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열두 시 반.양혁수는 침대 왼쪽 끝에 누웠고 오른쪽엔 변여름이 누워 있었다.아까 변여름은 대화를 하자며 양혁수를 기어코 침대에 데리고 왔다.평소에 말수가 적은 변여름이었지만 대화를 이어가야 할 때에는 그 누구보다도 수다스러울 수 있었다.지금도 변여름은 양혁수에게 최근에 봤던 아재 개그를 알려주고 있었다.“너 예능도 봐?”양혁수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일반적으로 제 나이 또래 여자아이들이라면 예능 많이 보잖아요.”또 자신을 일반적인 소녀로 묶으려 애쓰는 모양이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왜 굳이 이런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변여름의 대화에 꽤 흥미가 생겼기에 잠자코 듣고 있었다.“그래. 무슨 아재 개그인데? 너무 썰렁하면 안 들어줄 거야.”변여름이 목을 가다듬더니 말을 이었다.“딸기가 회사에 잘리면 뭐가 되는지 알아요?”양혁수는 고민하다가 말했다.“백수.”“아니요. 딸기시럽이요.”양혁수는 한참 고민하다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왜?”변여름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딸기가 실업했으니까 딸기시럽이죠!”“...”양혁수는 썰렁함에 두 눈을 질끈 감았지만, 이상하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 어떤 개그보다도 자신을 웃기려 애쓰는 변여름이 가장 재밌게 느껴졌다.“나 다른 아재 개그도 알아요.”변여름은 은근슬쩍 양혁수에게 다가갔고 거의 딱 붙기 직전이었다.양혁수는 재빨리 이를 발견하며 변여름을 다시 원위치로 밀었다.“자꾸 선 넘으면 네 방으로 확 던져 버리는 수가 있어.”양혁수가 변여름을 향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대화하자며 데려와 놓고 자꾸 수작 피울래?”변여름은 얼굴 하나 변하지 않고 이불을 고쳐 덮었다.“너무 멀어서 오빠한테 잘 들리지 않을까 봐 그랬죠.”“나 겨우 서른이야. 이 정도 거리에서 듣지 못할 정도 아니거든?”“오빠 귀가 먹는다고 해도 난 오빠 옆에 있을 거예요.”변여름은 시도 때도 없이 플러팅을 했고 양혁수는 거의 무감각해졌다.“그만해.”양혁수는 이불을 쭉 당겨 변여름의 얼굴을 가렸다.
얼떨결에 기차에 탄 양혁수는 왠지 뾰로통했다.이건 양혁수의 추억 여행이었으나 변여름이 양혁수보다도 에든베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기분이 들었으며 본인과 양시연 사이의 이야기도 속속히 꿰고 있는 것 같았다.역에 도착하자 마침 눈이 내리고 있었다.양혁수는 추위에 절로 몸이 움츠러지고 옷매무새를 다시 여몄다.그러나 변여름은 그 옆에서 한껏 과장하여 감탄하고 있었다.“여기 너무 예쁜데요?”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에든베타의 눈밭은 양혁수가 다녔던 여행지 중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었다.그런데 변여름이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그래서 오빠가 이곳에서 시연 언니를 좋아하게 됐나 봐요.”“나였어도 시연 언니한테 반했겠다.”“...”방금까지 센치하던 기분이 또 와장창 깨져버렸다.오늘 일정에도 마중을 온 사람이 있었고 변여름은 아예 지낼 곳을 양혁수와 양시연이 함께 지냈던 마을로 골랐다.“거긴 여행객이 많아서 남은 방이 많지 않을 거야.”양혁수가 넌지시 말하자 변여름은 패드로 남은 방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네요. 남은 방이 없긴 하지만 오빠가 그곳을 많이 그리워할 테니 기사더러 빙 둘러대려고 하려고요. 오빠 추억 여행 좀 하게요.”“...”양혁수가 싸늘한 표정으로 변여름을 바라봤다. 이젠 변여름이 일부러 이러는 것이라는 게 확신이 들었다.용산 거리를 지나쳐 눈이 뒤덮인 에든베타 건축물을 보고 있자니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이 분위기에 알맞은 노래를 틀어 양혁수가 한껏 추억에 잠길 수 있도록 했다.그러나 익숙한 풍경을 보며 양혁수가 든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아, 추워 죽겠네.’그때, 양혁수와 양시연이 함께 지냈던 집을 지나치게 되었고 주변엔 온통 눈이 쌓여 있었으며 여행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양혁수는 눈을 반짝이며 그 풍경을 눈에 담으려 애썼고 왠지 이 집이 몇 년 전보다 많이 낡았고 정원도 생각보다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기억 속의 집은 늘 해가 잘 들고 넓은 곳이었는데
여섯 시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양혁수가 집으로 돌아왔다.주방에 있던 변여름은 인기척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며 몰래 입꼬리를 올렸다.그래서 주방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양혁수를 불렀다.외투를 벗던 양혁수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다.이것도 변여름이 예상했던 시나리오이긴 했으나 이런 양혁수를 바라보는 건 너무 마음이 아팠다.“오빠, 빨리 와서 앉아요. 밥 다 됐어요.”양혁수는 알겠다고 대답하며 식탁 앞으로 걸어왔다.변여름은 부지런히 반찬 여섯 가지와 국 하나를 완성했다.“우리 두 사람뿐인데 이렇게 많이 할 필요없어.”“많지 않아요.”변여름이 양혁수의 밥 위로 반찬을 올려주며 말했다.“하루 종일 돌아다녔으니 기운이 빠졌을 거예요. 오빠는 양식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밖에서 뭘 사 먹지도 않았을 거잖아요.”그 말에 양혁수는 피식 웃음이 터졌다.“누가 그래? 내가 양식 별로 안 좋아한다고?”“오빠잖아요.”변여름이 수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전에 우리 오빠한테 여기 음식이 입에 맞지 않다고 엄청나게 투덜거렸으면서.”“뭐. 그렇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야.”양혁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갓 튀긴 돈가스를 한 점 입에 넣었다.집 안에는 향기로운 음식 향이 가득했고 두 사람의 도란도란 얘기 소리와 이따금 들리는 웃음소리가 집안을 따뜻하게 데웠다.양혁수는 배가 아주 고팠던 건지 밥을 평소보다도 많이 비웠다.낮에 밖에서 겪었던 쓸쓸함은 어느새 변여름의 온기에 녹아서 사라져 버렸다.샤워하고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변여름이 술잔을 세팅하고 있었다.“네가 산 거야?”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오후에 사람을 시켜서 가지고 오라고 했어요.”양혁수는 변여름이 만들어준 칵테일도 마셔봤기에 변여름의 솜씨를 인정했다.“네 마음대로 한잔 만들어줘.”변여름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로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양혁수는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앉아 화려한 손놀림의 변여름을 바라봤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오
콩깍지?양혁수의 추억 속 에든베타는 분명히 따듯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러나 오늘 밖을 돌아다니며 느낀 건 에든베타는 사실 흐린 날이 더 많다는 것이었다.술잔을 내려놓은 양혁수가 변여름에게 물었다.“빙 둘러 말하더니 지금 나한테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은 사실 내가 꾸며낸 허상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양혁수는 무표정이었고 기쁨도 슬픔도 읽히지 않았다.이에 변여름은 솔직하게 말했다.“추억은 아름다운 거죠. 근데 그게 왜 허상이겠어요?”“다른 사람 눈에 별로 일 순 있어도 오빠한테 아름다운 거면 아름다운 추억인 거예요.”양혁수는 말없이 변여름을 바라봤고 변여름은 더 차분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하지만 난 한 여자의 가장 예쁜 순간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마음속에 제일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 건 원치 않아요.”“내가 에든베타의 쓸쓸함을 봤다고 해서 과거의 그 사람이 별로가 되어버리는 건 아니야.”“당연하죠.”변여름이 미소를 지었다.“요즘 시연 언니 만나봤어요?”“뭐, 나이가 든 시연이가 과거와 달라졌을 것 같아?”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시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는 건 있어요. 시연 언니는 오빠와 4분의 1이 넘는 인생을 같이했고 오빠의 인생에서도 시연 언니는 이미 중요한 사람이 되었겠죠. 그러니 달라진 외모는 오빠한테 큰 타격이 없을 거예요.”양혁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다 마신 컵을 돌려줬다.“그럼, 네가 원하는 건 뭐야?”“오빠가 과거를 직시하는 거요.”변여름은 옆에 내려둔 인형을 안아 들고 양혁수를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시연 언니가 과거에 예뻤고 지금도 예쁘다고 하지만, 오빠는 아직도 시연 언니만 보면 마음이 불편하잖아요.”양혁수의 표정이 굳어갔다.“그게 왜 그렇겠어요.”양혁수가 대답이 없어도 변여름이 말을 이었다.“과거의 시연 언니가 50점이었다면 지금 더 완벽해진 시연 언니는 거의 80점에 달하겠죠. 하지만 오빠 마음속에 심어진 시연 언니는 추억 속에서 점점 미화가 되어 100점이 아니라 만
양혁수는 지금껏 변여름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던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변여름은 얼마든지 자신의 제가 했던 말을 뒤엎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그럼, 네 말대로면 시연이도 현실이 상상보다 더 좋은 사람일 수도 있잖아.”그러자 변여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오빠, 계속 그러면 나 정말 질투할지도 몰라요.”“술 마셔 자제력이 떨어진 오빠를 질투에 눈먼 내가 뭐 어떻게 하려면 어쩌려고 그래요?”“...”변여름의 말을 듣고 있자니 어느새 우울함이 반으로 줄었다.그리고 변여름이 뜨개질 거리를 찾아 다시 양혁수의 옆자리에 얌전히 앉았다.하얀 피부는 투명할 정도였고 가까운 거리에 양혁수는 변여름의 긴 속눈썹까지 보였다.“부모님이 연락이 온 거야?”양혁수의 질문에 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빨리 집으로 돌아오라 재촉하진 않으셔?”“아니요. 그것보다 오빠 어디까지 꼬셨는지 궁금해하시던데요.”양혁수는 머리가 지끈거렸고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가족들한테 날 좋아하는 사실은 언제 밝힌 거야?”“성인이 되는 날 에요.”그리고 변여름을 한 마디 덧붙였다.“오빠네 나라 법에 따른 성인이던 해에요.”“...”‘뜬금없는 곳에서 꼼꼼하긴.’“몇 해 동안 얼굴 한번 보여주지 않더니 그동안 부모님 사업 돕고 있었어?”변여름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5년 동안 아빠를 위해 일하면 앞으로 가문 사업에 손을 대지 않아도 된다고 약속을 받았거든요.”“그럼 넌 앞으로 뭘 하고 싶은데?”“의학이요.”변여름은 고민도 하지 않고 답했다.양혁수는 나쁘지 않은 계획이라 생각했다. 변여름처럼 똑똑한 사람이 의사가 된다면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그때, 변여름이 스웨터를 내려두고 말했다.“낮에 교수님이 연락을 하셔서 언제 한강시에 돌아올지 물었어요.”사실, 양혁수는 예전에 변여름한테 지도교수한테 연락하겠다고 겁을 줬지만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변여름이 그걸 은근히 떠보는 말투로 흘리자 양혁수는 못 들은 척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처음 하는 뽀뽀도 아니었고 양혁수도 이젠 깜짝 놀라지는 않았다. 단지 헛웃음을 내뱉고 시선으로 무언가의 경고를 날릴 뿐이었다.변여름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오빠, 정말 향기로운 냄새가 났단 말이에요.”“...”‘그게 중요해?’양혁수가 혼을 내려고 자세를 고쳐 앉자, 변여름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래요. 제가 정신이 나갔나 봐요. 변태라는 거 인정할게요.”그러자 양혁수는 화를 내기는커녕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댄 양혁수는 굳은 얼굴로 물었다.“꼬맹이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이야.”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글쎄요.”그리고 소파에 편히 기대앉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나도 오빠 앞에서만 이래요. 정말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오빠만 보면 달라붙고 싶은 걸 어떡해요.”“그러는 오빤, 내가 다가오면 어떤 기분이에요?”막아서는 사람이 없자 변여름은 점점 겁 없이 질문을 이어갔고 양혁수는 며칠 전 밤이 떠올라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별생각 없어.”“정말요?”“그래.”퉁명스러워 보이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피식 웃더니 제 스마트 워치를 벗어 양혁수의 손목에 채우려 했다.“뭐 하는 거야?”“뽀뽀 한 번만 더 하고 오빠 심박수 체크해보면 안 돼요?”양혁수는 바로 손을 빼냈으나 변여름도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체구로 보았을 때 변여름은 당연히 양혁수의 상대가 아니었고, 계속 매달리는 변여름에 양혁수는 양손을 꽉 잡아 포획해 버렸다.“자꾸 까불래?”손목이 잡혔지만, 변여름은 손가락을 살살 움직여 양혁수를 간지럽혔다.양혁수는 새우처럼 파닥거리기 시작했고 변여름은 웃음이 터졌다. 양혁수가 자신을 어떻게 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변여름은 점점 더 과하게 움직여 양혁수의 몸을 가로 탔다.참다못한 양혁수는 아예 변여름의 손을 잡아 벽으로 가두었다.“그만해.”양혁수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는데 간지러움에 숨이 찬 것도 있었지만 자꾸 기어오르는 변여름에 속수무책이라 그런 것도 있는 것
두 사람이 소파 위로 함께 쓰러지듯 누울 때도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양혁수의 무게가 실리자, 변여름은 작게 신음을 뱉었다.그 소리에 양혁수는 잠시 멈칫했고 변여름은 목을 꽉 껴안고 다시 키스를 이어갔다.양혁수는 키스 도중에 눈을 떴고 마침 눈을 깜빡거리는 변여름과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의 시선은 끈적하게 이어졌고 양혁수는 점점 변여름에게 이끌렸다.술을 마셨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그러니 지금 양혁수의 행동을 별달리 설명할 방법은 없었다. 어쩌면 너무 추운 에든베타에서 변여름의 품 안이 너무 따뜻해 떨어질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변여름을 품에 안고 있으면 양혁수는 마음이 가득 차는 기분이 들었다.양혁수는 잠시 이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변여름의 호흡에 맞췄다.사랑에 서툰 부분에 있어 두 사람은 닮은 점이 있었다.변여름은 용기와 재능이 있었지만, 그동안 양혁수가 협조하지 않은 탓에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그때 윗입술을 스치더니 입술 끝이 가볍게 빨렸다. 짜릿한 전율이 머리끝까지 번지자 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다리도 무의식적으로 들렸지만 양혁수의 다리에 눌려 다시 꼼짝 못 하고 그의 품 안에 갇혔다.그렇게 알 수 없는 열기가 어느새 온몸으로 번져갔다.변여름은 양혁수를 꼭 껴안고 싶다가도, 온몸이 힘이 빠져 그저 그의 품으로 가만히 안겨있을 수밖에 없었다.이어 양혁수가 몸을 낮추고, 변여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더 깊고 부드럽게 키스를 이어갔다.호흡마저 뺏겨버렸지만 변여름은 점점 긴장을 풀 수 있었고 무조건적으로 양혁수를 믿었다.서툴던 키스는 점점 익숙하고 완벽해졌다.양혁수는 처음으로 키스만으로도 이렇게 황홀한 기분이 들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그래서 자세를 바꿔 더 깊게 변여름에게 다가갔고 쿵쿵거리는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또다시 호흡을 맞췄다.처음엔 행동이 생각보다 앞섰다. 그러나 이젠 상황 판단이 되었어도 행동을 멈출 수가 없었다.양혁수는 그렇게 밀어내던 변여름에게 키스를 쏟아붓다
잠을 잘 때에는 변여름도 얌전한 편이었다. 양혁수에게 찰싹 들러붙긴 해도 기껏해야 팔이나 안고 잘 뿐이었다.가끔 양혁수가 밀어내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슬며시 팔베개할 때도 있었다.변여름은 양혁수에게서 향기로운 향이 난다고 했지만 양혁수는 변여름에게서 끈적한 허니 향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향기에 본인도 취해 버려 정신이 이상하게 된 것 같았다.낮에 하염없이 에든베타를 돌아다녔던 건 양시연에 대한 추억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다른 이유도 있었다.양혁수는 이렇게 외로울 때면 혼자 잠드는 게 너무 싫었고, 오늘 밤 변여름이 옆에 있어 너무 다행이라 느껴졌다.새벽에 잠시 잠에서 깼을 때 제 팔을 베고 자는 변여름이 보였고, 어깨가 너무 시큰거렸지만, 양혁수는 손목을 돌려 살짝 스트레칭만 할 뿐 팔을 빼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불을 당겨 변여름에게 잘 덮어줬다.그때, 창밖에서 무언가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에 변여름이 깜짝 놀라 깨버렸다.변여름은 무의식적으로 양혁수의 품을 파고들었고 양혁수는 자연스레 등을 토닥였다.“괜찮아. 그냥 바람일 뿐이야.”변여름은 용기를 내어 창밖을 바라봤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안심할 수 있었다.그러다가 눈을 비비며 이미 잠에서 깬 양혁수의 손을 잡고 말했다.“오빠 빨리 자요...”양혁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귓가에는 색색거리는 호흡 소리가 들려오고 창밖에는 거센 바람 소리에 이어 굵은 빗방울이 창가를 내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바람에 커튼이 흩날리고 나무 그림자까지 방안에 비춰오자 양혁수는 심기가 거슬렸다.그래서 침대 헤드등을 끄고 눈을 감았다.어둠 속에서 갑자기 양혁수는 음침한 무덤 앞에 섰다.짙은 안개에 얼굴을 가린 한 여자가 몇 번이고 양혁수의 이름을 불렀다.“혁수야, 혁수야!”“내가 네 엄마잖아. 혁수야!”피를 쏟으며 쓰러지던 그 모습과 똑같았다.양혁수는 온통 피로 뒤덮인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이게 원망인지 슬픔인지 공포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오빠?”“혁수 오빠!”그때, 변여름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