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너리.노지혜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위층을 확인하더니 여유롭게 머리카락 한 올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두 사람 떠났어.”변여름은 테이블에 엎드린 채로 노트북을 조작했고 영상을 앞으로 당겨 양혁수와 변백호가 투덕거리는 장면을 되돌아봤다.노지혜도 관심을 보이더니 콕 집어 이렇게 말했다.“백호 오빠가 이겼네.”변여름은 노지혜를 힐끗 쳐다보았고 노지혜는 미소를 지었다.그러자 변여름은 안 보여줄 거라는 듯이 아예 노트북을 옆으로 밀어버렸다.“...”“아, 근데 말이야. 네가 고백했을 때 혁수 씨 반응 어땠어?”변여름은 턱을 괴고 다시 영상의 타임라인을 조정했다. 이번엔 양혁수가 카메라를 쳐다보던 순간을 되돌려보았다.“우리한테 들킨 거 알고 있었네.”“어쩐지 네가 심하게 오글거리더라.”변여름은 아무렇지 않은 듯 굴었지만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그러게 왜 날 그렇게 매몰차게 밀어낸 거야.’‘난 그냥 고백만 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것도 못 하게 하고. 흥’노지혜가 다시 다가와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근데 이제 두 사람 모두 자리 비웠는데 약 정말 줘?”“음... 일단 지혜 씨가 갖고 있어요.”노지혜는 단번에 눈치챘고 변여름의 어깨를 감싸안더니, 귀에 대고 더 위험한 계획을 속삭였다.변여름은 순진한 얼굴로 연신 손을 휘저으며 거부 의사를 표했지만 눈이 반짝거렸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일부러 그랬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질질 끌지 않고 고백 같은 건 아예 못 하게 단칼에 잘라, 최대한 빨리 집에 돌려보냈다.하지만 변여름은 꼭 끝까지 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그래서 할 수 없이 양혁수는 변여름을 애써 모른 척했다. 평소처럼 행동하면서 결혼식이 끝나는 대로 곧장 떠날 계획을 세웠고 앞으로 엮일 일은 절대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그런데, 밤에 혼자 있으면 자꾸 변여름 생각이 났다.‘대체 내 어디가 좋다는 거야?’‘몇 년 동안 얼굴도 자주 못 봤고... 그때는 완전 어린애였는데?’어린아이의 짝사랑이니 그렇지 상
양혁수가 변여름을 발견한 건 우연이었지만 그 이후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자신을 계속해서 훔쳐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심스럽지만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시선이었다.그때 음악이 울려 퍼지며 결혼식이 시작되었다.양혁수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 어디에서 차를 탈 거냐는 비서의 질문에 답장을 보냈다.식장은 축복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신부가 드디어 신랑 앞에 마주했고, 주례는 뻔한 멘트를 읊기 시작했다.양혁수는 시큰둥했다. 아침부터 그 쌍둥이들한테 시달려서인지 아직도 정신이 혼미했다.미간을 지그시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변여름이 양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어설프게 각도를 조절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충 봐도, 자기랑 같이 찍히려고 하는 것 같았다.휴대폰 화면에 뭐가 찍혔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변여름이 잠깐 동작을 멈춘 걸 보니, 마침 양혁수가 쳐다보는 순간이 찍힌 모양이었다.스크린 속에서 서로의 시선이 맞닿는 묘한 순간 변여름이 망설이지 않고 셔터를 눌렀다.찰칵!양혁수는 변여름의 뻔뻔한 태도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피식 나갔다.그렇게 두 사람은 말없이 몇 초간 시선을 마주했다.그런데 그때.콰과광!귀청이 찢어질 듯한 폭발음이 식장을 뒤흔들었다.순간적으로 엄청난 충격이 몰아쳤고, 사방에서 날아온 파편들이 양혁수를 비롯한 주변의 하객들을 노렸다.그리고 비명과 구조 요청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폭탄이야!”정신을 차린 양혁수는 힘겹게 몸을 지탱하며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아직 경호원들이 도착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오빠! 이쪽으로 가요!”변여름이었다.지금은 시시비비를 따질 때가 아니었고 양혁수는 곧장 변여름을 따라 움직였다.하객들은 모두 호텔 밖으로 도망치고 있었지만 변여름은 반대로 움직였다. 양혁수를 데리고 호텔 내부로 들어가, 가장 외진 길을 선택해 빠르게 이동했다.그리고 무선 장비를 이용해 가족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전원이 무사하다는 걸
“그럼 뭐라고 말해야 하나요?”“무조건 괜찮다고 말하세요. 만약 문제 생기면 본인의 눈을 대신 주겠다고 말이에요!”양혁수가 눈을 뜨기도 전에, 먼저 들려온 건 노지혜가 의사를 윽박지르는 소리였다.양혁수는 천천히 몸의 감각을 확인했다. 팔다리는 멀쩡했고, 감각도 정상이었다. 다만 눈앞이 온통 어두웠지만 실명한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병실 문이 열렸고 들어온 사람은 변여름이었다. 변여름은 들어오자마자 노지혜와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의사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아무 문제없습니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제 눈을 바치겠습니다!”“...”이제 변여름이 대답할 차례였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대신 종이를 넘기는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렸다.한참 후에야 변여름이 입을 열었다.“됐어요. 이제 가보셔도 돼요. 여긴 제가 있을게요.”“네네! 알겠습니다!”의사는 마치 해방이라는 듯 밝게 대답하고 황급히 병실을 나갔다.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변여름.”그 순간, 변여름이 얼마나 빠르게 다가왔는지 침대 옆으로 바람이 일렁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오빠! 깨어났어요?”“응.”양혁수는 변여름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지금 내 상태는 어때?”“눈꺼풀이 유리 파편에 긁혔지만 안구는 문제없대요.”그 말을 듣자 양혁수는 안심하며 긴 숨을 내쉬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행여나 걱정할까 봐 말을 덧붙였다.“지금 눈이 안 보이는 건 눈을 뜨지 못하게 고정 장치랑 붕대를 감아둬서 그런 거예요. 잠시 휴식하고 붕대를 풀면 정상적으로 돌아올 거예요.”“다른 건?”“미약한 뇌진탕이랑 등에 충격으로 인한 타박상이 있어요.”양혁수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봤고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앞이 보이지 않는 게 꽤 불안했다.“다른 사람들은?”“부상자는 있지만, 사망자는 없어요.”그건 그나마 다행이었다.변여름은 붕대로 가려진 양혁수의 눈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오빠, 미안해요. 내가 판단을 잘못해서... 그 길로
“오빠, 다른 사람이 오빠를 돌보는 건 내가 못 믿겠어서 그래요.”양혁수는 속으로 생각했다.‘네가 날 돌보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일이야.’변여름은 그런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 듯 아무 말없이 손을 잡아 화장실로 이끌었다. 문을 열고 세면대 근처까지 안내한 뒤 침착하게 설명했다.“오빠, 화장실 공간이 좀 작아요. 왼쪽으로 1미터 가면 변기이고 난 바로 밖에 있을 테니까 끝나면 불러요.”말을 마치자마자 변여름은 조용히 문을 닫고 얌전히 문 앞에서 기다렸다.양혁수는 더 이상 변여름과 말다툼할 여력이 없었다. 지금 당장 급한 일을 해결하지 않으면 정말 큰 일이었다.“변여름.”“네. 저 여기 있어요.”“멀리 떨어져.”“아...”잠시 뒤, 문밖에서 변여름이 침대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변여름은 두 손 검지손가락을 귀에 쏙 집어넣고는 친절하게 외쳤다.“오빠, 나 귀도 막았어요!”“...”얼마 후, 양혁수가 화장실에서 나왔다.변여름은 어느새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창문을 등지고 앉은 양혁수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수다를 들었다. 어제 결혼식 이야기를 하는데 그 누구도 두려운 기색은 없었으며 오히려 웃음소리까지 섞여 있었다.이 집안 사람들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친구들까지도 정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이 근처 1km 반경 안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인 인간은 자기 혼자뿐인 것 같았다.양혁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가만 생각해 보니 그동안 양혁수는 안일하고 평온한 일상에 익숙해졌고 이번 일은 꽤나 오랜만에 겪는 황당한 사건이었다.옆에서 변여름은 뜨거운 국밥을 숟가락으로 저으며 온도를 식히고 있었다. 그러다 양혁수의 작은 움직임에도 관심을 보였다.“너희 가문에는 이런 일이 자주 있는 거야?”“아니요.”변여름은 침착하게 답했다.“우리도 오랜만에 겪는 일이에요. 이번 일은 그냥 사업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벌인 짓이래요.”양혁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변씨 가문 사업에 사고가 안 나는
양혁수는 숟가락에 닿는 걸 느끼며 조심스레 입에 넣었다.그러나 국물 맛은 여전했으며 짭짤한 새우젓의 맛만 추가되었을 뿐이었다.말없이 입안의 것을 씹고 있는데 변여름이 물었다.“입에는 맞아요?”“그래...”변여름은 다행이라며 중얼거렸고 자연스럽게 양혁수의 숟가락 위로 반찬을 집어주었다. 양혁수는 본인이 우연히 반찬을 집은 건지 아니면 반찬이 밥에 잘 섞여 있던 건지 구별이 되지 않았지만 애써 무덤덤하게 입에 넣고 국물도 한술 떴다.양혁수는 본인의 의지대로 스스로 밥을 먹었고 변여름도 자신이 먹여주겠다고 떼를 쓰지 않고 몰래 집어주고 있으니 두 사람 분위기도 차츰 풀렸다.하지만 몰래 반찬을 집어주는 것도 사실 먹여주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양혁수가 이를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고 변여름은 어느새 깨끗하게 씻은 딸기를 양혁수 입가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아...”그러나 양혁수는 입을 벌리지 않고 손으로 받으려 했다.“오빠는 손도 안 씻었잖아요.”“...”겨우 딸기 하나라는 생각에 양혁수는 못 이기는 척 입을 벌렸다.그렇게 물꼬를 트고 나니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일이 번졌다.딸기에 이어 변여름은 손수 치킨을 한입 크기로 잘라 양혁수에게 건넸다.그렇게 한입씩 먹여주며 변여름이 말했다.“오빠가 자고 있을 때 연락이 네 통 정도 걸려 왔는데 하나는 지원 이모이고 다른 전화는 회사 사람인 것 같아요.”입을 꾹 다물고 있던 양혁수는 핸드폰을 건네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변여름이 건네온 치킨에 말문이 막혔다.“오빠, 이 집 치킨 맛있으니까 많이 먹어요.”양혁수는 입 안 가득 찬 치킨에 말을 잇지 못했으나 변여름은 양혁수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알아서 핸드폰을 건넸다.그러다 보니 양혁수는 지금 변여름이 자신을 ‘먹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고 아주 자연스레 변여름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변여름이 질문을 이었다.“조원희라는 사람이 두 번이나 전화를 걸었는데 다시 걸까요?”두 번이나 걸었다는 건 필시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을 설명했
“네가 무슨 방법이라도 대서 날 국내로 보내줘.”양혁수가 변백호를 향해 말했다.양혁수가 정신을 차린 뒤로 변백호는 처음 병실을 찾았다.변여름은 방금 병실을 나섰고 엉망인 양혁수의 입가를 보며 변백호는 방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상이 되었다.“눈이 회복될 때까지 두 날만 더 쉬어.”양혁수는 고민도 하지 않고 말했다.“타박상뿐이고 안구는 다치지도 않았다면서 뭔 회복을 기다리는 거야?”“서둘러줘. 오늘 밤, 늦어서 내일 아침엔 돌아가야 해. 국내에 할 일이 많다고.”변백호는 바로 양혁수의 마음을 쿡 찔렀다.“너 여름이 무서워서 그러는 거지?”“...”양혁수는 긴 한숨을 내쉬었고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너희 부모님께 말 좀 잘해줘. 난 네 매부 되고 싶은 마음 추호도 없으니까.”“말해봤자 소용없어. 여름이는 너만 좋아하니까.”변백호가 바로 받아쳤고 양혁수는 이런 변백호를 노려보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너 정말 미쳤어? 나한테 여동생이 있었다면 띠동갑 되는 남자한테는 다리를 분질러서라도 절대 보내지 않을 거야. 너라도 정신 제대로 차려야 하는 거 아니야?”“내가, 여름이 다리를 분질러라고?”변백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양혁수는 아직도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하지만 사실 양혁수는 누구보다도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그래서 더 마음이 무거웠다.“그러니까 너희 부모님께 말해서 여름이 좀 잘 타일러줘.”“소용없어. 오히려 두 분이 여름이 돕겠다고 나설지도 몰라. 우리가 오랜 친구인 걸 보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은걸.”“...”변백호는 양혁수에게 충고를 남겼다.“네가 정말 여름에게 마음이 없다면 너무 티 내지는 말고 당분간만 참아줘. 갖지 못하는 것에 더 목을 매게 된다는 말도 있잖아. 일단은 옆에 두고 여름이가 차츰 관심이 식을 때까지 내버려둬. 그렇게 같이 지내다가 너한테 질리면 가버릴 수도 있잖아.”“...”‘그걸 충고라고! 정말 하나도 도움이 안 돼!’양혁수는
양혁수는 어릴 때부터 타고난 인기에 지금껏 받은 고백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그런데 서른네 살이 되는 해에 족히 열 살은 더 어린 꼬마에게 고백 폭탄을 받을 거라고는 예상치도 못했다.며칠을 곱씹어본 끝에, 양혁수는 결론을 내렸다.이건 마치 산적 두목한테 납치당한 기분이었다!그러나 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산적 두목은 말투가 부드럽고 귀에 착 감기는 데다, 모든 일에 적당히를 알고, 양혁수를 모시는 방식도 너무 완벽해서 반박할 구석이 없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양혁수는 불평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양혁수가 두 번의 진료를 받고 일상생활이 가능해지자, ‘두목’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양혁수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비서 노릇도 하고, 가끔은 가정부 노릇도 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읽어야 하는 서류들은 미리 검토한 후 요점만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고, 업무 효율은 원래 비서보다 더 뛰어났다. 게다가 식사 시간이 되면, 준비한 과일을 다양한 모양 틀로 찍어냈다.처음엔 유치하다고 생각했는데, 몇 번 먹다 보니 과일을 입에 넣기 전에 오늘엔 별 모양인가, 하트 모양인가 확인하는 버릇까지 생겼다.그리고 무엇보다 변여름은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즐거워했다. 가끔 양혁수가 작은 부탁을 하면, 대단한 일이라도 된 듯 기뻐하며 도왔다.지친 기색 없이 기꺼이 헌신하는 변여름 덕분에 양혁수는 점점 더 게을러졌고, 어느새 낮잠까지 챙겼다.낮잠 자다가 조금이라도 뒤척이면 어김없이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빠, 깼어요?”‘지금 일상이 신선놀음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반려동물이 된 것 같다고 해야 하나...’양지원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양혁수는 내심 양지원이 오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양지원이 봤다면 또 놀려댈 게 뻔했다.차츰 이곳 생활에 적응이 되고 굳이 급히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겠다 생각한 양혁수는 바로 양지원에게 전화를 걸어, 오지 않아도 된다고 전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붕대만 풀면 바로 떠날 것이라 계획을 차렸다.해가 질 녘, 변여
양혁수는 축축한 건 질색이라 평소 머리가 완전히 건조될 때까지 말리는 편이었다.양혁수는 드라이어를 들고 능숙하게 방향을 바꿔가며 바람을 조절했고 그 바람에 양혁수가 입은 셔츠 자락이 말리면서 양혁수의 탄탄한 몸이 그대로 드러냈다.변여름은 원래 가만히 서서 양혁수가 필요할 때 물건을 건네줄 생각이었다.하지만 주변에 은은하게 샴푸 향이 퍼지고 변여름의 시선은 자꾸 두어 개 단추를 풀어 헤쳐 드러난 양혁수의 쇄골로 향했다.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멍해지고 저도 모르게 자꾸 양혁수를 힐끔대다가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음... 이건 좀 아닌 것 같아.’변여름은 슬그머니 자세를 틀어 양혁수를 등지고 벽을 바라보며 반성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드라이어 소리가 멈췄다.변여름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고 양혁수는 무심하게 머리를 정리하고 있었다.그런데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모습이 너무나도 예뻤다.‘안돼! 이 음란 마귀야 멈춰!’변여름은 인상을 팍 찌푸렸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해 제 볼을 꽉 꼬집었다.‘좀 참으라고!’“여름아.”양혁수의 부름에 변여름이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왜요, 오빠?”“목욕물 받아놓고 나가줘.”이제 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변여름을 부려 먹었다.“알았어요.”변여름은 양혁수가 소파에 앉는 걸 확인하고 욕실로 향했다.그 사이, 양혁수는 소파에 기대앉아 시원한 과일 주스를 마시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잠시 후, 유리컵을 내려놓자마자 변여름이 욕실에서 나오며 말했다.“오빠, 준비 끝났으니까 들어가요.”“혼자 할 수 있으니까 이만 나가.”“오빠 들어가는 것까지 도와주고 나갈게요.”양혁수는 내심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머리를 대신 감겨주는 건 그렇다 쳐도, 씻는 건 꽤 사적인 영역이었다.솔직히 변여름이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면 목욕물과 갈아입을 옷도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욕실 안은 바깥보다 더 축축했다.변여름은 양혁수를 부축해 안으로 들어가며 어느 물건은 어디에 두었는지 설명해 줬다.양혁수는 일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