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고? 마탑의 공간 이동 마법진을 이 승강장으로 즉시 연결하겠다! 마마, 굳이 저런 덜컹거리는 마차를 타실 필요 없습니다. 제 심장을 마나 동력으로 삼아서라도 수도까지 1초 만에 모시겠습니다!""두 분 다 작작 좀 하세요."나는 관자놀이를 짚었다.과도한 물량 공세와 부담스러운 사후 관리(A/S). 대기업들이 악성 재고를 처리하거나, VIP 고객을 다른 브랜드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매달리는 지독한 마케팅 현장을 보는 것 같았다.'나를 붙잡아 두고 대공가 부도 위기를 넘기려는 속셈이 아주 눈물겹네.'"난 분명히 제일 싼 일반 마차를 타겠다고 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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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원치 않는 프리미엄 패키지
수도로 향하는 마차 여행은 그야말로 '가시방석', 아니 정확히 말하면 '원치 않는 최고급 프리미엄 패키지'였다.출발한 지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점심시간이 되자 마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최고급 서스펜션 마법 덕분에 덜컹거림 한 번 느끼지 못한 안락한 주행이었다. 마차 문이 열리며, 마부복을 입은 대공 카이엔이 극진하게 손을 내밀었다."엘리, 시장하실 텐데 잠시 내려서 쉬어 가시오."내가 마차에서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카이엔이 황급히 외쳤다."잠깐! 움직이지 마시오!"그가 품에서 꺼낸 것은 눈이 부실 정도로 붉은 최고급 실크 카펫이었다. 카이엔은 축축한 흙바닥 위에 그것을 정성스럽게 깔더니, 내 구두가 흙에 닿지 않도록 그 위에 내밀었다.'와, 대단한 정성이다.'흙길에 실크 카펫이라니. 나 하나를 속여 넘기려고 기획한 예산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혹시 대륙 섬유 길드에서 대규모 협찬이라도 받은 걸까? PPL(간접광고)치고는 지나치게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엘리아나 마마, 이쪽으로 앉으십시오."르웰린 공작이 마법 지팡이를 가볍게 흔들자, 공중에 떠 있는 투명한 마력 보호막이 햇빛과 바람을 완벽하게 차단하며 쾌적한 온도를 만들어냈다. 마치 최신형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진 VIP 대기실에 앉은 기분이었다."공작님, 에어컨 필터 청소는 제대로 하신 건가요? 먼지 날리는 것 같으니 그 기괴한 마법은 좀 치워주시죠."내 쌀쌀맞은 한마디에 르웰린의 눈시울이 또다시 붉어졌다."아아……! 제 마력의 탁함까지 염려해 주시다니. 전생에 마마를 가두었던 제 마법이 얼마나 마마에게 상처가 되었으면……! 당장 마력을 정화하여 무결한 공기만을 대접하겠습니다!"그는 혼자 감격에 겨워 지팡이를 붙잡고 부들부들 떨었다. 자기들끼리 대본을 어떻게 짜 맞췄는지는 몰라도, 리액션 하나만큼은 대륙 최고 수준의 배우들이었다.바로 그때였다.숲속 수풀이 거칠게 흔들리더니, 도끼를 든 험악한 인상의 산적 떼 수십 명이 함성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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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낡은 여관의 5성급 서비스
날이 저물 무렵, 마차가 멈춰 선 곳은 황량한 국도변에 위치한 허름한 여관 앞이었다. 간판은 반쯤 부서져 덜렁거렸고, 외벽의 칠은 다 벗겨진, 그야말로 지나가던 잡상인이나 묵을 법한 초라한 곳이었다.내가 일부러 이곳을 지목해 내리겠다고 한 이유가 있었다.'이 정도 급의 여관이라면 대공가나 황실의 정보망이 미처 손을 쓰지 못했을 게 분명해. 여기선 저들의 연극도 밑천을 드러내겠지.'"여기서 하룻밤 묵고 가겠습니다. 당신들이 아무리 방해해도 전 이 이코노미 여관에 들어갈 테니까 그리 아세요."내 선언에 마부석에 있던 카이엔과 르웰린의 안색이 동시에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그들의 눈동자에 서린 것은 지독한 가슴 앓이와 절망이었다."엘리…… 정녕 이런 쥐가 들끓는 곳에서 자겠다는 말이오? 전생에 네가 황실 감옥의 차가운 돌바닥에서 홀로 신음할 때도 내가 돌보지 못했는데, 이번 생에서조차 이런 누추한 곳에 널 밀어 넣어야 한다니……!"카이엔이 제 가슴을 쥐어뜯으며 피맺힌 목소리로 절규했다."마마! 제발 통촉해 주십시오! 당장 제 마법으로 이 자리에 7성급 임시 궁전을 연성해 올리겠습니다! 저런 천한 먼지가 마마의 폐로 들어가는 꼴은 죽어도 볼 수 없습니다!"르웰린 역시 지팡이를 치켜들며 당장이라도 대지 변형 마법을 쓸 기세였다."됐거든요. 전 아주 멀쩡하니까 오버하지 마세요."나는 콧방귀를 뀌며 낡은 여관 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밖에서 보던 부서져 가던 외관과 달리, 여관 내부는 눈이 부실 정도로 번쩍이는 순금과 대리석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천장에는 수천 개의 최고급 마석으로 만들어진 샹들리에가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고, 바닥에는 왕실 연회장에나 깔릴 법한 폭신한 벨벳 카펫이 깔려 있었다.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이 여관의 주인으로 보이는 뚱뚱한 남자가 내 몸집만 한 황금 자루 수십 개를 품에 안고 사시나무 떨듯 떨며 서 있었다."어, 어서 오십시오, 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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