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외할머니의 마지막 밤을 옆에서 지키기로 했다.연정훈도 장례식장을 찾았으나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그렇게 늦은 밤이 되고 밖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어깨 위로 겉옷을 걸쳐주며 덤덤하게 말했다.“그러다가 감기 걸리겠어.”안시연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그러다가 안시연은 몸을 돌려 복도 창가로 향해 내리는 비를 가만히 구경했다.안시연은 겁이 많은 편이었으나 외할머니의 장례를 지키며 다른 사람들의 영정 사진을 보고 있어도 두려운 감정이 없었다.아니 오히려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장례를 마치고 잠시 다른 곳에서 생각을 비우고 싶어요.”안시연의 갑작스러운 말에 연정훈이 물었다.“어디 가고 싶어?”안시연이 고개를 돌렸다.“전에 날 해외로 보내려고 했잖아요. 그때 어디로 보내려고 했어요?”“시연아, 그건 너무 예전의 일이잖아.”“사실 얼마 지나지도 않았어요. 겨우 반년 전의 일인데요.”“...”연정훈이 침묵했다.“나랑 북유럽 다녀올래?”“북유럽이요?”잠시 고민하던 안시연이 말했다.“나쁘지 않네요.”“그런데 혼자 다녀오고 싶어요.”안시연의 말에 연정훈은 다른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더 이상 말을 보탤 수가 없었다.너무 침착한 안시연은 이성을 잃은 것보다 더 불안했다.안시연은 헤어진다는 말을 다시 입에 올리지 않았다. 연정훈의 성격상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더 이상 논쟁을 이어 가기도 지쳐 빨리 떠나고 싶었다.한 사람을 떠나는 방법은 생각보다 다양했다.더구나 연정훈은 안시연에게 충분한 금전적인 지원을 해주었고 안시연이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많았다.어느새 바람이 더 거세져 갔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옆에 서서 비바람을 대신 맞았다.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안심하고 쉬고 와. 재판은 나와 부승원이 알아서 잘 해결할게.”안시연은 가만히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소현주가 무죄 판결이든 유죄 판결이든 마땅한 벌은 받게 될 거야.”안시연은 여전히 아무 말
소현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외할머니의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안시연은 속으로 냉소를 터뜨렸으나 겉으로는 여전히 침착한 얼굴이었다.“사과할 필요 없어요. 윤리 도덕 따위 없는 사람이 사과한다니 너무 역겨워서 들을 수가 없거든요.”소현주가 눈에 띄게 당황해했다.소현주의 병은 심각한 편이 아니었고 약물로 충분히 제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감정 기복이 커지고 매일매일 불면에 시달리다 보니 소현주는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안시연 씨, 말 가려서 해주세요. 저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결국은 살인자잖아요.”소현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미소를 짜냈다.“굳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도 다른 방법은 없어요.”“당연히 그렇겠죠.”안시연은 등받이 몸을 기대더니 연정훈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 있어도 그쪽은 감옥에서 평생을 썩게 될 거예요.”소현주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연정훈이 몰래 안시연에게 그 어떤 약속을 했을까 걱정이 되었다.하지만 연정훈은 소현주에게 증거를 찾을 거라고 말했고 아무리 안시연을 위해 움직인다고 해도 증거를 위조할 리는 없었다.“정훈이가 사적으로 날 처리할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죠?”안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그러자 소현주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아직 그 사람을 잘 모르나 봐요.”안시연은 마음이 아팠다.틀린 말은 아니었다.안시연은 연정훈을 정말 알지 못했다.하지만 이제 더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안시연은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건넸다.소현주의 시선이 슬쩍 그곳을 향했지만 바로 시선을 돌렸다.“자세히 보지 않을래요?”안시연의 미소에 소현주는 주춤하다가 종이를 건네받았다.주문 내역서였다.반지...소현주의 눈빛이 흔들렸다.그러나 안시연은 아주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그 사람 나한테 청혼했어요.”소현주는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자신의 목을 조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주문 내역서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한참 동안 움직일
소현주는 아주 득의양양해서 안시연을 쳐다봤고 순수 무구한 얼굴로 물었다.“이건 몰랐죠?”안시연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리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이렇게 말했다.“내가 그쪽 죽일 거예요.”그 말에 소현주는 조금 당황하다가 바로 미소를 지었다.도발하고 있는 소현주에 연정훈은 참지 못하고 큰 보폭으로 그곳으로 걸어갔다.활짝 웃고 있는 소현주를 보며 안시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연정훈이 선물한 차를 타고 그쪽 쳐버릴 거예요.”소현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그래요?”“장례식장 바로 앞에서 차를 타고 그쪽 쳐버릴 거라고요!”“좋아요.”소현주는 갑자기 차분해졌고 이에 안시연이 더 미친 것처럼 보였다.연정훈이 가깝게 다가오자 소현주는 안시연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그럼 기대할게요.”그 말을 마치자 연정훈은 마침 안시연의 등 뒤에 도착했고 방어적인 자세로 안시연을 자신의 뒤로 당겼다.말다툼은 이만하면 되었다.소현주는 아주 침착하게 연정훈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안시연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연정훈에게 말했다.“긴장할 필요 없어요. 별말 하지 않았는걸요.”연정훈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소현주 쪽으로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으며 그저 안시연을 다른 곳으로 당겼다.“발인 곧 시작해. 외할머니 마지막으로 보러 가자.”안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그렇게 두 사람은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자리를 떠났고 남겨진 소현주는 죽일 것처럼 등 뒤를 노려보고 있었다.‘그래, 어디 한 번 해봐.’소현주는 안시연에게 그 기회를 주고 싶었다.그것도 장례식장, 모든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 그 자리에서 말이다.연정훈은 충분히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는데 안시연이 차로 친다면 평생 죄책감으로 묶어 둘 수 있었다.외할머니의 발인은 빠르게 시작되었고 가족은 소현정과 안시연 두 사람뿐이었다. 부승원은 대리 변호사 신분으로 발인에 참석했고 반우희는 어린 동생들과 함께 찾았다.몇 시간 후, 안 그래도 가냘프던 외할머니는 작은 상자가 되어 돌아왔다.안시연은 유
구급차는 아주 빠르게 도착했다.소현주는 구급차에 오르는 내내 울면서 외쳤다.“정훈아! 저 사람 일부러 그런 거야! 날 쳐 죽이려고 했어!”연정훈과 안시연은 빗속에서 상황을 지켜봤고 두 사람 모두 흠뻑 젖었다.안시연이 말했다.“차량은 그렇게 빠르지 않았고 일부러 칠 생각은 없었어요. 소현주 씨가 일부러 넘어진 거예요!”소현주가 자신의 병을 몰랐다고 한 것처럼 안시연도 일부러 소현주를 치려고 했던 사실을 부인했다. 더구나 차량은 빠르게 달리지 않았고 제한 속도를 넘기지 않았으며 정작 소현주를 향해 달리다가 방향을 돌려버렸었다. 만약 소현주가 넘어지지만 않았다면 사고가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말없이 바라보았다.그때 부승원이 다가와 작은 소리로 누군가 경찰에 신고했음을 알렸다.그러자 연정훈은 안시연의 손을 잡으며 이 말을 반복했다.“나한테 했던 말 그대로 하면 돼! 절대 말 바꾸지 마!”안시연은 이런 연정훈에 벙어리가 된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연정훈도 두려워할 때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눈물은 빗물과 함께 흘렀다.안시연은 침묵을 지켰고 연정훈과 부승원의 동행하에 경찰 조사를 마쳤다.조사 내내 연정훈은 안시연의 옆을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으며 행여나 안시연이 말실수를 할까 노심초사했다.경찰서에서 나오고 부승원이 먼저 떠났다. 두 사람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근처에 세워진 차에 올라탔다. 분위기는 얼어붙어 무서운 기운이 감돌았다.연정훈은 두 눈을 꼭 감고 자리에 몸을 기댔다.“내가 말했잖아! 그 사람 반드시 받아야 할 처벌받게 해주겠다고!”‘그런데 왜 스스로 움직이는 거야! 방향 판을 돌리지 않았다면 소현주는 중상이거나 죽었을지도 몰라. 그러면 안시연 넌 인생 망치는 거라고!’안시연은 아주 덤덤했다.“이제 그럴 필요 없어요.”안시연이 연정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소현주 씨 깨어나면 날 고소할 거예요.”“그런데 며칠 전 나처럼 원하는 결과를 가질 수는
소현주의 한쪽 발목은 분쇄성 골절 진단을 받았고 회복 불가 판정을 받았다.마취에서 깨어난 소현주는 아주 우울해했다.그리고 안시연이 눈에 들어오자 소현주는 당장 안시연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었다.안시연은 병실에 들어서며 문을 닫았고 연정훈을 병실 밖으로 단절시켰다.소현주의 이글거리는 시선이 느껴져 연정훈은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하지만 문에 기댄 안시연이 이렇게 말했다.“연정훈 씨는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우리 두 사람의 공간을 방해한다면 자해할 거라고 말해 뒀거든요.”소현주는 이불을 꽉 쥐었다. 마치 위험에 처한 짐승처럼 자신을 노리는 사냥감을 향해 최후의 발악을 하려는 것 같았다.“그런 시선으로 날 보지 마요. 무슨 피해자라도 된 것 같잖아요.”안시연이 비아냥거렸다.“그쪽이 날 쳤잖아요!”소현주가 고집스레 말했다.안시연은 소현주의 말투 그대로 따라 하며 말했다.“난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실수였어요. 만약 소현주 씨가 일부러 넘어지지 않았다면 차에 치이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소현주는 무언가 떠오른 듯 깜짝 놀라며 말했다.“장례식장에서 일부러 그렇게 말했던 거죠!”“내가 뭐라고 했는데요?”“날 칠 거라고 했잖아요!”안시연이 고개를 저었다.“난 그런 말 한 적 없어요.”안시연이 얼굴의 미소를 지우더니 핸드폰을 꺼내 들고 버튼을 눌렀다.이어 소현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런데 소현주 씨는 자신의 증상을 미리 알고 있었나 봐요.”소현주가 얼어붙었다.몇 초 뒤, 소현주가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런 증거는 무효 처리될 거예요.”“그건 상황에 따라 다르죠.”안시연이 핸드폰을 거두고 천천히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그쪽이 실형을 받는지 아닌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아요.”그리고 시선은 소현주의 발목으로 향했으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한다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벌을 받았다고 생각해요.”장애라는 말에 소현주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안시연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내가
부승원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점심 무렵이었다. 안시연의 부탁한 대로 부승원은 또 다른 변호사와 함께 왔다.“현재로서는 이 사고가 일반 교통사고로 처리될 듯합니다.”변호사가 말했다.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후속 상황은 모두 변호사님께 맡기겠습니다. 정상 절차에 따라 처리해 주세요. 법적 책임이 제게 있다면 인정할 것이고 없다면 그걸로 끝내 주세요.”잠시 생각하던 안시연은 연정훈 쪽을 슬쩍 바라본 후 말했다.“이 일에는 누구도 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부탁드립니다.”변호사는 많은 자료를 챙겨 나갔고 부승원은 여유롭게 자리를 지켰다.연정훈은 매우 바빠 보였다. 아마 며칠간 쌓인 업무가 많았지만, 연정훈은 회사로 출근하지 않고 있었다.그가 전화를 받는 틈을 타 부승원은 안시연에게 물었다.“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연정훈에게 복수하려는 의도인가요?”안시연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웃음을 지었다.“부 변호사님, 저 그렇게 유치하지 않아요.”자신의 미래를 걸고 한 남자를 복수하기엔 너무 충동적인 일이었다.“그렇다면 왜 이런 결정을 한 겁니까?”만약 소현주가 안시연의 책임을 끝까지 묻는다면 안시연은 무사히 빠져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잘못하면 짧게나마 감옥에 가게 될 수도 있다.안시연은 대답했다.“그저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기 싫을 뿐이에요.”부승원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사랑에 빠진 남녀는 정말 두려운 존재다.연정훈이 만난 두 여자는 연정훈이 여성을 두려워하게 할 정도로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었다.그럼에도 오랜 친구로서 그는 연정훈을 위해 몇 마디라도 전하고 싶었다.“시연 씨 외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출관 전에 연정훈과 제가 소현주 씨를 만난 적이 있어요.”안시연은 멈칫했다.부승원은 말을 이었다.“둘 사이의 일은 대략 알고 있어요. 소현주 씨에 대해 연정훈이 오해받고 있는 것 같아요. 연정훈이 소현주 씨에게 미련이 남아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큰 빚을 느끼고 있는
연정훈은 차 트렁크를 가득 채운 후 안시연을 집으로 데려다주었다.사실 그곳은 집이라기보다는 외할머니의 마지막 기억을 간직한 곳이었다.안시연의 집은 오래전에 다른 사람에게 팔려버렸다.차에서 내리자마자 승주가 동생들과 함께 나타났다.안시연은 그들을 부르며 음식을 가져오라고 부탁했다. 아이들의 소리는 맑고 순수해 슬픔과 침묵을 뚫고 겨울조차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아이들의 소리는 맑고 순수하여 슬픔과 침묵을 뚫고 겨울도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언니, 아저씨와 함께 올라가서 밥 먹어요. 내가 요리해 줄게요.”승주가 말했다.안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아니야. 또 나한테 라면 끓여주려고 하는 거지?”승주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아니면 소세지 추가해 줄게요!”안시연은 승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녀는 돌아서 연정훈에게 말했다.“반우희 씨를 초대해서 저녁을 먹으려 해요. 조금 늦게 가도 될까요?”“돌아가고 싶지 않다면 여기서 지내도 돼. 저녁에 와서 너와 함께 있어 줄게.”연정훈이 말했다.“괜찮아요.”안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정훈 씨가 불편할 거라는 걸 알아요.”“잠시 망설이다가 안시연이 덧붙였다.“나도 불편해요.”외할머니가 없어진 이 집은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었다. 연정훈은 안시연의 슬픔을 느끼고 참지 못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반우희 씨를 초대해서 혼자 요리할 거야?”“반우희 씨와 물어볼게요.”“혼자서 하려면 내가 여기 남아 도와줄까?”연정훈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안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정훈 씨가 도와주면 승주보다 못할 거예요.”승주가 끼어들며 말했다.“언니, 모르겠어요? 아저씨는 언니와 함께하고 싶어 해요.”안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안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손을 뻗어 그의 카라를 정리해 주었다.“정훈 씨는 가서 일 보세요. 요즘 일이 많이 쌓였을 거예요.”“괜찮아. 누군가 처리하고 있어.”“누군가가 처리하더라도 정훈 씨가 직접 하는
소현정이 외할머니의 약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말했을 때 안시연은 의심하지 않았다. 소현정은 원래 이런 일에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딸로서 어머니의 약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안시연은 답답함과 함께 화가 치밀었다.며칠 전 반우희는 안시연과 함께하며 수술 당일의 상황을 들려주었다.외할머니는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소현정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말하지 않으셨다.소현정에게는 외할머니를 해칠 이유가 없었다.그런데도 안시연은 이제 이 엄마를 더 이상 마음속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수술대에서 돌아가신 것은 소현주에 대한 미움 때문이라지만, 외할머니께 약을 챙겨 드리지 않은 소현정도 책임이 있다!어차피 모녀간에 애정도 없으니 이제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안시연이 더 묻지 않자 소현정은 안도하며 슬쩍 안시연의 속마음을 떠보려 했다.소현정은 최근 오성호와 연락이 끊겼고 며칠 동안 여러 차례 항공권 예약을 시도했지만 계속 실패하면서 불안감이 커졌다.어젯밤 마침내 항공권 예약에 성공한 소현정은 급히 화서시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니?”소현정이 안시연에게 물었다.안시연은 말했다.“사고를 냈으니 소송이 걸릴 것 같아요. 당분간은 경인시에 머물려고요.”소현정은 그제야 생각났다.에휴.어제 그 장면은 정말 무서웠다. 역시 양씨 가문의 자식이다. 조금만 더 핸들을 덜 돌렸더라면 그 여의사의 다리는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하지만 그 여의사도 죽어 마땅하다!나중에 오씨 사모님이 되면 소현주는 반드시 이 일을 다시 청산할 것이다.소현정은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너무 무모했어. 외할머니가 아시면 얼마나 마음 아파하셨을까.”안시연은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켰다.소현정은 속으로 비웃었다.사실 안시연이 정말 소현주를 치어 죽였다면 오히려 좋았을 것이다. 그녀를 망가뜨리고 외할머니에게 복수할 기회였으니 말이다.안시연이 소송 이야기를 꺼내자 소현정의 긴장된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소현정은 며칠 동안 어머니를 실수로
양석진은 아무 내색하지 않고 양지원을 이끌어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누가 너 괴롭혔어?”“아니요!”배는 자꾸 쿡쿡 쑤셔오고 멀리서 진병수가 모르는 여자를 껴안고 있는 걸 보면 양석진도 본인이 없는 곳에 저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배가 아팠다.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아빠도 늘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양지원은 저런 행동에 큰 반감을 느꼈고 양석진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면 화가 났다.그런 생각을 하는데 양석진이 옆으로 다가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혹시 생리 시작한 거야?”“...”양지원이 아무 대답이 없자 양석진은 바로 눈치를 챘다.“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그리고 룸을 나선 양석진은 따뜻한 꿀물을 한 잔 가지고 돌아왔다.마침 두 사람을 지나치던 진병수는 꿀물과 화가 잔뜩 난 ‘공주님’을 번갈아 보며 혀를 쯧쯧 찼다.‘이게 동생이야? 딸이야?’따뜻한 꿀물을 마시자 몸이 녹아내렸고 양지원은 소파에 푹 기대앉았다.그리고 양석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아까 그 여자 누구예요?”양석진은 멈칫하다가 바로 상황 파악을 마쳤다.“연예인인데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사정이 딱해 보여서 병수더러 도와주라고 했었어.”양지원은 바로 시선을 흘렸다.“오빠는 다른 사람한테도 다 이렇게 친절해요?”“그 사람 연예인이 된 이유가 어머니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어머니를 결국 지키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양지원은 침묵했다.‘사정이 딱하긴 하네.’“그래도 오빠는 조심해야 해요. 아빠가 오빠를 정치인으로 키우려고 하는데 병수 오빠처럼 헤프게 행동하면 안 돼요.”양석진은 자신에게 훈수를 드는 양지원을 보며 며칠 전 양지원이 벌인 일을 떠올렸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알겠어.”구석 자리에서 양석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양지원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래서 양석진에게 청아에 대한 얘기를 더 들려달라고 했다.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양창수가 옆자리에 와 있었다.양지원은 양창수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손명우는 안경을 고쳐 쓰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날 그냥 보러 온 건 아니고, 드레스샵 깨부순 것 때문이지?”양지원은 조금 계면쩍은 기분이 들어 목을 가다듬었다.진병수는 장난기가 많았고 술잔을 들고 옆으로 앉으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뭐야? 우리 지원이가 언제부터 드레스에 관심을 가졌지? 혹시 연애라도 하는 거야?”소파에 앉아 있던 양석진은 제게 걸어오려는 여자를 눈빛으로 제압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양지원은 그걸 발견하고 득의양양해서 턱을 치켜들었다.‘역시 우리 오빠가 제일 멋있어.’“내가 왜 연애해요?”양지원은 다시 양석진의 옆자리로 앉으며 말을 이었다.“드레스 입는 사람은 꼭 연애하고 결혼할 사람이어야 하는 거예요? 드레스가 예쁘면 그냥 입을 수도 있는 거죠.”“그래도 굳이 창을 깨부술 필요는 없잖아.”진병수는 손명우를 가리키며 말했다.“명우한테 말만 하면 드레스는 얼마든지 입을 수 있어.”손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가게에 새로 턱시도 모델 많이 들어왔는데 관심 있으면 같이 사진도 찍어줄 수 있어.”양지원은 크게 관심이 생긴 건 아니었으나 손명우를 거절하기 애매했다.그때, 양석진이 디저트를 양지원의 앞으로 당겨주며 말했다.“아직 나이도 어린 게 무슨 웨딩드레스 사진을 찍는다고.”“오빠, 방금 너무 촌스러운 거 알아요?”양지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옆 사람들한테 말했다.“내 나이가 어려요? 진씨 고모는 내 나이 때 벌써 결혼 1주년이었어요.”“그건 예전 얘기고.”한강시 쪽은 말이 달랐지만 화서시는 한 10년 전만 해도 다들 결혼을 아주 어린 나이에 했었다.“그냥 모델이랑 같이 사진 찍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잖아.”진병수의 말에 양지원은 양석진의 표정을 살폈고 고민하다가 손을 저었다.“어휴, 내가 무슨 모델이랑 사진을 찍어요. 됐어요.”그렇게 사진 촬영은 일단락이 되었다.양지원이 들어온 뒤로 룸 안의 사람들은 행동을 조심하기 시작했다.양석진은 동생 양지원을 끔찍하게 챙겼고 진병수와 손명우는 크게
오토바이를 타고, 쓰레기통 따위로 창을 깨부수는 건 가히 그해의 유행이라 할 수 있었다.양지원은 그런 반항적인 일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기분이 저기압이라 분출한 곳이 필요했다.양석진이 옆에 있었다면 얼리고 달랬을 테지만 양창수는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했을 것이다.양홍두가 자리를 비우자 두 사람은 입에 모터가 달렸다.“형,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드레스샵은 손명우네 가게니 아무 문제 없어요.”양지원은 팔짱을 척 끼고 양석진의 앞으로 걸어갔다.“그냥 드레스뿐인데 아빠가 괜히 오바하시는 거예요. 내가 전에 그 불여우한테 전화했다고 지금 아니꼽게 보시는 거라고요.”양석진이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향해 말했다.“말 가려서 해.”양지원은 여전히 불만이라는 듯 입을 삐죽였다.‘계속하면 내가 손해니까 참아야지 뭐.’그리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오빠한테 굳이 이런 일로 마음 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양지원은 어린 시절처럼 양석진에게 딱 붙어 말했다.“참, 내 친구가 오빠한테 편지도 쓰고 선물도 챙겨줬어요.”양석진은 익숙하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난 그런 쪽으로 관심 없으니까 친구한테 다시 그런 걸 보내지 말라고 해. 난 공부에만 집중하고 싶으니까.”평소의 양지원은 양석진이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아주 흡족한 대답이었다.‘그래, 이게 맞아. 감히 누가 우리 오빠 옆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겠어?’‘꿈 깨라고!’양지원은 기분이 퍽 좋아졌고 제 친구들한테 전화를 돌려 오빠의 말을 전했다.다른 사람은 그냥 알겠다고 넘어갔지만 친구 길예은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너희 오빠 정말 아무한테도 관심이 없다고? 네가 애초에 편지를 건네지 않은 건 아니고?”“야, 길예은,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저번에 너한테 석진 오빠 선물 부탁했더니 그대로 다시 돌려줬잖아. 너희 오빠는 무슨 눈이 그렇게 높아? 정말 우리 중에서 한 명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길예은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작가의 말:아래 내용은 네 시기로 나뉘어 진행됩니다.소년 — 짝사랑이라는 이름의 시작.청년 — 서른 번째 생일, 그리고 아련한 재회.중년 — 오랜 시간 끝에 처음으로 엮인 둘의 이야기.결혼 후 — 이제는 함께 걷는 달콤한 나날들.각 시기를 함께하며, 두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깊어지는지 지켜봐 주세요.--------[소년기]양석진과 양지원이 혼인 신고서를 제출한 당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사무실부터 관저까지 하루 종일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았다.양석진에게 결혼 축하 인사를 건넨 첫 번째 사람이 드물게 보인다는 양석진의 미소를 목격했다는 소문이 전해진 뒤로, 다들 기회를 찾아 양석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그 미소를 직접 확인하려 했다.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고, 나이가 지긋한 기사가 관저로 바라대 주다가 낮에 들었던 소문을 듣고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의원님, 결혼 축하합니다. 내일에도 같은 시간으로 마중 오면 될까요?”양석진은 꽉 채운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며 미소를 지은 채 차에서 내렸다.“내일은 휴가입니다.”홀로 차에 남겨진 기사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예쁜 노을 아래, 양석진이 정원 안으로 걸어가다가 원피스를 입은 양지원이 얇은 외투 하나 걸치고 무언가 휘젓고 있는 게 보였다.그러자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른기침을 몇 번 했다고 양지원이 배즙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그런데 뭘 또 정원에서, 그것도 이렇게 큰 가마에 만들고 있는 거야?’양석진이 양지원을 부르려는 찰나, 우지끈하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양지원이 너무 힘을 주어 젓다가 나무 주걱이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양석진은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양지원이 이어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 지켜봤다.양지원은 외투를 다시 고쳐 입으며 주변을 살폈고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걸 확인하고는 위층을 향해 외쳤다.“창수 씨! 왜 부러진 나무 주걱을 주신 거예요!”“...”이어 2층 창문이 열리고 양창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양지원의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