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원이 고개를 돌려 반우희를 바라봤고 반우희는 바보같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러자 부승원은 바로 시선을 냉장고로 돌리고 식재료를 찾았다.반우희는 그제야 알아차리고 물었다.“혹시 저녁 안 드셨어요?”“그래.”‘어머. 정상인처럼 대답할 줄 아는 사람이었잖아!’반우희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그리고 방금 부승원의 간식을 먹은 보답으로 반우희는 대신 요리를 해주겠다고 나섰다.“제가 해드릴게요. 저 요리 잘해요.”“그래 보여.”‘요리 잘하니까 볼살이 통통하게 올랐지.’부승원이 이번에도 고분고분 대답하자 반우희는 점점 흥분되었고 용기를 내어 부승원의 옆으로 걸어갔다.“스파게티 하려고요?”“응.”“무슨 소스인데요?”부승원은 무뚝뚝하게 토마토소스를 옆에 두었다.“아, 토마토스파게티?”반우희는 부승원을 바라보며 다시 질문했다.“그런데 정말 요리할 줄 알아요? 제가 도와드릴게요.”“냉장고에 식재료 다 있어.”반우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냉장고에서 소스를 챙겨오고 토마토를 썰었다.부승원은 거절하지 않았고 묵묵히 면을 삶으며 작은 냄비를 반우희에게 건네 소스를 만들게 했다.반우희는 기쁜 마음이 얼굴에 드러났다.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할 때 부승원은 늘 반우희를 꾸짖기만 했었다. 그러나 정인 그룹에 들어가고 두 사람은 직급 차이로 꾸중할 기회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부승원이 반우희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고 같이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니... 반우희는 인정받는 기분이 들었다.물이 끓고 부승원은 면을 냄비에 넣었고 핸드폰을 꺼내 타이머를 눌렀다.반우희는 계속 부승원을 힐끔거렸고 부승원이 이렇게 추운 날 외투 안에 얇은 흰 셔츠만 입고 있는 게 보였다.‘음... 뭔가 잘생겨 보이는데?’반우희는 자신의 안목에 자신이 있었다. 레전드는 영원한 레전드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부승원은 진작 반우희의 시선은 눈치챘으나 그럴 여유가 없어 무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우희가 자신을 바라보다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모습이 딱 봐도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았다.
반우희는 의아해 되물었다.“네?”‘접시 가지고 오라고?’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부승원의 말에 고분고분 접시를 가지고 다시 나타났다.“여기요.”접시를 건네자 부승원은 반우희 손에 쥔 포크를 낚아채 자신이 건드리지 않은 부분의 스파게티를 덜어 그 접시에 올려줬다.“먹어.”반우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그게 아니라...”“조용히 해...”“네...”반우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슬쩍 돌렸다.‘뭐야. 누가 언제 스파게티 먹고 싶다고 했어?’‘그래도 나눠줬는데 한 입도 안 먹는 건 아니지.’그래서 반우희는 얌전히 자리에 앉아 스파게티를 먹기 시작했다.‘뭐지? 탄 거야?’반우희는 한 입 먹고 부승원을 향해 눈을 깜빡거렸다.부승원은 여전히 묵묵히 스파게티를 비웠다.그러자 반우희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방금까지 요리 잘한다고 그렇게 자랑했는데 소스를 태운 것도 모르다니.지금 보니 부승원도 가끔은 참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아니. 대표님은 좋은 사람 맞아. 전에 승주 사건 모든 변호사가 거절했는데 대표님만 받으셨잖아. 돈도 되지 않은 사건인데 정의를 위해 받으신 거지. 정의를 위해!’그 생각을 하니 부승원이 마치 부처님처럼 느껴졌다.‘그리고... 대표님은 정말 너무 잘생겼어!’반우희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는 없었으나 혹시 배가 부르지 않아 그런 건가 싶어 부승원은 또 냉장고에서 과일을 한가득 꺼내왔다.다시 자리로 돌아오니 반우희가 남겨준 스파게티는 별로 입도 대지 않고 어디 불편한 듯 자리만 고쳐 앉고 있었다.그래서 부승원은 아예 핸드폰을 꺼내 들고 문서를 보냈다.반우희는 새로운 업무가 생긴 줄 알고 눈을 반짝였다.“제가 뭘 해드리면 될까요?”“서재에서 프린트해 와. 펜도 챙겨오고.”“네!”반우희는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신이 난 채로 서재로 향했다.그리고 종이와 펜을 챙겨 다시 나타났다.부승원은 건네받지 않고 턱으로 반우희를 자리에 앉게 했다.반우희는 얌전히 자리에
부승원은 어렸을 때부터 성적이 늘 좋은 편이었고 또래 중에서 천재로 불렸다.그리고 대부분의 천재는 바보를 이해하기 어려웠다.반우희의 문제 풀이를 보며 부승원은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나도 알아요. 다시 할게요.”“자꾸 쳐다보지 마세요. 긴장된단 말이에요.”“차라리... 집에 가져가서 하면 안 될까요?”기초 문제 하나 또 틀리고 자꾸 시험지를 뒤로 빼는 모습에 부승원은 인상을 찌푸렸다.그리고 빠르게 반우희 손에 쥔 펜을 가져가 문제지 위로 엑스를 그렸다.반우희는 다시 찬찬히 읽어보더니 그제야 알겠다는 듯 말했다.“아, 4번이네!”문제를 제대로 읽지 않아 실수한 것이었다.부승원은 기혼 동료가 아이들 숙제를 가르치다가 혈압이 올라간다는 기분이 뭔지 알 것 같았다.눈앞의 반우희가 여전히 헤헤 웃고 있는 걸 보다가 부승원은 펜을 들어 반우희의 볼 위로 엑스를 그렸다.그러자 반우희는 빠르게 얼굴을 가리고 경악했다.‘지금 뭐 하는 거야!’부승원은 펜을 내려 두고 차갑게 말했다.“이젠 제대로 기억할 수 있겠지?”반우희가 입을 삐죽였다.“네...”“계속 해.”“네.”반우희는 도망칠 구멍이 보이지 않자 한숨을 내쉬고 다시 문제를 풀었다.연이어 정답을 맞히고 반우희가 꽤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자 부승원은 더 이상 개입하지 않았다.그래서 의자에 등을 기대 피곤한 몸을 쉬게 했다. 그러다가 집을 찾은 이유가 문서 때문이라는 게 떠올랐다.‘쯧. 저 멍청이 때문에 계획이 다 망가졌어.’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시험지를 모두 풀고 나니 시간이 많이 늦어버렸다.부승원은 부승희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방을 나서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문이 빼꼼 열리고 작은 머리가 쏙 보였다.부승원은 멈칫하고 반우희를 바라봤다.반우희는 토끼 모양인 귀여운 모자를 착용하고 있었고 볼에 그린 엑스표도 이미 지워져 있었다.“변호사님...”반우희는 늘 부승원을 말꼬리를 늘리며 불렀다.부승원은 고개를 돌렸고 서재의 온도가 후끈 올라가는
반우희는 발이 미끄러진 건지 크게 뒤로 넘어졌다!우당탕.“아이고. 내 엉덩이.”반우희는 눈 속에 파묻혀 앓는 소리를 냈다. 온몸에 찾아온 고통에 반우희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잠시 머물렀다.그러다가 숨을 고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발걸음 소리가 가까이 들려왔다.‘뭐지?’몸을 일으키려고 시도하는데 상대는 이미 반우희의 옆으로 다가왔다.“변호사님?”반우희는 의외라는 표정이었다.부승원은 급하게 아래층으로 내려와 호흡이 많이 거칠었다. 방금 창가에서 보다가 반우희가 사라지자 넘어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앉은 채로 꼼짝도 못 하는 반우희를 보며 부승원은 왠지 심장이 철렁했다.“일어나지 못하겠어?”반우희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 큰 어른이 이렇게 크게 넘어지다니.그래서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그냥 좀 쉬고 있었어요.”부승원이 인상을 찌푸렸다.“일단 일어나봐. 어디 다친 건 아니야?”“아, 네!”굳은 부승원의 표정에 반우희는 아픈 것도 꾹 참고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움직이다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나갔다.부승원은 빠르게 반우희를 부축했고 제대로 자리에 설 수 있자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몇 걸음 걸어봐.”“네네.”반우희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몇 걸음 걸었으나 다리를 절뚝였다.부승원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갔다.“어디가 아픈데? 왜 다리를 절어?”반우희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별거 아니에요. 엉덩이로 넘어져서 그래요.”반우희는 다시 헤헤 웃으며 말했다.“요즘 살이 쪄서 그런지 다행히 지방이 충격을 많이 흡수해 줬어요.”“...”부승원은 한참 침묵하다가 말했다.“오늘 집에 돌아가 지켜보고 내일 아침에도 아프면 병원 가.”반우희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시간이 많이 늦었고 더 지체를 하면 동생들이 걱정할 것 같아 다시 인사를 건네고 절뚝이며 밖으로 걸었다.부승원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가 멀어지는 반우희를 다시 불러세웠다.“왜요?”“기사는 왜 안으로 들어오지 않
부승원은 심장이 떨려왔고 이를 꽉 깨물어 겨우 표정 관리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반우희를 바라봤다.반우희는 크게 심호흡하더니 손가락질하며 말했다.“봐요! 변호사님도 넘어질 뻔했잖아요!”그리고 크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내가 많이 미끄럽다고 말했잖아요.”“...”감정에 무딘 반우희를 보며 부승원은 어이가 없었다.반우희는 한참 호탕하게 웃다가 부승원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다시 입을 다물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꽉 쥐고 있던 손의 힘을 스르르 풀었고 얼굴도 점점 붉어졌다.사실 반우희도 완전히 감정에 무딘 사람은 아니었다.부승원은 옅게 한숨을 쉬더니 다시 자세를 고쳐 안았다.“꽉 안아. 또 넘어지고 싶어?”그 말에 반우희는 부승원을 슬쩍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손에 힘을 주었다.추운 겨울밤, 두 사람은 뜨거운 온도를 함께 나눴다.몰래 침을 삼킨 반우희는 조용히 부승원을 살폈고 부승원은 반우희의 숨결이 얼굴과 목 언저리에 떨어지는 걸 느끼며 온몸이 간질거렸다.주변은 아주 조용했고 눈밭을 내딛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반우희는 왠지 온 세상에 두 사람만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왜 코트 하나만 입고 있어요?”“집히는 대로 입었어.”“안 추워요?”다시 얌전해진 반우희를 슬쩍 바라보다가 부승원이 물었다.“춥다고 하면 모자 빌려줄 거야?”“당연하죠.”반우희가 냉큼 대답했다.“...”부승원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고 반우희가 모자를 벗으려 손을 뻗자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너나 쓰고 있어. 난 안 추워.”“그래요.”그러자 반우희는 고분고분 손을 내렸다.오피스텔 아래층부터 대문까지는 멀지 않은 거리였으나 눈이 많이 쌓여 걸음걸이가 더디었다.대문에 거의 도착하고 보니 익숙한 차량이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기사는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있다가 부승원이 반우희를 안고 나오자 급하게 차에서 내렸다.반우희는 부끄러운 마음에 부승원더러 내려 달라고 말하려 했으나 무표
드디어 새해 아침이 밝았다.펑펑 내리던 눈이 드디어 새해 첫날엔 멈추고 따뜻한 햇살이 세상을 비췄다.양시연은 침대에 누워 꼼짝하지 않았으나 연정훈은 아침부터 바삐 움직이며 아침상을 가지고 나타났다.연정훈은 침대 옆에 앉아 양시연을 불렀고 양시연은 아직도 이불 안을 파고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연정훈이 허리로 손을 뻗어 겨우 자리에 앉게 했다.“아직 일어나고 싶지 않아요...”양시연은 연정훈의 어깨에 기대 칭얼거렸고 그 모습이 아기 고양이 같았다.연정훈은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어제 누가 아침 7시에 일어나 어머님 아버님께 인사 가겠다고 말했더라?”양시연은 눈을 감은 채로 웃음을 터뜨렸다.“말실수예요. 아침 7시에 엄마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인사를 드려요?”연정훈도 같이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런데 지금 벌써 9시가 다 되어가는걸.”“아이참. 엄마 9시에도 안 일어난단 말이에요.”“...”양시연은 연정훈의 허리를 잡고 품 안에 머리를 비볐다.어차피 중요한 일도 아니었으니 연정훈도 재촉하지 않고 양시연의 칭얼거림을 받아줬다.두 사람은 한참 알콩달콩하다가 고기만두 냄새를 맡은 양시연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난 양시연이 먼저 연정훈을 향해 손을 척 내밀었다.“세뱃돈 줘요!”연정훈은 미리 준비를 해뒀고 서랍을 열어 봉투 두 개를 건넸다.그러자 양시연은 활짝 웃으며 세뱃돈을 쥐고 배를 살살 어루만졌다.“아기야, 새해 복 많이 받아. 아빠가 우리 두 사람한테 세뱃돈도 챙겨줬어.”그리고 양시연은 다시 연정훈의 목에 팔을 둘렀다.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린 연정훈은 바로 양시연을 안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씻으러 가야지.’민수희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연호민은 세운을 떠나고 싶지 않아 했다. 그래서 연정훈의 부모님이 직접 세운으로 향했다.그렇기에 양시연과 연정훈은 전화로 인사를 대신했고 바로 양씨 저택으로 향했다.9시가 넘긴 시간이었으나 아래층엔 할아버지만 홀로 앉아
“널 낳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 다시 아이 낳고 싶지 않아.”양지원의 말에 양시연은 과거 양지원이 해준 말이 떠올랐다.그러고 보니 양석진도 다시 양지원을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하지 않을 것 같았다.모녀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연정훈과 양홍두가 바둑을 두는 게 보였다.양석진도 구경하고 있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양지원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러 떠났다.두 사람이 자리를 비우자 양홍두는 그곳을 슬쩍 보다가 혀를 찼다.‘나이가 몇인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애가 이렇게 지켜보고 있는데 말이야.’양시연과 연정훈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겨우 웃음을 참았다.두 사람은 양씨 가문에 한참 머물다가 여러 친척 집을 다니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그러니 양시연은 지칠 대로 지쳐버려 몸이 노곤했다.손님을 모두 보내고 연정훈은 양시연과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노곤하긴 한데 잠이 오지는 않아요.”연정훈은 요즘 양시연의 말이라면 하늘의 별도 따주고 싶은 심정이었고 양시연이 따분해 보이자 소파에 나란히 앉으며 이렇게 말했다.“승우가 매해 남산 저택에서 파티를 여는데, 같이 갈래?”“파티에서 뭘 하는데요?”“네가 생각하는 그 모든 게 있을 거야.”그러자 양시연이 눈을 반짝였다.“가요!”그렇게 두 사람은 바로 행동에 옮겼고 연정훈이 운전해 남산 저택으로 향했다.남산 저택 반경 1km 안으로 보이는 풍경 곳곳에 새해 느낌이 물씬 풍겼다. 이게 모두 남산 저택이 꾸민 거라 생각 하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느껴졌다.주차하고 차에서 내리자 누군가 양시연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시연 언니!”밝고 당찬 목소리가 들려오고 양시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번졌다.그래서 입구 쪽에 있는 반우희를 향해 손을 저었고 예상대로 세 꼬맹이도 함께 보였다.양시연은 연정훈의 팔에 팔짱을 걸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어떻게 다들 여기 있어요?”반우희가 대신 대답했다.“승주가 승우 씨한테 새해 인사를 해야 한다고 아우성쳤고 승우 씨가 흔쾌히 대
부승희는 화려한 옷차림으로, 또각또각 이곳으로 걸어왔다.이승우는 부승희를 바라보다가 또 양시연과 연정훈을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죄송해요. 요즘 밤을 자주 새웠더니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네요.”그리고 담배랑 라이터를 모두 한편에 내려 두었다.부승희는 그 옆자리에 앉더니 양시연과 연정훈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고 다시 이승우를 바라봤다.“대체 무슨 상황이야? 새해 전날까지 하다가 온 거야? 아주 영혼까지 털린 것 같은데?”“...”이승우는 자세를 바로 앉으며 말했다.“좀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어제 밤새운 건 새해 카운트 다운 때문이라고.”“어디에서 어떻게 밤을 새운 건지는 모르지.”부승희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침대에서도 카운트 다운은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그러자 연정훈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말조심해.”“아이도 가진 사람이 부끄러워하긴.”그러나 양시연이 뱃속 아기를 가리키자 부승희는 바로 알겠다는 듯 입의 지퍼를 닫는 행동을 했다.“아차차. 태교도 아주 중요하다는 걸 깜빡했어요.”부승희는 양시연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기야 태어나면 꼭 우리 오빠를 닮아 정직하고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해.”양시연은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부승원은 독설인 걸 제외하면 참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아이의 성별을 막론하고 부승원처럼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그런데 이승우가 이런 말을 했다.“넌 말해도 참. 정훈이 아이인데 네 오빠를 닮으라고 하면 뭐가 돼?”“...”“...”부승희는 쯧하고 혀를 차더니 손에 집히는 물건을 이승우에게 던졌다.“그 입 다물어.”이승우는 부승희가 던진 빵을 손에 쥐더니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방금까지 생기가 없던 얼굴에 드디어 웃음이 번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부승원도 도착했다.요즘 들어 양시연에게 있어 부승원은 ‘귀인’ 같은 사람이었고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부승원을 맞았다.그러나 부승원은 아주 침착하고 무뚝뚝했고 대체 누가 대표인지
양석진은 아무 내색하지 않고 양지원을 이끌어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누가 너 괴롭혔어?”“아니요!”배는 자꾸 쿡쿡 쑤셔오고 멀리서 진병수가 모르는 여자를 껴안고 있는 걸 보면 양석진도 본인이 없는 곳에 저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배가 아팠다.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아빠도 늘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양지원은 저런 행동에 큰 반감을 느꼈고 양석진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면 화가 났다.그런 생각을 하는데 양석진이 옆으로 다가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혹시 생리 시작한 거야?”“...”양지원이 아무 대답이 없자 양석진은 바로 눈치를 챘다.“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그리고 룸을 나선 양석진은 따뜻한 꿀물을 한 잔 가지고 돌아왔다.마침 두 사람을 지나치던 진병수는 꿀물과 화가 잔뜩 난 ‘공주님’을 번갈아 보며 혀를 쯧쯧 찼다.‘이게 동생이야? 딸이야?’따뜻한 꿀물을 마시자 몸이 녹아내렸고 양지원은 소파에 푹 기대앉았다.그리고 양석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아까 그 여자 누구예요?”양석진은 멈칫하다가 바로 상황 파악을 마쳤다.“연예인인데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사정이 딱해 보여서 병수더러 도와주라고 했었어.”양지원은 바로 시선을 흘렸다.“오빠는 다른 사람한테도 다 이렇게 친절해요?”“그 사람 연예인이 된 이유가 어머니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어머니를 결국 지키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양지원은 침묵했다.‘사정이 딱하긴 하네.’“그래도 오빠는 조심해야 해요. 아빠가 오빠를 정치인으로 키우려고 하는데 병수 오빠처럼 헤프게 행동하면 안 돼요.”양석진은 자신에게 훈수를 드는 양지원을 보며 며칠 전 양지원이 벌인 일을 떠올렸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알겠어.”구석 자리에서 양석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양지원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래서 양석진에게 청아에 대한 얘기를 더 들려달라고 했다.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양창수가 옆자리에 와 있었다.양지원은 양창수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손명우는 안경을 고쳐 쓰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날 그냥 보러 온 건 아니고, 드레스샵 깨부순 것 때문이지?”양지원은 조금 계면쩍은 기분이 들어 목을 가다듬었다.진병수는 장난기가 많았고 술잔을 들고 옆으로 앉으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뭐야? 우리 지원이가 언제부터 드레스에 관심을 가졌지? 혹시 연애라도 하는 거야?”소파에 앉아 있던 양석진은 제게 걸어오려는 여자를 눈빛으로 제압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양지원은 그걸 발견하고 득의양양해서 턱을 치켜들었다.‘역시 우리 오빠가 제일 멋있어.’“내가 왜 연애해요?”양지원은 다시 양석진의 옆자리로 앉으며 말을 이었다.“드레스 입는 사람은 꼭 연애하고 결혼할 사람이어야 하는 거예요? 드레스가 예쁘면 그냥 입을 수도 있는 거죠.”“그래도 굳이 창을 깨부술 필요는 없잖아.”진병수는 손명우를 가리키며 말했다.“명우한테 말만 하면 드레스는 얼마든지 입을 수 있어.”손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가게에 새로 턱시도 모델 많이 들어왔는데 관심 있으면 같이 사진도 찍어줄 수 있어.”양지원은 크게 관심이 생긴 건 아니었으나 손명우를 거절하기 애매했다.그때, 양석진이 디저트를 양지원의 앞으로 당겨주며 말했다.“아직 나이도 어린 게 무슨 웨딩드레스 사진을 찍는다고.”“오빠, 방금 너무 촌스러운 거 알아요?”양지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옆 사람들한테 말했다.“내 나이가 어려요? 진씨 고모는 내 나이 때 벌써 결혼 1주년이었어요.”“그건 예전 얘기고.”한강시 쪽은 말이 달랐지만 화서시는 한 10년 전만 해도 다들 결혼을 아주 어린 나이에 했었다.“그냥 모델이랑 같이 사진 찍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잖아.”진병수의 말에 양지원은 양석진의 표정을 살폈고 고민하다가 손을 저었다.“어휴, 내가 무슨 모델이랑 사진을 찍어요. 됐어요.”그렇게 사진 촬영은 일단락이 되었다.양지원이 들어온 뒤로 룸 안의 사람들은 행동을 조심하기 시작했다.양석진은 동생 양지원을 끔찍하게 챙겼고 진병수와 손명우는 크게
오토바이를 타고, 쓰레기통 따위로 창을 깨부수는 건 가히 그해의 유행이라 할 수 있었다.양지원은 그런 반항적인 일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기분이 저기압이라 분출한 곳이 필요했다.양석진이 옆에 있었다면 얼리고 달랬을 테지만 양창수는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했을 것이다.양홍두가 자리를 비우자 두 사람은 입에 모터가 달렸다.“형,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드레스샵은 손명우네 가게니 아무 문제 없어요.”양지원은 팔짱을 척 끼고 양석진의 앞으로 걸어갔다.“그냥 드레스뿐인데 아빠가 괜히 오바하시는 거예요. 내가 전에 그 불여우한테 전화했다고 지금 아니꼽게 보시는 거라고요.”양석진이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향해 말했다.“말 가려서 해.”양지원은 여전히 불만이라는 듯 입을 삐죽였다.‘계속하면 내가 손해니까 참아야지 뭐.’그리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오빠한테 굳이 이런 일로 마음 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양지원은 어린 시절처럼 양석진에게 딱 붙어 말했다.“참, 내 친구가 오빠한테 편지도 쓰고 선물도 챙겨줬어요.”양석진은 익숙하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난 그런 쪽으로 관심 없으니까 친구한테 다시 그런 걸 보내지 말라고 해. 난 공부에만 집중하고 싶으니까.”평소의 양지원은 양석진이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아주 흡족한 대답이었다.‘그래, 이게 맞아. 감히 누가 우리 오빠 옆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겠어?’‘꿈 깨라고!’양지원은 기분이 퍽 좋아졌고 제 친구들한테 전화를 돌려 오빠의 말을 전했다.다른 사람은 그냥 알겠다고 넘어갔지만 친구 길예은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너희 오빠 정말 아무한테도 관심이 없다고? 네가 애초에 편지를 건네지 않은 건 아니고?”“야, 길예은,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저번에 너한테 석진 오빠 선물 부탁했더니 그대로 다시 돌려줬잖아. 너희 오빠는 무슨 눈이 그렇게 높아? 정말 우리 중에서 한 명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길예은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작가의 말:아래 내용은 네 시기로 나뉘어 진행됩니다.소년 — 짝사랑이라는 이름의 시작.청년 — 서른 번째 생일, 그리고 아련한 재회.중년 — 오랜 시간 끝에 처음으로 엮인 둘의 이야기.결혼 후 — 이제는 함께 걷는 달콤한 나날들.각 시기를 함께하며, 두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깊어지는지 지켜봐 주세요.--------[소년기]양석진과 양지원이 혼인 신고서를 제출한 당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사무실부터 관저까지 하루 종일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았다.양석진에게 결혼 축하 인사를 건넨 첫 번째 사람이 드물게 보인다는 양석진의 미소를 목격했다는 소문이 전해진 뒤로, 다들 기회를 찾아 양석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그 미소를 직접 확인하려 했다.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고, 나이가 지긋한 기사가 관저로 바라대 주다가 낮에 들었던 소문을 듣고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의원님, 결혼 축하합니다. 내일에도 같은 시간으로 마중 오면 될까요?”양석진은 꽉 채운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며 미소를 지은 채 차에서 내렸다.“내일은 휴가입니다.”홀로 차에 남겨진 기사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예쁜 노을 아래, 양석진이 정원 안으로 걸어가다가 원피스를 입은 양지원이 얇은 외투 하나 걸치고 무언가 휘젓고 있는 게 보였다.그러자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른기침을 몇 번 했다고 양지원이 배즙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그런데 뭘 또 정원에서, 그것도 이렇게 큰 가마에 만들고 있는 거야?’양석진이 양지원을 부르려는 찰나, 우지끈하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양지원이 너무 힘을 주어 젓다가 나무 주걱이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양석진은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양지원이 이어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 지켜봤다.양지원은 외투를 다시 고쳐 입으며 주변을 살폈고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걸 확인하고는 위층을 향해 외쳤다.“창수 씨! 왜 부러진 나무 주걱을 주신 거예요!”“...”이어 2층 창문이 열리고 양창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양지원의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