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지극히 순수한 공법으로 제가 수련한 얼음의 술법을 완전히 억누르는군요. 천지 음양, 오행 팔괘. 그쪽의 공법이 천지 음양에 속하고 제 오행보다 우위에 있으니 제가 수련한 이 술법은 완전히 억눌려 더는 상대가 되지 못하겠군요.”북경왕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이번에는 누가 승리할지 알 수 없지만 만약 지난번 싸움에서 윤구주가 처음부터 구양진용결을 사용했다면 북경왕은 단 한 판도 버티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극 신급 절정에 도달한 그는 내공을 믿고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마리의 용도 깨뜨리지 못했다.“북경왕, 그쪽은 싸우기도 전에 이미 진 거나 마찬가지예요. 죽음을 자초한 셈입니다. 절대로 제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니 지금 후회하면 살길을 남겨줄 거에요.”윤구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말을 마친 그는 다시 천옥 진법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저와 대결하면서도 다른 데 신경을 쓰는 겁니까? 윤구주, 그쪽은 완전히 저를 무시하는군요. 다시 생각해 보니 구주왕과 제 옛정도 거짓이었던 거 아닐까요? 이 위선적이고 간악한 악당의 목숨은 제가 가져갈 것입니다.”북경왕이 다시 돌진했다. 윤구주가 다른 데 신경을 쓴 틈을 노려 공격한 것이다.그는 여전히 윤구주에게 완전히 억눌리는 얼음의 술법을 사용했기에 연이은 공격으로도 윤구주를 보호하는 아홉 마리의 용을 깨뜨리지 못했다.“북경왕! 문아름은 저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어요. 그쪽의 술법이 저에게 억눌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쪽을 이곳으로 보냈죠. 그쪽 내공이 저보다 강하더라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거란 말입니다. 말해보세요. 문아름이 또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윤구주가 진지하게 물었다.빙신전과 북경왕보다 문아름이 윤구주에게 더 큰 위협이었다.그 여자에게 반드시 다른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그렇게 알고 싶나요? 그럼 먼저 저를 이기세요. 승자만이 조건을 내세울 자격이 있습니다.”“금술, 빙역만리.”금술로 인해 대지가 얼어버렸고 주변의 산마저 꽁꽁 얼어붙었다.동시에 천지에 이
북경왕의 영혼을 본 윤구주의 마음이 심하게 흔들렸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금술을 사용했지만 자신의 두 손으로 북경왕의 목숨을 빼앗기는 힘들었다.하지만 저 모양이 된 북경왕에게 어쩌면 윤구주의 손에 죽는 것이 제일 좋은 결과일지도 모른다.“문아름은 그녀의 계획에 참여한 사람들을 죽음보다 못한 경지로 몰아넣죠. 자신의 편이라도 예외가 아닙니다.”“북경왕! 저는 그쪽이 정확히 무슨 짓을 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쪽의 양혼을 보았을 때 저는 이미 그쪽을 용서했어요. 천주 금술, 신마소멸.”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세상을 삼켜버릴 듯한 기세로 반경 수백 리의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불길이 사라지자 조용히 땅에 누워 있는 북경왕의 양혼이 보였다. 그의 영혼은 이미 투명해져 있었고 혼이 흩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드디어 해방되었네요. 구주 씨, 고맙습니다.”북경왕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음속에 드리워진 어둠이 드디어 사라졌고 인제야 그는 모든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윤구주는 조용히 북경왕의 곁으로 다가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친구의 마지막을 지켜주었다.“구주 씨 손에 죽을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북경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도 북경왕과 싸울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윤구주가 대답했다.“구주 씨에게 할 말이 있어요. 곤륜이 화진의 통일을 방해하고 화진의 부흥을 막는 것은 그들이 화진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화진을 내버려 뒀다가 언젠가 봉신 전쟁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까 봐 두려웠겠죠. 만 년 전, 우리 화진의 인황은 구주와 오방을 다스렸고 하늘과 맞먹는 존재였죠. 인황이 살아있을 때 수련자들은 쥐 죽은 듯 조용하게 살았죠. 인황이 죽자 신과 귀가 함께 세상에 나왔고 온갖 요괴와 마귀들이 스스로 신이라 자칭하기 시작했어요.“저도 제 입장이 있으니 함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어요. 문씨 가문도 권력만을 위해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구주 씨는 단지 제가 구주 씨 편이라는 것을 알면 됩니다. 현재 청룡이
윤구주의 도심이 영향을 받는다면 그는 진정한 인간계의 사신이 될 것이다.슉!함께 천옥에 도착한 진동왕과 현모는 윤구주의 모습을 보고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다.그들은 이런 모습인 윤구주를 본 적이 없었다. 지금의 윤구주는 온몸에서 음침한 흑기를 발산하며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마왕처럼 무서웠다.윤구주는 살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단지 죽어 마땅할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을 뿐이다. 윤구주는 살생의 도리를 오래전부터 이미 깨우치고 있었다.하지만 그 도리가 흐트러진다면 윤구주는 죽여야 할 사람과 죽이지 말아야 할 사람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그가 선과 악을 가리지 못하고 살인을 밥 먹는 것처럼 평범하게 여기는 사람이 된다면 화진에 큰 재앙이 될 것이다.“윤구주, 정신 차려! 망할, 문씨 가문이 어떻게 이런 대규모 살상 무기를 손에 넣은 거야.”진동왕이 급하게 욕을 내뱉었다.평소 침착한 현모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윤구주의 몸에서 퍼져나오는 흑기는 점점 더 짙어졌고 이제는 현모조차 윤구주의 인간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죽음의 신이 곧 이 세상에 나타날 것이다. 문아름 정말 대단한 여자야!”빙신전의 대 제사장이 블랙홀 속에서 오만하게 웃었다.구주왕이 이렇게 될 줄이야!화진의 수호자가 화진을 공격하게 된다는 생각에 대 제사장은 더욱 흥분했다.이렇게 되어야만 곤륜의 역할이 빛을 발할 수 있다.화진에 재앙이 닥쳤을 때 곤륜의 신이 나타나 위기를 극복하고 화진을 구했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 이야기인가!“문벌, 세가 그리고 종문. 화진이 혼란스러울수록 그들을 더 쉽게 통제할 수 있을 거야. 문씨 가문을 화진의 주인으로 삼는다면 화진은 영원히 일어설 수 없을 것이다.”이것이 바로 곤륜이 화진을 억누르는 계획이었다.‘이대로는 안 돼. 왕의 몸에는 임씨 가문의 기운이 있어. 아마도 옛 국주가 왕에게 전수한 것일 거다.’방법을 생각해 낸 현모는 즉시 임씨 가문의 절학을 발동했다. 윤구주의 몸에서 임씨 가문의 금빛 기운이 빛났지만 곧 윤구주의
문 뒤에 서 있는 노인은 그저 미소를 지은 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자신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사부님?”윤구주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그는 다름 아닌 윤구주의 사부님 화신 화공두목이었다.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한쪽으로 돌려 그의 몸에 가려진 사람을 드러냈다. 그는 칼을 메고 차가운 눈빛으로 서 있었다. 그저 가만히 서 있음에도 마치 칼날이 목을 겨누고 있는 듯한 압박감을 주었다.“김도현 님.”블랙홀 속의 빙신전 대 제사장은 김도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많이 놀란 듯했다.“검도 도주, 김도현.”진동왕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곧 그에게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뒤에 있던 현모도 그에게 인사를 하며 예를 표했다.두 쪽은 서로 인사를 마친 뒤 아무런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두 명의 절세 강자는 윤구주를 깊이 바라보고 유유히 사라졌다.불꽃으로 휩싸인 문이 천천히 사라지더니 문안에서 소채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김 스승님, 화공 할아버지, 아까 그 사람 구주 맞죠?”이때 문이 완전히 사라졌기에 두 사람이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했다. 두 명의 절세 강자가 지켜주고 있으니 소채은은 안전했다.화공두목은 아마도 문씨 가문이 벌인 일을 알고 윤구주가 위험에 처할 것을 예감했기 때문에 이곳에 찾아왔을 것이다.문이 열리고 윤구주와 눈을 마주친 순간 그는 이 제자를 얕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현모, 임 삼촌, 10만 대군을 이끌고 천옥 북쪽 현관으로 가세요. 제가 직접 밖으로 보내줄게요.”윤구주가 명령을 내렸다.두 사람은 잠시 망설였다. 윤구주는 그들이 천옥을 떠나도록 호위해 주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떠나면 윤구주는 어떻게 될까?“지금 제 명령을 의심하나요?”“아닙니다.”두 사람은 윤구주의 명령대로 즉시 대군을 소집했다.귀신족은 이미 전멸했기에 이제 남은 것은 10만 대군을 천옥에서 무사히 철수시키는 것이었다.대군 소집을 마치자 하늘이 어두워지더
“천옥이 무너져 영기가 새어나가면 화진의 절반 이상이 불바다에 휩싸일 것이기 때문에 윤구주는 절대로 이곳을 떠나지 않을 거야.”빙신전 대 제사장은 윤구주가 반드시 모든 힘을 다해 영기를 지키려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적어도 영기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말이다.하지만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자연의 힘을 막을 수 있겠는가?윤구주가 천인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윤구주는 모든 힘을 잃게 될 가능성이 컸다. 잘못하면 목숨마저 잃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문아름의 계산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윤구주는 처음부터 천옥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십만 대군은 윤구주의 명령대로 천옥 북쪽 현관으로 달려갔다.붕괴한 천옥에 숨겨져 있던 현관 출구가 나타났다.현모와 진동왕이 힘을 합쳐 무너진 통로를 뚫었고 십만 대군은 질서정연하게 현구를 빠져나갔다.십만 대군을 전부 내보내고 나서 진동왕과 현모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윤구주가 여전히 전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본 진동왕이 급히 물었다.“구주야, 뭘 기다리고 있는 거야? 얼른 이곳을 떠나야지.”“두 사람 먼저 가세요. 곧 따라갈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윤구주가 대답했다.진동왕은 눈을 가늘게 뜬 채 현모를 향해 소리쳤다.“너 먼저 나가.”“왕이 떠나지 않았는데 제가 어떻게 먼저 물러날 수 있겠습니까? 진동왕은 왕실 왕족이지 우리 편이 아닙니다. 먼저 떠나도 그쪽을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현모가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이런 젠장!진동왕은 현모의 말에 화가 나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내가 나라를 지킬 때 너희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어. 사람을 함부로 얕보지 마. 윤구주, 현모와 함께 먼저 철수해라. 내가 전법을 안정시킬 수 있는지 시도해 보겠다. 수옥인도 곤륜의 수련자다. 내가 그 사람과 힘을 합치면 이 재앙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몰라.”진동왕이 큰소리로 외쳤다.윤구주는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진동왕도 재앙이 닥칠 것을
곤륜은 하나의 통일된 세계가 아니라 여러 세력으로 나누어진 아주 이상한 세계였다. 봉신 전쟁 이후 신이 된 자들이 함께 만든 세계로 그들은 이를 신계라 부른다.곤륜에는 수많은 입구가 있으며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었다. 그 목적은 전 세계를 위협하는 것이다. 신의 뜻을 어기는 자가 나타나면 곤륜은 가장 빠른 속도로 그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곤륜 내부의 세력은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아직 통일되지 않았다.“삼도, 육전, 십이각. 동봉각은 십이각 중 하나이고 말단에 속한다.”사라지는 금빛 무지개를 바라보며 윤구주가 진지하게 말했다.수옥인 안종환의 스승은 겁이 많아 싸움에 섣불리 나서려 하지 않았지만 이것도 한가지 생존 방식이었다.봉신 이후, 곤륜의 세력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았고 잔혹한 내부 투쟁을 통해 소모되어 현재의 구조가 된 것이다.약한 세력이 곤륜에서 생존하려면 자신만의 생존의 길을 찾아야 했다.“진북왕이 죽었으니, 화진 북쪽 국경은 반드시 혼란에 빠질 거야. 외적이 침입하면 가장 먼저 공격받는 곳은 북주일거다.”동봉각 주인의 도움은 아주 유용했다.이때, 하늘이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세계가 빠르게 붕괴하였다.순간 폭주하는 영기가 구속을 벗어나 사방팔방으로 흘러나갔다. 영기가 외부로 흘러나가면 그 결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할 것이다.천옥의 폭주하는 영기는 마치 고대의 흉수와 같았다. 그 힘은 윤구주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섰다.천옥을 설계한 봉신 신들도 이 거대한 영기를 이곳에 봉인하기 위해 엄청난 힘을 들였는데 윤구주 혼자서 이 일을 완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화진 국경 밖, 눈으로 뒤덮인 깊은 산속.문아름은 천옥에서 전해오는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동봉각 주인이 곤륜의 전송진을 이용해 윤구주의 십만 대군과 진북왕, 현모를 북주로 전송했다는구나. 역시 네 예상대로 윤구주는 천옥을 떠나지 않았어.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약점이 있는 법이지.”문창정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문아름은 입술을
천옥.하늘이 찢기고 땅이 꺼지는 것이 마치 세계의 종말이 다가온 것 같았다.윤구주는 두 눈을 감은 채 폭주하는 영기 속에서 끝없는 증오를 느꼈다.이 계략은 문아름이 세운 것이었고 윤구주는 그녀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넌 나를 미워하고 있는 거니? 미워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었어? 어쩌면 네게 무슨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변명이 될 수는 없어. 만약 상황이 뒤바뀌었다면 당시 내가 너에 대한 감정으로는 절대 너를 죽이려 하지 않았을 거야.”“팔기지, 팔기귀일.”윤구주의 몸 안에서 강한 기운이 솟구치며 팔기지가 하나로 융합되어 천인의 기세를 드러냈다. 윤구주의 기운이 밖으로 퍼져나가 거인이 되어 그의 몸으로 천지를 떠받들었다.무너져 내리던 천옥은 윤구주의 힘으로 잠시 안정되었지만 이는 단지 시간을 벌 수단이었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윤구주는 천옥 전법을 다시 만들어낼 생각이었다.진기가 다시 나타나고 윤구주가 이전 전법의 단계를 따라 천옥 전법을 만들어갈 때 낯선 기운이 튀어나와 그를 방해했다.이것은 천옥 전법을 세운 곤륜 수련자의 한 조각 신념이었다.“오? 구주왕? 대단하군. 혼자서 천옥의 천지를 떠받치다니. 천옥 전법을 재구성하려는 건가? 하지만 소용없어. 이 전법은 후세에 창조된 것으로 주로 천옥의 영기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해. 하지만 지금은 천옥 외부의 기반이 무너졌기에 네가 전법을 재구성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지.”형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윤구주의 행동이 실로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용기를 존중해줬다.“그쪽은 누구죠? 보아하니 음신도 아니고 분신도 아닌데.”윤구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처음으로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없는 적을 만났기에 자연스럽게 경계심이 생겼다.“하하! 내가 누구냐고? 지금의 너는 아직 알 자격이 없어. 하지만 힌트를 주겠다. 만약 네가 종문 동맹의 맹주를 쓰러뜨릴 수 있다면 내가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제는 네가 여기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거지. 그만 포기해. 지금 이곳
외부의 위협은 잠시나마 억제되었지만 천옥 내부에서 폭주하던 영기가 다시 폭발했다. 고대의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폭발하면서 이제는 윤구주가 막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구기등선의 힘으로도 부족했다.“구양진용결!”“구음만상결!”아홉 마리의 용이 나타나 천지를 떠받쳤고 아홉 마리의 상이 대지를 지켰다.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더는 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에너지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미친 듯이 외부로 빠져나갔다.“더는 방법이 없나봐? 너는 정말 강하지만 인간은 인간이야. 아무리 강해도 신이 될 수는 없어. 참 아쉽구나. 이제는 떠나려 해도 늦었어. 나도 너 구주왕의 마지막 길을 보내주고 싶지만 이 신념이 더는 버틸 수가 없구나. 너도 죽을 각오를 하고 남은 거겠지.”거세게 밀려오는 영기가 이 신비한 강자의 신념을 산산조각냈다. 이제 천옥에는 윤구주만 남았다.그 신비한 강자가 말했듯이 후회하기엔 이미 늦었다.“용상 합일.” 윤구주는 강한 압력을 견디며 구룡과 구상을 강제로 자신의 몸에 융합시켰다.음양이 합쳐지며 윤구주의 몸에서 하얀빛이 강하게 발산되었고 그의 두 눈동자는 먹물처럼 까맣게 변했다.하지만 이렇게 해도 윤구주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시간을 끄는 것 뿐이었다.폭주하는 영기를 억제할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미친 듯이 윤구주의 천술을 들이받았고 점점 더 강해졌다.윤구주는 구오 지존의 내공으로 극 신급 절정이나 사용할 수 있는 천술을 쓰기 시작했다. 경계를 넘어 강제로 사용하는 것 자체가 윤구주에게 엄청난 압력을 주었다.매번 반격이 들어올 때마다 윤구주는 조금씩 상처를 입었고 엄청난 압력 속에서 더는 버틸 수 없었다.“또 다른 방법이 없을까? 이젠 한계야.”윤구주는 입을 벌려 새하얀 피를 토해냈다.폭주하는 에너지가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순간 윤구주는 이를 악물고 결심했다.“안 되겠다. 더 높은 단계의 술법을 사용해야겠어. 천술을 초월한 기술, 성술. 경지는 충분하지만 내공이 부족했기에 일단 사용하면 내 정원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