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꼬맹이, 추우면 내 옆에 있어." 상류층 모임에서 재킷과 초콜릿을 건네며 늘 곁을 지켜주던 아홉 살 연상의 소년, 강서준. 그러나 연수의 가족이 파산하며 두 사람은 비극적인 이별을 맞이합니다. 15년 후, 오직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버텨온 하연수는 대한민국 최고 기업 '태성 기획'의 신입사원으로 입사합니다. 그곳에서 재회한 서준은 과거의 다정함 대신 오만하고 차가운 대표이사가 되어 있었죠. "이제야 알아본 거야, 꼬맹이." 서서히 밝혀지는 그날의 진실과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다시 깨어나는 오랜 첫사랑. 두 사람의 아슬아슬한 사내 로맨스가 지금 시작됩니다.
View More스물일곱의 겨울은 잔인할 만큼 시렸다.
하연수는 목덜미를 파고드는 칼바람을 막으려 회색 울 코트의 깃을 턱 끝까지 바짝 끌어올렸다. 매서운 빌딩풍이 날카로운 바늘처럼 뺨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얇게 바른 립스틱 위로 겨울 공기가 닿아 입술이 감각 없이 굳어갔다. 입을 열면 금방이라도 하얀 입김과 함께 나약한 소리가 새어 나올 것만 같아 연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오늘 그녀의 차림새는 단정하다 못해 엄숙했다. 면접을 위해 큰맘 먹고 구입했던 짙은 네이비색 정장 재킷에 구김 하나 없는 흰 블라우스. 대학 시절 내내 아르바이트를 뛰며 신어 앞코가 살짝 닳아버린 검은 구두는 오늘 아침, 구두약으로 몇 번이고 깨끗하게 닦아낸 상태였다. 품에 안은 서류 가방 안에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 수백 번도 더 확인한 입사 증빙 서류들이 들어 있었다. 대한민국의 심장이라 불리는 서울 한복판. 눈앞에는 업계 최고이자 대학생들의 드림 컴퍼니로 꼽히는 광고·기획사, ‘태성 기획’의 사옥이 거대한 얼음 성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유리 외벽은 차가운 겨울 햇살을 서슬 퍼렇게 반사하고 있었고, 회전문 너머로 언뜻 보이는 로비는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처럼 번쩍이며 사람을 압도했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어.’ 연수는 심장 언저리를 지그시 누르며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화려하게 꾸밀 줄 몰라 그저 깨끗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이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녀의 맑고 투명한 피부와 동양적인 이목구비를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 연수의 머릿속에는 제 외모에 대한 자각 따윈 없었다.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본능만이 가득했다. 갑작스러운 집안의 몰락, 매일 밤 이어지던 어머니의 마른 한숨, 한때 당당했던 아버지의 구부정한 등 언저리. 새벽편의점 알바와 과외를 전전하며 밤새 불을 밝히던 고시원의 쪽방까지. 그 지독했던 가난의 기억들이 거대한 그림자가 되어 그녀의 등 뒤를 바짝 쫓고 있었다. 오직 독기와 책임감 하나로 최고 명문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이 악물고 버텨내 얻어낸 결실이 바로 이 문 너머에 있었다. 회문을 통과해 로비에 들어서자, 완벽하게 통제된 온기가 전신을 감싸 안았다. 대리석 바닥 위로 연수의 구두 소리가 또각또각, 이질적으로 울려 퍼졌다. 주위를 둘러보자 세련된 명품 코트를 걸치고 고가의 가방을 든 채 당당하게 걸어 다니는 사원들이 보였다. 그들의 여유로운 미소는 연수를 순간적으로 위축되게 만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낡은 가방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괜찮아, 연수야. 넌 배경이 아니라 실력으로 이 자릴 증명했어.’ 그녀는 눈을 감았다 뜨며 고개를 바짝 치켜들었다. 눈동자가 단단하게 빛났다. 태성 기획 신입 사원 하연수. 이제부터 그녀의 이름 앞에는 ‘망한 집 딸’이라거나 ‘흙수저’라는 라벨은 붙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어야만 이 화려한 빌딩 숲에서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신을 가다듬고 안내 데스크로 향하려던 그때였다. 로비 전체가 순간적으로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사방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던 직원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한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로비 전용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185센티미터가 훌쩍 넘는 압도적인 피지컬. 테일러드 수트가 맞춤옷처럼 딱 떨어지는 단단하고 넓은 어깨. 조각상처럼 수려한 이목구비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냉랭한 분위기. 태성 그룹의 젊은 구원투수이자, 상류층 라인에서 최고의 신랑감으로 꼽히는 강태성 CEO였다. 그는 주변의 시선에는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다는 듯, 비서가 건네는 서류를 차갑게 훑어 내리며 걸어왔다. 얼음 가시를 두른 듯한 그 오만한 아우라에 연수는 숨을 멈추고 그 자리에 박박 굳어버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빠른 걸음으로 로비를 가로지르던 태성의 시선이 허공을 돌다 돌연 멈춰 섰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낡은 코트를 입고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채 서 있는 한 여자. 태성의 차가운 눈동자가 연수의 얼굴을 포착한 순간, 그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완벽하게 절제되어 있던 그의 얼굴에 균열이 일어난 것은 찰나였다. 비현실적으로 맑고 깨끗한 눈망울.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단번에 심장을 관통하는 그 익숙한 실루엣. 태성의 시선이 연수의 입술과 눈매에 박혔다. 평소 그 어떤 미녀 앞에서도 미동조차 하지 않던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너야?’ 하지만 연수는 그저 압도적인 상사의 기운에 짓눌려 고개를 숙였을 뿐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시선 속에서, 두 사람의 운명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강태성 대표님! 폐쇄된 물류 창고에 불법 침입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연수 씨! 하정우 대표가 불법 자금 이동에 가담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강태성 대표가 증거를 없애려고 건물에 불을 질렀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정우 산업의 기밀 자료를 훔치려 했다는 의혹을 인정하십니까?”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질문이 쏟아졌다. 연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걸음을 멈췄다. 태성은 피가 흐르는 어깨를 감춘 채 즉시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물러서.” 그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화재는 계획된 범죄야. 우리는 안에서 죽을 뻔했어.” 그러나 기자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태성의 상처와 연수의 그을린 얼굴을 더욱 가까이 촬영했다. “계획된 범죄라고 주장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누가 불을 질렀습니까?” “건물 안에서 가져온 자료를 공개할 수 있습니까?” 태성은 연수를 자신의 등 뒤로 감쌌다. “연수야, 아무 말도 하지 마.” “하지만 오빠…….” “지금 네가 하는 말은 전부 편집돼서 이용될 거야.” 그때 경찰들이 기자들 사이를 가르며 다가왔다. 선두에 선 형사가 서류를 내밀었다. “강태성 씨 맞습니까?” 태성은 연수를 등 뒤에 둔 채 형사를 바라봤다. “그렇습니다.” “CK 물류 소유 법인으로부터 불법 침입 및 기밀문서 절취
하정우는 중요한 서류를 구분할 때 문서 모서리에 작은 점 두 개와 선 하나를 남기곤 했다. 남들은 의미 없는 낙서라고 생각했지만 연수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만의 표시였다. “잠깐만요.” 연수가 태성의 팔을 조심스럽게 벽에 기대게 했다. “연수야, 어디 가?” “아빠 표시가 있어요.” 연수는 연기가 자욱한 바닥을 기어 서류 상자 쪽으로 다가갔다. “위험해! 돌아와!” 태성이 따라가려 했지만 상처 때문에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연수는 불길이 번지기 직전 상자 안에서 얇은 서류철 하나를 꺼냈다. 서류철 겉면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오른쪽 아래에 아버지의 표시가 있었다. 연수는 떨리는 손으로 서류철을 펼쳤다. 대부분 비어 있는 종이들이었다. 그 가운데 한 장의 뒷면에 작고 흐릿한 글씨가 남아 있었다. 연수는 소매로 먼지를 닦아냈다. 그리고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숨을 멈췄다. 서명하지 않은 장부를 믿지 마라. 숫자는 M-17에서 다시 시작된다. 아버지의 필체였다. 연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잉크가 흐려졌지만 글자의 기울기와 마지막 획을 올리는 습관은 분명 하정우의 것이었다. 연수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떨어졌다. “아빠…….” 태성이 힘겹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우리는 같이 들어가고.” 연수가 태성의 말을 이었다. “같이 나가요.”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단단히 잡은 채 비밀 통로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진혁이 휴대전화의 불빛으로 앞을 비추며 먼저 좁은 통로를 살폈다. 벽과 천장은 모두 녹슨 철판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오래된 먼지 위에는 누군가 최근에 오간 듯한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태성은 한 손으로 연수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벽을 짚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통로 안으로 들어갈수록 공기는 더욱 답답해졌다. 오래된 기름과 금속이 뒤섞인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진혁이 앞쪽을 살피며 낮게 말했다. “통로 끝에 공간이 하나 더 있어.” “사람이 있는 것 같아?” “아직은 모르겠어.” 진혁이 바닥의 발자국을 비췄다. 안쪽으로 들어간 흔적뿐 아니라 밖으로 나온 흔적도 여러 개 뒤섞여 있었다. 누군가 이 장소를 최근까지 드나들었다는 뜻이었다. 연수는 태성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잡았다. 태성이 곧바로 그녀를 돌아봤다. “괜찮아?” “네.” 연수는 짧게 대답했지만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묻어났다. 태성은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무슨 일이 생겨도 내 뒤에 있어.” “오빠도 혼자 앞에 나가지 마요.” “연수야.” “약속했잖아요.” 연수는 그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
연수는 한동안 화면이 꺼진 휴대전화를 바라봤다. 강한 척했지만 손끝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태성은 휴대전화를 진혁에게 건넨 뒤 연수 앞에 섰다. “연수야.” 연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태성은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나 봐.” 연수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렀다. “오빠.” “응.” “저 사실 무서워요.” “알아.” “혹시 아빠가 정말 잘못한 거면요?” 태성의 표정이 아프게 흔들렸다. 연수는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제가 믿었던 아빠가 제가 알던 사람이 아니면 어떡해요?” 태성은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댔다. “그래도 네가 사랑받았던 기억까지 거짓이 되는 건 아니야.” “…….” “사람은 잘못할 수 있어.” 그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진실을 안다고 해서 네가 아버지를 사랑했던 시간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야.” 연수는 눈을 감았다. 태성의 숨결과 체온이 가까이 느껴졌다. “그리고 어떤 진실이 나와도.” “네.” “그 진실이 널 아프게 하면 나도 같이 아플게.” 연수가 눈을 떴다. “왜 그런 말까지 해요.” “네 아픔을 대신 가져갈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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