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널 좋아한다고 여러 번 말했지만 정작 제대로 사과한 적은 없었어. 배여진이 사고 난 그날 밤 사실 너한테 말하려고 했거든. 그런데 막상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이 왠지 공허하게 느껴지더라. 그냥 한마디 말로는 부족할 것 같았어. 그래서 시간을 두고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더 진심을 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하늘은 내게 그런 시간을 허락하지 않더라. 마치 나에게 기회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이. 그때는 정말로 이대로 끝이라고 생각했어.”그 말을 할 때 이승우의 목소리는 살짝 떨렸고 잠시 말을 멈췄다.부승희는 눈가가 뜨거워졌고 평소에는 잘 터지지 않던 눈물샘이 한밤중에 초과근무를 시작했다.베개를 눈물로 적시기 싫어 못마땅한 듯이 휴지를 뽑아 들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입을 열어 그만하라고 하려 했지만 목이 잠겨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짜증 나. 도대체 왜 이렇게 말이 많아.’“너 도대체...”그녀는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도대체 잘 거야. 안 잘 거야?”“이제 잘게.”“말하지 마.”“...응.”이승우는 한숨을 쉬고는 그대로 그녀를 바라보는 자세를 유지했다.한참이 지나고 부승희는 이승우가 여전히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 시선이 확신을 주지 않아 불안했다.이승우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부승희는 잠시 코를 훌쩍인 뒤 천천히 몸을 돌렸다.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부승희는 안도하며 조용히 몸을 눕히고 잠을 청했다. 그리곤 시선의 끝자락으로 이승우를 슬쩍 바라보았다.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흉터가 남아 있었다. 옆으로 누운 채 살짝 웅크린 모습 한 손을 베개 위에 올려놓고 자는 모습은 평소 180cm가 넘는 크고 듬직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쓸쓸해 보였다.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당시 상황을 상상하니 부승희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두려움과 걱정이 뒤섞여 심장이 먹먹해졌다.부승희가 생각에 잠긴 사이 갑자기 이승우가 눈을 떴다.그들은 시선이 맞닿자 부승희는 당황한 듯 잠시 멈칫했다.“...”이승우는 평온한 표
“내가 널 위해 운 건 내 안에 양심이 있기 때문이야.”부승희 변명하듯 말했다.“양심 말고는?”“...”부승희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돌아누우려 하자 이승우가 재빠르게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멈춰 세웠다.그녀는 그를 흘겨보았지만 이승우는 담담히 말했다.“너 자꾸 나한테 얼버무리기만 하잖아. 가끔은 진짜 속마음도 좀 털어놔. 다 말하고 나면 바로 잘게.”“자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해.”이승우는 부승희의 날 선 말투를 흘려듣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네가 나 때문에 울었던 건 아직도 나를 조금은 좋아해서지?”부승희는 그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친 순간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고 그녀는 침을 삼키며 화난 듯 외쳤다.“좋아하면 어쩌라고? 나 좋아하는 사람 많거든?”이승우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뭐가 그렇게 웃겨?”“기분 좋아서. 웃으면 안 돼?”“한 번만 더 웃으면 당장 나가.”부승희는 못마땅한 듯 등을 돌리고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잠시 정적이 흐른 뒤 그녀가 입을 열었다.“너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내가 너를 조금 좋아하고 네 걱정을 했다고 해서 이번 일을 계기로 너랑 더 가까워질 거란 생각은 하지 마.”“알아.”그녀가 이 정도까지 말해준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만족했다.“나 진짜 운 좋은 놈이지.”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그동안 그렇게 막살아도 결국 이렇게 살아 돌아왔고 너랑 같이 사업도 하고 매일 널 볼 수도 있었어. 심지어 죽을 뻔한 날엔 네가 날 위해 울어줬지.”이승우는 무심한 듯 손을 뻗어 부승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부승희 네가 아직도 날 조금이라도 좋아하고 걱정해 준다는 게 너무 좋다.”부승희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아주 조금일 뿐이야.”“...그것만으로도 충분해.”그녀는 콧방귀를 뀌었다.이승우가 또 무슨 말을 하려 하자 그녀는 재빨리 몸을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한마디라도 더 하면 가만 안 둬.”이승우는 웃음을 참으며 입을 지퍼로 잠그는 시늉을 했다.‘입 닫고
이승우는 옷을 갈아입고 나와 부승희가 여전히 영상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살짝 질투를 느꼈다.“그저 흐릿한 사진 한 장일 뿐이잖아. 감우지 씨는 발표회에서 얼굴도 비추지 않았어.”부승희가 그를 한 번 쳐다보며 대답했다.“당연하지. 감우지 씨는 티선항공의 책임자가 아니잖아. 그냥 주주일 뿐이야. 얼굴을 안 보여주는 건 그저 겸손한 거지.”“그리고 감우지 씨가 너를 헬기로 집까지 데려다줬잖아.”이승우는 잠시 침묵했다.“...”그는 입을 열었다.오늘 엄 씨의 주가를 봐. 그 흐릿한 사진 하나가 얼마나 큰 돈을 벌었는지. 너는 그걸 보고 바보처럼 웃고 있잖아.”부승희는 혀를 찼다.그녀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꽤 흥미로워 보였다.“감우지 씨, 실물 진짜 잘 생겼어? 댓글 보니까 그 회사 직원은 감우지 씨가 사진보다 더 잘 생겼다고 하던데.”이승우는 대답했다.“…댓글을 믿을 수 있겠어?”부승희는 그가 의도한 바를 알아챘다.“내가 보기엔 그 사람이 너보다 잘 생겼지?”이승우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강제로 자신감을 드러내며 말했다.“나보다 조금 덜 잘 생겼어.”부승희는 이승우를 째려보았다.이승우는 부승희의 영상을 넘기며 결국 다음 영상이 바로 감우지였다.그는 한숨을 쉬었고 부승희는 웃으며 휴대폰을 빼앗아 갔다.“쪼잔하긴.”이승우는 그녀의 찐빵 하나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뭐 볼 거 있어. 한 사람은 여자친구가 있고 한 사람은 결혼해서 애들도 몇 살인데.”부승희는 감우지와 엄우한의 나이를 확인한 후 그 휴대폰을 이승우에게 내밀었다.“이승우, 두 명 다 너보다 젊어.”이승우는 당황했다.‘???’부승희는 그를 보고 혀를 차며 휴대폰을 들고 말했다.“사람과 사람을 비교하니 진짜로 차이가 확 느껴지네.”이승우는 침묵했다.“…”그는 불만이 있었지만 결국'솔로'라는 꼬리표는 여전히 그에게 붙어 있었고 방법이 없었다.부승희의 발걸음을 따라가며 또 다른 마음을 짓누르는 말을 들었다.부승희가 말했다.“부
부승원과 반우희는 지난해 혼인신고를 마쳤지만 아직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다.부승희는 이승우와 함께 맡고 있던 일을 마무리한 뒤 날씨가 화창한 날을 골라 차를 몰고 경인으로 돌아왔다.지난 1년 동안 두 사람은 집을 여관처럼 들락거렸고 오랜만에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부승희는 엄마에게 귀를 잡힌 채 호되게 혼이 났다.“너 아직도 이 집이 네 집인 줄은 아는구나.”부승희는 잔뜩 비위를 맞추는 웃음을 지으며 엄마에게 건넬 선물을 슬쩍 내밀었다.“밖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도 다 엄마 체면 세워 드리려고 그러는 거잖아요.”채애정은 그 말에 조금 마음이 풀린 듯했지만 이내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마른 몸을 보고는 안쓰러워하며 핀잔을 주었다.“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할 일도 많은데 하필 그렇게 먼 데까지 가서 돼지를 키운다고? 요즘 축산업도 별로라던데 차라리 인터넷 사업을 하는 게 낫지.”“이제 돼지 키우는 것도 인터넷 없으면 안 돼요. 전통 산업도 예전이랑 많이 달라졌어요.”부승희는 능숙하게 설명하며 채애정이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리려 했다.그러다 문득 집 안을 둘러보니 완전히 새 단장을 한 듯했다. 값비싼 물건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엄마, 오빠 결혼 준비하는 거예요? 아니면 왕이라도 될 셈이에요?”채애정은 위층을 가리키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네 오빠가 왕이 된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신경 쓰진 않을걸.”부승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우리 새언니 보통 사람이 아니네요?”엄마는 손을 휘휘 저으며 한마디 덧붙였다.“네 오빠는 참 못났어.”부승희는 피식 웃었다.‘엄마, 완전히 질투하는 거네.’그런데 사실 채애정뿐만 아니라 부승희도 조금 질투가 났다.‘그렇게나 냉철하고 철벽같았던 친오빠가 결국 녹아내릴 때가 오다니.’부승희는 채애정과 한참 수다를 떨다가 문득 반우희가 보고 싶어졌다.두 손을 뒤로 깍지 낀 채 계단을 올라가며 오빠의 결혼 준비로 집 안이 얼마나 북적이는지 새삼 실감했다.부씨 가문의 집은 워낙
방금 안에서 19금의 장면이 펼쳐지려는 걸 본 부승희는 당황한 나머지 가볍게 헛기침했다.그 순간 반우희가 ‘앗’ 하고 짧게 소리를 내며 부승원의 무릎에서 미끄러질 뻔했다.부승원은 재빠르게 그녀를 단단히 붙잡아 품에 안았고 그제야 문 쪽을 바라보며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하지만 부승희는 익숙한 오빠의 단정한 인상 때문인지 그의 싸늘한 눈빛도 별로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오히려 눈가에 아직 남아 있는 감정이 더 민망했다.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쳇.’부승희는 손을 입에 가져갔다가 다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러고는 두 손을 등 뒤로 돌렸다.“오빠 문이라도 좀 닫지? 너무 예의 없잖아.”부승원은 여동생임을 확인하자 살짝 표정이 풀렸지만 어색함을 감추려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다.오히려 반우희가 밝게 웃으며 부승희에게 손을 흔들었다.웨딩드레스가 무겁기도 할 텐데 그녀는 능숙하게 몸을 돌려 바닥에 내려선 후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부승희 언니.”부승희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아직도 언니라고 불러요? 며칠 뒤면 내가 반우희 씨에게 올케라고 불러야 할 텐데.”반우희는 헤헤 웃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그게 뭐 어때서요? 그냥 각자 부르는 대로 부르면 되죠. 전 계속 언니라고 부를 테니까 언니는 저한테 올케라고 부르면 되고요.”부승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부승원은 말없이 안경을 챙겨 쓰고 옷매무새를 정리한 후 부승희를 훑어보았다.“또 살이 빠졌네요? 그리고 까매졌고.”그러자 반우희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장난스럽게 덧붙였다.“건강미 넘치는 섹시한 스타일이네요!”부승희는 확실히 피부가 조금 까매지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심한 정도는 아니었고 섹시한 스타일은 맞았다. 짧은 스포츠 브라탑 위에 짧은 가죽 재킷을 걸쳐 한층 더 멋스럽고 당당한 분위기에 몸매 라인이 돋보였다.그녀는 반우희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우희 씨야말로 엄청 하얗고 통통하네요.”그러자 반우희는 더 가까이 다가와 볼을 쏙 내밀며 장난쳤다.부
이승우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현관에서 한은숙이 그를 맞이했다.이승우의 부모님은 늦게 결혼하고 늦게 아이를 낳은 부부였다. 한은숙은 아직 쉰을 조금 넘겼을 뿐이었지만 철저한 자기 관리 덕분에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오랜만에 본 아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깊은 안쓰러움이 묻어 있었다.“아들아, 이리 와. 엄마가 좀 보자. 어디 다친 데는 없니?”이승우는 한은숙을 거실로 이끌며 소파에 앉아 있는 이상열에게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부드러운 말투로 한은숙을 안심시켰다.“괜찮아요. 그냥 살짝 긁힌 정도예요.”하지만 한은숙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얼굴에 난 상처를 발견하고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긴장했다.이승우가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결국 이상열이가 냉담하게 쏘아붙였다.“괜찮으면 당장 집에 와야지? 네 엄마가 걱정하는 거 몰랐어?”그러자 한은숙은 즉시 이승우를 감싸며 이상열을 나무랐다.“얘가 제일 먼저 나한테 전화했어요. 무사한 거 알고 있었으니까 걱정 안 했죠. 그리고 사고 난 다음에 제일 먼저 와이프한테 가보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와이프?”이상열은 비웃으며 말했다.“너무 과장하는 거 아니에요?”“내가 뭘...”“분명 같이 돌아왔겠죠. 고속도로에서 내려서 부씨 가문 아가씨를 먼저 데려다주고 우리 집을 지나쳤을 텐데 예전에는 자주 놀러 왔던 우리 집에 몇 년째 얼굴도 비추지 않고 이번에도 인사 한마디 없이 그냥 지나갔어요.”이승우는 침묵했다.“...”한은숙은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며 이승우를 바라보았다.“아직도 승희의 마음을 붙잡지 못한 거야?”“거의 잡았어요.”“그 말 이번에도 했잖아.”한은숙은 못마땅한 듯 말했다.이승우는 답답한 속을 품고 있었고 그때 이상열이 옆에서 한술 더 떠서 말했다.“나는 몇 년 있으면 칠십이야. 죽기 전에 손자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지 모르겠군.”“아버지가 늦게 손자를 보는 건 아버지가 늦게 저를 낳으셔서 그렇잖아요.”한은숙은 이승우의 말에 맞장구치
부승원이 부승희를 향해 말했다.“많이 낡았는데 이참에 꺼내서 다시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부승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부승원이 바로 나무 상자를 열었다.남매는 테이블 앞에 옹기종기 붙어서 상자 안에 든 물건에 시선을 집중했다.부승희는 아예 허리를 숙여 상자 안으로 들어갈 기세였는데 고개를 드니 부승원도 꽤 집중한 눈치였다.그래서 피식 웃음이 터졌다.“눈 깜짝할 사이에 오빠가 벌써 결혼을 다하네.”부승원도 시간이 이렇게 빠르게 흐른 게 믿기지 않았다. 아직도 부승희만 보면 작고 어리던 시절이 떠올랐다.“너도 많이 컸네.”부승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상자 안에 든 진주 목걸이를 가리켰다. 가문에 대대손손 내려온 진주 목걸이는 감탄사를 자아냈다.그러다 보니 아주 오래전, 어린 부승희가 부승원을 졸라 엄마의 보물 상자를 열어달라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어린 부승희는 진주 목걸이를 보며 눈을 반짝이고 감탄을 늘어놨었다.부승원이 이런 부승희를 보다가 머리를 꾹 눌렀다.부승희는 눈을 지그시 감고 그 무게를 견디다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결혼하고 오빠 어디에서 지낼 거야?”“설마 우희 씨네 화려한 별장에서 지내는 거야?”부승원은 마른기침을 하면서 말을 고쳤다.“인테리어 새로 해서 이젠 그렇게 과하지 않아.”“흥, 안 믿어.”별로 이상할 것 없는 일상적인 대화였지만 부승원은 왠지 이 상황이 슬프게 느껴졌고 저도 모르게 부승희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이젠 빨리 자고 내일 봐.”부승희는 제 오빠를 방 밖으로 밀며 말했다. 널찍한 부승원의 등을 보고 있자니 어린 시절 부승원이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부승원도 코를 훌쩍이며 다니던 어린 시절이 있었는데 말이다.그러자 눈시울이 점점 뜨거워졌고 부승희는 제 방문을 닫고 다시 방 안으로 돌아왔다.침대 끝에 걸쳐 앉으니 방이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었다.나무 상자의 진주 목걸이는 전등 불빛에 반짝거렸고 마치 동화 속에 나올법한 마법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아니야. 아버님께서 어머님을 얼마나 아끼시는데 내가 어떻게 어머님께 밥해달라고 조르겠어? 내가 졸랐다고 하면 아버님이 나 혼내실지도 몰라.”“안 그럴 거야.”이승우는 단번에 부승희의 말을 잘랐다.“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네가 좋아한다면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셔서 밥 차려주실걸?”부승희는 웃음이 터졌다.“농담하지 마.”“농담 아니야. 오늘 밤에도 아버지가 네 얘기하셨어.”부승희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물었다.“나에 대해... 무슨 얘기를 했는데?”“네가 좋은 사람이라고, 똑똑하고 예쁜 널 나와 맺어준다면 가문의 영광이라고 했어.”“웃기지 마.”부승희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그러나 입꼬리는 내려올 줄을 몰랐다.“아버님 눈이 얼마나 높으신지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버님 눈엔 어머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눈에 차지 않으실걸?”“어머니가 널 마음에 들어 하니까 아버지도 그러는 거지.”부승희는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심장이 콩닥거리는 걸 느꼈다.핸드폰 너머 이승우도 조용했고 부승희는 혹시 자신의 심장 소리가 이승우에게 들릴까 호흡 소리도 작게 했다. “내일엔 뭐해?”이승우가 물었다.“모르겠어. 오빠가 볼일이 많아서 내가 좀 거들어줘야 할 것 같아.”“그래도 오후 일정이지 않겠어? 그러니까 오전엔 푹 쉬고 내가 데리러 갈게. 같이 아침밥 먹자.”“별로 나가고 싶진 않은데.”“그럼 점심 같이 먹을래?”어찌 되었든 꼭 만나고자 하는 이승우의 의지가 느껴졌다.부승희도 크게 싫은 건 아니었지만 계속 툴툴거렸다.“뭘 또 같이 먹는다고 그래. 오빠도 오랜만에 돌아온 건데 친구나 거래처 사람들이나 만나. 나도 할 일이 산더미라고.”“거래처 만나기 전에 짧게 만나는 것도 안 돼?”왠지 이승우의 간절한 표정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그럼 내일 아침 만나자. 내가 도시락 챙겨서 너희 집으로 갈게.”이승우가 자꾸 보채자 부승희는 잠이 점점 가셨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아직 해가 뜨려면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
새벽이 되도록 양혁수의 방에는 열기가 뜨거웠다.딸깍.헤드 등을 켜고 변여름이 이불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주변을 살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혁수가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연스레 변여름의 몸을 닦아줬다.변여름은 자꾸 양혁수를 훔쳐봤고 양혁수는 손을 뻗어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꾹 눌렀다.그러자 변여름은 양혁수의 베개에 얼굴을 묻고 비비며 입꼬리를 올렸다.이어 욕실에서 샤워 소리가 들려오자 왠지 양혁수가 만족하지 못해 홀로 해결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 옆 서랍을 열어보니 손목시계 따위만 있을 뿐 남은 콘돔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양혁수가 많이 자제한 것 같았다.‘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 있는 걸 통째로 갖고 오는 건데.’그리고 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양혁수가 돌아왔다.변여름은 얌전히 누워있다가 양혁수의 품에 꼭 안겼다.양혁수의 체향을 느끼며 변여름은 두 눈을 감고 얼굴을 비볐고 목 언저리에 뽀뽀하려 했다.그러나 양혁수가 변여름을 제지했다.“지금 뭐 해?”“왜요?”양혁수는 제 목에 있는 흔적을 가리켰고 새길 때는 몰랐지만 샤워하고 나니 따끔거리는 게 느껴졌다.변여름이 지난번처럼 또 정도 없이 세게 흔적을 남긴 모양이었다.하지만 이번 모양과 색깔이 너무 마음에 들어 변여름은 미안한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오빠 다음엔 반대편도 해줄게요.”“...”양혁수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변여름이 취조하듯 방금 잠자리가 만족스러웠냐고 물었다.“오빠, 나 다른 것도 배웠는데 오빠만 좋다면... 읍!”양혁수는 바로 변여름의 입을 막았다.“...”‘풉. 부끄러워하긴.’양혁수는 본인이 오빠로서 리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이 꼬맹이한테 놀아나고 있는 것 같았다.“잠이나 자!”그래서 고작 이런 일로 무게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흥. 오늘은 이만 물러선다.’변여름은 얌전히 몸을 돌렸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자꾸 치근덕거렸다.“오빠가 많이 보수적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요
변여름은 말재주가 뛰어났고 그대로 두면 분명 더 큰 소동을 일으킬 기세였다.양혁수는 그녀를 다잡아보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변여름은 밀고 당기기에 능했고 결국 늘 그가 그녀를 달래는 쪽이었다. 변여름을 제압하려면 그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를 유혹하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서로가 진심을 담기 시작하면 결국 누가 누구를 먼저 유혹한 건지조차 흐려진다.어느새 그녀는 그에게 기대어 그를 천천히 침대로 이끌었다.양혁수는 조용히 누워 있었고 변여름은 이불 속에서 조심스레 머리를 내밀었다. 표정은 잔잔했지만 눈동자에는 설렘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그녀는 익숙한 듯 그의 팔을 벌리고 조용히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내 그의 온기를 안은 채 잠이 들었다.양혁수는 차갑게 굴어보려 했지만 몸은 정직하게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키스가 끝나자 그는 스스로의 입을 때리고 싶을 만큼 후회가 밀려왔다.저녁이 되면 변여름은 양혁수 곁에서 말이 많아졌다. 그녀는 그와 감정을 나누고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부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전부 들려주었다. 작은 머릿속은 놀라울 만큼 명확했고 양혁수가 확신하지 못하던 일들을 종종 먼저 짚어내곤 했다.그러다 보면 두 사람의 입술은 자석처럼 끌려붙었고 전에는 양혁수가 불씨를 조심스럽게 다룰 수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변여름을 집에 데려온 첫날 밤 양지원을 마주친 이후의 느낌은 이전과는 달랐다. 그녀를 몸 아래에 눕히고 얼굴을 감싸안은 채 키스하자 변여름은 그의 몸에 다리를 스치듯 비볐고 그는 순간적으로 치솟는 충동을 느꼈다.자신의 반응을 깨달은 그는 재빨리 움직임을 멈췄다.변여름에게 들킬까 봐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조명의 밝기를 낮추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막 눕자마자 변여름의 부드러운 몸이 다시 양혁수의 품에 파고들었고 변여름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으며 단 한 번의 눈 맞춤으로 그녀가 이미 모든 것을 알
양혁수의 ‘착하지’라는 한마디에 변여름의 입꼬리는 하늘까지 닿을 듯 환하게 올라갔다.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데 능했고 사실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특히 밤 11시 30분이 넘도록 그가 나타나지 않자 아마도 자신이 먼저 찾아오기를 기대하며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아이고.’변여름은 그의 장난에 넘어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간질이는 마음을 안고 그녀는 문가에 서서 발끝을 들어 여러 번 밖을 내다보았다.밤이 깊어 12시가 다 되어도 그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외투를 걸쳐 입은 채 문을 열고 나섰다.양씨 가문의 저택은 워낙 넓어서 그녀가 양혁수의 방에 닿기 위해선 한 층 아래로 내려가 길게 이어진 복도를 걸어야 했다.몰래 발걸음을 옮겨 문 앞에 선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예상대로 잠겨 있지 않았다.문을 열고 들어선 방 안은 숨 막힐 듯 어두웠다.침실은 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그녀는 익숙한 감각과 뛰어난 시력에 의지해 침대를 더듬어 앉았지만 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변여름은 숨을 죽인 채 주변을 감지했고 방 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혹시 오빠가 나를 찾으러 간 걸까?’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작은 거실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무언가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그녀는 즉시 멈춰 섰다.달빛이 비추는 거실 그 한쪽 소파 팔걸이에 몸을 기댄 양혁수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침실 문을 빠져나온 그녀가 멈추는 순간까지 눈을 떼지 않았고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그의 손에는 라이터가 들려 있었고 그는 그것을 가볍게 던지며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갔다.변여름은 품에 안긴 이가 양혁수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가 갑작스레 뒤에서 안아오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이어진 그의 키스가 그녀의 옆얼굴에 가볍게 닿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숨을 멈췄다.양혁수는 평소 그녀가 마음껏 표현하게 두었지만 자신이 먼저 유혹
식사가 끝나자 양지원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식사 후 그녀는 아래층 소파에 편히 앉아 야경을 바라보며 시간을 재어 양석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위층에서는 양혁수와 변여름 사이에 또다시 작은 충돌의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양지원이 집에 머무는 동안 양혁수는 변여름과 같은 방에 머무를 수 없었다.변여름은 몹시 언짢은 기분이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전화에는 세 글자의 짧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양혁수.]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꽤 화가 난 모양이네. 성까지 붙여 부르다니.’풀네임으로 불린 건 처음이라 문득 그것도 꽤 재미있었다.수건을 툭 던지고 침대에 앉은 그는 변여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화났어?]잠시 후 변여름에게서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사진 속에는 줄에 매달린 막대 인형이 있었고 그 옆에서 날아온 주먹이 인형의 배를 강하게 가격하고 있었다. 인형 옆 상자에는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었고 상자 안에는 ‘양혁수’라는 이름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양혁수는 순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어디서 배운 거야? 너희 천재들은 이런 것도 다 할 줄 아는 거야?]예전에 변여름은 허예나의 이름으로 그와 채팅할 때 일부러 평범한 여고생처럼 꾸미며 어색하고 오래된 이모티콘을 보내곤 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그녀는 모든 걸 이해했고 재치 넘치고 독특한 이모티콘으로 그의 휴대폰을 장악했다.[이런 게 아주 유용하죠.]변여름이 말했다.[그러니까. 이제는 원격으로도 때릴 수 있지.]양혁수가 답장을 보냈다.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양혁수는 전화를 받았다.화면 속 변여름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아 있었고 아마 두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는지 아래에서 위로 비추는 각도는 썩 좋지 않았다.양혁수가 웃으며 말했다.“집에 재밌는 공간 많잖아. 잠 안 오면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나가기 싫어요.”변여름은 기운 없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