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피도 눈물도 없는 마케팅팀 ‘악마 상사’ 강태준. 당근마켓 직거래 중 부하 직원 이루다의 검은호랑이 타투 스티커를 보고, 그녀를 위험한 인물로 착각한다! 그녀를 구원하겠다며 온갖 중2병 과잉보호와 직진을 쏟아내는 태준. 한편, 루다는 당근마켓의 다정한 익명 주민 ‘햇살강쥐(매너 온도 99도)’에게 악마 상사의 기행을 실시간으로 상담하는데…. 본캐는 불도저 직진남, 부캐는 다정한 연애 상담사? 완벽주의 상사의 대환장 오피스 착각 로코!
더 보기아침 9시.
마케팅 1팀 회의실에는 때아닌 시베리아 기단이 머물고 있었다. 히터가 빵빵하게 돌아가고 있음에도 팀원들은 약속이나 한 듯 어깨를 움츠렸다. 그 중심에는 마케팅 1팀의 기온을 영하로 떨어뜨린 주범, 강태준 팀장이 앉아 있었다.
"이루다 대리."서늘하고 낮게 깔린 목소리에 루다의 어깨가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네, 팀장님."
"이 기획안, 주말 내내 쓴 겁니까, 아니면 주말 예능 보면서 발가락으로 쓴 겁니까?"
"……주말 내내, 손으로 썼습니다."
"그럼 손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 병원부터 가보셔야겠네요. 타겟층 분석은 수박 겉핥기 수준이고, 기대 효과는 본인의 희망 사항을 적어놨습니다."
태준의 시선이 내 기획안에서 머물다, 날카로운 무테안경 너머로 나를 향해 꽂혔다. "회사는 이 대리의 감성 일기장이 아닙니다. 숫자와 팩트로 증명하세요. 전면 재검토." 탁-.그가 내 기획안을 테이블 위로 던지듯 내려놓았다. 완벽한 수트 핏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포마드 헤어. 저 인간은 피 대신 차가운 아메리카노가 흐르는 게 분명했다. 속으로 태준의 정수리에 번개를 수십 번 내리꽂으며, 루다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네. 수정해서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탕비실로 도망쳐 들어온 나는 믹스커피 두 봉지를 거칠게 뜯어 종이컵에 쏟아부었다. 뒤따라 들어온 입사 동기이자 베프인 최지원 대리가 내 등을 찰싹 때렸다. "야, 이루다. 너 오늘 완전 가루가 되도록 까이더라. 강로봇 저 인간은 주말에 무슨 안 좋은 일 있었나? 왜 저렇게 씹어먹을 듯이 굴어?""내 말이! 내가 진짜 더러워서 확 사표를 던지…"
띠링-.
호기롭게 사표를 운운하던 내 말을 끊고,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경쾌하게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순간, 헉 하는 소리가 절로 새어 나왔다.
[XX카드] 이루다님, 3/3일 결제예정금액 320,000원입니다. (잔여 할부 원금 1,450,000원)
내 통장 잔고가 얼마더라. 13만 원이었나, 15만 원이었나. 눈앞이 아찔해졌다. 지난달, 3년을 만나다 바람이 나서 환승 이별을 한 전남친 개자식의 생일 선물로 긁었던 최신형 태블릿 PC 할부금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사표를… 던지기엔 내가 빚이 좀 많지, 응.""자본주의의 노예 같으니라고. 갚을 돈은 있고?"
"아니. 그래서 비장의 무기를 꺼내려고."
나는 탕비실 구석에 몰래 숨겨두었던 큼직한 종이백을 꺼냈다. 지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뭔데?""그 똥차 새끼가 내 자취방에 버리고 간 유물. '닌텐도 64' 레트로 게임기."
"미친, 그걸 아직도 안 버렸어? 당장 갖다 버려!"
"버리다니! 이게 내 당장 숨통을 틔워 줄 동아줄인데!"
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탕비실의 하얀 테이블 위에 게임기 박스를 세팅했다. 각도를 요리조리 틀어가며 가장 상태가 좋아 보이게 사진을 찍었다. 이 정도면 금방 팔리겠지. 떨리는 손으로 중고 거래 앱 '당근'을 켰다. [글쓰기]제목: [눈물을 머금고 급처] 닌텐도 64 풀박스. 전남친 흔적 지웁니다.
가격: 150,000원 (※ 쿨거래 시 네고 가능. 제발 사주세요.)
작성 버튼을 누르고 나니, 내 프로필 옆에 박힌 수치스러운 닉네임이 눈에 들어왔다. [루다공주] (닉네임 변경 가능일까지 D-15) '닉네임 바꿔야 하냐? 동네에서 아는 사람이랑 거래 잡히면 어쩌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지금 공주 체면이 문제가 아니다. 15만 원이면 이번 달 급한 불은 끈다. 제발, 지나가는 레트로 덕후 아무나 이 글을 클릭해 주길 기도하며 폰을 내려놓으려던 찰나. "당근!"글을 올린 지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알림이 울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황급히 채팅창을 열어보니, 눈부신 닉네임 하나가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매너온도 99.9도. 거래 후기 수백개의 빛나는 전설의 유저, [햇살강쥐]님이었다.
[햇살강쥐: 헉! 루다공주님! 이거 제가 엄청 찾던 모델이에요. 혹시 오늘 저녁에 바로 직거래 가능할까요?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천사다. 이 팍팍한 세상에 내려온 진짜 천사. 탕비실 너머로 또다시"이루다 대리!"
하고 쩌렁쩌렁하게 부르는 강태준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심장이 떨어질 것 같았지만, 루다의 입가에는 이미 자본주의의 흐뭇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야, 이루다. 너 방금 전에는 팀장님이 혼자 있다가 나간 자리에 네가 들어간 거라며. 그래서 잔향이 남은 거라며. 근데 왜 우리 민호 사원님은 두 분이 '같이' 들어갔다고 하실까?""어, 어어. 그게, 민호 사원이 뭔가 잘못 본……."루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손사래를 쳤지만, 해맑은 민호가 쐐기를 박았다."에이, 제가 잘못 볼 리가요! 저 어제 탕비실에서 몰래 믹스커피 두 봉지 타서 자리로 가고 있었거든요? 근데 두 분이 복도 끝에서 엄~청 심각한 분위기로 미팅룸에 들어가시더라고요! 불도 안 켜시고! 와, 무슨 영화 찍으시는 줄 알았어요! 무슨 대외비 프로젝트 같은 거 하시는 거죠? 저도 나중에 꼬옥 끼워주셔야 합니다!"민호의 TMI 가득한 생생한 증언에 루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지원은 이제 아예 팔짱을 낀 채 등받이에 기대어 루다를 노려보았다."그래. 불도 안 켜고. 영화를 찍으셨다. 이루다, 변명해 봐. 이번엔 또 무슨 기상천외한 핑계를 대려고 한숨까지 푹푹 쉬셨을까?"도망칠 곳이 없었다. 민호의 팩트 폭력 앞에 머릿속이 하얗게 표백된 루다가 아무 말 대잔치라도 시작하려 입술을 달싹이던 바로 그때였다."비밀 프로젝트는 아닙니다, 김민호 사원."루다의 등 뒤에서 들려온 낮고 서늘한 목소리에 카페 안의 온도가 순식간에 영하로 뚝 떨어졌다. 루다와 지원, 그리고 해맑던 민호까지 동시에 목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그곳에는 한 손에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든 완벽한 수트 핏의 남자, 강태준 팀장이 서 있었다."어, 팀장님! 팀장님도 오셨네요!""팀, 팀장님……."민호가 배꼽인사를 했고, 루다는 구세주를 만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태준은 안경을 한 번 쓱 치켜올리며 특유의 무미건조한 로봇 톤으로 입을 열었다."이루다 PM과 제가 개별적으로 논의해야 할 무거운 실무가 있었을 뿐입니다. 민호 사원이 낄 자리는 아니니 기대는 접으십시오.""아항! 역시 우리 팀 에이스 이루다 PM님! 근데 무슨 업무를 그렇게 불 꺼진 방
내일 점심의 살벌한 취조보다, 당장 눈앞에 있는 이 맹수 같은 팀장님의 '모의고사'를 빠져나가는 것이 루다에게는 훨씬 더 시급하고도 위험한 과제였다."티, 팀장님! 숨 막혀요! 좀 떨어져서 이야기해요!"루다가 양손으로 태준의 단단한 가슴팍을 밀어내며 소리쳤다. 하지만 태준은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안경 너머로 시선을 날카롭게 빛냈다."방어율 0%입니다, 이루다 PM. 대답하십시오. 가상의 인물이라도, 그게 누굽니까."결국 루다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아, 그냥 소개팅남요! 주말에 엄마가 억지로 내보낸 선자리에서 만난 사람이라고 할게요! 그럼 우리 팀이냐는 의심도 완벽하게 피할 수 있잖아요!"그럴싸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준의 미간에 깊은 계곡이 파였다."기각합니다." "네? 왜요? 완전 완벽한 핑계잖아요!""가상의 인물이라도 제 앞에서 다른 남자와의 만남을 상정하는 건, 제 감정 제어 시스템에 매우 치명적인 오류를 일으킵니다. 아주 불쾌한 워딩이군요."질투. 이건 명백하고도 노골적인 강 로봇의 질투였다. 루다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쳤지만,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엔 역부족이었다."아, 진짜 깐깐하시네! 그럼 도대체 뭐라고 방어해요!""거짓말의 기본은 진실을 10% 섞는 겁니다. 그래야 심박수와 동공 지진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죠."태준이 마침내 뒤로 물러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내일 최지원 대리의 유도심문 패턴은 명확할 겁니다. 변화구 없이 팩트로 곧장 찌르겠죠. '너 어제 미팅룸 테이블 밑에, 강 팀장이랑 둘이 숨어있었지?' 라고요."태준의 정확한 예측에 루다는 소름이 돋아 양팔을 문질렀다."맞아요. 지원이라면 진짜 대놓고 그렇게 물어볼 애예요. 그럼 뭐라고 해요?""향수의 출처와, 당신이 숨어있던 이유를 완벽하게 분리하십시오. 향수 냄새는 '나 들어가기 직전까지 팀장님이 거기서 본부장님 보고 자료를 검토하고 나갔기 때문'이라고 하고, 당신이 굳이 불 꺼진 테이블 밑에 숨어있었던 이유는……."태준이 잠시 뜸
루다는 애써 입꼬리를 꾹 내리눌렀지만, 결국 삐져나오는 부드러운 미소를 막지 못했다.'아, 진짜. 이 사람한테는 못 당하겠다니까.'루다가 창문에 이마를 기댄 채 몰래 웃음을 삼키고 있을 때였다.투둑, 타닥.차창 위로 물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약속이라도 한 듯 거센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퇴근길 정체에 갑작스러운 기상 악화까지 겹치자, 올림픽대로에 진입한 태준의 세단은 붉은 테일램프가 끝없이 이어진 도로 위에 완벽하게 갇혀버렸다."……예측하지 못한 기상 이변으로 트래픽 지표가 최악이군요. 도착 시간이 무기한 지연될 것 같습니다."태준이 와이퍼 속도를 조절하며 낮게 말했다. 건조한 말투였지만, 핸들을 쥔 그의 긴 손가락이 미세하게 가죽 커버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괜찮아요. 비 오는 날 차 막히는 건 팀장님 통제 밖의 변수잖아요."루다가 어색하게 웃어 보이던 그때였다.꼬르륵-.빗소리를 뚫고 좁은 차 안에 울려 퍼진 아주 작지만 명확한 마찰음. 루다의 배가 아니라, 운전석 쪽에서 난 소리였다.루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완벽주의자 얼음 마왕, 강태준 팀장의 몸에서 난 소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울림이었다."……방금 들은 건, 차량의 소음입니다. 엔진 점검을 받을 때가 된 것 같군요."태준이 안경을 쓱 치켜올리며 정면을 뚫어지게 응시한 채 말했다. 안경 너머의 눈빛은 한없이 진지했지만, 그의 귀끝은 이미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엔진이 엄청 배고파 보이는데요, 팀장님?""제어 시스템에 일시적인 에너지 고갈 현상이 발생한 것뿐입니다."그 철두철미한 남자가 예상치 못한 생리현상에 뚝딱거리는 모습이, 루다는 참을 수 없이 귀여웠다. 루다가 네비게이션 화면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이 앞에서 빠지면 드라이브스루 햄버거집 있어요. 엔진 오일 대신 햄버거 세트 어때요? 저도 배고프거든요."결국 마케팅 1팀의 폭군 강태준 팀장은 방향 지시등을 켜고 조용히 차를 돌렸다.15분 뒤.태준의 세단은 한강이
파티션 너머에서 루다의 다급한 메시지를 확인한 태준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팼다.'각자 퇴근.'태준의 중앙제어장치가 그 불경한 단어를 무려 여섯 번이나 스캔하고 분석했다. 하지만 도출되는 처리 결과는 매번 동일했다.'거절.'그는 안경을 한 번 치켜올리며, 키보드가 부서져라 빠르게 답장을 쳐 내려갔다.[강태준 팀장: '각자 퇴근' 건은 이미 반려했습니다. 재검토는 없습니다.][강태준 팀장: 최지원 대리의 예상 행동 반경은 제가 별도로 통제하겠습니다.]숫자 '1'이 사라지자마자, 태준은 지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서늘한 시선이 자연스럽게 미팅룸 A 쪽을 한 번 훑더니, 곧장 머리를 쥐어뜯으며 엑셀과 혈투를 벌이고 있는 서은호의 등짝으로 향했다.태준이 천천히, 그러나 위압적인 걸음으로 이동했다.오후 5시 40분.퇴근을 20분 앞두고 마케팅 1팀 사무실은 '칼퇴'를 위한 묘한 흥분감으로 술렁이고 있었다. 팀원들이 슬그머니 저장 파일을 닫고 가방을 챙기는 시늉을 하던 바로 그때였다.태준이 서은호 수석의 책상 앞에 우뚝 멈춰 섰다."서 수석님.""네엡! 예산안 분석, 오늘 밤 안으로 반드시 마무리하겠습니다!"태준의 그림자에 놀란 서은호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태준은 처절한 몰골의 서 수석을 한 박자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오늘 저녁, 최지원 대리 데리고 재무팀 김 차장과 저녁 미팅 다녀오십시오. 이번 공동 프로젝트 예산안 건은 서 수석이 직접 대응하는게 효율적이겠더군요.""예? 오늘 저녁이요? 지금……요?"은호의 눈이 탁구공만 해졌다. 퇴근 20분 전에 떨어지는 갑작스러운 저녁 미팅 지시. 직장인에게 이보다 끔찍한 처형은 없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태준의 한 마디가 판도를 완전히 뒤집었다."재무팀 김 차장과는 방금 제가 사전 조율 해뒀습니다. 7시에 을지로 쪽 식사 자리입니다. 식사 메뉴는 한우 투뿔입니다. 미팅 후 비용은…… 이 법인 카드로 처리하면 됩니다."태준의 길쭉한 손가락 사이에서 영롱한 '법인 카드'가 빛을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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