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도진 우상, 이곳엔 왜 온 겁니까?”이때 정태웅이 갑자기 차가운 얼굴로 다가왔다.민규현과 천현수도 전부 달갑지 않은 얼굴로 걸어서 나왔다.육도진은 서둘러 말했다.“저하께서 돌아오셨다는 말을 듣고 인사를 전하러 온 겁니다. 저하께서는 설국을 굴복시켜 백 년 동안 우리 화진의 속국으로 지내게 만드셨으니 얼마나 경사입니까?”“흠, 소식이 빠르군요. 아니면 뭐 달리 음모라도 있습니까?”정태웅은 품 안에서 비수를 꺼내 들더니 차가운 얼굴로 육도진을 향해 말했다.육도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정태웅 씨, 저는 저하께 인사를 드리러 온 것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절 죽이기라도 하실 생각입니까?”정태웅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육도진 우상이 무슨 속셈을 숨기고 있을지 누가 압니까?”“이...”육도진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정말로 어처구니가 없군요! 말이 통하질 않네요!”말을 마친 뒤 육도진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윤구주에게 말했다.“저하, 이자들을 보세요!”윤구주는 육도진에게 나쁜 의도는 없다는 걸 알았기에 손을 저었다.“정태웅, 너희는 일단 물러나. 난 육도진 우상과 단둘이 얘기를 좀 나눌 거야.”육도진이 명령을 내리자 정태웅 등 사람들은 그제야 물러났다.다들 물러난 뒤 윤구주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육도진을 바라보았다.“육도진 우상, 이렇게 늦은 시간에 찾아오신 걸 보니 중요한 일이 있는 건가?”육도진은 웃으면서 빠르게 윤구주의 곁으로 다가갔다.“저는 정말로 단순히 저하께 인사를 드리러 온 겁니다.”“인사?”“황성에서 폐황령을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육도진 우상은 한가한가 보군.”육도진은 그의 말에 말문이 턱 막혔다.그는 헛기침을 하면서 멋쩍게 말했다.“역시 저하를 속일 수는 없군요! 휴, 솔직히 얘기하겠습니다. 제가 오늘 밤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는 저하께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입니다.”육도진은 그제야 본심을 드러냈다.“무슨 일인데?”윤구주가 물었다.“저하께서는 종문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일을 알고 계시겠죠
평화는 피를 흘려야 얻을 수 있는 법이라는 말에 육도진은 사색에 잠겼다.육도진은 한참 뒤 갑자기 윤구주를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어찌 됐든 제 인사를 받아주십시오. 국주님뿐만 아니라 화진의 백성들을 대신하여 인사하는 겁니다.”말을 마친 뒤 한 나라의 우상인 육도진이 윤구주를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그건 가정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였다.윤구주는 줄곧 화진 백성들을 지켰다.6년 전, 10개국 간의 전쟁에서 윤구주는 홀로 병사들을 이끌고 화진을 지켜냈다.그는 평화를 되찾았고 무도의 질서를 지켰다.덕분에 화진 무도는 처음으로 통일될 수 있었다.6년 뒤인 지금, 윤구주는 접경지대를 지키고 설국을 속국으로 만들었다.문벌과 세가 사람들을 처단한 이유 또한 화진의 번영을 위해서였다.윤구주가 설국을 수복하고 엄청난 업적을 세운 지금, 종문에서는 오히려 윤구주를 처단하게 나섰다.누구라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저하, 앞으로 저와 황성은 저하 편입니다. 저희의 힘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육도진은 윤구주의 패기에 영향을 받고 참지 못하고 말했다.윤구주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괜찮아. 국주님께서 폐황령을 내린 뜻은 알겠어. 국주님께서는 조정과 부대가 이 혼란스러운 국면에 휘말리는 걸 원하지 않는 거겠지. 그렇다면 나는 국주님의 바람을 이루어주겠어. 앞으로 모든 건 나 혼자 짊어질 거야.”윤구주가 그렇게 얘기하자 육도진은 코를 훌쩍였고 눈가가 조금 시큰했다.어쩔 수 없었다.감동이 너무 컸다.화진에 윤구주 같은 왕이 있다는 건 엄청난 복이었다.“저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더 할 얘기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저하께 한 가지 사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부디 저하께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육도진은 말을 마친 뒤 품 안에서 비밀 서신을 하나 꺼내더니 그것을 윤구주에게 건넸다.“이건 저희 황성에서 방금 얻은 정보입니다. 저희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6대종문이 곧 비밀리에 회의를 열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100년 만에 나타난
정태웅, 천현수는 자매가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하지 않았고 공수이는 눈을 깜빡이면서 옆에 있던 연규비를 바라보았다.흰 치마를 입은 연규비는 아주 아름다웠다.다리는 길고 하얬으며 매끈하고 쭉 뻗었다.그녀는 몸매가 좋았고 성숙한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물씬 느껴졌기에 공수이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정말 아름다운 누나네요. 그런데 우리 형님의 여자라니, 너무 아쉽네요.”공수이는 한숨을 쉬었지만 연규비의 앞으로 걸어갔다.“안녕하세요, 예쁜 누나! 전 공수이라고 해요. 구주 형님의 동생이에요! 누나가 우리 형님의 여자라는 말을 들었는데 혹시 저에게 누나의 지인들을 소개해 줄 수 있나요?”“꺼져!”공수이가 말을 마치자마자 연규비는 곧바로 대꾸했다.그는 공수이를 무시하고 곧장 떠났고 공수이는 매우 억울했다.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왜 미녀들은 다 그에게 사나운 것일까?‘젠장, 진짜 모르겠어!’잔뜩 풀이 죽은 공수이는 홀로 자리를 떴다....윤구주가 드디어 돌아왔고, 마당은 떠들썩해졌다.거실 안에는 민규현, 천현수가 윤구주에게 최근 서울에서 일어났던 일과 며칠 전 종문이 습격한 사실을 얘기했다.“어떤 종문들이 온 거야?”윤구주가 평온한 어투로 물었다,“저하, 6대종문 중 하나인 현문과 자운각이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남궁서준이 검으로 그들을 막아주지 않았다면 아마...”민규현은 상황을 솔직히 얘기했다.그 말을 들은 윤구주의 얼굴에 흐뭇한 표정이 떠올랐다.“그 두 종문을 제외한 다른 종문은?”윤구주가 또 물었다.“다른 종문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6대종문 출신 사람들이 다 있는 것 같습니다.”6대종문에서 모두 모습을 드러냈다는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살짝 심각해졌다.오직 윤구주만이 아주 태연해 보였다.그는 한참 뒤에야 천천히 말했다.“육도진 우상의 말이 맞는 것 같아. 6대종문에서 회의를 연다던 게 사실인 것 같네.”그 소식에 민규현과 다른 이들은 깜짝 놀랐다.“저하
민규현이 제일 처음 시작했다.그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더니 조심스럽게 머리 위 떠다니는 자줏빛 기운을 바라보다가 두 손으로 수인을 맺었다. 곧 젓가락 굵기의 자줏빛 기운이 그의 정수리를 꿰뚫고 그의 체내로 흡수되었다.쿵!자줏빛 기운이 몸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민규현의 체내에서 기혈이 맹렬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욱 무시무시한 것은 그의 규혈이 그 순간 모두 열렸다는 점이다.규혈이 열리자 민규현은 순간 체내에 뜨거운 에너지가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걸 느꼈다.“흡수!”그는 크게 소리를 질렀고 호마공을 사용하자 넘실대는 무홍의 기운이 그 순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잠시 뒤, 민규현은 자신의 실력이 질적으로 향상됐음을 느꼈다.옆에 있던 천현수와 정태웅 등 사람들도 민규현이 자줏빛 기운을 흡수하는 걸 보고 따라서 흡수하기 시작했다....다들 모두 수련에 집중하고 있을 때 윤구주는 뒷산에 도착했다.뒷산에는 어린아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검도를 수련하고 있었다.그 아이는 바로 남궁서준이었다.남궁서준은 현문의 도자와 자운각 사람들을 상대한 뒤로 자신의 검도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를 깨달았다.비록 그는 절정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놀라운 검의를 지녀 정3품 절정 강자도 그를 얕볼 수 없었다.윤구주가 도착하자 남궁서준은 서늘한 눈빛으로 말했다.“누구야?”고개를 들어 윤구주를 본 순간, 남궁서준은 흥분해서 펄쩍 뛰었다.“형!”그는 단번에 윤구주의 곁으로 달려갔다.“좋아, 좋아. 잠깐 안 본 사이에 검도 수준이 더 늘었구나.”윤구주는 흐뭇한 얼굴로 남궁서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이건 다 형님의 공로예요. 지난번에 형님께서 검의를 느끼라고 하셔서 경지를 돌파할 수 있었어요.”남궁서준은 앳된 얼굴을 들고 선망하는 눈길로 윤구주를 바라보았다.윤구주는 웃었다.윤구주는 진심으로 남궁서준을 아꼈고 그를 친동생처럼 여겼다.심지어 그는 자신의 팔기지까지 흔쾌히 남궁서준에게 가르쳐주었다.“형님! 태웅 형님 말씀을 들어 보니 종문에서 형님을 제거하
윤구주는 다시 서울로 돌아온 뒤 우선 소채은 등 사람들의 지낼 곳을 마련했다.그러고는 6대종문과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문벌, 세가 출신의 사람들을 상대할 준비를 했다.지금까지 수만 명의 무인들이 전국 각지에서 서울로 모여들었다.그중에는 문벌, 세가 출신의 사람들도 있었고 아닌 사람들도 있었다.대부분은 문벌, 세가 출신이 아니었지만 중요한 건 그들의 수가 많다는 점이었다.방 안에서 민규현, 천현수, 정태웅 등 사람들은 정보를 수집하면서 현재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형님, 상황을 보니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수만 명의 무인들이 이미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지금 바로 저하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천현수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민규현에게 물었고 민규현은 안색이 좋지 않았다.윤구주의 자줏빛 기운을 흡수한 뒤 민규현의 실력은 눈에 띄게 상승했다.현재 그는 무홍의 기운이 넘치는 상태로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빌어먹을 놈들이구나! 전부 죽어 마땅한 놈들이야!”“그놈들을 제외하고 종문 쪽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어?”민규현이 계속해 물었다.“아직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제 동쪽에 칠수방의 사람이 나타났습니다.”천현수가 대답했다.“칠수방? 절세 미녀들만 제자로 받아준다는 문파 말이야?”민규현이 물었다.“네.”이때 정태웅이 갑자기 끼어들었다.“와, 세상에 그런 문파도 있습니까? 전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태웅이 형은 매일 술을 마시고 여자들과 노는데 정신이 팔렸으니 어떻게 그런 걸 알겠어?”천현수가 정태웅을 향해 눈을 흘기면서 말했고 욕을 먹은 정태웅도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다.그는 오히려 뻔뻔하게 물었다.“현수야, 얼른 얘기해 봐. 그 칠수방은 대체 어떤 문파야? 왜 절세 미녀들만 제자로 받아주는 거야?”천현수는 칠수방의 상황을 간단히 얘기했다.칠수방은 6대종문 중 유일하게 여제자들만 있는 문파였고, 모든 제자들이 다 꽃처럼 아름다웠다.소문에 따르면 칠수방 주인의 이름은 여제라 하고 삼절칠금채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한다
정태웅은 공수이가 사랑 때문에 상처받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공수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전부 공수이를 좋아하지 않았고 모두 윤구주를 좋아했다. 그러니 공수이는 매우 슬플 것이다.정태웅은 미소 띤 얼굴로 공수이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야비하게 말했다.“예쁜 여자를 만나고 싶은 거 아니었어?”“그거 당연하죠. 인생에 여자가 없으면 얼마나 무료해요!”“헤헤, 내가 아까 엄청난 정보를 알아 왔거든. 이번에는 분명 예쁜 여자를 찾을 수 있을 거야!”정태웅은 음흉한 얼굴로 말했다.“됐어요, 형님. 전 룸살롱이나 클럽의 여자들에게는 관심이 없어요. 전 진지하게 연애를 해보면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느껴보고 싶어요.”공수이가 방황하는 눈빛으로 말했다.“뭐라는 거야? 내가 언제 룸살롱 여자들을 소개해 준다고 했어? 이번에 나는 아주 엄청난 미녀들의 정보를 알아냈다고. 그것도 종문 출신의 미녀들이야!”그 말을 들은 공수이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태웅이 형님, 그게 정말이에요? 룸살롱 누나들이 아니에요?”“물론이지!”정태웅의 진지한 표정을 본 공수이는 순간 흥미가 생겨서 잠깐 고민하다가 물었다.“태웅이 형님, 얼른 말씀해 보세요. 어디 여자들이에요?”정태웅은 히죽 웃었다.“칠수방이라고 들어봤어?”“칠수방이요?”공수이는 한참을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칠수방이라는 곳은 아주 엄청난 곳이야. 우리 화진의 6대종문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종문 제자들이 전부 여자야. 그것도 전부 절세 미녀들이지! 삼절칠금채라고 들어봤어? 삼절칠금채는 칠수방의 7대 미녀들이야. 전해지는 데 따르면 칠수방의 칠금채 중 한 명을 손에 넣으면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대. 게다가 그들은 무려 일곱 명이야...”정태웅은 그렇게 말하면서 공수이를 향해 음흉하게 눈을 깜빡였다.공수이는 그 말을 듣자 눈동자가 마치 불타오르듯 무척 빛났다.그는 정태웅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말했다.“형님, 형님! 얼른 말씀해 보세요. 그 칠금채는 어디를 가면 볼 수 있나요? 저 보고 싶어요!
황성에서 폐황령을 내린 뒤 서울은 완전히 개방되었고 많은 무인들이 출입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였다.이 순간 서울 동부의 번화한 거리 위에는 무인들이 거들먹거리면서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그들 중 일부는 문벌 출신이고 일부는 세가 출신이며 또 다른 별 볼 일 없는 문파 출신도 있었다.수많은 무인들이 오가는 가운데 노인 한 명과 소녀 한 명이 보였다.노인은 50대로 보였는데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했고, 두 손에 굳은살이 가득한 걸 보니 무인이 틀림없었다.그의 곁에는 어린 소녀 한 명이 있었다.소녀는 머리를 묶었고 피부가 구릿빛이라 아주 건강해 보였다.두 사람은 누가 봐도 타지에서 온 무인이었다.그들은 짐을 메고 걸으면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할아버지, 서울의 닭도리탕이 그렇게 맛있다던데 저 닭도리탕 먹고 힢어요!”소녀는 걸으면서 노인에게 말했다.닭도리탕을 먹은 뒤 소녀는 가게 앞에 앉아서 오가는 무인들을 바라보면서 물었다.“할아버지, 왜 이렇게 많은 무인들이 서울에 모여든 걸까요? 대체 어떤 대단한 인물이 초대한 걸까요?”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끊임없이 보이는 무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백 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종문이 나서서 초대한 거라고 해.”“종문이요?”소녀는 그 말을 듣고 조금 놀란 듯했다.“그래. 너도 알다시피 우리 화진은 무력으로 나라를 세웠고 3대 서열은 오랜 역사가 있어. 3대 서열 중 가장 강한 건 바로 종문이지. 그런데 종문에서 아주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우리와 같은 무인들은 당연히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하지.”노인이 말했다.“할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소문에 의하면 종문의 강자들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한다던데 만약 그 사람들을 만난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아요.”소녀가 말했다.“음? 하지만 할아버지, 종문 사람들이 그동안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이번에는 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걸까요?”소녀가 궁금한 듯 물었다.노인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손녀
칠수방을 이끄는 사람은 안희정이었다.안희정은 비록 나이가 아주 많았지만 얼굴을 통해 젊었을 적 매우 아름다운 미인이었을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어르신, 저희 언제 6종 회의에 참석해요?”질문을 한 사람은 아주 늘씬한 여성이었다. 여자는 매우 차갑고 도도해 보였다. 그녀는 안희정을 바라보며 물었다.절정 기운을 지닌 안희정은 덤덤히 대꾸했다.“내일이라고 하던데.”“저희 정말로 구주왕을 상대하는 건가요?”늘씬한 여자가 다시 물었다.질문을 받은 노인은 음산한 눈빛으로 말했다.“구주왕은 안하무인이고 우리 3대 서열조차 안중에 두지 않아. 그렇게 건방진 놈에게는 교훈을 줘야 해.”“하지만 어르신... 전 그 사람이 꽤 좋은 사람처럼 보였는데요. 지난번에 절 난처하게 하지도 않았고요.”이때 갑자기 요염한 여자가 걸어왔다.자세히 보니 그녀는 바로 흑여산맥에 나타난 적이 있었던 칠금채 중 한 명인 차비연이었다.“어머, 넷째 언니. 설마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된 건 아니죠?”다른 요염한 여자가 걸어 나오면서 차비연에게 말했다.차비연은 키득대며 웃었다.“좋아하면 뭐 어때? 그 사람은 잘생긴 데다가 실력도 아주 강하다고. 그런 멋진 남자를 세상에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어?”“뭐 일리 있는 말이네요. 그런데 그 남자 정말로 그렇게 잘생겼어요?”“일곱째야, 내가 이제 구경시켜 줄게. 보면 알 거야.”“그래요? 그러면 우리도 같이 데려가 줘요!”다른 여자들도 웃으며 차비연에게 다가갔다.“다들 그만해. 지금은 중요한 일부터 처리해야 해!”이때 그들을 이끌던 안희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그녀가 명령을 내리자 다들 조용해졌다.“그거 아니? 소문에 따르면 현문과 자운각 모두 패배했다.”안희정이 갑자기 말했다.안희정의 말에 여자들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현문과 자운각은 항상 나서길 좋아했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않았어요. 그들이 당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차비연이 말했다.“넷째 언니 말이 맞아요. 현문의 도자인지 뭔지 하는 놈은 자기가
단 한 걸음,그 한 걸음만 넘기면, 그는 곧 성급 바로 직전 경지에 이른다.그리고 그 마지막 문턱을 박살내는 순간 반쯤 성인이 된 경지, 반성급이다!지금 이 자리, 그 반성급 경지에 선 자는 바로 인마라고 불리는 무명이었다.“과연... 화진의 인황, 구주왕이라 불릴 자격은 있군. 하지만 너도 알겠지. 지금 네 수준으론 몸을 직접 이 판에 던지지 않는 이상 나랑 맞붙을 자격조차 없어. 네가 그 잘난 원신출체를 어떻게 하겠다는지 구경이나 해보자고. ”무명이 입꼬리를 비틀며 코웃음쳤다.팔기귀일에 도달한 윤구주의 전투력은 이미 황의 지경을 뛰어넘었다.하지만 무명과의 경지 차이는 여전히 너무 컸다.실력은 분명 엄청났지만 격이 다르였다.지금 상태로도 보통의 황자의 경지까지 초월한 상태지만 무명을 상대하긴 아직 한참 부족했다.심지어 무명이랑 싸울 실력은커녕 참마검조차 손에 제대로 못 잡는 게 현실이었다.“팔기로 부족하다면... 제구기는 어때? 구기:적선!”부우우우웅!윤구주의 온몸을 하얀 선기가 감싸는 순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웃고 있던 무명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뭐라고? 이건 네 따위가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니잖아! ”그 순간, 무명조차 숨을 삼켰다.이건 상식의 틀을 깨부수는 광경이었다.근대에 들어서면서 도에 대한 수련는 사실상 약해졌다.그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세상에 흐르는 천지영기가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봉신전쟁 당시, 상상을 초월하는 영기가 소모됐고 그 전쟁이 끝난 후 곤륜구역은 세상의 영기 90%를 신계에 봉인해버렸다.거기서 마음껏 영기를 탕진한 것도 모자라 바깥의 산수들까지 무분별하게 빨아들인 탓에세상의 영기는 걷잡을 수 없이 줄어들고 말았다.결국 세상은 고위 수련자가 태어나기 어려운 구조가 되었다.그래서 화진에선 500년에 한 번 황자가 나올까 말까 할 정도이고 황자의 경지에 도달하는 건 지독하게 어려운 일이었다.임정설이 황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처음부터 그가 강해서가 아니라 윤구주를 돕기 위해 왕
마기가 검종 제자들의 혼백에 침투하자 그 순간 제자들의 몸에서 시커먼 마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이를 목격한 장인 대진인은 망설임 없이 즉시 결단을 내렸다. 오염된 제자들을 그 자리에서 곧바로 정화해 버린 것이다.“모든 제자들아, 입문 첫날 내가 분명히 말했을 것이다. 서요산은 찬란한 성지 화진 정통의 계승지다. 정은 사악함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정은 사악함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은 바로 서요산 제자들이 평생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는 도의였다.입문과 동시에 깨달음을 얻은 그들은 언젠가 반드시 도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저 화진 정통의 수호자가 되기 위해서였다.그 순간 진요탑 외곽에서는 7대 진인을 중심으로 전 종문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진요탑을 사수하고 있었다.하늘을 뒤덮을 듯한 마기의 기세는 점점 거세져 어느새 검종의 경내 전역을 삼켜버렸다.검종 제자들은 마기를 막아내면서도 동시에 진요탑의 결계를 유지해야 하는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정도를 지키는 일은 그만큼 고통스럽고 힘든 투쟁이었다.산 아래 상황도 마찬가지로 치열했다.온갖 요괴와 귀신들이 들이닥치는 가운데 임정설은 황운을 등에 업고 이씨 가문의 국운을 모두 모아 홀로 수백만 마기를 막아서고 있었다.백호는 마인으로 완전히 변신해 광란의 충격 속으로 몸을 던졌고, 스스로 마를 품은 채 적진을 난도질했다.청해는 천뢰신술을 펼쳐 수만 개의 천뢰를 무기로 변환시켜 온갖 사도와 악귀를 쓸어내기 시작했다.그 무렵 진요탑 내부에서 풍무극의 기세는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구주야, 내 한계에 도달했다. 이제 내 500년 수련의 혼을 너에게 바치겠다."”풍무극의 준비는 이미 완료되었다.그는 미리 준비해 둔 제천 법기를 꺼냈고 전법이 발동되는 순간 그의 육신은 산산조각 부서졌다.그의 정기와 천지 정기를 모두 품은 찬란한 진신 영혼은 한 자루의 참마검으로 변해 윤구주 앞에 떠올랐다.“풍 종주...” 윤구주는 입술을 깨물었다.슬프고 아쉬
윤구주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새로운 국운의 기운이 그의 발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그가 진요탑의 문에 도달했을 무렵 모든 국운이 윤구주에게 집중되었다.윤구주의 주변으로는 천인신광이 펼쳐져 있었다.이 순간만큼은 그가 천지의 주재자 화진의 영겁을 관통한 유일한 존재였다.윤구주는 홀로 진요탑 안으로 들어섰다.겉보기에 거대한 산 같았던 진요탑의 내부는 참혹한 말세의 풍경이었다. 땅은 끝없이 펼쳐진 용암으로 뒤덮여 있었고 하늘에서는 강줄기가 거꾸로 흘러내리고 있었다.불과 물이 충돌할 때마다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격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거꾸로 흐르는 강물 위에 한 노인이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백발이 성성한 그 인물은 다름 아닌 서요산 검종의 종주였다.밖에서 보이던 강건한 중년의 모습은 단지 화신에 불과했으며, 본체는 수백 년 전부터 이 진요탑에서 마인을 봉인해 왔다.서요산 검종 종주는 극도로 지쳐 있었고 이제는 마지막 호흡으로 버티고 있었다.“드디어 왔구나.” 서요산 검종 종주는 허약한 전음으로 말을 건넸다.“오백 년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종주님.” 윤구주는 고개를 숙였다.풍무극은 현 서요산의 종주이자 당대 최고의 영웅, 화진 제일 검으로 불리던 남자였다.원래는 풍속을 다루는 수련자로 젊은 시절엔 검 하나로 화진을 호령한 사내로 알려졌다.그의 검은 아무도 궤적을 볼 수 없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500년 전 마인이 봉인되고 서요산의 조사가 승천한 후, 풍무극은 서요산의 거자로서 종주의 자리를 이어받았다.그날 이후 진요탑에 몸을 묻고 마인과의 싸움을 500년간 지속해 왔다.풍을 다루던 그였지만 지속적인 봉인을 위해 익숙하지 않은 수속까지 수련하며 지금까지 버텨왔다.그가 마도에 빠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기적이었다.“그래도 괜찮다. 다행히 이 시대에 또다시 인황이 나왔으니. 화진은 연달아 두 명의 인황을 배출했다. 임정설이 인황에 등극한 지금 쇠락하던 이씨 가문의 국운이 다시 살아났다. 그가 천지의
마인이 출현하면 곤륜 구역조차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서요산 검종의 진요탑은 이미 오백 년 동안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다.이는 곧 그 마인이 오백 년 동안 진요탑 안에 봉인되어 있었음을 의미했다.“우리가 가진 유일한 이점은 저 마인이 지난 오백 년간 수련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 오백 년 동안 분명 무언가를 '깨달았을' 가능성도 있겠지요. 정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사도가 존재하는 법입니다. 만약 그가 이곳을 벗어나 다시 한번 돌파에 성공하여 진정한 성인의 경지에 오른다면… 그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전 우리 종문의 선대 종주께서 이 마인을 직접 봉인하셨습니다. 하지만 선대 종주께서는 진요탑만으로는 그를 완전히 봉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찍이 아셨지요. 그래서 마침내 구천으로 비상하셔서 바깥 세계에 존재한다는 신기를 찾기 위해 떠나신 것입니다.”장인 대진인이 비밀을 털어놓자 임정설은 왜 그 옛날 서요산 검종을 창립한 선조가 갑자기 사라졌는지 이해했다.“구천을 비상했다고? 전설 속 그 이야기 설마 전부 사실이었단 말인가? 이 세상 위에 더 위대한 세계가 있다는 건가?” 임정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들은 바로는 성인이란 육지에서 신선이 된 자를 이르는 말이고 준성은 그보다 한 단계 아래 반쯤 신선이 된 존재라 하더군요. 우리보다 더 풍부한 영기의 세계가 과연 존재하는지는 이 몸 역시 감히 짐작할 수 없습니다.” 장인 대진인은 고개를 저었다.그때였다.진요탑이 거칠게 흔들렸고 모든 호법 제자의 얼굴이 딱딱해졌다.수련이 부족한 제자 몇몇은 그 자리에서 마기의 침식으로 피를 토했다.“모든 제자에게 고한다. 나와 함께 현문을 수호하라.” 장인 대진인이 친히 자리에 앉아 온 종문의 기운을 모아 마인을 억제하기 시작했다.마인은 일시적으로 제압되었지만 산 밖의 요괴들과 악귀들은 마기의 부름을 받아 사방팔방에서 서요산으로 몰려들고 있었다.임정설은 이제 자신이 이곳에 온 진짜 이
“저하,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그를 죽여야 합니까? 저자의 기운이 이토록 흉악한데 성수의 혈기로 진압할 순 없습니까?” 백호는 이미 싸우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안 된다. 너희 네 명이 함께라면 잠시나마 억누를 수는 있겠지만, 너희는 그저 성수의 정혈을 가졌을 뿐이니 마인을 완전히 없애려면 성수가 직접 나타나야 한다. 지금 이 세상에 성수가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스럽다.”윤구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말을 마친 윤구주는 곧장 진요탑 쪽으로 향했다.백호와 임정설, 청해가 함께 가서 돕고자 했으나 장인 대진인이 그들을 가로막았다.“이 마인은 오직 구주만이 상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 국주님, 곧 전투가 시작될 터인데 서요산의 진법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 호법의 중임을 몇 분께 맡기겠습니다.”장인 대진인이 임정설에게 경건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좋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저 마인을 죽이고야 말겠다.” 임정설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황자의 위엄을 한껏 드높였다.화진의 존망이 걸린 일이라면 임정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하지만 마기가 몰려와 서요산 전체를 뒤덮고 세상이 오직 흑백 두 가지 색깔만으로 변해버리며 그 끔찍한 살기가 강림했을 때 임정설마저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떨렸다.“이 마인의 기운이 이렇게까지 무서울 줄이야.” 임정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마기로 가득 찼고 윤구주마저 그 기세에 눌리고 있었다.진요탑에서 흘러나온 마기는 실체가 되어 넘쳐흘렀다. 마기가 나타나자 서요산을 지키는 모든 검종 제자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어떤 제자는 순간적으로 십여 년을 늙어버렸다.수련이 부족하면 수명으로라도 채워야 하는 참혹한 상황이었다.웅웅.하늘에는 먹구름이 밀집했고 그 안에서 요괴의 번개가 끊임없이 터졌다.“이젠 영기조차 요기로 변하고 있다. 풍수 비술로 보건대 머지않아 이곳에서 요마가 출현하겠구나.” 임정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요산 외부에서 짙은 요기
도가는 인연이라는 두 글자를 대단히 중히 여긴다.그의 한 번의 인연, 한 번의 생각은 곧 만백성의 생사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윤구주가 정상에 오르자 앞서 온 다른 이들과는 달리 서요산 검종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깊은 존경을 표했다. 그들이 경배한 대상은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라 구주의 저하, 화진의 인황, 오방 천지의 주재자였다.“모두 일어나십시오. 제가 오늘 서요산에 온 이유는 오직 진요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진요탑 안의 마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문 씨 세가의 역심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마인을 죽여야만 문 씨 세가의 야심도 함께 근절할 수 있습니다.”윤구주는 서요산 검종의 모든 제자를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이번 서요산 행차의 목적은 바로 문 씨 세가의 역심을 뿌리째 뽑는 것이었다.검종 제자들이 앞장서 일행을 이끌었고 모두가 금정을 지나 뒷산으로 향했다.뒷산에 막 들어서자마자 음산한 기운이 얼굴을 스쳤다.후산 중앙에는 높이 오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산이 서 있었는데 그 산은 무려 구백구십구 개의 쇠사슬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이 쇠사슬은 그저 평범한 사슬이 아니었다. 절반은 땅속의 지맥과 연결되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하늘 높이 떠올라 천지의 영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이런 수준의 봉인이라면 설령 윤구주 자신이 여기에 갇혀 있다고 해도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처럼 견고한 고진마저 지금은 마인의 사기로 조금씩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본래는 영기가 흘러넘치는 명산이었으나 지금은 온 서요산이 마인의 기운에 물들어 음침하고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이 강렬한 악기운을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모두 얼굴을 찌푸렸다.솟구치는 사기를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찌푸렸다.최근 몇 대에 걸쳐 입종한 서요산의 제자들은 이런 마인의 사기와 요마의 위협 속에서 수련해야 했다.천지의 영기조차 마인의 기운에 오염되어 수련에 큰 지장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남은 현
이 말을 듣자 모든 이들은 천 년 전 마지막으로 나타난 그 성인이 바로 서요산 검종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짐은 서요산 검종의 선대 종주께서 우화등선하셨다고만 들었는데 그저 떠도는 신화 속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더니 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신 것이었군.” 임정설이 깊은 감탄과 함께 말했다.구백 계단 윤구주는 이미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하지만 그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구백삼십 계단 사십 계단을 오르면서 윤구주의 발걸음은 오히려 더욱 가벼워졌고 그가 세우는 기록은 사람들의 상식을 계속해서 뒤흔들었다.구백팔십 계단을 지나 정상까지 겨우 십여 계단만 남은 그 순간 윤구주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구백구십구 계단에 이르러 결국 완전히 멈추었다.드디어 한계에 도달한 것인가?모두가 숨을 죽이고 윤구주를 지켜봤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분명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험일 터였다.윤구주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십여 분을 견뎌냈다. 사람들은 그가 언제 다시 계단을 오를지 초조하게 기다렸다.마침내 윤구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습니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시험을 포기하지요.”말을 마치고 계단에서 내려서는 순간 청석 계단 아래에서 강력한 영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고 곧바로 서요산을 감싸던 어둠의 기운을 깨끗이 몰아냈다.오랫동안 음울했던 서요산 상공은 순식간에 환해졌고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맑은 하늘이 펼쳐졌다.서요산의 모든 이들은 충격에 빠져 넋을 잃었다.그제야 그들은 윤구주가 왜 그토록 여유롭게 올라올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서요산의 청석 계단이 가진 진법의 힘을 계속해서 억누르고 있었다.“참으로 대단하신 신위군요! 우리 서요산의 청석 진법마저 제압하셨다니! 마지막 한 걸음을 분명 넘으실 수 있었을 텐데 혹시 강제로 넘었다가 진법이 견디지 못해 영기가 새 나가고 진법이 무너져 진요탑까지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신 건 아닌가요?” 장인 대진인이
도법의 깊이는 워낙 심오해서 임정설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쉽게 말씀드리자면 구주는 천지의 운기를 완전히 장악한 데다가 하늘이 직접 영광을 내리신 거죠.” 장인 대진인이 말했다.임정설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이해한 듯 말했다.“대진인의 말은 윤구주가 바로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라는 뜻인가?”“맞습니다. 우리 화진 사람들은 운명의 갈림길에 서면 본심에 따라 도법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사는 다하고 하늘의 뜻을 따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윤구주는 분명 큰 복을 타고났지만 그 엄청난 복을 감당할 힘도 필요합니다.”대진인이 설명했다.말이 끝날 무렵 윤구주는 이미 육백삼십 계단을 거뜬히 올라와 있었다.한 걸음도 멈추지 않고 더욱 확고한 걸음으로 계속 전진했다.그의 발걸음마다 천지의 기운이 응축되었다.어느 순간 서요산의 계단조차 윤구주의 기세를 가두지 못했다. 그는 마치 천지를 밟으며 오르는 듯했다.곧이어 그는 칠백 계단마저 돌파했다.칠백 계단이란 천 년 전 서요산의 전성기에도 극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경지였다. 지금 만약 윤구주가 구주왕이 아니라 일반 수련자였다면 이 기록만으로 서요산 전체가 들썩였을 것이다. 만일 윤구주가 서요산에 입문을 원했다면 서요산은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 그를 키웠을 것이며 서요산 검종의 다음 종주 자리는 당연히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그러나 이미 칠백 계단에 이르렀음에도 윤구주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칠백오십 계단 팔백 계단 팔백오십 계단!그는 끊임없이 정상의 기록을 깨며 전설을 써 내려갔다.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윤구주 앞에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 같았다. 이쯤 되자 장인 대진인조차 감히 그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었다.왜냐하면 자신도 과거에 겨우 칠백 계단에 그쳤으니 팔백 계단을 오른 사람을 감히 평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윤구주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 마치 천지를 흔들어 이 강산을 뒤엎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그리고 마침내 구백 계단에 이르렀다.“구백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