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원해?” 권태혁이 새빨개진 얼굴로 품 안에 안긴 여자를 보며 나른하게 물었다. 병이 도진 온세아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한 지 1년이 지나도록 남편 구형민은 온세아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결국 지독한 방치 속에 온세아가 해리성 장애라는 진단을 받고 말았다. 발작이 시작되면 욕구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았다. 어느 깊은 밤, 언니의 사진에 대고 몰래 입을 맞추는 남편을 목격하고서야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은 그저 언니의 대역일 뿐이라는 것을. 증세가 점점 심해지자 결국 병원을 찾았고 그곳에서 젊고 잘생긴 남자 의사를 만났다. 병이 도져 그 자리에서 하마터면 이성을 잃고 덮칠 뻔했다. 그런데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한 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어제 온세아를 진찰했던 의사가 바로 새로 부임한 대표였다. 온세아는 모르는 척 도망치려 했지만 권태혁이 그녀를 비서로 발령해버렸다. ... “대표님, 저 남편이 있어요. 불륜이라도 저지르겠다는 거예요?” 대표실, 권태혁의 다리에 앉아 화를 내며 씩씩거리는 온세아. 권태혁이 그녀의 허리를 잡고 입을 맞췄다. “자기야, 어젯밤에 날 여보라고 불렀던 거 까먹었어?” 결국 온세아는 미련 없이 이혼하고 보란 듯이 재혼했다. 뒤늦게 후회가 밀려온 전 남편이 온세아를 잡고 애원했다. “세아야, 우리 다시 시작하자. 재결합만 해준다면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해줄게.” 온세아의 말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미안한데 난 남자 구실 못하는 남자한테 관심이 없어.”
View More권태혁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하복부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확 끼쳐 올랐다.이대로 있다가는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질 것 같았다.그는 서둘러 차 문을 열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트렁크에서 비상용으로 챙겨둔 새 옷 한 벌과 마른 수건을 꺼내 돌아와서 그녀에게 내밀었다.“닦고, 옷 갈아입어.”세아는 마른 수건만 받아들며 사양했다.“전 괜찮아요. 대표님이야말로 온몸이 다 젖으셨는데 얼른 옷부터 갈아입으세요.”“그럼 세아 씨는 이 셔츠 입어. 난 바지 갈아입을 테니까.”권태혁이 셔츠를 그녀 쪽으로 툭 던졌다.그리고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이미 몸에 딱 달라붙어 있던 젖은 옷을 벗어 던졌다.고스란히 드러난 탄탄한 복근과 견고하게 잡힌 근육들을 마주하자 온세아는 당혹감에 헛기침을 내뱉었다.“설마... 여기서 바지까지 갈아입으시게요?”권태혁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되물었다.“왜, 남자 거 처음 봐?”“그럴 리가, 당연히 본 적 있죠!”말을 내뱉자마자 아차 싶었다. 권태혁의 안색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변했기 때문이다.그는 속이 뒤틀렸다.제길, 그녀가 이미 유부녀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니.남편과 한 침대에 누운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지자 형용할 수 없는 질투심이 들끓었다.권태혁은 가라앉은 눈으로 온세아를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그래? 볼만하던가?”온세아는 과거 이채린이 억지로 성인물을 보여주려 했을 때, 얼떨결에 훔쳐보게 되었던 화면이 떠올랐다.“아니요! 징그럽기만 하던데요.”권태혁은 그녀가 방금 누구를 떠올렸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십중팔구 남편일 것이라 짐작했다.가능하다면 당장이라도 이 여자를 차 밖으로 내쫓고 싶은 심정이었다.이내 서늘한 눈빛으로 가시 돋친 냉소를 내뱉었다.“남편은 이미 세아 씨 언니한테 간 거 아니었나? 아직도 그런 놈이 생각나나 보지?”온세아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었다.방금 이채린과의 통화 내용을 그가 전부 듣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이런 치욕스러운 가정사
그리고 서둘러 가방에서 휴대용 우산을 꺼내 들고 차에서 내렸다.이내 권태혁의 곁으로 다가가 우산을 씌워주며 물었다.“어떻게 됐어요?”“차가 고장 났군.”무덤덤한 대답에 온세아의 눈이 동그래졌다.“이렇게 좋은 차도 고장이 나요?”“속도가 너무 빨랐던 데다 비까지 많이 와서 웅덩이를 못 보고 앞바퀴가 완전히 빠져버렸어.”권태혁이 간결하게 상황을 설명하더니 한마디 덧붙였다.“세아 씨는 차 안에서 기다려.”온세아가 우산을 내밀었다.“그럼 이거라도 쓰고 계세요.”여자 혼자 쓰기에도 작아 보이는 우산을 본 권태혁의 미간이 좁아졌다.“남자 몸으로 비 좀 맞는 건 일도 아니니까 얼른 들어가 있어.”온세아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누군가에게 진심 어린 배려를 받는 생경한 경험이었다.어릴 적부터 부모님은 물론, 명목상의 남편인 구형민조차 그녀의 존재와 감정을 무시해 왔다.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장대비 속에서 기꺼이 우산을 양보하며 그녀를 차 안으로 떠밀고 있었다.온세아는 고마운 마음을 안고 먼저 차로 돌아왔다.십여 분이 흐른 뒤에야 권태혁이 흠뻑 젖은 몸으로 운전석에 탔다.온세아는 얼른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차는 고쳐졌나요?”권태혁이 대충 물기를 닦아내며 대답했다.“고치긴 했는데, 앞바퀴가 너무 깊게 빠졌어. 일단 나갈 수 있는지 한번 해보지.”몇 번이고 시동을 걸어 보았지만 모두 실패였다.다시 밖으로 나가 커다란 돌을 주워 바퀴 밑에 지지해도 차는 좀처럼 빠져나올 기미가 안 보였다.설상가상으로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마저 진흙탕 속으로 빠져 버렸다.권태혁이 다시 차 안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젖어 있었다.짧은 머리카락에 맺힌 물방울들이 그의 수려한 얼굴 윤곽을 타고 끊임없이 흘러내렸다.날렵한 턱을 지나 도드라진 목울대를 타고 내려간 물줄기가 이윽고 젖은 셔츠 너머 탄탄한 가슴팍 안쪽으로 스며들었다.그 광경을 지켜보던 온세아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차라리 보지 말자.’그녀
“나 유혹하는 게 뜻대로 안 된다고 바다에 뛰어들기라도 하겠다는 거야?”권태혁의 어이없는 한마디에 온세아는 가슴을 짓누르던 울적함이 한순간에 사라졌다.불과 몇 초 전까지 슬픔과 상실감에 빠져 있었건만, 자기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대표님이야말로 여긴 어쩐 일이세요?”정신을 차린 온세아가 깜짝 놀라 물었다.“타.”권태혁이 대뜸 명령했다.온세아는 당황한 듯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지금은 엄연히 주말이고, 사적으로 그다지 친한 사이도 아닌 상사의 차에 올라탈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내가 아는 척 안 했다고, 진짜로 바다에 빠질 작정이야?”권태혁이 눈썹을 살짝 치켜뜨며 능청스럽게 물었다.“누가 바다에 뛰어든대요? 그리고 대표님을 넘본 적도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온세아가 차분히 말했다.오늘은 정말 기분이 엉망이라 그를 상대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하지만 권태혁은 그녀가 당장이라도 극단적인 선택을 할 사람이라 굳게 믿은 눈치였다.“이 밤중에 혼자 해안 도로를 서성이는데, 만에 하나 떨어지기라도 하면 산재 처리해 줘야 하지 않겠어?”“...”“나중에 딴소리하면서 덤터기 씌울 생각 말고 얼른 타.”권태혁은 다짜고짜 그녀를 조수석에 밀어 넣었다.지금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온세아는 아마 모를 것이다.붉게 충혈된 눈동자, 밤바람에 엉망이 된 머리카락과 옷차림.흡사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고도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 없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가엾고 무력한 모습은 권태혁의 마음속에 이유 모를 연민을 불러일으켰다.‘내가 미쳤나?’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성격이었던가.수년 동안 자신을 보좌해 온 부하 직원들의 사생활조차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그였다.그런데 길가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여자를 보자마자 어째서 이런 측은지심이 생기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심지어 친절하게 차를 돌려 태워주기까지 하다니.온세아는 옆자리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시선을 의식했다.무언의 압박감을 견디다 못해 결국 고개를 돌려
이 비취 팔찌는 외할머니의 유일한 유품으로, 평소 성해연 본인도 아까워 차마 몸에 지니지 못할 만큼 애지중지하던 것이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온아정에게 선물하겠다니?“이 팔찌, 엄마 외가에서 물려받은 마지막 물건이잖아요. 그냥 엄마가 간직하세요. 언니는 이런 거 없어도 충분히 가진 게 많은 사람이에요.”어머니를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 온세아의 간곡한 만류였다.하지만 성해연은 즉시 얼굴을 굳히며 서슬 퍼렇게 나무랐다.“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아정이가 부족함이 없다고 한들 우리가 도리를 안 해서야 되겠어? 결혼은 여자 인생에 단 한 번뿐인 대사야. 번듯한 예물 몇 개라도 더 갖춰가지 않으면 시댁에서 얕잡아 보이기에 십상이란 말이다. 더군다나 네 언니가 시집가는 곳은 그 대단한 진씨 가문 아니더냐.”온세아는 숨이 턱 막혀왔다.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하지만... 제가 결혼할 때는 번듯한 예물 같은 건 구경도 못 했잖아요.”그랬다. 하나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아버지와 큰어머니는커녕, 친어머니조차 그녀를 위해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사실상 빈손으로 구형민에게 시집을 간 셈이었다.그 일로 시댁 식구들과 시어머니에게 은근한 비아냥을 들어야 했고, 사랑받지 못하는 온씨 가문의 핏줄과 결혼한 탓에 구형민이 막대한 손해를 봤다는 소리는 꼬리표처럼 그녀를 따라다녔다.“네가 어떻게 아정이랑 비교가 되니?”성해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싸늘한 목소리로 훈계했다.“아정은 온씨 가문의 명실상부한 아가씨야. 네 아버지와 큰어머니의 딸이라고. 게다가 진씨 가문 후계자한테 시집가는 거잖니. 국내 굴지의 재벌가인 그곳에서 귀한 안주인 대접을 받을 몸이란 말이다.”이내 한술 더 떠서 경멸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내렸다.“그런데 너는 어떠니? 네 남편은 애초에 사생아 출신 아니냐. 구씨 가문과 진씨 가문은 아예 급부터가 달라. 억울하면 내 몸에서 태어난 걸 탓해야지. 넌 평생 번듯한 자리에 서지 못할 팔자니까 아정이랑 하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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