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열여섯 살. 나는 첫사랑 오빠가 신부가 되기를 기도했다. 그게 그의 행복이라고 믿었으니까. 그 후로 10년. 나는 매년 성당 주보를 뒤졌다. 혹시 사제 서품 기사가 실렸을까 봐. 혹시 그가 있는 성당을 알 수 있을까 봐. 재회 후 그는 수의사가 되어있었다. "결혼하자, 윤서야." 말보다 행동으로. 한결같은 다정함으로. 오랜 시간 단 한 사람만을 바라본 순정남의 구원 로맨스. 🤍 「나의 첫사랑; 진심으로 행복하길」 📖 월 · 수 · 금 주 3회 연재
View More“엄청 작았는데 고집은 또 얼마나 센지. 병원 오는 것도 어릴 때부터 하나도 안 무서워했고.” 윤서는 슈슈의 귀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대학교 다닐 때도 맨날 작업실 데리고 갔어. 교수님 몰래 품에 안고 과제한 적도 있고….” 학교 앞에 자주 가던 김밥집 이야기. 비 오는 날 슈슈 안고 버스 놓쳤던 이야기. 혼자 자취방에서 울다가 슈슈 끌어안고 잠들었던 이야기. 민준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조용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예전에 길 가다가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린 적 있었거든.” 윤서가 슈슈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대로 주저앉았는데… 슈슈가 안 도망가고 내 옆에 계속 있어 줬어.” 잠시 웅크린 슈슈를 내려다보던 윤서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내가 다시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 줬어.” 윤서는 잠시 말을 멈추고 웅크린 슈슈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처음 알았어. 옆에서 기다려주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처치실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어느새 멈춰 있던 민준의 손끝이 아주 느리게 윤서 손등 위를 움켜쥐었다. 그의 체온이 아주 조금 돌아온 것 같았다. "신학교 옆에 가톨릭교리신학원 있잖아. 일반 신자들도 교리 공부하러 다니는 곳.”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잠깐 사무보조 했었는데, 출근할 때마다 오빠 마주칠까 봐 엄청 긴장했어. 근데 사실은… 조금 기대했던 것 같아.” 윤서는 웅크린 슈슈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슈슈가 있어서 다행이야.” 슈슈가 아니었다면, 아마 이 병원 앞까지 와서도 끝내 들어오지 못했을 거다. 그가 힘들어하는 순간에도, 아무것도 모른 채 지나쳤겠지. 민준은 그저 멍하니 도시락을 바라보다가 굳어 있던 손을 움직였다. 윤서가 밀어두었던 수저를 집어 든 순간이었다. 한 숟갈. 식어가는 국물이 목 안으로 넘어갔다. 한 숟갈. 민준은 이렇게 따뜻함을 느끼고 있는 순간조차
오후 6시. 윤서는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오늘 집에 늦게 갈 것 같아..병원에 일이 있어서...슈슈 하원 할 수 있어?]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슈슈 등원과 하원은 자신이 하겠다며 약속했던 사람이었다. 윤서는 괜히 이상한 기분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결국 한 시간 뒤, 하원한 슈슈를 유모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안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로비에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오빠…?” 윤서는 천천히 안쪽 복도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복도 끝. 후텁지근한 여름 열기가 미처 닿지 않은 복도 구석에 민준이 수술복 차림 그대로 주저앉아 있었다. 에어컨 바람도 없는 구석에서, 고개를 숙인 채 멍하니 닫힌 문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윤서가 알던 다정한 그가 아니었다. 윤서의 발걸음이 천천히 멈췄다. 그 순간 유모차 안의 슈슈가 눅눅한 공기 사이로 민준의 냄새를 맡았는지, 작게 낑낑거리며 꼬리를 흔들었다. 그 소리에 민준이 고개를 들었다. 그와 윤서가 눈이 마주친 순간, 하루 종일 초연한 척 버티고 있던 그의 얼굴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윤서야...." 그의 목소리가 툭, 끊어지듯 새어 나왔다. “내가…지키지 못했어…내가…괜찮다고 했었는데…" 민준의 넋이 나간 눈빛을 마주한 순간 윤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겨우 숨만 쉬고 있는 사람 같았지만,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대신 천천히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아 차가운 손끝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오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시선만 아래로 떨구고 있었다. 윤서는 눈물을 꾹 삼켰다. 지금 여기서 자신까지 무너지면 안 될 것 같았다. “오빠가 그랬잖아. 내가 곁에 있으면…길을 잃지 않는다고.” 윤서가 민준의 손등 위에 제 이마를 천천히 기댔다. “…그러니까 어두운 곳에서 혼자 길 헤매지 마. 내가 옆에 있을게.” 윤서는 한동안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민준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동가방을 내려놓자, 슈슈는 안에서 잔뜩 들뜬 얼굴로 꼬리를 흔들었다. 민준은 그런 슈슈를 내려다보다가 작게 웃었다. 방금 전 현관 앞에서 졸린 얼굴로 손을 흔들어주던 윤서가 아직도 눈앞에 선명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지하주차장의 서늘한 공기가 스쳐 지나갔다. 민준은 조심스럽게 이동가방을 조수석에 올려둔 뒤 안전벨트를 고정해주었다. “슈슈야, 이따가 아빠가 데리러 갈게.” 슈슈는 알아듣기라도 한 듯 작은 소리를 내며 꼬리를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본 민준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월요일 아침의 분주한 도로 위였지만, 이상하게도 오늘만큼은 마음이 조급하지 않았다. 신호에 걸려 멈춰선 순간, 민준은 다시 한번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윤서에게서 도착한 짧은 메시지. [오늘도 힘내] 민준은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슈슈를 유치원에 내려준 뒤 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민준의 입가에는 옅은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병원에 도착한 민준은 평소보다 한결 느슨한 얼굴로 직원들의 인사를 받아주고, 부원장의 농담에도 드물게 대꾸해주는 모습을 보였다. 진료실에 들어오는 보호자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괜찮아. 아프지 않게 해줄게.” 긴장한 강아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는 손끝이 평소보다도 다정했다. 간호사 정지원은 그런 민준을 멀리서 조용히 바라보았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얼굴. 무의식적으로 자꾸 휴대폰을 확인하는 시선에 정지원은 입술 안쪽을 조용히 깨물었다. 지난 토요일, 그 견고하던 강민준이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원의 신경은 뾰족하게 곤두서 있었다. 퇴근길 수술모를 벗을 때 흩날리던 낯선 여자의 샴푸 향기까지. 그 모든 상황이 월요일 아침이 되자 확신으로 변해 있었다. ‘누구야.’ 지원은 입술 안쪽을 피가 날 것처럼 깨물었다. 자신이 지난 몇 년간 지켜왔던 그의 옆자리를 보이지 않는 정체불명의 여자에게 빼앗겼다.
이른 월요일 아침이었다. 민준이 눈을 떠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넓은 침대 한가운데 윤서가 이불 속에 파묻힌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자신에게 맞춰 주문 제작한 침대 위에서 윤서는 너무 작아 보였다. 낯선 침대가 아직 완전히 익숙하지 않은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이불 끝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와 목덜미에는 어젯밤을 떠올리게 하는 자신이 남긴 붉은 흔적들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는 잠시 말없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너무 괴롭혔나.. 하지만 어젯밤 제 팔을 붙든 채 울먹이던 윤서가 눈에 아른거렸다. 민준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결국 자신은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여전히 그녀는 이불 끝을 꼭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윤서의 좁은 침대에 몸을 구겨 넣고 밤을 보냈다. 그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 작은 침대는 끝내 익숙해지지 않았다. 같은 침대에 누워 하루를 함께 보내고 있는데도, 마치 아직도 자신은 윤서의 삶 바깥에 서 있는 사람 같았다. 윤서가 마음만 먹고 10년 전처럼 다시 사라져버린다면, 자신은 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될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윤서와 슈슈는 자신의 영역에 들어와 있었다. 다시는 윤서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걸 바보처럼 바라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이제 자신의 집은 윤서와 슈슈가 살아갈 곳이기도 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으웅…… 오빠…….” 잠결에 흘러나온 목소리에 민준은 그녀의 몸을 달래듯 토닥였다. “피곤하지. 어젯밤에 내가 너무 심했어…좀 더 자.” 그는 윤서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춘 뒤 조용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뒤쪽에서 이불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민준이 돌아보자, 윤서가 반쯤 감긴 눈으로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윤서야." “오빠 출근하는 거 보고 싶어…….” 잠이 덜 깬 목소리가 웅얼대듯 흘
"……그렇지만, 완전히 놓지는 못했어."윤서가 울음을 삼키며 희미하게 웃었다."새신부님 서품식 시즌만 되면 마음대로 안 되더라.혹시 올해는 있을까 싶어서..처음엔 서울대교구만 찾아봤어."그녀가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어나갔다."근데 없더라..그래서 춘천도 보고, 대전도 보고, 부산도 보고...전부 다 찾아봤어. 그래도 오빠 이름이 없어서...해외에 있는 줄 알았어.""그걸 계속 다 찾았었다고?"윤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민준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매년.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윤서
여름밤의 눅눅한 공기가 거실을 메우고 있었다. 금요일 밤이라 마감이 끝난 직후여서 홀가분해야 했지만 윤서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슈슈가 밥을 먹지 않아 애타는 마음으로 '민준 오빠'의 이름을 눌러 전화를 걸었다. 늦은 시간이라 망설였던 마음이 무색하게도, 그는 단 1초의 지체 없이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끊은 뒤, 정말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다. "거봐, 윤서야. 오빠가 오니까 먹잖아. 슈슈도 오빠 기다린 모양이야." 민준이 거실 바닥에 구부려 앉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슈슈를 달래자, 신기하게도 슈슈는
윤서는 제 숨통을 막아설 듯 눈앞을 가득 채운 거대한 피지컬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10년이라는 세월은 정갈했던 신학생 오빠를 완벽한 체격을 가진 남자로 바꾸어 놓았다. 의사 가운 너머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음영과 위압감에 윤서의 온몸이 잘게 떨려왔다. “오, 오빠가…… 왜 여기에…….” 10년을 참았는데, 여기서 서두르다 첫사랑을 다시 놓칠 수는 없었다. 민준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윤서에게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내어주었다. 그리고 서슬 퍼렇게 뒤집혔던 눈동자와 날 선 소유욕을 완벽하게 가면 뒤로 갈무리했
그 세례명을 제 입술로 직접 베어 문 순간, 민준의 뇌리 너머로 12년 전 그토록 찬란하고 지독했던 부활 대축일의 미사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날의 본당은 죽음을 이긴 부활의 기쁨을 맞아 제대 위를 장식한 백합의 진한 향기가 향연의 연기와 섞여 성전 전체를 감싸던 일요일 낮 중고등부 미사. 당시 신부님을 보필하던 열여섯의 복사단장 강민준은 티 없이 빳빳하게 풀이 죽은 하얀 복사 옷을 입고 있었다. 매주 교구 성소 모임—본당 사람들이 친근하게 '예비 신부반'이라 부르던 그곳에 나가며 장래 신학생 후보로 본당의 기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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