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혁수가 전화를 걸지 않았다면, 안시연은 양혁수를 거의 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딸은 어디 있어? 카메라 좀 돌려봐.”안시연은 침대에 누워 있다가 양혁수의 목소리를 듣고 잠시 멍해졌다.딸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 이불을 걷어내고 천천히 일어섰다.연정훈은 방에 없었지만, 아침 식사로 양주의 특산 요리를 가득 차려놓고 간 듯했다. “나비는 자고 있어요. 조금 있다가 영상으로 보여줄게요.”안시연이 대답했다. “연정훈이 내 애기들 학대하지 않았겠지?”연정훈의 이름을 듣자, 안시연의 마음이 다시 답답해졌다.“연정훈 얘기는 그만 해요. 누가 나비를 학대하겠어요? 기분 나쁘면 침부터 뱉는데.”안시연이 말했다.양혁수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 역시 내 딸이야.”안시연은 양혁수가 나비의 성격을 이미 잘 알고 있을 거라 짐작했다.양혁수는 답답했던 모양인지 다시 곧 놀러 올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미리 알렸다. “양혁수 씨, 그냥 쉬세요.”안시연이 다급히 말했다. “너희는 잘 놀면서 나보고 쉬라고?” “양주에는 딱히 재미있는 것도 없어요.”“재미없는데 왜 너희는 계속 양주에 있는 거야?”안시연이 대답했다. “저도 곧 돌아가려고요.” “너 경인시로 돌아간다고? 그럼 난 안 갈래.”안시연은 어이없었다.이 도련님은 정말 철부지 같다.양혁수가 다시 말했다.“양주에 특산품 좀 사다 줘.”안시연은 살짝 어이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양주랑 경인시가 겨우 두 시간 거리인데 무슨 특산품이 있겠어요?” “디저트.”“경인시에서도 충분히 먹을 수 있잖아요...” “특산품 안 사 오면 나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알 거다.”안시연은 솔직히 양혁수를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다른 일들로 마음이 복잡했던 안시연은 양혁수와 말다툼할 기분이 아니었고 나비와 연정훈을 생각하며 일단 부탁을 받아들였다.전화를 끊고 나서 안시연은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났다.아침 식사를 주문해 포장한 후, 특급 배송으로 양혁수에게
부승희는 이승우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안시연의 마음속에는 자연스럽게 이승우가 연정훈과 겹치며 한층 더 깊은 쓸쓸함이 밀려왔다. “승희 씨는 좋은 사람이니까, 분명 승우 씨보다 더 나은 사람을 만나게 될 거예요.”안시연은 부승희를 위로했다.그러나 부승희는 고개를 저었다.눈을 감고 과감한 디자인의 소파에 몸을 기대며 나지막이 말했다. “다 똑같아요.”안시연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든 남자를 한꺼번에 그렇게 치부하지 마세요.” “세상 모든 까마귀가 검은색인 건 사실이죠. 하얀 까마귀를 찾으러 다닐 만큼 여유도 없고요.”부승희는 차분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거죠. 어차피 손해 볼 것도 없고 얼마 안 있으면 유럽으로 떠날 거예요.” “유럽으로요?”“네, 석사 공부하러 가요.” “그러면 국내 사업은 어떻게 할 건데요?” 부승희는 웃으며 말했다.“이승우한테 맡겨둘 거예요. 내가 돌아올 때까지 꼼꼼하게 챙겨놓겠죠. 제가 남자친구를 데리고 오더라도 오빠와의 관계를 생각해서 한 푼도 빠지지 않게 돌려줄 거예요.”안시연은 할 말을 잃었다.부승희가 말을 이었다.“이승우가 정말로 나를 좋아한다면 저도 진심으로 대할 수 있어요. 하지만 만약 이승우가 저를 속이고 놀아난다면 굳이 엮일 필요 없죠. 세상에 이승우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승희 씨가 충분히 생각했으면 됐어요…”안시연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슬프게 들렸는지 부승희는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연정훈은 이승우랑 달라요.” “뭐가 다르죠?”부승희는 잠시 멈칫했다.부승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연정훈 역시 안시연을 진정한 아내로 맞이할 생각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말했잖아요. 적당한 시점에서 멈추고 너무 깊이 빠지지 말라고요.”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대답했다.“승희 씨 말대로 할게요. 정훈 씨 돈을 쓰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모든 호의를 즐기다가, 때가 되면 부자가 되어 떠날
부승희와 안시연이 이승우를 만났을 때, 옆에는 부승원만 있었다.“연정훈은 어디 있어?”부승희가 물었다.이승우는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경인시로 돌아갔어.”“뭐라고요?”안시연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부승원이 이승우를 한 번 바라보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연정훈의 아버지에께서 전화가 왔어. 연정훈은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부승희는 그 말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께서 전화하셨다면 분명 큰일이겠지. 연정훈도 안 갈 수는 없었을 거야.”부승희는 안시연을 위로했다.“아마도 너무 급해서 시연 씨에게 인사할 시간조차 없었을 거예요. 일이 끝나면 분명히 전화할걸요.”안시연은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왠지 안시연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안시연은 연정훈에게 두 번 메시지를 보냈지만,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도대체 얼마나 중요한 일이길래 메시지를 확인할 시간조차 없는지 안시연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긴장이 가시지 않은 안시연은 방으로 돌아가 두 마리 알파카를 데리고 경인시로 돌아갈 차를 부르기로 했다.그때 갑자기 방문이 두드려졌다.안시연이 문을 열어보니, 뜻밖에도 부승원이 서 있었다.“부 변호사님, 안녕하세요.”부승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시연의 옷차림을 보며 말했다. “경인시로 돌아가려는 거예요?”“네...”“짐은 싸지 마세요. 하루만 더 기다렸다가 저희와 같이 가죠.”“괜찮아요.”안시연은 예의 바르게 거절했다.부승원은 말했다.“굳이 사양하실 필요는 없어요. 연정훈이 떠나기 전에 저희에게 시연 씨를 잘 부탁해 달라고 하셨어요.”‘정말 그런 걸까?’그렇다면 왜 연정훈은 메시지 하나 남기지 않았는지 궁금해졌다.안시연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안시연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부승원은 이미 두 마리 알파카를 보며 말했다. “시연 씨, 혼자서 두 마리 양을 데리고 가는 건 차를 빌린다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에요.”부승원의 말이 사실임을 안시연은 인정했다.안시연은 침묵했다.
안시연은 찻집을 떠나면서 부승희에게만 메시지를 보냈다.부승희는 안시연을 붙잡으려 따라나섰지만, 안시연은 거절했다.이승우는 대나무집 위에서 망원경으로 상황을 살펴보며 혀를 차며 말했다.“아가씨, 정말 고집이 세네. 양 두 마리 데리고 길을 나서는 것이 마치 아이들 데리고 가출하는 것 같잖아.”부승원은 속으로 생각했다.‘아마 멀지 않아 아이를 안고 뛰게 될 것 같은데 지금 연정훈이 하는 짓을 보면 아무리 마음을 다 준 여자라도 떠나게 되었어.’안시연이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이 지나고 있었다.안시연은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양 두 마리도 힘들 것 같았다. 영준이는 아직 한 달밖에 되지 않았고, 나비는 술이 깬 지 얼마 되지 않았다.연정훈이 없어도 괜찮지만, 이 사랑스러운 양 두 마리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안시연은 돌아갈 시간을 조금 미루기로 했다.하지만 침실로 들어가 핸드백 안에서 USB를 찾지 못했다.‘이게 무슨 일이야?’안시연은 방을 몇 번이나 뒤졌지만, 허탕이었다. 결국 연회를 주최한 호텔 프런트에 전화를 걸었다.“혹시 착오가 있었던 건가요? 말씀하신 USB를 찾지 못했어요.”프런트 직원은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말했다.“아마 저희 쪽에서 실수한 것 같아요...”안시연은 어이없었다.전화를 끊고 안시연은 짐을 싸면서 연정훈의 물건을 모두 정리했다. 이렇게 해야 마음이 조금 가벼워질 것 같았다.안시연은 오후에 잠깐 눈을 붙였다.일어나 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어 있었다.“우리 이제 집에 가자.”안시연은 나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나비는 머리로 안시연의 배를 살짝 밀었다.“착한 아기.”안시연의 마음이 따뜻해졌다.안시연은 룸서비스를 부르려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양혁수의 전화가 걸려 왔다.“여보세요?”“어디야?”안시연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왜요?”“나 양주에 도착했어. 너 보러 갈게.”안시연은 황당하면서도 무심하게 말했다.“저 이제 경인시로 가려고 차를 탈 준비 중이에요.”“
소현주는 성산시의 아파트에서 손목을 그었다. 소현주를 발견한 것은 맞은편 이웃이었고 그때 소현주는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한 상태였다. 소현주는 믿을 만한 가족도 없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위급 상황을 알릴 사람조차 없었다.간호사에 따르면 소현주는 계속 휴대폰을 쥐고 있었지만 연락처 목록에는 몇 명뿐이었다. 그중 누구에게도 연락이 닿지 않았고 유일하게 최근 통화한 사람은 연정훈이었다. 그러나 그의 전화도 통하지 않아 경찰에게 그 번호로 전화를 걸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원장은 연정훈의 신분을 고려해 연정훈이 일찍 도착한 것을 보고 소현주는 연정훈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연정훈은 부하에게 소현주에게 간병인을 붙여주라고 지시한 후, 떠날 준비를 했다. “소현주가 깨어나면 이렇게 전해줘요.”연정훈은 간병인에게 말했다. “정말 죽고 싶다면 다음번엔 커튼을 닫고 아무도 못 보게 해.”간병인은 당황했다.이 말은 너무도 차가웠다.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마치 선녀처럼 보였고 아직 의식을 잃은 상태인데 이 남자는 너무 냉정했다.연정훈은 간병인에게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모든 것을 정리한 후 병원을 떠났다. 소현주를 한 번 보러 온 것으로 연정훈은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했다.결국 한때 사랑했던 사람인데, 그녀의 생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만약 다음번에 소현주가 정말 죽는다면 연정훈은 돈을 내서 소현주의 시신을 수습해 줄 생각이었다. “이제 양주로 돌아가시겠습니까?”진수빈이 물었다.“그래.”연정훈은 짜증스럽게 숨을 내쉬며 몸을 뒤로 기대고 휴대폰을 꺼냈다. 안시연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정훈 씨 일이 있어서 먼저 간 건가요?]안시연이 물었다.연정훈은 그때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고민했다. 마음이 가라앉은 후 연정훈은 신속하게 답장을 보냈다. “곧 양주로 돌아갈 거야. 찻집에서 기다려.” 메시지를 보내고 다른 알림을 확인해 보니 이승우가 보낸 메시지가 있었다.[네 여자 친
안시연은 알파카 두 마리와 함께 호텔 로비에서 양혁수를 만났다.오늘 식사는 안시연이 쏘기로 했고 둘은 근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향했다.들어선 지 얼마되지 않아 부승희 일행도 도착했다.고개를 살짝 끄덕여 인사를 주고받은 뒤 각자 주문했다.양혁수는 스스럼없이 한 상 가득 주문했다.“우리 둘만 먹을 거예요.”하지만 양혁수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어차피 연정훈 돈인데 뭣 하러 아껴.”“...”식사 도중 양혁수가 갑자기 물었다.“연정훈은 어디 간 거야?”안시연은 당황하며 대답했다.“급한 일이 생겨 경인을 떠났어요.”양혁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다른 여자 만나러 간 건 아니고?”안시연의 손이 뚝 멈췄다. 그러자 양혁수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을 이었다.“진짜인가 보지?”안시연은 양혁수를 힐끗 노려보았다.“밥 먹을 때 조용히 밥만 먹는 게 어때요?”“방금까진 그럴 생각이었는데 지금부터는 말 좀 하려고.”“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요?”양혁수가 웃음을 터뜨렸다.“겨우 연정훈의 카드를 손에 쥐게 되었는데 계속 놀려먹어야지.”“...”안시연이 한 입 크게 입에 넣으며 말했다.“연정훈 씨가 누굴 만나든 그 사람 자유니까 나와 아무런 상관없어요.”“그런데 뭔가 심통 난 것 같은데?”양혁수는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속은 말이 아니었다.“선배 연정훈한테 진심이지?”“아니요? 저도 지금까지 연기한 거예요.”양혁수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상관없어. 연정훈한테 진심이 아니라면 차라리 나한테 와. 난 진심이거든.”또 시작된 양혁수의 플러팅.“그쪽 어머니를 설득할 자신이 없으니 우리의 인연은 딱 이 정도예요. 그러니까 포기하세요.”“누가 그래? 우리 엄마가 반대한다고?”양혁수가 수저를 내려놓았다.“선배만 좋다면 우리 엄마는 내가 바로 해결할 수 있어.”안시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도련님, 지금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아프니까 제발 저 숨 쉴 틈은 주세요.”“내가 숨통이 되어줄게.”안시연은 더 이상 얘기를 이어가
“읍읍”‘조심해!’안시연은 몸부림치며 양혁수에게 알려주려고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칼이 몸을 찌르는 소리가 선명하게 귓가에 들려왔다.양혁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칼을 휘두른 상대는 한 번으로 부족했는지 칼을 빼 들고 또 한 번 더 찌르려 했다.양혁수는 고통을 참으며 상대의 손을 내리쳤고 다시 몸 다툼이 생겼으나 양혁수는 힘에 부쳤다.그렇게 칼이 다시 그의 복부를 찌르려는 순간 안시연은 끝내 차로 끌려갔다.“가자!”“빨리 가!”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 수 없도록 차 문이 굳게 닫혔다.안시연은 문을 열려고 몸통으로 들이박았으나 맞은편의 남자에 뺨을 맞고 말았다.입가가 찢어지고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으나 안시연은 바로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양혁수를 바라봤다.바닥에 쓰러진 양혁수를 내버려두고 방금까지 몸 다툼을 하던 사람들이 모두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몰려와 양혁수 주변을 둘러쌌다.흐릿한 시야에서 왠지 이승우의 모습이 보인 것 같았다.그리고 차량은 주차장을 벗어났다.안시연의 코를 막은 수건에 약물이 묻어 있었고 약효가 올라오자 그녀는 점점 정신을 잃어갔다.눈이 감기고 그녀는 오직 단 한 사람만 떠올랐다.연정훈.살려줘.세상이 온통 하얀색이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찾아온 추위에 안시연이 눈을 번쩍 떴다.눈을 떠보니 온몸이 푹 젖어 있었다.사납게 생긴 어느 사내가 깨어난 안시연을 보며 손에 쥔 물컵을 내려놓았다.“빨리 철수 형님 모시고 와.”안시연은 머리가 깨질 것 같았고 철수 형님이라는 지칭에도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주변을 천천히 돌아보자 텅 빈 방에는 안시연이 묶여있는 의자와 그녀 맞은편의 소파밖에 없었다. 창밖으로는 오직 나무 한 그루만 보였다.쓰러지기 직전의 기억이 파편이 되어 떠오르고 안시연은 점점 두려움을 자각하기 시작했다.‘내가 납치된 건가?’방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한 안시연이 깜짝 놀라 얼어붙
연명걸은 이철수를 죽이지 못해 참고 있는 얼굴이었다.연명걸은 예전과는 달리 괴팍해진 모습으로 소리쳤다.“미쳤어? 안시연을 납치하려고 양혁수를 칼로 찔러?”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양혁수는 양석진 의원의 조카였다!이철수도 사건의 심각성을 눈치채고 표정을 구겼다.“그 녀석이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먼저 덤벼들었어요!”그러자 연명걸이 신경질적으로 안경을 벗어 던졌다.젠장! 젠장!이철수와 한 배를 탔으니 연명걸도 같이 연루될 가능성이 컸다.“정보는 이미 연정훈에게 흘렸으니 저 여자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려면 제가 시킨 대로 할 겁니다.”이철수의 말에 연명걸이 냉소를 터뜨렸다.‘멍청한 녀석. 안시연만 잡고 있으면 뭐든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해?’양혁수를 칼로 찔렀으니 하느님에게 빌어도 내버릴 목숨이었다.연명걸이 차가운 얼굴로 이철수에게 물었다.“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연정훈에게 딜을 할겁니다. 조건은 날이 밝기 전까지 주식을 모두 넘기는 것입니다.”연명걸은 이철수의 멍청한 생각에 헛웃음만 나왔다.“넌 네 목숨보다 주식이 더 중요해?”이철수는 야비한 얼굴로 말했다.“양혁수를 찔렀으니 당연히 한국에서는 지낼 수 없겠지요. 그러니 도망갈 퇴로를 미리 준비해 뒀습니다. 주식만 넘어오면 제가 저가로 대표님께 되팔겠습니다.”연명걸이 침묵했다.이철수도 완전히 멍청한 건 아니었다.하지만 그는 너무 순진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30분 안으로 이 별장은 벌써 표적이 되었다!연명걸이 찾아온 것도 미리 계획된 것이었으며 사건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 안으로 들여보낸 것이었다.그러니 이철수가 빠져나갈 구멍은 존재하지 않았다!연명걸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이철수는 시한폭탄이 되었으니 이철수의 손을 빌려 주식을 쥐고 연정훈과 양석진의 손을 잡고 다시 이철수를 처리하면 되었다!두 눈을 감고 고민하다가 결정한 연명걸이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넌 안시연에게 손 떼. 내가 직접 연정훈이랑 딜 할 테니!”“빨리!”안시연은 1분 1초가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
새벽이 되도록 양혁수의 방에는 열기가 뜨거웠다.딸깍.헤드 등을 켜고 변여름이 이불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주변을 살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혁수가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연스레 변여름의 몸을 닦아줬다.변여름은 자꾸 양혁수를 훔쳐봤고 양혁수는 손을 뻗어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꾹 눌렀다.그러자 변여름은 양혁수의 베개에 얼굴을 묻고 비비며 입꼬리를 올렸다.이어 욕실에서 샤워 소리가 들려오자 왠지 양혁수가 만족하지 못해 홀로 해결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 옆 서랍을 열어보니 손목시계 따위만 있을 뿐 남은 콘돔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양혁수가 많이 자제한 것 같았다.‘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 있는 걸 통째로 갖고 오는 건데.’그리고 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양혁수가 돌아왔다.변여름은 얌전히 누워있다가 양혁수의 품에 꼭 안겼다.양혁수의 체향을 느끼며 변여름은 두 눈을 감고 얼굴을 비볐고 목 언저리에 뽀뽀하려 했다.그러나 양혁수가 변여름을 제지했다.“지금 뭐 해?”“왜요?”양혁수는 제 목에 있는 흔적을 가리켰고 새길 때는 몰랐지만 샤워하고 나니 따끔거리는 게 느껴졌다.변여름이 지난번처럼 또 정도 없이 세게 흔적을 남긴 모양이었다.하지만 이번 모양과 색깔이 너무 마음에 들어 변여름은 미안한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오빠 다음엔 반대편도 해줄게요.”“...”양혁수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변여름이 취조하듯 방금 잠자리가 만족스러웠냐고 물었다.“오빠, 나 다른 것도 배웠는데 오빠만 좋다면... 읍!”양혁수는 바로 변여름의 입을 막았다.“...”‘풉. 부끄러워하긴.’양혁수는 본인이 오빠로서 리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이 꼬맹이한테 놀아나고 있는 것 같았다.“잠이나 자!”그래서 고작 이런 일로 무게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흥. 오늘은 이만 물러선다.’변여름은 얌전히 몸을 돌렸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자꾸 치근덕거렸다.“오빠가 많이 보수적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요
변여름은 말재주가 뛰어났고 그대로 두면 분명 더 큰 소동을 일으킬 기세였다.양혁수는 그녀를 다잡아보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변여름은 밀고 당기기에 능했고 결국 늘 그가 그녀를 달래는 쪽이었다. 변여름을 제압하려면 그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를 유혹하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서로가 진심을 담기 시작하면 결국 누가 누구를 먼저 유혹한 건지조차 흐려진다.어느새 그녀는 그에게 기대어 그를 천천히 침대로 이끌었다.양혁수는 조용히 누워 있었고 변여름은 이불 속에서 조심스레 머리를 내밀었다. 표정은 잔잔했지만 눈동자에는 설렘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그녀는 익숙한 듯 그의 팔을 벌리고 조용히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내 그의 온기를 안은 채 잠이 들었다.양혁수는 차갑게 굴어보려 했지만 몸은 정직하게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키스가 끝나자 그는 스스로의 입을 때리고 싶을 만큼 후회가 밀려왔다.저녁이 되면 변여름은 양혁수 곁에서 말이 많아졌다. 그녀는 그와 감정을 나누고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부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전부 들려주었다. 작은 머릿속은 놀라울 만큼 명확했고 양혁수가 확신하지 못하던 일들을 종종 먼저 짚어내곤 했다.그러다 보면 두 사람의 입술은 자석처럼 끌려붙었고 전에는 양혁수가 불씨를 조심스럽게 다룰 수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변여름을 집에 데려온 첫날 밤 양지원을 마주친 이후의 느낌은 이전과는 달랐다. 그녀를 몸 아래에 눕히고 얼굴을 감싸안은 채 키스하자 변여름은 그의 몸에 다리를 스치듯 비볐고 그는 순간적으로 치솟는 충동을 느꼈다.자신의 반응을 깨달은 그는 재빨리 움직임을 멈췄다.변여름에게 들킬까 봐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조명의 밝기를 낮추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막 눕자마자 변여름의 부드러운 몸이 다시 양혁수의 품에 파고들었고 변여름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으며 단 한 번의 눈 맞춤으로 그녀가 이미 모든 것을 알
양혁수의 ‘착하지’라는 한마디에 변여름의 입꼬리는 하늘까지 닿을 듯 환하게 올라갔다.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데 능했고 사실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특히 밤 11시 30분이 넘도록 그가 나타나지 않자 아마도 자신이 먼저 찾아오기를 기대하며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아이고.’변여름은 그의 장난에 넘어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간질이는 마음을 안고 그녀는 문가에 서서 발끝을 들어 여러 번 밖을 내다보았다.밤이 깊어 12시가 다 되어도 그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외투를 걸쳐 입은 채 문을 열고 나섰다.양씨 가문의 저택은 워낙 넓어서 그녀가 양혁수의 방에 닿기 위해선 한 층 아래로 내려가 길게 이어진 복도를 걸어야 했다.몰래 발걸음을 옮겨 문 앞에 선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예상대로 잠겨 있지 않았다.문을 열고 들어선 방 안은 숨 막힐 듯 어두웠다.침실은 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그녀는 익숙한 감각과 뛰어난 시력에 의지해 침대를 더듬어 앉았지만 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변여름은 숨을 죽인 채 주변을 감지했고 방 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혹시 오빠가 나를 찾으러 간 걸까?’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작은 거실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무언가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그녀는 즉시 멈춰 섰다.달빛이 비추는 거실 그 한쪽 소파 팔걸이에 몸을 기댄 양혁수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침실 문을 빠져나온 그녀가 멈추는 순간까지 눈을 떼지 않았고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그의 손에는 라이터가 들려 있었고 그는 그것을 가볍게 던지며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갔다.변여름은 품에 안긴 이가 양혁수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가 갑작스레 뒤에서 안아오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이어진 그의 키스가 그녀의 옆얼굴에 가볍게 닿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숨을 멈췄다.양혁수는 평소 그녀가 마음껏 표현하게 두었지만 자신이 먼저 유혹
식사가 끝나자 양지원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식사 후 그녀는 아래층 소파에 편히 앉아 야경을 바라보며 시간을 재어 양석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위층에서는 양혁수와 변여름 사이에 또다시 작은 충돌의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양지원이 집에 머무는 동안 양혁수는 변여름과 같은 방에 머무를 수 없었다.변여름은 몹시 언짢은 기분이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전화에는 세 글자의 짧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양혁수.]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꽤 화가 난 모양이네. 성까지 붙여 부르다니.’풀네임으로 불린 건 처음이라 문득 그것도 꽤 재미있었다.수건을 툭 던지고 침대에 앉은 그는 변여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화났어?]잠시 후 변여름에게서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사진 속에는 줄에 매달린 막대 인형이 있었고 그 옆에서 날아온 주먹이 인형의 배를 강하게 가격하고 있었다. 인형 옆 상자에는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었고 상자 안에는 ‘양혁수’라는 이름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양혁수는 순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어디서 배운 거야? 너희 천재들은 이런 것도 다 할 줄 아는 거야?]예전에 변여름은 허예나의 이름으로 그와 채팅할 때 일부러 평범한 여고생처럼 꾸미며 어색하고 오래된 이모티콘을 보내곤 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그녀는 모든 걸 이해했고 재치 넘치고 독특한 이모티콘으로 그의 휴대폰을 장악했다.[이런 게 아주 유용하죠.]변여름이 말했다.[그러니까. 이제는 원격으로도 때릴 수 있지.]양혁수가 답장을 보냈다.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양혁수는 전화를 받았다.화면 속 변여름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아 있었고 아마 두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는지 아래에서 위로 비추는 각도는 썩 좋지 않았다.양혁수가 웃으며 말했다.“집에 재밌는 공간 많잖아. 잠 안 오면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나가기 싫어요.”변여름은 기운 없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