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낳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 다시 아이 낳고 싶지 않아.”양지원의 말에 양시연은 과거 양지원이 해준 말이 떠올랐다.그러고 보니 양석진도 다시 양지원을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하지 않을 것 같았다.모녀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연정훈과 양홍두가 바둑을 두는 게 보였다.양석진도 구경하고 있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양지원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러 떠났다.두 사람이 자리를 비우자 양홍두는 그곳을 슬쩍 보다가 혀를 찼다.‘나이가 몇인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애가 이렇게 지켜보고 있는데 말이야.’양시연과 연정훈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겨우 웃음을 참았다.두 사람은 양씨 가문에 한참 머물다가 여러 친척 집을 다니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그러니 양시연은 지칠 대로 지쳐버려 몸이 노곤했다.손님을 모두 보내고 연정훈은 양시연과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노곤하긴 한데 잠이 오지는 않아요.”연정훈은 요즘 양시연의 말이라면 하늘의 별도 따주고 싶은 심정이었고 양시연이 따분해 보이자 소파에 나란히 앉으며 이렇게 말했다.“승우가 매해 남산 저택에서 파티를 여는데, 같이 갈래?”“파티에서 뭘 하는데요?”“네가 생각하는 그 모든 게 있을 거야.”그러자 양시연이 눈을 반짝였다.“가요!”그렇게 두 사람은 바로 행동에 옮겼고 연정훈이 운전해 남산 저택으로 향했다.남산 저택 반경 1km 안으로 보이는 풍경 곳곳에 새해 느낌이 물씬 풍겼다. 이게 모두 남산 저택이 꾸민 거라 생각 하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느껴졌다.주차하고 차에서 내리자 누군가 양시연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시연 언니!”밝고 당찬 목소리가 들려오고 양시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번졌다.그래서 입구 쪽에 있는 반우희를 향해 손을 저었고 예상대로 세 꼬맹이도 함께 보였다.양시연은 연정훈의 팔에 팔짱을 걸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어떻게 다들 여기 있어요?”반우희가 대신 대답했다.“승주가 승우 씨한테 새해 인사를 해야 한다고 아우성쳤고 승우 씨가 흔쾌히 대
부승희는 화려한 옷차림으로, 또각또각 이곳으로 걸어왔다.이승우는 부승희를 바라보다가 또 양시연과 연정훈을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죄송해요. 요즘 밤을 자주 새웠더니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네요.”그리고 담배랑 라이터를 모두 한편에 내려 두었다.부승희는 그 옆자리에 앉더니 양시연과 연정훈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고 다시 이승우를 바라봤다.“대체 무슨 상황이야? 새해 전날까지 하다가 온 거야? 아주 영혼까지 털린 것 같은데?”“...”이승우는 자세를 바로 앉으며 말했다.“좀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어제 밤새운 건 새해 카운트 다운 때문이라고.”“어디에서 어떻게 밤을 새운 건지는 모르지.”부승희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침대에서도 카운트 다운은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그러자 연정훈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말조심해.”“아이도 가진 사람이 부끄러워하긴.”그러나 양시연이 뱃속 아기를 가리키자 부승희는 바로 알겠다는 듯 입의 지퍼를 닫는 행동을 했다.“아차차. 태교도 아주 중요하다는 걸 깜빡했어요.”부승희는 양시연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기야 태어나면 꼭 우리 오빠를 닮아 정직하고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해.”양시연은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부승원은 독설인 걸 제외하면 참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아이의 성별을 막론하고 부승원처럼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그런데 이승우가 이런 말을 했다.“넌 말해도 참. 정훈이 아이인데 네 오빠를 닮으라고 하면 뭐가 돼?”“...”“...”부승희는 쯧하고 혀를 차더니 손에 집히는 물건을 이승우에게 던졌다.“그 입 다물어.”이승우는 부승희가 던진 빵을 손에 쥐더니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방금까지 생기가 없던 얼굴에 드디어 웃음이 번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부승원도 도착했다.요즘 들어 양시연에게 있어 부승원은 ‘귀인’ 같은 사람이었고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부승원을 맞았다.그러나 부승원은 아주 침착하고 무뚝뚝했고 대체 누가 대표인지
이승우와 그의 진짜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양시연도 연정훈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시작은 화려했지만 끝은 초라했고 결국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그야말로 이승우답게 제멋대로 굴다가 끝난 일이었다.이승우가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꿔 부승희에게 집착하게 되었는지는 양시연조차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연정훈은 이를 단순히 해석했다.“아마도 조금 모자라서 그럴 거야.”양시연은 그 말에 장난스럽게 응수했다.“정훈 씨는 다른 사람 얘기할 때는 유독 말을 잘하네요.”연정훈은 침묵했다.“...”지금도 양시연이 다른 사람들을 힐끔거리는 것을 본 연정훈은 슬며시 그녀의 허리를 감으며 물었다.“어디 보고 있어?”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팔에 기대 안겼고 연정훈은 한 손으로 대충 포커를 하고 있었다.주변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불평을 터뜨렸는데 이승우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포커 테이블에서 애정행각이라니 진짜 양심도 없네.”연정훈은 양시연을 흘끗 바라봤고 그녀는 눈치를 채더니 그의 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하면 어쩔 건데?’이승우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부승희는 양시연을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시연 씨도 이제 많이 뻔뻔해졌네요.”양시연은 태연하게 대답했다.“곁에 오래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물들게 마련이죠.”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 대화에 어이없어하며 잠시 침묵했다.“...”이들의 유쾌한 티키타카가 오가는 동안 부승원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평소에도 말수가 적은 그였기에 지금 그의 기분을 짐작하기는 더욱 어려웠다.얼마 지나지 않아 반우희가 이승우의 뒤에 조용히 다가왔다. 이승우는 입이 독한 편이라 그녀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제 뒤에 서지 마세요. 우희 씨가 내 패를 훔쳐보고 부 변호사님한테 일러바칠까 봐 무섭단 말이에요.”반우희는 순간 멈칫하며 부승원을 힐끔 보았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굴이 갑자기 빨개졌고 당황하며 더듬거렸다.“그럴 리 없어요. 저는 절대 반칙 같은 거 안 해요.”이승우는 비웃으며 응수했다.“
반우희는 솔직하게 말했다.“친구 한 명이 돈이 조금 모자란다고 해서 승주랑 상의하고 건담 피규어를 팔았어요.”“의리 있네요.”이승우가 반우희를 칭찬하자 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그 친구가 누구예요?”연정훈이 갑자기 물었고 반우희는 물으면 뭐든 답하는 성격이라 솔직하게 말했다.“장서진이요.”양시연은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물었다.“그때 승주 생일 때 너희 집에 왔던 그 남자애 맞죠?”“네. 맞아요.”‘오호라.’양시연은 몰래 연정훈의 허리를 살짝 밀며 눈짓했다.‘정훈 씨, 엄청 예리하네요.’연정훈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고 사실 그는 반우희의 친구가 그 한 명뿐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날 만남에서 그의 관심은 온전히 양시연에게 쏠려 있었지만 장서진과 반우희의 관계가 특별하다는 건 눈치챌 수 있었다.이승우는 다시 활기를 되찾은 듯 일부러 말했다.“재산 다 털어서 도와줄 정도면 진짜 친한 친구인가 보네요.”반우희는 가슴을 툭 치며 대답했다.“저랑 장서진은 함께 자랐어요. 장서진의 일이 곧 제 일이죠. 돈이 뭐가 대수겠어요.”“말 잘하네요.”이승우가 박수를 치며 그녀를 응원하듯 말한 후 일부러 부승원을 힐끗 쳐다봤다.‘쯧쯧.’부승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카드를 밀며 조용히 말했다.“끝.”이승우는 눈썹을 치켜세웠고 부승희는 제일 먼저 패배를 인정하며 말했다.“돈 내야지.”조금 떨어진 곳에서 승주가 크게 반우희를 불렀고 반우희는 모두에게 간단히 인사를 한 후 그쪽으로 뛰어갔다.반우희가 떠나자마자 이승우는 부승원에게 묘한 웃음을 띠며 물었다.“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반우희 씨가 너를 피하는 것 같은데?”부승원은 속으로 불쾌함을 느꼈다. 반우희가 자신의 물건까지 팔아가며 돈을 빌려준 상대가 그 남자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자신도 힘든 처지면서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남의 구세주 노릇을 하는 거지?’이승우의 말을 곱씹으며 부승원은 미간을 찌푸렸다.‘반우희가 나를 피한다고?’곰곰
양시연이 의아해하며 물었다.“모연준 씨에게 문제가 있다면 부승원 씨가 이미 알아냈을 텐데 부승희 씨에게 말하지 않았을 리가 있어요?”연정훈은 그녀를 품에 안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 손으로 간식을 집어 그녀에게 건네주었고 걸음을 옮기며 그는 차분히 대답했다.“부승희 성격을 알잖아. 부승원이 설령 뭔가 알았다 해도 대놓고 말하진 않았을 거야. 암시 정도로 끝냈겠지. 부승희가 직접 고른 남자가 문제 있다고 하면 자존심이 상하니까.”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부승희 같은 자존심 강한 사람이면 배신도 못 참지만 자신의 선택이 남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건 더 못 견딜 것이다.그래도 부승원은 딱 하나뿐인 여동생이니 그녀가 상처받지 않도록 최대한 할 말을 전했을 것이다.그들은 방에서 나와 위층으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 도착한 무도회는 건물 꼭대기에 있었고 유럽풍의 고풍스러운 창문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주변 건물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무도회 중앙에는 춤을 추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양시연은 춤에 자신이 없었지만 연정훈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섰다.연정훈은 격식을 차린 춤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허리를 가볍게 감싼 채 부드러운 리듬에 맞춰 움직였고 양시연도 그의 목을 감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정훈 씨와 부승원 씨가 이렇게 오래 알고 지냈는데 당신 생각엔 부승원 씨가 우희 씨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연정훈은 주변 사람들에게 신경 쓰기 싫다는 듯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맞대며 대답했다.“부승원을 누가 알겠어.”“...”“남의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들이 잘살든 못살든 우린 상관할 일이 아니잖아.”양시연은 그를 흘겨보며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당신과 형제 맺는 사람은 정말 불쌍하네요. 좋은 일은 안 하면서 불난 데 부채질이나 하고 말이에요.”‘장서진 얘기를 괜히 꺼내서 부 변호사를 속상하게 만들고.’연정훈은 당당히 말했다.“나는 부승원이 더 이상 속지 않도록 돕고 싶었어. 정말로.”“당신은 마
이승우와 모연준이 싸울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양시연과 연정훈 역시 그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무도회를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승주는 숨을 고르지도 못한 채 급히 말했다.“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제가 봤을 때는 이미 싸우고 있었어요. 근데 서로 말은 안 하고 싸우기만 하더라고요. 왜 싸우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어요.”승주의 말투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싸움이 고조되지 않은 채 욕설도 오가지 않은 것이 못내 답답한 듯했다.양시연과 연정훈은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재촉했다.“...”“다 왔어요. 바로 저 앞이에요.”승주는 다급하게 외쳤고 양시연은 연정훈의 팔을 끌며 더 빠르게 움직였다.방 입구 바로 앞의 넓은 홀에는 사람들이 빽빽하게 몰려 있었다. 대부분 싸움을 말리려는 사람들이었지만 상황은 여전히 어수선했다.반우희도 홀 한쪽에 있었는데 아마 부승희를 말리려다 부승원에게 밀려난 듯했다. 전체 상황을 한눈에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모연준은 몇몇 사람들에게 붙잡혀 있었고 이승우 또한 제지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승우의 이마에서 선명히 피가 흐르고 있었다.‘이렇게 심하게 싸운 건가?’양시연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로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이승우 머리 다친 건 부승희가 때린 거예요.”양시연은 더욱 놀랐다. 그녀는 연정훈을 밀어 싸움을 말리러 가라고 했지만 연정훈은 고개를 저으며 손짓으로 이승우의 반응을 보라고 했다.홀 중앙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승우는 천천히 손을 들어 이마의 상처를 만졌다. 손바닥에 묻은 피를 확인하더니 그의 얼굴은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이승우는 조용히 부승희를 응시했다.부승희는 모연준의 앞에 서 있었고 어찌할 바를 몰라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이승우가 조소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부승희 너 진짜 대단하다. 저놈 때문에 날 죽이려고 하는 거야?”이승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비웃듯 말했다.부승희
좋은 명절 설날 첫날 결국 분위기는 한바탕 소동으로 끝이 났다.이승우는 고집을 부리며 사람들 앞에서 부승희를 강제로 데려갔고 이를 지켜보던 양시연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연정훈에게 물었다.“이승우 씨가 정말 이상한 일을 저지르는 건 아니겠죠?”연정훈은 태연하게 대답했다.“그럴 리 없어.”“그럴 리 없다니요? 이승우 씨가 부승희 씨를 강제로 데려가는 걸 봤잖아요.”“아까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랬지. 이승우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부승희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하려고 하는 거야.”양시연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진짜야? 가짜야?’양시연은 턱을 괴고 옆에 앉아 눈을 감고 한가롭게 쉬고 있는 부승원을 힐끔 보았다. 연정훈의 말에 신뢰도가 살짝 올라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근데 이승우 씨는 어떻게 모연준 씨가 문제 있다는 걸 알았을까요?”연정훈은 마치 예상했다는 듯 자연스럽게 답했다.“뻔하잖아. 이승우는 부승희를 마음에 두고 있어서 모연준한테 문제가 없어도 억지로 문제를 만들어낼 놈이야. 게다가 모연준도 딱히 깨끗한 사람은 아니잖아.”양시연은 혀를 차며 말했다.“이 사건 정말 골치 아프네.”...남산 저택 아래의 가로수길에서 롤스로이스가 멈춰 서자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부승희는 곧장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고 이승우는 그녀를 따라갔다.이승우가 부승희의 팔을 붙잡자 그녀는 화를 참지 못하고 돌아서며 그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짝!’소리가 크게 울렸다.이승우는 이미 얼굴에 마른 핏자국과 치료되지 않은 이마의 상처로 섬뜩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방금 맞은 따귀로 인해 그의 잘생긴 얼굴은 더욱 참혹하게 보였다.부승희는 화가 풀리지 않은 듯 손을 뿌리치고 다시 그의 반대쪽 뺨을 내리쳤다.이승우는 도망치지 않고 그녀의 손길을 그대로 맞았고 부승희가 멈추자 그는 담담하게 물었다.“더 때릴 거야?”‘짝!’부승희는 다시 한 번 세게 이승우의 뺨을 내리쳤고 그 순간 온몸을 부르르 떨며 분노를 토해냈다.“여기
부승희는 점점 멀어져 갔지만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여보세요?”부승희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너 그 자식이랑 헤어질 거야?”부승희는 당황해서 발신자를 보니 이승우였다.‘헐. 이 멍청이.’그녀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몇 걸음 더 걷자 휴대폰이 다시 울렸지만 이번엔 받지 않았다.휴대폰이 잠잠해졌고 그녀가 십자로 근처에 다다랐을 때 뒤를 돌아보니 이승우의 모습은 이미 희미해져 있었다.얼핏 보니 이 재수 없는 놈이 일어나긴 했지만 차 뒷부분에 기대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죽으려고 그러나? 피가 마르기를 기다리는 거야?’부승희는 코웃음을 치며 무시하고 돌아섰고 입구를 지나 몇 걸음 걷자마자 또 전화가 울렸다.부승희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그래도 친구 사이인데 내가 죽는 걸 지켜보기만 할 거야?”“네가 죽든 말든 난 이미 너 안 보이는데 죽는 거 지켜볼 일이 없어.”부승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좋아. 부승희. 네가 이겼어.”이승우는 말을 끝내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부승희는 전화를 내려다보며 한참 미간을 찌푸렸다.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몇 걸음 물러나 그가 또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보기로 했다.바닥에는 한 구의 시체가 있었고 이승우는 바닥에 누워 있었다. 부승희의 마음이 순간 철렁했지만 곧 깨달았다.‘하. 죽은 척하는 거지?’부승희는 이승우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이승우는 받지 않았고 그가 이미 기절한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그 순간 부승희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고 가슴 깊은 곳에서 미칠 듯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오늘 이승우가 여기서 정말 죽게 되더라도 그것은 모두 그가 자초한 일이었고 자신에게서 돈을 뜯어낼 생각은 하지 말라고 속으로 생각했다.그러나 두 집안 간의 관계를 떠올리며 그녀는 결국 이희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고모, 안녕하세요.”“승희야, 무슨 일이야?”“이승우가 길가에서 기절해서 곧 죽어가고 있어요. 사람 보내서 데려가세요.
양지원은 양석진이 예전엔 어떤 사람이었는지 희미하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그가 살이 찐 건지 빠진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저릿함은 그가 분명히 살이 빠졌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했다.잠시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양석진과 그의 일행이 어느새 그녀 앞에 다다라 있었다.그녀는 손을 꽉 움켜쥔 채 순간 말을 잃었고 그의 뒤에 서 있는 예전에 본 적 있던 용 국장의 얼굴을 보고서야 겨우 정신을 가다듬었다.용 국장 역시 그리 나이가 많지 않았고 서른네다섯쯤 되어 보였고 또래들 사이에서는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었다.하지만 양석진을 마주하면 그는 어딘가 빛을 잃는 듯했다.그가 먼저 운명 같은 우연이라며 말을 꺼냈다. 대운산을 사용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정말로 이곳에서 회의가 잡혔고 그 책임자가 다름 아닌 양석진이었다.“양 대표님, 우연의 일치네요. 막 완공된 이 대회장의 첫 번째 사용자가 바로 당신 가족입니다.”양지원은 미소를 머금은 채 최대한 차분히 그를 바라보았다.‘오빠’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녀는 끝내 입을 다물고 대신 직함을 부르며 입을 열었다.“먼저 들어가서 쉬세요. 오늘은 더우니까요. 조금 후에 제가 임원분들을 모시고 천천히 둘러보시게 해드릴게요.”양석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더는 머무르지 않고 돌아섰다.“2시에 출발하죠.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좋아요.”양지원은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안은 채 돌아서 앞장섰다.그 일행은 의외로 조용히 정리되어 있었고 마치 더는 움직이거나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쉬었다.15분도 채 지나지 않아 홀은 금세 고요해졌다.양지원은 아래층에 홀로 앉아 차를 마셨지만 입안에는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두 사람은 서둘러 스쳐 지나갔고 양석진은 그녀에게 단 한 마디를 남겼다.비록 이제는 서로 마주하는 일이 드물었지만 그녀의 시간과 기억은 여전히 십 년 전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그가 모든 것을 그녀를 중심으로
[청년기]“내일 돌아오는 거예요?”대운산으로 향하던 길 양지원은 집에 있는 양혁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그녀는 감기에 걸린 지 이틀째였다. 아무것도 할 기운이 없었고 그나마 양혁수와 이야기하는 순간만이 마음을 조금 편하게 해주었다.“가능하면 돌아가려고 해.”몇몇 선생님들의 불만이 떠오르자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집에서는 좀 얌전히 지낼 수 없을까? 너 때문에 맨날 선생님 앞에서 얼굴을 못 들겠어.”한창 말썽꾸러기 시절을 지나 양혁수는 이제 누구에게도 귀여움을 받지 못하는 나이에 접어들었다.몇몇 선생님이 함께 교육을 맡으면 그는 종종 머리를 치켜들고 반항했다.“저 정도면 엄청 얌전한 편 아닌가요? 같이 농구도 하잖아요.”양지원은 눈동자를 굴리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무더운 여름날 예민한 성격의 선생님들이 누가 그런 말썽꾸러기와 농구장에 나가고 싶겠는지 의문스러웠다.“알겠어. 어쨌든 조금만 얌전히 있어 줘.”“알겠어요. 엄마는 밖에서 몸조심하고 집에 오시면 제가 생일 챙겨드릴게요.”양지원은 말끝에서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세상 어딘가에서 여전히 자신을 걱정해 주는 이 작은 녀석이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통화가 끝나자 차의 속도도 서서히 줄어들었고 비서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양 대표님, 먼저 접대소에서 잠시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용 국장 쪽 점검팀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양지원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대운산 관광 프로젝트는 오래전에 시작되었지만 그녀는 그동안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위쪽에서 이 지역을 외교 관련 주요 회의 장소로 활용하고 싶다는 연락이 들어왔다. 그건 분명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행궁’을 조성하려면 결국 관계자들의 사전 점검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양지원은 직접 사람들을 이끌고 일주일 전 이곳에 도착해 현장을 둘러보며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하나 점검했다.최근 날씨가 너무 더워서 에어컨이 있는 곳과 뜨거운 태양 아래를 오가다 보니 체력이 많이 지쳐갔다.비서는 그녀의 얼굴 색
양지원은 화려한 의상에 휩싸인 채 기분이 한껏 들떠 있었다.그녀는 오빠의 팔에 살며시 팔짱을 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우리 오빠는 당연히 멋져요. 키도 크고 잘생기기까지 했는걸요.”진병수는 이마를 짚은 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양석진은 길을 걸으며 양지원에게 사진을 찍지 말라고 했지만 현장에 도착하자 그녀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결국 두 세트를 함께 찍기로 했다.예복을 입고 양지원과 함께 거울 앞에 서자 주위에서 감탄의 말들이 흘러나왔다.그는 마음속에서 불안이 스멀거리자 양창수의 애매한 미소를 피하려 애써 시선을 돌렸다.결혼사진을 찍는 자리였지만 양지원에게는 가족사진을 남기는 느낌에 더 가까웠다. 그녀는 예쁜 옷을 입었으니 기념으로 사진을 남기고 싶었고 중간에 진병수에게도 함께 찍자며 부탁했다.“자, 신부가 신랑에게 키스해 주면 좋겠네요.”사진사가 말하자 양석진의 눈빛이 흔들렸고 양지원은 황당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저기요. 이분은 제 오빠예요.”사진사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아. 깜빡했네요.”양창수가 장난스럽게 끼어들었다.“키스하는 게 뭐 어때? 얼굴에 하는 거면 괜찮아.”진병수도 거들었다.“나는 괜찮은 것 같은데.”“안 돼. 그건 너무 이상해.”양지원이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손명우가 조용히 제안했다.“카메라 각도를 조절해서 찍으면 돼.”양지원과 양석진은 동시에 외쳤다.“안돼.”순간 현장은 조용해졌다.“...”양지원은 웃으며 옆에 앉은 오빠를 바라보았다.“오빠, 우리 둘 진짜 잘 맞는 것 같아요.”그녀는 그의 팔을 감싸며 바르게 자세를 고쳤다.“오빠, 우리 사진 한 장 찍어요. 처음 오빠를 만났을 때도 가족사진 찍느라 소파에 나란히 앉았잖아요.”양석진은 잠시 시선을 피했다가 감정을 억누르며 부드럽게 말했다.“맞아. 그렇게 하는 게 제일 좋지.”두 남매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고 찰칵하는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그 순간이 고정되었다.수많은 사진 중 그 사진은 양지원이 가장 아끼는 사진이 되었
배가 콕콕 쑤시는 걸 제외하면 양지원은 꽤 신나게 놀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미소가 가득했다.위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양석진이 양창수를 뒤뜰로 불렀고 늦여름이라 뒤뜰에는 매미 소리가 귀를 울렸다. 양창수는 계단에 뚝 멈춰 섰다가 올 것이 왔음을 직감했다.뒤뜰에서 양석진이 말했다.“지원이 이제 어리지 않으니 지원이 앞에서 아무 말이나 쉽게 내뱉지 말았으면 해.”“내가 뭘 또 아무 말이나 했다고 그래요?”양석진은 시시콜콜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너 자꾸 까불면 바로 입대시켜 버린다?”양창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마음대로 하세요.”양창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며 위층을 슬쩍 보다가 양석진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내가 헛소리했다 치죠.”그리고 몸을 휙 돌려 자리를 떠났다.양석진은 뒤뜰에 홀로 남아 사라지는 양창수의 뒷모습을 지켜봤다.의미심장한 양창수의 시선은 마치 오래된 전등처럼 깜빡깜빡하며 양석진의 마음을 괴롭혔다.양석진은 입술을 꾹 다물고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러다가 위층에서 양지원이 저를 부르자 천천히 위층으로 올라갔다.양석진은 그날 밤 또 불면증에 시달렸다. 하룻밤 내내 뜬눈으로 지새우는 건 양석진에게 있어 흔한 일이 되었다.어느 날부터인지, 양석진은 감히 누구에게도 고백하지 못할 감정이 생겼고 아무리 억눌러도 아무도 없는 새벽이 되면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양석진도 이게 무슨 감정인지, 본인이 뭘 하고 싶은 건지 잘 몰랐다.그저 양지원만 떠오를 뿐이었다.어쩌면 양지원도 나이가 좀 더 들고, 각자 연인이 생기면 이런 감정이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했다.그리고 그러한 가능성이 현실이 되기를 양석진은 늘 기도했고 한편으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날 뒤로, 양석진은 며칠 동안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양지원의 걱정을 사지 않기 위해 최대한 집을 비우는 것을 택했다.그 시간이 점차 길어지고 더 이상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양석진은 바로 진병수의 연락을
양석진은 아무 내색하지 않고 양지원을 이끌어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누가 너 괴롭혔어?”“아니요!”배는 자꾸 쿡쿡 쑤셔오고 멀리서 진병수가 모르는 여자를 껴안고 있는 걸 보면 양석진도 본인이 없는 곳에 저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배가 아팠다.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아빠도 늘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양지원은 저런 행동에 큰 반감을 느꼈고 양석진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면 화가 났다.그런 생각을 하는데 양석진이 옆으로 다가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혹시 생리 시작한 거야?”“...”양지원이 아무 대답이 없자 양석진은 바로 눈치를 챘다.“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그리고 룸을 나선 양석진은 따뜻한 꿀물을 한 잔 가지고 돌아왔다.마침 두 사람을 지나치던 진병수는 꿀물과 화가 잔뜩 난 ‘공주님’을 번갈아 보며 혀를 쯧쯧 찼다.‘이게 동생이야? 딸이야?’따뜻한 꿀물을 마시자 몸이 녹아내렸고 양지원은 소파에 푹 기대앉았다.그리고 양석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아까 그 여자 누구예요?”양석진은 멈칫하다가 바로 상황 파악을 마쳤다.“연예인인데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사정이 딱해 보여서 병수더러 도와주라고 했었어.”양지원은 바로 시선을 흘렸다.“오빠는 다른 사람한테도 다 이렇게 친절해요?”“그 사람 연예인이 된 이유가 어머니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어머니를 결국 지키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양지원은 침묵했다.‘사정이 딱하긴 하네.’“그래도 오빠는 조심해야 해요. 아빠가 오빠를 정치인으로 키우려고 하는데 병수 오빠처럼 헤프게 행동하면 안 돼요.”양석진은 자신에게 훈수를 드는 양지원을 보며 며칠 전 양지원이 벌인 일을 떠올렸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알겠어.”구석 자리에서 양석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양지원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래서 양석진에게 청아에 대한 얘기를 더 들려달라고 했다.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양창수가 옆자리에 와 있었다.양지원은 양창수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손명우는 안경을 고쳐 쓰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날 그냥 보러 온 건 아니고, 드레스샵 깨부순 것 때문이지?”양지원은 조금 계면쩍은 기분이 들어 목을 가다듬었다.진병수는 장난기가 많았고 술잔을 들고 옆으로 앉으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뭐야? 우리 지원이가 언제부터 드레스에 관심을 가졌지? 혹시 연애라도 하는 거야?”소파에 앉아 있던 양석진은 제게 걸어오려는 여자를 눈빛으로 제압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양지원은 그걸 발견하고 득의양양해서 턱을 치켜들었다.‘역시 우리 오빠가 제일 멋있어.’“내가 왜 연애해요?”양지원은 다시 양석진의 옆자리로 앉으며 말을 이었다.“드레스 입는 사람은 꼭 연애하고 결혼할 사람이어야 하는 거예요? 드레스가 예쁘면 그냥 입을 수도 있는 거죠.”“그래도 굳이 창을 깨부술 필요는 없잖아.”진병수는 손명우를 가리키며 말했다.“명우한테 말만 하면 드레스는 얼마든지 입을 수 있어.”손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가게에 새로 턱시도 모델 많이 들어왔는데 관심 있으면 같이 사진도 찍어줄 수 있어.”양지원은 크게 관심이 생긴 건 아니었으나 손명우를 거절하기 애매했다.그때, 양석진이 디저트를 양지원의 앞으로 당겨주며 말했다.“아직 나이도 어린 게 무슨 웨딩드레스 사진을 찍는다고.”“오빠, 방금 너무 촌스러운 거 알아요?”양지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옆 사람들한테 말했다.“내 나이가 어려요? 진씨 고모는 내 나이 때 벌써 결혼 1주년이었어요.”“그건 예전 얘기고.”한강시 쪽은 말이 달랐지만 화서시는 한 10년 전만 해도 다들 결혼을 아주 어린 나이에 했었다.“그냥 모델이랑 같이 사진 찍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잖아.”진병수의 말에 양지원은 양석진의 표정을 살폈고 고민하다가 손을 저었다.“어휴, 내가 무슨 모델이랑 사진을 찍어요. 됐어요.”그렇게 사진 촬영은 일단락이 되었다.양지원이 들어온 뒤로 룸 안의 사람들은 행동을 조심하기 시작했다.양석진은 동생 양지원을 끔찍하게 챙겼고 진병수와 손명우는 크게
오토바이를 타고, 쓰레기통 따위로 창을 깨부수는 건 가히 그해의 유행이라 할 수 있었다.양지원은 그런 반항적인 일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기분이 저기압이라 분출한 곳이 필요했다.양석진이 옆에 있었다면 얼리고 달랬을 테지만 양창수는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했을 것이다.양홍두가 자리를 비우자 두 사람은 입에 모터가 달렸다.“형,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드레스샵은 손명우네 가게니 아무 문제 없어요.”양지원은 팔짱을 척 끼고 양석진의 앞으로 걸어갔다.“그냥 드레스뿐인데 아빠가 괜히 오바하시는 거예요. 내가 전에 그 불여우한테 전화했다고 지금 아니꼽게 보시는 거라고요.”양석진이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향해 말했다.“말 가려서 해.”양지원은 여전히 불만이라는 듯 입을 삐죽였다.‘계속하면 내가 손해니까 참아야지 뭐.’그리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오빠한테 굳이 이런 일로 마음 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양지원은 어린 시절처럼 양석진에게 딱 붙어 말했다.“참, 내 친구가 오빠한테 편지도 쓰고 선물도 챙겨줬어요.”양석진은 익숙하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난 그런 쪽으로 관심 없으니까 친구한테 다시 그런 걸 보내지 말라고 해. 난 공부에만 집중하고 싶으니까.”평소의 양지원은 양석진이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아주 흡족한 대답이었다.‘그래, 이게 맞아. 감히 누가 우리 오빠 옆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겠어?’‘꿈 깨라고!’양지원은 기분이 퍽 좋아졌고 제 친구들한테 전화를 돌려 오빠의 말을 전했다.다른 사람은 그냥 알겠다고 넘어갔지만 친구 길예은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너희 오빠 정말 아무한테도 관심이 없다고? 네가 애초에 편지를 건네지 않은 건 아니고?”“야, 길예은,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저번에 너한테 석진 오빠 선물 부탁했더니 그대로 다시 돌려줬잖아. 너희 오빠는 무슨 눈이 그렇게 높아? 정말 우리 중에서 한 명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길예은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작가의 말:아래 내용은 네 시기로 나뉘어 진행됩니다.소년 — 짝사랑이라는 이름의 시작.청년 — 서른 번째 생일, 그리고 아련한 재회.중년 — 오랜 시간 끝에 처음으로 엮인 둘의 이야기.결혼 후 — 이제는 함께 걷는 달콤한 나날들.각 시기를 함께하며, 두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깊어지는지 지켜봐 주세요.--------[소년기]양석진과 양지원이 혼인 신고서를 제출한 당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사무실부터 관저까지 하루 종일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았다.양석진에게 결혼 축하 인사를 건넨 첫 번째 사람이 드물게 보인다는 양석진의 미소를 목격했다는 소문이 전해진 뒤로, 다들 기회를 찾아 양석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그 미소를 직접 확인하려 했다.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고, 나이가 지긋한 기사가 관저로 바라대 주다가 낮에 들었던 소문을 듣고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의원님, 결혼 축하합니다. 내일에도 같은 시간으로 마중 오면 될까요?”양석진은 꽉 채운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며 미소를 지은 채 차에서 내렸다.“내일은 휴가입니다.”홀로 차에 남겨진 기사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예쁜 노을 아래, 양석진이 정원 안으로 걸어가다가 원피스를 입은 양지원이 얇은 외투 하나 걸치고 무언가 휘젓고 있는 게 보였다.그러자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른기침을 몇 번 했다고 양지원이 배즙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그런데 뭘 또 정원에서, 그것도 이렇게 큰 가마에 만들고 있는 거야?’양석진이 양지원을 부르려는 찰나, 우지끈하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양지원이 너무 힘을 주어 젓다가 나무 주걱이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양석진은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양지원이 이어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 지켜봤다.양지원은 외투를 다시 고쳐 입으며 주변을 살폈고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걸 확인하고는 위층을 향해 외쳤다.“창수 씨! 왜 부러진 나무 주걱을 주신 거예요!”“...”이어 2층 창문이 열리고 양창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양지원의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