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허, 제자 하나 잘 뒀군. 죽기라도 할까 봐 그렇게 서둘러 달려오다니.”맞은편, 검은 망토를 두른 사내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그 말에 류경표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옆에 선 윤구주를 힐끔 바라봤는데 그 시선엔 조금의 꾸짖음이 담겨 있었다.윤구주는 진심으로 걱정했다. 자신이 늦게 왔더라면 이 싸움은 시작도 못 하고 끝났을 것이고 스승님은 죽었을 것이다.“스승님, 이건 개인의 생사를 건 결투가 아닙니다. 구주의 수많은 백성의 운명이 걸린 대전입니다. 만약 진짜 결투를 원하신다면 김도현이나 서해검성쯤은 되어야 스승님의 맞수가 될 겁니다.”“훗날 그 둘과 생사를 겨루실 일이 있다면 그때는 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겠습니다.”윤구주는 조용히 말했다. 그 말엔 대의를 우선하는 결의가 서려 있었다.그제야 류경표의 표정이 가라앉았다.“빌어먹을, 검심이 흔들리다니. 내 목숨이 걸린 순간, 이토록 마음이 어지러울 줄이야...”그는 깊은 수치와 함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스승님이 하신 말씀, 잊지 않았습니다. 하찮은 미물일지라도 목숨은 귀한 법. 다만 그 목숨이 희생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가 중요하죠. 지금은 제 눈앞에 스승님이 계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희생을 입에 올리는 건 옳지 않아요.”윤구주의 말은 담담했지만 단호했다.류경표는 다시금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눈길엔 자부심이 비쳤다. 이토록 이치를 꿰뚫는 제자라니, 스승으로서 더 바랄 게 있을까.“좋다. 네가 왔으니, 스승과 제자가 함께 저 무도 도주를 베어내자! 이건 단순한 승부가 아니여. 천하의 생사, 그 운명을 건 싸움이지!”그 말을 들은 무도 도주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지난 천상역에서 마주했을 때부터 윤구주는 이미 그에게 위협이었다.극 진경에 이른 자신조차 껄끄럽게 느꼈던 존재가 이제 소성의 경지에 도달했다. 거기다 검성 류경표까지 합세한 지금 자신은 이전의 전투로 전력이 80% 남짓, 이 둘을 상대로 승산을 장담할 수 없었다.그러나 곧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현모는 순간 어리둥절했다.진짜로 항복하겠다는 건가? 무도 놈들이?“너희 진심으로 항복할 셈이냐? 어설픈 계략은 통하지 않는다.”현모는 눈빛을 날카롭게 세우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계략은 무슨 얼어 죽을! 너희 몇 놈으로 우리 대군을 이기겠다고? 지금 그 빌어먹을 구주왕이 돌아오고 있다고!”무도 지휘관들은 당장이라도 무릎 꿇고 싶을 만큼 다급하고 초조했다.현모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구주왕이 돌아온다면서 왜 항복을 얘기하는 거지?답은 하나였다. 아직 전세는 갈리지 않았지만 문아름의 계책이 먹혔고 무도의 핵심 강자들 중 일부는 이미 그녀의 손에 넘어갔다.무도의 진짜 전력은 십대 강자였다. 그런데 지금 이곳엔 그들 중 누구도 없고 무도가 먼저 항복을 요청해온다? 십대 강자 쪽에서 무슨 일이 터졌다는 뜻이다.“좋아. 항복은 받아들이지. 하지만 먼저 방어를 해제하고 성수들이 결계를 펼 수 있도록 협조해.”현모의 단호한 말에 무도 측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섯 강자의 재촉 끝에 결국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무도가 항복에 동의한 것을 확인한 현모는 즉시 화진군에 전음을 보냈다.“문아름의 이름으로 항복을 요청한다.”소식을 들은 청룡, 주작, 백호 세 전신은 잠시 말이 없었다.“걱정 마. 문아름이라면 함부로 장난칠 용기는 없을 거야. 걔 몸은 구주가 직접 녹여 만든 육신이야. 구주라면 당연히 그 몸에 제어장치를 심어뒀을 테지.”서해검성이 굳은 어조로 말했다.세 전신은 짧은 논의 끝에 무도의 항복을 수락했다.곧 무도 수련자들은 진법을 해제하고 내공을 거두었다. 하늘에 떠 있던 성수들이 일제히 움직여 결계를 펼치며 그들을 하나의 구역 안에 봉인했다.혹시라도 변수가 생긴다면 화진은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다. 어떤 상황이 와도 손해 볼 일은 없었다.한편 항복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다른 전선에서 망설이던 무도 군세도 주력 부대가 무장을 내려놨다는 소식에 더는 버틸 명분이 사라졌다.결국 각 전선에서 줄줄이 항복을 선언했다.서쪽 전선, 진북왕 이원이
무도의 다섯 강자가 협박과 회유를 동원해 이쪽 무도 지휘관들에게 항복을 강요했다.하지만 정말 항복했다가 나중에 무도 도주가 살아 돌아와 책임을 묻는다면 그땐 어쩔 셈인가?결국 그들은 거짓을 만들어냈다.무도 도주는 이미 윤구주에게 살해당했다고. 그래서 그들은 무도의 기틀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문아름에게 도움을 청했다고.“지금 항복은 무도를 살리기 위한 결정이다! 살아야 훗날 복수도 가능해!”“윤구주는 곧 화진으로 돌아올 거야. 머지않아 직접 이 전장에 나타날 거라고!”“우리 도주조차 그자를 이기지 못했어. 목숨을 걸고 싸운다 해도 윤구주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거야!”그 말 한마디에, 무도 지휘관들은 결국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은 명분을 갖춘 형식적인 항복으로 병력을 보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그게 무슨 놈의 항복이냐! 이건 사기다! 도주님이 살아 계시다면 너희는 무도의 반역자야! 문아름의 간계에 속지 마라!”문창정은 거의 이성을 잃고 날뛰었다. 정말 윤구주가 그렇게 강하다면 지금 이 전장을 지키는 인물은 기린수여야 했다.무도를 항복시킨 것도 윤구주가 아닌 기린수를 곤륜 구역에 묶어두고 화진의 전력을 보존하려는 계략일지도 모른다!하지만 무도의 지휘관들은 냉정하게 그를 일축했다.“닥쳐라! 여긴 네가 입 뗄 자리가 아니다. 다른 전선의 무도 군세는 이미 항복했어. 남은 건 우리뿐이야.”“윤구주는 이미 인황으로 각성했어. 이 병력으론 상대도 안 돼. 설령 이게 계략이라 해도 나중에 도주께 무도의 기틀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말하면 그분도 우릴 용서하실 거야!”결국 무도의 기틀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명분이 지휘관들로 하여금 항복을 받아들이게 만들었다.한편, 전투를 준비 중이던 화진 진영은 전혀 예상치 못한 소식을 들었다. 싸움은커녕 무도 측이 먼저 항복을 요구해온 것이다.“뭐라고? 항복? 젠장, 이건 계략이 분명하다! 일단 저놈들 중 소성 몇 놈은 베고 나서 항복을 논해!”서해검성이 번개처럼 검을 움켜쥐었다.“잠깐만요
“결정 빨리 내려. 일단 결전이 시작되면 그땐 기회조차 없어.”다섯 사람이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하자 문아름은 싸늘하게 다그치며 최후통첩을 날렸다.“셋, 둘, 하나!”‘하나’가 떨어지자 다섯은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그들은 이미 문아름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그녀는 말한 대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기한이 지나면 끝이고 그때 가서 무릎 꿇어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걸 안 그들은 동시에 신혼을 꺼내 문아름과 혼술 계약을 맺었다.계약이 완성되자 문아름의 입가에 싸늘한 웃음이 떠올랐다.새 육신을 미끼로 귀순이라니? 세상에 그렇게 쉬운 거래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윤구주는 분명 새로운 육신을 빚어낼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도 혹독했다.그녀를 위해 육신을 새겨준 대가로 윤구주는 상위 경지로의 돌파를 스스로 봉인해야 했다. 그 일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윤구주는 결코 소성일환 따위에 머물러 있을 인물이 아니었다.혼술이 완성되는 순간, 다섯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이미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문아름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지금 당장 무도에 명을 내려. 화진과 접경에서 전쟁을 준비 중이거나 이미 교전 중인 무도 수련자들 전원에게 항복 명령을 내려. 그리고 그건 내 명령이라고 밝혀. 감히 불복하는 자가 있다면 너희 다섯부터 내 손으로 죽이겠다.”“뭐라고?”윤구주와 무도의 도주는 아직 맞붙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이 타이밍에 항복 명령을 내리라니, 완전히 무리한 요구였다.문아름은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항복이냐, 죽음이냐. 선택은 너희가 해.”결국 다섯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곤륜 구역 밖 무도 수뇌부에 비밀 전음을 보냈다. 즉시 화진에 항복하라고.“이게 본심이었군. 다섯을 굴복시킨 것도 결국 화진을 지키기 위해서였어.”김도현은 그제야 문아름의 의도를 꿰뚫었다.“이렇게만 되면 문아름은 오히려 화진의 공신이 되겠지. 여론을 살짝만 조작하면 적진 깊숙이 들어가 거짓 항복으로 화진을 구한 영웅처럼 포장할 수도 있겠군
남은 다섯 명도 그 기세를 잠시 거둬들이고 눈치를 살폈다. 지금은 섣불리 움직일 때가 아니었다.곧 문아름이 진법 한가운데로 걸어들어왔다.윤구주를 배신하고 수많은 화진의 강자들을 살해한 자. 그런 그녀가 다시 화진으로 돌아와 여전히 높은 자리에 앉아 깊은 신임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본 순간 다섯의 표정은 마치 똥이라도 씹은 듯 일그러졌다.“문아름, 갈수록 확신이 들어. 이건 너희 문씨 가문의 계책이지? 두 편에 동시에 돈을 걸고 누가 이기든 이익은 문씨 가문이 가져가는 거!”다섯 중 가장 강한 자가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내뱉었다.문창정은 무도에 충성했고 문아름은 다시 윤구주의 편에 들어왔다. 결국 누가 이겨도 문씨 가문은 손해 볼 일이 없는 셈이었다.“네가 뭐라 생각하든 상관없어. 다만 너희는 지금 두 편에 걸칠 자격조차 없어.”문아름의 목소리는 차갑고 담담했다.“윤구주는 이미 무도 도주와 승부를 벌이고 있어. 승부가 갈린 뒤에 네가 무슨 선택을 하든 아무 의미 없지.”“그리고 하나 더, 설령 너희 도주가 승리하고 윤구주가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해도 너희 다섯은 절대 살아남지 못할 거야.”“지금 너희 앞에 남은 길은 두 가지뿐이야. 여기서 신혼을 폭발시켜 모든 걸 끝내거나, 신혼을 바치고 나처럼 빚을 갚거나.”그녀의 말은 마치 병력을 모으는 장수의 선동 같았다. 사실 그것이 문아름의 의도였다.다섯은 문아름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문아름이 천상 영역에서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쳤다는 사실을. 그런데 지금 왜 그녀에게 또 다른 육신이 있는가?게다가 이번 육신은 기운이 전과 달랐는데 훨씬 단단한 도사의 근골을 타고 있었다.기린수는 문아름의 말 속에서 음모의 냄새를 맡았다.“영감, 문아름 지금 뭐 꾸미는 거지?”“하하하! 구주의 혼술에 완전히 묶인 몸이야. 윤구주가 죽으면 문아름도 같이 죽어. 뭘 할 수 있겠냐?”김도현은 태연히 웃었지만 기린수의 표정은 더 늘어졌다.혼술의 노예? 그건 백호가 흘린 소문에 불과했다. 하
천하제일검이 고작 기린수에게 얕보이다니.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김도현이 어찌 이를 참겠는가.“하하! 천하 제일검이라니, 늙은이가 허세는. 영감은 이제 천하 제이검이야!”기린수가 껄껄 웃으며 도발했다.“네 이놈!”김도현의 눈빛이 번개처럼 번뜩였다.“그날은 내가 심신이 흐트러져 서해에게 진 거다! 오늘 똑똑히 보여주마. 내가 천하제일검이라 불리는 건 허명이 아니다!”“천수!”천수성검이 하늘로 치솟았고 하늘의 깊은 곳에서 성수가 내려오며 협곡이 열렸다.그에게 천수성검은 곧 검역이었다.검역 안의 김도현은 마치 순간이동하듯 어디든 존재했고 단 한 사람의 힘으로 무도 아홉 강자를 동시에 상대했다.그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피가 비처럼 흩날렸고 아홉 명은 눈 깜짝할 새 갈가리 찢겨 나갔다.“좋은 기회네.”기린수가 음산한 웃음을 터뜨렸다.기린의 법신을 거두자 그의 몸은 그림자처럼 변하며 죽음의 낫이 되어 무도 강자들을 베어 나갔다.기린수는 순수한 전투광이었다. 싸움에는 집착했지만 무덕 따위는 알지 못했다. 그에게 중요한 건 단 하나,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상대를 죽이는 것뿐이었다.피에 젖은 어둠 속에서 중상을 입은 무도 강자 한 명이 기린수의 기습에 그대로 산산이 부서졌다. 살점이 흩날리고 그 신혼마저 기린수의 입속으로 삼켜졌다.남은 여덟 명의 얼굴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질렸다.‘어떻게 싸운단 말인가?’하나는 천하제일검이었고 하나는 무덕을 모르는 광수였다. 이대로라면 모두 죽게 될 것이다.“모두 죽을 각오로 맞서 싸우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한 줄기라도 길이 열린다!”남은 여덟 명이 동시에 신혼을 불태웠다. 육신이 신혼의 불길에 재물처럼 사라져갔고 그 순간부터는 설령 살아남아도 다시는 온전한 무를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목숨을 건 폭발적인 힘이 그들을 감쌌고 김도현 역시 최후의 검을 꺼냈다.“천수 성검!”천수성검과 김도현이 완전히 하나로 녹아들었다.그의 의식은 검혼을 타고 무형의 칼날이 되어, 세상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 무영검으