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불행한 결혼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이수는 상대가 먼저 무너지도록 불륜을 설계한다. 가정폭력, 집착, 협박 속에서 의뢰인들을 구해내던 그녀는 점점 더 위험한 진실과 마주하게 되고, 자신의 상처까지 들키게 된다. 사람을 무너뜨리는 데 익숙했던 여자와 그런 그녀를 끝까지 기다리는 남자. 이것은 이혼을 설계하는 사람들의 가장 위험한 사랑 이야기다.
더 보기비는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급하지도, 망설이지도 않는 속도였다.
우산을 쓴 사람보다 쓰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어차피 젖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얼굴들 같았다.
구급차가 교차로를 가르며 지나갔다.
사이렌 소리는 빗소리에 섞여 둔해졌고,
사람들은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떤 소음도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 오후였다.
이수는 미용실 안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들었다기보다는 유리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진동을 느꼈다.
장미 미용실.
간판의 ‘장미’는 오래전에 색이 바랬다.
붉었던 글자는 연분홍에 가까웠고,
밤이 되면 조명에 눌려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수는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손님은 없었다.
예약도 없었고, 문을 닫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가위는 이미 내려놓은 상태였다.
오늘은 머리를 자를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예감은 대개 틀리지 않았다.
문이 열렸다.
문 위에 달린 작은 종이 울렸다.
짧고 가벼운 소리.
이수는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여자였다.
마흔 초반쯤.
나이를 짐작하게 만드는 건 얼굴이 아니라 어깨였다.
힘이 빠진 어깨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여자는 미용실 입구에 잠시 서 있었다.
들어와도 되는지, 돌아가야 하는지 결정을 미루는 사람처럼.
“머리 하시게요?”
이수는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높지도, 낮지도 않게.
감정을 섞지 않은 톤.
“편하신 데 앉으세요.”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안쪽으로 몇 발짝 들어왔다.
의자에 앉지 않은 채,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기요…”
목소리는 작았고, 끝이 조금 떨렸다.
“건너 건너서 들었어요.”
“뭘요.”
이수는 묻지 않아도 될 질문을 했다.
상대가 말을 꺼낼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방식이었다.
여자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결심을 여러 번 되돌려 삼킨 얼굴이었다.
“이혼할 수 있게… 도와주신다고.”
이수의 손이 멈췄다.
정확히 말하면, 멈춘 것처럼 보였다.
사실은 이미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저는 미용사예요.”
그 말은 거절이 아니었다.
확인에 가까웠다.
여자는 대답 대신 스카프를 풀었다.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소매를 걷었다.
마지막에는 윗옷까지 들어 올렸다.
이수는 그제야 여자의 몸을 보았다.
팔 안쪽. 손목. 옆구리.
시간을 두고 반복된 흔적들이었다.
어제 생긴 것도, 오래된 것도 섞여 있었다.
그건 넘어져서 생기는 상처가 아니었다.
부딪혀서 남는 자국도 아니었다.
이수는 그 차이를 알고 있었다.
너무 오래, 너무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었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명하지 않았다. 부탁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이미 충분했다.
“남편이 무서워요.”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조금 더 또렷했다.
“이혼은… 절대 안 해준대요.”
이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자기한테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요.”
그 말이 끝났을 때, 미용실 안은 아주 조용해졌다.
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안쪽에는 닿지 않았다.
이수는 천천히 다가가 여자의 앞에 섰다.
가까웠지만, 닿지는 않았다.
“제가요.”
이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와드릴 수 있어요.”
여자는 그제야 숨을 내쉬고, 울지는 않았다.
그럴 여유는 이미 지나간 얼굴이었다.
이수는 의자를 끌어당겼다.
여자를 앉게 했다.
그 순간, 이수의 표정은 미용사였다.
그러나 눈은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이건 상담이 아니었다.
치료도 아니었다.
제의였다.
그날 밤, 이수는 집으로 돌아와 손을 씻었다.
비누 거품이 손등을 덮었다가 흘러내렸다.
몇 번이나 문질렀지만 깨끗해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거울 속 얼굴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이수는 수건으로 손을 닦고 불을 껐다.
침대에 누웠지만 쉽게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여자의 팔이 떠올랐다.
상처의 모양은 기억보다 오래 남았다.
이수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생각하지 않았다.
망설이지도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은 다시 시작될 거라는 걸.’
그리고 자신이 그걸 멈추지 않을 거라는 걸.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천천히, 끝날 기색 없이.
비가 그친 뒤의 아침은 이상하게 소리가 컸다.
물기 머금은 도로 위로 타이어가 지나가는 소리.
담벼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젖은 흙이 숨 쉬는 냄새.
이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창문 틈으로 찬 공기가 들어왔다.
춥다는 감각은 늦게 왔다.
먼저 온 건, 몸의 긴장이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급한 동작은 하지 않았다.
급해질수록 실수가 많아지는 걸, 이수는 알고 있었으니까.
세면대 앞에서 물을 틀었다.
차가운 물이 손 끝을 때리는 것 같았고,
그래도 이수는 손 끝의 시린 느낌을 이기고 손을 씻었다.
비누 거품이 생겼다가 금방 사라졌고,
어젯밤에도 씼었는데, 다시 씻게 되는 손이 있었다.
거울 속 얼굴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눈 밑이 조금 더 무거워 보였다.
잠이 부족한 얼굴이 아니라, 생각이 오래 남은 얼굴.
이수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머리를 대충 묶었다.
미용실로 내려갔다.
장미 미용실의 셔터를 올리는 소리가 좁은 골목에 퍼졌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은 없었고,
고양이 한 마리가 담장 위를 걸었다가 사라질 뿐이었다.
이수는 불을 켰다.
거울 앞에 앉아 잠시 공간을 바라보았다.
이 미용실은 늘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단정하고, 조용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
그래야 했다.
상담이 이루어질수록 겉은 더 평범해야 했다.
숨겨야 하는 건 늘 안쪽에 있었고, 안쪽은 티를 내면 안 됐다.
이수는 의자를 닦고, 가위를 정렬했다.
아무도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정돈은 변명이었다.
오늘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머리를 자르는 일이 아니었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어제 그 여자였다.
심미선.
어제와 같은 옷. 어제보다 조금 더 초조한 눈.
다만 오늘은 스카프를 단단히 묶고 있었다.
상처를 보여주는 건 한 번이면 충분하다는 듯이.
미선은 의자에 앉지 못하고 서 있었다.
어제의 말을 되새기러 온 사람처럼.
이수는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상대가 먼저 무너져야, 대화가 시작된다.
미선이 입술을 열었다.
“진짜… 도와주실 수 있어요?”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도, 작게도 아닌 정도로.
“남편 성함.”
미선이 잠깐 멈칫했다. 이수는 기다렸다.
이 질문이 ‘시작’이라는 걸, 미선도 알아차려야 했다.
“…최진상.”
이수는 그 이름을 한 번 마음속으로 굴렸다.
이름은 대개 주인을 닮지 않지만, 가끔 주인의 태도를 드러낸다.
“직업은요.”
“카페요. 혼자 해요.”
“어디.”
미선이 주소를 말했다.
설해시 외곽. 큰 길에서 한 번 꺾고, 한 번 더 들어가는 자리.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폭행은… 경찰에 신고하셨어요?”
미선이 고개를 저었다.
그 대답은 흔했다. 흔해서, 더 무거웠다.
“왜요.”
“진짜로 죽일까 봐요.”
미선은 대답하면서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수는 그 문장을 이해했다.
경찰을 부르면, 오늘 밤이 더 길어진다는 뜻.
이수는 잠시 손끝으로 테이블 가장자리를 문질렀다.
“진상 씨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뭐예요.”
미선이 눈을 깜빡였다.
이 질문은 이상하게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수에게는 늘 가장 먼저 필요한 질문이었다.
“사람들이… 자길 우습게 보는 거요.”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일 좋아하는 건요.”
미선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했다.
“…젊은 여자요.”
말이 끝났을 때, 미선의 얼굴은 조금 붉어져 있었다.
수치심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홍조였다.
이수는 그 홍조를 가만히 봤다.
그리고 아주 짧게 말했다.
“알겠어요.”
미선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요?”
이수는 미선의 눈을 똑바로 보지 않았다.
대신 거울을 봤다.
거울 속에 비친 미선의 얼굴이 더 잘 보였다.
사람은 정면보다, 반사된 얼굴에서 더 솔직해진다.
“오늘부터 당신은 아무것도 안 하시면 돼요.”
미선의 눈이 흔들렸다.
“정말… 아무것도요?”
“네. 아무것도.”
이수는 덧붙였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제일 어려워요.”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미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믿었다기보다, 믿어야 했던 사람의 끄덕임.
미선이 나간 뒤, 미용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수는 잠시 서 있었다.
그 다음엔 움직였다.
오늘은 ‘접근’해야 했다.
이수는 화장을 시작했다.
평소의 미용실 화장과는 달랐다.
미용실 화장은 ‘단정’이 기준이었다면,
오늘의 화장은 ‘주목’이 기준이었다.
그러나 과하면 안 됐다.
신고를 마치고 돌아온 다음 날, 지연의 하루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전화도 없었고, 문자도 오지 않았다.준혁의 이름이 화면에 뜨지 않는 것만으로도 공기가 달라 보였다.지연은 그 조용함을 의심부터 했다.무언가를 준비하는 침묵인지, 아니면 정말로 멈춘 건지 아직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지연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가다시 내려놓았다.확인할 게 없다는 사실이 낯설었다.지난 몇 주 동안은 늘 뭔가를 확인하며 하루를 시작했는데,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이게 정상인데.’지연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정상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멀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회사에 도착했을 때도 별다른 일은 없었다.보안팀에서 연락이 오지도 않았고, 동료들 역시 조심스러운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지연은 자기 자리에서 업무를 처리하며 시간이 흐르는 걸 느리게 체감했다.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이렇게 길게 느껴진 건 오랜만이었다.점심 무렵, 이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오늘은 별다른 접촉 없었나요?지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답장을 보냈다.-네. 지금까지는 아무 연락도 없어요.곧 답장이 왔다.-그렇다면 오늘은 그대로 유지하시면 됩니다.-괜히 먼저 움직이실 필요는 없어요.지연은 그 문장을 읽으며 숨을 내쉬었다.‘유지하라’는 말이 이렇게 편안하게 들릴 줄은 몰랐다.퇴근 무렵, 준혁에게서 처음으로 이틀째 아무 소식이 없다는 사실이 조금씩 실감 났다.지연은 회사 건물을 나서며 주변을 둘러봤다.그는 없었다.늘 서 있던 자리도,늘 눈에 밟히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그 사실이 안도라기보다는 공백으로 느껴졌다.지연은 그대로 장미 미용실로 향했다.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수는 테이블 위를 정리하고 있었다.“오셨어요.”이수가 먼저 말했다.“네.”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어요.”이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잘 지나가신 겁니다.”“지금 단계에서는 아무 일도 없다는 게 가장 중요한 결과
그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시작됐다.지연은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옷을 입고 정해진 길로 출근했다.의식적으로 일상을 유지하려 애썼다.일상이 무너지면 사람은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지연은 그 단계로 가지 않겠다고 이미 마음먹은 상태였다.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메일 한 통이 눈에 들어왔다.[개인 요청]보낸 사람은 강준혁이었다.제목만 봐도 공식과 사적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리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지연은 메일을 열지 않았다.열지 않고도 내용이 어떤지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대신 메일 헤더를 캡처했다.보낸 시각, 수신 대상, 참조 여부.기록은 이제 습관이 됐다.오전 업무를 처리하던 중, 관리팀에서 지연을 불렀다.“지연 씨,”“개인적인 문제로 업무에 불편이 있으면 말씀 주세요.”그 문장은 배려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선 긋기였다.지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미 보안팀과 공유 중입니다.”그 말에 상대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이제 지연은 설명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조치가 진행 중인 당사자였다.점심시간이 지나자 준혁에게서 문자가 왔다.-메일 확인했어?-이렇게까지 만들고 싶지 않았어.지연은 그 문장을 읽으며 손가락을 멈췄다.‘만들고 싶지 않았다’는 말은‘지금 만든 건 네 책임’이라는 논리의 변형이었다.지연은 답하지 않았다.대신 장미 미용실로 향할 시간을 확인했다.퇴근길, 지연은 일부러 사람 많은 지하철을 탔다.비좁았지만 그 밀도가 지금은 필요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이 분명해졌다.장미 미용실 문을 열자이수와 하빈이 이미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었다.지연은 말없이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메일 보냈지.”이수가 먼저 말했다.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회사 메일.”“경계 넘었어.”하빈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이제 공식 기록으로 묶을 수 있어.”이수는 노트를 펼쳤다.“지금부터는,”그가 말했다.“네가 반응하지 않아도 사건이 진행돼.”
지연은 그날 아침, 회사로 가는 발걸음이 조금 느렸다.몸이 무거워서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급해질수록 상대의 리듬에 말려들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다.회사 건물 앞에서 잠시 멈춰 서 유리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봤다.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오히려 선이 또렷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동료 몇 명과 눈이 마주쳤다.예전 같았으면 괜히 표정을 정리했을 텐데,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자기 얼굴을 자기 손으로 관리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지연 씨.”누군가 조심스럽게 불렀다.“어제… 괜찮았어요?”그 질문에는 호기심보다 경계가 섞여 있었다.사람들은 이미 무언가를 눈치채고 있었다.“네.”지연은 짧게 대답했다.“괜찮아요.”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오전 회의 도중, 준혁의 이름이 처음으로 회의실 안에서 나왔다.직접 언급된 건 아니었다.대신 “외부 인사 출입 관리 강화”라는 건조한 안건으로 포장돼 있었다.지연은 그 문장을 듣는 순간 이 상황이 개인사의 범위를 이미 넘어섰다는 걸 느꼈다.기록은 이렇게 작동했다.소리를 키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공식 언어 안으로 스며든다.점심시간, 지연은 회사 근처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었다.휴대폰이 진동했다.강준혁이었다.-왜 이렇게까지 해?-회사까지 움직이게 만들고.지연은 그 문장을 읽으며 처음으로 상대의 초조함을 선명하게 느꼈다.예전 같았으면 그 초조함이 자기 책임처럼 느껴졌을 것이다.지금은 달랐다.지연은 답장을 하지 않고 메시지를 저장했다.오후 12:43 - 책임 전가 시도그날 오후, 회사 로비에서 작은 소동이 있었다.준혁이 경비에게 막혀 한동안 언성을 높였다는 소문이었다.지연은 그 장면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묘하게도 상상이 정확했다.공공장소, 통제가 안 되는 상황,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그는 그런 공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퇴근 무렵, 보안팀에서 지연을 다시 불렀다.“오늘도 접촉 시도가 있었습니
그날 밤 이후로, 지연의 하루는 조금 달라졌다.무언가 특별한 일이 생겨서가 아니라, 특별하지 않은 일들까지 전부 의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아침에 집을 나설 때 문을 잠그는 손의 각도,엘리베이터 안에서 거울을 보는 시간,회사 앞에서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보는 습관.예전에는 그저 불안이라고 넘겼던 행동들이 이제는 자기 보호라는 이름으로 정리되고 있었다.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지연은 휴대폰을 확인했다.준혁에게서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어제는 내가 너무했다.-손대려고 한 건 아니었어.지연은 그 문장을 천천히 읽었다.‘하려고 한 건 아니었다’는 말은 ‘할 수도 있었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지연은 그 메시지를 새 폴더에 저장했다.[접촉 시도- 신체적 위협 암시]폴더 이름을 정하는 순간, 문장은 더 이상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게 됐다.점심시간, 지연은 회사 근처 카페가 아니라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갔다.사람이 많은 곳이 오히려 편했다.시선이 있다는 사실이 안전처럼 느껴졌다.자리에 앉자 이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오늘은 어때요.지연은 짧게 답했다.-괜찮아요. 기록 중이에요잠시 후, 전화가 걸려왔다.“잘하고 있어.”이수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지금 네가 하는 건 버티는 게 아니라 쌓는 거야.”“쌓아서… 뭐가 달라질까?”“사람이 아니라 상황이 바뀌어.”그 말은 지연에게 이상한 안정감을 줬다.퇴근 무렵, 회사 보안팀에서 연락이 왔다.“지연 씨,”“어제 로비에서 불편한 상황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지연은 잠시 말을 고르다가 사실대로 말했다.“제 배우자입니다.”“현재… 접촉을 원하지 않는 상태예요.”그 말은 처음으로 입 밖으로 꺼낸 선언이었다.보안팀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앞으로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바로 말씀 주세요.” “기록 남겨두겠습니다.”지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풀리는 걸 느꼈다.혼자만 알고 있던 일이 처음으로 공식적인 언어를 얻은 느낌이었다.그날 저녁, 지연은 장미 미용
남자들은 너무 완벽한 것 앞에서 경계한다.완벽은 함정의 냄새가 난다.대신 ‘조금 과한 듯한 자연스러움’이 필요했다.그래야 자기 욕망을 자기 탓으로 돌릴 수 있다.이수는 파운데이션을 얇게 올렸다.눈매를 길게 뺐다.립은 선명하지만 젖지 않게. 향수는 거의 쓰지 않았다.향은 기억을 남기고, 기억은 나중에 문제가 된다.옷은 고민하지 않았다.고민이 길어지면 마음이 늦어진다.이수는 얇은 니트와 코트를 걸쳤다.너무 화려하지 않은 색.하지만 얼굴은 눈에 띄게.거울 앞에서 한 번 더 확인했다.표정은 비워두었다.웃는 얼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자, 익숙한 냄새가 먼저 닿았다.커피가 아니라, 커피가 오래 머문 자리의 냄새였다.하루 이틀 사이에 바뀔 수 없는 공기였다.이수는 가방을 내려놓고 앞치마를 집어 들었다.끈을 묶는 손길이 잠시 느려졌다가 다시 속도를 찾았는데, 매듭을 완전히 당긴 뒤에도 손이 한 번 더 머물렀다.단단히 묶어두는 습관은, 이미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진상은 카운터 뒤에서 잔을 닦고 있었다.닦을 필요가 없는 잔이었다.투명했고, 얼룩도 없었다.그럼에도 그는 같은 자리를 몇 번이나 문질렀다.“오늘은 조
잔의 수위는 더 이상 눈에 띄게 줄지 않았다.마시지 않아도, 시간은 잔을 비워 갔다.술집 안의 시간은 사람의 선택과 상관없이 흘렀다.진상은 물컵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물이 반쯤 남아 있었다.그는 그 반을 오래 바라봤다.채우지 않은 선택과, 비우지 않은 선택 사이에서 사람은 자주 멈춘다.“이상하죠.”그가 말했다.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충동은 아니었다.“뭐가요.”이수는 잔을 내려놓은 채로 물었다.목소리는 낮았고, 끝이 흐리지 않았다.“이런 날은…”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말을 삼킨다기보다, 말을 고르는 얼굴이
비는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급하지도, 망설이지도 않는 속도였다.우산을 쓴 사람보다 쓰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어차피 젖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얼굴들 같았다.구급차가 교차로를 가르며 지나갔다.사이렌 소리는 빗소리에 섞여 둔해졌고,사람들은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어떤 소음도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 오후였다.이수는 미용실 안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정확히 말하면, 들었다기보다는 유리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진동을 느꼈다.장미 미용실.간판의 ‘장미’는 오래전에 색이 바랬다.붉었던 글자는 연분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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