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외할머니의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안시연은 속으로 냉소를 터뜨렸으나 겉으로는 여전히 침착한 얼굴이었다.“사과할 필요 없어요. 윤리 도덕 따위 없는 사람이 사과한다니 너무 역겨워서 들을 수가 없거든요.”소현주가 눈에 띄게 당황해했다.소현주의 병은 심각한 편이 아니었고 약물로 충분히 제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감정 기복이 커지고 매일매일 불면에 시달리다 보니 소현주는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안시연 씨, 말 가려서 해주세요. 저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결국은 살인자잖아요.”소현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미소를 짜냈다.“굳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도 다른 방법은 없어요.”“당연히 그렇겠죠.”안시연은 등받이 몸을 기대더니 연정훈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 있어도 그쪽은 감옥에서 평생을 썩게 될 거예요.”소현주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연정훈이 몰래 안시연에게 그 어떤 약속을 했을까 걱정이 되었다.하지만 연정훈은 소현주에게 증거를 찾을 거라고 말했고 아무리 안시연을 위해 움직인다고 해도 증거를 위조할 리는 없었다.“정훈이가 사적으로 날 처리할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죠?”안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그러자 소현주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아직 그 사람을 잘 모르나 봐요.”안시연은 마음이 아팠다.틀린 말은 아니었다.안시연은 연정훈을 정말 알지 못했다.하지만 이제 더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안시연은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건넸다.소현주의 시선이 슬쩍 그곳을 향했지만 바로 시선을 돌렸다.“자세히 보지 않을래요?”안시연의 미소에 소현주는 주춤하다가 종이를 건네받았다.주문 내역서였다.반지...소현주의 눈빛이 흔들렸다.그러나 안시연은 아주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그 사람 나한테 청혼했어요.”소현주는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자신의 목을 조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주문 내역서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한참 동안 움직일
소현주는 아주 득의양양해서 안시연을 쳐다봤고 순수 무구한 얼굴로 물었다.“이건 몰랐죠?”안시연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리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이렇게 말했다.“내가 그쪽 죽일 거예요.”그 말에 소현주는 조금 당황하다가 바로 미소를 지었다.도발하고 있는 소현주에 연정훈은 참지 못하고 큰 보폭으로 그곳으로 걸어갔다.활짝 웃고 있는 소현주를 보며 안시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연정훈이 선물한 차를 타고 그쪽 쳐버릴 거예요.”소현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그래요?”“장례식장 바로 앞에서 차를 타고 그쪽 쳐버릴 거라고요!”“좋아요.”소현주는 갑자기 차분해졌고 이에 안시연이 더 미친 것처럼 보였다.연정훈이 가깝게 다가오자 소현주는 안시연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그럼 기대할게요.”그 말을 마치자 연정훈은 마침 안시연의 등 뒤에 도착했고 방어적인 자세로 안시연을 자신의 뒤로 당겼다.말다툼은 이만하면 되었다.소현주는 아주 침착하게 연정훈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안시연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연정훈에게 말했다.“긴장할 필요 없어요. 별말 하지 않았는걸요.”연정훈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소현주 쪽으로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으며 그저 안시연을 다른 곳으로 당겼다.“발인 곧 시작해. 외할머니 마지막으로 보러 가자.”안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그렇게 두 사람은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자리를 떠났고 남겨진 소현주는 죽일 것처럼 등 뒤를 노려보고 있었다.‘그래, 어디 한 번 해봐.’소현주는 안시연에게 그 기회를 주고 싶었다.그것도 장례식장, 모든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 그 자리에서 말이다.연정훈은 충분히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는데 안시연이 차로 친다면 평생 죄책감으로 묶어 둘 수 있었다.외할머니의 발인은 빠르게 시작되었고 가족은 소현정과 안시연 두 사람뿐이었다. 부승원은 대리 변호사 신분으로 발인에 참석했고 반우희는 어린 동생들과 함께 찾았다.몇 시간 후, 안 그래도 가냘프던 외할머니는 작은 상자가 되어 돌아왔다.안시연은 유
구급차는 아주 빠르게 도착했다.소현주는 구급차에 오르는 내내 울면서 외쳤다.“정훈아! 저 사람 일부러 그런 거야! 날 쳐 죽이려고 했어!”연정훈과 안시연은 빗속에서 상황을 지켜봤고 두 사람 모두 흠뻑 젖었다.안시연이 말했다.“차량은 그렇게 빠르지 않았고 일부러 칠 생각은 없었어요. 소현주 씨가 일부러 넘어진 거예요!”소현주가 자신의 병을 몰랐다고 한 것처럼 안시연도 일부러 소현주를 치려고 했던 사실을 부인했다. 더구나 차량은 빠르게 달리지 않았고 제한 속도를 넘기지 않았으며 정작 소현주를 향해 달리다가 방향을 돌려버렸었다. 만약 소현주가 넘어지지만 않았다면 사고가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말없이 바라보았다.그때 부승원이 다가와 작은 소리로 누군가 경찰에 신고했음을 알렸다.그러자 연정훈은 안시연의 손을 잡으며 이 말을 반복했다.“나한테 했던 말 그대로 하면 돼! 절대 말 바꾸지 마!”안시연은 이런 연정훈에 벙어리가 된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연정훈도 두려워할 때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눈물은 빗물과 함께 흘렀다.안시연은 침묵을 지켰고 연정훈과 부승원의 동행하에 경찰 조사를 마쳤다.조사 내내 연정훈은 안시연의 옆을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으며 행여나 안시연이 말실수를 할까 노심초사했다.경찰서에서 나오고 부승원이 먼저 떠났다. 두 사람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근처에 세워진 차에 올라탔다. 분위기는 얼어붙어 무서운 기운이 감돌았다.연정훈은 두 눈을 꼭 감고 자리에 몸을 기댔다.“내가 말했잖아! 그 사람 반드시 받아야 할 처벌받게 해주겠다고!”‘그런데 왜 스스로 움직이는 거야! 방향 판을 돌리지 않았다면 소현주는 중상이거나 죽었을지도 몰라. 그러면 안시연 넌 인생 망치는 거라고!’안시연은 아주 덤덤했다.“이제 그럴 필요 없어요.”안시연이 연정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소현주 씨 깨어나면 날 고소할 거예요.”“그런데 며칠 전 나처럼 원하는 결과를 가질 수는
소현주의 한쪽 발목은 분쇄성 골절 진단을 받았고 회복 불가 판정을 받았다.마취에서 깨어난 소현주는 아주 우울해했다.그리고 안시연이 눈에 들어오자 소현주는 당장 안시연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었다.안시연은 병실에 들어서며 문을 닫았고 연정훈을 병실 밖으로 단절시켰다.소현주의 이글거리는 시선이 느껴져 연정훈은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하지만 문에 기댄 안시연이 이렇게 말했다.“연정훈 씨는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우리 두 사람의 공간을 방해한다면 자해할 거라고 말해 뒀거든요.”소현주는 이불을 꽉 쥐었다. 마치 위험에 처한 짐승처럼 자신을 노리는 사냥감을 향해 최후의 발악을 하려는 것 같았다.“그런 시선으로 날 보지 마요. 무슨 피해자라도 된 것 같잖아요.”안시연이 비아냥거렸다.“그쪽이 날 쳤잖아요!”소현주가 고집스레 말했다.안시연은 소현주의 말투 그대로 따라 하며 말했다.“난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실수였어요. 만약 소현주 씨가 일부러 넘어지지 않았다면 차에 치이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소현주는 무언가 떠오른 듯 깜짝 놀라며 말했다.“장례식장에서 일부러 그렇게 말했던 거죠!”“내가 뭐라고 했는데요?”“날 칠 거라고 했잖아요!”안시연이 고개를 저었다.“난 그런 말 한 적 없어요.”안시연이 얼굴의 미소를 지우더니 핸드폰을 꺼내 들고 버튼을 눌렀다.이어 소현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런데 소현주 씨는 자신의 증상을 미리 알고 있었나 봐요.”소현주가 얼어붙었다.몇 초 뒤, 소현주가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런 증거는 무효 처리될 거예요.”“그건 상황에 따라 다르죠.”안시연이 핸드폰을 거두고 천천히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그쪽이 실형을 받는지 아닌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아요.”그리고 시선은 소현주의 발목으로 향했으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한다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벌을 받았다고 생각해요.”장애라는 말에 소현주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안시연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내가
부승원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점심 무렵이었다. 안시연의 부탁한 대로 부승원은 또 다른 변호사와 함께 왔다.“현재로서는 이 사고가 일반 교통사고로 처리될 듯합니다.”변호사가 말했다.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후속 상황은 모두 변호사님께 맡기겠습니다. 정상 절차에 따라 처리해 주세요. 법적 책임이 제게 있다면 인정할 것이고 없다면 그걸로 끝내 주세요.”잠시 생각하던 안시연은 연정훈 쪽을 슬쩍 바라본 후 말했다.“이 일에는 누구도 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부탁드립니다.”변호사는 많은 자료를 챙겨 나갔고 부승원은 여유롭게 자리를 지켰다.연정훈은 매우 바빠 보였다. 아마 며칠간 쌓인 업무가 많았지만, 연정훈은 회사로 출근하지 않고 있었다.그가 전화를 받는 틈을 타 부승원은 안시연에게 물었다.“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연정훈에게 복수하려는 의도인가요?”안시연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웃음을 지었다.“부 변호사님, 저 그렇게 유치하지 않아요.”자신의 미래를 걸고 한 남자를 복수하기엔 너무 충동적인 일이었다.“그렇다면 왜 이런 결정을 한 겁니까?”만약 소현주가 안시연의 책임을 끝까지 묻는다면 안시연은 무사히 빠져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잘못하면 짧게나마 감옥에 가게 될 수도 있다.안시연은 대답했다.“그저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기 싫을 뿐이에요.”부승원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사랑에 빠진 남녀는 정말 두려운 존재다.연정훈이 만난 두 여자는 연정훈이 여성을 두려워하게 할 정도로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었다.그럼에도 오랜 친구로서 그는 연정훈을 위해 몇 마디라도 전하고 싶었다.“시연 씨 외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출관 전에 연정훈과 제가 소현주 씨를 만난 적이 있어요.”안시연은 멈칫했다.부승원은 말을 이었다.“둘 사이의 일은 대략 알고 있어요. 소현주 씨에 대해 연정훈이 오해받고 있는 것 같아요. 연정훈이 소현주 씨에게 미련이 남아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큰 빚을 느끼고 있는
연정훈은 차 트렁크를 가득 채운 후 안시연을 집으로 데려다주었다.사실 그곳은 집이라기보다는 외할머니의 마지막 기억을 간직한 곳이었다.안시연의 집은 오래전에 다른 사람에게 팔려버렸다.차에서 내리자마자 승주가 동생들과 함께 나타났다.안시연은 그들을 부르며 음식을 가져오라고 부탁했다. 아이들의 소리는 맑고 순수해 슬픔과 침묵을 뚫고 겨울조차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아이들의 소리는 맑고 순수하여 슬픔과 침묵을 뚫고 겨울도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언니, 아저씨와 함께 올라가서 밥 먹어요. 내가 요리해 줄게요.”승주가 말했다.안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아니야. 또 나한테 라면 끓여주려고 하는 거지?”승주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아니면 소세지 추가해 줄게요!”안시연은 승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녀는 돌아서 연정훈에게 말했다.“반우희 씨를 초대해서 저녁을 먹으려 해요. 조금 늦게 가도 될까요?”“돌아가고 싶지 않다면 여기서 지내도 돼. 저녁에 와서 너와 함께 있어 줄게.”연정훈이 말했다.“괜찮아요.”안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정훈 씨가 불편할 거라는 걸 알아요.”“잠시 망설이다가 안시연이 덧붙였다.“나도 불편해요.”외할머니가 없어진 이 집은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었다. 연정훈은 안시연의 슬픔을 느끼고 참지 못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반우희 씨를 초대해서 혼자 요리할 거야?”“반우희 씨와 물어볼게요.”“혼자서 하려면 내가 여기 남아 도와줄까?”연정훈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안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정훈 씨가 도와주면 승주보다 못할 거예요.”승주가 끼어들며 말했다.“언니, 모르겠어요? 아저씨는 언니와 함께하고 싶어 해요.”안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안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손을 뻗어 그의 카라를 정리해 주었다.“정훈 씨는 가서 일 보세요. 요즘 일이 많이 쌓였을 거예요.”“괜찮아. 누군가 처리하고 있어.”“누군가가 처리하더라도 정훈 씨가 직접 하는
소현정이 외할머니의 약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말했을 때 안시연은 의심하지 않았다. 소현정은 원래 이런 일에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딸로서 어머니의 약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안시연은 답답함과 함께 화가 치밀었다.며칠 전 반우희는 안시연과 함께하며 수술 당일의 상황을 들려주었다.외할머니는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소현정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말하지 않으셨다.소현정에게는 외할머니를 해칠 이유가 없었다.그런데도 안시연은 이제 이 엄마를 더 이상 마음속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수술대에서 돌아가신 것은 소현주에 대한 미움 때문이라지만, 외할머니께 약을 챙겨 드리지 않은 소현정도 책임이 있다!어차피 모녀간에 애정도 없으니 이제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안시연이 더 묻지 않자 소현정은 안도하며 슬쩍 안시연의 속마음을 떠보려 했다.소현정은 최근 오성호와 연락이 끊겼고 며칠 동안 여러 차례 항공권 예약을 시도했지만 계속 실패하면서 불안감이 커졌다.어젯밤 마침내 항공권 예약에 성공한 소현정은 급히 화서시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니?”소현정이 안시연에게 물었다.안시연은 말했다.“사고를 냈으니 소송이 걸릴 것 같아요. 당분간은 경인시에 머물려고요.”소현정은 그제야 생각났다.에휴.어제 그 장면은 정말 무서웠다. 역시 양씨 가문의 자식이다. 조금만 더 핸들을 덜 돌렸더라면 그 여의사의 다리는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하지만 그 여의사도 죽어 마땅하다!나중에 오씨 사모님이 되면 소현주는 반드시 이 일을 다시 청산할 것이다.소현정은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너무 무모했어. 외할머니가 아시면 얼마나 마음 아파하셨을까.”안시연은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켰다.소현정은 속으로 비웃었다.사실 안시연이 정말 소현주를 치어 죽였다면 오히려 좋았을 것이다. 그녀를 망가뜨리고 외할머니에게 복수할 기회였으니 말이다.안시연이 소송 이야기를 꺼내자 소현정의 긴장된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소현정은 며칠 동안 어머니를 실수로
양주에서 반우희가 유학한다고 했지만, 이렇게 빨리 떠날 줄은 몰랐다.야외에서 세 사람은 매운 홍탕을 주문했다.뜨거운 김이 피어오르자 반우희가 가방에서 금괴를 꺼내 안시연과 희주에게 하나씩 건넸다.반우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안시연은 당황했다.“?”반우희는 긴 벤치에 웅크려 앉아 매운 국물 때문에 입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안시연 씨는 그냥 넘어가요. 시연 씨에게는 연정훈이 있으니 돈 걱정은 없을 테니까요. 희주 씨는 받아두세요. 떠나기 전에 우리 인연의 증표로 주는 거예요.”반우희는 좋아서 입꼬리가 귀에 닿을 만큼 활짝 웃었다. 그리고 일부러 덧붙였다.“너무 귀중해서 받아도 되는 건가요...?”“됐으니 연기하지 말고 그냥 받아둬요. 나중에 필요할 때 바로 가서 바꿔 쓰면 돼요.”“알았어요!”반우희는 기쁘게 금괴를 받아서 들었다.안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부승희의 따뜻한 배려에 마음이 녹아내리는 듯했다.알고 보니 이번엔 이승우가 진심이었다고 했다. 바람둥이 같던 귀공자가 드디어 철이 든 것이다.반우희가 마음을 정리하고 급히 떠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부승희 씨, 그러면 이후에 다시 돌아오나요?”반우희가 물었다.“돌아오죠.”부승희는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못 돌아올 이유는 없어요. 집에 아직 남아 있는 유산들이 날 기다리고 있으니까요.”반우희는 어이없었다.“...”사실 그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이었다.“하지만 당분간은 만날 수 없겠죠.”부승희는 술잔을 들어 그녀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자, 건배해요. 우리 그리 길지 않은 우정을 위해서.”안시연과 반우희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반우희는 작별 인사를 유난히 거창하게 했다. 반우희가 물었다.“언니, 이 말 몇 번이나 했어요?”“수없이 했지만, 너희가 마지막 타자예요”“...”역시.안시연이 말했다.“저도 곧 해외로 나가볼 생각이에요.”“어디로요?”“북유럽?”부승희는 그녀와 하이 파이브를 하며 말했다.“그러면 나중에 찾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