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동생을 원했고 연정훈도 딸을 갖자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예지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은 십중팔구 사라졌다.“삼촌, 뭐해요?”“삼촌은 일하고 있어.”“예지에게 보여줘요.”연정훈은 어쩔 수 없이 잡지를 예지에게 건넸다.자기가 일하는 중이니 예지가 다른 사람과 놀러 가기를 바랐지만 예지는 발돋움해서 잡지를 힐끗 보더니 통통한 손가락으로 잡지에 실린 여성 분석가의 사진을 가리키며 양시연에게 말했다.“삼촌, 예쁜 여자 보고 있어요.”연정훈은 당황했다.“???”양시연은 어리둥절했다.그것을 깨달은 양시연은 예지의 영리함에 감탄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예지가 어떻게 그런 걸 알았는지 궁금했고 게다가 삼촌이 예쁜 여자를 보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신기했다.그런데 예지는 연정훈이 화내지 않자 입술을 쭉 내밀고 연정훈의 의지와 상관없이 연정훈과 책상 사이의 좁은 공간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연정훈의 무릎 위로 기어오르려 했다.연정훈은 어쩔 수 없이 예지를 안아 올렸다.“너 평소에 집에서 낮잠 자니?”연정훈이 태양이와 이야기하듯 묻자 예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연정훈을 올려다보았다.“자요...”연정훈은 예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착한 아기는 낮잠 자야지.”예지는 깔깔 웃으며 하얀 이를 드러냈다.연정훈은 다시 물었다. “예지는 착한 아기 맞지?”“네.”“그러면 예지는 지금 자야 해 자지 말아야 해?”“싫어요.”연정훈은 잠시 침묵했다.“...”옆에서 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렸고 연정훈의 뒤에서 살짝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아직도 예지를 속이려고? 예지 똑똑해.'예지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질문에 대한 답은 할 수 있지만 질문 간의 논리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고 따라서 연정훈을 반항하는 것이 아니었다.오히려 예지는 연정훈을 좋아했다.예지는 우유를 반쯤 마시다가 갑자기 배고프다고 말했고 연정훈은 기뻐하며 예지가 밥을 먹는 동안 달래서 보내려고 생각했다.하지만 예지는 연정훈에게 찰싹 달
세상은 그저 2초 동안 침묵에 빠졌다.양시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고 태양을 데리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연정훈은 손에 있던 개구리가 펄쩍 뛰는 걸 보고 순간 얼어붙었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그런 그를 향해 예지는 가방을 꼭 끌어안고 해맑게 웃으며 물었다.“삼촌, 맘에 들어요?”연정훈은 말이 없었다.“...”잠시 침묵하던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징그러운 연체동물에 대한 혐오감을 애써 누르며 평정을 유지한 채 개구리를 예지의 작은 가방에 조심스럽게 넣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양시연과 태양은 속으로 동시에 엄지를 치켜세웠다.‘대단하다.’그런데 예지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삼촌?”연정훈은 의자의 팔걸이를 움켜쥐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개구리는 유익한 동물이야. 잡으면 안 돼.”예지는 잠시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하더니 갑자기 가방에서 개구리를 다시 꺼냈다. 연정훈이 손을 내밀지 않자 예지는 주저하지 않고 개구리를 그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아빠가 말했는데 이건 두꺼비래요.”연정훈은 당황했다!양시연과 태양은 반사적으로 다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맞은편에서 이승우는 웃음을 참지 못했고 부승희는 그런 이승우를 툭툭 치며 생각했다.‘너무 못됐어.’그러나 정훈은‘두꺼비’라는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그는 서서히 시선을 내리깔아 무릎 위의 작은 생물을 확인했다.“예지야, 이건 개구리야.”“개구리 맞아요?”“응.”그러자 예지는 안심했다.개구리는 유익한 동물이고 유익한 동물은 좋은 삼촌과 함께 있어야 한다.예지는 앞으로 다가가 개구리를 잡아 연정훈의 바지 주머니에 넣으려 했다.그러나 연정훈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순간적으로 벌떡 일어났다.“삼촌, 개구리 줄게요.”“괜찮아. 삼촌은 개구리 싫어해.”“개구리는 유익한 동물이에요.”맞은편에서 예지에게 밀려 계속 자리를 옮기는 연정훈네 가족을 보며 이승우는 부승희를 꼭 껴안은 채 웃음을 참지 못했다. 너무 웃어서 얼굴이
“예지야, 지금 누가 제일 좋아?”이승우가 소리쳐 물었다.예지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삼촌.”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렸고 부승희는 양시연에게 말했다.“연정훈은 아이들한테 꽤 인내심이 많아요.”양시연은 연정훈이 예지와 눈을 맞추며 낮은 목소리로 인내심 있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며 그가 사실 예지를 많이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그 옆에 있던 태양은 어른스럽게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망했어.'그는 아마도 귀여운 막내 여동생을 얻기 어려울 것 같았다.집 앞에서 부승희는 예지를 안고 있는 연정훈에게 두세 마디 말을 건넸다. 그러다 갑자기 ‘아이고’라는 소리가 나왔다.양시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왜 그래요?”“괜찮아요. 배가 갑자기 묵직해진 것 같아요.”“아기 찬 거 아니에요?”“그런 것 같아요.”부승희는 곧 출산 예정이라 작은 움직임에도 이승우는 바로 그녀 곁으로 달려갔다.“어디 불편해?”“아니야.”“빨리 앉아서 좀 쉬어.”이승우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고 양시연은 그에게 제안했다.“위층에 올라가서 좀 쉬는 게 어때요? 괜히 돌아다니지 말고요.”부승희는 답답해서 밖으로 나왔지만 올라가기 싫었다. 그렇지만 이승우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니 어쩔 수 없이 위층으로 올라갔다.오후에는 소에게 우유를 짜는 일이었기에 연정훈과 양시연은 태양과 예지를 데리고 함께 갔다.예지는 그저 장난으로 생각하며 장난치는 것을 그대로 두기로 했다.태양은 이미 학교에 다니고 있었지만 양시연과 연정훈은 학업 외에도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려고 했다. 그들은 세 사람 모두 진지하게 협력하며 일을 했다.드디어 해가 지기 전 큰 우유 통 몇 개를 채웠다.양은 직접 짠 우유를 담아 집으로 가져가 양시연에게 요구르트를 만들어 주려고 했다.연정훈은 저녁에 일이 있었기에, 그들은 예지를 목장 휴양 시설로 데려가 평소 예지를 돌보던 가정부에게 맡기고 세 식구는 집으로 돌아갔다.그들이 떠난 직후 부승희는 예지를 데리러 오려고 했지만 침대에서 내려오자마자 뭔가
예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도 채애정이 돌아오자마자 슬쩍 다가가 조용히 일러바쳤다.“아빠는 엄마한테만 라즈베리를 사주고 나한테는 안 사줘요.”채애정은 예지의 말에 맞장구치며 일부러 화난 척하고 예지의 편을 들어 주었다.“고모가 아기 낳고 나면 할머니가 예지한테 잔뜩 사줄게.”“엄청 많이 사줘야 해요!”“알았어...”그제야 예지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예지는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았다. 라즈베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두 개 이상 먹고 싶어 하지 않았다. 단지 평소처럼 장난을 치고 싶었을 뿐이었다.한편 맞은편에는 반우희와 부승원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부승원은 벽에 기대앉아 반우희를 흘깃 바라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얼굴 하나 안 빨개지네? 반만 남겨 두라고 했는데 한 입도 안 남겼잖아.”반우희는 콧방귀를 뀌며 그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마지막 라즈베리 케이크였어요. 당신이 사준 거지만 나 혼자 먹기에도 모자랐다고요.”부승원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아직 철이 덜 들었네.”“뭐라고요? 나 오늘 혼자 소송해서 이겼거든요.”이야기가 나오자 부승원은 그녀를 다시금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법정에서의 그녀는 그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었고 그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부승원은 속으로 흐뭇하게 웃으며 이미 그녀를 위한 축하 선물로 무엇을 준비할지 머릿속에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한편 병실에서는 부승희가 아직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 이승우에게 머리를 감겨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차분히 출산을 준비했다.그러나 몇 시간을 기다려도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새벽이 지나고 피곤함이 몰려오던 그때 갑작스럽게 진통이 시작됐다.이승우는 당황하면서도 재빨리 그녀를 부축해 분만실로 향했고 그는 옆에서 조용히 응원을 건넸다.부승희가 말했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 휴대폰 만지다가 걸리면 죽는 줄 알아.”이승우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휴대폰을 볼 정신이 있긴 해? 내 손바닥에
“너, 시도 알아?”부승희는 이승우를 놀리며 말했다.“그만해. 갑자기 그러면 무서워.”“먼저 나를 놀리지 말고 들어봐.”“그럼 말해 봐.”“동쪽에서는 해가 뜨고 서쪽에서는 비가 내리네. 완전히 맑다고 할 순 없지만 그 안에 맑음이 숨어 있지.”부승희는 눈썹을 한껏 올렸다.“이동하?”이승우는 침묵했다.“...”“이유하.”부승희는 잠시 멈칫하며 생각에 잠겼고 이승우는 턱을 쭉 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이름 예쁘지 않아?”이쁜 건 둘째 치고 부승희는 이 시구절이 가진 다른 의미가 마음에 들었다.“하늘은 흐린 듯하지만 그 안에 맑음이 스며 있고. 차가워 보이지만 속에는 따뜻한 정이 흐른다.”“여름을 뜻하는 한자 ‘하’를 쓸 거야?”그녀가 이승우에게 물었다.“응. 우리 아이가 평생 여름 날씨처럼 맑고 비바람 없이 햇살만 가득한 삶을 살기를 바래.”이승우는 의자를 끌어당기며 얼굴에 웃음을 가득 지었고 어젯밤보다 훨씬 더 기뻐 보였다.“내가 애칭도 생각해 뒀어.”부승희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본명은 네가 지었으니 애칭은 내 차례야.”“알아. 난 그냥 이름 후보를 추천하는 거야. 본명도 그렇듯이 넌 거부할 권리가 있잖아.”부승희는 마지못해 동의하며 고개를 들었다.“그럼 말해 봐.”“미소, 어때?”“미소?”부승희는 살짝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미소가 얼마나 좋은데. 항상 행복하게 웃으며 살면 좋잖아.”“…”그녀는 본명에는 꽤 만족했다. 애칭도 몇 가지 고민해 두었지만‘미소’만큼 마음에 드는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없었다.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아기의 이름을 불러 보았고 아기는 여전히 냠냠 먹으며 멈추지 않았다.이승우가 장난스레 말했다.“봐, 미소도 반대 안 하잖아.”부승희는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미소가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야 부승희는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왔다.집은 이미 축제 분위기였고 많은 친구가 찾아와 축하를 건넸다.그날 아침 이승우는 모든 준비를 마친 뒤 부승희와 딸을 차에 태웠다.이
다음 해가 되었다.알람이 울리자 문 밖에서 태양의 발소리가 제시간에 들려왔고 양시연은 연정훈의 품에 기대어 눈을 감고 웃음을 터뜨렸다.“얘는 왜 이렇게 부지런해요? 초등학교 다니는 게 그렇게 재밌을까요?”연정훈은 자세를 바꿔 그녀를 끌어안고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았다. 동시에 침대 옆 램프를 켰다.“신기해서 그렇지. 며칠만 지나면 지겨워질 거야. 예전에 유치원 갈 때도 그랬잖아.”양시연은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아직 시간이 있고 아침 식사는 누군가 준비해 줄 거라서 그들은 서두르지 않았다.연정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 옆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물었다.“어디 아픈 곳은 없어?”양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무렇지도 않아요.”이틀 전 검사 결과를 받았고 양시연은 둘째를 임신했다. 아직 태양에게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그녀가 처음 임신했을 때부터 벌써 6, 7년이 흘렀다. 연정훈은 그때의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그녀에게 더 많은 신경을 썼다.“내 생각에는 집에서 쉬는 게 좋을 것 같아.”그는 돌려 말했다.양시연은 아직 배가 많이 나온 것도 아닌데 집에서 쉬면 오히려 답답할 것 같아 거절했다.“걱정 마요. 조심할게요.”연정훈은 아직도 양시연을 설득하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재촉을 받아 일어섰다. 그는 4년 전에 원래 근무지에서 떠나 지금은 서운시에서 일하고 있었고 예전보다 더 조심해야 했다.“태양 오늘 생일인데 정시에 퇴근할 수 있겠어요?”양시연이 물었다.“응. 요즘은 별일 없어.”연정훈은 침대에서 내려와 그녀 옆을 지나가며 말했다.“일어나지 말고 좀 더 자. 내가 아침 챙겨줄게.”“괜찮아요.”양시연은 일어나서 뒤에서 연정훈을 끌어안고 말했다.“어제 태양한테 침대에서 먹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는데 오늘 내가 침대에서 먹으면 양심이 좀 찔릴 것 같아요.”“그냥 배 속에 여동생이 있어서 여동생이 침대에서 먹고 싶다고 하면 태양은 분명히 괜찮다고 할 거야.”양시연은 웃었다.“아니요. 그냥 나중에 말해줘요. 태양이에게 서
양시연은 연정훈에게 태양이 너무 일찍 어른스러워지려 한다며 투덜거렸지만 부씨 가문은 온 가족이 꼬마 악당에게 휘둘려 진이 빠진 상태였다.새벽부터 온 가족이 예지를 둘러싸고 유치원 갈 옷을 입히려 분주했다.이승우의 아들 라온도 곧 돌을 맞이했고 예지는 세 살이 되었다. 채애정은 예지가 또래 친구들과 더 잘 어울릴 수 있도록 최고의 사립 유치원에 보내기로 했다. 유치원은 주 4일 운영되며 매일 오전 9시에 등교해 오후 2시에 하원하는 시스템이었다.그런데도 예지는 유치원에 가기 싫어했고 아침마다 울음을 터뜨렸다.“예지야 착하지? 할머니 들어봐. 유치원 정말 재미있어. 네가 제일 좋아하는 은서 선생님도 계시잖아.”“싫어요. 싫어요.”예지는 치마를 입으려 하지 않고 바지를 입은 채 머리도 헝클어진 채로 기회만 있으면 아빠 품에 안겼다.“예지는 유치원 안 갈래요. 할머니가 가요.”채애정은 머리가 아팠다.부승원이 예지를 안아 올리며 달래는 모습을 보니 유치원에 가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채애정은 부승원에게 눈짓을 보내며 겨우 깨웠는데 방해하지 말라고 했다.“아빠.”예지는 부승원의 목을 꼭 껴안고 훌쩍이며 울었다.“예지를 유치원에 보내지 마세요.”“유치원이 싫어?”“싫어요. 싫어요.”부승원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소파로 데려갔다.채애정은 굳이 맞힐 필요도 없이 그의 말을 미리 짐작했다.“그러면 오늘은 가지 말자.”채애정은 먼저 말했다“이번 주에 이미 두 번이나 결석했어.”일주일은 7일인데 2일만 다니고 5일은 쉬는 셈이었고 이건 도저히 안 되는 일이었다.부승원은 채애정을 흘끗 보며 다른 손으로 예지를 안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예지가 다섯 살에 유치원 가도 괜찮다고 생각했고 뭘 배우고 싶으면 선생님을 집으로 초대하면 된다고 여겼다.하지만 부모님의 의견도 일리가 있었고 그는 아이의 성장을 놓치는 게 두려웠다.아무리 마음이 아파도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다.부승원이 ‘안 간다’는 말을 하지 않자 예지는 불안해하며 부승원
반우희는 이불 속에 누워 게으름을 피우며 즐거워하고 있었다.문밖에서는 예지가 할머니와 화해하고 채애정이 예지를 치마를 입혀 줄 때 얌전하게 있으면 방과 후의 일정을 짜고 있었다.“태양 오빠랑 놀러 가요.”“알았어. 태양 오빠랑 놀자.”반우희는 속으로 투덜거렸다.‘태양이랑 같이 놀러 간다니. 그건 진짜 놀러 가는 게 아니라 그냥 태양을 괴롭히겠다는 거잖아.’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한 남자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뒷목을 쥐었다.“안 일어날 거야?”반우희는 콧방귀를 뀌고 문밖을 힐끗 살펴보았다. 채애정이 예지를 안고 내려간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재빨리 일어나서 침대에 앉아 있던 부승원에게 달라붙었다.“안 일어날 거예요. 당신도 날 달래줄 수 있어요?”그녀는 예지에게 질투하는 일상이었지만 부승원은 재미있어하며 입꼬리를 올리고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달래주면 네가 어린이집 갈 때 데려다줄까?”“좋아요.”반우희는 잠시 눈을 돌려 생각한 후 그에게 바짝 다가가 속삭였다.“나 선생님 할 거예요. 우희 선생님.”그녀는 그의 뒤쪽 목덜미를 부드럽게 문지르며 그 특유의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말 안 들으면 벌주겠어요.”부승원은 즉시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 그녀의 역할 놀이를 떠올렸다.역시 반우희는 이어서 그를 불렀다.“어린이?”아침 일찍 모든 것이 자라기 쉬운 시간 부승원은 아무렇지 않게 숨을 고르고 얼굴을 옆으로 돌려 그녀를 한 번 바라보았다.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일부러 그의 얼굴 가까이에 다가갔다.부승원은 그녀를 어떻게 할 수 없었고 이제 막 옷을 입고 일을 보러 갈 시간이었기에 그녀를 다루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는 그저 손을 뻗어 그녀의 양 볼을 살짝 쥐었다.“다시 말해 볼래?”반우희는 그의 꾸짖음에도 이미 익숙해져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그를 품에 파고들었다.부승원은 그녀에게서 달콤한 향기를 맡으며 점점 이끌려 가고 싶었지만 다행히 아래층에서 꼬마 악마의 하이톤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
양석진은 아무 내색하지 않고 양지원을 이끌어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누가 너 괴롭혔어?”“아니요!”배는 자꾸 쿡쿡 쑤셔오고 멀리서 진병수가 모르는 여자를 껴안고 있는 걸 보면 양석진도 본인이 없는 곳에 저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배가 아팠다.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아빠도 늘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양지원은 저런 행동에 큰 반감을 느꼈고 양석진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면 화가 났다.그런 생각을 하는데 양석진이 옆으로 다가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혹시 생리 시작한 거야?”“...”양지원이 아무 대답이 없자 양석진은 바로 눈치를 챘다.“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그리고 룸을 나선 양석진은 따뜻한 꿀물을 한 잔 가지고 돌아왔다.마침 두 사람을 지나치던 진병수는 꿀물과 화가 잔뜩 난 ‘공주님’을 번갈아 보며 혀를 쯧쯧 찼다.‘이게 동생이야? 딸이야?’따뜻한 꿀물을 마시자 몸이 녹아내렸고 양지원은 소파에 푹 기대앉았다.그리고 양석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아까 그 여자 누구예요?”양석진은 멈칫하다가 바로 상황 파악을 마쳤다.“연예인인데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사정이 딱해 보여서 병수더러 도와주라고 했었어.”양지원은 바로 시선을 흘렸다.“오빠는 다른 사람한테도 다 이렇게 친절해요?”“그 사람 연예인이 된 이유가 어머니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어머니를 결국 지키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양지원은 침묵했다.‘사정이 딱하긴 하네.’“그래도 오빠는 조심해야 해요. 아빠가 오빠를 정치인으로 키우려고 하는데 병수 오빠처럼 헤프게 행동하면 안 돼요.”양석진은 자신에게 훈수를 드는 양지원을 보며 며칠 전 양지원이 벌인 일을 떠올렸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알겠어.”구석 자리에서 양석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양지원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래서 양석진에게 청아에 대한 얘기를 더 들려달라고 했다.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양창수가 옆자리에 와 있었다.양지원은 양창수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손명우는 안경을 고쳐 쓰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날 그냥 보러 온 건 아니고, 드레스샵 깨부순 것 때문이지?”양지원은 조금 계면쩍은 기분이 들어 목을 가다듬었다.진병수는 장난기가 많았고 술잔을 들고 옆으로 앉으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뭐야? 우리 지원이가 언제부터 드레스에 관심을 가졌지? 혹시 연애라도 하는 거야?”소파에 앉아 있던 양석진은 제게 걸어오려는 여자를 눈빛으로 제압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양지원은 그걸 발견하고 득의양양해서 턱을 치켜들었다.‘역시 우리 오빠가 제일 멋있어.’“내가 왜 연애해요?”양지원은 다시 양석진의 옆자리로 앉으며 말을 이었다.“드레스 입는 사람은 꼭 연애하고 결혼할 사람이어야 하는 거예요? 드레스가 예쁘면 그냥 입을 수도 있는 거죠.”“그래도 굳이 창을 깨부술 필요는 없잖아.”진병수는 손명우를 가리키며 말했다.“명우한테 말만 하면 드레스는 얼마든지 입을 수 있어.”손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가게에 새로 턱시도 모델 많이 들어왔는데 관심 있으면 같이 사진도 찍어줄 수 있어.”양지원은 크게 관심이 생긴 건 아니었으나 손명우를 거절하기 애매했다.그때, 양석진이 디저트를 양지원의 앞으로 당겨주며 말했다.“아직 나이도 어린 게 무슨 웨딩드레스 사진을 찍는다고.”“오빠, 방금 너무 촌스러운 거 알아요?”양지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옆 사람들한테 말했다.“내 나이가 어려요? 진씨 고모는 내 나이 때 벌써 결혼 1주년이었어요.”“그건 예전 얘기고.”한강시 쪽은 말이 달랐지만 화서시는 한 10년 전만 해도 다들 결혼을 아주 어린 나이에 했었다.“그냥 모델이랑 같이 사진 찍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잖아.”진병수의 말에 양지원은 양석진의 표정을 살폈고 고민하다가 손을 저었다.“어휴, 내가 무슨 모델이랑 사진을 찍어요. 됐어요.”그렇게 사진 촬영은 일단락이 되었다.양지원이 들어온 뒤로 룸 안의 사람들은 행동을 조심하기 시작했다.양석진은 동생 양지원을 끔찍하게 챙겼고 진병수와 손명우는 크게
오토바이를 타고, 쓰레기통 따위로 창을 깨부수는 건 가히 그해의 유행이라 할 수 있었다.양지원은 그런 반항적인 일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기분이 저기압이라 분출한 곳이 필요했다.양석진이 옆에 있었다면 얼리고 달랬을 테지만 양창수는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했을 것이다.양홍두가 자리를 비우자 두 사람은 입에 모터가 달렸다.“형,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드레스샵은 손명우네 가게니 아무 문제 없어요.”양지원은 팔짱을 척 끼고 양석진의 앞으로 걸어갔다.“그냥 드레스뿐인데 아빠가 괜히 오바하시는 거예요. 내가 전에 그 불여우한테 전화했다고 지금 아니꼽게 보시는 거라고요.”양석진이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향해 말했다.“말 가려서 해.”양지원은 여전히 불만이라는 듯 입을 삐죽였다.‘계속하면 내가 손해니까 참아야지 뭐.’그리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오빠한테 굳이 이런 일로 마음 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양지원은 어린 시절처럼 양석진에게 딱 붙어 말했다.“참, 내 친구가 오빠한테 편지도 쓰고 선물도 챙겨줬어요.”양석진은 익숙하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난 그런 쪽으로 관심 없으니까 친구한테 다시 그런 걸 보내지 말라고 해. 난 공부에만 집중하고 싶으니까.”평소의 양지원은 양석진이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아주 흡족한 대답이었다.‘그래, 이게 맞아. 감히 누가 우리 오빠 옆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겠어?’‘꿈 깨라고!’양지원은 기분이 퍽 좋아졌고 제 친구들한테 전화를 돌려 오빠의 말을 전했다.다른 사람은 그냥 알겠다고 넘어갔지만 친구 길예은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너희 오빠 정말 아무한테도 관심이 없다고? 네가 애초에 편지를 건네지 않은 건 아니고?”“야, 길예은,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저번에 너한테 석진 오빠 선물 부탁했더니 그대로 다시 돌려줬잖아. 너희 오빠는 무슨 눈이 그렇게 높아? 정말 우리 중에서 한 명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길예은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작가의 말:아래 내용은 네 시기로 나뉘어 진행됩니다.소년 — 짝사랑이라는 이름의 시작.청년 — 서른 번째 생일, 그리고 아련한 재회.중년 — 오랜 시간 끝에 처음으로 엮인 둘의 이야기.결혼 후 — 이제는 함께 걷는 달콤한 나날들.각 시기를 함께하며, 두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깊어지는지 지켜봐 주세요.--------[소년기]양석진과 양지원이 혼인 신고서를 제출한 당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사무실부터 관저까지 하루 종일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았다.양석진에게 결혼 축하 인사를 건넨 첫 번째 사람이 드물게 보인다는 양석진의 미소를 목격했다는 소문이 전해진 뒤로, 다들 기회를 찾아 양석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그 미소를 직접 확인하려 했다.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고, 나이가 지긋한 기사가 관저로 바라대 주다가 낮에 들었던 소문을 듣고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의원님, 결혼 축하합니다. 내일에도 같은 시간으로 마중 오면 될까요?”양석진은 꽉 채운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며 미소를 지은 채 차에서 내렸다.“내일은 휴가입니다.”홀로 차에 남겨진 기사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예쁜 노을 아래, 양석진이 정원 안으로 걸어가다가 원피스를 입은 양지원이 얇은 외투 하나 걸치고 무언가 휘젓고 있는 게 보였다.그러자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른기침을 몇 번 했다고 양지원이 배즙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그런데 뭘 또 정원에서, 그것도 이렇게 큰 가마에 만들고 있는 거야?’양석진이 양지원을 부르려는 찰나, 우지끈하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양지원이 너무 힘을 주어 젓다가 나무 주걱이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양석진은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양지원이 이어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 지켜봤다.양지원은 외투를 다시 고쳐 입으며 주변을 살폈고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걸 확인하고는 위층을 향해 외쳤다.“창수 씨! 왜 부러진 나무 주걱을 주신 거예요!”“...”이어 2층 창문이 열리고 양창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양지원의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