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네요! 구주 씨는 서울 사람이셨나요?”은설아가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네.”“이제 알겠어요! 구주 씨 오해는 하지 말아 주세요. 전에 말했듯이, 구주 씨를 따라 어디든 가더라도 저는 괜찮아요.” 은설아는 윤구주가 자신을 오해할지 걱정되어 서둘러 해명했다.윤구주는 은설아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은설아가 정말로 허영심이 많고 화려한 생활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면, 연예계 생활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고 자신을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참, 구주 씨. 저 이제 연예계에서 완전히 은퇴했어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대스타라고 부르지 마세요. 그냥 설아라고 불러 주실래요?”은설아는 아련하게 윤구주를 바라보며 부탁했다. 윤구주와 더 이상 거리감이 생기지 않길 바랐다. 이제는 윤구주와 함께하기로 결심했다.“알겠어요. 그럼 설아 씨라고 부를게요.”“네! 좋아요!”그렇게 윤구주는 은설아를 데리고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옛날 작은 집으로 향했다.택시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멀리서 담배를 피우던 용민, 철영, 그리고 재이가 눈에 들어왔다.택시가 다가오자, 사람들은 호기심에 그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어? 저하 아니야?”“봐봐. 저하 옆에 미인이 있잖아!”“저 여자 누구야? 정말 예쁘네!”사람들의 수군거림 속에 택시는 마당 앞에 멈췄다. 차 문이 열리고 윤구주가 대스타 은설아와 함께 내렸다.세 사람은 윤구주가 내리자마자 공손하게 입을 모아 말했다.“저하!”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모두 은설아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내가 소개해 줄게. 이쪽은 대스타 은설아야. 이제부터 우리와 함께할 거야.”윤구주가 소개하자, 세 사람은 놀라움에 빠졌다. 특히 재이는 은설아를 상하로 찬찬히 훑어본 후 갑자기 외쳤다.“당신이 바로 은설아 씨? 노래도 하고 연기도 하시는 그 대스타 은설아? TV에서 뵌 적 있어요!”은설아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설아님. 너무 겸손하시네요!”“저희와 함께하다니, 정말 영광
이렇게 해서 은설아는 윤구주의 대가족에 완전히 녹아들었다.한때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톱스타였던 은설아의 등장은 모든 사람을 기쁘게 했다.정태웅이든, 천현수든, 용민이나 철영까지도 매일 은설아 주위를 돌며 신경을 썼다.왜냐하면 은설아는 외모나 분위기 모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 충분했기 때문이다.오직 공수이만이 얼굴에 묘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은설아를 볼 때마다 무슨 이유인지 도망치기 일쑤였다.마치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말이다.그래서 은설아는 공수이를 따로 불렀다.공수이는 은설아를 보자마자 도망가려 했으나, 은설아는 그를 불러 세웠다.공수이는 멈춰 서서 수줍은 얼굴로 돌아보며 말했다.“예쁜 누나. 전에 정말 죄송했습니다. 사과드릴게요.”“사과? 저한테 왜 사과를 해요? 제 목숨을 구해 준 걸 잊었어요?” “하지만! 저는 미처 몰랐어요. 누나가 형님의 여자인 줄도 모르고…”공수이는 말을 하다가 점점 얼굴이 뜨거워지며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너무 생각이 많아요! 저는 비록 구주 씨를 좋아하지만, 구주 씨는 저를 사랑하지 않아요. 그러니 지금 저는 아직 그의 여자가 아니에요.” 은설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네?”공수이는 머리를 긁적였다.“하지만 상관없어요. 형님의 여자인데, 제가 가까이 있는 건 안 될 것 같아요!” 공수이가 작게 중얼거렸다.은설아는 그 말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이 작은 스님이 너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괜찮아요. 저는 수이 씨를 항상 동생처럼 생각하고 있어요.”은설아가 덧붙였다.공수이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살짝 아팠지만, 이내 형님의 여자라는 걸 떠올리고 마음을 정리했다.“예쁜 누나, 사실 우리 형님도 누나를 많이 신경 쓰고 있어요.”공수이가 갑자기 말했다.“저를 신경 쓴다고?”“그럼요! 생각해 보세요. 제가 그날 유명전의 늙은 거북이 같은 놈들이 누나를 노리고 있다고 말했을 때, 형님이 바로 누나를 여기로 데리고 왔잖아요. 그게 신경 쓰는 게 아니면 뭐겠어요?” 공수이가 눈을 깜박이며 말
알고 보니 매일 이 시간은 바로 이홍연이 폭발하는 시간이었다!방 안에서 들려오는 고함을 들으며, 주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이 여섯 번째 공주가 이렇게 소리치고 나면 곧바로 후회할 것이라는 사실을 주도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주도의 생각이 맞았다. 곧 방 안에서 이홍연의 후회에 가득 찬 나지막한 자책 소리가 들려왔다.“왜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된 거지? 어릴 때는 분명 나한테 직접 말했었는데, 나랑 결혼하겠다고! 지금은 왜 이러는 거야? 이 멍청한 녀석이 혹시 무슨 사정이 있는 건가? 아니면 진짜로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된 건가?”이홍연은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화가 나면 날수록, 더 참을 수 없었다.쿵!이홍연은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 앞에 있던 육도 주도는 그 발차기에 날아가 땅바닥을 구르며 한 바퀴를 돌았다.“공주님, 또 왜 이러십니까?”주도는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땅에서 일어나 이홍연에게 물었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저랑 갑시다!”이홍연은 말하면서 그대로 문밖으로 나섰다.“공주님,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주도는 이홍연을 따라가며 물었다.“어디겠어요? 당연히 그 멍청한 윤구주를 찾으러 가야죠!”“또 그 무서운 녀석을 찾아가신다고요? 제발 공주님, 저 좀 살려주세요! 그 녀석은 정말 무서운 놈입니다. 저는 그를 이길 수 없어요!”주도는 울상을 지으며 처음 윤구주를 만났던 기억을 떠올렸다.한때 천하를 제패했던 육도의 절정이었던 그는 살아오면서 그런 상황을 겪은 적이 없었다.지금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이 무적의 절정은 등골이 서늘해졌다.지금 이 공주가 자신에게 다시 윤구주를 만나러 가자고 하니, 주도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다.“참 한심하네요! 예전에는 육도의 절정이라고 하더니, 이제 와서는 그 멍청한 놈 하나도 못 이긴다고요?”이홍연은 허리에 손을 얹고 눈을 부릅뜨며 술꾼을 꾸짖었다.술꾼은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정말입니다! 제가 본 그 친구는 완전 괴물 같
갑작스럽게 나타난 공주 앞에서 여섯 명의 하녀는 공포에 질려 몸을 떨기 시작했다.“방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말해 봐.”이홍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하녀들을 향해 추궁했다.“공주님. 저희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공주에 관해 말한 소녀는 두려움에 떨며 대답했다.“방금 너희가 무슨 얘기하는지 똑똑히 들었는데도, 아직도 잡아떼겠다는 거냐? 나를 화나게 해서 모두 벌받고 싶다는 거야?” 이홍연은 목소리를 높이며 날카롭게 말했다.그 말에 하녀들은 즉시 겁에 질렸다.“공주님, 제발 용서해 주세요! 제 입이 방정이었어요. 제가 잘못 말했습니다. 공주님, 제발 살려 주세요!” 동그란 얼굴의 소녀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이홍연에게 빌었다.“잘못 말했다고? 무슨 말을 잘못했는지 말해 봐.” 이홍연이 물었다.하녀는 겁에 질려 입을 우물쭈물하며 도무지 말을 꺼내지 못했다.“걱정 하지마. 네가 솔직히 말하면 절대 너를 나무라지 않을 거야.”이홍연은 겁먹은 소녀를 달래듯 말했다.이홍연의 말에 용기를 얻은 하녀는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제 입이 방정이었습니다. 공주님을 연애에 푹 빠진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뭐? 내가 연애에 빠진 사람이라고?”그 말을 듣고 이홍연은 갑자기 배를 잡고 크게 웃기 시작했다.하녀들은 공주가 화내기는커녕 웃음을 참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어리둥절했다.공주는 눈물을 흘릴 정도로 웃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뒤로 젖혔다.한참을 웃고 난 후 이홍연이 말했다. “세상에, 내가 연애에 빠졌다고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야!”그 말에 하녀들은 몸을 움찔했다.“하지만 너희 말이 맞아. 난 정말 사랑에 빠진 사람이 맞아.”이홍연은 다시 한 마디 덧붙였다.하녀들은 공주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그저 긴장한 채 서 있었다.하지만 이홍연은 전혀 화내는 기색 없이 말했다.“인제 그만 무릎 꿇고 일어나. 너희에게 화내지 않을 거야. 너희 말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확실히 사
이홍연은 기분 좋게 차에서 주도와 함께 윤구주를 찾아가고 있었다. 앞좌석에 앉은 택시 기사는 나이가 사십 대쯤 되어 보이는 기름진 중년 남자였다.한 손으로는 운전하고, 다른 손으로는 휴대폰을 들고 짧은 동영상을 보고 있었다.“와, 이게 뭐야? 저 유명한 여자 연예인이 남자친구 스캔들 때문에 연예계를 떠났다고? 정말 웃기네”그 중년 기사는 혼잣말하며 비꼬듯 말했다.“두 분, 요즘 연예계 소식 좀 보고 계시는가요?”중년 남자가 갑자기 뒤를 돌아 이홍연과 주도에게 물었다.“저희와 한 말인가요?"이홍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렇습니다. 손님. 요즘 연예계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뉴스로 가득해요. 국제적인 대스타 은설아가 어떤 남자랑 공개적으로 포옹한 사진이 찍혔어요. 지금은 은설아가 그 평범한 남자 때문에 연예계를 떠났다는 소식까지 나온 걸 보셨어요?”그 말을 들은 이홍연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이홍연은 화진의 여섯 번째 공주였기에, 여자 연예인과 배우 같은 사람들은 그의 눈에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게다가, 이홍연은 애초에 연예계 같은 혼란스러운 세계에는 관심조차 없었다.“생각해 보세요. 돈도 많고 얼굴도 예쁜 국제적인 스타가 어떻게 평범한 남자 하나 때문에 연예계를 떠나겠어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 남자가 그렇게 대단한가? 그렇게 가치 있는 사람일까요? 두 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중년 기사는 계속 혼잣말을 늘어놓았다.원래 연예계 얘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이홍연은 기사가 점점 열을 올리는 말을 듣고 나서 궁금해졌다.“그 은설아라는 여자가 그렇게 유명한가요?”“그럼요, 당연히 유명하죠! 작년에만 해도 영화 세 편을 찍었고, 올해는 전국에서 60번 넘는 공연을 열었어요! 지금 아마도 연예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스타일 거에요.”중년 남자는 은설아에 대해 말할 때, 눈에 띄게 설레는 기색을 보였다.이홍연은 그저 무심하게 듣고 다시 질문하였다.“그 미녀 스타 사진 좀 보여줄 수 있나요?” “손님 휴대폰으로
“세상에, 정말로 윤구주네요? 왜 사진 속에 있는 거죠?”주도도 그를 알아보았다.심상치 않음을 느낀 이홍연은 서둘러 스크린을 내렸고 사진 아래에 영상 링크가 있는 걸 보았다.링크를 클릭하자 은설아가 은퇴를 선언한 뒤 팬들과 기자들 앞에서 윤구주의 팔에 팔짱을 끼고 돈킹 호텔을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그 광경을 본 순간 이홍연은 마음이 차게 식었다.바보라도 눈치챌 수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팔짱을 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이다.아래 댓글들을 본 이홍연은 넋이 나갔다.[은설아 씨 남자 친구가 사실은 저 사람이었군요!][얼굴은 꽤 잘생겼네요. 설마 제비는 아니겠죠?][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은설아 씨가 저 녀석에게 푹 빠졌을 리가 없죠!][정말 화가 나네요. 저 남자 대체 누구길래 우리에게서 은설아 씨를 빼앗아 간 거죠?]댓글들을 본 이홍연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졌다.옆에 있던 주도는 이홍연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순간 어떻게 그녀를 위로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그는 화진의 여섯째 공주인 이홍연이 줄곧 윤구주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태화루에서 윤구주가 공공연히 거절했는데도 이홍연은 여전히 그를 사랑했다.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막북에서 10년간 윤구주를 기다렸을 리도 없었다.그런데 윤구주가 여자 연예인과 만나고 있었다니, 누구라도 견딜 수 없을 것이다.이홍연은 애써 분노를 다스렸다.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계속해 다른 기사를 확인해 보았다.그중 한 기사에는 윤구주와 은설아가 돈킹 호텔 앞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사진 속 은설아는 윤구주의 품에 폭 안겨 있었고 윤구주는 두 팔을 벌리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그 사진을 본 이홍연은 더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윤구주! 이 망할 놈!”이홍연이 사납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그 목소리에 앞에서 운전을 하고 있던 중년 남성은 깜짝 놀라서 서둘러 고개를 돌려 물었다.“손님, 왜 그러세요?”“세워요! 당장
황성 공주저.수십 명의 하녀들이 전전긍긍한 상태로 문밖에 서서 안쪽에서 들려오는 물건이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몸을 흠칫 떨면서도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화를 내는 사람은 다름 아닌 화진의 여섯째 공주 이홍연이었기 때문이다.윤구주가 대스타 은설아와 만난다는 걸 알게 된 뒤로 이홍연은 완전히 폭발했다.그녀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진심을 다해 사랑했던 남자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된 건 배신과 다름없었다.이홍연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그녀는 오늘 윤구주를 찾아가서 그에게 자신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얘기해 줄 생각이었다.그러나 지금 그 모든 사랑이 증오로 변했다.“죽여버릴 거야! 반드시 죽여서 내게 진 빚을 모조리 갚게 할 거야!”분노에 찬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이때 이홍연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공주님 왜 저러시지? 오늘 외출하실 때까지만 해도 괜찮지 않았어? 왜 갑자기 저렇게 돌변한 거지?”한 하녀가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분명 공주님이 좋아했던 그 남자 때문일 거야!”“그래?”“당연하지! 소문에 따르면 그 남자가 우리 화진 제일의 왕 구주왕이라고 해. 공주님이 막북에서 10년간 지내셨던 것도 그 남자 때문이라고 들었어. 그런데 그 남자가 지금 다른 여자랑 만나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공주님이 화가 나셨지!”“휴, 공주님이 슬퍼하실 만하네. 구주왕 사실은 나쁜 놈이었잖아?”하녀들은 작은 목소리로 의논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서 이홍연을 위로하거나 설득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공주저 안.이홍연은 마치 화가 난 암사자처럼 난폭해졌다.그녀는 두 눈이 벌겠는데 너무 오래 울어서 눈가가 퉁퉁 부어있었다.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무시무시한 것은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오심이었다.그 증오심으로 인해 이홍연은 이성을 잃었다.“죽여버릴 거야. 윤구주 그 빌어먹을 놈을 죽여서 내게 진 빚을 갚게 할 거야!”이홍연은 악랄한 표정으로 또박또박 말했다.“주도! 지금 당장 가서 윤구주를 죽여버려
내각대학사 은성구의 곁에는 위풍당당한 젊은 청년이 무릎 꿇고 있었다.남자는 검은색 비단옷을 입고 있었고 허리춤에는 옥패를 하나 달고 있었는데 남다른 분위기 때문에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내각의 여덟 장로 중 수장인 은성구가 데려온 비단옷을 입은 소년이 대체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금란 대전 아래 무릎을 꿇고 있는 건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이때 이홍연이 빨개진 눈으로 씩씩거리면서 다가왔다.오늘 그녀는 단단히 화가 났다.그것은 전부 윤구주 때문이었다.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이홍연은 아버지를 찾아가서 대신 복수해달라고 할 생각이었다.이홍연이 금란 대전 아래에 도착하자마자 내각의 여덟 장로 중 한 명인 은성구가 이홍연을 발견했다.“공주님을 뵙습니다!”은성구는 서둘러 예를 갖추었다.은성구가 외치자 그의 곁에 있던 청년의 시선 또한 이홍연에게로 향했다.이홍연의 아름다운 모습을 본 순간 청년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는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했다.‘이분이 바로 공주님이셨군!’이홍연은 은성구의 목소리를 듣고는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은성구 대학사, 왜 여기서 무릎 꿇고 있는 거죠?”“공주님, 저희는 국주님을 뵈러 왔습니다.”“어머, 여러분도 우리 아버지를 보러 오신 건가요?”“네!”“그렇다면 저와 함께 들어가요.”내각대학사 은성구는 그 말을 듣고 살짝 당황했다. 그가 입을 열려는데 금란 대전 안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나왔다.그 사람은 환관 옷을 입고 있었고 흰 수염이 있었다.그는 아주 활력 넘치는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쉽게 나이를 추측할 수가 없었다.그가 바로 황성 최고의 고수라고 불리는 내시 총관 한진모였다.한진모는 모습을 드러내더니 싱긋 웃으면서 먼저 이홍연을 바라보았다.“공주님께서 오셨군요. 공주님을 뵙습니다!”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살짝 숙였다.이홍연은 싸늘한 눈빛으로 한진모를 힐끗 보았다.“우리 아버지는요? 전 아버지를 뵈어야겠어요!”이홍연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한진모가 대답했다.“공주님,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