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시연은 빠르게 손을 빼냈다.그리고 한 발 멀어지려는데 연정훈이 또 한 발 가까이 다가왔다.“연정훈 씨!”양시연이 손을 앞으로 뻗어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했다.“여긴 제 구역이니까 조심해요.”연정훈은 여전히 무표정이었고 양시연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손님맞이로 정신없이 돌아다녔더니 인내심이 떨어진 양시연이 바로 연정훈을 톡 쏘려 했다.그러나 연정훈의 시선은 양시연의 손가락으로 향했다.“손톱은 어쩌다가 부러졌어?”양시연이 멈칫하다가 손을 돌려 확인했다. 그러자 작은 고통이 전해졌고 손톱이 부러진 게 보였다.“실수로 부딪혔나 봐요.”그리고 다시 손을 빼냈다.끊어진 손톱이 연정훈의 손바닥을 스치자 옅은 고통이 느껴졌다.양시연은 손목을 살짝 돌리고 연정훈을 힐끗 쳐다봤다.연정훈이 행여나 변백호에 대해 물을까 서둘러 자리를 떠나려 했다.그러나 연정훈은 빠르게 앞길을 막았고 양시연은 경계를 담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그리고 연정훈은 의미심장하게 입을 열었다.“남자 친구?”“무슨... 문제라도?”“문제는 아니지만 한 번에 여자 친구가 한 명인 경우는 많아도 둘은 좀 색달라서 말이야.”“...”양시연은 모르는 척 넘어가려 했다.그러나 연정훈이 한 걸음 더 다가왔고 양시연은 바로 숨을 멈추고 뒷걸음질했다.연정훈이 양시연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말했다.“마음이 많이 넓은 편인가 봐? 그런 제자가 옆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을 걸 보면.”‘날 바보로 아나?’‘그 사람이 무슨 남자 친구? 짜고 쳐서 날 속이려는 거지.’연정훈은 그날 밤 술에 취한 양시연에게 된통 맞은 게 잊혀 지지 않았다.양시연은 꿋꿋이 모르는 척 연기했고 자신이 인정하지 않으면 이기는 판이라 생각했다.“무슨 제자요? 연 대표님 말 가려서 하세요. 그 친구 이제 성인이 되었고 멀쩡한 가문 자식이에요.”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비꼬았다.“그래. 어느 가문의 딸이겠지.”“네. 그렇고 말고요.”양시연이 고집을 피우는데 연정훈이 갑자기 양시연의 허리를 잡았다
연정훈은 양시연을 안아 들고 가장 가까운 방으로 향했다.“슬리퍼 달라고 할까?”양시연은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언제 내 발목까지 본 거야?’잠시 고민하던 양시연이 말했다.“도우미에게 대신 말해줘요.”연정훈은 말없이 방을 나서더니 2분 뒤 퍼 슬리퍼를 챙겨 돌아왔다.양시연은 허리를 숙여 하이힐을 벗으려 했다.그러나 연정훈이 한 발 더 빨랐으며 먼저 양시연의 발목을 잡았다.하이힐이 벗겨지고 연정훈의 손 온도가 느껴지자 양시연은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양시연은 천천히 퍼 슬리퍼로 갈아신었다. 한 여름이지만 시원한 에어컨이 틀어진 방에서 퍼 슬리퍼가 아주 편안하게 느껴졌다.연정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씻으러 화장실로 향했다.화장실에서 돌아오기 전 양시연은 빠르게 방을 떠나려 했다.그런데 연정훈이 도망치려는 양시연의 목덜미를 살짝 잡으며 말했다.“승주한테 갈 거야?”“상황... 보고요.”“아이가 직접 초대를 했는데 안 가면 되겠어?”양시연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승주 생일 파티에 가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연정훈 씨 만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연정훈은 양시연의 뒤에 서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손을 뻗어 머리를 두어 번 쓸어내렸다.양시연은 깜짝 놀라 빠르게 뒷걸음질하며 연정훈을 노려보았다.그러자 연정훈은 덤덤하게 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진이 빠진 양시연은 곧장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하지만 연정훈은 그 자리에 남아서 조용히 물었다.“진짜 남자 친구인 건 아니지?”양시연이 인상을 찌푸렸다.“그 사람이 내 남자 친구가 맞든 아니든 그쪽은 이미 제 전 남자 친구이잖아요.”“남자 친구가 아니라면 내가 하고 있는 건 정상적인 대시일 테고 남자 친구라면 그 사이에 끼어드는 거잖아.”“...”“나도 도덕이 뭔지는 아는 사람이야.”양시연은 눈을 흘겼다.그리고 다시 몸을 돌리며 말했다.“얼굴에 난 상처는 아직 채 낫지 않았죠?”‘그 주제에 무슨 도덕을 논한다고
양시연이 몇 초간 제자리에 얼어붙었다.변백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내 말이 맞지?”“허튼소리 하지 말라고 했잖아.”양시연은 변백호를 흘겨보다가 그 뒤에 선 사람을 보며 말했다.“너나 잘해. 다른 사람 연애사에 관심 가지지 말고.”변백호가 말했다.“정곡을 찌른 사람들은 강한 부정을 한다는 대량의 데이터가 있어.”“...”양시연은 팔짱을 척 끼며 당당하게 말했다.“내가 무슨 정곡이 찔렸다고 그래? 양혁수가 뭐 이상한 사람도 아니고 만나는 게 잘못된 일도 아니잖아.”“그래서 만났어?”“맞춰봐.”변백호는 김이 빠진 듯 벽에 몸을 기댔다.“그 연 대표님이란 사람이 귀찮으면 가짜 남자 친구 찾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 알려줄게. 그냥 그 사람한테 양혁수랑 사귀었었다고 해. 그러면 포기할걸.”양시연은 잠자코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너 참 스승이네. 이거 나쁘지 않은데?”그러나 양시연은 바로 표정을 바꾸고 몸을 돌렸다.“먼저 네 사랑하는 제자나 챙겨. 낯선 곳에서 상처받지 않게.”“...”승주와 약속을 했으니 양시연은 승주의 집을 다녀와야 했다.양지원의 생일 연회는 저녁 만찬이 가장 성대했고 곧 양석진도 도착할 것이다.양시연은 다시 양지원을 찾아갔는데 양지원은 다른 유명 인사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편하게 놀다가 일찍 집에 돌아와.”양시연은 마지막으로 양지원을 안아 주고 볼에 뽀뽀했다.모녀 사이가 아주 가까워 보이자 사람들은 속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아무리 양지원의 친딸이라 해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 친딸인지 양딸인지 알 길이 없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양지원은 양민아보다 양시연을 훨씬 더 아꼈다.사람들은 여러 가지 추측을 했지만 양시연이 양지원과 양석진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 것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그 자리에서 벗어난 양시연은 바로 승주를 찾으러 떠나려 했다. 그런데 반우희가 먼저 전화를 걸어와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했다.“승주가 차도 구했어요?”“네. 이승우 씨한테 빌렸어요.”양시연은 의아해했
차량은 천천히 양씨 저택을 떠났다.반우희는 양시연의 옆에 찰싹 붙어 몰래 물었다.“언니, 변백호 씨가 정말 언니 남자 친구 아니죠?”양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아니에요.”반우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시연 언니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아무나 만나겠어?’‘이제 안심이야.’반우희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편히 눈을 감았다.그 모습에 양시연도 한결 기분이 가벼워졌고 입꼬리가 올라갔다.그때, 차량이 멈춰 섰다.승주는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익숙하게 손님을 맞았다.양시연은 경고음이 귓가에 울렸다.이어 승주가 아부를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형부, 볼일 마치셨어요?”“그래.”연정훈의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졌다.양시연은 바로 눈을 흘겼다.‘연정훈이 왜 갑자기 애들 장단에 맞춰주고 난리야?’‘오늘 할 일 없어?’승주는 미리 양시연의 옆자리를 비워두고 연정훈을 기다리고 있었다.옅은 재스민 향이 풍겨오고 양시연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작은 재스민 꽃이 연정훈의 어깨에서 톡 떨어지는 게 보이고 연정훈에게서 좋은 향이 느껴졌다.연정훈의 차량은 밖에 세워져 있었는데 아마 다른 일을 처리하고 대문 앞에서 기다릴 때 재스민이 어깨 위로 떨어진 것 같았다.차 문이 닫히고 차 안 가득 향이 풍겼다.반우희는 코를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향이 엄청 좋네요.”양시연도 눈을 감고 몰래 향을 느꼈다.향이 오래 지속될수록 연정훈의 존재감은 커졌다.재스민 향은 연정훈에게서 비롯되었고 자꾸 향을 느낄수록 왠지 연정훈의 품에 안겨 향을 맡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최대한 향을 모른 척 외면했다.예전 동네 근처에 오자 재스민 향은 줄어들고 치자나무 향이 물씬 풍겼다.여름이 오면 동네는 치자나무의 향기로 물들었다.그러자 양시연은 외할머니가 치자나무를 참 좋아했던 게 떠올랐다. 치자나무 꽃을 따서 양시연의 머리에 꽂아주기도 했다.외할머니와의 추억에 양시연은 코끝이 시큰거렸다.외할머니가 떠난 것도 벌써 몇 해 전의 일이 되었다.
“이 사람은 장서진이고 저와 어릴 때부터 함께 큰 친구예요!”반우희는 사람들에게 장서진을 소개했다.장서진은 밝은 사람이었고 활짝 웃는 모습이 반우희와 많이 닮았다.노지혜가 턱을 괴고 눈을 반짝였다.“남자 친구예요?”“당연히 아니죠.”“그럼 저 사람이 남자 친구예요?”노지혜는 부승원을 가리켰다.반우희는 더 세차게 고개를 저었고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제 사장이거든요!”“아 그렇군요...”노지혜는 또 말꼬리를 늘렸다.반우희는 양팔을 쓸어내리며 장서진을 이끌고 주방으로 향했다.소파에 앉은 부승원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오늘 이 자리에 변백호와 노지혜가 참석하는 건 의외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척 보아도 정상의 범주는 아니었으나 부승원이 여길 온 건 연정훈보다도 더 의아한 일이었다.승주도 같은 생각인 건지 오늘따라 유난히 부승원에게 친절하게 물을 따라주며 챙겼다.양시연은 방안을 빙 둘러보다가 창가에 자리 잡고 창밖을 구경했다. 그리고 반우희에게 주변 상가의 변화를 물었다.“다 비슷해요. 몇 년 동안 큰 변화는 없어요.”반우희의 말에 양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사람들은 각자 떠들었다.승주는 부승원과 연정훈이 무리에 어울리지 못할까 봐 바둑을 가져왔다.“자, 마음껏 해요!”두 사람은 할 말을 잃었다.무뚝뚝한 성격의 두 사람은 숨겨진 바둑 고수의 느낌이 있었다.그때 반우희 동생 중 가장 어린 동준이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와 진지한 얼굴로 게임을 지켜봤다.“지금 마음대로 두는 거예요?”“...”“누가 먼저 지나 내기하는 거죠?”그 소리에 희주가 다가와 부승원과 연정훈에게 말했다.“바둑은 마음을 비우고 신중하게 둬야 해요.”“그래. 알겠어.”아이들이 떠나고 부승원은 재차 그 말을 반복했다.“마음을 비우고 신중하게.”“난 마음이 어지러운 게 아니라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그런데 넌 왜 그래?”부승원은 표정 변화 없이 대답했다.“네 생각하느라.”“...”양시연은 여전히 창가에서 멍하니 밖을 바라보
거실에서.양시연은 소파에 앉아 눈앞의 차를 보며 한참 침묵했다.이건 연정훈이 수납장에서 꺼낸 차로 직접 우린 것이었다.“한번 와봤는데 집이 너무 텅 빈 것 같아서 채워 넣었어.”양시연은 기분이 착잡해졌다. 그래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아래로 내려갔다.연정훈은 계속 양시연의 뒤를 따랐다.늦은 밤이 되자 밖은 꽤 시원했다.동네의 낡은 주차장을 떠나 어두운 구역까지 걸어가자 오랜 세월 고장 난 가로등 아래에서 한 커플이 키스하고 있는 게 보였다.양시연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변백호...소녀는 변백호의 목에 팔을 걸고 품으로 파고들었다. 변백호는 그 손길을 두어 번 피하더니 곧 가만히 노지혜의 손길을 받아들였다.연정훈도 가만히 그 상황을 지켜보았다.양시연이 연정훈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연정훈도 양시연을 바라보았다.이제 굳이 해명할 필요가 없었다.양시연은 말을 꺼내기도 귀찮아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했다.길가에는 연정훈의 차량이 세워져 있었다.“차에 타. 할 말 있어.”양시연이 걸음을 멈췄다.‘그래. 이번엔 확실하게 끝내는 거야.’양시연이 좌수석 손잡이를 당겨 안으로 앉았다.문이 닫히고 밀폐된 공간에는 두 사람만 남겨졌다.연정훈은 외투를 벗어 뒷자리에 두었다. 그리고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고 편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양시연은 차창을 내렸다.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담배라도 피울 줄 알았는데 연정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그 사람이랑 무슨 사이야?”“말했잖아요. 연인 사이라고.”양시연은 될 대로 되라는 심산이었다.연정훈은 이에 화를 내지도 않고 침착하게 변백호의 신상을 읊었다.“멕하든의 최고 권력 가문인 변씨 가문. 무기 장사로 일떠선 가문이지. 지금도 티후아엔에서 가장 큰 검은 세력이고 변백호는 3년 사이 4번의 암살 위협을 받았어. 변백호의 주변 사람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지.”양시연이 인상을 찌푸렸다.“그렇게 위험한 사람을 왜 굳이 조사한 거예요?”“여기는 경
“거절할게요.”차 안에서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연정훈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덤덤했다.지금 연정훈은 유독 담배가 당겼지만, 손에는 담배가 없었다.양시연이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문 열어줘요.”연정훈은 미동조차 없었다.양시연 역시 당황하지 않았다.“정훈 씨가 재결합을 부탁해서 거절했어요. 저를 못 가게 막는 건 정말로 끝까지 매달리겠다는 뜻인가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정훈은 버튼을 눌러 양시연 쪽 창문을 닫았다.양시연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의 행동은 갈수록 이해할 수 없었다.예전엔 자존심이 강해서 무모한 행동은 하지 않을 거라 믿었지만, 강남시티 사건에서 이미 그 믿음은 깨졌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침내 연정훈이 입을 열었다.“재결합을 거절하는 이유를 말해줘.”양시연은 연정훈의 자존심을 잘 알기에 망설임 없이 직설적으로 말했다.“이유는 없어요. 이제 당신을 찾고 싶지 않거든요. 당신에게 권력과 지위가 있어도 나에겐 이제 아무 의미 없어요. 어느 가문이든 그런 정도는 있잖아요? 연애할 거라면 당연히 젊고 활기찬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나요? 왜 하필 당신이어야 하죠?”연정훈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입꼬리가 살짝 내려가는 걸 보고 연정훈의 아픈 곳을 찔린 걸 눈치챘다.연정훈이 그녀를 한 번 쳐다봤고 양시연은 그 시선에 물러서지 않고 똑바로 맞섰다.오래도록 팽팽한 침묵이 흘렀다.연정훈은 여전히 차 문을 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양시연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연정훈 씨, 이렇게 굴면 정말 품위가 떨어지는 거 아시죠? 이렇게까지 매달리면 내가 당신을 가지고 놀까 봐 걱정 안 되세요?”“걱정 안 해.”양시연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깊고 어두운 눈빛을 띠고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나는 네가 나를 가지고 놀기를 바라고 있어. 어떻게 가지고 놀거야?”양시연은 어이없었다.“...”‘역시
양시연은 자신의 청각에 문제가 생겼거나 아니면 연정훈이 미쳤다고 생각했다.‘뭐라고? 정인 그룹을 나에게 준다고?’양시연의 관심은 오로지 정인 그룹에 쏠려 있었지만, 연정훈의 관심은‘결혼’에 맞춰져 있었다.양시연이 얼떨떨해하는 모습을 보며 연정훈이 덧붙였다.“이번 주 내로 하자.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하고 모든 절차를 마치면 정인 그룹은 네 것이 될 거야.”양시연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그래. 내 청각엔 이상이 없어. 연정훈 씨가 미쳤어.’양시연은 연정훈이 절대 동의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주도권을 쥐고 연정훈을 조롱할 생각이었지만, 그가 이렇게 모든 걸 뒤집는 결정을 내리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난 필요 없어요!”양시연은 한쪽 발을 차 밖으로 내밀며 미간을 찌푸렸다.“나는 돈이 부족하지 않아요. 돈 때문에 결혼할 일은 없어요.”연정훈은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살짝 눌렀다.양시연은 순간 당황했다.???연정훈이 말했다.“네가 먼저 요구했잖아. 내가 동의했는데 이제 와서 번복하려고?”“번복하면 어쩔 건데요?”양시연은 당당하게 말했다.“아까 경고했잖아요. 너무 매달리면 결국 내가 당신을 가지고 놀 거라고요. 연정훈 씨, 너무 방심 하신 거 아니에요?”“...”연정훈은 양시연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한참 동안 응시했다.양시연은 좌석에 기대어 옆으로 앉아 있었다. 가늘고 긴 다리를 가지런히 모은 채 섬세한 힐을 신고 하얀 손목으로 머리를 받치며 도전적인 미소로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보며 이가 갈릴 듯했다. 그녀를 품에 안아 단단히 제압하고 싶었다.긴 대치 끝에 갑자기 멀리서 강한 불빛이 그들을 향해 비춰왔다.둘은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돌려 눈이 부신 빛을 피했다.양시연은 손을 들어 눈을 가리며 몇 번 깜빡인 후 손가락 틈 사이로 빛의 방향을 살폈다.검은색 SUV가 가까운 곳에 멈춰 섰고 차 문이 열리며 젊은 남자가 내렸다.그는 검은 반소매 티셔츠에 부드러운 소재의 캐주얼 바지를 입고 밤인데도 검은 야구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