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 상사의 부캐는 매너온도 99도

악마 상사의 부캐는 매너온도 99도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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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도 눈물도 없는 마케팅팀 ‘악마 상사’ 강태준. 당근마켓 직거래 중 부하 직원 이루다의 검은호랑이 타투 스티커를 보고, 그녀를 위험한 인물로 착각한다! 그녀를 구원하겠다며 온갖 중2병 과잉보호와 직진을 쏟아내는 태준. 한편, 루다는 당근마켓의 다정한 익명 주민 ‘햇살강쥐(매너 온도 99도)’에게 악마 상사의 기행을 실시간으로 상담하는데…. 본캐는 불도저 직진남, 부캐는 다정한 연애 상담사? 완벽주의 상사의 대환장 오피스 착각 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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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화 : 사표 대신 당근을 열었다.

아침 9시.

마케팅 1팀 회의실에는 때아닌 시베리아 기단이 머물고 있었다. 히터가 빵빵하게 돌아가고 있음에도 팀원들은 약속이나 한 듯 어깨를 움츠렸다. 그 중심에는 마케팅 1팀의 기온을 영하로 떨어뜨린 주범, 강태준 팀장이 앉아 있었다.

 

"이루다 대리."

서늘하고 낮게 깔린 목소리에 루다의 어깨가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네, 팀장님."

"이 기획안, 주말 내내 쓴 겁니까, 아니면 주말 예능 보면서 발가락으로 쓴 겁니까?"

"……주말 내내, 손으로 썼습니다."

"그럼 손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 병원부터 가보셔야겠네요. 타겟층 분석은 수박 겉핥기 수준이고, 기대 효과는 본인의 희망 사항을 적어놨습니다."

 

태준의 시선이 내 기획안에서 머물다, 날카로운 무테안경 너머로 나를 향해 꽂혔다.

 

"회사는 이 대리의 감성 일기장이 아닙니다. 숫자와 팩트로 증명하세요. 전면 재검토."

 

탁-.

그가 내 기획안을 테이블 위로 던지듯 내려놓았다. 완벽한 수트 핏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포마드 헤어. 저 인간은 피 대신 차가운 아메리카노가 흐르는 게 분명했다. 속으로 태준의 정수리에 번개를 수십 번 내리꽂으며, 루다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네. 수정해서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탕비실로 도망쳐 들어온 나는 믹스커피 두 봉지를 거칠게 뜯어 종이컵에 쏟아부었다. 뒤따라 들어온 입사 동기이자 베프인 최지원 대리가 내 등을 찰싹 때렸다.

 

"야, 이루다. 너 오늘 완전 가루가 되도록 까이더라. 강로봇 저 인간은 주말에 무슨 안 좋은 일 있었나? 왜 저렇게 씹어먹을 듯이 굴어?"

"내 말이! 내가 진짜 더러워서 확 사표를 던지…"

띠링-.

호기롭게 사표를 운운하던 내 말을 끊고,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경쾌하게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순간, 헉 하는 소리가 절로 새어 나왔다.

[XX카드] 이루다님, 3/3일 결제예정금액 320,000원입니다. (잔여 할부 원금 1,450,000원)

 

내 통장 잔고가 얼마더라. 13만 원이었나, 15만 원이었나. 눈앞이 아찔해졌다. 지난달, 3년을 만나다 바람이 나서 환승 이별을 한 전남친 개자식의 생일 선물로 긁었던 최신형 태블릿 PC 할부금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사표를… 던지기엔 내가 빚이 좀 많지, 응."

"자본주의의 노예 같으니라고. 갚을 돈은 있고?"

"아니. 그래서 비장의 무기를 꺼내려고."

 

나는 탕비실 구석에 몰래 숨겨두었던 큼직한 종이백을 꺼냈다. 지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뭔데?"

"그 똥차 새끼가 내 자취방에 버리고 간 유물. '닌텐도 64' 레트로 게임기."

"미친, 그걸 아직도 안 버렸어? 당장 갖다 버려!"

"버리다니! 이게 내 당장 숨통을 틔워 줄 동아줄인데!"

 

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탕비실의 하얀 테이블 위에 게임기 박스를 세팅했다. 각도를 요리조리 틀어가며 가장 상태가 좋아 보이게 사진을 찍었다. 이 정도면 금방 팔리겠지. 떨리는 손으로 중고 거래 앱 '당근'을 켰다.

 

[글쓰기]

제목: [눈물을 머금고 급처] 닌텐도 64 풀박스. 전남친 흔적 지웁니다.

가격: 150,000원 (※ 쿨거래 시 네고 가능. 제발 사주세요.)

 

작성 버튼을 누르고 나니, 내 프로필 옆에 박힌 수치스러운 닉네임이 눈에 들어왔다.

 

[루다공주] (닉네임 변경 가능일까지 D-15) 

 

'닉네임 바꿔야 하냐? 동네에서 아는 사람이랑 거래 잡히면 어쩌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지금 공주 체면이 문제가 아니다. 15만 원이면 이번 달 급한 불은 끈다. 제발, 지나가는 레트로 덕후 아무나 이 글을 클릭해 주길 기도하며 폰을 내려놓으려던 찰나.

 

"당근!"

글을 올린 지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알림이 울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황급히 채팅창을 열어보니, 눈부신 닉네임 하나가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매너온도 99.9도. 거래 후기 수백개의 빛나는 전설의 유저, [햇살강쥐]님이었다.

[햇살강쥐: 헉! 루다공주님! 이거 제가 엄청 찾던 모델이에요. 혹시 오늘 저녁에 바로 직거래 가능할까요?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천사다. 이 팍팍한 세상에 내려온 진짜 천사. 탕비실 너머로 또다시

"이루다 대리!"

하고 쩌렁쩌렁하게 부르는 강태준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심장이 떨어질 것 같았지만, 루다의 입가에는 이미 자본주의의 흐뭇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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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당근이
당근이
ㅎ ㅎ ㅎ 재미있어요.
2026-04-18 17:28:34
1
0
71 챕터
2화 : 루다공주와 햇살강쥐
같은 시각, 마케팅 1팀의 상석.강태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완벽하게 각 잡힌 서류철, 먼지 한 톨 없는 키보드, 그리고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서늘한 표정. 누가 봐도 '강로봇'이라는 별명에 걸맞은 완벽한 업무 모드였다. 그는 방금 전 회의실에서 이루다 대리의 기획안을 반려했던 순간을 복기했다. '이루다 대리. 톡톡 튀는 발상 자체는 나쁘지 않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타겟층의 심리를 찌르는 직관적인 기획력만큼은 팀 내에서 가장 뛰어났다.' 하지만 그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논리적으로 뒷받침할 데이터 수집과 분석 능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기초 공사 없이 화려한 지붕만 얹으려 하니 번번이 반려될 수밖에.그녀의 기획안을 조금만 더 혹독하게 쪼아대면 틀림없이 빈틈없는 결과물이 나올 터였다. 바닥까지 부서지고 깨지더라도, 결국엔 단단하게 다져지길 바라는 일종의 기댓값. 물론 그 기대치를 입 밖으로 꺼내 칭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공과 사는 명확해야 하고, 아직 그녀는 덜 여문 풋내기일 뿐이니까. 속으로 부하 직원의 육성 계획을 세우고 있던 그때. 태준의 왼쪽 손목에 채워진 스마트워치가 징징, 하고 짧게 두 번 울렸다. 오직 단 하나의 앱에만 설정해 둔, 태준만의 '긴급 호출' 진동이었다. 태준은 자연스럽게 서랍장 아래로 손을 내려 개인용 스마트폰의 화면을 켰다. [당근!] 설정하신 키워드 '닌텐도 64 풀박스'의 새로운 글이 올라왔어요."……!" 태준의 동공이 미세하게 확장되었다. 닌텐도 64 풀박스. 그것도 민트급! 지난 6개월 동안 중고 장터를 이 잡듯 뒤져도 흠집 없는 매물을 구하지 못해 밤잠을 설치게 했던 바로 그 환상의 레트로 기기였다. 게다가 가격은 단돈 15만 원. 이건 거저나 다름없었다. 태준의 엄지손가락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는 항상 단답형에 마침표를 꽉꽉 찍어 보내던 그의 손가락이, 지금은 간절함을 가득 담아 화면 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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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 공포의 직거래 현장
오후 6시 30분.강남의 심장부, 역삼역 3번 출구 앞은 토해내듯 쏟아지는 퇴근길 인파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꽉 막힌 테헤란로 위로는 붉은 브레이크 등이 끝도 없이 이어졌고, 신경질적인 경적 소리가 허공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루다는 행여나 누가 치고 지나갈세라 닌텐도가 든 종이백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까치발을 들었다. 15만 원. 통장의 심폐소생술이 달린 이 중대한 순간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까만 정장, 까만 정장을 입은 스윗한 댄디남……신호가 초록 불로 바뀔 때마다 횡단보도에는 거대한 파도처럼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매너온도 99.9도에 걸맞은 다정한 눈빛의 인물을 찾아 인파를 두리번거리던 그때였다. 저 멀리, 신호등을 건너오는 수많은 사람의 정수리 위로 유독 우뚝 솟은 훤칠한 실루엣 하나가 시야에 꽂혔다.빌딩 숲 사이로 부서지는 어스름한 저녁 노을을 등지고 걸어오는 남자. 몸에 맞춘 듯 딱 떨어지는 까만 수트 핏.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걸음걸이. 루다의 입가에 화색이 돌았다.오, 핏 장난 아닌데? 역시 매너온도 99도는 외모부터가 매너구나!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거리가 20미터, 10미터, 5미터로 좁혀질수록 루다의 얼굴에 피어났던 미소는 차갑게 식어가다 못해 꽁꽁 얼어붙고 말았다.석양빛에 반사되어 날카롭게 번쩍이는 무테안경. 칼같이 빗어 넘긴 포마드 헤어. 인간미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서늘하고 무감정한 그 얼굴.……태준?!왜 하필 저 마왕이 여기에 있단 말인가. 기획안을 던지며 갈구던 것도 모자라, 아예 역삼역 3번 출구까지 쫓아와서 잔소리를 하려는 건가. 루다는 반사적으로 닌텐도가 든 종이백을 등 뒤로 홱 숨기며 숨을 헉 들이켰다.아니야. 태준이 햇살강쥐님일 리가 없어. 대한민국 당근 가입자가 몇 명인데! 그냥 우연히 타이밍이 겹친 걸 거야. 암, 그렇고말고!루다는 억지로 그렇게 믿기로 했다.같은 시각, 당당하게 3번 출구로 걸어오던 태준 역시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렸다. 출구 앞에서 커다란 종이백을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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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 루다공주님 최고!
"루다공...주님과 게임기 직거래입니다. 혹시... 이 대리가 루다 공...주님...?!"태준은 자신의 망막에 맺힌 피사체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머릿속의 논리 회로가 과부하로 타오르기 직전, 루다가 등 뒤로 숨겼던 종이백을 슬그머니 앞으로 꺼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세상에! 팀장님 조카분이 햇살강쥐님이셨군요! 제가 바로 그 거래 상대방이에요. 루다공주요!"루다는 종이백을 그의 품 쪽으로 쑥 내밀었다. 태준은 루다의 종이백과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한 글자 한 글자 씹어 뱉듯 물었다."……이루다 대리가, 루다공주라고요.""네! 중고나라부터 쓴 아이디라 이름이 좀 부끄럽긴 하지만요. 하하하!"루다는 해맑게 웃었지만, 태준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는 짐짓 무심한 척 고개를 숙여 종이백 안을 들여다보더니, 박스 모서리부터 표면까지 매의 눈으로 스캐닝하기 시작했다."제 조카가 보존 상태에 워낙 예민해서요. 제가 대신 확인하겠습니다. 직거래의 기본은 현장 검수 아니겠습니까, 루다…… 공주님?"마지막 호칭을 발음할 때 그의 입매가 미세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루다는 정수리 끝까지 수치심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속으로 '오늘 집에 가면 무조건 닉네임 변경권 결제한다'고 수백 번 다짐하며 입술을 깨물었다.태준은 루다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든 말든, 길바닥에 꼿꼿하게 서서 닌텐도 박스의 상태를 요리조리 살폈다. 3월의 저녁 바람이 제법 차가웠지만, 레트로 기기를 향한 그의 집념은 영하의 기온조차 뚫을 기세였다. 검수를 마친 그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스마트폰을 꺼냈다."상태는 나쁘지 않네요. 계좌로 바로 이체하겠습니다."띠링-. 정확히 3초 뒤, 루다의 스마트폰에 오늘 들어본 소리 중 가장 감미로운 알림음이 울렸다.[XX은행] 강태준님으로부터 150,000원이 입금되었습니다.입금자명 '강태준' 세 글자를 확인하는 루다의 기분은 묘했지만, 텅 빈 계좌에 꽂힌 15만 원의 온기만큼은 진짜였다.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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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 나쁘지 않네요
다음 날 아침 8시 50분. 마케팅 1팀 사무실.루다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출근해 자리에 앉았다. '아, 어제 괜히 뒷담화를 해선...'어제 햇살강쥐님에게 '극혐하는 빌런 상사'라며 신명 나게 뒷담화를 날렸던 기억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혹시 햇살강쥐 계정을 강태준도 볼 수 있는 상황이었으면 어쩌지? 엄청난 찜찜함과 불안감이 몰려와, 어제 밤새 뒤척이느라 한숨도 자지 못한 탓이었다.'아니야, 설마...'애써 합리화하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지만, 여전히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본인이든 조카의 심부름이든, 어제 그 어색하고 뻘쭘했던 중고 거래 현장을 떠올리면 당장 오늘 아침 기획안 수정본을 들고 그 서늘한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곤욕이었다."이루다, 너 안색이 왜 그래? 어제 당근 거래하다가 사기라도 당했어?"동기인 지원이 파티션 너머로 얼굴을 불쑥 들이밀며 물었다. 루다는 밤새 한숨도 못 자 퀭해진 눈으로 지원을 바라보았다."차라리 사기를 당하는 게 마음 편했을지도 몰라. 나 오늘 기획안 수정본 들고 팀장석 가면, 숨 막혀서 두 발로 못 걸어 나올 수도 있어.""얘가 아침부터 재수 없는 유언을 남기고 있어!"그때였다. 사무실 입구의 유리문이 열리며, 익숙하고도 서늘한 구두 굽 소리가 바닥을 때렸다. 강태준 팀장이었다. 완벽하게 세팅된 포마드 머리와 먼지 한 톨 없이 각 잡힌 네이비 수트. 어제 역삼역 3번 출구에서 베이커리 쇼핑백을 들고 어색하게 서 있던 그 인간적인 흔적은 온데간데없었다.루다는 헉, 숨을 들이마시고 모니터 뒤로 거북이처럼 목을 바짝 숨겼다. 제발, 제발 나를 찾지 마라."이루다 대리."하지만 얄궂은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정확히 루다의 파티션을 향해 꽂혔다. 타닥거리던 키보드 소리가 일제히 멈추고, 팀원들의 동정 어린 시선이 루다에게 집중되었다.루다는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무릎을 진정시키며, 밤새 뜯어고친 기획안을 두 손에 꼭 쥔 채 팀장석으로 다가갔다."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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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 센 척을 위한 흑호 스티커
점심시간.회사 근처 편의점 파라솔 아래에 엎어진 루다는 죽어가는 소리를 냈다. 얼음이 반쯤 녹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컵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손등을 적셨다. 3월 초의 햇살은 제법 따뜻했지만, 빌딩 숲 사이로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은 여전히 매서웠다."지원아, 나 아무래도 팀장님한테 완전히 약점 잡힌 것 같아.""야, 이루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그 강 로봇이 언제부터 그렇게 한가한 인간이었냐? 그냥 어제 네가 판 닌텐도가 마음에 쏙 들었나 보지.""아니야. 내가 너무 만만해 보여서 저 인간이 속으로 더 비웃는 걸 거야. 오늘 오전에 기획안 통과시켜주면서 한 소리도 '조카한테 상사 흉은 적당히 보라'잖아. 뒤끝이 얼마나 길고 쪼잔한 인간이라는 거야."지원이 콜라 빨대를 쪽 빨며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래서. 그럼 어쩔 건데.""나도 이제 좀 '강한 이미지'를 구축할 테다. 더 이상 저 인간한테 굽실거리며 주눅 드는 이루다는 없어.""강한 이미지. 네가?"지원의 시선이 루다의 말랑한 뺨과 순둥한 눈매를 훑고 지나갔다."그래, 나라고 못할 것 있냐!"지원은 한 박자 쉬다가 영혼 없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뭐, 어디 한번 해봐. 실패하면 믹스커피 한 달 치 사기다."목요일 퇴근 후. 루다는 회사 근처 초등학교 앞 문방구에서 발을 멈췄다. 사실 처음부터 이 허름한 가게가 목적지였다.진열대 한편에 초등학생용 알록달록한 워터 타투 스티커들이 걸려 있었고, 그중 한 장이 루다의 눈을 사로잡았다. 팔뚝을 덮고도 남을 크기의 흑호(黑虎) 한 마리. 날카로운 발톱과 맹렬하게 벌어진 아가리. 가격표에는 매직으로 비뚤빼뚤하게 **[500원]**이라고 적혀 있었다.내일은 금요일이었다. 당근 앱에 올려둔 중고 노트북을 팔아야 했는데, 문제는 구매자였다.닉네임 [쿨거래안하면차단].이 인간, 약속 잡는 말투부터 심상치 않더니 매너 온도가 무려 '20도'였다. 20도라니. 매너 온도 99.9도의 천사 같은 햇살강쥐님과는 차원이 다른, 흉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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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 강로봇의 시스템 에러
금요일 오전 9시.출근하고 정확히 47분이 지났다.루다는 결재 서류를 두 손에 들고 팀장석 앞에 섰다. 어제 미리 정리해 둔 덕에 '오전 중 제출'이라는 목표를 깔끔하게 이룬 참이었다. 스스로가 제법 기특했다."팀장님, 어제 지시하신 타깃 데이터 취합해서 가져왔습니다."태준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무심하게 한 손을 내밀었다. 루다가 서류를 건네자, 그가 펜을 쥐고 첫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출근해서 사무실 온도가 올라간 탓인지, 아니면 바짝 긴장한 채로 팀장석까지 걸어온 탓인지 목덜미부터 훅 열기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루다는 아무 생각 없이 블라우스 넥 라인을 살짝 아래로 당기며, 손부채질을 해 그 안으로 후후 바람을 불어넣었다.스르륵.마침 서류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던 태준의 시선이, 허공을 가르다 그대로 정지했다.넥 라인 너머, 하얀 왼쪽 쇄골 위. 시커먼 아가리를 벌린 흑호(黑虎) 한 마리가 날카로운 발톱을 세운 채 정면을 노려보고 있었다."......"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루다는 아직 옷깃을 쥐고 바람을 불어넣는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였고, 태준은 서류를 쥔 손가락이 딱딱하게 굳은 채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평정심을 유지하던 그의 새카만 눈동자 안에서 무언가가 세차게 지진을 일으켰다.루다는 1초 뒤에야 상황을 파악했다."아, 헉! 이거요!"루다는 황급히 넥 라인을 끌어올려 여미며 얼굴을 붉혔다."이거 진짜 타투 아니고요! 그냥 판박이 스티커입니다! 제가 오늘 저녁에 아주 중요한 거래가 하나 있어서요. 좀 무서운 상대를 만나야 해서 기선제압용으로 붙여본 건데,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뗄 시간이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루다 입장에서는 100퍼센트 진실이었다. 오늘 저녁 매너 온도 20도짜리 진상 중고 거래자와의 담판을 앞두고 준비한 비장의 무기였으니까.그러나 태준의 촘촘하고 비약적인 '오해 필터'를 거치면서, 이 지극히 평범한 설명은 완전히 다른 장르로 변이하고 있었다.무서운 상대. 기선제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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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 특 갈비탕 하사식
금요일 낮 12시 정각. 마케팅 1팀 사무실은 무거운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평소라면 각자 삼삼오오 흩어져 꿀 같은 개인 시간을 즐겼을 금요일의 점심시간이건만, 오늘은 공기부터가 달랐다. 팀원들은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죄수들처럼 일렬로 열을 맞춰, 저 앞을 걷고 있는 강태준 팀장의 넓고 각 잡힌 네이비색 수트 등짝을 숨죽여 뒤따르고 있었다.불과 한 달 전. 태준이 서늘한 표정으로 남겼던 명언은 팀 내 절대적인 헌법과도 같았다."점심시간은 법적으로 보장된 개인의 온전한 휴식 시간입니다. 불필요하게 단합 운운하며 무리 지어 다니지 말고, 각자 효율적으로 식사하고 복귀합시다."그랬던 얼음 마왕이 오늘 아침, 갑자기 '팀 전체 회식을 본인 사비로 쏘겠다'며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하필이면 루다가 그의 눈앞에서 그놈의 500원짜리 흑호 스티커를 들킨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팀원들이 끌려간 곳은 회사 앞 골목 안쪽의 최고급 한우 수제 갈비탕 집이었다. 평사원들 사이에서는 법인 카드가 아니면 엄두도 못 낸다는 전설의 식당. 프라이빗한 룸으로 안내받아 상석에 앉은 태준은 메뉴판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무심하게 안경테를 밀어 올렸다."메뉴는 통일했습니다. 고기가 제일 많은 특갈비탕으로 시켰으니, 눈치 보지 말고 편하게들 드시죠."편하게 드시라니. 그의 앞에 놓인 숟가락과 젓가락은 자로 잰 듯 완벽한 수평을 이루고 있었고, 손을 닦으라고 나온 물티슈와 냅킨은 한 치의 구겨짐도 없이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 그 숨 막히는 세팅 앞에서, 팀원들은 기본 반찬으로 나온 깍두기를 씹는 소리조차 데시벨을 조절하며 처절하고도 조용한 눈치 게임을 시작했다.루다는 맞은편에 앉은 팀원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며 국물을 조심스럽게 떠먹고 있었다.그러다 문득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태준의 시선이 테이블 이곳저곳을 훑는 척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루다의 넥 라인, 정확히는 흑호가 숨겨진 쇄골 쪽에 집요하게 머무는 것이 느껴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자신의 뚝배기에서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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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 흑기사의 등장
오후 6시 정각. 마침내 퇴근 알람이 울렸다.루다는 짐을 챙겨 회사 건물을 빠져나왔다. 벽돌처럼 무거운 노트북 가방이 어깨를 짓눌렀지만, 발걸음만큼은 비장했다. 양심상 7만 원에 올려둔 구형 노트북이었다. 배터리는 10분 컷. 이미 사실상 심정지 직전의 고물이었지만, 그래도 7만 원이면 이번 달 남은 식비는 너끈히 버틸 수 있었다.문제는 구매자였다. 약속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당근 채팅창에는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쿨거래안하면차단 : 가는 중. 10분 늦음.][쿨거래안하면차단 : 액정에 흠집 있으면 현장에서 3만 원 깝니다.]닉네임부터 문장 부호 하나 없는 삭막한 단답형까지, 진상의 냄새가 짙게 풍겼다. 하지만 텅 빈 통장 잔고가 아쉬운 루다는 꾹 인내해야만 했다.회사 근처 대형 카페 앞. 3월의 저녁 바람이 제법 차가웠다. 루다는 목을 움츠리며 구매자를 기다렸다. 이 자리에서 쇄골의 흑호를 슬쩍 보여주며 기선을 제압하고, 깔끔하게 7만 원을 받아내는 것이 오늘 저녁의 유일한 목표였다.셔츠 단추를 세 개쯤 풀어 헤치고 굵은 금목걸이를 찬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불쑥 루다의 앞을 가로막은 건 정확히 10분 뒤였다."노트북? 줘 봐요."인사도 없이 루다의 손에서 노트북 가방을 홱 채가듯 빼앗아 들었다. 지퍼를 열고 이리저리 뒤집어보던 그가 이내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으며 혀를 찼다."아, 모서리에 흠집 있네. 이 상태로는 7만 원 다 못 주지. 3만 원에 줍시다."그는 선심이라도 쓴다는 듯 구겨진 만 원짜리 세 장을 루다의 눈앞에서 달랑달랑 흔들었다. 7만 원짜리를 단숨에 3만 원으로 후려친다고?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루다는 주먹을 꽉 쥐었다.'지금이다. 어깨 넥 라인을 살짝 당기기만 하면 돼.' 그러면 쇄골 위의 흑호가 맹렬하게 발톱을 세우고 나타날 것이었다.루다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비장하게 블라우스 넥 라인 끝자락을 움켜쥐려던 찰나였다."이루다 대리."귓가에서 들려온 서늘한 목소리에 손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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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 킬 빌을 막아라
그날 저녁 7시.중고 거래로 10만 원을 두둑하게 챙긴 루다는 가방을 고쳐 메고 동네 골목 끝자락에 위치한 세탁소로 향했다.내일 오후 12시, 바람난 전남친의 결혼식.복수심을 불태울 전투복으로 낙점한 '블랙 랩 원피스'를 드라이클리닝 맡겨둔 참이었다. 3월의 밤바람이 제법 차가웠다. 낮에 살랑이던 봄기운은 온데간데없고, 해가 지자 다시 서늘해진 공기가 뺨을 스쳤다. 루다는 재킷 지퍼를 끝까지 올리며 걸음을 재촉했다.세탁소 안에는 노란 백열등 조명이 따뜻하게 켜져 있었다."어머, 루다 씨! 내일 어디 좋은 데라도 가나 봐? 아까부터 표정이 아주 비장한데?"친절한 세탁소 사장님이 투명한 비닐에 빳빳하게 싸인 까만 원피스를 건네며 넉살 좋게 물었다."네! 내일 아주 중요한 거사가 있거든요. 그동안 제가 당했던 억울함을 아주 제대로 갚아주고 올 겁니다!"루다가 스스로 다짐하듯 허공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내일 결혼식장에서 하객들의 축하를 받으며 뻔뻔하게 미소 지을 개자식의 얼굴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세탁소를 나온 루다는 인적 드문 골목길에서 까만 원피스를 몸에 슬쩍 대보았다. 그러다 주머니에서 어제 노트북에 붙이고 남은 '흑호 홀로그램 스티커' 조각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어둠 속에서 가로등 불빛을 받은 홀로그램 스티커가 서늘하게 번쩍였다. 루다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좋아. 내일 이 까만 전투복에 발톱 제대로 세워주마. 아주 피바다를 만들어 줄 테니까 딱 기다려, 개자식아."같은 시각. 세탁소 밖, 희미하게 깜빡이는 가로등 불빛이 비추는 전봇대 뒤.퇴근길 코트 깃을 세우고 걷던 강태준은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 있었다. 아까 중고 거래에서 이상한 진상 놈과 얽히기도 했고, 이 근처가 자신의 오피스텔로 가는 길이기도 해서 부하 직원이 무사히 귀가하는지만 멀리서 확인하고 지나칠 생각이었다.그런데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그의 상식선을 완전히 파괴하고 있었다.어두운 골목 한복판. 까만 옷을 든 이루다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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