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완강하게 강남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끝까지 버텼다.결국 연정훈은 어쩔 수 없이 안시연을 다시 반우희의 집으로 데려다주었다.가는 내내 두 사람은 침묵만이 흐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아파트에 도착하자 안시연은 말없이 차 문을 열고 내렸다.연정훈은 안시연이 어두운 계단으로 사라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결심한 듯 차 문을 열고 빠르게 걸어갔다.계단 입구에서 연정훈은 안시연을 힘껏 안았다.“오늘 밤 여기서 자도 좋아. 하지만 내일은 집으로 돌아가.”안시연은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연정훈은 한 걸음 더 양보하며 말했다.“내일 돌아가기 싫으면 여기서 이틀 더 있어도 돼.”그럼에도 안시연은 여전히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긴 침묵 끝에 연정훈은 안시연을 조용히 놓아주며 나지막이 말했다.“들어가.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해.”“네...”안시연은 침울하게 대답하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연정훈은 그 자리에 서서 안시연이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올라가는 발소리를 들으며 기다렸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잠시 후 반우희가 문을 열며 깜짝 놀라 안시연을 맞아들이는 소리가 들리자 연정훈은 그제야 차로 돌아갔다.위층에서 반우희는 이미 잠에서 깨어났고 갑자기 찾아온 안시연을 보고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침실에서 자라고 권했다.안시연은 미안한 마음에 말했다.“괜찮아요. 소파에서 자도 돼요.”하지만 반우희는 졸린 눈을 비비며 손을 휘저었다.“그럴 순 없어요. 시연 씨는 손님이잖아요. 제 침대에서 주무세요.”안시연은 비틀거리며 흔들리는 반우희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동안 마음속을 어지럽히던 복잡한 감정들이 낯선 공간 속에서 잠시나마 따뜻함으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반우희의 침대는 오래됐지만, 매우 컸다. 아마도 이전에 어르신이 사용했던 것 같았다.반우희는 이불을 안고 나와 안시연에게 창가 쪽 자리를 내주었다.“언니, 난 먼저 잘게요. 언니도 빨리 자요.”반쯤 낯선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맞아들이고는 그
양씨 가문에서.집 밖에서 양혁수는 귀가한 양지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 앞에서 양지원을 가로막으며 차 창문에 기대어 말했다.“대표님, 어떻게 다른 사람 편을 들어줄 수 있어요?”양지원은 양혁수를 한 번 쳐다본 뒤, 아무렇지 않게 입을 벌려 그에게 ‘후’하고 바람을 불었다.강렬한 두리안 냄새가 났다.“아!”양혁수는 눈을 감고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무슨 냄새예요? 너무 지독한데요.”양지원은 웃으며 차 문을 두드렸다.“비켜.”양혁수는 자리를 내주며 불평했다.“앞으로 이거 좀 먹지 마세요. 그 냄새가 몸에 배면 품격 없어 보여요.”양지원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품격을 모르는 놈.”“두리안 같은 심오한 과일은 너희 할아버지와 나도 좋아해. 왜 너만 싫어하는 거야?”“내 유전자가 업그레이드돼서요.”“그건 퇴보야.”양지원은 안시연을 떠올렸다. 안시연은 두리안을 좋아했다.에휴.그들은 집 앞에 도착했고 양지원은 밖에서 2층을 한 번 쳐다봤다.양민아의 방 불이 갑자기 꺼졌다.양지원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시선을 거두고 양혁수에게 빨리 올라가서 쉬라고 재촉했다.“앞으로 안시연 씨한테 매달리지 마. 안시연 씨는 널 좋아하지도 않아.”양혁수는 손을 깍지 끼고 계단을 올라가며 느긋하게 말했다.“진정한 사랑은 항상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에요. 엄마는 못 느끼세요? 안시연이랑 연정훈 씨 이제 곧 끝나요.”“끝나도 네 차례가 아닐 거야.”양혁수는 불만스럽게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쳐다봤다.양지원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양혁수를 보내려 했다.“두고 보세요. 내가 안시연을 결국 저에게 넘어올 거예요.”양혁수가 말했다.글렀다.그 ‘넘어온다’는 말 한마디만으로도 양혁수가 안시연을 가질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양지원은 한밤중임에도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콩국을 먹고 있었다.거실은 조용했고 양지원은 2층 양민아의 방을 바라보며 마음이 편치 않았다.한강은행 사건은 사소한 일이 아니었고 양민아의 성격으로 보아
부승원이 갑자기 찾아오자 반우희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안시연이 반우희를 살짝 밀어 깨워주고 나서야 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차렸다.“부 변호사님,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어요?”부승원은 이미 아이들에게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아이들은 의자를 가져다주고 과일을 내오며 차를 따르는 등 바삐 움직였다.부승원은 안시연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안시연은 미소로 답했다.부승원은 반우희에게 말했다.“옹지천 씨의 사건을 내가 맡게 됐어.”옹지천은 바로 그 악명 높은 원장이었다. 그날 그들을 차로 들이받은 사람이기도 했다.반우희는 부승원이 이 사건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궁금했다.부승원은 이미 안시연에게 설명을 마친 듯했다.“연정훈이 저를 보낸 겁니다. 그날 시연 씨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들었어요.”반우희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렇구나.’안시연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부승원이 말을 이었다.“연정훈에게 들었는데 시연 씨가 옹지천을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하더군요. 연정훈이 사람을 보내 해결하려 했지만, 완전히 끝을 보지 못해서 옹지천이 궁지에 몰리자 반우희 씨를 찾은 거예요. 결국 시연 씨까지 피해를 보게 됐죠.”안시연은 당황해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부 변호사님, 당신 같은 변호사가 직접 나서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부승원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어렵지 않았습니다. 충분한 보상을 받았습니다.”안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반우희에게 말했다.“상황을 말해 봐.”“아, 네!”반우희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긴장한 듯 들뜬 기분이 들었다.반우희는 갑자기 바빠지며 책상 위를 정리했다. 특히 법률 서적들과 소설책들을 한꺼번에 치우고는 작은 노트북을 들고 부승원 맞은편에 집중한 표정으로 앉았다.“부 변호사님, 이제 시작하셔도 됩니다.”말이 끝나자마자 반우희는 두 눈을 반짝이며 펜을 꽉 쥐었다.부승원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네가 말하고 내가 적
소현주는 온화한 표정으로 외할머니에게 말했다.“과찬입니다. 저는 그저 무명 의사일 뿐이에요. 할머님의 외손녀와는 비교할 수 없죠.”안시연은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외할머니는 웃으며 눈이 가늘어지더니 소현주의 손에 낀 반지를 보고 참지 못하고 물었다.“소 선생님, 결혼하셨나요?”안시연도 외할머니의 질문에 이끌려 그 반지를 보았다.그것은 지나치게 큰 다이아몬드 반지였다.소현주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미소를 지었다.“아직입니다.”“그럼 곧 결혼하시나요?”소현주는 약간 쑥스러운 듯 손에 낀 반지를 바라보며 말했다.“몇 년 전 연애 기념일에 받은 작은 선물이에요. 그냥 계속 끼고 있었죠.”안시연은 불편한 마음에 차갑게 고개를 돌렸다. 더는 볼 필요가 없었다.몇 년 전이라면 분명 연정훈이 준 것일 것이다. 소현주는 안시연과 연정훈의 관계를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이런 모호한 말을 꺼낸 것이 분명했다.“외할머니, 이제 가요. 소 선생님을 방해하지 말아요.”안시연이 외할머니에게 말했다.“그래, 그래.”외할머니는 안시연의 손을 잡고 천천히 일어섰다.소현주는 끝까지 그들을 배웅하며 단정한 태도를 유지했다.아래층에 내려온 뒤에도 외할머니는 계속해서 소현주를 칭찬했다.안시연은 그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그들이 떠난 후, 위층 창가에 선 소현주는 안시연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얼굴은 점점 차가워졌고 눈빛은 어둡고 일그러져 갔다.요즘 며칠 동안 아무리 소현주가 연정훈에게 전화를 걸어도 연정훈은 더 이상 소현주를 만나주지 않았다.대신 연정훈의 비서가 여러 가지 물건을 보내왔고 저택의 설계도와 프로젝트 계획서 같은 것들이었다. 그 모든 것들은 어마어마한 액수를 의미했다.“연 대표님께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시면 된다고 하셨습니다.”‘마음대로 고르라니...’그러니 다 고르면 연정훈의 보상도 끝난다는 것이다.갑자기 이렇게 냉정해진 연정훈은 소현주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잔인했다.안시연을 본 순간, 소현주는 그 이유를 깨달
안시연은 조심스레 과자를 챙겨 놓았다.할머니는 안시연의 기분이 좋은 걸 눈치채고 참지 못해 물었다.“누구셔?”“상사예요.”안시연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할머니는 안시연의 회사 상사인 줄 알고 말했다.“정말 좋은 사람이네”몇 마디 하시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안시연이 출발하려던 찰나 휴대폰이 갑자기 깜빡였다.안시연은 슬쩍 휴대폰을 살폈다. 놀랍게도 이메일 회신이 온 것을 발견했다.[발신자: N.S.]안시연은 약간 흥분되었고 빨리 집에 돌아가서 메일을 확인할 생각이었다.이 느낌은 마치 잃어버린 청춘이 한순간에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양지원은 건너편에서 안시연의 차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패딩을 입었음에도 여전히 메마른 안시연의 모습을 떠올렸다. 양지원은 문득 연민을 느꼈다. ‘참, 좋은 소녀였는데 운이 따라주질 않아서 안타깝구나.’때마침 양혁수가 병원에서 돌아왔다. 그들은 함께 집으로 향했다.“며칠 있으면 설인데 큰삼촌 오세요?”양혁수가 조용히 물었다.양지원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모르겠어.”“전화해서 물어보지 그래요?”“...바쁘신데 뭘 굳이 물어.”양혁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앞좌석에 앉은 집사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양씨 저택에 도착하자, 집안 곳곳이 설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할아버지가 이번 설을 경인에서 보내시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화려한 장식들이 집 안 곳곳에 걸려 있었다.양민아는 방학을 했고 한강시 특산 음식을 준비하라고 사람들에게 지시하고 있었다.양지원은 2층 테라스에 앉아 통유리창 너머 펼쳐진 눈 덮인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3대가 모이니 이제야 집안에 화목한 기운이 감돌았다.그 사이, 오성호에게서 걸려 온 전화는 양지원의 좋은 기분을 반쯤 깨트렸다.기분이 울적한 가운데 아래층에서 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집사는 난간 너머를 살짝 내다보더니 다시 양지원에게 다가와 말했다.“민아 아가씨가 실수로 접시를 깼습니다.”양지원은 무심
양지원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친자 확인이요?”“네.”“누구와 누구의 친자 결과를 확인하려는 거죠?”상대방은 완전히 침묵에 빠졌다.양지원은 한숨을 내쉬며 바닥나는 인내심을 간신히 붙잡았다.“손문병 씨, 계속 입 닫고 있을거면 앞으로 제 일을 맡지 마세요.”“...”상대방은 더 이상 망설일 수 없다는 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중 하나는 아마도 도련님의 것일 겁니다.”양지원은 순간 멈칫했다.“뭐라고요?”“도련님의 것입니다.”양지원은 할 말을 잃고 머릿속이 잠시 멈춰 버린 듯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꽉 쥐었다가 다른 가능성을 떠올리며 천천히 손을 풀었다.그럴 리 없다.이미 예전에 친자 확인을 했고 혁수는 분명 오성호의 아이였다.“다른 하나는 누구 거예요?”“샘플 정보를 근거로 저희는 큰아씨인 것으로 의심하고 있습니다.”양지원은 얼어붙었다.그녀는 계속 혁수가 오성호의 아이가 아닐지 걱정했지만, 혁수가 자신의 아이가 아닐 거로 의심하는 사람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정말 웃기는 일이었다.양민아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궁금해졌다!양지원은 의자에 깊이 기대며 낮게 말했다.“민아가 이걸 조사하는 이유가 뭔가요?”손문병은 대답 대신 조심스럽게 다른 힌트를 주었다.“큰아씨, 친자 결과에 문제가 있습니다.”양지원은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어떤 문제요?”손문병은 결심한 듯 서둘러 말했다.“양민아 아가씨와 협력했던 사람들은 모두 통제했습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이번이 처음이 아니며 얼마 전에도 두 개의 샘플을 가져갔다고 합니다. 하나는 도련님이었고 다른 하나는 안시연 씨의 것이었습니다.”안시연?양지원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너무 급히 일어난 탓에 격해진 감정과 함께 눈앞이 캄캄해졌다.“계속 말해요!”“첫 번째는 혈연 확인이었는데 결과는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친자 확인이었고 결과는...친자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쾅!양지원은 천둥이 머리 위로 내리치는 듯
양씨 가문이 대대로 쌓아온 부와 권세는 양지원 세대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양홍두의 와이프는 탄탄한 집안 배경과 강력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그들은 꽤 금실이 좋았지만, 결혼 후 오랜 세월 동안 단 하나의 소중한 딸만 두었다. 그 딸이 바로 양지원이었다.양지원이 처음 양석진을 만난 건 겨우 여섯 살 때였다.양홍두가 여러 소년을 데리고 와서 양지원에게 오빠로 삼을 아이를 고르라고 했을 때 그녀는 이유 없이 한눈에 양석진을 선택했다. 그저 잘생겼다는 이유였다.시간이 흐르면서 양지원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이 증명되었다.양석진은 단지 외모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매우 재능 있는 사람이었다.그는 양씨 가문의 친아들이 아니었지만, 양씨 가문의 진짜 아들보다 더 친아들 같았다.“우리 오빠는 제일 똑똑하고 제일 멋져요!”어린 양지원은 늘 오빠 자랑을 입에 달고 살았다.왜냐하면 양석진은 똑똑하고 능력 있을 뿐 아니라 양지원을 누구보다 아껴주었기 때문이다.양석진이 가진 것이든 상으로 받은 것이든 밖에서 산 것이든 양지원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결국 모두 그녀의 손에 들어왔다.당시 양지원과 함께 놀던 친구들은 그런 똑똑하고 능력 있는 오빠가 있다는 사실을 부러워했다.양지원은 오빠 자랑을 중학교에 가서도 멈추지 못했다.양석진이 주는 사랑은 한 번도 줄어든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오빠, 나중에 결혼은 천천히 하세요. 결혼하면 나한테 신경 안 써줄 거잖아요.”어릴 적 양지원은 이런 걱정을 자주 했다.양석진은 항상 차분하게 대답했다.“나는 결혼 안 해.”“정말이에요?”“응. 난 결혼하는 거 안 좋아해.”양석진은 항상 이렇게 말했다.양지원은 웃으며 뒤에서 양석진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다정하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지금은 그렇게 말해도,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생각이 바뀔걸요.”“안 그럴 거야.”양석진은 차분히 책장을 넘기며 반듯한 자세로 앉아 양지원의 팔을 살며시 떼어내고는 책을 내밀었다.“중요한 부분을 표시해 놓았어. 오늘 다 읽어.”“
양지원은 그날을 아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양지원은 한참을 울었고 양석진은 평소처럼 그녀를 달래지 않았다. 양석진은 양지원 옆에 서서 울음을 멈출 때까지 기다렸고 그녀가 지칠 대로 지쳐 흐느끼자 마침내 양지원을 품에 안았다.“생일 선물은 이미 너한테 보냈잖아. 언제 내가 너한테 못 해준 적 있어?”“있어요!”양지원은 고개를 들어 양석진에게 억울하게 말했다.“방학 때 집에 안 들어오잖아요!”양석진은 변명했다.“너무 바빴어.”“아빠만큼 바빠요?”양지원은 양석진의 변명을 단번에 꿰뚫었다.양석진은 할 말이 없었다.양지원은 그의 항복을 눈치채자 바로 잡고 명령조로 말했다.“앞으로 방학 때마다 집에 와야 해요. 그리고 내 전화도 무조건 받아야 해요!”양석진은 고개를 숙여 양지원을 바라보며 깊은 눈빛으로 말했다.“네가 이렇게 나한테 집착하다가, 나중에 남자친구 생기면 남자친구가 질투하면 어떡하려고?”양지원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양지원은 늘 양석진에게 여자친구가 생길까 봐 걱정했고 자신이 남자친구를 사귈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녀 곁에 있던 남자애들은 모두 양석진만큼 훌륭하지 않았기에 눈에 차지 않았다.“남자친구는 남자친구고 오빠는 오빠예요. 오빠와는 상관없어요!”“남자친구가 질투하면?”“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세요. 오빠를 질투하면 그냥 그런 남자친구는 안 만나면 돼요!”양지원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렇게 말하면서 울다 웃다 하더니 토끼처럼 빨개진 눈으로 양석진의 팔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오빠, 이상한 말 좀 하지 마요. 무슨 남자친구 타령이에요. 내가 남자친구를 사귀더라도 오빠랑 비교할 수 없어요.”양석진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지만, 곧 시선을 피하며 평온하게 대답했다.양지원은 그의 반응에 활짝 웃으며 더 다정하게 양석진에게 매달렸다.“생일은 집에서 보내지 말고 여기서 보내요. 우리 둘이서만, 어릴 때 오빠가 나 데리고 놀러 다녔던 것처럼요.”“아빠가 집에서 널 기다리시잖아.”양지원은 콧방귀를 뀌었다. 엄마가
양석진은 아무 내색하지 않고 양지원을 이끌어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누가 너 괴롭혔어?”“아니요!”배는 자꾸 쿡쿡 쑤셔오고 멀리서 진병수가 모르는 여자를 껴안고 있는 걸 보면 양석진도 본인이 없는 곳에 저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배가 아팠다.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아빠도 늘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양지원은 저런 행동에 큰 반감을 느꼈고 양석진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면 화가 났다.그런 생각을 하는데 양석진이 옆으로 다가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혹시 생리 시작한 거야?”“...”양지원이 아무 대답이 없자 양석진은 바로 눈치를 챘다.“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그리고 룸을 나선 양석진은 따뜻한 꿀물을 한 잔 가지고 돌아왔다.마침 두 사람을 지나치던 진병수는 꿀물과 화가 잔뜩 난 ‘공주님’을 번갈아 보며 혀를 쯧쯧 찼다.‘이게 동생이야? 딸이야?’따뜻한 꿀물을 마시자 몸이 녹아내렸고 양지원은 소파에 푹 기대앉았다.그리고 양석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아까 그 여자 누구예요?”양석진은 멈칫하다가 바로 상황 파악을 마쳤다.“연예인인데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사정이 딱해 보여서 병수더러 도와주라고 했었어.”양지원은 바로 시선을 흘렸다.“오빠는 다른 사람한테도 다 이렇게 친절해요?”“그 사람 연예인이 된 이유가 어머니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어머니를 결국 지키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양지원은 침묵했다.‘사정이 딱하긴 하네.’“그래도 오빠는 조심해야 해요. 아빠가 오빠를 정치인으로 키우려고 하는데 병수 오빠처럼 헤프게 행동하면 안 돼요.”양석진은 자신에게 훈수를 드는 양지원을 보며 며칠 전 양지원이 벌인 일을 떠올렸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알겠어.”구석 자리에서 양석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양지원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래서 양석진에게 청아에 대한 얘기를 더 들려달라고 했다.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양창수가 옆자리에 와 있었다.양지원은 양창수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손명우는 안경을 고쳐 쓰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날 그냥 보러 온 건 아니고, 드레스샵 깨부순 것 때문이지?”양지원은 조금 계면쩍은 기분이 들어 목을 가다듬었다.진병수는 장난기가 많았고 술잔을 들고 옆으로 앉으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뭐야? 우리 지원이가 언제부터 드레스에 관심을 가졌지? 혹시 연애라도 하는 거야?”소파에 앉아 있던 양석진은 제게 걸어오려는 여자를 눈빛으로 제압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양지원은 그걸 발견하고 득의양양해서 턱을 치켜들었다.‘역시 우리 오빠가 제일 멋있어.’“내가 왜 연애해요?”양지원은 다시 양석진의 옆자리로 앉으며 말을 이었다.“드레스 입는 사람은 꼭 연애하고 결혼할 사람이어야 하는 거예요? 드레스가 예쁘면 그냥 입을 수도 있는 거죠.”“그래도 굳이 창을 깨부술 필요는 없잖아.”진병수는 손명우를 가리키며 말했다.“명우한테 말만 하면 드레스는 얼마든지 입을 수 있어.”손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가게에 새로 턱시도 모델 많이 들어왔는데 관심 있으면 같이 사진도 찍어줄 수 있어.”양지원은 크게 관심이 생긴 건 아니었으나 손명우를 거절하기 애매했다.그때, 양석진이 디저트를 양지원의 앞으로 당겨주며 말했다.“아직 나이도 어린 게 무슨 웨딩드레스 사진을 찍는다고.”“오빠, 방금 너무 촌스러운 거 알아요?”양지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옆 사람들한테 말했다.“내 나이가 어려요? 진씨 고모는 내 나이 때 벌써 결혼 1주년이었어요.”“그건 예전 얘기고.”한강시 쪽은 말이 달랐지만 화서시는 한 10년 전만 해도 다들 결혼을 아주 어린 나이에 했었다.“그냥 모델이랑 같이 사진 찍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잖아.”진병수의 말에 양지원은 양석진의 표정을 살폈고 고민하다가 손을 저었다.“어휴, 내가 무슨 모델이랑 사진을 찍어요. 됐어요.”그렇게 사진 촬영은 일단락이 되었다.양지원이 들어온 뒤로 룸 안의 사람들은 행동을 조심하기 시작했다.양석진은 동생 양지원을 끔찍하게 챙겼고 진병수와 손명우는 크게
오토바이를 타고, 쓰레기통 따위로 창을 깨부수는 건 가히 그해의 유행이라 할 수 있었다.양지원은 그런 반항적인 일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기분이 저기압이라 분출한 곳이 필요했다.양석진이 옆에 있었다면 얼리고 달랬을 테지만 양창수는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했을 것이다.양홍두가 자리를 비우자 두 사람은 입에 모터가 달렸다.“형,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드레스샵은 손명우네 가게니 아무 문제 없어요.”양지원은 팔짱을 척 끼고 양석진의 앞으로 걸어갔다.“그냥 드레스뿐인데 아빠가 괜히 오바하시는 거예요. 내가 전에 그 불여우한테 전화했다고 지금 아니꼽게 보시는 거라고요.”양석진이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향해 말했다.“말 가려서 해.”양지원은 여전히 불만이라는 듯 입을 삐죽였다.‘계속하면 내가 손해니까 참아야지 뭐.’그리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오빠한테 굳이 이런 일로 마음 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양지원은 어린 시절처럼 양석진에게 딱 붙어 말했다.“참, 내 친구가 오빠한테 편지도 쓰고 선물도 챙겨줬어요.”양석진은 익숙하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난 그런 쪽으로 관심 없으니까 친구한테 다시 그런 걸 보내지 말라고 해. 난 공부에만 집중하고 싶으니까.”평소의 양지원은 양석진이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아주 흡족한 대답이었다.‘그래, 이게 맞아. 감히 누가 우리 오빠 옆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겠어?’‘꿈 깨라고!’양지원은 기분이 퍽 좋아졌고 제 친구들한테 전화를 돌려 오빠의 말을 전했다.다른 사람은 그냥 알겠다고 넘어갔지만 친구 길예은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너희 오빠 정말 아무한테도 관심이 없다고? 네가 애초에 편지를 건네지 않은 건 아니고?”“야, 길예은,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저번에 너한테 석진 오빠 선물 부탁했더니 그대로 다시 돌려줬잖아. 너희 오빠는 무슨 눈이 그렇게 높아? 정말 우리 중에서 한 명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길예은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작가의 말:아래 내용은 네 시기로 나뉘어 진행됩니다.소년 — 짝사랑이라는 이름의 시작.청년 — 서른 번째 생일, 그리고 아련한 재회.중년 — 오랜 시간 끝에 처음으로 엮인 둘의 이야기.결혼 후 — 이제는 함께 걷는 달콤한 나날들.각 시기를 함께하며, 두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깊어지는지 지켜봐 주세요.--------[소년기]양석진과 양지원이 혼인 신고서를 제출한 당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사무실부터 관저까지 하루 종일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았다.양석진에게 결혼 축하 인사를 건넨 첫 번째 사람이 드물게 보인다는 양석진의 미소를 목격했다는 소문이 전해진 뒤로, 다들 기회를 찾아 양석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그 미소를 직접 확인하려 했다.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고, 나이가 지긋한 기사가 관저로 바라대 주다가 낮에 들었던 소문을 듣고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의원님, 결혼 축하합니다. 내일에도 같은 시간으로 마중 오면 될까요?”양석진은 꽉 채운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며 미소를 지은 채 차에서 내렸다.“내일은 휴가입니다.”홀로 차에 남겨진 기사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예쁜 노을 아래, 양석진이 정원 안으로 걸어가다가 원피스를 입은 양지원이 얇은 외투 하나 걸치고 무언가 휘젓고 있는 게 보였다.그러자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른기침을 몇 번 했다고 양지원이 배즙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그런데 뭘 또 정원에서, 그것도 이렇게 큰 가마에 만들고 있는 거야?’양석진이 양지원을 부르려는 찰나, 우지끈하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양지원이 너무 힘을 주어 젓다가 나무 주걱이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양석진은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양지원이 이어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 지켜봤다.양지원은 외투를 다시 고쳐 입으며 주변을 살폈고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걸 확인하고는 위층을 향해 외쳤다.“창수 씨! 왜 부러진 나무 주걱을 주신 거예요!”“...”이어 2층 창문이 열리고 양창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양지원의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